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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성으로 피하라(민수기 35:9-15)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성 때문에 일시적으로 허용
하신 제도가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그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허용을 하시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진적
으로 폐지하신 제도입니다. 하나는 유대인 족장들의 일부다처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는 에덴에서 분명히 일부일처제 제도를 제정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 족장들에게
일부다처제를 허용하신 것은 인간의 죄성 때문에 일시적으로, 잠정적으로 허락하신 것
이지 하나님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두 번째는 피에 의한 복수 제도입니다. 옛날에는 오늘날처럼 경찰제도가 없었습니다.
검사도 없고 판사제도도 제대로 정립이 안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국가가 질서 있
게 조사를 하고, 재판을 하며, 형을 집행하는 제도를 갖출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
문에 이스라엘에는 ‘친족 무르기’ 혹은 ‘기업 무르기’라고 하는 제도가 있었습니
다. 이는 국가의 제도가 미비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가족을 보호하고 공의를 시행하는
제도였습니다. 친족 무르기라 하는 것은 가장 가까운 친족이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을 당했을 때에 그 친족을 도와서 원상을 회복시키는 제도입니다.
친족 무르기는 대체로 네 가지 경우에 적용되었습니다. 첫째로 친족이 빚에 몰려서 노
예로 팔렸으면 가까운 친족이 그 빚을 청산해주고 노예에서 해방해주는 경우였습니
다. 이때에 그 노예를 산 사람은 “나는 돈을 받지 않고 이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겠
다”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로 친족이 빚에 몰려서 땅을 팔았을 때, 그 가까
운 친족이 빚을 갚아주고 땅을 원상태로 회복시켜 주는 경우입니다. 첫째의 경우처럼
그 땅을 산 사람도 “나는 이 땅 다시 팔지 않겠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셋째로
친족이 후손이 없이 죽은 경우 죽은 친족의 아내를 취해서 자손을 낳고 그 중 첫 아들
을 죽은 후손의 대를 잇도록 하는 경우입니다. 이를 소위 계대결혼(繼代結婚)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신명기 25장 5-6절까지를 보면 형님이 결혼을 했는데 죽어서 아내
가 혼자되었을 경우, 아우가 형수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자식을 낳아 그 맏아들을 형
님의 아들로 입적시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넷째로 친족이 살인자에 의해 죽었을
때, 가까운 친족이 복수를 해주는 경우입니다. 이 사람을 ‘피를 보수(報讎)하는 자’
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보수보다는 복수라는 단어가 이해가 더 쉽습니다. 우리가 흔
히 원수를 갚는다고 할 때에 ‘복수한다’는 표현을 쓰지만 영어에서는 ‘revenge’라
는 단어와 ‘avenge’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개념을 명확히 구분합니다. 감정을 가지
고 사람에게 복수한다는 표현은 ‘revenge'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감정을 가지고 복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피를 흘렸기 때문에 동일하게 피를 흘려서 공의를 시행한
다고 할 때에는 ‘avenge’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피를 보수하는 자’
는 ‘avenge’의 의미에서 원수를 갚아주는 것입니다.
살인자를 죽이는 것은 생명을 경시하고자하는 의도가 아닙니다. 어떤 분은 사형 제도
가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므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성경에서 살인자
를 죽이라고 명하는 것은 생명을 경시하는 의도가 아니라 도리어 생명을 존중하고 무
죄한 피를 흘림으로써 더러워진 땅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민수기 35장 33절
에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사람이 억울하게 죽
어서 피가 흘려지면 그 땅이 더럽혀진 것입니다. 더럽혀진 땅은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살인한 사람의 피를 반드시 흘려야 그 땅이 깨
끗하게 되고, 공의가 회복되며, 생명존중 사상이 확립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에
는 개인이 복수하고 피를 흘리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국가가 제도화되어
서 사법제도를 가지고 이를 시행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니 가까운 친족이 복수
하라고 되어있다. 그러므로 내가 우리 친족의 억울함을 복수해야 되겠다”고 말하지
마세요. 이것은 그 옛날 국가 제도가 미비한 시대에 하나님의 자구책이었다는 것을 우
리는 먼저 이해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을 살인했다고 할지라도 모두 똑같은 동기와 목적으로
살인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기업을 무를 수 있는 자, 즉 보수하는 자가 죽일 수
있는 대상은 고의적으로 살인을 한 살인자입니다. 고의성을 가지고 사람을 죽인 경우
에만 보수하는 자는 그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민수기 35장 31절에도 살인죄를 범한
고살자의 경우에는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의도가 없이 과실로 사람을 죽인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과실치사도 죄는 죄
입니다만 그런 경우에는 고의적으로 죽이는 경우와 달리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
다. 예를 들면 신명기 19장 5절에 기록된 것처럼 산에서 벌목을 하는 도중 그만 도끼
가 자루에서 빠지는 바람에 이웃이 죽게 된 경우입니다. 물론 기업 무르는 친족, 즉
피를 보수하는 사람은 고살자(故殺者)이건 과실치사자(過失致死者)이건 가리지 않고
복수하고 싶을 것입니다. 아무리 과실 일지라도 사람이 죽었는데 가해자에게 원수를
갚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원시적인 사법제도 하에서라고 할지
라도 과실치사자는 보호하는 제도를 두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도피성 제도입니다. 오
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도피성 제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리고 도피성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도피성 제도
하나님께서 도피성을 두신 목적은 본문 11-12절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를 위
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그릇 살인한 자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 이는 너희가 보
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
게 하기 위함이니라” 도피성은 어떤 사람이 그릇 살인하거나 우연히 사람을 죽인 경
우에 재판을 받을 때까지 생명을 보호받기 위해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던 것입니다. 살인자가 도피성에 오면 이스라엘의 장로와 회중들이
그 살인자를 놓고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판사 한 사람이 재판
을 하지 않았습니다. 장로와 회중들이 모여 배심원단을 형성을 한 후, 그 사건을 듣고
서 판결을 내렸습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사법제도에도 배심원 제도를 도
입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판사의 판결을 100%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배심원 제도를 시행하는 미국은 판사 혼자서 재판을 하지 않습니다. 배심
원들이 사건을 자세히 듣고 결정하는 대로 판사가 재판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장로와 회중들이 배심원이 되어서 살인사건을 재판을 할 때에도 아무런 기
준 없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의적인 살인자인지, 과실치사자인지에 대한 재판의 기
준이 분명히 제시되었습니다. “만일 철 연장으로 사람을 쳐 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
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만일 사람을 죽일만한 돌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 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만일 사람을 죽일만한
나무 연장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 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니라”(35:16) “피를 보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친히 죽일 것이니 그를 만나거
든 죽일 것이요, 만일 미워하는 까닭에 밀쳐 죽이거나 기회를 엿보아 무엇을 던져 죽
이거나 원한으로 인하여 손으로 쳐 죽이면 그 친 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니 이는 고살
하였음이라. 피를 보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니라”(35:19-21)고
했습니다. 고살의 기준은 손에 철 연장이나 돌, 나무 연장을 들었을 경우, 혹은 맨손
이더라도 미움이나 원한을 가지고 있어서 밀치거나 무엇을 던져 죽였을 경우입니다.
그런 사람은 도피성으로 들어오더라도 재판을 거쳐서 유죄판결이 나면 피를 보수하는
자에게 그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지금은 국가가 사형을 집행하지만 옛날에는 국가에
그런 제도가 미비했기 때문에 피를 보수하는 자, 즉 죽은 사람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에게 사형을 집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22-25절을 보십시오. “원한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
이 무엇을 던지거나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만한 돌을 던져서 죽였다 하자. 이는 원
한도 없고 해하려한 것도 아닌즉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보수하는 자 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
려보낼 것이요” 사람이 원한이 없거나 우연히 기회를 엿봄이 없이 살해를 했다는 것
은 그냥 장난으로 돌을 던졌는데 사람이 맞아 죽었다 이런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고살이 아니기 때문에 도피성 안으로 돌려보내서 도피성 안에서 살도록 한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도피성 안에 사는 것도 일종의 형벌입니다. 다른 곳으로 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금고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다른 곳으로 나갔다가 피를 보수하는 자
가 그를 만나서 죽여도 죄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이 사람은 도피성 안에서만 살아
야 하는 것입니다. 도피성 안에서 살게 되면 가족도 만날 수 없고, 사업을 운영할 수
도 없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으니까 안전할지라도 형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
로 과실치사도 죄가 되기는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도피성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할까요? 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대제사장
이 죽기까지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 사건이 일어날 때의 대제사장이 살아있는데
그 분이 일 년 만에 돌아가시면 일 년 만에 도피성에서 해방이 되고, 그 대제사장이
30년 후에 돌아가시면 삼십년 동안 도피성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 도피성 안
에 있는 사람의 소원은 ‘대제사장님이 빨리 돌아가게 해 주옵소서’가 아닐까 싶습니
다. 그렇다면 대제사장이 죽어야 도피성 안에 있는 사람이 해방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
일까요? 이것은 과실치사도 죄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피가 흘려지고, 그가 죽고 난
후에야 속죄가 된다는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져야 도피성 안에 있는 사람도 해방이 된다는 복음입니다. 대제사장이 죽고
난 후에는 도피성에서 나와서 고향으로 돌아가도 아무도 그를 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
바로 도피성 제도입니다.
이 도피성은 네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도피성은 레위 지파의 성읍입니
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에 열 두 지파에게 땅을 나눠줬습니다. 그러나
레위 지파에게는 땅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큰 땅을 배분받은 사람은 많이 내놓고 적게 받은 사람은 적게 내놓고 해
서 마흔 여덟 개의 성읍을 레위 지파의 성읍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읍 사
방 이천규빗의 들판도 레위 지파 사람들의 가축을 먹일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이
마흔 여덟 개의 성읍 가운데 여섯 개의 성읍을 하나님께서 도피성으로 지정하셨습니
다. 요단강 동편에 세 개, 그리고 요단강 서편에 세 개입니다. 그러므로 이 도피성은
원래 제사장의 성읍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억울한
사람들을 돌봐주도록 지시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에는 상심한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 낙심한 사람들, 죄로 말미암아 고
통당한 사람들이 몰려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새 힘
을 얻어 해방 받고 구원의 은총을 체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도피성 제도는
실수로 사람을 죽인 억울한 사람들을 제사장들이 보호해주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둘째로 도피성은 접근하기 쉬운 곳에 설치하도록 했습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쉽게 접
근할 수 있는 곳에 도피성을 마련하셨습니다. 신명기 19장 3절과 6절에 도피성으로 가
는 도로를 잘 닦아놓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중간에 강이 있으면 다리도 놓으라고 하
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겨울이 지나면 도로가 망가질 수 있기 때문에 봄이 되면 장로
들이 돌아보고 그 망가진 곳은 다 고치도록 했습니다. 만약 삼거리가 나오게 되면 삼
거리에 큰 표시를 해두어서 도피성이 어느 방향인지 정확하게 표시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가는 길이 멀지 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 도피성이 있는데 중강
진에 있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러면 부산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중강진까지 도망하다
가 그만 가기도 전에 피를 보수하는 사람의 손에 잡혀서 죽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
문에 최소한 하룻길만 가면, 혹은 반나절만 가면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도피성문은 24시간 항상 열어놓아서 언제라도 누구든지 바
로 바로 들어올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실수로 살인을 했는데 뒤에서
보수하는 자가 망치를 들고 쫓아온다고 생각해보세요. 간신히 도피성에 도착했는데 문
이 닫혀있다면 그만 도피성 문 앞에서 죽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문을 언제나 열어
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도피성 제도를 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마
음 깊이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셋째로 도피성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도 이용할 수 있도
록 했습니다.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자
의 도피성이 되리니 무릇 그릇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35:15)고 기
록되었습니다. 도피성을 이용하는 데는 민족의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도 들
어갈 수 있고 이방인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넷째로 도피성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셔서 안전을 보장해 주시는 곳입니다. 도피성이 안
전한 이유는 담이 높아서나 땅이 높아서가 아닙니다. 도피성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손대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안전한 것입니다.
2. 도피성의 영적인 의미
도피성은 과실치사범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의미만을 가지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영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도피성의 영적인 의미는 분명합니다. 죄인들이 피하
여 구원받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입
니다. 도피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라고 하는 증거가 성경에 있을까요? 물론 ‘도
피성은 예수님이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한 구절은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 보면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히 6:18)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를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
는 사람들, 즉 지금 도피성으로 피하여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로 표현하였습니다. 다윗
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
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삼하 22:3)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 즉 나의 도
피성이라고 노래했습니다.
물론 도피성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도피성은 과실치
사자만을 보호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께 피하는 자들의 현재, 과거, 미래의 모
든 죄를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용서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도피성이시지만 구약
시대의 도피성보다도 더 우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 됩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마음에 평강
이 없기 마련입니다. 율법이 보수자가 되어 죄인들을 쫓기 때문입니다. “야! 너 죄
지었지? 살인했지? 간음했지? 도적질 했지?”하면서 따라옵니다. 뿐만 아니라 마귀도
쫓아옵니다. “너는 내 종인데 어딜 가려고 하느냐?”고 하며 쫓아옵니다. 율법이 쫓
아오는 사람에게는 참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
한 도피성이 되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한나절 거리에 있는 도피성으로 들어갔지만 이제는 누구든지 “주 예수여!
내가 죄로 말미암아 마음에 평강이 없습니다.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구원하소서. 다윗
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기만 하면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
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줄 믿습니다. 그 곳에는 아무런 차별도 없습니다. 로마
서 10장 12절 말씀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차별이 없이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
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신 것입니다.
3. 어리석은 네 종류의 사람
어떤 한 사람이 고의가 없이 사람을 죽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보수하는 자,
즉 그 죽은 사람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지금 도끼를 들고 쫓아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만약 이 사람이 이렇게 행동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시겠
습니까? “내가 비록 살인은 저질렀지만 할 일도 많으니까 내일 도피성으로 가야 되겠
다. 오늘 집에 들러서 아내에게 인사도 하고, 친척들에게 인사도 하고, 그동안 먹고
싶었던 것도 좀 먹고 가야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이 사람은 집에서 식사하다가 도끼가 날아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첫째로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4장 25절에
나오는 총독 벨릭스가 바로 이런 어리석은 인물입니다. 바울에게 부활의 복음을 들은
총독 벨릭스가 바울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시방은 가라” 시방은 지금이라
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틈이 있으면 부를 테니 지금은 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로마 총독 벨릭스가 나중에 다시 바울을 불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 믿기를 주저하고 뒤로 미루십니까? 어떤 분들은 죽기 바로 직전에 믿
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기 5초전에 믿을 수 있을지 어떻게 확신합니까? 예
수 믿는 것을 뒤로 미루는 것은 도피성에 들어가야 될 사람이 우물쭈물하다가 보수하
는 자에게 결국은 생명을 빼앗기게 되는 어리석은 행동과 같은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
입니다.
둘째로 도피성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단 동편
에 세 개, 요단 서편에 세 개, 총합 여섯 개의 도피성을 분명히 만들어 놓으셨는데 도
피성이 없다고 하는 자도 진실로 어리석은 자요, 앉아서 죽겠다고 하는 사람에 불과
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해서 그대로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 때문에 양
심의 가책으로 고통받고 슬퍼한다고 해서 구원자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죄에
서 해방하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도피성이 아니라 엉뚱한 도시로 피하는 사람도 어리석
은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이 사람이 많다고 해서 그리로 가면 그는 보수하는 자의 손
에 죽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도피성으로
피해야 합니다. 그 도피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인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
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부처도 훌륭한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도피성이 아닙니다. 마호메
트도 탁월한 정치가이며 종교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호메트도 도피성은 아
닙니다. 공자와 맹자는 얼마나 탁월한 학자입니까? 공자와 맹자의 글을 읽으면 사람
이 어떻게 이렇게 지혜로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공자와 맹
자도 도피성은 아닙니다. 그리로 피하는 사람은 영원한 사망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도피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신 줄로 확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
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 이외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하는 종교 다원주의
를 이야기하지만,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도피성으로 피해봐야 아무 효력이 없는
것임을 확실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넷째로 죽을죄를 짓고도 죄를 부인하고, 심판을 부인하며, 하나님을 부인하며 희희낙
락하는 사람도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목에 칼이 들어왔는데도 “내가 무슨 죄
가 있습니까? 죄에 무슨 심판이 있습니까?”라고 말하며 술 마시며 즐기는 사람은 참
으로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여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말입니
다.
결 론
인간은 율법의 추격을 당하고 있는 죄인입니다. 율법은 계명을 들이대면서 우리를 쫓
아옵니다. 마귀도 옆에서 같이 쫓아옵니다. 그러나 이처럼 율법의 추격을 받고, 마귀
의 추격을 받고 있는 죄인들이여! 두려워하지 마시고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
로 들어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도피성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보수하
는 자가 죽일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영원한 사망, 지옥의 형벌을 조만간
에 당하게 될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가 장례를 여러 번 치렀습니다. 장례를 치르면서 느끼는 것은 예수님
을 믿고 돌아가신 분들이 천국 가셨다는 증거를 하나님께서 다 보여주셨다는 것입니
다. 어떤 성도님은 돌아가시기 3일 전쯤에 깨어나 평온한 모습으로 “천국에서 하나님
이 날 부르신다”고 간증 하시면서 평안하게 천국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래서 그 자손
들이 더욱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더욱 헌신하며 믿음으로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 것입니다.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육신이 사망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사망해서 지옥에서 영영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여러분들은 후에 하나님 앞에서 “나는 그런 소리 못 들
었습니다”라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서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행여
여러분이 지옥에 간다 해도 저는 여러분의 피에 대해 책임이 없습니다. 오늘 확실하
게 증거 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용서가 있고, 보호가 있고, 안전
이 있고, 돌보심이 있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도피성 안에 들
어와 있으면 벌벌 떨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두려워 할 건 아무 것도 없습
니다.
어떤 분이 하도 뱃멀미를 심하게 하니까 선장이 와서 위로를 합니다. “여보시오. 뱃
멀미하다가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소. 그러니 걱정 마시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성
질을 내면서 “그게 무슨 소리요? 나는 죽으면 천국 간다는 것을 소망하면서 그 소망
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당신이 나보고 죽지 않는다고 하니 그런 소리 마시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도리어 나의 소망이요”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도피성 안에 있기 때문에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살면 좋고, 죽어도 더 좋은 것입니
다.
예수 이외에 다른 도피성은 없습니다. 죄가 있어도, 근심이 있어도, 절망이 있어도 도
피성으로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죄가 있고, 평안이 있고, 소
망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도피성 되신 예수님 안에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도피성 바깥에 있는 사람들, 죄를 짓고도 지금 어디
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을 이끌어 도피성 안으로 인도하는 사명이 우
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