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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과 감성, 그 재현의 시적 미학
---신협의 시세계
이 덕 주
1. 신협의 시적 비의
신협은 시대가 안고 있는 상호간의 관계를 주시하며 정신적 고양의 세계를 전해주기 위해 숨겨진 언어를 호명하는 시인이다. 그는 우리가 미처 말하지 못한 정신적 근원인 밀도 짙은 원형의 세계를 자신만의 언어로 펼쳐내려 한다. 그곳은 그의 구체화된 경험적 고백이 넘쳐나고 과거의 체험을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시적 공간이다.
신협은 그곳에서 새로운 시적 의미를 생성시키며 자신만이 추구하는 아주 특별한 정신적 세계를 보편성으로 연결하고 진열하려 한다. 회고와 회상에 접어들기보다 근원을 형상화한 체험적 고백으로 시적 현장에 독자인 우리를 닿게 하며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본원의 위치에서 되돌아보게 한다. 진중하고 곡진한 그의 언어, 쉬운 언어이고 분명 흔적과 현상과 관계를 말하고 있는데 기묘하게 우리들에게 ‘지금여기’에 있는 자신들을 살펴보게 한다.
또한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그토록 많은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 또 경청할 말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시를 다 쓰고 난 후 아직도 못 다한 말이 그에게 샘솟고 있는 시에 대한 열정일 것이다. 끝없이 솟아오르는 깊은 원천처럼 그에게 아무리 퍼내도 줄지 않는 그의 시적 근원이 정신적 원류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인가? 신협의 제9시집『긍정의 빛』(기획출판 오름, 2018)을 펼쳐 그가 안내하는 행간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펼쳐내는 정신적 전류가 흐르는 시세계에 안착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2013년『독도의 꿈』발간 이후 5년 동안 진행된 자신의 시세계를 진솔하게 드러내는 그의 눈빛이『긍정의 빛』에 오롯이 담겨있는 시집으로 비쳐진다. 마치 자신의 손을 잡고 함께 우리 정신적 본류인 자신의 고향인 시정신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려는 듯하다. 시집의 편 편마다 쉬운 언어로 여전히 시대를 통찰하면서도 맵짜게 자신의 시정신을 투영하려 한다.
이번 신협 시인에 대한 집필의 기회에 그의 제1시집『변명』(1974)부터 최근의 제9시집『긍정의 빛』까지 시를 선정하여 분석하면서 필자는 신협이 작시作詩의 필연성에 대해 특별한 긍지를 지니고 있는 시인임을 발견했다. 그 때문인지 그는 자신의 시편마다 자기만의 특별한 자화상을 탄생시켜 다양한 모습으로 시적 공간으로 소환하여 다양한 역할을 하게하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 시대를 거슬러 자신을 자신의 시적 공간에 투영하고 자신을 연출하게하며 압축적으로 자신의 시적 진실을 도출하려 했다. 이러한 점은 시인은 오로지 시로써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자신의 시정신을 실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평생 시정신을 앞세우며 통시적 안목으로 시적 대상을 보는 신협의 시를 단편적으로 규정하기는 당연히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의 시가 갖고 있는 몇 가지 특성을 그의 시집에서 추출한 텍스트를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신협시인에 대한 연대기를 중심으로 한 형식과 틀에 맞춘 비평은 지양하며 시인을 대변하는 작품만으로 이번 기회에 그의 시세계에 접근하려 한다. 질문과 답을 병행하는 그의 독자적인 시에 대해 필자 나름의 다양한 해석을 구하려 한다.
2. 신협의 대표작품 분석
신협은 시를 위한 시정신을 중시하는 시인이다. 그는 <2011시의 날> 발표한 논문에서도 자신이 시정신을 정립하려는 의지와 주견을 거듭 강조했다. 그의 시정신을 인지하게 하는 초기 시이며 그의 대표작이 된「달나라 여행」을 우선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는 우주로 가는 중간 지점/ 시간은 낮 열두시에서 멈추었고/ 몸무게가 스르르 빠저 나가면서/ 우리는 지구에서 싣고 온 말씀을 잃어버렸습니다.
벗이여./ 잠시 바쁜 일손을 멈추고/ 기도를 드립시다.
벗이여/ 슬픔을 거두소서./ 창 밖에는 황홀한 지구가 보입니다.
벗이여/ 싸움을 그치고/ 우주 저 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
여기는 등대도 빛도 무게도 없어/ 빈손엔 다만 빈손이 닿을 뿐
돌아오는 길목에서 나는/ 빈손에 어둠 한 상자만을 가지고 와서는/ 대지에 씨앗을 뿌리겠습니다./ 대지에 씨앗을 뿌릴 것입니다.
-「달나라 여행」(『변명』, 1974)전문
이 시는 신협의 고백적 기록에 의하면 자신이 생애 최초로 쓴 시라고 한다. 1969년 7월 21일은 아폴로 11호가 인류 최초로 우주인이 된 닐 암스트롱, 에드윈 버즈 올드린, 마이클 콜린 이들 셋을 태우고 달을 최초로 탐사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지구역사의 새 장을 장식하는 경사였다. 그날 신협은 TV를 통해 이 광경을 지켜보고 그 감동의 장면에 대해 처음으로 즉흥시를 썼는데 그 시가 바로「달나라 여행」이라고 한다.
1974년 출간한 첫 시집『변명』에 초고가 실린 후 십년쯤 경과해서「달나라 여행」을 위와 같이 ‘벗이여’ 호칭이 각 연의 도입부마다 삽입되어 있는 것을 세 연 만 남기고 모두 제외시켰다고 한다. 이 시에서 2연은 암스트롱, 3연은 올드린, 4연은 콜린스가 달 착륙 현장에서 했었을 말을 상상으로 화자인 신협이 대입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 셋이 한 말은 물론 지구를 향해, 지구인에게 간구하듯 호소하는 경건한 기도문이다.
당시 세계는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세력을 서로 부풀리며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냉전시대였다.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1991년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이 냉전은 계속되었다. 1957년 10월 4일 소련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의 성공으로 소련은 최초로 우주에 인공위성을 발사한 국가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또한 스푸트니크 2호에는 ‘라이카’라는 이름의 개를 동승시켜 최초로 포유동물을 우주에 보낸 타이틀까지 얻게 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미국은 뒤늦게 우주개발에 뛰어들었다. 1961년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우주상공을 일주하면서 ‘지구는 푸른빛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우주개발에 계속 뒤처지던 미국은 1969년 7월 21일 아폴로 11호에 의해 소련에 앞서 나간다. 닐 암스트롱이 최초로 달 표면에 발을 디디며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라는 말을 남긴다.
이 생중계를 지켜보면서 신협은 우주와 연결되는 세계에 대해, 또한 자기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본격적으로 우주의 신비에 대해 연구하며 정신세계의 위대함에 대해 많은 궁구를 했다고 보아진다. 세 우주인이 차례로 한 말에 이어 이 시의 백미는 마지막 연이다. “여기는 등대도 빛도 무게도 없어/ 빈손엔 다만 빈손이 닿을 뿐”인 5연에 이어 우주를 떠나 지구로 귀환하는 6연은 “돌아오는 길목에서 나는”하며 화자 자신을 지칭하며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한다. 신협의 화자는 “빈손에 어둠 한 상자만을 가지고 와서는/ 대지에 씨앗을 뿌리겠습니다.”라고 결언을 맺는다.
“빈손에 어둠 한 상자만을”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하는 이 문면은 이 시가 왜 신협의 대표시가 되었는지를 확연하게 인지하게 한다. 우주의 신비는 밝혀지고 있지만 우주의 비밀은 밝혀내면 낼수록 아직도 그 비밀은 무궁무진하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별의 밝기는 몇 십억, 몇 백억 광년에 비롯되어 우리의 시야에 도달했다고 한다. 빈 공간으로 인식했던 우주는 1969년 이래 조금씩 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들 인간에게 신비적 존재이며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다.
신협의 화자는 당시의 시대상인 미⦁소 냉전시대에 미래에 대한 불안요소와 함께 지구의 안위를 염려한다. 그 때문에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며 다의적 상상을 하게 하는 “대지에 씨앗을 뿌리겠”다는 희망을 기대하는 구절이 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신협은 자신이 직접 체험한 현상에 대해 정신적 가치를 부여하고 균형적 시각으로 시적 대상을 제자리에 위치시키려 한다. 그 시적 대상에 대해 질서를 부여하고 역사의식을 지닌 시대적 소명을 생성시키려 한다.
소년은 하늘을 향해/ 연줄을 풀고 있었다.
바람을 조심스레 타면서/ 연은 차츰 높이 올라/ 세상을 너그럽게 내려다보았다.
연은 체중을 가늠하면서/ 목숨을 한 가닥 실 끝에 매달았다.
순간, 연은 한 바퀴 빙 돌다가/ 현기를 쫓듯/ 처절하게 몸을 흔들었다
실이 끝나는 지점에서/ 우주는 빈손을 흔들어 보이고,
실이 끊어지면서/ 연은,/ 뿌리 깊은 소리 쪽으로 사라졌다.
-「연(鳶)」전문 (제1시집『변명』, 1974)
자신의 한 생을 예단하는 시다. 1970년, 신협은 이 시「연(鳶)」을 의도적으로 작시作詩했다고 한다. 신협은「연(鳶)」에서 자신의 일생이 진행되는 과정을 ‘연’의 생성과 소멸로 눈에 보이듯 묘사하고 있다. ‘연’은 화자의 적극적인 의지가 작용되는 상징물로 “연줄을 풀”면서 미래에 맞닿게 될 세상을 향해 ‘연’의 운명을 수용하고 전개해 나간다.
연줄을 푸는 화자는 ‘연’에 투사된 ‘연’과 동일시되는 화자 자신이다. ‘연’은 자신의 의지로 ‘바람’이라는 동반자와 함께 세상을 운행하면서 운명적 세계를 관류한다. “목숨을 한 가닥 실 끝에 매달”았다고 하듯이 ‘연’은 숙명적 존재로 실과 함께 병존한다.
인因과 연緣은 조건과 상황이 끝나면 인과 연은 다시 이어질 수 없다. 인이 된 ‘연’과 연緣이 된 실과 바람은 인연因緣의 관계이며 상의相依로 관계를 지속해나간다. 이처럼 ‘연’의 운명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한정되어 있음이 처음부터 예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 과정에 성립의 요건이 되던 조건이 변화하면 다른 형태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 그 마지막 변화는 무상이고 공空이다. 인연이 다하면 “실이 끝나는 지점에서/ 우주는 빈손을 흔들어 보”인다고 하듯이 공으로 존재하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연은,/ 뿌리 깊은 소리 쪽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게 모든 생멸을 거듭하는 존재의 참모습이다.
신협의 화자는 이러한 존재의 참모습과 변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예찬을 하려 한다. 즉 ‘연’과 화자인 신협을 일체화시키고 존재에 대한 성주괴공成住壞空을 형상화하며 이 시를 종결짓는다.
신협은 이 시를 30대 초반에 작시作詩하며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존재의식과 우주의 근원에 대해, 특히 자기존재의 근원에 대해 많은 고뇌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에 맞는 이상적 진리를 탐구하면서 우주와 인간의 존재원리에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리려 했다고 보아진다. 그 시기, 그는 자신의 한 생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투영시켜 자신의 한 생을 온전히 살아내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신협의「연(鳶)」은 한 인간의 생의 주기인 지극히 제한된 세계를 생성과 소멸의 차원에서 우주와 대비시키려 고심했다. 자신의 존재의식을 적극적으로 투영한 작품으로 신협의 시적 사유가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음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물은 달지 않아 좋다
물은 맵거나 시지 않아 좋다
물가에 한 백년 살면
나도 맹물이 될 수 있을까
-「맹물」전문(제2시집『낙엽으로 돌아와서』, 1979)
「맹물」은 신협의 또 다른 시세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4행의 단시다. 압축과 정결미를 드러낸다. 언어는 쉽게 전개되지만 그 시적 해석의 공간은 한없이 확장이 될 수밖에 없다. 꼭 필요한 언어만을 축약해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물’의 속성에 대해, ‘물’만이 지니고 있는 특질에 대해 화자인 신협은 “물은 달지 않아 좋다”고 하며 또한 “물은 맵거나 시지 않아 좋다”고 ‘맹물’의 조건과 특성을 ‘좋다’는 절대긍정을 표명하며 연속해서 단정적으로 말한다. ‘물’에 대한 적극적인 신뢰를 표명한다. 또한 그 ‘맹물’의 특성을 신협의 화자는 닮고 싶어 한다. ‘맹물’처럼 달지 않고 맵지 않고 시지 않기를 바란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화자는 세상의 시시비비에 얽매이지 않고 초연하려는 마음을 은연중 ‘맹물’에 투사하려 한다.
그래서「맹물」은 ‘맹물’이 그렇듯이 일체의 수사적 언어를 생략한 채, 4행으로 이루어진 시이면서 여백을 확장해 나간다. 즉 쉽고 단순한 언어로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몫을 남겨놓는다. “물가에 한 백년 살면/ 나도 맹물이 될 수 있을까”하며 의문부호를 던진다. 독자와 자신에게 동시에 던지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가에 한 백년 살면”이라는 전제는 ‘맹물’의 특성을 닮고 싶은 화자의 의지다. 독자의 입장에서 ‘맹물’의 의미에 대해 상상을 다의적으로 하게 한다. 신협은「맹물」에서 짧은 시의 긴장미와 조화를 동시에 아우르며 시의 효용성을 중시하려 한다. 이러한 표현은 또한 현상과 작용을 그대로 보여주듯 동양적 사상의 한 지류인 공과 연기와 중도를 표방하는 선禪적 요인도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운 대지의 젖줄/ 윤기 반짝이는 잎에/ 쏟아 붓던 햇살을 꿈꾼다
임의 입김은/ 바람의 은밀한 속삭임/ 오늘의 무게로/ 저 하늘의 순수를 바라 본다
이제는 나무를 위하여/ 조용히 기도를 하자/ 때가 오면/ 꽉 잡았던 가지 끝을/ 놓을 줄을 안다.
은혜 깊은 뿌리 곁에 누어/ 제 몸을 묻고/ 낙엽은 꿀잠을 잔다.
-「낙엽으로 돌아와서」전문(제2시집『낙엽으로 돌아와서』, 1979)
화자는 자신이 1연에서 “대지의 젖줄/ 윤기 반짝이는 잎에/ 쏟아 붓던 햇살을 꿈꾼다”고 서두를 시작했다. ‘햇살’은 무엇인가. 나뭇잎이 반짝일 수 있는 것은 ‘햇살’이 나뭇잎에 투사되어 동화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자가 ‘햇살’을 꿈꾸는 일은 희생적인 마음으로 “저 하늘의 순수를 바라”보듯이 자연에 귀의하고 싶은 의지를 드러낸다.
3연에서 화자는 “이제는 나무를 위하여/ 조용히 기도를 하자”고 한다. 나뭇잎을 무성하게 만들던 즉 화자가 된 나뭇잎을 존재하게 했던 모태인 ‘나무’를 위해 ‘기도’를 올리는 것은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무는 한때 지금은 비록 낙엽이 되어 있지만 낙엽이 되기 전의 나뭇잎을 생성하는 동체였다. 낙엽 이전의 나뭇잎을 존재하게 했던 모든 것에서 나뭇잎은 이제 나무와 분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협의 화자는 이 자연의 순리, 생성과 소멸의 순환을 ‘은혜’로 수용한다. 자연의 이치에 대해, 또한 화자 자신이 그 자연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비로소 “은혜 깊은 뿌리 곁에 누”었다고 절대긍정을 보내며 “제 몸을 묻”으면서도 달갑게 자신의 처지를 감수하고 “낙엽은 꿀잠을 잔다.”며 감사의 마음을 지니려 한다. 이처럼 자신을 낙엽에 대위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숭고함이다. 자신을 가장 낮은 자리에 드려는 겸양이며 겸허함이다. 이와 같은 자연의 정해진 이치에 순응하며 사색적 정경을 연출하려는 신협의 시적 의도는 다음의 시「종(鐘)」에서 연속된다.
층계를 밟고 올라간/ 하늘 맨 꼭대기에/ 종은 높이 매달려 있다.
꿈에 나는 키가 부쩍 자라/ 탑신을 밟고 올라/ 종을 치려고 발을 휘젓다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날개 부러진 까치 떼가 몰려와/ 머리로 부딪쳐/ 종소리는 꿈처럼 길게 늘어지며 울었다.
종은 이제 스스로 울어/ 마침내 바람을 울리고/ 바람은 나뭇잎을 울리고/ 산과 바다와 가슴도 따라 울었다.
-「종(鐘)」전문 (제3시집『물가에 앉아서』, 1985)
화자의 시적 대상이 된 ‘종’은 한 발 한 발 내딛는 단계를 거쳐 ‘종’이 최종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정상까지 도달해 ‘종’이 갈 수 있는 자신의 위치에 있다. 그곳은 생의 한계이며 또한 우리가 가야할 생의 극점이고 정상이다. 화자는 꿈에서조차 자신의 능력을 한껏 키워 그 정상을 정복하려고 한다. 하지만 “종을 치려고 발을 휘젓다가/ 땅바닥에 떨어졌다.”고 하듯이 도전은 실패하고 만다. 다시 처음의 위치로 되돌아간다.
화자가 다시 ‘종’을 치기 위해서는 다시 단계를 거쳐 올라가야 한다. 그만큼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우리 생이 그렇듯이 요원하고 힘들기만 하다. 그 종소리는 그냥 울리지 않는다. 3연에서 말하듯 “날개 부러진 까치 떼가 몰려와/ 머리로 부딪쳐” 생명을 담보로 최선을 다했을 때만 울린다. 목숨을 다 내놓기에는 화자는 아직 그 무조건적인 희생에 대해 번민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화자가 된 ‘종’은 자신이 스스로 울기를 선택한다. ‘종’이 울기 위해서는 누군가 ‘종’에 힘을 가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으니 ‘종’은 자기가 자신을 울려서 소리를 내려고 한다. 자기가 자신을 울릴 때 “바람을 울리고/ 바람은 나뭇잎을 울리고/ 산과 바다와 가슴도 따라” 운다. 화자가 된 신협은 따라서 자신이 울어야 하는 당위성을 이렇게 형상화한다.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자신의 심경에 대해 “산과 바다와 가슴”에까지 동조를 구하려 한다. 이처럼 자신에 대한 통한을 시적 대상에게 동의를 구하는 동감과 함께 자신이 귀속해 있는 시적 대상들과 합일을 이루려 한다.
예순쯤 살아온 강물은/ 조용 조용히 흐른다/ 가슴으로 뜨겁지도 않고/ 입술 파랗게 질리지도 않는다.
오직 하나밖에 모르는 강물/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갈 뿐/ 단순한 기쁨 얼굴에 넘치고/ 강물은 밤낮을 잊어버리고 산다.
거슬러 올라갈 생각 없이/ 아래로 아래로 오직 한 길/ 바다를 경건히 바라보며/ 단순한 강물은 그냥 넉넉하다
물새 날아와 외롭지 않고/ 물고기 함께 살아 외롭지 않다./ 바다의 마음 그리워하는/ 단순한 강물 도도하게 살아간다.
-「단순한 강물」전문 (제6시집『단순한 강물』, 2002)
신협의 화자는 이순耳順을 맞아 자신을 흘러가는 ‘강물’에 비유한다. ‘강물’은 처음 산에서 발원하여 계곡을 흐르기도 하고 범람을 이겨내며 강폭이 넓은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어지간한 외부의 환경변화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강물’은 제 갈 길을 간다. “가슴으로 뜨겁지도 않고/ 입술 파랗게 질리지도 않”으면서 오직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갈 뿐”이다. 먼 바다를 향해 가는 그 길, 또한 제 갈 길이다. 이제 화자를 환치하는 ‘강물’은 흘러간다는 그 자체도 잊어버린 ‘강물’로 전환된다. 그 때문에 ‘강물’로 흘러가는 화자의 내면은 환희로 충만하며 “단순한 기쁨 얼굴에 넘치고” 있다.
‘강물’이 된 화자는 되돌아갈 수 도 없으며 그런 생각조차 아예 하지 않는다. “아래로 아래로 오직 한 길”인 앞을 향해 “바다를 경건히 바라보며” 나아갈 뿐이다. 주어진 그대로의 환경과 여건에 순응할 뿐이다. 이제 “단순한 강물은 그냥 넉넉”한 마음만 남아있다. 주위를 새삼 휘둘러보니 “물새 날아와 외롭지 않고/ 물고기 함께 살아 외롭지 않다.”고 하듯이 물새와 물고기가 친구가 되고 동반자가 되어 있다.
화자는 지금 “바다의 마음 그리워”한다. 언젠가는 자신이 가야할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여전히 자신은 “단순한 강물”이 되어 “도도하게 살아”가야 한다. 자신을 자신답게 지키면서 갈 길을 가야 한다.
화자는 이순을 맞아 분노도 내려놓고 욕심도 다 내려놓은 무위자연의 삶을 연결하고 진행하려 한다.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며 ‘강물’로 치환된 자신의 시원始原인 바다를 그리워하며 자족의 삶을 희구하려 한다. 이제 비로소 자신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며 운명의 귀속자가 되려 한다. 이러한 안분지족의 삶의 태도는 이후 오래 지속된다.
시를 쓴다는 것은/ 개울 바닥에 굴러다니는/ 조약돌을 줍는 일/ 수석을 즐기다가/ 기이한 돌을 발견하고는/ 혼자서 즐거워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벌이 되어 꿀을 모으는 일/ 꽃을 찾아다니다가/ 꿀을 발견하고는 행복해 한다.
시를 짓는다는 것은/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하는 일/ 쇳덩이를 불에 달구어/ 담금질로 연장을 만들고는/ 이마의 구슬을 훔쳐낸다.
시를 쓴다는 것은/ 영혼의 맑은 이슬을 받으러/ 산사를 찾아 떠나는 일/ 텅 빈 절간을 헤매다가/ 잠자리에 들어서는/ 꿈에 도인을 만난다.
-「시를 쓴다는 것은」전문 (제7⦁8시집『독도의 꿈』, 2013)
제7⦁8시집『독도의 꿈』에 실린 시「시를 쓴다는 것은」은 신협이 ‘자신의 시론이 과연 무엇인가? ’ 일목요연하게 적시한 시라고 할 수 있다. 근래의 시인들은 ‘독자적인 시론이 없는 시인이 아니다.’라며 자신만의 독보적 시론을 갖기를 내세운다. 다변화되고 있는 현대시단에서 자기만의 시론과 그 시론을 적용하는 시를 써야만 시인으로서 생존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중론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위 시는 신협이 앞세우는 자신의 시론을 각 연의 도입부에 “시를 쓴다는 것은”이라는 서두를 1행에 두면서 자신의 독자적 시론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신협은 1연에서 시인이 자기만이 볼 수 있는 발견의 눈을 지녀야 함을 강조한다. “수석을 즐기다가/ 기이한 돌을 발견하고는/ 혼자서 즐거워한다.”고 하듯 시적 발견의 환희를 예찬한다. 2연 역시 1연에 연속해서 “그 꽃을 찾아다니다가/ 꿀을 발견하고는 행복해 한다.”고 시인의 행위에 대해 시를 쓰는 그 자체를 ‘행복’해 해야 한다고 시를 쓰는 과정의 즐거움을 표현한다. 3연은 시작詩作의 고통에 대해 “쇳덩이를 불에 달구어/ 담금질로 연장을 만”드는 힘든 역경을 극복하기를 비유한다. 4연은 시를 쓰는 목적이 “영혼의 맑은 이슬을 받으러/ 산사를 찾아 떠나는 일”과 다름없음을 강조하며 “텅 빈 절간을 헤매다가/ 잠자리에 들어서는/ 꿈에 도인을 만”난다고 하듯이 시정신과 덕목을 중시하면서 자신의 시론에 대해 긍정적 결론을 내린다.
「시를 쓴다는 것은」결국 신협에게 정신적 충만함이 조성되어야 하는 선결조건이 완비되기를 희망한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시정신에서 주창하듯 ‘진실성 위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미적 감동’이 있어야 하며 ‘체험에서 얻어진 현실의식이나 역사의식’과 함께 ‘생명 있는 정신’이 깃들어야 한다고 본다.
신협이 대학원에서 쓴 학위논문「현대 한국시의 정신적 연구」(고려대 대학원 1989) 중 시정신에 관련된 항목을 자신이 요약한 내용 그대로 열거해 본다.
첫째로 시정신은 시의 내용이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로 시정신은 시의 주제가 아니다. 셋째로 시정신은 시의 사상이 아니다. 넷째로 시정신은 살아있는 정신이요, 깨어있는 의식이다. 다섯째로 시정신은 진실성 위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미적 감동 상태인 것이다. 여섯째로 시정신은 불멸하는 시인의 혼이다. 일곱째로 시정신은 체험에서 얻어진 현실의식이나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여덟째로 시정신은 생명 있는 정신이다. 시정신이 풍부해야 감동을 준다. 나의 박사논문 이후에 정리해본 詩精神을 구체적으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① 선비의식의 시정신(윤동주의 서시/이육사의 광야/조정권의 독락당)
② 저항의식의 시정신(한용운의 당신을 보았습니다/심훈의 그날이 오면/)
③ 역사의식의 시정신(변영로의 논개/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육사의 절정/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④ 사랑의 시정신(/김소월의 진달래꽃/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⑤ 생명의식의 시정신(/유치환의 생명의서/서정주의 자화상)
⑥ 신앙심의 시정신(김현승의 절대신앙/ 황현의 절명시/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신석정의 그 먼 나라를 아르십니까?)
⑦ 현실비판의 시정신(조지훈의 봉황수/오규원의 이 시대의 순수시)
⑧ 우주적 상상력의 시정신(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윤동주의 별 혜는 빔)
⑨ 휴머니즘의 시정신(정한모의 가을에/박재삼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⑩ 문명비판의 시정신(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김기림의 기상도)
⑪ 생태환경의 시정신(이형기의 전천후 산성비)
⑫ 치열한 영혼의 시정신(김소월의 산유화/이호우의 개화/노천명의 사슴)
⑬ 淸淨心의 시정신(김영랑의 동백닢에 빗나는 마음/김동명의 내 마음은)
⑭ 죽음 또는 생사초월의 시정신(이상화의 나의 침실로/이형기의 낙화)
⑮ 깨달음의 시정신(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박목월의 이별가)
⑯ 참회, 자아비판의 시정신(윤동주의 참회록/서정주의 自畵像)
⑰ 언어조탁의 장인정신(김영랑의 사행소곡/정지용의 호수/박목월의 나그네)
⑱ 민중심리와 시대정신(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조병화의 의자)
⑲ 실험의식의 예술혼(이상의 오감도시제1호/ 김동환의 국경의 밤)
⑳ 하늘에 이른 시정신(주요한의 불놀이/김소월의 산유화/한용운의 님의 침묵//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유치환의 깃발/박두진의 해/조지훈의 승무/김춘수의 꽃/김광균의 설야/박목월의 나그네/ 윤동주의 서시)
하늘에 이른 시정신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한국의 고전시론 중에서 詩를「天來之言」이라고 하기 때문이요, 온 국민이 애송하는 시는 하늘에 이른 시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시정신이 풍부한 시란 정신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엘리어트의 말처럼 사상이 장미의 향기로 형상화 되었을 때 비로소 시정신으로 살아나는 것이므로 이를 문학성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은 좋은 시는 시정신에 달려있다.
-(『문예운동』「작시법을 위한 나의 시, 나의 시론」2018, 가을호 참조)
이와 같이 신협은 정신적인 측면에서 “결론은 좋은 시는 시정신에 달려있다.”고 역설하며 시정신을 중시한다. 그 때문에 자신이「시를 쓴다는 것은」결국 시정신에 부합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영혼의 맑은 이슬을 받으러/ 산사를 찾아 떠나는 일”이 아니겠느냐? 묻는 장면은 독자를 위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신적 기조는 최근까지 다음의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신협시인의 시작詩作의 주류를 이룬다.
시는 깨달음을 쓰는 것/ 빙벽 앞에서/ 절망 앞에 서서/ 그대는 무엇을 깨달았는가.
시는 깨우치려고 외치는 것/ 빙벽 앞에서/ 절망 앞에서/ 그대는 누구를 깨우치려고 외치는가.
시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빙벽 앞에서도/ 절망 앞에서도/ 그대가 발견한 보석은 어떤 보석인가.
시인이 서있는 자리는/ 빙벽 앞이거니/ 절망을 뚫고 일어서려는 사람/ 바로 그가 시인이 아니던가.
시여! 시대에 절망하라./ 시인이여! 곡괭이를 내려치듯/ 저 어둠의 빙벽을 뚫고/ 새벽을 불러오라.
깜깜한 밤하늘에도/ 샛별은 빛날지니/ 어둠이 짙을수록/ 별들은 더욱 총총히 밤하늘을 수놓는다.
-「빙벽 앞에서」 (제9시집『긍정의 빛』, 2018)
신협의 화자는 1연에서 “시는 깨달음을 쓰는 것”이라고 전제한다. 시는 결국 시적 대상이 된 세상의 모든 대상에게 시인 자신이 세상의 이치에 대해, 어떤 존재의 필연성에 대해, 깨달음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빙벽 앞에서/ 절망 앞에 서서/ 그대는 무엇을 깨달았는가.”라는 질문이 화자가 된 신협에게 지극히 당연한 질문이 된다. 2연은 1연의 의미를 더욱 강조한다. 시인 자신이 아닌 타자에게도 깨달음과 울림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화자의 주장에 힘을 더한다.
또한 시는 결국 감성적 미학을 찾아내는 것이므로 “시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을 3연에서 주견으로 내세운다. “그대가 발견한 보석은 어떤 보석인가.” 질문하며 시인의 행위가 시적 미학의 발견에 있음을 더욱 강조하려 한다.
시인은 그 어떤 ‘빙벽’과도 같은 장애를 극복하며 자신의 의지를 세우고 결코 어떤 절망 앞에서도 좌절해서는 안 된다. 시에 대한 사명을 다해야 하며 시 정신으로 무장해서 난관을 이겨내야 한다. 시인은 화자가 세상의 부조리와 절망을 딛고 항변하고 외쳐야 한다. “곡괭이를 내려치듯/ 저 어둠의 빙벽을 뚫고/ 새벽을 불러”와야 한다. 이처럼 신협은 자신에게 내재된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시인이라는 천형과 시인의 사명의식을 연속해서 강조하며 깨달음을 시적으로 승화시키려 한다.
신협은 계속해서 시인의 정신적인 면을 앞세운다. 그와 동시에 “시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라며 시의 정신이 충만할 때 시의 미학적 요소인 은유와 상징이 더 자연스럽게 운용되고 있음을 또한 중시한다. 즉 시정신으로 무장된 시인은 그 때문에 더 독자에게 동감을 주는 시를 쓸 수 있음을 강조하려 한다. 때론 정신적인 측면을 앞세우는 것은 시인에게 일종의 굴레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신협은 이 점에 대해서도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시정신을 지켜나가는 것은 그에게 일종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하얀 백지
스무 살에는 백지 위에/ 「달」을 그렸고
서른 살에는 백지 위에/「물가에 앉아서」호수를 그렸고
오십이 넘어서 예순 살에는/「단순한 강물」을 그렸다.
이제 팔십이 다 되어서는/ 잘못 살았다는 생각에/ 백지 위의 달도 호수도 강도 모두 지웠다.
다시금 하얀 백지로 돌아가/ 나를 찾아 나섰다.
-「하얀 백지 위에」 (제9시집『긍정의 빛』, 2018)
신협 시인의 화자는 존재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한 생을 회한으로 바라본다. 화자는 “내가 태어난 곳은/ 하얀 백지”였음을 공표한다. ‘하얀 백지’가 상징하는 것은 화자 자신이 애초에 무無와 공空에서 비롯되었음을 뜻한다. 화자는 이 문면에서 시인을 대변하는 ‘하얀 백지’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시작詩作의 예술적 공간으로 수용한다는 의미이다. ‘하얀 백지’ 위에 태어난 화자는 따라서 시인으로서 자신의 한 생을 회고하며 느끼는 진솔한 감회를 술회하려 한다.
화자는 “스무 살에는 백지 위에/「달」을 그렸”다고 하듯이 꿈과 이상에 가득한 세계를 추구했다고 회상한다. 또한 “서른 살에는 백지 위에/「물가에 앉아서」호수를 그렸”다며 제3시집『물가에 앉아서』를 출간하던 시기를「물가에 앉아서」라는 시를 중심으로 그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한다.
“오십이 넘어서 예순 살에는/「단순한 강물」을 그렸다.”고 하듯이 화자는 무위자연의 삶을 이상으로 여기고 자연에 순응하려 했다고 술회한다. 응분자족의 삶을 그리면서 그 무엇보다 운명을 신뢰하고 자신 역시 자연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려 했을 것이다.
신협의 화자는 “이제 팔십이 다 되어서는/ 잘못 살았다는 생각에” 자신의 위치를 새삼 점검하려 한다.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자신의 생에 대한 반성이며 동시에 자신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된 강한 긍정이다. 철저한 부정은 철저한 긍정 위에서 성립한다. 그동안 삶의 지표가 되고 이정표가 되던 “백지 위의 달도 호수도 강도 모두 지웠다.”는 화자의 고변이 그래서 더 실감 있게 감득된다. 그 때문에 “다시금 하얀 백지로 돌아가/ 나를 찾아 나섰다.”고 진솔하게 실토하는 화자에게 당위성과 절대긍정이 성립된다.
역설적으로 화자인 신협은 자신의 삶을 성실하고 진솔하게 살아왔음을 자신의 한 평생을 부정함으로써 증명하려 한다. 동시에 제9시집을『긍정의 빛』으로 명명했듯이 자신의 생에 대한 부정을 다시 부정하며 긍정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생에 대한 회의와 부정을 거쳐 자신의 생에 대해 절대긍정으로 전환하려 한다.
배달부는 우체통 속을 샅샅이 뒤져/ 편지나 엽서를 모두 가방에 담아도/ 전에는 배불뚝이였으나 요즈음은 홀쭉이가 되었네.
오작교 건너 견우와 직녀의 만남/ 스마트폰 때문에/ 세계가 이웃집 안마당이 되었네.
우체통 속 안쓰러운 기다림/ 배달부의 허기진 눈망울/ 세기는 전광석화처럼 지나가 버렸네.
오후의 들판을 급행열차가 달리고/ 자전거를 탄 배달부 아저씨가/ 시골 신작로를 달리고 있네.
가을 오동나무 위로/ 기러기 멀리 날아가고/ 빈 가지에 초승달이 걸려 있네.
-「우체부와 우체통」 (제9시집『긍정의 빛』, 2018)
세상은 빠르게 변화한다. 그 변화의 양상을 현실에서 그대로 체험하고 있는 ‘우체부’를 보면서 화자는 긴박하게 전개되는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을 ‘우체부’로 비유한다. 예전의 ‘우체부’들은 우체통에 넘쳐나는 우편물을 회수해 넘치도록 우편낭에 담고 다녔다. 으레 ‘우체부’들은 그런 작업의 부하를 당연시했고 ‘배불뚝이’처럼 뒤뚱거리며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가방을 가득 채워 들고 다니는 ‘우체부’는 보이지 않았다. 한 시절 연말이 되면 엽서와 연하장을 보내는 일로 분주했는데 지금은 그런 일조차 아득한 옛 추억이 되었다.
화자는 스마트폰에 의해 세상이 빠르게 뒤바뀐 것을 절감한다. “스마트폰 때문에/ 세계가 이웃집 안마당이 되었”다며 스마트폰에 의해 이전에 ‘우체부’가 도맡았던 연락과 배송 등의 문제를 짧은 순간에 해결해 버리는 세태를 보며 격세지감에 빠진다. 그야말로 “세기는 전광석화처럼 지나가 버렸”다고 하듯이 스마트폰이라는 문명의 이기에 의해 세상의 시공간이 순간이동하며 생각마저 화급을 다투는 상황을 수용한다.
화자는 그 때문에 자신이 간직했던 느리게 진행되는 일상의 추억을 회상한다. “오후의 들판을 급행열차가 달리고” 있는 가운데 “자전거를 탄 배달부 아저씨가” 한가롭게 “시골 신작로를 달리고 있”는 광경을 떠올린다. 그곳은 들판을 달리는 급행열차와 “자전거를 탄 배달부 아저씨”가 기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여유롭기만 하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일상이 아니며 서두를 필요가 없는 시공간이다.
신협의 화자는 지금 “빈 가지에 초승달이 걸려 있”다고 하듯 회한 가득한 심경으로 옛 시절을 회상하며 사색에 빠져 무념으로 대상을 바라보던 여유를 그리워한다. 이러한 장면은 ‘스마트폰’과 ‘우체부’를 대비시키며 신협이 자신의 본령으로 회귀하고 싶은 의지의 작용이 형상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신협의 다층적인 시세계
신협의 제1시집『변명』(1974)부터 제9시집『긍정의 빛』(2018)까지 작품을 선정하여 모두 열 편의 시를 대표적으로 살펴보면서 신협의 시는 신협의 시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평생 정론에 가까운 통시적 안목으로 시를 쓰는 그의 시를 단편적으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의 시가 갖고 있는 몇 가지 특성을 밝혀보려 한다.
첫째, 신협의 시는 정신적 경험과 정신적 추론에 근거한 과학적인 정론의 시를 제시하려 한다. 그가 추동하는 시정신은 제1시집『변명』의「달나라 여행」이라는 시를 최초로 쓰면서 당시의 냉전시대라는 시대상을 반영하고 동시에 정신적 세계와 함께 균형적 시각으로 대상을 위치시키려 했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그는 시적 대상에 대해 질서를 부여하며 시정신에 부합되는 정론의 시를 쓰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자칫 아포리즘으로 흐른 듯해 보이지만 감성과 이성의 경계를 넘나들며 시의 미학적 측면을 아울러 중시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정신을 앞세운 그의 시는「달나라 여행」응 비롯하여 제4시집『어린 양에게』의「어린 양에게」, 제7⦁8시집『독도의 꿈』의「시를 쓴다는 것은」, 제9시집『긍정의 빛』의「강물처럼 살련다」,「빙벽 앞에서」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둘째, 신협의 시는 자신의 의지와 의도를 자신의 시에 적극 적용한다. 시적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거쳐 통찰의 시각으로 대상을 보며 행간에 이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려 한다. 따라서 그의 시는 구도적이며 일면 건축을 하듯이 구상적構想的인 측면이 강하다. 그가 주창하듯이 시정신이 내용과 주제와 사상이 아니면서 시정신을 자연스럽게 작품에 스며들게 하는 나름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시집『변명』의「연(鳶)」,제3시집『물가에 앉아서』의「종(鐘)」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자신의 시정신과 시론을 시의 행간에 의도를 포용하여 투입시키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제7⦁8시집『독도의 꿈』의「독도의 꿈」,「팽이치기(1) 등이 이에 해당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신협의 시는 무상함이 근원에 자리하고 있는 무위자연의 방식을 수용하려 한다. 그는 자신이 추동하는 시정신과 부합되게 모든 시적 대상들을 자연의 순리에 맞게 배치시키려 한다. 서양의 온갖 수사기법이 그의 시에 방법론으로 응용되어도 그의 내면적 사유는 동양적 사유에 그 근원을 두고 있기에 가능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시가 제2시집『낙엽으로 돌아와서』의「맹물」과「낙엽으로 돌아와서」, 제6시집『단순한 강물』의「단순한 강물」, 제7⦁8시집『독도의 꿈』의「석곡리의 돌」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신협의 시가 독자에게 사유와 성찰의 시적 공간을 제공하는 것도 그의 시가 지닌 미학적 무상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로소 자신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며 삶 그 자체의 흐름을 자연의 순리대로 순행시키려 한다. 일체의 욕심도 내려놓고 운명의 귀속자가 되려 한다. 어떤 시는 전통적인 선禪적 사상이 내밀하게 안착되어 있는 느낌도 준다. 이러한 자연에 순응하는 안분지족의 삶의 태도는 이후 신협의 시의 줄기를 이루며 오래 지속된다.
넷째, 신협의 시는 자문자답의 내면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 사람과 사물과의 대화, 그 문답의 과정과 결론을 시의 행간에 균형 있게 장치하고 독자가 이해하게 한다. 즉 독자를 배려하는 시를 쓴다. 이를 위해 자신을 시적 대상에 투사하며 그 대상과 대화체형식을 차용하여 그 대상에게 질문을 반복하기를 즐겨한다. 나름 자신의 의도를 우회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소서, ~하리, ·~할까, ~이여, ~시라. 등으로 문자의 끝말을 맺는 것은 이런 전달방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긍정의 빛』에 있는「긍정의 빛」,「가시면류의 영광」,「고목 아래에서」,「온돌의 단잠」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따라서 그의 시는 경우에 따라 대상과의 간격을 줄이는 스토리텔링, 즉 짧은 단막극을 보여주는 양상을 띠기도 한다.
다섯째, 신협의 시는 사회적 변화를 주시하며 그 변화를 자신의 시에 한 부분으로 적용시키려 한다. 시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인 기능을 자신의 시에 도입하려 한다. 이는 그가 자신이 처한 사회의 변화에 대해 유용성을 찾아내려한 노력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맞닥뜨리는 시대와 사회적 불편함에 대해 사회적 변혁을 시도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본다. 오랜 기간 대학교수와 학자라는 사회적 정형의 틀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론을 해본다. 다만 그는 급변하는 사회현상에 대해 역사의식에 토대를 둔 문제의식을 자신의 작품에 반영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제1시집『변명』의「달나라 여행」, 제4시집『어린 양에게』의「피지 못한 꽃」, 제7⦁8시집『독도의 꿈』의「독도의 꿈」등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협의 시를 다섯 가지 특징으로 분류해 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를 다섯 가지 특징만으로 규정할 수 없다고 본다. 실상 그의 시는 복합적 요인이 작용하는 독특한 신협, 그만의 독자적인 시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숙고와 성찰과 병행하여 감성의 미학이 작용하는 그의 시는 1969년 처음 쓴「달나라 여행」에서 시작하여 <분수동인> 시절을 거쳐 실질적인 시력 50년을 증명하듯이 위에 제시한 다섯 가지 방법론을 포함, 다양한 시적 방법론이 복합적으로 응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자신이 추구해온 시적 방법론이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자신의 시 내면에 자연스럽게 다층적으로 용해되어 있다고 해야겠다.
이처럼 신협의 시는 내면의 정신세계를 삭힌 정서로 응축시키며 시적 대상을 구체적으로 재현한다. 보편적이고 쉬운 언어로 지성과 감성이 용해되어 자신만의 시적 세계를 연출하는 그의 시는 쉽게 우리를 동감으로 이끈다. 그가 주창하는 정신적 시정신이 시의 내면에 흐르기 때문일 것이다. 투명하고 선명하게 운행되는 그의 언어는 현장감 있게 시대의 정신을 재현하며 우리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정신적 동화를 불러일으킨다. 그만이 지닌 독특한 시적 방법론으로 정신의 본령에 이르게 하는 시적 초월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미흡하지만 그의 시집의 편 편을 통해 내리는 필자의 결론이다.
앞으로 신협이 자신만의 독자적인 시를 통해 어느 방향으로 진화를 계속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시는 나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한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 현재진행형으로 시를 쓰는 시인으로서 신협이 나이를 초월해서 자신의 시와 함께 진화를 거듭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