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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Capitalist'의 중국 사랑
중국경제와 중국 증시를 공부하자면 꼭 부딪치게 되는 기업이 있습니다. 중국국제신탁투자공사(中信그룹)가 바로 그 회사입니다. 흔히 'CITIC'으로 불리고 있지요. CITIC은 중국 개혁개방을 만든 기업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개혁개방을 위한 대내외 자금 통로 였지요. 그러기에 CITIC를 보지 않고는 중국경제를 논할 수 없게 됩니다.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鳥巢'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경기장 건설 프로젝트를 맡은
업체가 바로 중신그룹이다. 중신그룹은 올림픽이 끝난 후 30년동안 이 경기장 운영권
을 갖게 된다. 베이징의 축구팀 '궈안(國安)'도 중신그룹이 후원하고 있다.
CITIC은 지금도 중국경제계에서 막강한 파워를 갖고 있습니다. 주요 업종에 약 40여 개의 굵직굵직한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중 중신은행, 중신증권, 중신하이즈(海直),중신궈안(國安) 등 4개 업체가 대륙증시에 상장되어 있고 중신국제금융, 중신타이푸(中信泰富), 중신은행, 야저우(亞洲)위성, 중신자원, 중신21세기 등 6개 업체가 홍콩증시에서 거래되고 있지요. 중신은행은 홍콩과 상하이에 동시 상장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 CITIC 얘기를 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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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6년 6월 18일. 실권자 덩샤오핑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귀한 손님을 맞습니다. 롱(榮)씨 가문 일가가 그들이었지요. 롱이런(榮毅仁)당시 국제신탁투자공사(CITIC)회장을 비롯해 약 2백여 명의 롱씨 가족이 참석했습니다. 대부분 해외에서 왔습니다. 덩샤오핑이 친히 마련한 자리였지요. (아래 사진은 당시 모습입니다. 왼쪽 서있는 사람이 롱이런입니다)
덩샤오핑은 왜 한 가족의 모임을 국가행사가 치러지는 인민대회당에서, 그것도 자신이 친히 참석한 것일까요. 중국 개혁개방 과정에서 롱씨 일가가 차지한 역할을 보면 수긍이 갑니다.
롱씨 일가의 뿌리는 장쑤(江蘇)성 우시(無錫)입니다. 1900년대 초 우시는 자본주의 식 경영이 싹트는 중국 최고의 방직산업의 본고장이었습니다. 롱씨 일가에는 그 자본주의 정신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롱이런의 부친 롱더셩(榮德生)은 1889년(당시 15세) 자그만 배를 타고 우시에서 상하이로 건너옵니다. 그보다 3년 전 상하이로 온 형 종징(宗敬)의 부름을 받고 상하이에 온 것입니다. 두 형제는 상하이에서 일종의 사금고였던 '치엔좡(錢庄)'에서 일을 배웠고, 이들은 몇 년 후 독립했습니다. 금융업에 뛰어든 것이지요. 우시의 상인정신으로 무장한 그들의 사업은 게 성공했고, 재산은 부풀어 올랐습니다.
롱씨 가문의 사업은 금융업에서 벗어나 밀가루 방직 기계 등으로 확장했습니다. 손 대는 것 마다 사업이 번창했지요. 밀가루의 경우 롱씨 공장의 생산량이 전국의 29%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섰습니다. 돈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해외로 빠져나갔지요. 롱씨 가문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롱이런의 삼촌 종징(宗敬)과 그의 자식들은 모두 상하이를 떠나 홍콩 대만 독일 등으로 향했습니다. 롱이런의 동생이었던 얼런(爾仁) 엔런(硏仁) 웨이런(偉仁) 등도 홍콩 브라질 등으로 피했습니다.
그러나 롱이런과 그의 가족은 중국에 남았습니다. '민족을 버리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답니다. 롱이런은 공산당 정권에 협력, 재기를 모색했습니다. 건국 초기 공산당 지도부는 그의 뜻을 고맙게 받아들였고, 롱이런은 초기 민족자본 구조조정 작업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50년대 초 상하이 부시장을 역임하기도 했지요.
마오쩌둥은 그를 두고 ‘붉은 자본가(紅色資本家, 'Red Capitalist'의 )’라고 했습니다. '타도해야 마땅한 자본가이긴 하지만 공산주의이기 때문에 괜찮다'라는 것이었지요. 롱이런은 특히 덩샤오핑과 막역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롱이런이 상하이 시장으로 재직할 당시의 사진입니다. 롱이런이 상하이 한 방직공장에서 모택동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모택동 왼쪽 양복잆은 사람이 롱이런)
롱이런은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으로 이어지는 중국경제의 질곡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의 재산은 모두 국유화됐고, 평범한 인민으로 돌아갔습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자본가로 낙인 찍혀 가진 고생을 다 해야 했습니다.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아니었으면 홍위병에게 맞아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롱이런이 다시 중국 산업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직후입니다. 덩샤오핑은 중국 시장경제를 이끌 경제계 인물로 ‘붉은 자본가’롱이런을 찾았지요. 그의 자본주의 지혜가 필요했던 겁니다.
개혁개방을 선언한 이듬해였던 1979년 1월. 덩샤오핑은 롱이런에게 개혁개방을 이끌 조직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롱이런은 한 달 동안 고민합니다. 그 고민의 결과가 바로 'CITIC'였지요. 그는 중앙당에 'CITIC'설립을 건의했고, 덩은 흔쾌히 OK했습니다. 덩은 “하고 싶은 데로 해라. 누구도 CITIC의 업무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독립성을 보장해주겠다. 당신이 하는 일은 옳기 때문이다”라고 롱이런에게 힘을 실어줬습니다.
개혁개방 초기 중국과 해외자금을 연결해주던 통로였던 CITIC는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1979년 6월이었지요. 국가가 설립했기에 지금도 CITIC와 그 산하 기업은 국유기업으로 분류됩니다.
'붉은 자본가' 롱이런의 활약이 시작됐습니다. 롱이런은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돈을 끌어 모았습니다. 최초의 ‘차이나 펀드’였던 셈입니다. 1993년 CITIC는 홍콩 런던 도쿄 뉴욕 등에서 20억 달러의 채권을 발행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CITIC이 없었더라면 개혁개방이 그처럼 빨리 진행되지는 못했을 겁니다.
붉은 자본가 롱이런. 그는 2005년10월26일,89세의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합니다. 그는 1993년부터 5년 동안 국가부주석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국가부주석'이라기보다는 '라오반(老板)'으로 불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중국인에게 '롱 라오반'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롱이런이 해외 자금을 그처럼 빠르게 유치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공산화로 중국을 등져야 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롱씨 가문에 흐르는 상인정신이 흘렀습니다. 모두 현지에서 자리를 잡았지요.
롱이런의 삼촌이었던 종징(宗敬)의 막내아들 홍칭(鴻慶)은 홍콩과 대만에서 섬유업체로 성공했습니다. 그는 중국이 열리면서 대륙으로 와 첫 중국-대만 합자은행인 상하이대만저축은행을 설립했지요. 홍칭은 또 3천만 달러를 투자, 상하이 최대 방직업체인 선난(申南)방직을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롱이런의 조카 즈신(智?)은 MIT공대를 졸업한 뒤 미국과 홍콩에서 거부가 됐습니다. 그는 홍콩에 설립한 롱원(榮文)과기를 토대로 대륙에서 사업을 하고 있지요.
롱씨 가족은 미국 캐나다 호주 브라질 독일 등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롱씨 가문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이지요.
CITIC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해외네트워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아니, 중국의 개혁개방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화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1986년 덩은 이들을 인민대회당으로 초대했던 것입니다.
80년대 후반 롱씨 가문에 새로운 실업계 스타가 태어납니다. 그는 홍콩과 대륙을 오가며 업계를 누비고 다닙니다.
중국에서 개혁개방의 기운이 한 창 싹트고 있던 1978년 6월. 얼굴에 귀티가 흐르는 한 베이징 청년이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실습니다. 여행용 가방 한 개와 '홍콩통행증(入港通行證)'이 그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누구였을까요?
롱이런(榮毅仁)의 아들 롱즈지엔(榮智健)이 그였습니다. 롱이런은 부인 양지엔칭(楊鑒淸)과 1남 4녀를 두었습니다. 롱즈지엔은 롱이런의 독자였던 것이지요. 1942년 상하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롱이런과 그의 부인 양지엔칭, 그리고 그들의 아들 롱즈지엔
공산당 치하 중국에서 '자본주의자' 롱이런의 아들로 살아간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대륙에서의 그의 삶을 잠깐 들여다 보지요.
롱이런이 상하이 부시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만하더라도 롱즈지엔은 아무 걱정이 없는 '귀공자'였습니다. 1959년 텐진(天津)대 전기공학과에 입학 한 후에도 그의 귀족풍류는 계속됐지요. 그의 집은 없는 게 없을 만큼 풍족했습니다. 당시 마오쩌둥은 민족자본(특히 민족기업)에 대해 매우 부드럽게 대했던 까닭에 꼬마 롱즈지엔은 정권이 바뀐 것을 실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랬듯 그 역시 지방으로 쫓겨가야 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하방(下放)입니다. 그가 간 곳은 지린(吉林)성 백두산 부근의 수력발전소 였습니다. 거기서 죽어라 노동을 해야 했지요. 풍족하게 자란 그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백두산 노동을 하던 그에게 이번에는 쓰촨(四川)으로 가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말이 쓰촨이지 지린에서 쓰촨이 어딥니까? 그래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본가의 자식인 그를 도와 줄 이 없었습니다.
롱즈지엔은 그렇게 8년 동안 '하방 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가 가족이 있는 베이징으로 돌아온 것은 1972년 이었습니다. 정부조직인 기전부(機電部)의 전자연구소로 배치됐습니다. 부친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 그가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입니다. 부인과 딸은 롱이런에게 맡겨야 했습니다. 홀홀 단신 홍콩으로 넘어온 것이지요.
'면화대왕'이라는 별명을 얻은 롱더셩(榮德生)에서 시작된 롱씨 가문의 상인정신은 그의 아들 롱이런을 거쳐 손자 롱즈지엔에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홍콩에 온 롱즈지엔은 바로 비즈니스에 손을 댑니다. 부친 롱이런이 갖고 있던 홍콩 몇 몇 회사의 지분이 그의 자산이었습니다. 미국 MIT대학 졸업후 사업에 나선 사촌형 롱즈신(榮智?)과 홍콩에서 만나 일을 같이 하게 되지요. 그밖에 해외에 퍼져있던 롱씨 가족들의 도움도 받습니다.
롱즈지엔은 역시 롱 가문의 적손이었습니다. 손에 대는 사업 모두 성공했습니다. 78년 홍콩의 한 전자업체를 인수해 키운 뒤 82년 미국업체에 매각, 불과 4년 사이 720만 달러를 벌었습니다. 그는 이중 120만 달러를 떼네 캘리포니아에 CADI라는 컴퓨터디자인(CAD)회사를 설립했습니다. IBM에서 이탈한 전문가들을 모아 만들었지요. 이 회사 역시 대박이었습니다. 1년 후 미국의 한 업체가 지분 28%를 인수할 정도 였지요.
롱더셩의 손자, 롱이런의 아들, 롱즈지엔
1980년대 중반 롱즈지엔은 이미 이가성 등과 함께 홍콩실업계의 주목 받는 인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대륙에서 온 롱씨 가문 적손은 그렇게 홍콩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당시 홍콩에는 실업계를 주름잡는 실업인이 많았습니다. 아시아 최고의 재벌 리자청(李嘉誠), 자리(嘉里)그룹의 궈하오넨(郭鶴年), 헝지(恒基)그룹의 리자지(李兆基) 등이 그들입니다. 그러나 이들과 롱즈지엔은 근본적으로 차이점이 있습니다. 바로 대륙에서 태어나 대륙에서 살다가 홍콩으로 왔다는 점입니다. 홍콩인이 아닌 대륙인이었던 겁니다. 이 차이는 향후 롱즈지엔의 비즈니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롱즈지엔이 홍콩실업계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1986년. 베이징 부친이 그에게 전화를 겁니다.
"아들아, 네가 할 일이 하나 있다"
롱이런은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아들에게 맡기려 하고 있습니다. 아니 롱이런은 이를 위해 아들을 먼저 홍콩으로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틀렸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작년 홍콩 반환 10주년(2007년 7월1일)을 앞둔 특집 기사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언론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는 쉽지 않은 일, 도대체 무엇이 틀렸다고 인정한 것일까요?
"10년 전, 홍콩의 중국 반환 당시 우리는 '홍콩은 이제 죽었다'라고 썼었다. 공산정권이 홍콩을 인수하면 홍콩의 정치와 경제, 사회는 이전과 같은 생기를 잃게 될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틀렸다. 홍콩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활기에 차 있다. 중국경제가 발전하면 할 수록 홍콩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중국이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이양받은 것은 1997년 7월 1일이었습니다. 당시 언론들은 '드디어 홍콩이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난리를 쳤었지요. 장쩌민 당시 주석은 홍콩에서 '香港明天更好(내일은 더욱 좋아질 것이다)'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반면 홍콩사람들은 죽을 맛이었습니다. 새 주인 중국공산당이 자기들을 어찌 대할지 맘 조리고 있었습니다. 홍콩의 '지주(부자)'들은 캐나다 호주 등으로 재산을 빼돌렸고, 해외로 몸을 피했습니다. 1949년 공산당이 대륙을 차지했기에 홍콩으로 도망 왔던 그들입니다. 이제 공산당이 홍콩마저 접수한 상황에서 이들이 해외로 떠나는 것은 당연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기우였습니다. 홍콩 반환 이전에 두각을 보였던 실업계 인사들은 지금도 여전히 부(富)를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 이들의 부는 중국 덕택에 더 크게 부풀었습니다. 증시에는 여전히 세계적인 투자자금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홍콩은 여전히 세계적인 금융 무역 물류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중국도 홍콩 덕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작년 해외증시에 상장한 118개 중국기업 중 54개 업체가 홍콩증시를 선택했습니다. 중국공상은행, 페트로차이나 등은 홍콩증시 덕택에 세계 최대 IPO(기업공개), 세계 최대 시가총액 업체의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홍콩이 중국기업의 국제자금 조달창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세계적인 금융중심지인 홍콩의 금융노하우는 중국 금융시장 발전의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홍콩과 중국은 지금 최고의 위윈게임을 즐기고 있습니다.
홍콩과 중국이 '일국양제(한 나라 두 체제)'라는 테두리에서 함께 위윈할 수 있었던 데에는 중국정부와 기업의 치밀한 사전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롱(榮)씨 가문'스토리는 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롱이런(榮毅仁)은 1979년 CITIC을 설립한 직후부터 홍콩을 드나들기 시작합니다. 홍콩 화교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지요. 홍콩의 유력 실업계 인사와 자주 교류를 갖습니다. 그리고는 흩어진 롱씨 가문의 재력가들을 모읍니다. 아들 롱즈지엔(榮智健)을 홍콩에 보낸 것도 다 전략적 이유가 있어서 였습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 롱즈지엔는 기대 이상으로 아버지의 기대를 만족시키며 홍콩에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1986년 롱이런이 아들을 부릅니다.
"CITIC 자회사를 홍콩에 만들어야 겠다."
"그래야겠지요. 당연합니다"
"네가 맡아야 겠다. 경영할 사람은 너 뿐이다"
(롱즈지엔은 한 참을 고민한 후 답합니다.)
"조건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인사 채용의 완전한 자율권, 둘째는 사사건건 보고가 아닌 포괄보고입니다."
"좋다.보장하마"
롱즈지엔이 2005년 10월 사망한 부친의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고 있다
그렇게 중싱홍콩(中信香港)이 태어나게 됩니다. 2억9000만 홍콩달러가 대륙에서 지원됩니다. 롱즈지엔은 부회장 겸 총경리로 임명됐지요. 그는 철저히 자기가 원하는 홍콩인으로 직원을 채용, 회사를 꾸려나갔습니다.
롱즈지엔의 첫 사업은 영국계 '케세이 퍼시픽(Cathay Pacific)'항공 지분인수였습니다. 주변에서는 다들 말렸습니다. 86년 당시 항공업은 매력적인 분야가 아니었습니다. 이사회 조차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롱이런은 아들을 믿었습니다. 롱즈지엔은 본사에 사업보고를 했고, CITIC는 보고 5일 만에 승인했습니다. 국무원(정부)는 8억 위안의 매수자금을 바로 쐈습니다. 중신홍콩은 이 돈을 종자돈으로 삼아 총 23억홍콩달러를 들여 케세이 퍼시픽 지분 12.5%(현재 17.5%)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게 신호탄이었습니다. 롱즈지엔의 기업사냥, 인수합병(M&A)이 시작됐습니다. 1990년에는 홍콩 제2의 항공사인 드래곤에어를 인수했고, 이어 홍콩전신 지분 20%를 사들였습니다. 1991년에는 종합 유통업체인 헝창(恒昌)을 사들이게 됩니다. 이를 위해 청콩실업의 리자청(李嘉誠), 말레이시야계 화교이자 홍콩 자리(嘉里)그룹 회장인 궈허넨(郭鶴年), 홍콩신세계그룹의 정위통(鄭裕통)등의 실업인들과 연합을 하기도 합니다. 결국 40억 홍콩달러로 70억 홍콩달러의 기업을 사들이게 됩니다.
당시 홍콩경제계에서는 '뱀이 코끼리를 삼켰다'고 난리가 났었지요.
그렇다면 '롱즈지엔 함대'의 모선인 홍콩증시 상장사인 중신타이푸(中信泰富,영어 CITIC Pacific)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요?
1986년 롱즈지엔은 홍콩상장사 하나를 사들입니다. 타이푸(泰富)발전공사라는 회사입니다. 이 회사를 사들 임으로써 CITIC홍콩은 우회 상장하게 됩니다. 1991년 타이푸발전공사는 이름을 '중신타이푸(中信泰富)'로 바꿔었고, CITIC홍콩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회사가 바로 지금 홍콩증시에 상장된 대표적인 'R주'인 '중신타이푸, CITIC Pacific입니다.
중신타이푸의 상장과정은 'R주'가 어떻게 생겨나게 됐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R주의 정의에 대한 얘기는 사이트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woodyhan&folder=1&list_id=9549644&page=)를 참조하십시요.
중신타이푸는 지금 철강(특수강), 부동산개발 및 관리, 항공, 도로 터널건설, 전력, 유통, 통신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홍콩섬과 주룽(九龍)반도를 잇는 여러 터널 중 이스턴터널을 만들었습니다. 상하이 양저우 등에 부동산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기도 합니다. 작년 결산보고서를 보니 약 450억 홍콩달러(약 6조 원)의 매출액에 115억 홍콩달러의 수익을 거두었더군요.
CITIC가 CITIC홍콩을 세운 것은 중국 국무원(정부)의 뜻입니다. 그 지분구조를 보면 금방 압니다. 중신타이푸의 대주주는 CITIC홍콩이고, 그 CITIC홍콩의 대주주는 베이징의 CITIC이고, 그 CITIC의 대주주는 중국정부입니다.
CITIC홍콩은 홍콩경제 흡수하겠다는 중국정부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됩니다. 실제로 중국 기업들은 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대거 홍콩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중국 정부가 적극 독려했지요. 홍콩반환 10년 앞두고 중국정부의 홍콩 경제접수가 시작됐던 겁니다.
반환후 홍콩과 대륙이, 홍콩증시와 상하이증시가 윈-윈게임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들 기업인이 있었고, 그 중심에 롱씨 가문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중국증시를 얘기하면서 롱씨 가문의 행적을 뜯어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어쨌든, 롱즈지엔은 홍콩드림을 완성했습니다. 2003년부터 중국 최고의 부호로 꼽히게 됐으니까요. 중신타이푸의 주식 25%는 임직원이 갖고 있고, 이중 18%는 롱즈지엔의 몫입니다. 그는 회사의 제2대 주주이기도 합니다. 최근 발표된 중국 신차이푸(新財富)잡지의 '500대 중국 부호'조사에서 롱즈지엔은 개인재산 350억 위안으로 7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중신타이푸의 이사진 명단을 보면 롱즈지엔 말고 다른 롱씨 성의 이사가 한 명 나옵니다. 롱밍지에(榮明杰)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롱즈지엔의 아들입니다. 현재 상하이 중신타이푸빌딩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롱즈지엔의 후계자로 인식되고 있기도 합니다.
롱씨 집안은 더셩(德生)-이런(毅仁)-즈지엔(智健)의 3대를 넘어 밍지에(明杰) 4대로 흘러가고 있는듯 합니다.
'부는 3대를 넘기지 못한다(富不過三代)'말이 있긴 합니다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