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대의 음색에는 한을 녹이는 묘한 빛갈이 녹아있다. 청아한 소리를 지닌 저대는 예로부터 풍류의 상징으로 통해왔으며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의 모든 한을 잠 재우고 이 세상의 모든 혼을 달랠수 있다고 해 “만파식적”- “넓은 바다를 잠 재우는 악기”라는 미명을 얻었다.
저대연주원으로 23년, 교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저대를 가르치기를 13년, 하지만 김동설선생(70세)이 저대와 인연을 맺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난 1963년, 왕청현 대흥구중학교의 문예소년으로 활약하던 김동설선생은 당시 40:1의 치렬한 경쟁을 뚫고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해 처음 저대와 만나 중국 제1대 대금연주가 허금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졸업을 하게 되는 해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그는 꽤 오랜 시간을 저대와 멀리 해야 했다.
1970년 5월에 가무단에 입단했으나 당시 형세때문에 저대는 불지 못하고 플루트연주원으로 있다가 문화대혁명이 결속되면서 다시 본격적인 저대연주를 시작할수 있었다. 그렇게 여러 크고작은 무대에 올라 저대를 연주했고 외국의 무대에 초청되기도 했으며 1993년 가을부터는 연변대학 예술학원에 전근해 2006년 정년퇴직을 하기전까지 후대양성사업에 종사했다.
김동설선생은 기자에게 저대의 유구한 력사에 대해서 구수한 이야기를 풀어주었다. 저대는 대금 또는 대함이라 부르기도 하며 옛날에는 대금, 중금, 소금 이 세가지를 통털어 “삼죽(三竹)”이라 했는데 이중 지금 연변에 남은것은 대금 즉 우리가 말하는 저대뿐이다.
조선 후기로 오며 정악에만 사용되면 대금은 점차 민가로 퍼져나가면서 대금산조가 발생했고 산조의 연주를 위해 정악대금보다 조금 작아진 크기의 산조대금이 나왔는데 현재 연변에서는 정악대금과 산조대금을 모두어 전통대금으로 분류한다.
지난 1952년부터 연변에서는 민족악기개량운동이 시작되였는데 당시 저대도 음계확장의 필요가 절실했기에 이를 계기로 개량저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초기의 개량은 전통저대의 기존 6개의 음공중 3개에 건을 달아 C조와 F조, G조의 연주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처럼 음역이 넓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민악연주에는 문제 없으나 서양악기와의 합주는 여전히 불가능했다. 하여 두번째의 개량이 시작되였는데 6개의 주요 음공 가운데서 왼손 세번째, 네번째 손가락 음공과 오른손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손가락 음공에 가락지식으로 구멍을 냈다. 이렇게 하니 화음(滑音)을 연주하는데 유리했고 전통음악의 풍격을 더욱 잘 살릴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존재했다. 이와 같은 개량저대는 느린 음악을 연주하기는 좋으나 빠른 음악을 연주하기가 힘들었다. 하여 60년대 중반에 와서는 다시 가락지식으로 낸 구멍을 막았으며 지금까지 줄곧 사용돼오고있다.
개량저대들은 전통저대의 우아하고 처량하고 부드럽고 구성진 음색을 보존하는 전제하에서 7음 음계의 12평균률로 조률되여 더 큰 음량과 넓은 음역을 가졌기에 연주할 때 전조가 자유로우며 연주범위가 넓어져 현대음악의 연주와 다양한 창작곡도 소화해낼수 있었다. 즉 과거의 소리와 현재의 소리 그리고 미래를 위해 다듬은 새로운 소리까지 공존하는 악기로 거듭났다.
또한 개량저대는 악기를 두개 마디로 나눔으로써 음정조률을 할수 있을뿐만아니라 휴대하는데도 편리했다.
“물론 개량저대에도 문제점이 존재합니다. 저대의 음색에 장쾌한 멋을 더하는것이 바로 ‘청’인데 개량저대에는 ‘청’이 없어 저대 특유의 소리를 내는데는 아쉬움이 큽니다.” 김동설선생은 개량저대의 부족점에 대해 이와같이 말하면서 그때문에 전통 판소리음악을 연주할 때는 전통저대가 사용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청”이란 갈대속에 붙은 습자지처럼 얇은 막으로 연주자의 입김과 만나 파르르 떨며 일종의 “떨림판” 구실을 하는데 전통저대에만 있을뿐 개량저대에는 “청”이 없다.
현재 김동설선생은 연길시 “학림악단”의 민악대를 책임지고 각종 공익성 공연이나 행사를 이끌면서 로익장의 정열을 불태우고있다. 그는 그런 시간들이 더없이 보람차고 충실하다고 말한다.
“지금은 가끔 제자들이 찾아와서 연주에서의 어려움을 말하면 같이 방법을 찾아보기도 하고 또 악기에 고장이 생기면 손봐주기도 합니다. 저는 이제 여력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제자들이 곳곳에서 활발한 역할을 하는것을 보면 그나마 마음이 놓입니다.” 김동설선생은 당시 관객들의 박수갈채가 끓던 무대를 떠나 교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지난 세월이 참 다행스럽다고 얘기한다.
그의 제자들은 지금 국내외 각 예술단체에서 현역연주자로 활약하기도, 또 스승의 뒤를 이어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배양하기도 한다. 그중 연길시예술단의 리금호씨는 저대 성급무형문화재로 인정받아 아름다운 우리 민족악기 저대의 전통을 이어갈 중임을 짊어지고 빛나는 활약을 하고있다.
글·사진 박진화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