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용궁댁을 답사했다.
답사의 목적은 경복고등학교 34회 동창의 일원이시자 졸업 60주년 기념 회고록 발간 편집 책임을 맡으신 평소 존경해마지 않는 이 원순 님(이하 편집자)께서 내게 한옥건축을 하는 사람으로서 아산 용궁댁을 직접 답사하고 관련 사진을 찍어 보내줬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고서다.
여러 고택이나 사찰을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필자로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어 내킨 김에 답사 길에 나섰다. 내 우거가 있는 서해안 태안반도 몽산포에서 같은 충청남도지만 내륙에 자리한 아산은 그리 가깝지는 않은 거리지만 오랜만의 답사 길에다 때는 경칩 지나 춘분을 앞둔 완연한 봄이어서 꽃피는 춘삼월 즐거운 여행길이 되었다.
고택 초입에서 바라본 고택의 모습은 남쪽에 자리한 높다란 도고산 산자락 아래 숲속에 자리하고 있어 아직 녹음이 욱어지기 전임에도 숲속에 숨어있는 듯 보일 듯 말듯 아름다운 자태를 가리고 있었다. 전체적인 지세는 남쪽으로 배산을 하고 북향으로 자리한 장원 속에 자리한다.
입구에서 잠시 걸어 오르니 이내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는 듯 사랑채가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 들어서자 좌우에 자리한 거목 보호수인 은행나무와 몇 그루의 고목들이 그만큼 세월이 묵은 집임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고 갖가지 나무와 화초들이 아직 이른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언덕 좌측으로 산수유가 만개하여 노란 봄빛을 내보이고 사랑채 앞으로는 홍매 청매가 일제히 봉우리를 터트릴 태세였는데 그나마 수양 벚나무와 목백일홍은 아직도 벌거벗은 채였다. 이미 자료들을 일별한 터인지라 안내판이나 안내인이 따로 없이도 마치 내 집 이라도 되는 양, 여기는 사랑, 여기는 바깥채 , 저기는 행랑채, 그리고 여기가 안채 하면서 발걸음을 옮겨 다니며 열심히 사진을 담았다.
일별해서 한양의 양반가와 같은 고대광실의 풍모를 갖추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한옥문화재로서 특별한 건축 기법이나 구조를 갖춘 것도 아닌 지극히 소박하고 평범해 보이는 그야말로 옛 선비들이 어떻게 집을 짓고 어떤 나무와 화초들을 심고 가꾸면서 자연 속에 묻혀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는 집으로 보였다.
답사 전에 자료를 검토하면서부터 조금 기이하게 느껴졌던 점은 고택의 담장이었다.
고택 현장을 둘러보면서도 고택 좌우와 뒤로 둘러 친 담장의 모습이 색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만한 집 담장이 막돌을 허튼 층으로 쌓 올린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네모 반듯하게 담장을 두르는 것이 상식임에도 지형이 딱히 그래야만 할 사정이 없음에도 굳이 둥글게 담장을 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건물 사진을 찍으면서 이상한 묵서 하나를 발견했다.
안채 우측 날개 방문 문설주에 ‘王命’(왕명)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고 그 아래로 다시 네자의 글자가 보이는데 매 글자 머리마다 대죽(竹)(?)머리 아래에 自(자), 羅(라), 信(신), 里(리) 라 쓰여 있었다.
문화재청이 발간한 경복궁 근정전 보수공사 및 실측조사보고서의 ‘근정전 부재에 적힌 각종묵서(사진자료 별첨)’를 보면 글자며 그림이며 자재의 치수나, 낙서 또는 수결, 이름 등이 보이는 사례는 흔하지만 다 지은 건물 부재에 낙서가 아닌 묵서를 써놓은 사례는 흔치 않다.
답사 후에 편집자님께 사진 일체를 보내드렸다.
그리고 그 중 예의 문설주 묵서를 확인해 봐달라고 말씀드렸다.
편집자께서는 아우님 되시자 도꾜대 농학박사로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을 역임하시고 여러 고전을 국역하여 출간한 바 있는 이 두순 박사께 사진을 보여드리고 글자가 무슨 뜻인지를 문의하였다.
이 두순 박사는 대 죽(竹)을 글자로 간주하고 대죽 변이 있는 네 글자를 검토했는데 대 竹 아래에 네 글자는 自, 羅, 付, 里 인 것으로 보이나 그중 두 번째와 세 번째 글자는 籮, 符이지만 첫 번째와 네 번째 글자는 강희자전에도 없는 글자라는 답변을 해왔다. 필자는 처음에 付자를 믿을 信으로 읽었는데 信이 아니라 付로 판명이 난 것이다.
그렇다면 네 글자는 ‘자라신리’가 아니라 ‘자라부리’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자라신리’라는 말은 무슨 말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지만 ‘자라부리’로 읽으니 그 뜻은 몰라도 뭔가 그런 우리말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일단 인터넷에서 ‘자라부리’를 검색했다.
검색을 해보니 강진에 송정마을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 마을 이름이 '자라부리' 또는 '자래부리'라고 했다..‘자래’는 ‘자라’의 그 지방 방언으로 그 말뜻은 마을 전체의 지형이 자라형국으로 ‘자라부리’ ‘자래부리’로 통하는 마을은 자라의 등에 해당하는 곳을 중심으로 집들이 옹기종기 자리하고 있다는 자료가 나왔다.
조선 궁궐이나 화성 건축의궤에 나오는 건축 관련 용어가 난해한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 말의 음가를 같은 음가의 한자를 이두 식으로 차용하여 쓰다 보니 역으로 그렇게 만들어진 한자 용어의 한자만 봐서는 그 뜻이 무슨 말인지 모르게 된다. 예컨대 우리말 도리 받침으로 쓰이는 부재인 장혀를 ‘長舌’이라 표기한다. 또 세로 공포재인 쇠서는 牛舌이라 표기한다. 그러므로 ‘長舌’이나 ‘牛舌’을 글자만 가지고는 이것이 한옥 부재를 가리키는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듯이 ‘自羅付里’도 한자를 소리대로 빌려다 쓴 글자로 봐도 무리가 없을 듯싶다는 의견을 보내드렸다.
참고로 송전마을 마을사람들은 “마을 입구에 위치한 마을회관 부근은 자라 앞발에 해당하며 마을 주위를 따라 흐르는 송전천 양측면이 자라 뒷발이다. 또 마을회관 남쪽에 펼쳐진 들녘이 자라목 부분이며 마을 북쪽에 남아있는 독립가옥이 자라꼬리에 해당한다. 과거 마을주민들은 자라 등에 샘을 파면 마을에 흉사가 생긴다고 믿어 샘 개발을 막기도 했으며 서산저수지가 들어선 이후 마을 주위의 수로를 따라 물이 흐르게 되면서 자라에게 물을 공급하는 형상으로 풍수상 마을에 이롭게 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용궁댁 뒷 담장이 원형으로 되어 있을까? 하는 의문이 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배치도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니 이 집터가 혹시 자라형국을 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이런 생각을 정리하여 편집자님께 “행랑채 쪽이 자라머리에 해당하고 바깥채가 자라 꼬리 부분으로 보인다. 안채, 문간채, 사랑이 자리한 곳이 자리 몸채인 셈이다. 특히 행랑채 끝에 담을 이어 쌓았는데 그게 바로 자라 꼬리모양으로 보인다.”라는 답변을 드렸다.
이어서 “견강부회 같지만 틀림없이 '自羅付里'에 풍수와 관련된 연유가 있을 듯싶었다.
일부러 담장을 자라 등처럼 둥글게 쌓았고 자라 머리와 자라 몸채 사이에 배수로를 파서 물이 흐르게 했는데 집안에 도무지 우물자리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이상한 생각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직계 후손 며느님에게 우물자리를 물었더니 우물은 집안에 있지 않고 담장 밖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수도물을 사용 중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自羅付里’라는 것은 집안에 샘을 파서는 안된다는 금지사항을 후손들이 지켜라는 뜻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진 자라부리 형국의 예에서 보듯이 풍수적으로 자라 몸체에 우물을 파서는 자라의 생명을 해치는 것이므로 자라형국인 용궁댁 담안에 우물을 파지 말것을 당부하는 선대 택주의 지엄한 유지가 틀림 없으리라는 판단이었다.
'王命'이라는 말은 진짜 교지로서의 '어명'이라기보다 임금의 명처럼, 임금의 명으로 알고 꼭 지켜야 한다는 뜻에서 선대 집 주인께서 문설주에 써 놓았던 것인데 후에 보수하면서 신재로 갈아 끼운 문설주에 원래 써있던 글씨를 그대로 다시 써놓지 않았을까 한다.“라고 필자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 보내드렸다.
필자는 또 한 가지 의문점이었던 “매 글자마다 ”대 죽(竹)” 형상(글자)이 붙은 것에 대해서도 남들이 글자를 못 알아보게 그리 덧붙여 놓았을 것으로 해석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추리를 바탕으로 이 고택은 자라형상을 딴 대지라는 잠정결론에 이르렀다. 또한 그 집 택호가 '용궁댁'인데 풍수상 용궁에 자라가 사는 게 이상할 것이 없다는데도 동의했다. 전체 부지가 용궁이요 그중 집터는 용궁에 사는 자라 형상으로 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해석이라 할 것이다.
고택을 지은 성교묵 선생은 35세에 進士에 이르고38세에 부모님을 위하여 집을 짓고 후에 宗廟令(정5품벼슬로 종묘제례를 준비하고 통할하는 자리)과 용궁현감을 지낸 분이니만큼 철저한 유교와 성리학 지식은 물론 조선시대에 성행했던 풍수사상을 바탕으로 집짓기에 본인의 이상을 구현했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따라서 택주로서의 이상과 후대의 무탈 번성을 기원하는 염원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王命’(왕명)이라는 이름으로 ‘自羅付里’묵서를 남겼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우리는 풍수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하고 문화재 전반에 대한 이해 또한 부족한 점에서 우리의 잠정 결론은 하나의 ‘가설’이라 할까 문제 제기 차원에 그치는 것으로 차제에 학계나 문화재 당국에서 ‘용궁댁 문설주 왕명 묵서’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용궁댁 배치도
좌로부터 행랑채 뒷곁 탱자나무(1) 탱자나무(2)
광채 담장 코너 복숭아
사랑채 앞 좌에서 우로 목백일홍 수양벚꽃 홍매 청매
문설주 묵서 왕명 자라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