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인권문제
한 국가의 삶의 질을 논할 때 중요한 지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그 나라의 국민들이 얼마나 인권을 보장받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억압과 착취, 차별과 폭력이 종식된 세계에서 살고자 했던 것은 근대 계몽주의자들의 공통된 희망이었고, 마르크스는 이런 희망의 프로젝트를 '인간해방'이라고 불렀다.
인권 유린의 사례는 전쟁과 같은 극한적인 상황에서 쉽게 발생하지만, 일상적인 맥락에서도 잘못된 관습이나 제도에 의해 인권은 끊임없이 침해당한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나 세르비아 민병대가 저지른 인종말살책과 같은 것은 전자의 대표적인 사례이고, 이슬람 문화의 명예살인이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CEO가 가져가는 월급의 20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월급으로 연명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삶은 후자의 예에 해당할 것이다.
인권이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권이 인간의 보편적 본성에 그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권문제는 국경이나 인종, 민족을 초월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누려야할 기본적인 권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인권문제에 대한 문제제기가 그렇게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미국이 중국과 북한의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내정간섭으로 여겨진다. 중국이나 북한과 같은 사회의 정치지도자들은 인권 개념 자체가 서구적인 것이며, 그런 개념으로 자신들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간섭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슬람권의 여성들이 히잡을 쓰고 다니는 것에 대해 서구인들이 간섭하는 것을 부당하게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는 인권과 같은 개념을 근거지울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타 문화권이나 국가에서 벌어지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상황에 대해 문화적 차이를 이유로 들어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도 인권문제는 미묘한 정치적 문제가 되고 있다. 북한의 경제가 열악해 지면서 인권상황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없다. 식량이 부족해서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중국의 인신매매단에 팔려가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북한으로 송환되어 사형을 당하기도 하는 상황이다. 한국 사람들이 그동안 정부의 북한에 대한 원조를 지지한 것은 적어도 굶어죽는 동포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동포애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진보나 좌파를 내세우는 정파에서는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언급하거나 논의의 주제로 삼는 것을 금기로 여겨왔다.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나 비규정규직 노동자, 여성, 도시빈민, 농민 등과 같은 경제적 약자의 인권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북한의 기아선상에 있는 인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로 여겨져 왔다. 실용주의자들의 입장은 이런 태도가 정당한 것인가 하는 물음을 통해서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다윈주의자들이다. 즉, 인간의 보편적 본성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권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보편적 본성에 그 철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질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하면 곧바로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인권이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실용주의 철학자들이 인권이 인간의 보편적 본성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고 보고 있는 것과 '인권'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현금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실용주의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권을 주장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론적으로 그와 같은 권리가 내재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약자가 부당한 힘에 의해서 희생당해서는 안 된다는 당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로티는 인권이 인간의 보편적 본성에 근거해 있다는 인권근본주의가 플라톤주의의 잔재일 뿐이라고 언급하면서 "인간이 진정으로 헬싱키 선언에서 열거된 권리를 가지고 있느냐는 물음은 쓸모없는 물음"이라고 주장한다.
인권이라는 말을 할 때 일상적으로 사람들은 그것이 진정으로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권리인지 묻지 않는데, 철학자들만이 그 문제에 대해 비생산적인 논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질주의 철학자들은 만약 인권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서구 이외의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인권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용주의자의 관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개념의 철학적 정당성 여부가 아니라, 그 개념이 적용되어 가져오게 될 사회적 효과이다. 만약에 인권이라는 개념이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상황을 개선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실용주의자의 입장에서 그 개념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리고 인권문제가 제기됨으로써 사람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역사적 사례들만으로도 인권이라는 개념은 충분히 정당화될 수가 있다.
실용주의자들의 정치적인 과제는 '인간해방'을 꿈꾸었던 계몽주의자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근대의 계몽주의자들이나 서구의 대부분의 합리주의적 정치철학자들이 그런 인간해방의 희망이 보편적인 철학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데 반해 실용주의자들은 그런 철학적 정당성의 여부를 따지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하버마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모든 대화상황의 전제이며, 정치적인 갈등의 상황에서 상호합의로 나아갈 수 있는 근거는 그와 같은 합리성에 의해서 무엇이 진리인지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로티는 이것이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의 시도라고 간주한다. 로티 역시 자유의 확장과 관련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현존하는 가장 탁월한 제도라고 보는 일종의 서구중심주의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로티는 서구의 자유민주주의가 확장되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 철학적인 정당성을 가진 제도여서가 아니라 인간의 사회에서 잔인성을 감소시키고 개인의 자유를 확장시켜 온 역사적 결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용주의자들은 지역적, 문화적 차이를 떠나서 모든 전체주의 정부에 대해 비판적이다. 전체주의는 개인들의 삶을 획일화하고, 자유롭게 살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나치와 스탈린의 소련은 실용주의자의 눈에는 모두 전체주의 국가라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정치적 자유를 제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의 공산당 정부와 북한의 김정일 체제 역시 실용주의자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다.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독재자의 사욕을 채우는 데 이용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독재국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실용주의자에게 있어서 원조를 통해 북한 인민을 기아선상에서 구하는 일과 북한의 전체주의적인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일은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만약 북한의 정권이 위기에 빠짐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면, 실용주의자로서는 당연히 그런 위험은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수많은 인민의 목숨을 담보로 실패한 독재정권의 생존게임을 지지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용주의자로서는 북한의 전체주의적인 체제가 민주화될 수 있는 방안, 북한 인민의 생존권과 자유가 확보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와 잔인성의 감소, 자유의 확대라는 실용주의자들의 정치적 과제는 한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악화시키는 경제적 약자의 인권문제와 더불어 북한의 정치체제로 인해 고통당하는 북한인민의 인권문제를 동시에 제기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진보를 요구한다. 인간의 삶을 끊임없이 개선시키는 것을 지식의 목표로 간주하는 실용주의자들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태생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에게 진보는 인간의 보편적 본성을 구현하는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요소들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극복해 나가는 실천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