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위를 걷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방랑자 가방을 벗어 우산을 꺼내 펼쳐들었다. 30초도 안 걸린 것이다.
우산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이렇게 피할 수 없는 장소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면 얼마나 당황해 할까?
어제의 일이 생각났다.
세 자녀를 둔 젊은 부부가 2년에 걸쳐 자신들의 집을 손수 짓는 자료를 보았다. 주말을 이용하여 하루도 쉬임없이, 그것도 순전히 가족들의 힘으로서만 완벽한 흙집을 지어나가는 것을 보니 정말 인간 승리이고, 가족들의 화합된 마음과 그들의 의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과 비슷하게 주위에도 자신의 노후를 하나 둘씩 준비해 가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지금껏 뭐하고 사는 걸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저 마음으로만 수십채의 집을 짓고, 기분으로만 아름다운 밑그림을 그려왔다. 순간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집이 가까울 무렵 친구를 만나 예전에 갔었던 막걸리집을 찾았다. 두 테이블의 손님이 있었고, 우리는 가운데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안쪽 테이블엔 오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세명의 남자가 막걸리와 두부를 시켜놓고 시골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출입문쪽엔 사십대 초반의 젊은 남자가 혼자 앉아 두부와 돼지고기에 막걸리를 시켜놓고 돼지고기만 맛있게 먹고 있었다.
우리는 막걸리 한주전자와 두부안주를 시켰다. 자주 만나는 사이라 이야기야 별스런게 있을리 없었다. 우리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옆 테이블 사람들의 이야기를 훔쳐 듣기도 하였고...
잠시후 안쪽 테이블 사람들이 일어서 나가자 주인 아줌마가 그들의 험담을 늘어 놓는다. 겨우 막걸리 두주전자에 두부하나 시켜놓고 두시간을 노닥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래도 가게엔 사람이 있어야 지나가는 사람이 들어오지 아무도 없이 썰렁해 보이면 손님이 오지 않는다고 말했더니, 그것도 정도껏 해야지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장사에 방해가 되다는 것이었다.
조금뒤엔 입구쪽의 남자가 나가면서 조금도 먹지 않은 막걸리 주전자를 우리에게 넘겨주며 먹으라는 것이다. 자신은 고기가 먹고싶어 들어왔다고 하였다.
그래도 차마 그럴 수는 없는일, 우리는 주전자를 주인에게 넘겨주며 부추안주나 좀 더 달라고 하고 서는 주인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게는 전세와 달세를 주고 있단다. 남편은 주변의 장기 바둑판에 훈수나 두는 백수건달에 서른 두살이라는 외아들은 장애인이다. 지켜보니 그래도 착해서 시키는 일은 잘하는 편이다.
주인 아줌마는 걱정이 태산이란다. 나는 그래도 같은 장애인 이라도 참한 여자와 결혼을 시켜 같이 살게 해 주면 좋겠다는 이야기와 이전에 경영컨설팅을 배운답시고 자료에서 보았던 어설픈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가게는 손님들의 드나듬에 비하여 쓸데없이 넓고, 입구 공간에는 탁자라도 내놓아 손님들을 유인할 것이며, 남편을 장사일에 돕도록 어떻게하든지 끌어들이라고 하였다.
다 맞는 말이지만 어디 그리 말처럼 쉬울까?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다. 철길가에 사는 할머니는 좁은 공터에다 들깨를 심었두었고, 철길가를 따라서 참깨를 심으셨다. 그리고 호박을 심어 줄기를 철조망에다 올리셨는데 거름을 많이 하셨는지 무척이나 튼실하게 잘 자랐다.
두어주 전엔 탐스런 호박들이 달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지금은 하나도 없다. 그동안 맛깔스런 애호박을 따다가 된장국을 끓여 먹으신게 틀림없다.
애호박의 향이 배인 구수한 된장국을 가운데 놓고 자식내외며 손주, 삼대가 옹기종기 둘러앉아 밥을 먹는 모습이 머리속에 훤하게 떠오르는 듯 하다.
지나는 길가 이발소는 아침부터 문을 열고 청소를 하고 있다. 이 비오는 아침에 무슨 손님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그것이 장사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이발소 이름이 경영인데, 사람의 이름인지, 아니면 경영을 잘하자는 취지의 아이템에서 나 온 것인지를 알 수 없다.
요즘은 미용실에 밀려 장사도 안되는 사업 중의 하나이다. 심지어 고지식한 나 같은 사람도 미용실을 이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돈 많이 벌어 노후라도 편하게 살기를 바랄뿐이다.
차도로 나오니 매일 보이는 중학교를 다니는 여자애 세명과 마주친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 같은 학교를 다니는지 교복이 같다. 오늘은 우산이 셋이다. 매일 같이 다니며 무슨 애기들을 저렇게 조잘대는지 참으로 정다워 보인다.
빗방울이 굵어져 어느새 바지가랑이가 거의 다 젓었다. 뒤에 멘 가방이 젓을까봐 뒤로 우산을 젖히면 앞 다리쪽이 젓어든다. 요즘의 비는 게리라성이라 오고 싶을땐 갑자기 오고, 그칠때도 제맘대로 그친다.
임진왜란때 있었던 일이란다. 선조가 북침해오는 왜군을 피하여 의주로 피난기를 가는 길에 넓은 개성평야를 지나고 있었다. 오늘처럼 갑자기 비가 쏟아져 내렸다.
그러자 선조는 가마꾼들을 재촉하여 빨리 가자고 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신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했단다.
"전하! 이 끝없이 넓은 평야에서 가마꾼을 채촉한들 바삐간다고 비가 천천히 오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전하가 거할 헛간도 마련되지 않았나이다."
비가 오니 주위가 어수선해 보인다. 다가오는 버스에 빨리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학생들, 우산을 미쳐 준비못해 종종 걸음질을 쳐대는 사람도 있다.
보는 사람 민망스럽게도 궁둥이 근처까지 올라가는 짧은 치마를 입은 멋쟁이 아가씨의 허벅지에도 빗방울이 맞는지 우산을 돌려막는다.
저런...오늘 같은날은 긴 바지를 입었으면 좋으련만, 그놈의 멋 부리려다 인생의 참맛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런지...
인생 별거 없다 하여도 삶 그자체가 인생이다.
첫댓글 좋은글 잘일고 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