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종착역 10 (2019 사토 아이코)
10 인생은 자신의 힘으로 개척해야, 의지하려는 마음이 한탄스럽다.(88세 부인공론 2012년 5월 7일호)
10-1 그때는 그때.
돌이켜보면 50대부터 '노후'에 대해 여러 가지 글을 써왔습니다. 그로부터 80대인 지금까지 노후 경력은 상당히 길어졌습니다. 요즘은 연금이 상당히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만, 저는 세상사에 관심을 가질 틈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고, 만사에 무관심하여 연금가입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연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민건강보험에도 가입하지 않았습니다만, 보험 담당자가 와서 의무라고 해서 가입한 것이 40대 후반이었습니다. 그때 연금도 의무라고 알려 주었으면 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연금 같은 것은 가입하고 싶은 사람이 가입하면 되기 때문에 가입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가입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 일할 수 없게 되면 나라에서 돈을 받다니, 그런 겁쟁이 정신으로 어떡해!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애초에 별로 재능도 소양도 없는데 작가가 되려고 한 것도 무모하고, 나중에 지쳐 길거리에서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 때는 그때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佐藤紅緑사토고로쿠1874-1949작가)의 영향일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생명 보험이나 화재 보험 따위를 몹시 싫어했습니다. 나의 경우는 의리나 끈질긴 권유 때문에 가입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 보험금이 얼마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불이 나봐야 알 수 있을 거라는 황당한 생각을 가졌으니까요.
이혼이나 빚, 화재, 지진 등 인생에서는 여러 가지 위기가 일어납니다. 그때는 그때 힘을 발휘하면 되는데 미리 걱정해서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기를 염원하고 있으면 소극적이 되어 생활이 위축되어 버립니다. 인생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남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을 체험함으로써 국가가 국민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잃게 된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으니까요, 어떤 사태가 되어도 자기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겠다는 각오 같은 것이 언젠가부터 생긴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것은 사토 씨, 당신 혼자만의 생각이다' 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10-2 통장을 안 보게 된 이유
그래도 20대, 30대 때는 돈을 모으고 가계부를 쓰며 일희일비한 적도 있었습니다. 가난했으니까요. 그러다 남편이 파산해 큰 빚을 진 뒤로는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돈을 휴지조각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또한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살기 힘든 나날이었으니까요.
남편 회사가 도산한 것은 내가 마흔두 살 때의 일로 남편은 도망가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빚쟁이는 내게로 몰려 왔습니다. 그 무렵 저는 한 장에 오백엔의 원고료로 소녀취향의 소설을 쓰고 있었고, 그것은 용돈 정도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수입이어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집에 있는 물건을 팔고 돈을 만들어 빚쟁이에게 넘기곤 했습니다.
돈 때문에 안색을 바꾸고 다그치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모든 것이 싫어졌습니다. 그렇다고 빚을 갚지 않을 수도 없어 의기소침하여 앞일 같은 건 생각치도 않고 변제약속 서류에 도장을 찍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전쟁터에서 총알이 앞에서 날아올 때 되돌아 볼 틈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심정이었고나 할까요. (웃음)
변제액은 총 3천5백만엔 정도였고 어쨌든 글을 쓰고 그 원고료를 변제에 충당할 수밖에 없었던 나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다행히 마흔다섯 살 때 빚을 지게된 전말을 소재로 쓴 소설 '분투의 나날들'로 나오키상을 받았습니다. 수상 후 집필 의뢰가 오게 되면서 목돈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빚청산을 할 수 있었습니다.
노후대비 말인가요? 노후대비라는 의식은 없지만, 무엇을 갖고 싶다, 이렇게 저렇게 하고 싶다는 등의 욕망은 나이가 들 수록 쇠퇴하기 때문에 별로 돈을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세가 자연스럽게 얼마간 쌓여 있겠지만 어느 정도 쌓여 있는지 관심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가계부를 쓰지 않게 된 것도 남편의 빚을 지고 있을 때, 내 통장은 항상 제로였고, 수입이 있어도 들어온 돈은 빚을 갚기 위해 잠시 통장을 거쳐갔기 때문에 가계부 같은 것은 쓸 필요도 없었습니다.
빚쟁이가 도대체 몇 명이고, 한 달에 얼마를 갚고, 얼마가 들어 있는지 계산할 처지가 아니라서 일체 통장을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7, 8년이 지난 어느 날, 통장을 확인하니 "어, 남아 있어!" 통장에 돈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계속 깔끔했던 통장에 드물게 돈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설레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홋카이도에 집을 짓는 바람에 또 제로로 만들어 버린 적도 있었지만 빚 때문에 걱정하며 산다든가, 불행하게 생각한다든가, 그런 일을 당하게 한 남편을 원망한다든가 하는 등의 마음은 일절 없었습니다.
스스로 나서서 빚 변제를 한 일이었으니까요. 원망할 바에는 아예 처음부터 하지 않았겠지요. 이러한 밑바닥 체험을 한 덕분에 뭔가를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10-3 의존에 익숙해져 버린 일본인
2, 30년 전에 '즐거운 노후'라는 문구가 유행했습니다. 지금은 국가 재정이 파탄이 나서 '불안한 노후'가 된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노후를 불안해하느냐 하면, 일본인은 사치의 경험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옛날에는 가난은 비극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어서 원하는 것을 살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치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에 남들과 비교하게 되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하면 불만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노후에 수입이 없어질 것을 생각하면 더욱 걱정이 커지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본인은 의존증에 중독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젊은 시절에는 의존하고 싶어도 아무도 의존하게 해주지 않았고, 어쨌든 스스로 어떻게든 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어려운 사람이나 약자에게는 국가가 원조하는 구조가 생겨서 옛날에 비하면 잘 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불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입만 열면 불만과 요구만 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전쟁 전, 연금은 일부 사람을 제외하고는 없었기 때문에 노후에 대비해 검소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검소 검약이 당연한 것이었고 미덕이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당시 어른들의 생활 방식을 봐 왔기 때문에,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살면 된다는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부자일수록 검소 절약을 실천했습니다. 경제적인 풍요만이 행복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허둥대는 일은 없게 됩니다. 그럼 욕망을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데, 그런 것은 스스로 생각할 일입니다, 무엇이든 남에게 묻는 버릇을 버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니까. 여러 가지 괴롭고 여의치 못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돈이 없어서 걱정이고 그래서 노후가 걱정이다라고 말들합니다만, '그건 그 때가 되어 부딪혀 볼 일"이라는 오기를 가지고 부딪혀 봐야죠.
10-4 도와주는 것도, 도와주지 않는 것도 자유.
노후를 대비해서 저축해 왔는데 불황이 되는 바람에 아들 가족이 손을 벌려 저축이 줄어들게 되었다는 푸념을 주변에서 들은 적이 있는데, 아, 시대는 이렇게까지 정이 매말라 가는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과거 3대, 4대가 함께 사는 것이 당연했을 때는 고부 간의 갈등이나 자유의 제약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인내하며 생활했다. 그러던 것이 핵가족이라는 것이 생겨 각자 독립 생활을 하게 되면서 갈등이 없어짐과 동시에 가족의 정이라는 것이 희박해져 버린 것입니다.
다세대가족 시절에는 젊었을 때 부모에게 짓눌려 살아 괴로웠지만 대신 노인이 되면 평안이 마련돼 있었다. 아들 때문에 '재산이 줄어든다'는 푸념을 하기보다는 아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정이 솟는 것입니다. 핵가족으로 오랫동안 지내다 보면 그 정이라는 것이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그건 불행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 '백수' 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부모는 게으른 자식을 내쫒았습니다. 세상에 나가서 자기 일은 자기가 처리하라고. 그런데 지금은 시대를 탓하며 탄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취업난이라고 하는데 이건 자기 마음에 드는 직업이 없다는 겁니다. 먹고 살려면 뭐든지 하겠다는 용기가 없어지고 힘들고 험한 일을 싫어하게 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외국인들이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게 좋다, 저게 싫다는 이런 사치스러운 소리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시대를 탓하는 것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이런 현상은, "아이의 주체성을 인정하라"든가,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야한다"든가 하며 아이들을 과보호하며 키워 온 결과입니다.
아이의 입장에 선다---그것의 무엇이 잘못된 일이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주의(主義)라면 어쩔 수 없지요. 그 대신 몇 년 후에 문제가 생겨도 불평하지 말라는 게 내 인생관으로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10-5 매일매일의 검약 정신을 소중히.
내가 지금 바라는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입고 있는 것도 30년 정도 전의 기모노입니다. 어머니는 메이지시대 태생의 검소한 사람으로 검약 정신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싼 게 비지떡"이라고 해서 조금 비싸도 좋은 것을 선택하여 오래 사용한다는 것을 어머니로부터 배웠습니다
한번 산 가구나 옷은 모두 내구성이 좋기 때문에 오래 동안 아무 것도 사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에 지겨겹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나이가 되면 새로운 것을 사는 것은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살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아까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존경해 온 영험한 분으로부터 "사토 씨는 아흔 살까지 살 것 같습니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러고 보니 앞으로 2년. 지금까지 이것저것, 시시한 것만 마구 써 왔으니, 마지막에 제대로 된 것을 쓰려고 장편에 착수하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매일 글쓰는 일이 소중하기 때문에, 완성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다 보람이 있으니까요. 딸에게도 말한 적이 있습니다만, 뭔가 창의적인 일을 하고 있으면, 가난 따위는 조금도 괴롭지 않습니다. 남의 눈에는 불행해 보여도 본인은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앞일을 이것저것 걱정한다든가, 남을 탓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그동안의 삶에서 무엇을 해왔으며 무엇을 해야 할까를 생각해보면 불평불만이 가라앉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못마땅함이나 불합리함을 포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포기하지 못하면 언제까지나 불행해 집니다. 역시 나는 밑바닥까지 떨어진 적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인생은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는 것입니다.
(88세 부인공론 2012년 5월 7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