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골초원에서 일어나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는 대원제국, 칭기스칸이 세운 원나라다. 원나라는 동쪽의 연해주부터 서쪽으로 모스크바를 거쳐 인도 북부,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와 동유럽을 아우르는 엄청난 세계제국이었다. 이런 세계 제국을 37년이나 뒤흔든 황후가 있었으니, 그 여인은 바로 기황후, 고려여인이었다. 여인의 몸으로, 외국에 나가 고귀한 신분에 오른 이는 우리 역사상 기황후밖에 없었다. 참으로 일세를 뒤흔든 여걸이라 불릴 만 하다. 그러나 기황후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서에 부정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역사스페셜 <미스 고려 기황후, 대원제국을 장악하다>편은 원나라를 뒤흔든 기황후에 대해 재평가를 하였다. 기황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왜 고려 여인 기황후는 왜 원으로 갔으며, 어떻게해서 이민족 출신으로 황후 자리에 올랐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고려와 몽고의 전쟁 대몽항쟁을 살펴보아야 한다. 고종 12년(1225년) 몽고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에서 도둑들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당시 몽고의 황제 오고타이는 이 사건을 구실로 삼아 1231년(고종 18년)살리타(撒禮塔)에게 명해 수 만의 군사를 주어 고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세계의 5분의 4를 정복한 몽고와 고려가 28년간 7차에 걸쳐 피바다를 이룬 참혹한 대몽항쟁의 시작이었다.
고려는 몽고에 맞서 치열하게 항전했지만, 당시 몽고가 금을 멸망시키고 남송을 압박하고, 서쪽을 정벌하는 상황에서 강성한 몽고에게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함으로써, 원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는 종속관계가 되었고, 이때부터 다양한 원의 내정간섭이 시작되었다. 원은 고려 왕실의 자식들을 인질로 보내게하고, 고려 국왕이 직접 원 황실에 내조하게 하였으며, 고려왕에게 원나라 황실의 공주를 줌으로써, 고려를 원의 부마국으로 만들었다. 더구나, 원에 의한 고려에의 수탈은 가혹했다.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하였을 뿐 아니라 환관(宦官)과 공녀(貢女:공물로 바치는 여자)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기황후는 바로 공녀 출신이었다.
그렇다면 고려는 언제 원나라에 공녀를 보냈을까? 공녀는 고종 18년(1231)에 원나라에 항복한 남송 귀순병들에게 배우자를 마련해준다는 구실로, 원나라가 고려에 공녀 1,000명을 요구한 것을 시작으로 약 백여년에 걸쳐 수많은 고려 처녀들이 공녀로 끌려갔다. 원종 15년(1274)에는 만자매빙사(滿字媒聘使:오랑캐에세 중매하기 위한 사신) 초욱(肖郁)을 보내 귀순한 남송의 군인들을 위한 공녀를 요구하자 고려에서는 결혼도감(結婚圖鑑)을 설치해 140명의 고려여인을 선발했다. 이때만해도 고려는 처녀가 아닌 과부나 역적의 처 등을 공녀로 보냈으나, 1275년(충렬왕 원년) 원나라가 복속국가 중 고려만이 여자를 공납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자 충렬왕은 금혼령을 발표하고 10인의 처녀를 원나라에 바쳐 처녀 공납의 문을 열었다. 1276년에는 원에서 500인의 공녀를 요구하자 충렬왕은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을 만들어 이에 응했을 뿐 아니라 금혼법을 만들어 양가(良家)의 처냐는 먼저 관에 신고한 후 결혼하도록 하였다.
당시 공녀들은 출신성분에 따라 왕가나 고위 관직의 처첩이 되거나 주점에서 노래하는 기생으로 비극적인 생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 딸 자식을 둔 부모들은 자신의 딸이 공녀로 뽑히지 않게 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였다. 고려 후기 귀조가문의 홍규(洪奎)는 딸이 공녀로 선발되자 딸을 승려로 만들었다. 이에 대한 처벌로 홍규는 섬으로 유배되었고, 딸은 원으로 끌려갔다. 이렇듯 원의 공녀 징발은 귀족가문의 딸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원나라는 고려처녀의 징발을 요구한 1231년 이래 계속 공녀를 요구하게 되고, 나중에는 원나라 대신들 사이에 고려 여인을 아내로 삼는 것이 유행처럼 퍼져 원나라 조정의 공식적인 요구 뿐 아니라 원의 관료까지 개인적으로 공녀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공녀징발로 인한 피해가 크자 뜻 있는 학자들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여러차례 올리기도 하는데 그 가운데 고려 말의 유학자 이곡(李穀, 1298~1351, 한산이씨의 중시조, 고려 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 호는 가정(稼亭), 이 글을 쓰는 필자의 방계조상이기도 함)이 쓴 「공녀 반대 상소문」이 있다. 이 상소문을 보면 당시 고려인들이 공녀로 징발되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그 참혹한 상황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 공녀로 뽑히면 부모와 친척이 서로 한 곳에 모여 곡을 하는데, 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공녀로 나라 밖으로 떠나보내는 날이 되면, 부모와 친척들이 옷자락을 부여잡고 끌어당기다가 난간이나 길바닥에 엎어져 버립니다. 비통하고 원통하여 울부짖다가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근심 걱정으로 기절하는 사람도 있고, 피눈물을 흘리며 눈이 멀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고려인 기자오(奇子敖)의 막내딸 기씨 또한 공녀로 뽑히어 원으로 가게 되었다. 기씨는 어떻게 원 순제(順帝:1333~1368)의 눈에 들어 마침내 황후 자리에 올랐을까? 그 배경에는 고려 출신 환관의 대표인 고용보(高龍普)가 있었다. 당시 고려는 공녀 뿐 아니라 환관을 바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고려인들이 학문적 소양과 정치적 경륜을 겸비했기 때문이다. 원 세조(쿠빌라이)또한 고려인을 우수한 민족이라 평한데서 알 수 있듯 당시 원은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한자를 알고 기본적인 학문의 소양을 갖춘 고려인을 황궁에 두기 위해 환관을 요구한 것이었다. 고려 출신 환관들은 황제의 신임을 받기 위해 황제를 사로잡을 수 밖에 없는 고려 여인을 물색하였고,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기씨를 발견하게 되었다. 고용보는 기씨소녀를 순제의 다과를 시봉하는 궁녀로 만들어 그녀가 원 순제의 눈에 들도록 노력하였다.
더욱이 기황후의 남편인 원 순제 역시, 고려에 각별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1330년 권신(權臣) 엔티무르가 문종(명종의 동생)을 제위에 올리고, 자신이 권력을 좌지우지하기 위해 명종(원 순제 아버지)을 죽이고, 당시 11세였던 토곤테무르(원 순제)를 인천 앞 바다인 대청도*로 유배보냈다.
----------------------------------------------------------------------------------------
*대청도는 고려시대 원나라의 유배지로, 곳곳에 원나라와 관련된 전설이 남아있다. 대청도의 내동초등학교는 옛날 궁궐터이며, 이 주변에 기와 조각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주변을 대궐이 있는 동네라고 해서 대궐터라고 부르고 주변 마을을 장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토곤테무르는 1년 5개월동안 고려의 작은 섬에 유배를 보내면서, 고려에 대한 남다른 추억을 갖고 잇었을 것이다. 그가 원나라로 돌아간 지 2년만에 원나라 황제로 등극하게 되는데, 고려에 대한 남다른 기억이 차를 따르는 궁녀 기씨에 대한 호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원 순제의 황후는 타나시리였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을 유배보낸 원수 태평왕(太平王) 앤티무르의 딸이었다. 그러니 원 순제는 그런 황후에게 호감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씨가 순제의 눈에 든 것이었다. 질투에 눈이 먼 타나시리는 기씨를 여러 차례 채찍으로 때렸다. 야사의 기록에는 인두로 그녀의 몸을 지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다행히 기씨에게 기회가 왔으니, 타나시리 황후의 형제들이 순제를 제거할 정변을 세우다가 실패한 것이었다. 원 순제는 승상 빠앤(白顔)과 손을 잡고 타나시리의 친정을 황제 역모사건에 연류시켜 제거하였고, 황후 타나시리에게 사약을 내렸다.
타나시리를 제거한 순제는 기씨를 황후로 책봉하려 했으나, 옹기라트 가문 출신이자. 타나시리 세력 제거의 일등공신인 빠앤이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원제국은 건국 이래로 황후는 몽골족의 명문인 옹기라트 집안의 여자로 맞이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빠앤에 굴복한 순제는 전통대로 옹기라트 가문의 빠앤후두(佰顔忽都)가 황후가 되었다. 기씨는 비록 황후가 되지 못했지만, 상당한 세력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일개 공녀가 아니라 황제의 총애에, 고려 출신 환관들의 지원을 받는 실력자였다. 더구나 1339년 순제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아 그녀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원 순제와 그의 스승, 샤라반과 측근 왕자후는 비밀리에 모여 빠앤을 제거하였는데, 빠앤의 제거에는 급성장하고 있던 기씨가 배후에 있었던 듯 하다. 거사 직후 샤라반이 순제에게 기씨를 제2황후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할 수 있다. 1339년, 공녀로 끌려온 기씨는 드디어 세계를 지배하는 원제국의 제2황후가 되었다. 그 후 제1황후가 1365년 세상을 뜨자 제1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기황후가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은 제2황후 자리에 올랐을 때 부터였다고 한다. 물론 고려 여인 가운데 원의 7대 황제인 쿠빌라이 세조(1260~1294)의 총애를 받은 이씨, 10대 인종(1312~1320) 때의 영비가 된 고려 여인이 있었지만 자신의 실력으로 황후가 되어 원나라를 호령한 인물은 기황후 뿐이었다.
기황후가 황후가 되자 원에 끼친 영향은 상당히 크다. 고려의 문화가 원에 유행하게 되는 고려양이 바로 그것이다. 원나라 후기의 복식을 살펴보면 전통복식(원의 전통복식은 위 아래가 하나로 붙은 원피스 형태) 과 달리 치마저고리가 있고, 옷이 위, 아래가 분리되어 있다.**
----------------------------------------------------------------------------------------
**“궁중에서 제일 유행하는 것은 고려식 옷이라네 정방형 목선과 짧은 허리, 반소매…궁중여인들이 모두 다투어 구경하려 하네…이는 고려 여인이 황제 앞에서 이 옷을 입기 때문이라네…” -장욱의 『궁중사』-
---------------------------------------------------------------------------------------
또한 지금의 몽골 울란바토르에 있는 국립박물관에는 ‘일루르’가 보관되어 있는데 일루르는 ‘인두’로 기황후로부터 전해졌다고 한다. 고려양은 복식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고려의 음악을 비롯해 생활풍속, 음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퍼져갔다. 몽골의 전통음식인 ‘뮈시카’는 우리 전통 한과인 ‘매잡과’(매잡과는 신라시대부터 즐겨온 한과다. 가운데 칼집을 내고 꼬아서 만든다고 한다.) 와 비슷하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의 여러 음식이 원으로 전해졌다고 하는데 고려병(高麗餠), 고려다식, 고려조청, 상추등이 원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당시 고려에는 원의 침입으로 몽고의 풍습인 몽고풍이 유행하였다. 결혼할 때 연지곤지 찍기, 족두리, 남녀의 옷고름에 차는 장도칼, 변발, ~치의 말, 고기를 지지거나 튀기는 조리법, 소주, 수라상 등이 몽고풍인데, 기씨가 황후에 오름으로써 원나라에 고려의 문화가 퍼지게 된 것이다.
황후가 되어 실권을 장악한 기황후는 황후부속기관이자 자금조달기구인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해, 세력 기반으로 삼았고,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러 임명했다. 자정원은 기황후를 추종하는 고려 출신 환관은 물론, 몽골 출신 고위관리까지 가담해 ‘자정원당’이라는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녀는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구사하여, 빠앤의 조카 토크다카를 유배지에서 불러들여 중서성 우승상에 임명했다. 이는 화해의 정치를 표방하는 것이다. 원사 후비열전을 보면 기황후에 대해 “시간이 나면 여효경(女孝經)과 역사서를 보며 역대 황후들의 좋은 덕행에 대해 공부하고,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진상품 중에서도 진귀한 것들은 먼저 태묘에 제사지낸 뒤 먹었다”고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들은 기황후가 정치를 함에 있어 상당한 식견을 갖춘 여장부임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기황후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권형의 평가는 당시 기황후와 자정원당이 원 황실 내에서 어느정도 지위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기황후는 고려미인들을 많이 데리고 있으며, 대신 중에 권력이 있는 자들에게 그들을 보냈는데, 당시 원나라 고관들과 귀인들은 반드시 고려 여인을 얻은 뒤에야 명가(名家)라고 불렀다.… 순제 이후로 궁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태반이 고려 여인이었으므로 의복, 신발, 모자, 물건 등이 모두 고려의 것을 따르게 되었다.”
기황후는1353년 14세의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책봉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제 원나라 황실의 다음 주인은 고려 여인이 낳은 아이가 될 것이었다. 또한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를 군사통솔의 최고 책임자인 추밀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로 만들어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이는 앞서 설명한 기황후의 화해의 정치와 현지화 전략을 펼친 결과이기도 하였다. 기황후는 이렇게 장악한 권력을 누구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원나라 말년에 큰 기근이 들어 대도 안에서 20만 명이 굶어죽고 시체가 나뒹글었다. 이 때 기황후는 관청에 명해 죽을 쑤어주고, 자금내원인 자정원에서 자신의 명의로 돈을 풀어 시체를 경도 11문 밖에 묻었다. 그녀는 이에 그치지 않고 대규모 수륙대회(水陸大會)를 열어 그들의 영혼을 위로해주었다. 막대한 재정이 필요한 이런 사업을 기 황후가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자정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자정원은 기황후의 정치적 뒷받침으로, 자신들의 최측근인 환관을 집중 · 배치하여 인적 · 물적자원을 확보하였다. 기황후가 순제로 하여금 박불화에게 영록대부(영록대부는 2품의 벼슬로, 원대 제상 가운데 영록대부가 되는 사람은 드물었다. 환관이 영록대부를 제수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기황후의 세력을 짐작케 해준다 할 수 있다.) 란 벼슬을 내리게 한 것은 기황후의 영향력이 컸음을 의미한다.
이 무렵, 순제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양자강 유역을 비롯해 강남, 황하 유역등 전국 각지에서 몽고족의 통치에 저항하는 한족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어느덧 한족의 봉기는 원제국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런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대제국 원나라는 중원을 점령했던 많은 북방민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향으로 쫓겨갈 판국이었다. 원나라 역사상 미증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기황후와 그녀를 중심으로 하는 자정원파는 중대한 계획을 세운다. ‘순제양위사건’이 그것이다. 기황후는 순제를 양위시키고 태자를 즉위시켜 원나라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으나, 순제의 반발로 결국 이 사건은 순제 편에 서서 기황후의 모의를 거부한 재상이 귀양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체질개선에 실패한 원나라는 결국 1366년 주원장에게 연경(북경)을 빼앗기고 순제와 기황후는 황급히 북쪽 몽골초원으로 도망갔다. 도피하는 가운데 기황후는 원병을 보내지 않는 고려를 원망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기황후는 어떤 최후를 맞이하였을까? 『북순사기(北巡私記)』를 보면 1368년 7월 몽골의 깊숙한 초원 카라코룸으로 도피한 순제는 나라에 관한 모든 권한을 황태자에게 넘겨준 뒤 세상을 떠났다. 기황후가 낳은 아유시리디다가 북원의 황제가 되었다고 전할 뿐 그녀의 최후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역사스페셜에서는 기황후의 무덤이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에 있었다고 방영하였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연천에 있는 기황후의 무덤에 대해 의문이 든다. 만약 기황후가 그 곳에 묻혔다면 ‘기황후릉’이 되어야지 왜 ‘기황후묘’가 되었을까? 더군다나 연천에 기황후 무덤이 있다고 기록한 문헌 사료는 『동국여지지(東國與地誌)』 하나 밖에 없다. 효종 7년(1656)에 편찬된 『동국여지지』에 ‘민간에 전하기를 원나라 순제의 기황후 묘라고 전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 때 비로소 문헌에 최초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생긴 전설임을 짐작케 해준다. 그리고 당시 시대상황이 과연 기황후로 하여금 고국에 묻히도록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오라비 기철이 제거되었을 때 기황후는 태자에게 ‘이 만큼 장성했는데 어찌 어미의 원수를 갚아주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한 그녀가 과연 고려로 와 묻혔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결국 이 전설은 하나의 전설일 뿐 실제 역사는 아니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원사와 고려사에 평가된 기황후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그도 그럴것이 이 책들은 봉건적인 유학의 관점으로 저술된 책이기 때문에, 여성의 정치 참여는 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기황후가 그렇게 기록된데는 기황후의 오빠 기철(奇轍)형제들도 한 몫했다. 원 황후의 세력을 등에 업은 그는 고려에서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며 심한 횡포를 부렸다. 충목왕의 개혁정치를 좌절시키기도 했고, 충혜왕이 원나라로 압송하는데 앞장을 섰으며, 각지에 농장을 개설하여 백성들을 수탈했을 뿐 아니라, 임금 앞에서도 칭신(稱臣)하지 않는 작태를 부리다가 결국 공민왕에 의해 제거당했다. 기황후도 고려의 왕을 책봉하는 과정에 개입해 자신이 부리기 쉬운 사람을 세우고, 최유로 하여금 반역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김용의 반역사건이 일어났을 때, 자신의 심복인 최유를 시켜 김용과 합세하여 공민왕을 폐위시키라는 지시를 내리는 등 고려의 입장에서 볼 때 부정적인 일을 많이 했다. 그러나 그녀가 항상 고려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만은 아니넜다.
기황후는 충렬왕 이후 80여년 간 계속되던 공녀 징발을 금지하였고, 환관의 징발을 축소하였을 뿐 아니라, 골를 원에 속한 하나의 성으로 만들자는 입성론 논의를 폐지하기도 하였다. 만약 기황후가 없었다면, 현재 우리는 이 땅에 한국어 대신 중국어를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지양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내려져야 할 것이다. 기황후는 시대를 잘못 만나, 힘없는 나라에 태어나 원하지 않는 공녀로 선출되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녀는 불쌍한 여자이다. 하지만 기황후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대원제국을 30여년간 호령한 위대한 여장부이다. 기황후의 인생 개척은 현대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라고 필자는 감히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