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칠 년 전 삶의 터를 잡아 살고 있던 곳을 찾아갔다. 경북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다. 그 때 나는 산성중학교의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인근의 다른 학교에 근무하다가 앞으로의 신분 변화에 도움이 될까하여 벽지 학교인 이 학교 근무를 자원하여 찾아왔었다. 면 전체의 인구가 천오백 명이 채 되지 않고, 학교의 전체 학생 수가 백 명도 되지 않은 궁벽한 산골 동네의 조그만 학교였다.
이 학교가 근년에 들어 아이들이 다 없어지고 폐교가 되어, 그 자리에 ‘추억박물관‘이 들어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추억박물관이란 무엇을 보여주는 곳인가도 궁금하고, 가버린 세월 속의 일들이 그립기도 하여, 어느 날 산을 넘고 굽이진 길을 돌아 허위허위 달려갔다.
그 마을, 그 학교를 향하여 달려가는 동안 지난날의 일들이 파노라마가 되어 머릿속을 분주하게 흘러갔다. 내가 부임하던 첫 해엔 3학년만 두 학급이고, 1,2학년은 한 학급씩이었는데, 한 반에 겨우 스무 명이 될까 말까한 아이들이 시간이 흐르고 해가 바뀔수록 자꾸 줄어 갔다. 대처로 유학을 갈 형편이 안 되는 집안의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마을의 순박한 지세(地勢)를 닮은 탓인지 아이들의 심성은 하나같이 순하고 착했다.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큰소리 한번 내본 기억이 없다. 성적이 열등하거나 불우한 처지의 아이들이 있긴 했지만, 그 아이들이 학교를 잘 안 나오거나, 말을 안 들어 속을 썩인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아이들과 생활하고 있을 즈음 어느 신문사에서 ‘교단에서’라는 칼럼을 집필해 달라고 의뢰가 왔다. 첫 칼럼으로 ‘작은 학교의 큰 즐거움’이라 하여, 아이들이 자꾸 도시로 빠져 나가 점점 작아지고 있는 학교지만, 그 속에서 참 순박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생활의 즐거움에 대해 썼었다. 고단한 벽촌 살림이 싫어 부모들이 오히려 집을 떠나버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착하게 살고 있는 ‘벽지 아이들’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부모의 무지와 일탈에 빠진 생활로 간난과 고초 속을 헤매고 있는 어떤 아이의 사연을 쓰기도 했고, 그 글을 읽은 상주 어느 절의 스님이 학교로 찾아와 자기의 신원은 밝히지 말라면서 그 아이를 위한 성금을 주고 간 사실을 소개하기도 했다.
아이들의 그런 모습과 사연에 젖는 사이에 차는 화본 마을에 들어섰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2차선 좁다란 길은 예나 지금이나 인적이 드물어 고요에 잠겼는데, 길갓집 담 벽에는, 울긋불긋 낯선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인각사(麟角寺)와 가까운 고장이라고, 삼국유사 속의 설화를 소재로 한 그림들인 것 같았다. 스님의 초상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화본역에 이르렀다. 학교 사택에 기거하고 있다가 가끔씩 대구의 집을 오갈 때 기차를 타고 내리기도 했던 조그만 간이역이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역전상회’에는 세월의 더께가 두텁게 끼었는데, 역사(驛舍)는 오히려 말끔히 단장되어 드문 승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하행선 완행열차가 하루에 서너 편씩 지날 뿐이라는, 한산하기 그지없지 없는 플랫폼에는 ‘산모롱 굽이굽이 돌아/ 돌아누운 낮달 따라 가네/ 낮달 따라 꽃 진 자리 찾아 가네’라 노래한 박해수 시인의 ‘화본역’ 시비가 찬바람 굴러가는 철길을 외로이 지키고 있었다.
역을 지나 학교에 이른다. 가풀막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교문과 교패는 여전하건만 운동장에 아이들은 보이지 않고, “1954년4월20일 개교하여 3,094명을 배출하고 2009년3월1일 폐교되었다.”는 사실을 새긴 교적비만이 황량한 바람을 맞으며 을씨년스럽게 서있었다.
교사(校舍) 쪽을 바라보니, 1,2층 예닐곱 칸 교실은 그대로인데, 교실 창을 막은 자리에 아이들의 커다란 얼굴이며 기차가 들고나는 역두의 풍경을 담은 벽화가 그려져 있고, 현관 머리에는 ‘추억의 시간 여행, 엄마 아빠 어릴 적에는…’이라 새긴 커다란 간판이 덩그렇게 달려 있었다.
현관을 들어서니 안내원이 계단 길을 막아 만든 방에서 2,000원 입장권을 팔고 있었다. 이 폐교지에 누구의 생각으로 왜 이런 것을 만들려 했는지는 모를 일이나, 군(郡)에서 운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니 반짝이는 눈망울의 착한 아이들도, 그 아이들이 재잘대며 놀던 모습들도 보이지 않고, 1950~60년대 궁핍했던 시절의 온갖 문물들이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릴 적 즐겨 먹던 사탕이 즐비한 구멍가게도 있고, 벽에는 빛바랜 선거 포스터며, 흘러간 영화 광고지가 붙어 있다. 골목길을 따라 드니 앉은뱅이책상이 놓여 있는 좁다란 공부방도 보이고, 한가로운 시골 이발소, 코흘리개들이 즐겨 찾던 문방구점, 빙설 기계 들이 옛 시절을 생각나게 했다. 지난날의 교실 모습으로 다시 꾸며 놓은 곳엔 나지막한 책걸상과 도시락이 층층이 쌓인 갈탄 난로가 있고, 누렇게 바랜 상장이며, 졸업장, 앨범이 진열되어 있었다. 교무실이며 서무실이 있었던 곳엔 옛날식 다방이 들어앉아 있고, 그 옆엔 자주색 포니 자동차와 지금은 때 묻은 기억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소박한 생활 소품들이 그 옛날의 지난한 삶을 돌아보게 했다.
이런 곳, 이런 것이 바로 지난날의 추억에 젖게 하는 ‘추억박물관’이로구나, 여기며 전시장을 나오다가 안내원에게 ‘이런 추억거리들을 어떻게 다 모았느냐?’고 물으니,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경기도 어디에 가서 사왔다.’고 당연한 듯 말한다. 그런 것을 전문적으로 수집해서 파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아, 추억도 팔고 살 수 있는 것이구나, 모르고 있던 것을 깨우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면서 가벼운 절망이 유성처럼 지나갔다.
작은 학교지만 큰 즐거움을 느끼게 했던 착한 아이들이 사라져간 교실에 그 아이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매매한 어른들의 추억이 들어 앉아 있는 추억박물관-. 이 교실을 두고 떠난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슨 추억에 잠기고 있을까.
그 아이들이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며, 그 그리움이 묻혀 있는 모교를 찾아오는 날이 있다면, 저희들 삶 속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낯선 추억들이 자리 잡고 있는 교실을 보면서 또 어떤 추억에 잠길까?
오늘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을 두고도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할 수 있을까. 어찌하였거나, 또 하나 ‘화본리의 추억’을 내 기억 창고 속에 담아 간다고 생각하며 전시장을 나서는데, 운동장 가장자리에 울부짖듯 펄럭이고 있는 기다란 플래카드가 보였다.
‘허수아비 만들기 체험장’이라 적힌 플래카드 아래에 남루한 옷을 걸친 허수아비들이 울타리에 힘겹게 기대서서 앙상한 나뭇가지를 울리며 황망히 불어오는 찬바람에 돌돌 소름을 돋우고 있었다. ♣(2011.12.17.) |
첫댓글 착한 아이들을 품었던 착한 학교의 추억이 참 정겹게 다가옵니다.
추억도 사고 팔 수 있는 현실에 참 마음이 허망하셨을 모습이
커다란 아쉬움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옛 근무지를
찾으셨던 설레는 마음은 예전과 다름없으셨겠지요?
선생님의 좋은 추억 구경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예, 추억을 찾아 갔다가, 또 추억 하나 얻어 왔습니다.
사는 일이란 추억을 쌓아가는 일인 것 같습니다.
찾아 주시고 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