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계장터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靑龍) 흑룡(黑龍)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 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天痴)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있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시집 『농무』, 1973)
[어휘풀이]
-박가분 : 1920~30년대 박승직이 만들어 판매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산품 화장품. 박승직의 이름을 따서 박가분(朴哥粉)이라고 하였다.
[작품해설]
이 시는 ‘목계장터’를 중심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는 민중들의 삶과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다. ‘목계’는 1910년대까지 중부 지방의 각종 산물의 집산지로, 남한강안(南漢江岸)의 수많은 나루터 중 가장 번창하기도 했지만, 1921년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의 일환으로 충북선이 부설되자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 시는 전통적인 민요의 리듬을 연상시키는 4음보를 주된 율격으로 하면서, ‘하고’ ⸱ ‘하네’ ⸱ ‘라네’ 등의 어미를 반복적으로 구사하여 생동감 있는 시상을 전개한다. 전체적으로 방랑과 정착의 이미지가 교체되어 나타나고 있으나, 마지막 부분에서 1⸱2행을 변주⸱반복하여 주제를 강조하는 안정된 구조를 보여 준다.
이 시는 표면상 1인칭 화자의 독백으로 진술되어 있다. 그러나 그 독백은 화자 개인의 삶의 애환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떠돌이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민중의 고뇌라는 일반화된 삶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 시가 ‘목계장터’라는 생활 현실의 공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시적 화자가 보고 듣고 체험한 사실들이 시적 표현의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구름’ ⸱ ‘바람’ 등으로 표상되는 떠남과 ‘들꽃’ ⸱ ‘잔돌’ 등으로 표상되는 정착의 이미지 사이의 대조적 표현은 퇴색해가는 목계 나루에서 방랑과 정착의 기로에 서 있는 농촌 공동체의 시대적 삶과 화자의 개인적 삶 사이의 갈등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이 시는 16행의 단연시로서 의미상 5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단락[1~4행] : 하늘 – 구름, 땅 – 바람
2단락[5~7행] : - 방물장수
3단락[8~11행] : 산 – 들꽃, 강 – 잔돌
4단락[12~14행] : - 떠돌이
5단락[15~16행] : 하늘 – 바람, 산 – 잔돌
1~7행에서, 하늘과 땅은 날더러 구름이나 바람, 혹은 ‘방물장수’가 되라고 하고, 8~14행에서는, 산과 강이 날더러 들꽃이나 잔돌, 혹은 ‘떠돌이’가 되라고 한다. 이를 보면, 8~14행은 1~7행의 변주이며, 15~16행은 1~2행의 반복이면서 변주로, 이 시가 정교한 기하학적 구조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따.
1단락은 화자가 갖는 유랑의 운명에 대한 인식을 보여 준다. ‘구름’과 ‘바람’은 화자가 삶에 대해 갖는 비탄, 또는 삶의 주체로서의 자유에 대한 의지를 뜻하며,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는 그 곳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서 취재한 표현이다. 2단락은 방물장수로서의 떠돌이 삶을 노래한다. ‘아흐레 나흘’은 목계장이 서는 4일과 9일을 말하며,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에서 가을볕마져도 서럽게 느끼며 살아야 하는 그의 비애가 잘 드러난다.
3단락은 나약한 민초로서 살아가는 삶을 제시하며, 4단락은 고달픈 삶의 애환과 소망을 보여 준다. ‘산 서리 맵차’고 ‘물여울 모진’ 삶의 시련을 피해 ‘풀 속에 얼굴 묻고’ ‘바위 뒤에 붙’어 안식을 얻고 싶지만, 현실은 언제나 그를 ‘떠돌이가 되’어 살아가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천지로 변해 / 짐 부리고 앉아’ 쉬고 싶다는 역설적 표현은 화자가 처한 곤궁한 삶을 대변한다. 5단락은 운명과 존재성을 함께 제시하며 시상을 마무리한다.
[작가소개]
신경림(申庚林)
1935년 충청북도 중원 출생
동국대학교 영문과 졸업
1956년 『문학예술』에 시 「갈대」, 「탑」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74년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
1975년 고은, 백낙청, 박태순, 이문구, 염무웅 등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현의회 창립
1981년 제8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3년 민요연구회 창립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 소장
1988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창립, 사무총장 역임
1990년 제2회 이산문학상 수상
1991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및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 의장
시집 : 『농무』(1973), 『새재』(1979), 『새벽을 기다리며』(1985), 『달넘세』(1985), 『남한강』(1987), 『씻김굿』(1987), 『가난한 사랑 노래』(1988), 『우리들의 북』(1988), 『저푸른 자유의 하늘』(1989), 『길』(1990), 『쓰러진 자의 꿈』(1993), 『갈대』(1996),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 『목계장터』(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