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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9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마태오 15,21-28
부스러기라도 감사할 때 빵도 받는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의 딸을 치유해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예상외로 가나안 여인에게 불친절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하십니다.
이에 가나안 여인은 자신의 믿음을 이렇게 보여줍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자존심도 없나?’란 생각이 드는 대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믿음이 있어야 바라는 대로 됩니다.
믿음도 없이 바라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것의 부스러기라도 바라는 겸손에서 나옵니다.
나를 믿음이 하느님을 믿지 않음이고 하느님을 믿음이 나를 믿지 않음입니다.
‘포크포크’엔 ‘모두가 거부한 아이 입양한 여성. 20년 뒤 놀라운 운명 마주해’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한 여성이 모두가 싫어하는 아이를 입양하게 됩니다.
잉게보르는 수년간 125명의 위탁 아동을 보살펴왔습니다.
조던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잉게보르는 조던을 입양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조던의 생모는 백인이 흑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며 자기 아들이 잉게보르에게
입양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흑인 남자아이를 입양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4년이 지나서야 잉게보르는 조던을 입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잉게보르와 조던은 서로를 아끼며 사랑하는 친 모자와 다를 바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뒤, 잉게보르는 어느 날부턴가 복부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통증은 더 심해졌고 의사는 너무 늦어서 신장을 이식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신장을 줄 사람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잉게보르가 모든 것을 놓고 주저앉으려는 순간 조던이 어머니 몰래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어머니에게 자신의 신장을 이식할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조던이 친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식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조던은 끝까지 주장하였고 의사들이 맞춰본 결과 놀랍게도 조던의 신장은 어머니 것과 정확히 일치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조던 것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이미 조던의 마음은 굳어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제게 모든 것을 주셨잖아요.
이제 제가 돌려드릴 때가 됐어요. 이 모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은 그 안에 나에게 꼭 필요한 더 큰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작은 생명을 무시하며 영원한 생명을 달라고 청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만약 자수성가한 부자가 걸어 다니다가 길에 떨어진 10원이 있으면 주울까요, 줍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제가 읽고 본 내용들을 종합하면 그들은 반드시 그 돈을 줍습니다.
돈은 하늘이 주시는 것인데, 그 작은 것을 대하는 자세가 큰 것을 대하는 자세가 되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은 하나 같이 적은 돈을 소중히 여기라고 합니다.
천 원짜리도 다리미로 다려서 빳빳한 장지갑에 넣고 다니라고 합니다.
돈도 하나의 인격체라 자기 새끼에게 잘못하는 사람에게 가려 하지 않습니다.
어느 분이 자신의 회사 앞에 있는 거지에게 조금 큰돈을 주었더니 그가 벌떡 일어나서 잔돈을 버리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래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은총도 마찬가집니다.
작은 은총을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큰 은총을 주실 리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받은 것에 항상 감사합시다.
그리고 혹시 작은 은총을 무시해버리지 않는지 살펴봅시다.
저도 더 많은 신자가 나왔으면 좋겠다고는 하지만, 아직 요양원에 계신 분들을 다 챙기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만간 우리 지역 요양원을 조사하여 신자들을 찾아내어 하루 따로 시간을 내서 봉성체를 하려고 합니다.
이미 집에서 봉성체 하시는 분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가장 작고 약하고 힘없고 소외된 분들 먼저 챙기지 않으면서 더 많은 신자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은총을 청하면서 그것과 관련된 작은 것들은 무시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겸손하게 부스러기부터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스러기를 잘 챙기는 우리를 보며 주님께서 큰 빵 덩어리 하나를 주지 않으실 리 없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할 때 큰 것도 받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9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마태오 15,21-28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찬란한 생애!
에디트 슈타인 혹은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로 불리는 수녀님의(1891~1942) 기념일입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그녀의 생애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철학자, 여성운동가, 가르멜회 수녀, 아우슈비츠 사랑의 순교자, 최초의 유대인 출신 성녀, 유럽대륙의 수호성녀. 그녀의 생애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기에 흥미진진하면서도 감동적인 한편의 영화 같습니다.
그녀가 연출한 장엄한 삶의 연극은 총4막으로 구성됩니다.
제1막은 에디트 슈타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의 30여년에 걸친 세월입니다.
그녀의 젊은 시절은 지칠 줄 모르는 진리에 대한 추구가 큰 결실을 맺던 날들이었습니다.
특히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당당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철학에 깊이 몰입했으며, 인간됨의 본질을 파악하고 정립하는데 매진했습니다.
진리에 대한 열정과 헌신의 결과 그녀는 당대 뛰어난 여성 철학자이자 지식인으로서 우뚝 서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무신론에 빠지고 맙니다.
제2막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됩니다.
가까운 친구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자서전을 접하고 나서부터입니다.
성녀의 넘치는 매력과 영성에 흠뻑 빠진 에디트 슈타인은 ‘이것이야 말로 진리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오랜 세월 찾아왔던 참 진리가 가톨릭교회 안에 있음을 발견한 그녀는 곧바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10여 년의 세월 동안 그녀는 가톨릭 신자이자 교사로서 참 진리이신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제3막은 또 다른 10여 년간에 걸친 가르멜 수녀회 수도자로서의 삶입니다.
탁월한 지적능력과 열정을 눈여겨본 주변 사람들은 에디트 슈타인이 학자로서 자신의 영역을 더욱 확장시켜나가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오랜 세월 쌓아올린 빛나는 업적을 홀연히 내려두고 쾰른의 한 가르멜회에 입회하였습니다.
늦깎이 지원자로서 그녀의 초창기 수도생활은 크나큰 자기낮춤과 겸손의 덕을 요구했습니다.
스무 살이나 차이 나는 동기 수녀들과의 괴리감을 극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 했습니다.
동시에 오랜 세월 축척해온 학문적 성취도 모두 내려놓아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에디트 슈타인 인생의 절정인 제4막은 나치에 의해 체포된 이후부터 아우슈비츠 수용소
독가스 실에서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일주일간의 삶입니다.
그녀는 유대인으로서의 신분을 감추고 은신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지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친언니와 함께 나치 비밀경찰에 체포된 그녀는 죽음의 수용소로 옮겨져 소리 소문 없이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와 영성이 긴 세월을 건너와서도 찬란히 빛나는 이유는 그녀가 평생토록 지니고 살았던 진리를 향한 강렬한 역동성이요, 적극성과 개방성 때문입니다.
그녀는 한 자리에 멈추어 서있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한 평생은 끊임없이 삶의 지평을 넓혀가고 성숙시키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보다 가치 있는 삶, 보다 해방되고 성숙한 삶, 보다 큰 진리와 자유를 찾아 떠난 부단한 여행길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유대교 신자에서 무신론자로, 무신론자에서 그리스도 신자로, 그리스도 신자에서 가르멜 수도자로, 가르멜 수도자에서 사랑의 순교자로 놀라운 성장과 변화를 거듭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에디트 슈타인은 죽음의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동료 인간 존재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나치라는 거대한 악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으며, 철학자이자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양심과
가치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모델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열매 맺는 것임을 저항과 죽음을 통해 선포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모든 고통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주변이 어두워질수록 우리는 위로부터의 빛에 우리 마음을 열어야만 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2023. 8. 9. 수)
(마태 15,21-28)
<강아지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1-28).”
이 이야기는, ‘우상숭배자’들은 구원받지 못하지만, 회개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티로와 시돈 지방, 가나안 부인, 강아지들’이라는 말은, 여자가 이방인이며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분명히 거절입니다.
그러나 그냥 거절은 아니고, 은총을 청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상태를 반성해 보라는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여자가 생각하는 하느님은 여러 우상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평소에 자기가 섬기는 우상에게
소원을 비는 것처럼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여자의 간청에 대답하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여자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께 간청하려면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누군가가 가르쳐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자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또 주님으로 믿은 것은 아닙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라는 말씀도 거절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도 그냥 거절은 아니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느님의 양이 되라는 뜻입니다.
<유대인으로 귀화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에 연결됩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5-6).”
<이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선포하라는 뜻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라는 말씀도 거절인데, 이 말씀도 그냥 거절은 아니고, “자녀들의 빵을 먹고 싶다면 먼저 자녀가 되어라.”, 즉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싶다면 먼저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따라서 이 이야기에서는 여자가 ‘이방인’이라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자’ 라는 점이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에게 은총을 주신 이야기가 아니라, ‘우상숭배자’를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주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 거절하시는데도 여자가 끈질기게 간청한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간절함’ 때문입니다.
<그 간절함이 결국에는 믿음으로 이어졌지만......>
여자는 처음에는 예수님의 침묵의 뜻도, 또 거절하시는 말씀의 뜻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강아지들이라는 말을 듣고 비로소 ‘말씀의 뜻’을 알아들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라는 말은, 자신이 강아지라는 것을, 즉 ‘어리석은 우상숭배자’ 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우상숭배를 버리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는 말은, “제가 비록 우상을 숭배하면서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좀 주십시오.” 라는 간청입니다.
<사실 ‘간절한’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다 그 ‘간절함’만으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간절함’ 때문에 더 심하게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여자가 예수님에게로 온 것 자체를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부르심과 여자의 응답이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라는 말씀은, 여자의 변화와 결심을 칭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올 때에는 믿음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여자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칭찬하신 말씀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버리고 이제 새롭게 믿음을 갖게 된 것을 칭찬하신 말씀입니다.>
복음서의 기록만 보면, 여자가 금방 깨닫고, 금방 변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아마도 예수님과 여자 사이에 더 많은 대화가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좀 더 있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간절함만으로 금방 우상숭배를 버린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는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즉 신앙인이면서도 ‘미신’을 믿고 ‘점’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녀’인 사람이 스스로 ‘개’가 되는 일이고, 십계명 제1계명을 위반하는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