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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기둥과 불 기둥(2)
광야의 길로 돌려
이동휘 목사
1. 지름길이 위험함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서 애굽 전역에 내린 장자 죽음의 재앙을 당하고 바로 왕은 어찌할 도리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던 곳은 라암셋인데 그곳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지름길은 블레셋의 해안 도시 가사(Gaza)를 통하는 지중해안의 길이었습니다. 이 길은 가나안 땅까지 약 4일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이처럼 가나안 땅에 이르는 지름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바꾸어서 애굽으로 되돌아가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이르는 지름길에는 당시 철기 문화를 배경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호전적인 블레셋 족속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만을 하다가 급히 나온 터라,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정비가 안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전쟁을 치를 군사적인 준비 뿐 아니라 마음의 준비조차도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 다섯 개의 큰 도시 국가들(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가드, 에그론)로 상호 공수 동맹을 결성한(수 13:3) 막강한 블레셋 군대와 맞부딪치게 되면, 쉽게 낙심하고 출애굽한 것을 후회하면서 오히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소지가 충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출13: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따라서 하나님은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6배나 먼 광야 길로 그들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블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나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에 취하신 조처였던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시내 산(호렙 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하여 인도해낼 지도자로 세우실 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출애굽기3:12입니다.
(출3: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여기 “산”은 시내산을 말합니다. 장차 모세가 십계명을 받게 될 시내산을 두고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라” 는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도 지름길로 가서는 안되었던 것입니다. 지름길과 반대되는 광야길로 가야만 약속하신 시내산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2.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인도하신 것입니다.
‘광야’는 ‘샘이나 강 등 사람이 쉴만한 곳이 전혀 없는 곳’을 말합니다. ‘광야’는 물과 식물이 없으므로, 주민이 살 수 없는 땅일 뿐만 아니라 또한 황폐하게 되어 버려진 황무지를 뜻합니다. 신명기8:15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광야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8: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편안하고 빠른 지름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광야 길, 멀고도 험한 고난의 광야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때로 성도들을 인생의 지름길로 인도하시지 아니하고 광야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알려주시고 깨닫게 하시지 않으시면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름길을 버려두고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그 의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훗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길로 돌려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 말씀을 보겠습니다. 신명기8:1-3, 14-16입니다.
(신8:1-3)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14-16)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단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B.C.539년경 바벨론 벨사살 왕이 귀족 천 명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메대 왕 다리오에 의해 포위되어 경제적, 정치적 최대의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은 바벨론 제국의 멸망과 왕의 비참한 최후를 알리는 서곡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특히 벨사살 왕은 그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실 때, 과거 자기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탈취해서 가져온 성전 기구들, 다시 말해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사용하는 기구들을 오게 해서 귀족들의 술잔으로 삼도록 했습니다.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성전 기구들을 술잔 삼아 술을 마셨을 때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왕의 맞은 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잔치를 즐기던 왕의 얼굴빛이 창백해지더니, 공포에 사로잡혀서, 넓적다리의 힘을 잃고 무릎을 서로 부딪치며 떨었습니다. 왕은 덜덜 떨며 큰소리로 외쳐서, 주술가들과 점성술가들과 점성가들을 불러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서, 그 뜻을 나에게 알려 주는 사람은 자색 옷을 입히고, 금 목걸이를 목에 걸어 주며, 이 나라에서 셋째 가는 통치자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글자를 읽는 사람이 없었고, 그 뜻을 왕에게 알려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벨사살 왕은 크게 낙심하여 얼굴빛이 변하였고, 손님들도 당황했습니다. 소란과 혼란에 빠져 요란한 소리를 듣고 왕의 어머니가 연회장으로 들어왔습니다. 왕의 어머니는 자기 남편 느부갓네살 왕 통치 시대에 탁월한 정신과 지식과 꿈을 해몽하는 총명이 있어서, 수수께끼도 풀었고, 어려운 문제도 해결했던 다니엘을 부르도록 했습니다. 왕의 부름을 받고 들어온 다니엘이 그 벽에 쓰인 글자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왕이여,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아버지 느부갓네살 왕께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들이 그 앞에서 떨면서 무서워하였으며, 부친께서는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마음대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마음대로 사람을 높이기도 하고, 마음대로 사람을 낮추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친께서 마음이 높아지고 생각이 거만해지셔서, 교만하게 행동을 하시다가, 왕위에서 쫓겨나셔서, 명예를 잃으신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쫓겨나시더니, 그의 마음은 들짐승처럼 되셨고, 들나귀와 함께 사셨으며, 소처럼 풀을 뜯으셨고, 몸은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로 젖으셨습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부친께서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의 나라를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을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깨닫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의 아들이신 벨사살 왕은 이 모든 일을 아시면서도, 마음을 겸손하게 낮추지 않으시고, 하늘의 왕이시요 주님이신 분을 거역하시고, 스스로를 높이시며, 하나님의 성전에 있던 그릇들을 가져 오게 하셔서, 왕과 귀한 손님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그것으로 술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왕은 보거나 듣거나 알지도 못하는, 금과 은과 동과 쇠와 나무와 돌로 만든 신들은 찬양하시면서도, 왕의 호흡과 모든 길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손을 보내셔서, 이 글자를 쓰게 하신 것입니다. 기록된 글자는 바로 ‘메네 메네 데겔’과 ‘바르신’입니다. 그 글자를 해석하면, 이러합니다.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계산하셔서, 그것이 끝나게 하셨다는 것이고,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리셨는데, 무게가 부족함이 드러났다는 것이고, ‘바르신’은 왕의 왕국이 둘로 나뉘어서 메대와 페르시아 사람에게 넘어갔다는 뜻입니다.” 그 밤에 벨사살 왕은 살해되었고 나라를 두 쪽으로 분단되었습니다.(단5장, 단4:34-37)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하여 사람에게서 쫓겨나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7년을 지낸 끝에 이렇게 겸손을 배워 고백했습니다. “(단4:37)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아들 벨사살 왕은 그 아버지가 당한 사건을 통해 겸손을 배우고 단련되지 못하여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역사의 교훈을 통해 누구든 하나님 앞에 겸손함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이 교만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염려하셔서 광야길로 돌려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겸손하게 단련하기 위해서 광야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마음으로 단련하시는 목적은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신8:16)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그 마음을 연단, 단련하십니다. “불은 은과 금을 연단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연단하십니다.(잠17: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지중해변 지름길에서 돌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겸손하도록 ‘연단’(test)하시기 위해, ‘시험’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의 ‘광야’는 ‘연단’을 위한 ‘도가니’, ‘풀무’, 즉 금을 걸러내는 용광로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시기 위해 시험하시고자 하는 것은 첫째, ‘낮추는 것’, 즉 겸손이었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조건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낮에는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아래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습니다. 또한 밤에는 추위로 말미암아 불기운이 없이는 몇 시간도 견딜 수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마실 물이나 사람이 먹고 살만한 음식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시고, 밤에는 따뜻한 불기둥으로 인도해주시지 아니하면 단 하루도 견딜 수 없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동안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하늘에서 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반석을 쳐서 그들의 마실 물, 생수를 공급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40년 동안 그들의 의복이 헤어지지 않게 하셨고, 그들의 발까지 하나 부릍지 아니하게 보호해 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이 입고 먹고 사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인생을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이와같은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달프고 험난한 광야 생활 중에서도 의식주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상기시킴으로써 겸손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계명을 순종하여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축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계속되는 신명기 8:17-18을 보겠습니다.
(신8:17-18)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사람이 배부르고 좋은 집에서 살며 모든 일에 풍부하게 되면 마음이 교만하게 되어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지난 날 애굽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일, 그 위험한 광야, 곧 독사와 전갈의 위험에서 보호하시고, 그리고 물 없는 땅에서 생수로 마시게 하며 땀흘려 일하지 아니하고도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먹이신 일 등, 하나님께서 어떻게 은혜를 베푸셨는가를 잊어버리고 교만할까 염려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사람이 교만한가 겸손한가를 시험하십니다.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부유하게 되었노라며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과 재능, 힘과 환경을 축복하셔서, 한 마디로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잘 되었다고 믿지 않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교훈합니다.
(렘9:23-2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명철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고 그 하나님을 자랑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당대에 율법 박사로 빼어난 학문과 학벌을 지녔습니다. 정통 히브리인으로 뛰어난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식민지 백성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로마 제국의 시민권을 소유한 권세있는 집안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그것들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겨 몽땅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여겨 그리스도 예수만을 자랑했습니다. 야고보서1:9-12을 보겠습니다.
(약1:9-12)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같이 쇠잔하리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이생의 자랑’(요일2:16)을 다 버리고,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고 시험과 연단을 겸손함으로 잘 감당하여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누리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시는 이유는 ‘마침내’, ‘마지막’에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낮추시는 것은 우리를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광야길'은 연단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 길로 인도하심은 자기 백성을 연단하시기 위함입니다. 갖가지 시험과 시련으로 백성을 연단시키어 가나안을 상속받을 만한 성숙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 그들을 죽음이 상존하는 광야 길로 내모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간혹 보이지 않는 거칠고 험한 광야 길과 같은 곤혹스러운 환경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견디기 힘든 시험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절망하며 죽음을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연단하여 더욱 성숙한 인격과 축복을(고전 10:13)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조처입니다(약 1:2-4)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치른 광야 길을 주심은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증표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인간이 보기에 때로는 고통스럽고 불투명하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영광스런 목적지에 이르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즐겨 추구하는 지름길이 항상 최선의 길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믿고 불평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이 고통스럽고 힘들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수 백, 수 천 km 돌아가도록 하셨지만 그 길이 종국에 가서는 마침내 가나안을 소유케 하는 바른 길이요 유익한 길이었음을 기억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B.C.1410년경,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광야의 길을 걷는 광야 생활이 거의 마감되어가는 때였습니다. 광야 생활 40년이 다 되어가는 때,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로 눈앞에 두고 광야길 행군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남지 않은 여정이 결코 쉽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고속도로처럼 바로 질러가는 지름길이 있는 에돔 땅을 지나가면 아주 수월한데 에돔 족속들이 이를 거절했기 때문이었습니다.(민20:14-21) 할 수 없이 먼 길로 돌아가자니 그만 마음이 상하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상하자 그간 물 때문에 고생했던 일들이 또 다시 생각나기 시작했고, 날마다 하늘에서 비같이 내려주시는 만나마저 “박한 식물”, 다시 말해 보잘 것 없는 양식으로 생각되어 원망 불평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망각하고 원망 불평을 일삼는 이들에게 불뱀을 보내서 물려 죽게 하셨습니다.
(민21:4-6)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 불평을 털어놓게 된 것은 ‘광야의 험한 노정에 지름길을 놔두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에 “마음이 상했다.”는 것입니다. 여기 “마음이 상했다.”는 말은 ‘안목이 좁아졌다’라는 말입니다. 마음이 상해 안목이 좁아지다 보니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만나마저 “박한 식물”,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이게 된 것이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가깝고 편리한 지름길을 놔두고 그 머나먼 광야길로 돌아가야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상하고, 마음이 상하다 보니 지난 38년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마저 ‘박한 식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연단하심을 끝까지 감당하지 못하고 원망불평하므로 결국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광야길로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므로 끝까지 감당하여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그 마음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과연 그 험악한 광야길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지 여부를 아시고자, 그리고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 하나님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단련하기 위해 광야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신8:2)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된 지 한 달이 되던 때 광야에서 그간 애굽에서 가져온 양식이 모두 떨어지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애굽에서 종살이했을지라도 그 때는 고기도 얻어먹었고 밥도 배불리 먹었었는데,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고 하던데 차라리 그 때 먹다가 죽게 내버려두지 왜 이 모진 광야까지 끌고 와서 우리를 굶어죽게 만드냐며 원망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출16:4-5)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제 육일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예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이제부터 하늘에서 만나를 비같이 내려 일용할 양식으로 날마다 거두게 할 텐데, 제 육일에는 갑절로 거두어 제 칠일 곧 안식일에는 거두지 않아도 먹을 수 있도록 해서 안식일을 지키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같이 하여 과연 이스라엘 백성이 이 하나님의 율법, 말씀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시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욕심이 생겨 일용할 양식 외에 더 거두어 다음날까지 쌓아두었습니다. 그러자 다음날 아침에 보니까 그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도저히 먹을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안식일 전, 제 육일에는 갑절, 즉 이틀 양식을 거두어 보관했다가 안식일에 먹어도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칠일에는 만나를 내리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만나를 거두러 밖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를 ‘시험’하시겠다고 하셨음에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시고 과연 예수 믿는 성도들이 주일을 성수(聖守)하는지 여부를 시험하시는데 주일을 성수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성도 여러분이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는지 여부를 ‘시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세상에 살면서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쓰디 쓴 환경에 처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지 여부를 ‘시험’하십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인정할 만큼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욥1:1,8) 그리고 동방의 거부였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시험을 받아 하루 아침에 몰락하는 엄청난 환난을 당했습니다. 모든 재산을 잃고 한순간에 모든 자녀들이 압사를 당하는 재난을 당했습니다. 환난 중에 욥이 이렇게 탄식합니다. 욥기 23:1-12내용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처절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니! 내가 받는 이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그분이 무거운 손으로 여전히 나를 억누르시는구나! 아, 그분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분의 보좌까지 내가 이를 수만 있다면,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 그러면 그분은 무슨 말로 내게 대답하실까? 내게 어떻게 대답하실까? 하나님이 힘으로 나를 억누르실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씀을 드릴 때에,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실 것이다.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하나님께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다 들으시고 나서는, 단호하게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다. 그러나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구나. 북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고, 남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구나.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내 발은 오직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며, 나는 하나님이 정하신 길로만 성실하게 걸으며, 길을 벗어나서 방황하지 않았건만! 그분의 입술에서 나오는 계명을 어긴 일이 없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늘 마음 속 깊이 간직하였건만!>(욥23:1-12) 이러한 욥의 탄식 중에 드리는 고백에서처럼 욥은 환난 중에 드리는 기도에 아무런 하나님의 응답을 들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어긴 일어 없었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항상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환난 중에 욥의 고백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when he has tested me)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은 자신이 겪고 있는 환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단련하신다.’, ‘시험하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But he knows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 “(잠17: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시험)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결국 욥은 이렇게 끝까지 믿음을 지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신앙을 ‘증명해보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갑절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욥42:10)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생활 중 때로 욥과 같이 ‘시험’받으실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은 욥 한 사람의 신앙에 대해 무려 42장에 걸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단련된 마음, 연단된 믿음, ‘증명’된 믿음이 가치가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마음을 끝까지 지키시기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 말씀을 생각에 두고 마음에 기록하여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히8:10) 마음을 연단하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믿음과 그 믿음대로 사는 신앙생활을 하나님 앞에 증명하므로 마침내 복을 받되 처음보다 갑절의 복을 더 받으며 “(벧전1:7)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광야를 통해 참 평안을 배운다
출애굽기 13:17-22 / 이준원 목사
[들어가는 말]
우리 교회는 아직까지 예배 때는 <개역한글> 성경과 <통일찬송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개역한글> 성경은 1961년에 나왔고, <통일찬송가>는 1984년에 나왔습니다. 사실은 당회에서도 결정하기를, 이제는 <개역개정> 성경과 <21세기 새 찬송가>로 바꾸려고 했는데, 또 다른 찬송가가 새로 나온다는 소식이 있어서, 찬송가 바꾸는 것을 보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있었던 한국 주요 교단들의 총회에서 ‘21세기 찬송가로 바꾼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뭘 또 바꾸냐?’고 하며 그대로 사용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조만간 우리 교회도 <개역개정> 성경과 <21세기 새 찬송가>로 바꾸게 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찬송을 부르고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요즘 새로 나온 경배와 찬양 곡들도 좋고, 오래 된 찬송가들도 좋습니다. 원래 ‘찬양’이란 것은 하나님께 ‘하나님, 참 위대한 분이십니다.’라는 식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칭찬하며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찬송가에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아닌 곡들도 많습니다. 특히 인생의 괴로움을 호소하는 탄식조의 곡들이 굉장히 많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474장을 보면 이렇습니다. “1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2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 3 이 세상에 죄악 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 / 1 내 주 예수 날 오라 부르시니, 2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시오니, 3 내 주 예수 날 건져주시오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 실제로 “죽을 일 쌓였구나”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너무 괴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평안히 쉬리로다”라는 식으로, 믿음의 고백을 하며 끝이 납니다.
487장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2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3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우리 주께 맡기세.” 363장에서는,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라고 노래합니다.
이런 찬송가들을 보면, 세상에서는 어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근심과 걱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산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실제로 인생에는, 옛날이든 지금이든, 어느 나라이든, 어느 사회이든, 누구나 영적 짐들, 정신적 짐들, 육체적 질병과 고통, 생계에 대한 부담, 교회적 짐들, 사회적 짐들, 관계들로부터 오는 무거운 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의 시편에 나오는 시들의 상당수가 탄식 또는 탄원 시입니다. 인간은 질병, 고통, 소외, 죽음과 같은 비극적 일이 닥칠 때 탄식합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걱정하며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오히려 하늘의 평안을 노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찬송가 가사들이 삶에 닥친 어려움 때문에 괴롭다고 호소하지만, 그냥 괴롭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는 반드시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는다고 하거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시편 기자들도, 자신의 괴로움을 주님께 아뢰고, 결국은 주님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 찬송가들 중 대표적인 찬송이 바로 470장입니다. 개인의 처절한 신앙고백이 그 찬송가의 내용에 들어가 있는 것이 보입니다. 우리 한글 번역에는 정확하게 번역되지 않았지만, 1절에 이런 고백이 들어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슬픔이 큰 풍파처럼 소용돌이 쳐 밀어닥치든지
하늘이 내게 준 삶의 몫이 어떠하든지
주님은 내게 이렇게 말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평안해, 평안해, 내 영혼!
이 땅에 살면서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인생의 위기가 있습니다. 불치병으로 고통 받으며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경우, 경제적 파산으로 죽음의 위기에 몰린 경우, 십대 자녀의 탈선으로 수많은 밤을 애타게 보내는 부모의 경우, 너무나 바라고 원하던 일이 되지 않아 좌절에 빠지는 경우 등등, 참 많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찬송가의 가사처럼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라고 노래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믿음을 고백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찬송가의 작사자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를 분명히 밝히는데, 한글 번역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영어 원문에는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말입니까. ‘내가 너를 붙들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나는 그 가르침에 순종하고 그것을 의지하여 “괜찮아, 괜찮아, 내 영혼아!”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샬롬으로 가기 위해 거치는 광야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걱정, 근심 없이 편안하게 살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노아,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와 라헬, 요셉, 모세, 여호수아 등, 그들의 삶을 살펴보면 언제나 걱정과 근심이 끊이지 않을 만한 여건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평안과 걱정이 언제나 같이 있습니다. 평안하다가도 걱정스럽고, 걱정스럽다가도 평안합니다. 삶은 늘 그런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삶에 어려움이 생기면 걱정하게 되고, 아무 일 없이 잘 지내면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럴 때의 평안은 진정한 평화(peace)라기보다는, 무탈 또는 안녕(well-being)이라는 개념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샬롬’은 단순히 문제가 없고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소극적 개념이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뜻에 맞추어 움직일 때 찾아오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그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의 대가이기도 합니다. 열심히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안(히브리어로 샬롬)은 그 뜻이 아주 넓습니다. 영육 간에 강건할 때, 나라가 강성하고 번영할 때, 온 세계가 평온할 때,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성실하게 수행할 때, 그럴 때 오는 풍요와 번영과 즐거움을 가리켜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거기에는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는 진정한 평안과 자유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험한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예로 살고 있던 당신의 백성들이 고통 중에 부르짖는 것을 들으시고, 모세를 통하여 이집트로부터 그들을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그들을 바로 가나안을 향해 인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광야 길로 인도하십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17-18절)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다가 이제 막 그 나라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지도자 모세가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큰 길로 자기들을 인도해줄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블레셋 사람들의 길(The Way of the Philistines)’이라고 불리는 대로가 있었습니다. 이 길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난 150마일 정도의 길로,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로 주변에는 먹을 양식과 물이 풍부했습니다. 이 길은 당시 국제무역을 하던 대상(caravan)들이 다녔던 길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만일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길로 갔었다면, 불과 몇 주 만에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쉬운 지름길 대신, 하나님은 광야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이 그대로 가나안을 향해 가게 하지 않으시고 홍해를 향해 나아가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다를 가르는 기적을 일으키셔서 그들이 갈라진 바다의 마른 땅을 건너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홍해의 기적을 체험한 다음에도 직접 가나안을 향해 가도록 하지 않으시고 남쪽 광야 길로 인도하십니다(15:22).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로 내몰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남쪽 길이란 시내 광야, 사막으로 들어가는 방향이었습니다. 거기는 물도 없고 먹을 양식도 없는 곳입니다. 무장한 베두인 유목민들이 사막을 지나는 행인들을 강탈하는 일이 흔히 일어났던 곳입니다. 그러니까 광야라는 곳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끊임없이 염려할 수밖에 없는 그런 곳입니다. 정말 죽음이 바로 앞에 와 있는 그런 장소가 광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 나와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정말로 무엇을 뜻하는지 온몸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 학교에 입학시켜 신앙의 걸음마부터 배우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생존을 위한 모든 기본 조건들, 즉 먹고 사는 문제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롭게 배우는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이며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광야 생활 동안 계속해서 하늘과 땅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생히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평안을 얻고 참된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은 결코 모든 일이 잘 되어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잘되고 있으면 오히려 불안해지지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광야 생활을 통해, 극심한 어려움을 통해, 그 길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체험을 하게 될 때, 그것이야말로 모든 염려와 근심에서 진정으로 자유롭게 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21-22절)
여러분, 하나님이 얼마나 자상한 분이신지 모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구름기둥과 불기둥 순서를 바꾸셨다면 어땠겠습니까? 낮에는 불기둥이었다면 다 뜨거워서 죽는 겁니다. 밤에는 구름기둥이었다면 다 얼어 죽는 겁니다. 그런데 너무나 적절하게, 낮에는 사막의 그 뜨거운 열기를 막아주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사막의 그 한기를 막아주는 불기둥으로 함께 해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가장 적절하게 인도해주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은 좋은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최악의 상황에서, 가장 극심한 고통 중에서, 우리는 참 평안을 맛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늘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좀 어려우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끊임없이 애굽을 그리워합니다. 거기서 먹던 음식의 종류를 메뉴처럼 줄줄 외우면서 거기 있을 때가 좋았다고 말합니다. 정말입니까? 정말 애굽이 좋았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물질적 풍요가 있었더라도, 아무리 먹을 것이 종류별로 넘쳤더라도,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노예였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그곳이 좋았어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없었습니다. 거기에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정말 힘들고 죽을 수도 있는 광야에 나와서야, 그들은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늘 함께 해주신다는 사실을 생생히 보게 되었습니다.
2. 아주 가까이 있는 약속의 땅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는 쉽지 않습니다. 아주 위험한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남쪽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곧 죽으러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광야 사막으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왜 이리로 가지? 뭔가 잘못되었는데?’
사실 출애굽 한 직후 그들은 거리적으로 약속의 땅에서 아주 가까이 있었습니다. 불과 몇 주 정도만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망원경으로도 보이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약속의 땅은 아주 가까이, 분명히 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그와 같이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원하고 꿈꾸는 것들은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바라고 꿈꾸는 곳에 빨리 이르기를 원합니다. 좋은 직장, 번듯한 사업체, 건강, 사회적 성공, 좋은 인간관계, 물질의 풍요로움 등, 그러한 약속의 땅에 쉽게 이르기를 원하며 살아갑니다. 또 자녀가 잘 자라고 공부도 잘하고 좋은 학교에 가기를 원하고, 가정에는 아무 걱정이 없는 그런 약속의 땅에 이르는 것이 우리가 꿈꾸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꿈은 분명하고, 가기를 원하는 곳이 어디인지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우리의 인생은 남쪽 광야 길로 방향을 틀고 있습니다. ‘아, 이게 아닌데. 어어, 방향이 이쪽이 아닌데.’ 그러면서 자기가 원하던 길과는 전혀 다른 데로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직접 인도하지 않으시고, 종종 그렇게 힘들고 위험한 광야 길로 인도하십니까?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비록 그렇게 험한 광야 길이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계속해서 따라간다면, 반드시 놀랍고 위대한 일들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놀랍고 위대한 일들은 오직 힘들고 위험한 길인 광야에서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힘들고 위험한 광야 길에서만 발견되는 놀랍고 위대한 일들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변화입니다. 그 위험한 광야 속에서 자신이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겉으로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안에서부터 바뀌어버리는 Transformation,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어디에서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바로 광야 길, 위험한 길, 힘든 길에서만 발견됩니다.
어디서 본 것인데 참 말이 됩니다. 우리가 운전하다 길을 잘못 들어 울퉁불퉁한 갓길로 가면 그 갓길이야 말로 ‘갓(God) 길’이라는 말입니다. 광야는 약속의 땅에 대해 그저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도망 나온 백성이, 그 길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배우며 신앙의 백성으로 변화되는 곳입니다. 그것만이 참 평안과 안식과 자유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로 이 비결을 깨달은 어떤 분은 이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 주를 더욱 의지합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뿐일세. 아무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합니다.” (342장)
직장에서 너무 힘들어서, 생계문제만 아니라면 언제라도 때려치우고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 불평하기보다는 감사해야 할 것은, 그곳이 바로 나의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사업이 너무 안 되어서 고민될 때도 불평보다는 감사해야 할 것은, 그곳이 나의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꼬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노예처럼 매여 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기보다 감사해야 하는 것은, 그곳이 나의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말을 안 듣고 일이 잘 안 풀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그곳이 나의 광야입니다.
우리는 그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광야에서 놀랍고 위대한 일들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나 자신의 변화입니다.
애굽의 문화와 잔재를 모두 털어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배우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진정한 안식,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우리가 무엇에 노예처럼 얽매였을 때, 그분이 우리를 ‘발견’하심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신음 소리와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우리를 구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출애굽기가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또한 바로 그것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일을 시작하셨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십자가는 진정한 자유와 평안으로의 부르심입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크리스천들은 십자가를 사랑하고, 너무 사랑해서 목걸이로 귀고리로 걸고 다니는 것이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크리스천들은 매 주일 십자가 밑에 모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자유와 평안을 상징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자유와 평안을 주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3. 하나님과 함께하는 여정
이 광야 길을 걸어가면서 우리는 자유와 평안에 이르는 길이 무섭고 두렵고 수많은 위험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막과 광야에는 무서운 독사들과 전갈들과 들짐승들이 숨어있는 곳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우리가 끈으로 묶어둘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또한 그분의 임재가 항상 분명하게 보이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광야 여정은 언제나 힘들고 고단합니다.
광야 여정에서 우리는 좀 더 다루기 쉽고 언제라도 부르면 올 수 있는 다른 신들이나 우상들을 찾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받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출애굽 후 광야 시절에 있었던 비극적 ‘황금송아지’ 사건이 그 예가 됩니다.
그러나 모든 우상은 우리를 다시 노예 상태로 끌어갑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 생각했던 우상들은 결국 우리를 속박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십계명을 이렇게 시작하십니다. “너희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그리고 그 다음은 “우상을 만들지도 섬기지도 말라”입니다.
우리를 속였던 우상들을 내버리라는 것입니다. 어떤 우상들입니까? 많이 있으면서도 “하나만 더 사!”라고 외치는 것, “우리 자신을 개발하는 프로그램을 바쁘지만 하나만 더 해봐!”라는 것, “한 번만 더 승진해봐” “어려운 날을 위해 돈 한 푼이라도 더 쌓아야 해.” 이렇게 아우성치는 우상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여러 해 동안 섬겼지만 결코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던 우상들입니다. 우상들은 우리에게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다시 애굽으로 데리고 가서 다시 노예 생활을 하게 한 것입니다.
[나가는 말]
“내 영혼 평안해!” 이런 멋진 고백을 한 그에게는 정말 슬픈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호레이시오 게이츠 스패포드(Horatio Gates Spafford)입니다. 시카고의 변호사였는데, 아주 부지런히 일하여 그곳에서 많은 재산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1871년 시카고에 대(大)화재가 발생하여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는 시카고 시의 복구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합니다. 가난한 사람, 집을 잃은 사람들을 구제하였고 다친 사람들의 재활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해에 그는 급성 전염성 피부 질환인 성홍열(scarlet fever, 猩紅熱)로 첫아들(1남 4녀 중)을 잃게 됩니다.
첫아들과 재산을 잃은 호레시오 스패포드는, 2년 후인 1873년 추운 겨울 11월에 아내와 남은 네 딸을 데리고 영국으로 가기로 작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시카고에 급히 처리할 일이 생겨 아내와 네 딸만 먼저 보내고 자신은 나중에 합류하기로 합니다. 아내와 네 딸들은 대형 프랑스 여객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먼저 영국으로 갑니다. 그러나 배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급한 전보 한 장이 날아왔습니다. 아내 애나(Anna)에게서 온 전보였습니다. 여객선이 바다 한가운데서 대형 화물선과 충돌하여 바다에 침몰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대형 사고로 딸 넷은 모두 죽었고 자기 홀로 살아남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애나의 전보에는 이렇게 단 두 마디만 적혀있었습니다. “Saved Alone.”(혼자만 구출되었음)
사고가 난 지 한 달 후 그와 아내는 다시 배를 타고 영국으로 갑니다. 항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장은 기내 방송을 통해, 지금 한 달 전에 사고가 난 바로 그 지역을 지나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날 밤 스패포드는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찾아온 불행과 재앙들, 잃어버린 다섯 어린 자녀들 생각에 밤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의 마음 속 깊은 곳 어디선가 말로 다할 수 없는 평안,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확신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내 영혼 평안하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런 고백이 입속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강한 기도였고 놀라운 고백이었습니다. 두 손을 불끈 쥐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 영혼아, 괜찮아. 괜찮아, 내 영혼!”
이 부부는 3년 뒤인 1876년에 다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도 4살이 되어 죽었습니다. 2년 후인 1878년에 그들은 또 다른 아이를 낳게 되는데, 이 아이가 자라서 후에 이 모든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 것입니다.
호레시오와 그의 아내 애나는 모두 6명의 자녀를 잃었습니다. 그러고도 그들은 계속해서 “내 영혼 평안해, 평안해! (It is well with my soul.)”라고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눈물겹고 장엄한 간증입니까! 1876년에 블리스(P. P. Bliss)라는 사람은 이 구절에 곡을 붙였으며, 그 후로 전 세계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고 부르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어느 경건한 크리스천 할머니는 딸에게 자신의 장례식에 이 찬송을 꼭 불러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나머지 절들을 직접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삼킨다 해도 수많은 고난이 닥친다 해도
우리에겐 흔들리지 않는 복된 확신이 있도다.
내가 애쓴다 해도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오, 내 죄여, 아니, 이 얼마나 영광스런 생각인가!
내 모든 죄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나 더 이상 짊어지지 않으리!
주님을 찬양하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라!
주님, 주님 오시는 날 급히 이를 때,
구름이 두루마리처럼 공중에 펴질 때,
트럼펫 소리 울리며 주님 강림하실 때,
그때에도 - 내 영혼 평안해!
환난과 고통 중에서 두 손을 불끈 쥐고 평안을 노래하는 이 찬송과 같은 고백들이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의 고백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크리스천의 자유는 “~로부터의 자유”를 넘어 “~를 향한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렇게도 우리가 자유롭게 되어 평안을 누리기를 바라십니까? 단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자유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바로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참된 평안이 어디 있나?”라고 자주 질문합니다. 우리 삶에는 늘 근심과 걱정이 밀물처럼 들어옵니다. 때로는 그것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옵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근심, 걱정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아울러 불평과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때로는 허망한 우상들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광야 길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기로 선택함으로, 하나님 안에서의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