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만춘’ 이후 고구려의 운명은

안시성전투에서 양만춘 장군의 화살 한 대로 쫓겨 간 당 태종은 중국인들에게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황제 중 한 명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 태종 이세민(서기 599~649년)은 13세부터 수많은 전투에 참전한다. 백여 명에
가까운 적장을 단 한 대의 화살로 떨어뜨렸고, 그의 모습만 보아도 적장이 말에서 떨어졌다는 중국의 명장이기도 하다.
수차례의 무모한 고구려 침공에 실패한 수(隋) 나라(서기 581년~618년)가 망해가자,
그는 수나라의 대신인 아버지 이연(당 고조)에게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을 간언한다. 곧 아버지를 도와 당나라(唐, 서기 618년~907년)를
세운다.
그는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태자인 형 이건성을 죽이고, 아버지를 상왕으로 몰아낸 뒤
2대 황제에 오른다. 이후 적극적인 치세로 당나라를 점차 대제국으로 키워간다. 현명한 재상인 ‘장손무기’의 동생을 황후로 맞이하고, 독설과
직간으로 유명한 ‘위징’의 간언을 그가 죽을 때까지 경청하였다.
문무겸전의 큰 능력으로 내치를 두텁게 하는 한편, 주변의 다른 민족을 차례로 복속시키면서
땅을 넓혀갔다. 또한 ‘왕희지’의 필법을 사랑하였고, 그 자신이 명필의 반열에 드는 황제였다. 이세민은 ‘제왕학의 교과서‘로 유명한 '정관의
치(貞觀ㅡ治)’를 정립할 정도로 역대 중국 황제 중의 황제가 되었다.
이토록 막강한 당 태종이 신라와 함께 연합하여 이번에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동쪽 천자의
나라’ 고구려를 친히 정벌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하늘 아래 오직 이세민만이 천자(天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침공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구려에게 패한 후 “고구려를 다시는 침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그러나 양만춘 장군은 모함을 받아 7년간 죄인으로 감옥에 있다가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풀려난다. 그의 세 아들 중 남건, 남생이 대립하자 고구려는 혼란에 빠진다. 이를 틈타 이세민의 아들 당고종 이치(서기 628년~683년)는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고구려를 공격한다.
동맹국 백제마저 망하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니 서기 668년이다. 비록
평양성은 항복하나 아직 무너지지 않은 요동의 11개의 성이 고구려 부흥을 위해 당나라에 항거한다. 그러나 당나라의 장수 ‘설인귀’에게 하나하나
항복하거나 함락되었고 마지막으로 양만춘 장군의 안시성만이 남았다.
양만춘 장군도 최후의 항전을 벌이나 사방에서 온 지원군 요청에 총 2만의 군사 중 1만을
보낸다. 양만춘 장군은 남은 1만으로 처절하게 버티나 희망이 없음을 알고, 아끼는 장수에게 남은 군사 5천 명 중 8백 명을 때어주며 탈출하게
한다. 그들은 수로를 통해 무사히 신라로 간다.
당나라의 파상공세 속에 나머지의 안시성 고구려군은 모두 전사하고 만다. 이때 양만춘
장군도 부하들과 함께 전사하니 마지막 순간까지 고구려를 가슴에 안고 돌아가신 천하명장, 절세충신이다.
양만춘 장군은 역사서에는 이름 없이 ‘안시성 성주(城主)’로만 기록되어 있으나 송준길의
『동춘당선생별집』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의해 양만춘(梁萬春, 楊萬春)으로 밝혀졌다.
고구려 멸망 30년 후인 서기 698년, 드디어 대조영에 의해 일명 ‘밝은 해의 나라’
인 ‘발해’가 건국된다. 발해는 태학에서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치며 수도가 다섯 군데나 되는 크고도 문화가 융성한 ‘해동성국’이 된다.
이정기 장군(서기 732~782년)은 중국 산둥 땅에 고구려의 후신인 제(齊)나라를 세운다. 당나라의 장군이 된 고선지(서기?~755년)는
고구려 요동성 태수 고사계의 아들로 실크로드를 제패(制霸)한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고구려인에게는 문무겸전의 선도수련의 결과인 ‘충성의 역량과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민족역사문화공원을 입구에서 지켜주시는 분이 바로 광개토호태왕이다. 그 충성심을 이어받은
분이 약 250년 후에 활동하신 양만춘 장군이고 대조영, 이정기, 고선지, 충무공 이순신 장군으로 흘러 내려왔다.
이제는 우리가 양만춘 장군이 되어야 한다.
‘양만춘’이라는 흰 날개에 맞아 검은 꽃 '이세민'이 지다
외세의 침략을 유난히 많이 받아온 우리역사에는 민족을 이어오기 위하여 목숨으로 나라를
지키신 분들이 많고 많다. 한민족역사문화공원에는 비록 그 모습이 모셔져 있지는 않지만 고구려 양만춘 장군도 그중 한 분이다. 불세출의 명장인
그는 지금으로부터 1370년 전인 서기 645년 6월 20일부터 9월 18일까지 치열하게 벌어졌던 고구려와 세계 최강대국인 당나라와 맞붙었던
‘안시성전투’의 주인공이다.
당나라의 태종 이세민은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고구려 침공을 결심한다. 천하의 명궁이자
절대지지 않는 장수로도 유명했던 이세민은 당나라를 세워 굳건하게 만들었다. 이세민은 지금도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 명의 황제 중 한 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존의 황제가 직접 전투에 참가하기 위하여 치밀한 계획으로 군량·선박·각종 전투 기구를
준비하는 한편, 소수의 병력을 파견해 고구려 변경지대의 형세를 정탐한다. 이어 당나라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영류왕과 대신들을 살해하고
집권했으므로 성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시에 공격해 온다. 수송부대까지 합쳐 100~104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645년 4월 1일 당나라 장군 이세적이 이끄는 선봉은 회원진(현, 광녕 부근) 쪽으로
진군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통정진(현, 신민 부근)에서 요하를 건너 고구려 침공을 개시한다. 고구려의 혼란을 위해 여러 성을 동시에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당나라는 전군을 집결시켜 4월 15일부터 ‘개모성’(현, 무순 고성자 토성)을 공격, 26일에 함락시킨다. 장량이 이끄는 당나라
수군은 요동반도의 천연의 요새인 비사성(현, 대련만 배안)을 5월 2일 함락시킨다.
한편 당태종 이세민도 요하를 건너와 이세적의 군대와 합류, 19일간에 걸친 집요한 공격
끝에 요동성(현, 요양), 6월 10일에는 난공불락의 백암성(현, 연주성)을 함락시킨다. 백암성 함락 후 다음 공격목표를 안시성(현, 해성 동남
영성자 산성 비정)으로 정하고, 6월 20일 총공격을 시작 한다.
이에 고구려는 고연수와 고혜진으로 하여금 고구려와 말갈병 15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게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오히려 당 군의 포위공격으로 살아남은 3만 6,800명의 군사와 함께 항복한다. 당 태종은 여세를 몰아
안시성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한다.
이에 반해 고구려는 안시성 구원군의 패배, 신라의 배후 공격, 북아시아의 새로운 강자
설연타와 제휴 실패로 안시성 지원능력을 완전하게 상실한다. 안시성은 고립무원의 갇혀버린 섬이 되고 만다.
그러나 안시성은 성주(城主) 양만춘을 중심으로 88일간의 결사적인 항쟁으로 결국 당나라
대군을 물리친다. 이 전투 중에 당 태종 이세민은 양만춘 장군의 화살에 눈을 잃고 황망하게 퇴각하였다고 한다. 서기 647년, 당나라군의 고구려
2차 침공도 실패하자 병이 깊어진 이세민은 서기 649년, “절대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고려 후기의 대학자 목은 이색(1328년∼1396)은 ‘정관음(貞觀吟)’라는 시를 지어
고구려의 안시성을 지켜낸 천하명장이자 절세충신인 양만춘을 추모하였다.
爲是囊中一物爾 위시낭중일물이 / (당태종은 고구려를) 주머니 속에 있는 한 물건인줄
가벼이 여겼으나
那知玄花落白羽 나지현화낙백호 / 뉘 알았으랴, 검은 꽃(당태종의 눈)이 흰 날개(양만춘의 화살)에 (맞 아) 떨어질
줄을.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가 그 옛날 안시성과 다를 바 없다. 모든 국민들이
양만춘의 마음이 되어 나라를 지켜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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