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신예찬의 저자 에라무스 >
1508-11년에 저술된 '우신 예찬'은 에라스무스가 이탈리아 여행으로부터 대륙을 거쳐 영국으로 가는 길에 착상했다. 40절로 구성된 그것의 1-7절은 우신의 계보 및 성격을 설명함으로써 풍자의 실마리를 끄집어 도출한다.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 {우신 예찬}의 전반부는 우신을 통한 인간 생활과 인간성의 본질을 파고든다. 후반부는 당시 중세 말의 일반 민중의 신앙 내용과 중세 교회 및 성직자, 군주 그리고 귀족 등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돌팔매를 맞을까 봐 집밖으로 나가기를 주저했던' {우신 예찬}이 당시의 지성계와 일반 대중에게 미친 영향은 이른바 미증유(未曾有)로 표현될 수 있다. 그것의 매진은 물론 각국어로 번역된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군주나 주교들이 다 같이 즐거워하고 심지어 교황 레오 10세도 이 책을 통독하고 매우 유쾌해 했을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적인 박해는 피할 수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고전 작품을 충분히 인용 . 참조하면서 매끄러운 풍자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주는 가치는 종교 개혁의 주동자들에게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는 데 있다기보다 하나의 지적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작품에 담긴 에라스무스의 개혁 사상은 대체로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중세 사회 일반의 신앙은 본질적인 것으로 환원되어야 하며 ② 스콜라 철학자들의 신학 해석이 번거롭고 형식화되고 말았고 ③ 수도 성직자들의 비종교적 생활은 비판받아야 하며 ④ 교황 및 그 밖의 정신계 지배층은 반성해야 한다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① 일반인의 신앙에 대한 비판: 일반적으로 중세 사람들의 신앙은 거의 미신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들은 파계에 대한 속죄(贖罪)와 게으른 의무에 대한 용서를 바라는 마음에서 성모나 성자에게 기도들 이는 것이 일반 신앙의 주된 것이었다. 더욱이 그러한 대중의 변질된 신앙에 대하여 교회측은 극히 타성적인 관례로 대했다. 성경의 주요 부분인 복음서나 사도 서간은 교회 미사 때 독송(讀訟)되는 정도였다. 에라스무스는 그러한 일반적인 비종교적인 풍조에 대하여 진정한 크리스트교도는 세례를 받았다거나 도유되었다거나 교회에 가는 사람이라기보다도 마음 속 깊이 내적으로 그리스도를 느끼며 경건한 행위로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② 신학자들에 대한 비판: 에라스무스는 성서 해석 방식 및 스콜라 신학 체계를 비판했다. 에라스무스는 중세 신학자들이 장황한 정의와 결론을 조합하여 쓸데없는 논리적 형식을 중요시하였던 사실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당시의 신학자들은 마음대로 밀가루 반죽을 이기듯이 성경을 뜯어고치고 거기서 나온 그들의 결론만이 유일불가침의 것임을 인정하고 말솜씨거나 어휘 사용에까지 신경을 쓰고 섬세한 주의와 천착을 가한다는 것이다. 1517년 앤터워프(Antwerp)에서 당시의 저명한 신학자 카피토(Wolfgang F. Capito)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잊어버리고 말았어야 할, 관례적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그런 신학을 원치 않으며 나는 옛날의 진실한 학문에 접근함으로써 그것(신학)을 더욱 믿음직스럽고 더욱 정확한 것으로 만들기를 원합니다'가 바로 그것이다.
③ 수도 성직자층의 생활: 에라스무스는 당시의 휴머니스트들의 의견을 대표하여 탁발(托鉢) 수도 성직자들의 생활이 지니는 이중성 . 위선 등을 조소하여 신앙이 무엇인지 잘 모르면서 불결과 무지, 조야(粗野)와 파렴치를 간판으로 하여 스스로 사도티를 내는 계층이라고 통박(痛駁)하고 있다. 그는 이들의 이상야릇한 규칙이란 것은 구두끈 매듭이 몇 개다, 띠의 빛깔이 무엇이다, 옷 무늬가 무엇이다, 수면은 몇 시간이냐 하는 식으로 정해져있다고 주장했다. 즉 당시 성직자층이 형식에 얽매여 있어 신앙과 형식이 그 주객을 전도했다는 것이다.
그루니우스(Lumbert Grunninus)에게 보낸 서한에서 에라스무스는 수도원과 교단에서는 종교는 의식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며 젊은 청년은 속아서 이런 교단에 입적하게 된다고 말하고 계속하여 성직자들은 매일같이 취하고 비밀리에 혹은 공공연하게 음란한 여자와 걸어 다니며 교회 돈을 나쁜 향락에 낭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하여 {우신 예찬}에서 에라스무스는 고행 . 단식 . 철야 . 절제 등의 이행이란 것은 그 형식으로 경건 . 비경건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의 순수에 있다는 성서적 휴머니스트로서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④ 교황관: 에라스무스는 최종의 공격 대상으로서 교황, 추기경, 주교들을 등장시킨다. 그는 {우신 예찬}의 입을 빌려서 역대 교황의 형식주의를 풍자했다. 그는 교황청은 부당한 심판을 남발하고 일반 신도들에게 침묵의 맹종과 부비판을 강요하였으며 교황은 자신의 사고 방식과 기준에 따라서 일반적으로 불신이라고 규정한 사람들을 면직 또는 파문했다고 주장했다.
에라스무스는 또한 신약 성서의 주석에서도 여기 저기서 복음을 가르치는 주교들이 그들의 생활과 종교적 이념이 유리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우리는 복음 자체를 파괴하고 제 마음대로 계율을 만들고 그들 자신들이 세운 규칙에 따라 정사(正邪)를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라고 신랄하게 반문했다. 교황들은 성자를 위한다는 미명아래 영지 . 도시 . 공물 . 세금 등의 재산으로써 마치 하나의 왕국을 이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결코 혁명적인 수단, 즉 폭력이나 파괴에 의한 것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정화와 재건에 필요한 온건한 수단을 제시했다. 에라스무스는 부패한 교회를 고치는데 회초리가 필요하지만 권위를 파괴함이 없이 종교를 순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택하려고 했던 것이다. ① 에라스무스는 항상 중간 코스를 순항하려는 그의 목적을 집요하게 고수하였으며 ② 종교에서는 낡은 것의 부패 . 화석과 새로운 것의 비타협적 협력과의 중간을 걸어갔다는 역사가 호이징하(J. Huizinga)의 언급이 그것을 잘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