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 이후 부산항 중심 극성 - 정부 사회악 규정 단속 사활 - 계몽영화 '여명' 만들어 홍보
- 세관수사직원 살인사건 당시 - 시대적 배경 담아 제작하기도 - 최근 '범죄와의 전쟁' 등 인기
밀수범은 정상무역의 궤도를 벗어난 무법자로 무역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다. 그동안 부산항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해상관문으로서 밀수 본산이라는 아름답지 못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과거 밀수의 특성을 보면 사회가 혼란스럽고 경제가 어려울수록 더욱 활개를 치는 속성이 있었다. 특히,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밀수는 더욱 성행해서 나라 경제를 어렵게 만들었다. 해방 후에는 중국 정크선에 의한 밀수, 한국전쟁 이후는 대마도 특공대 밀수, 1970년대는 대일활어선 및 냉동운반선에 의한 밀수, 1990년을 전후해서는 컨테이너를 이용한 합법가장밀수 등이 주로 부산항을 중심으로 남해안 일대에서 극성을 부렸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밀수를 사회악처럼 범죄시하면서 단속에 사활을 걸기도 했다.
밀수 근절을 위해서 세관을 비롯한 관계기관에서 직접 단속을 펼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초창기에는 사회 계몽운동을 통한 근절방법도 하나의 강구책이 되었다. 농촌계몽을 위해서 심훈의 '상록수'와 같은 소설이 나온 것처럼 밀수 근절을 위해서 하나의 밀수 계몽영화가 필요했다. 이런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가 1948년에 개봉한 안진상 감독의 '여명(黎明)'이었다.
어느 어촌지서에서 근무하는 권영팔, 이금용 두 순경이 있었다. 권 순경이 모범순경인데 반해 이 순경은 그렇지를 못했다. 어느 날 밀수배 이한종이 이 순경을 포섭하여 밀수품을 양륙한다. 그때 이 순경은 라이터를 뇌물로 받았다. 그랬지만 마침내 이 순경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지서 주임에게 사실을 자백함으로써 밀수배 일당을 일망타진하고 밀수품도 압수하게 된다는 줄거리다. 그러니까 민주경찰과 밀수 근절을 주제로 한 35㎜ 흑백 계몽영화였는데 영화 후원은 경상남도 경찰국 소속인 제7관구경찰청의 공보실이 했고 제작은 건설영화사가 맡았다. 당시 제작비는 450만 원이었는데 출연진은 이민자·권영팔·이금룡·황남 등이었다. 영화는 흥행 여부가 중요한데 밀수근절이라는 계몽성을 너무 강조한 영화여서 그런지 흥행에서는 실패했다.
이 영화에 이어서 1949년에 재무부 관세국에서도 밀수의 해악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협조를 구하고자 제2탄 밀수 계몽영화를 만들려고 촬영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한국전쟁 발발로 끝내 이 영화는 무산되고 말았다. 이어서 만들어진 밀수영화는 정경준 감독의 '밀수선'이었다. 남보영화제작소가 1955년 8월에 부산에 있는 영화인을 중심으로 해양경찰대의 후원 아래 평화선(平和線) 근해에서 촬영하였다. 그리고는 2년 후인 1957년 12월 초에 상영하였고, 출연진은 신동훈·황순덕·이두한·이월호·이유화·나종범·장식준 등이었다. 개봉을 앞둔 영화광고에는 '한국 최초의 해양 대활극'이라고 소개가 될 정도로 이 영화 소재는 당시 부산을 중심으로 남해안에서 극성을 부리던 대마도 특공대 밀수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75년 우리나라 '10대 뉴스'에 밀수 관련 사건이 하나 들어있었다. '여수·부산밀수사건'이다. 그해 8월 여수세관에서 세관수사직원이 밀수선 선장의 아들에게 흉기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정부는 즉시 이 사건을 하나의 공권력 도전으로 보고 여수를 시작으로 부산에 초점을 맞춰 밀수조직에 대한 강력한 소탕작전을 펼쳤다. 당시 남해안의 몇몇 도시는 밀수 소문이 자자한 터라 어디로 수사의 손길이 갈지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여인광 감독의 '아이스케키'였다. 여수지역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2006년에 개봉했는데 아이스케키 장사로 돈을 벌어 얼굴도 모르는 아빠를 찾아가려는 소년 영래(박지빈) 어머니(신애라)의 직업이 밀수화장품을 팔러 다니는 장수였다. 그리고 최근 부산지역의 대표적인 밀수영화는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을 들 수 있다. 1980년대 중후반의 부산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폭력조직과 연계된 마약 밀반출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초창기 밀수영화가 계몽성이 짙은 영화였다면 근래에 와서는 그 실상을 흥미 있게 고발하는 영화로 변화했다. 오늘날은 이야기 시대다. 예전 부산항 주변에서 있었던 무수한 밀수 이야기는 이제는 버릴 수 없는 하나의 자산이요 문화콘텐츠다. 이걸 소재로 더러 흥미진진한 밀수영화가 만들어져서 부산의 영화 바다가 풍성해졌으면 좋겠다.
부산세관박물관장
장기빈 초대 부산세관장 손자·종손 초청행사
"60여 년 만에 현대화된 세관 건물을 마주하니 감회가 남다르네요." 정부 수립 이후 초대 부산세관장을 지냈던 장기빈 씨의 후손이 부산을 찾는 뜻깊은 시간이 마련됐다.
부산세관은 지난 2일 장기빈 전 세관장의 손자인 장익(왼쪽) 신부와 종손 장명선(오른쪽) 씨를 초청했다. 이번 행사는 부산세관의 역사 바로잡기 사업의 하나로, 올해 장 전 세관장의 이름을 딴 고속 감시정 장기빈호가 최우수 감시정에 선정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있다.
장 전 세관장은 1948년부터 1년 6개월 간 초대 부산세관장을 지낸 인물이다. 정부 수립 이후 신식 세관 업무를 맡을 전문가가 없었던 시절 대한민국 세관 업무의 초석을 다졌다. 장 신부는 "할아버지는 뛰어난 영어 구사력을 바탕으로 신식 교역과 관세 업무를 맡았다"며 "광복 이후 이승만 박사로부터 초대 세관장 적임자로 추천받으신 사실을 가까이에서 모셔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 신부는 1993년 제6대 천주교 주교로 서품을 받은 뒤 2010년까지 춘천교구장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장면 부통령이다. 이용득 세관박물관장은 "1948년 당시 아버지는 70대에 세관장이 되고, 아들은 50대에 주미 초대 대사를 갔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장 신부 집안은 명문가"라며 "요즘 말로 자손 대대로 '엄친아'를 배출했다"고 설명했다.
장 신부 일행은 세관박물관을 관람한 후 장기빈호 내부를 둘러본 뒤 공식 일정을 마쳤다. 장 신부는 "관세청이 처음으로 직접 설계해 제작한 배에 할아버지의 이름을 붙여줘 감사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