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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직의 장편소설 '혈의 누'가 1906년 7월 22일부터 '만세보'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이후 같은 해 10월 10일까지 50회에 걸쳐 연재되었는데, 문학적인 수준이나 가치로 보아 이전의 유명무실한 신소설보다 '혈의 누'가 우리 문학사상 최초의 신소설로 평가된다. 상편은 '만세보' 연재로 끝났고, 하편에 해당하는 '모란봉'은 1913년 2월부터 6월까지 63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되다가 미완성으로 끝났다.
1822년 --- 멘델의 법칙을 확립한 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 성직자 멘델(Gregor Johann Mendel, 1822~1884) 출생
/1884년 1월 6일 죽음
▲ (1995년 발행-'강제수용소 해방 50주년 기념' 우표인데 내용과 잘 맞는지 몰라.... ^.^)
박인수 진술에 의하면 자신의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것이 발단이었다고 한다. 충격으로 인한 군기문란과 근무지 무단이탈이 문제가 돼 불명예 제대한 뒤부터 여성편력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대학 재학 중 6ㆍ25 발발로 군에 입대했던 것 만은 분명하다. 해군 대위로 재직시 해군장교구락부, 국일관, 낙원장 등 고급 댄스홀을 드나들며 익혔던 사교춤은 제대후 그가 카사노바의 길로 들어서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훤칠한 키, 떡벌어진 어깨에 매너까지 갖춘데다 반납하지않은 신분증과 공무집행증도 그에게는 중요한 무기였다. 제대후 1년동안 그를 거쳐간 여성은 70여명. 대학생이 대부분이었고 상류층 출신도 많았다. 재판이 시작되면서 '색마'로 낙인찍힌 그를 보려고 수천명의 방청객들이 몰려들어 법정은 언제나 아수라장이었다.
1955년 7월22일, 감춰졌던 성모럴을 만천하에 공개한 박인수에게 1심 선고가 내려졌다.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 만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을 밝혀두는 바이다." 판사가 혼인빙자 간음죄에 대해 무죄선고를 내리자 방청석 곳곳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녀관계에서 언제나 남성은 가해자, 여성은 피해자라는 의례적인 도식을 믿었던 탓이었다. 결국 박에게는 최종심에서 징역 1년이 선고됐다.
연극인 이해랑 출생/1916
연극배우·연출가. 본명 해량(海良). 서울 출생. 1940년 일본대학 예술과를 졸업하고, 41년 유치진(柳致眞)을 대표로 하는 극단 현대극장의 창립에 가담하였다. 광복 후 극단 <전선(全線)> <극예술원> 등을 창립하여 본격적으로 활동하였고, 54년 예술원 회원, 57년 중앙국립극장장, 58년 국제연극협회(ITI) 한국본부 상임위원 등을 거쳐 60년 동국대학교 교수, 62년 한국연극연구원(드라마센터) 극장장, 67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회장 등을 지냈다. 그는 연기·연출·연극관리 등의 분야에서 활동, 한국연극의 발전에 공헌하였고, 《오셀로》 《다이얼 M을 돌려라》 《밤으로의 긴 여로》 등 많은 작품에 출연 또는 연출하였다. 특히 1966∼75년까지 <이동극장운동>을 펼쳐 2800회 공연에 450만 명의 관객이 <연극>을 관람하였다. 1954년 서울시민문화상, 63년 예술원상, 68년 3·1 연극상,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받았다.
한국 샴쌍둥이 자매 민사랑, 민지혜(생후4개월) 분리수술 성공/2003
생후 4개월된 한국인 샴쌍둥이 민사랑. 지혜양 자매의 분리수술이 성공리에 끝나 마침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게 됐다.
싱가포르 래플스 병원 대변인 프렘 쿠마르 나이르 박사는 22일 "사랑. 지혜 자매가 오늘 오후 2시40분께(한국시간 오후 3시40분) 성공적으로 분리됐다"면서 "이들 자매가 분리된 후 중환자로 옮겨졌으며 현재 상태는 양호한 편이지만 수술경과를 세밀하게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사랑. 지혜양 자매는 이 병원 9층에서 분리수술을 받았으며, 분리된 뒤에는 특수 플라스틱이 사용되는 재생 성형수술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나이르 박사는 사랑. 지혜양 자매의 수술이 어른 샴쌍둥이보다는 단순하지만 분리 대상에 몇 개의 장기가 포함돼 있어 쉽지 않은 수술이었다고 강조했다.
엉덩이 부분이 붙은 채로 태어난 사랑. 지혜양 자매의 이날 분리.성형 수술은 당초 6∼8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됐었으나, 5시간30분만에 끝났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분리수술 뒤 24시간 교대로 돌아가며 이들 자매의 건강상태를 살피고 있으며, 향후 2∼3일간 외부와의 접촉이 철저히 차단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수술에는 샴쌍둥이 분리 수술의 전문가인 케이스 고 박사와 양칭유 박사의 집도하에 16명의 전문의와 50명의 의료진이 참여한 것으로 전해졌다.
양 박사는 "이들 자매의 분리 수술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고, 현단계에서 수술을 하지 않았으면 척추 기형으로 발전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할 뻔했다"고 말했다.
역시 수술에 참여했던 산부인과 전문의 통 파오 웬 박사는 "이번 수술에서 쌍둥이 자매의 항문 부분과 성기가 1㎜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이를 분리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면서 "일단 분리수술이 성공한데다 수술경과도 어느 정도 좋은 만큼 척추가 다시 정상적으로 자라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이르 박사는 "사랑. 지혜양 자매가 수술 후 최소 5일 간 집중 치료를 받은 뒤 일반병실로 옮겨 약 1주일 간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이라며 이들 자매는 앞으로 보행연습을 포함한 재활훈련도 받아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번 수술 비용은 사전 건강검진과 수술비용을 포함해 총 미화 2만8천400달러라면서 그러나 "의료진이 자신들의 모든 수술 수당을 포기했고 병원도 역시 일부 비용을 할인해줬다"고 설명했다.
래플스병원은 지난 8일에도 이란의 성인 샴 쌍둥이인 라단 비자니와 랄라 비자니 자매의 분리 수술을 시도했으나, 비자니 자매는 수술 후 과다 출혈로 1시간 30분만에 숨진 바 있다.
한편, 래플스병원측은 이날 경비원 2명을 병실로 올라가는 통로쪽에 배치, 로비에서부터 취재진과 외부인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는 등 `철통보안' 속에서 수술을 벌였다.
병원에는 사랑. 지혜양 자매의 부모와 외할머니가 있으며, 이들은 병원측의 요구로 취재진은 물론, 한국에 있는 친지들과도 일체 연락을 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인터넷 뉴스)
1950년 --- 총리 세번 역임한 캐나다 정치인 킹(W. L. Mackenzie King, 1874~1950) 사망
온타리오주(州) 벌린 출생. 토론토대학교·시카고대학교·하버드대학교 등에서 수학하였다. 캐나다 정치인으로는 처음으로 산업노동자의 이익을 대변, 노동문제의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노동차관과 노동장관을 역임하였다. 1908년 하원의원에 당선, 1919년 자유당의 당수로 추대되었다.
1921년 총리가 되었는데, 1930∼1935년의 공백기간을 제외하고는 1948년 정계에서 은퇴하기까지 총리직에 있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과의 군사협력체제 수립에 공헌하였고, 또 국제연합 성립에도 기여하였다.
1899년 --- 스와질란드 왕국의 왕 소부자 2세(Sobhuza II, 1899~1982) 출생
응그와네 5세의 아들. 좀보제 및 러브데일대학교를 졸업하였고, 1921년 헌법상의 통치자로 즉위하였다. 1907년 12월의 분할선언에 의한 국토의 상실을 없게 하여 달라는 청원 대표단을 인솔하고 런던에 다녀왔으며, 1941년에도 영국 왕 조지 6세에게 탄원하였다. 1967년 국왕이자 통치자임을 영국 정부로부터 공식으로 승인받았으며, 1968년 영연방 가맹국으로서 독립이 이루어져 국가 원수가 되었다.
1973년에 헌법을 정지시키고 국회를 해산, 모든 정당활동을 금지시킴으로써 독재체제를 강화하였다. 1978년에 국회의 재개를 승인하였으며, 1980년에는 구류 중이던 반체제 인사들을 석방하는 등 정치정세의 불안을 완화하려고 노력했다.
1898년 --- 모빌 조각을 창시한 미국의 조각가 콜더(Alexander Calder, 1898~1976) 출생
어머니는 화가였고, 아버지는 조각가였다. 1915~1919년 스티븐스 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였으며, 1919~1921년에는 자동차 기술자, 도안사, 능률기사, 보험회사 조사원, 기계 판매원, 지도 제작자, 기계 디자인의 식자공으로 뉴욕 ·코네티컷 ·미주리 ·오하이오 ·버지니아 주의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1923년 뉴욕의 미술학교 아트스튜던츠 리그에서 회화를 공부하였으며, 1926~1936년에는 주로 파리에 머물면서 P.몬드리안, J.미로, J.아르프, M.뒤샹과 사귀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1927년에 스튜디오에서 철사 ·나무조각 ·종이 ·가죽 등 여러 재료로 만든 서커스 단원과 동물들로 매주 4일 서커스 공연을 연출하였는데,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은 마루바닥에 앉아 장난감 동물들과 곡예사들의 묘기에 폭소를 터뜨리며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그 가운데에는 레제 ·르 코르뷔지에 ·몬드리안 등이 있었다. 특히 몬드리안에 압도된 그는 “몬드리안의 작품을 움직이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였고, 그 구체적 표현이 ‘움직이는 조각(mobile)’이었다. 그의 모빌은 조각을 대좌(臺座)에서 해방시켰고, 양감에서도 해방시켰다.
1935년 이후의 모빌은 모터보다는 기류(氣流)에 의해 움직이는 쪽으로 이동하였다. 그것은 가는 철사에 연결된 철판으로 된 형태들이 기류를 따라 또는 상호 균형의 원리를 따라 계속해서 움직이는 조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이 낳은 훌륭한 조각가의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고, 1952년에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국제전람회에서 조각대상을 받았다. 1960년대 이후 대형조각 붐이 일어나면서 그의 작품들은 비행장 ·미술관 ·광장 등에 세워졌다.
그의 업적은 움직이는 미술인 ‘키네틱 아트(Kinetic Art)’의 선구자였다는 데 있으며, 그 이후 J.탱글리, J.리키 등의 조각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87년 발행-'Red Curley Tail, Mobile')
1887년 ---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물리학자 헤르츠(Gustav Hertz, 1887~1975) 출생
함부르크주 출생. H.R.헤르츠의 조카이다. 괴팅겐대학교를 거쳐 뮌헨대학교·베를린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13년 베를린대학 연구조수가 되어 J.프랑크와 공동으로 전자(電子)의 충돌실험을 수행하여 보어의 원자모형의 기초 가정(假定)인 정상상태의 존재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많은 기체에 대한 이온화퍼텐셜의 측정을 시도한 후에 전자에너지 손실과 원자스펙트럼항(項)과의 관련을 살핀 것으로, 원자구조론, 따라서 양자론(量子論)의 진보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업적으로 프랑크와 함께 1925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여 부상하였으며, 1917년 베를린에 돌아왔다가 네덜란드의 필립스전등회사에 근무, 1925년 귀국하여 할레대학 교수, 1927년 베를린의 샬로텐부르크공과대학 교수, 1935년부터 지멘스회사 연구소장으로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시에 소련군에 연행되어 소련에 가서 1954년까지 연구에 종사하였고, 1954∼1961년 라이프치히의 칼마르크스대학 교수로 있었다.
1882년 ---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호퍼(Edward Hopper, 1882~1967) 출생
뉴욕주 나이액 출생. 뉴욕의 미술학교에서 R.헨리에게 그림을 배우고, 1906년 파리에 유학하였다. 1915년 에칭과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전향하였다가 1930년경부터 다시 수채화와 유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사실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한 그는 시가지나 건물 등을 즐겨 그렸으며, 밤의 레스토랑, 인적이 끊긴 거리, 관람객이 없는 극장 등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다.
주요작품으로 《책을 읽고 있는 모델》(1925), 《선롯가의 집》(1925), 《밤샘하는 사람들》 《밤의 레스토랑》(1942), 《아침 7시》(1948), 《두 가지 빛을 내는 등대》 등이 있다.
(1998년 발행-'Nighthawks')
1784년 --- 독일의 천문학자 베셀(Friedrich Wilhelm Bessel, 1784~1846) 출생
브란덴부르크주(州) 민덴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는 항해가가 되기 위하여 브레멘에서 항해술과 그 기초가 되는 수학 및 천문학을 공부하였다.
1804년 핼리혜성의 궤도를 계산하여 핼리혜성이 1807년에 회귀할 것을 예보한 것이 H.W.올베르스의 인정을 받아 릴리엔탈천문대의 조수로 일하게 되었다. 1810년 프로이센정부로부터 쾨니히스베르크국립천문대의 건설을 위촉받아 13년 만에 완성되자 초대 대장이 되어, 그 후 줄곧 그 자리를 지켰다. 항성의 위치결정에 대하여 획기적으로 정밀도를 향상시킨 것과, 천문계산을 위하여 베셀함수를 고안하여 응용수학의 길을 연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818년부터 J.브래들리의 관측자료에 세차(歲差) ·장동(章動) ·광행차 등의 영향을 보정하여 3222개 항성의 평균위치를 결정하였는데, 그 방법은 오늘날에도 통용되고 있다. 1838년에는 J.프라운호퍼가 고안한 헬리오미터를 이용하여, 백조자리 61번별의 연주시차를 측정하였다. 1844년 시리우스와 프로키온의 고유운동이 지그재그로 변하는 데서 미지의 동반성이 있음을 예언함으로써 백색왜성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지구의 편평도가 1/299이라는 것을 유도하여 지구의 크기와 모양에 대한 연구에도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밖에
첫댓글 혈의 누,, 귀의 성의 이인직이 있네요~ 새 장르를 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데,,한문구를 배제하고 구어체 문장을 사용하여 최초의 신소설이라는 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혈의 누를 탄생시킨 작가.. 까마득한 부러움을 품고 갑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