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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11/아이성의 정복/수8:1~7/말씀: 안광복 목사님
오늘의 말씀은 <아이 성>을 정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승리하는 비결>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4년마다 6월이 되면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는 <월드컵>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우리나라도 16강에 들어가기 위해 피나는 노력과 승리에 대한 갈망을 간직하며, 끊임없는 훈련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크리스찬으로 살아가면서 승리하고 싶지만,
성경은 “영적전투 앞에서 어떻게 해야 승리하는가?” 를 오늘 말씀에서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1. 첫째, <실패에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여호아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고, 모든 군사들을 이끌고 일어나 아이 성으로 올라 가거라. 내가 이미 그 성과 그 땅을 모두 네 손에 넘겨 주었다“(수8:1)
하나님이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은 <두려워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주의 말씀에서 우리는 아이 성의 전투에서 실패한 원인을 <아간> 때문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전쟁의 패배한 원인을 알려 주었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제비를 뽑게하여, 그 범죄자를 가려내도록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간>이 지목 되었고, 아간은 자신의 죄를 고백했지만,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게 만들었어요.
가나안 전투는 민족간의 <영토확장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이 심판>하는 전쟁이니까,
하나님은 그 전쟁의 <주체>이고, 하나님이 전쟁을 일으키도록 유도한 거예요.
하나님은 “여리고 성의 그 어떤 물건에도 손대지 말라"고 말씀을 했으나,
<아간>은 그 말씀을 거역하고, 그 물건에 손을 댔어요.
그들은 <진멸시켜야 할 사람>인데, 아간이 <진멸시키는 대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승리를 약속했어요.
오늘 말씀에서 모든 군사를 이끌고 <올라가라>고 명령했고, 이것은 <다시 시작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물론 아간의 잘못으로 첫 번째 전투에서 실패했지만,
<다시 시작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성공 스토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뒤에 숨어있는 수많은 <실패의 스토리>는 기억하지 못해요.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하면서 주저하지만, “그 실패를 통해서 나의 잘못이 무엇인지 배우고, 개선해 나가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메세지>입니다.
인생에 찾아오는 실패는 별개 아니예요.
그 실패 속에서 나의 문제가 무엇이고, 내가 교훈을 얻으면, 더 좋은 결과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발명왕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할 때, 수없이 많은 실패를 거듭했지만,
그는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어요.
교우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해 꼼꼼이 따져 보고, 고쳐야 합니다.
왜 실패했는지 반성해 보고, 다시 시도해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나 혼자의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나의 한계를 느껴야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관계>를 알게 됩니다.
인간은 쓰디쓴 실패의 경험을 하면서, <두려워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다시 시작해 보세요.
<하나님은 내가 너에게 힘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다시 한번 도전해 보세요.
2. 승리의 비결 두 번째는 <실력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너는 여리고와 여리고의 왕에게 했던 것처럼, 아이 성과 그 왕에게도 그렇게 하여라. 단 그들이 전리품과 가축들은 너희가 전리품으로 챙겨도 좋다. 너는 성 뒤로 가서 매복하고 있으라. 그래서 여호수아는 가장 잘 싸우는 용사 3만명을 뽑아, 밤을 틈타 보내며, <잘 들어라 너희는 성 뒤로 가서 매복하고 성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말라. 너희 모두는 출동 준비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명령했습니다. (수8:2~4)
하나님은 아이 성의 전투에서 획득하는 전리품은 <가져도 좋다>고 했어요.
<전리품>은 전쟁의 승리에 대한 댓가이고, 승리자의 권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싸우기도 전에 전리품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승리를 약속했기 때문에, 싸우기도 전에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여호수아도 첫 전투에서는 3천명이 가서 실패했는데, 이번에는 3만명을 배치했어요.
이렇게 결정한 것은 최정예 부대를 10배 가량 동원해서, <반드시 승리 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트라일라 타프>라는 세계적인 무용가가 있습니다.
이 분이 쓴 저서 <천재들의 창조적인 습관>이라는 저서에서
음악가에게는 공부할 악보가 있습니다.
배우에게는 대본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용수에게는 적어둘 곳이 없습니다.
다만 무용수에게는 자기 근육이 기억하도록 모든 것을 <머리 속에>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전 과정을 오랫동안 꾸준히 훈련하여, 자신의 근육이 기억하도록 만들어야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김연아 선수도 경기에 나가기 전에 수 많은 연습을 했지만, 막상 경기에 나가려고 하면
<긴장과 두려움이 쌓인다>고 고백했어요.
그러나 자기가 고생스럽게 훈련하여, 자기 몸에 기억되어 있으니까,
<담대한 마음으로 자신감을 갖고 출전한다>고 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부터는 그들의 실력만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해요.
우리들의 각자의 마음속에는 크고 작은 <아이 성>과 같은 장애물이 놓여 있어요.
나만이 간직하고 있는 그 장애물을 극복하고 나가야 해요.
여기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실력을 쌓아야 해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해요.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 지식도 필요하고, QT도 하고, 일대일 훈련도 쌓아요.
그러나 임직을 받을 때의 그 감격과 그 마음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꾸준히 예배와 집회에 참석해야 해요.
특별히 온누리교회는 <선교에 대한 마인드>를 품으며 성장해 왔어요.
그래서 온누리 교인이면 누구나 <선교>에 대한 애착을 가져야 해요.
이번에 Y. Mission에서 열리는 <선교학교>에 리더십들은 반드시 참여하여, 선교 마인드를 확립하고, 아웃리치에 참여하여 자기의 부족한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이 성> 전투는 여리고 전투와는 달라요.
성을 뱅뱅 맴돌기만 하면 성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스스로 매복을 하고, 공격을 해야 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에 어떻게 했나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잘 넘겼어요.
홍해 바다에 도착하면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먹을 것이 필요하면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어서 먹었어요. 어려울 때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안내해 주었어요.
여리고 성만 맴돌면서 함성을 지르면, 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때도 있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실력을 갖추어야 해요.
그들이 최선을 다하여 실력을 갖추고, 마음을 모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오는 거예요.
이것이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진인사 대천명>이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3. 승리하는 비결의 세 번째는 <절대로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5~7절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한 모든 군대는 성으로 진격해야 한다, 이전처럼 저들이 우리와 맞서 싸우려고 나오면, 우리는 그들 앞에서 도망칠 것이다. 그들이 성을 나와 벗어 날 때까지 우리는 그들을 끌고 나와야 한다. 그러면 저들이 이전처럼 <도망친다>라고 말 할 것이다. 우리가 그들 앞에서 도망칠 때 너희는 매복 하던 곳에서 일어나, 그 성을 덮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을 너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수8:5~7)
아이 성의 첫 전투에서 실패한 것이 오히려 [쓴약]으로 작용하여, 더 좋은 결과를 가져 왔어요.
그래서 두 번째 아이 성의 전투는 승리했어요.
5~6절에 특이한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 <이전처럼>이란 단어입니다.
이 말은 <처음과 같이..... 처음처럼....>이라는 좋은 의미로 사용하지만,
<반복되는 타성을 느낀다>는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만>이고, <착각>입니다.
[교만]은 패망하는 <지름 길>입니다.
설령 전쟁에서 승리했어도 교만하면 망합니다.
아이 성의 전투는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계속해서 싸워야할 전쟁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계속 승리를 지키려면, 여기서 교만하면 끝장입니다.
MS사(마이크로 소프트사)에 <빌 게이츠>가 있을 때에는 세계 1위를 유지했지만,
그가 떠나고 과거만 고집하고 지내던 사이에 스티브 잡스의 애플(Apple Incorporated)사에게
그 자리를 내어 주고 맙니다.
그러다 보니 최근 아이 팟에 이어, 아이 패드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어요.
기업에서 영원한 1등은 없습니다.
고집스런 전통을 깨야하고, “전통은 깨진다“는 신념을 가져야 <혁신>이 오는 거예요.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면, 정체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성공에 집착하는 우를 범하지 마십시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자기관리>와 <혁신>만이 승리를 얻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크리스찬이 어려운 세상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1. 첫째, 실패를 통해서 배워야하고
2. 둘째, 실력을 갖춰야 하고
3. 셋째, 절대로 교만하면 안 됩니다. 이 3가지를 우리의 삶속에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승리하는 사람은 승리하는 이유가 있고, 패배하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승리하는 습관>이 있어요.
그 <승리하는 습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언제나 동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과 동행할 때 <승리>할 수 있고,
주님과 함께 할 때 그 분에게 <도움>을 받고,
주님과 함께 할 때 그 분의 <지혜>를 배우고,
주님과 함께 할 때 그 분이 갖고 있는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크리스찬이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수12/영적예배/수8:30~35/말씀:안광복 목사님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에 이어 아이 성도 점령했어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과오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순종했더니, 짜릿한 승리를 경험하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율법을 낭독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영적예배>입니다. 그럼, <영적예배>란 무엇입니까?
[영적]이란 단어를 성경을 통해서 알려주는 성경 말씀은 로마서 12장 1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 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영적예배>입니다.” (롬 12:1)
이 말씀은 사도바울의 권면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영적]이란 단어는 “합리적이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땅하다” 또는 “합당하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우리는 <Sprit>를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적합한 예배”를 [영적예배]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합당한 예배>가 어떤 예배인지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영적예배>는 무엇입니까? 30~31절을 보십시오.
“그 다음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에발 산에 쌓았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한 대로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자연석 제단이었습니다.
그들이 제단 위에 여호와께 번제를 올렸으며, 이어서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수 8:30~31)
<영적 예배>란 무엇입니까?
1. 첫째, 영적예배는 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단을 쌓는 것이므로, 여호수아도 제단을 쌓았어요.
그것도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 자연 제단에 제물을 드렸어요.
<자연석 제단>은 더 투박해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정돈된 제단보다 더 자연스럽고, 우리의 내면을 드려다 보기에 좋았기 때문에 그 자연석 제단위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어요.
<번제>는 무엇입니까?
<번제>는 소와 양과 염소를 불로 완전히 태워서 드리는 제사로 <헌신>을 의미합니다.
이런 동물을 바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산비둘기를 드렸는데, 반드시 흠 없는 수컷을 드려야 합니다.
<화목제>는 무엇입니까?
<화목제>는 어떤 특별한 의무를 면하는 헌신의 목적과 고통의 때에 약속한 맹세를 이행할 목적으로 드려졌으며, 화목제는 화목과 화해의 의미로 드리는 제사로 [소통]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막힘이 없는 <소통의 의미>로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에, 제물을 반드시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 먹어야 효과가 있는 거예요.
화목제를 지내고 나서 그것을 혼자서 어떻게 하루 또는 그 다음날까지 다 먹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웃주민과 함께 나누어 먹어야 하지요. 그래서 이웃과 소통이 되고, 친교가 형성되기 때문이지요. 만약에 이웃과 소통이 막혀 있으면 그 화목제사는 소용이 없는 것이 되니까요.
그래서 찾아 가서라도 이웃과 소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둘째, <영적예배>는 우리를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만족과 우리들의 평안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 중심적인> 거룩한 행동을 말합니다.
예배를 정의할 때에 가장 중요한 단어가 있어요.
그것은 <창조>와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라는 이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해서
그 하나님에게 고맙고, 감사해서, 내가 반응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행동이 예배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에게 감격해서 <감사의 응답>이 [예배]이므로, 보답의 의미로써 하나님에게 예물을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미국에서는 “교회에 가지 않고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들을 <홈 처칭족> 또는 다이족 (디아이와이족=D.I.Y 족 = Do It Yourself 족)이라고 부르며 교회에 가지 않고, 집에서 혼자서 예배드리는 부류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장소를 초월하시는 분이고, 예배가운데 우리의 중심을 보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내면을 드려다 보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지역에 교회가 있는데도 자신의 편리한 점 때문에,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잘못된 <예배습관>입니다.
왜 그런 발상을 했을까요?
그런 사람들은 “예배가 <하나님 중심>으로 드려야 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나 중심>이 아니고, 나의 유익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하고, 이미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3. 예배는 수고와 헌신과 희생이 따라야 진정한 [영적예배]입니다.
이들이 제단을 쌓은 곳은 <에발 산> 지역입니다.
그 에발 산은 아이 성에서 북쪽으로 30km 떨어진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하던 그 장소에서 감사를 느끼고 제단을 쌓지 않고, 30km쯤 떨어진 곳에,
적어도 2일 정도 걸어서 그곳까지 이동하여서 제단을 쌓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는 곳에서, 또 하나님이 원하는 방법대로 제단을 쌓았어요.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곳에서 예배를 드렸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런 과정에는 <수고>와 <헌신>과 <희생>이 따랐어요.
그러니까 영적예배는 거룩한 <번거로움>과 <헌신>이 따라야 해요.
내가 드리는 예배에 별다른 준비가 없고, 고통이 따르지 않았다면, 금방 지루해 집니다.
감동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감동은 희생이 있는 곳에 감동이 따르는 거예요.
내가 희생하고, 눈물을 흘려야, 나에게 감동이 오고, 아쉬움과 기쁨이 있어야, 감동이 오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어떤 분이 가장 은혜를 많이 받을까요?
아마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어려운 시간과 물질을 드린 분이 더 은혜를 받을 꺼예요.
그 다음 분은 요즘에 가장 마음이 어려웠던 분일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드린 분, 예를 들자면 성가대에 나오려면 아침 7시부터 나와서 연습을 해야 하므로, 새벽부터 나온 그런 분들이 은혜를 더 많이 받을 거예요.
그렇게 수고하고, 헌신을 하는데,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거지요.
예배는 나의 수고와 헌신과 번거로움을 각오하고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드리는 예배는 올바른 예배입니까?
예배를 드리는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내 영혼의 <생명줄>과 같은 거예요.
그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줄>이 끊겨 있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서 막힌 것을 모두 뚫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배에 회복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기서 찬양을 한번곡 불렀으면 좋겠어요. <여호와의 유월절>이란 노래인데....
지극히 높은 주님의 나 지성소로 들어 갑니다. 세상의 신을 벗고서 주 보좌 앞에 엎드리리
내 주를 향한 사랑과 그 신뢰가 사그러져 갈 때 이곳을 덮으소서. 이곳을 비추소서.
내안에 무너졌던 모든 소망 다 회복하리니 이곳을 지나소서. 이곳을 만지소서
내안에 죽어가는 모든 예배 다 살아나리라.
가사에 나타났듯이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만져 줄때, 주님 안에서 모든 문제가 회복되기 바랍니다.
4. 영적예배는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32절에서 35절까지 보십시오. “거기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쓴 모세의 율법을 베껴서 돌에 기록했습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이 메고 있는 법궤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갈라 섰는데, 반은 그리심 산 기슭에, 반은 에발 산 기슭에 섰다. 이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할 때는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율법에 기록된 대로 <축복의 말씀>과 <저주의 말씀>을 크게 낭독해 주었다.” (수 8:32-35)
<에발 산>에서 그들은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어요.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돌에 새깁니다.
우리들은 현장에 없었으니까 잘 모르기는 하지만, “돌에 기록했다”는 말은 평생 지워지지 않고 오래 간다“는 의미입니다.
<에발 산> 앞에 <그리심 산>이 있어요.
이 두 개의 산은 넓이의 폭이 200m 정도 떨어져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산입니다.
<그리심 산>은 햇빛을 향하고 있어서 일조시간이 길어서 산림이 무성하고, 녹지가 조성되어 있는 생명의 기운을 느끼는 <축복의 산>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에발 산>은 햇빛을 등지고 있어서 모든 생명이 잘 자라지 않는 황폐한 민둥산으로
<저주의 산>입니다.
이 두 개의 산의 골짜기에서 레위인 제사장들이 말씀을 읽고 있어요.
신명기 27장에 나와 있는 말씀과 같이 “우상을 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제사장들이 읽으면, 백성들이 따라서 “아멘”하고 대답을 합니다.
또 제사장들이 “자기 부모를 함부로 하시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라고 읽으면, 백성들은 따라서 “아멘”이라고 화답을 합니다.
그리고 또 반대로 축복의 말씀을 읽으면, 백성들은 “아멘”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것은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 축복은 신명기 28장 1~6절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가정에서도 축복을 받고, 일터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자손이 번성하고, 농사가 잘 되고, 가축이 증식하며, 먹을 것이 풍성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는 일마다 복을 받아 다 잘 될 것입니다. ” (신 28:3-6)
이 말씀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어요.
“네가 내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복을 줄 것이고,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는 무서운 조건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말씀대로 순종하면, 축복을 받고, 거역하면 저주가 온다>는 거예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에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있어요.
한쪽 산은 너무도 풍요로운 <축복의 땅>이고, 또 다른 쪽 산은 황폐한 <저주의 땅>입니다.
이 두 가지 땅을 보여 주면서, 제사장이 읽어준 말씀을 들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요?
1. 그들은 첫째, 황폐한 산을 눈으로 보면서,
2. 둘째로, 제사장의 말씀을 들으면서,
3. 셋째로, 자기 입으로 <아멘>이라고 대답하면서
“그들은 입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체험하게 만들고, 무엇인가를 느끼게 만들고” 있는 거예요.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했고, 하나님이 인도한 가나안 땅으로 들어 왔어요.
요단 강을 건넜고, 여리고 성을 무너 뜨렸어요.
아이 성 전투에서 한번은 실패하고, 두 번째는 승리했어요. 그 과정을 통해서 그들이 느낀 것이 무엇인가요? 그들은 <순종>이란 단어를 뼈져리게 느낀 거예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면 축복을 받고,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요.
우리들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고, 꼭 해서는 안 될 일들이 있어요.
며칠 전 현역 육군 소장이 북한의 공작원에게 “정보를 건네 주었다“는 거예요.
이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거예요.
한 집안의 가장으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 있어요.
공직자로써 해서는 안 될 일이 또 따로 있어요.
이런 못된 <죄성>을 모두 다 끊어 버리기 바랍니다.
그 대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말씀은 그대로 순종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과 연관성이 있으니까 그대로 순종할 때, 우리 인생을 만사형통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감정에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같이 나란히 붙어 있어요.
한 쪽은 <축복의 산>이고, 또 다른 쪽은 <저주의 산>으로 나누어져 있어요.
<그리심 산>은 계속 햇빛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축복의 산>으로 불려졌고,
그 반대로 <에발 산>은 햇볕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주의 땅>으로 변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햇빛 되신 <하나님>을 바라만 보고, <축복의 땅>에 살게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예배자의 삶>인 것입니다
수13/ 기브온과 맺은 조약/수9 :1~15/ 말씀: 안광복 목사님
지난 주에 우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영적예배>는 무엇입니까?
<영적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실 합당한 예배”를 뜻합니다.
<영적예배>는 “바람직한 예배”를 의미하고, “마땅히 하나님이 받아야할 예배” 입니다.
그들은 아이 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에발 산에 가서 재단을 쌓았고, 거기에서 천연 자연석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온전한 헌신의 의미가 담겨 있고, <화목제>는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막힘이 없는 소통과 친교와 화목”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그 돌에 말씀을 새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곳에서 낭독을 했어요.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과 저주의 산인 <에발 산>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고 “불순종 하느냐?”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가 결정된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헌신을 다짐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영적으로 <하나>가 되는 느낌을 가졌고, <하나님의 뜻>과 의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인 자신감>을 찾았고,
파죽지세로 가나안을 하나 하나씩 차례로 정복해 나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리고와 아이 성은 가나안 전체의 지도를 보면, 아주 중심부에 위치한 중요한 전략지역이므로 그곳을 먼저 확보하고, 이제 그들은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서 차례로 하나씩 정복하려고 준비를 합니다.
그런 이스라엘 민족들의 사기 충전한 사실이 주변 국가들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가나안 민족 간에는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1. 첫째, 가나안 사람들은 <서로 연합전선을 구축하려고> 합니다.
여호수아 9장 1-2절을 보십시오. “요단강 건너 산지와 골짜기와 레바논 건너편 대해의 모든 해변에 있는 왕들, 곧 헷 사람, 아모리 사람, 가나안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사람,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들이 이 소식을 듣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 대항하기 위해 함께 모여 뜻을 모았습니다.”(수 9:1-2)
여기에서 “그들은 함께 모여 뜻을 모았다.”고 했어요.
각 부족들은 나름대로 경쟁관계에 있지만, 이슈가 같을 때에는 힘을 합치기도 합니다.
우리가 따로 따로 대항했다가는 여지없이 패배할 것으로 판단되므로, “서로 힘을 합쳐서 연합전선을 구축하자“는 것입니다.
2. 둘째로, 그들은 대항해서 싸우지 말고, <속여서 동맹을 맺자>는 반응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접근하고, 거짓 투항을 하고, 비굴한 모습으로,
또 한편으로는 자신을 낮추면서 까지, 소리없이 살려고 파고 들어 옵니다.
가나안 정복전쟁은 땅을 차지하는 실질적인 전쟁이지만, 단순히 영토확장 전쟁이 아니고, 영적인 의미와 교훈이 담겨있는 전쟁입니다.
교우여러분,
그들이 싸우는 모습은 우리가 매일 매일 겪을 수 있는 우리의 삶의 모습과 너무도 똑 같이 느껴집니다.
교회를 벗어나서 삶의 현장에서 느끼는 주제들이 <우리의 모습>과 너무도 비슷해요.
사실,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다른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아간의 범죄>와 같이 드러나는 죄는 아니지만, <숨겨진 실수>에서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브온 족속>과 조약을 맺어요.
그러나 그 조약은 <문제가 있는 조약>입니다.
어째서 문제가 있는 조약일까요?
그것은 <속여서 맺어진 조약이기> 때문이지요.
이 조약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원치 않는 조약이기에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 졌을까요?
그것도 에발 산에서 예배를 잘 보고, 은혜충만하게 <하나님 앞에 순종하자>고 다짐한 후에 왜 이런 잘못된 조약을 맺었을까요?
오늘 말씀으로 잘못된 조약을 맺게 되는 3가지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첫째는 여호수아는 그들의 외적인 모습에 속고 말았어요.
3-5절을 보십시오. “기브온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 성에서 한 일을 듣고, 꾀를 냈습니다. 그들은 사신처럼 꾸미고, 낡아빠진 자루와 찢어져 꿰맨 오래된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갔습니다. 발에는 닳을대로 닳아서 덧댄 신발을 신었고, 몸에는 낡은 옷가지를 걸쳤습니다. 그들이 먹을 빵은 다 말랐고, 곰팡이가 피어 있었습니다.” (수 9:3-5)
<기브온>은 어디입니까?
아이 성에서 남서쪽으로 11km,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꾀 큰 성읍입니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런 성읍이므로, 피부적으로 와 닿는 두려움을 더 크게 느끼는 지역이지요.
다른 부족들이 연합전선을 구축해도, 그들은 거기에 가담하지 않고, 현명한 대책을 마련합니다.
그들의 생각은 <자기들이 노력한다>고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절대로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았기 때문에, 가장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들의 생각은 무엇일까요?
첫째, 이 싸움은 <우리가 잘한다>고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과,
둘째, 이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셋째, 그들이 <연합해서 싸운다>고 해결 되는 것이 아니니까,
<조약을 맺어 항복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미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과 어떤 방법으로든 타협하지 말고, 멸절시키라.”고 말씀했어요. 그러나 "다만 멀리 거주하는 부족과는 화평을 하고, 그들이 항복을 하면 종으로 삼아도 좋다. “고 했어요.
그런 것을 알고 있는 가나안 족속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꾀를 내서라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길이지요.
그렇게 해서 찾아 낸 방법이 <위장해서 라도 멀리 이방 민족인것 처럼> 행세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소품을 준비하고, 연기를 했어요.
그것은 낡아빠진 자루와 오래된 포도주 푸대, 닳을대로 닳아서 덧댄 신발과 곰팡이가 핀 빵,
그리고 낡은 옷을 걸치고 속이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그리고 수개월 동안 머나 먼 광야를 거쳐서 온 것과 같이 속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났어요. 그들이 위장해서 만든 것은 대충 만든 것이 아니예요.
이런 위장된 모습을 보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고 말았어요.
그들은 아간처럼 죄를 지은 것도 아니예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 것도 아니예요.
그들은 겉 모습만 보고, 속고 말았어요.
여호수아는 겉 모습만 보고, 속아서 계약한 거예요.
이것은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도 똑같은 경우가 많아요.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상대편이 하는 말만 믿으면 속을 수 있어요.
때로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결정하면, 이런 실수를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시각적인 것을 너무도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때로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기 때문이지요.
외형적인 것에만 치중하다 보면 그런 실수를 할 수 있어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아무리 들어도, 한번 보는 것이 더 났다”고 생각하며 “당신이 봤어....”라고 우기면서, 접근하면 실수를 하게 되요.
마크 스미스가 쓴 <감각의 역사>라는 책을 보면, 가장 우선시 하는 것이 시각 seeing(視覺)이라고 해요. 초기 기독교인들이 역사에서도 <시각은 진실하다>고 옹호했어요.
우리들의 생활에서도 시각 (= 보는 것)을 중히 여기고, 의존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외적인 것을 중시하고, 더 신뢰를 해요.
실제로 더 중요한 <내면의 세계>는 보지도 않고, 외적인 <보이는 것에만> 집중을 해요.
오늘의 본문도 마찬가지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도 외형만 보고, 속아서 조약을 맺었어요.
다 떨어진 신발과 헤어진 의복을 보고,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로 믿고, 속고 말았어요.
우리들도 <믿음 생활>을 하면서 이런 실수를 자주 해요.
위장된 거짓 때문에, 잘못된 결정하는 경우가 많아요.
사업을 시작 할 때나, 동업자를 찾을 때나, 배우자를 고를 때, 무엇을 우선시 합니까?
그 사람의 진실성보다도, 그 집안의 경제적인 가치를 더 중요시 합니까?
그러나 거기에 감추어진, 숨겨진 내면의 모습을 확인하시고, 미래의 가치에 더 비중을 두고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현재의 모습과 겉으로 드러난 외형을 보지 마세요.
오히려 속 깊이 드러나지 않은, 내면의 세계를 중요시 하는 지혜를 가지십시오.
2. 둘째, 그들이 <하는 말에 속지> 마세요.
6-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길갈 진영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가서,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 지금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히위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 가까이에서 사는 것 같은데, 우리가 어떻게 당신들과 조약을 맺겠소?>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우리는 당신들의 종입니다>
그러자 여호수아에게 <우리는 당신들의 종입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너희는 누구며 어디에서 왔느냐?> 그들은 <당신의 종들로 하나님 여호수아에게 <우리는 당신들의 종입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너희는 누구며 어디에서 왔느냐?>. 그들은 <당신의 종들은 하나님 여호와의 명성을 듣고, 아주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 우리가 그 분의 명성과 그 분이 이집트에서 행하신 일들을 모두 들었습니다. (수9:6-10)
그들은 최근의 사건은 모르는 척 말하지 않고, 사탕 발림으로 유혹을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조약을 맺다>는 말은 “언약을 밴다”는 뜻입니다.
당시 풍습에 의하면, 중요한 언약을 맺을 때에는 동물을 잡아서 양쪽에 갈라 놓고, 계약의 당사자가 그 고기 사이를 지나 갑니다. 이것은 만약에 계약을 위반하면 <이 짐승과 같이 죽임을 당한다>는 의미와 같은 뜻입니다.
여호수아도 처음에는 의심을 했으나, 곧 그들의 외적인 모습과 <달콤한 말>에 속게 됩니다.
그들은 <종입니다>라는 말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은 거론하면서 접근을 하고, 최근에 일어난 두 전투의 얘기는 진정 모르는 것과 같이 연기하며, 행동을 했습니다.
우리들도 대부분 사기를 당할 때에 처음에는 좀 이상한 느낌이 오지만, 그 사람의 현혹된 말에 꼬치꼬치 묻지 않게 됩니다.
사기꾼은 특별한 목적이 있으므로 상대편에게 유익을 준다고 속이거나, <더 좋은 조건을 준다>고 현혹하면 금방 무너져서 사기를 당하게 됩니다.
여호수아도 그런 속임수에 속은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 칭찬을 하니까, 거기에 기분이 업(up)되어, 모든 것을 믿게 되는 거예요.
어쨌든,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중시하여 속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우리의 눈과 귀를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3. 셋째, 여호수아는 기도하지 않았어요.
14-15절을 보십시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여호와께 묻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들과 화친을 맺어 그들을 살려 준다>는 언약을 맺고, 회중의 지도자들도 그들에게 맹세했습니다.” (수 9:11-15)
그들은 외적 모습과 말에 의해 속았기 때문에 덜렁 조약을 맺었어요.
그런 중요한 결정을 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에게 묻지도 않았어요.
만약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었다면, 그들은 속지 않았을 거예요.
여호수아는 원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왜 여호수아는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그동안 여호수아의 말이나 행동에 문제점이나 단점이 있었나요?
전혀 그런 문제가 없었던 여호수아가 이번에는 하나님에게 묻지를 않는 실수를 범했어요.
그런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첫째, 여호수아는 아이 성의 전투에서 <순종의 중요성>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런 <영적인 자신감 때문에> 하나님에게 묻지 않았던 거예요.
2. 둘째, 여호수아는 그런 자신감에서 <자신들이 지혜를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묻지 않는 실수를 한 거예요.
잠언서 3장 5-7절을 보십시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과 지식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모든 일에 여호와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에게 바른 길로 인도하시리라.” (잠 3:5-7)
우리는 <스스로를 지혜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
<내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내 자신의 지혜를 과신하지 마십시오.
늘 겸손하게 처신하세요. 내가 전문가라고 하나님께 우기지 마세요.
내가 경험이 있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 성공했으니까**** 라고 과신하면,
그 순간에 더 큰 문제가 생기게 되요.
기도는 응급 처치의 수단이 아니예요.
기도는 문제가 생길 때에 무릎 꿇는 것이 아니예요.
기도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시간이므로, 문제가 생겨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와 미리 예방하고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과 호흡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언제 그들에게 속은 것을 알게 되나요?
여호수아는 사흘 후에 <사기>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거짓된 계약이기에 그것을 파기할 수 있나요?
아무리 거짓된 계약이라도 한번 맺은 계약은 절대로 파기할 수 없어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맺은 계약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만약에 그 계약을 파기한다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이 이방민족에게 멸시를 당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에게 원망을 했다>고 했고. 지도자의 영적권위는 추락하게 된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우리들도 성급하게 결정하여 후회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럴 경우에 사흘만 기다려 보세요!
그 [3일]이란 시간동안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도 있어요.
여러분? 중요한 결정을 하려면 서두르지 마세요.
특히 동업자를 결정하려고 할 경우에 마음의 평안이 없다면, 그 일은 진행하지 마세요.
[3일] 동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그런 후에 마음에 <하나님이 주신 평안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 일을 진행하세요.
그러나 조금이라도 의심이 생기면, 진행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TV 홈쇼핑에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에 속지 마세요.
<너무 빨리 결정하라>고 다그치는 그런 말에 속으면 반드시 후회합니다.
사탄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남을 속이는>거예요.
사단의 본질은 절대로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남을 속이는 행위를 해요.
오늘의 주제인 <기브온과의 계약>은 우리의 삶에도 자주 나타나요.
끊임없이 우리들에게도 이런 일들이 나타납니다.
이런 <기브온>은 우리의 가정에도***** 우리 교회에도*****
우리의 마음 속에도***** 예외 없이 자주 나타나요.
이런 <기브온>은 때로는 작정을 하고***** 전략을 세우고***** 타협하고*****,
온간 꾀를 짜내고*****, 때로는 불쌍하게 보이면서까지 우리에게 접근을 해요.
여기에는 예외가 없어요. <나는 성령 충만하다>고 자신감을 갖지 마세요.
흠이 없는 여호수아도 넘어 갔어요. 이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당할 수 있는 일이니까,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랑하지 말고,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마음속에 평안을 찾을 때까지, 3일을 기다리며 기도하세요.
중요한 문제일수록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찾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십시오.
이번 한 주일 동안도 주님 안에서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수14/ 해와 달이 멈추다/수10:7~14, 말씀:안광복 목사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온 백성들과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약은 <하나님이 원치않는 조약>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원망을 샀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수아가 기도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외형적인 모습만을 보고, 결정한 것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큰 실수를 범했어요.
이와같이 “이스라엘과 기브온이 조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남부지방에 퍼지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가나안 지방에 같이 살던 다른 민족들이 같이 지내던 기브온 족속이 자기와 같은 민족인 가나안 족속을 배반하고, "이스라엘과 함께 조약을 맺었다."는 소문을 들으면서 흥분을 합니다.
즉, 타도의 대상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기브온>으로 바뀌게 됩니다.
다른 각도로 보면, 가나안 족속들의 형제인 “기브온이 배신을 했다“고 생각하면서 기브온 족속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족속들이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기브온>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여호수아서 10장 1~5절을 보십시오.
"그때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그 왕에게 한 것 처럼, 아이 성을 점령하여 그 왕과 백성을 전멸시킨 일과,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화친하여 그들 가운데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크게 두려워 한 것은 기브온은 왕이 통치하는 다른 성 못지않게 큰 성으로서 아이 성보다도 더 크고, 군사력도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은 해브론 왕과 여러 왕에게 사람을 보내 말했습니다. <기브온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과 조약을 맺었다>고 하니, 내게로 올라와서 나를 도와 기브온을 칩시다. 그러자 아도니 다섯 왕들은 연합전선을 펴고, 기브온 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수10:1~5)
이 전쟁을 주도한 사람은 예루살렘의 왕 <아도니세덱>입니다.
<아도니세덱 왕>의 이름은 "의의 주인"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세상의 원리와 원칙은 자신으로 통일된다." 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즉, 자신의 말 한마디가 법으로 통용되었던 사람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심판자의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특별히 남부 가나안 지방에서는 심판자이거나, 해결사 역활을 주도한 사람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기브온과 조약을 맺었다"는 사실은 예루살렘의 왕인 <아도니세덱>왕을 자극했어요. 왜냐하면 기브온 성이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음으로써 여리고성, 아이 성, 베델이 기브온의 중심부가 <완전히 이스라엘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뜻이므로, 그렇게 되면 남과 북이 차단되어 예루살렘이 그 다음의 공격목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왕은 다른 가나안 족속과 연합해서 기브온 성을 공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 사실을 파악한 기브온 족속은 두려움을 느끼며, 이스라엘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6절을 보십시오 "이때 기브온 사람들은 길갈에 머물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다음과 같은 급한 전갈을 보냈습니다. "급히 올라와서 우리를 도와 구출해 주십시오. 산간지대에 사는 모든 아모리 왕들이 단합하여 우리를 치고 있습니다"(수10 :6)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파병하여 도와줄 것을 요청합니다.
기브온 족속이 “우리는 당신들의 종이니 도와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보더라도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런 말을 하였을까요?
여러분! 이것은 참으로 묘한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이 조약은 속아서 맺은 조약이므로 한방 먹이고 싶은 상황인데, 거기에다 한 술 더 떠서 그 얄미운 기브온 족속이 “연합군의 위협을 받고 있으니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하는 상황입니다.
여호수아 입장에서 보면, 가나안 지방의 자기들끼리 싸우면 너무나 잘 된 일인데.....
그래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동맹국이니까, 기브온은 <당연히 도와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도 이런 상황은 종종 일어 납니다.
그 사람이 함께 일하는 동료일 수도 있고, 동업자일 수도 있고, 한 가족일 수도 있어요.
갑자기 부담스럽게 <돈을 빌려 달라>고 할 수도 있고, <취직을 부탁>할 수도 있어요.
이럴 때에 우리는 두 가지 행동을 보입니다.
1. 첫째, <긍정적인 선택>과 <부정적인 선택>이거나
2. 둘째, <믿음의 선택>과 <인간적인 선택>이거나
3. 셋째, <이성적인 선택>과 <감정에 의한 선택>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게 되지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기브온>을 도와줄 근거가 전혀 없어요.
어차피 가나안의 남부 지역을 공격해야 하는데, 자기들끼리 싸우면 여호수아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좋아지겠지만, 그래도 여호수아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기브온을 도와 주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첫째, 여호수아는 인간적인 생각보다도 <믿음의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2. 둘째, 여호수아는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파병을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기브온과 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그런 결정한 거예요.
여호수아는 마음속으로는 부글부글 했겠지만, 그들의 요청에 약속대로 이행했어요.
여러분, 우리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흔히 벌어져요
그럴 때에는 절대로 <감정적인 판단>을 하지 마세요.
<인간적인 판단>으로 행동하지 말고, 약속에 근거해서 <이성적으로 판단>을 하세요.
마음은 내키지 않아도 꼭 그렇게 하셔야 해요. 그러면 상대도 그걸 알아요.
그리고 어차피 도와 줄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도와주세요.
오히려 상대가 미안할 정도로 화끈하게 도와주세요.
그래야 감동이 오는 거예요. 그럴 때에 상대가 변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한참 뒤에 그 사람이 <평생>을 고마워 해요.
그렇게 고마워하는 것은 그 사람만 고마워하는 게 아니고, 그렇게 해야 하나님이 <우리의 편>에 서게 되는 거예요.
본문 8절을 보십시오.
"그래서 여호수아는 모든 군사들과 모든 용사들과 함께 길갈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너를 당해낼 자가 없을 것이다"(수10:7~8)
여호수아는 기브온을 도와주려고 모든 병력을 이끌고 길갈에서 출발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이미 네 손에 넘겨주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이미 너에게 승리를 보장해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9절~11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는 길갈에서 밤새워 행군해 가서, 불시에 그들에게 들이 닥쳤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군 앞에서 크게 당황하게 하셨으므로 혼란에 빠뜨렸고, 대대적으로 죽이고 살육하였고, 벤호론으로 올라가는 길을 쫒아 갔고, 아세가와 막게다에 이르러 그들을 치셨습니다. 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우박을 내리셔서 그들이 죽었습니다. 우박에 맞아 죽은 사람이 이스라엘 군사들의 칼에 죽은 사람보다 많았습니다.(수10:9~11)
10절에 중요한 동사 4가지가 나옵니다. 혼란에 빠졌고, 쫓아갔고, 죽였고, 치셨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혼란에 빠뜨렸고, 하나님이 쫓아 갔고, 하나님이 살육하고 죽였고, 하나님이 그들을 치셨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사람이 우박에 맞아 죽을 수가 있습니까? 예,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박을 내려 심판하면,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으로 채워 주셨고, 보상해 주십니다.
우리의 능력 보다도 더 크고, 더 많은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헌신한 것, 보다도 더 많은 축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과 가나안 족속인 연합군의 싸움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미 그것을 넘겨 받아서, 이 전쟁은 <하나님이 개입한 전쟁>이 되었어요.
이 전쟁은 <하나님의 싸움>이고, <여호와의 심판>입니다.
여러분! 누가 지혜로운 사람일까요?
내가 고민하는 것을 하나님도 함께 고민하도록 만드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반대로, 누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일까요?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자기만 중요하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문제>를 <하나님의 문제>로 만들어 보세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요?
그것은 모든 일을 하나님과 함께 나누어 보세요.
하나님과 기도하면서 상의해 보세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순종해 보세요.
그러면 내가 애써도 안 될 때는 하나님이 적접 해결해 주십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예요.
누군가 나에게 와서 의론하고 상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분의 말씀에 관심을 갖고, 그 문제에 해결해 주려는 마음을 갖게 돼요.
사회생활의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리더의 생각을 따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분명히 사고가 다를 꺼예요.
조직의 러더가 원하는 방법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반드시 인정받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전투에서 크게 승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최선의 노력을 하였지만, 그것보다도 하나님의 큰 도우심으로 크게 승리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비록 밤새 잠도 못자고, 몸과 마음이 힘들었어도, 하나님이 인정받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 여호수아는 자신감이 충만하여, 벅찬 가슴으로 <믿음의 기도>를 드립니다.
12~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에 넘겨주신 그날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여호와께 말했습니다. <오! 해야, 기브온에 그대로 멈춰 있어라, 오! 달아, 아얄론 골짜기에 그대로 멈춰 있어라" 그러자 이스라엘 군이 그들의 원수를 다 쳐 부술 때까지, 해와 달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야살의 책에서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 거의 24시간 동안 그대로 있었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렇게 여호와의 말을 들어 주신 날은 전무후무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편에서 싸우셨기 때문입니다.(수10:12~14)
여기서 <멈춰 있어라>는 단어는 “활동을 그만 두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활동없이 정지한다”는 뜻으로 <아마도 태양이 멈추었다>는 말은 "개기일식"이거나 “추상적인 시적인 표현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럼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그 대답은 창세기 1장 1절을 믿는다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성령 안에서 나타난 그 어떤 기적도 믿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분들은 <그 어떤 과학적인 자료를 제공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여호수아는 이런 기도를 했을까요?”라는 의문입니다.
그것은 여호수아는 이미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현상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이미 오래된 얘기이지만, 애굽에서 [출애굽]하면서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본 사람이고, 철옹성과 같은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을 직접 체험했어요.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 보다 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해가 멈추어 달라>고 기도를 했어요. 이것은 감히 그동안의 기적을 체험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이런 놀라운 기도는 우리의 人生에도 반드시 필요 해요.
이런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는 거예요.
저는 이런 여호수아의 기도가 다른 백성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고 생각해요.
더 놀라운 것은 정말 그 기도를 한 후에, <해가 중천에 멈추었고, 낮이 계속되는 기적이 벌어졌다>는 거예요.
성경은 말합니다.
14절에서 “그렇게 여호와께서 사람의 말을 들어 주실 것은 전무후무 하였다.”(수10:14)
고 기록하고 있어요
교우여러분,
오늘 본문의 “여호수아의 기도는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다“고 했어요.
<야살의 책>은 무엇입니까?
<야살의 책>은 이스라엘 국가적인 일을 담은 [시 모음집]입니다.
그렇게 <야살의 책>에 기록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호수아의 그 놀라운 기도와 그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응답을 오래토록 전하기 위해서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다“고 했어요. 그 <야살의 책>은 “의로운 자의 책”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책>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예루살렘의 왕 <아도니세덱>의 이름이 무슨 뜻이라고 말했어요?
<의의 주인>이라고 말씀했어요. 마치 그는 자기가 절대군주인 것처럼 영향력을 행사했던
<거짓된 의의 군주>라는 의미로 자기를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와 연합군들은 절대 권력자인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한 사건이 <야살의 책>에 기록되어 있어요. 그 의미는 <누가 진정한 이 세상의 통치자인지?>를 “확실하게 알라“는 얘기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누가 <올바른 의의 왕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결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편이 되었으므로 여러분의 人生에도 <해와 달이 멈추는 사건>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언제 그런 일이 언제 벌어 지나요?
1. 첫째, 우리도 여호수아와 같이 위대한 <믿음의 기도>를 드릴 때에 그런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보다 더 큰 기도를 해 보세요.
우리 자녀가 우리 민족에게 크게 쓰임 받는 자녀가 되도록 기도해 보세요.
우리 자녀를 통해 “역사에 남는 위대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 보세요
또 “그런 국가가 필요한 일꾼으로 쓰임받는 위대한 가정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세요.
또 “하나님, 내가 일하는 일터가 선한 <믿음의 장소>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내가 일하는 일터가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좋은 일터>가 되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좋은 영향력으로 도움을 받는 그런 회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세요.
그러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좋은 회사가 될 것입니다.
2. 둘째, 어느 때에 이런 기적이 나타 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편>에 서 있을 때에 그런 기적이 나타 납니다.
거짓된 <의의 왕> 편에 서 있으면, 비참해 집니다.
여호수아와 같이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편에 서 있을 때, 그런 기적이 나타 납니다.
그럼,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질문>은 무엇입니까?
“나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 라는 질문은 너무나 중요한 질문입니다.
나는 현재 누구의 편에 서 있습니까?
<하나님 편>에 서 있습니까? <거짓된 왕>의 편에 서 있습니까?
아무리 거짓된 아도니세덱 왕이 연합군을 동원하고, 꾀를 부리고, 작전을 짜도,
그들의 운명은 비참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자리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의로운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자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편>이 아니고, <하나님의 편>에 서는 자리가 <예배의 시간>입니다.
우리들도 죽을 수 밖에 없는 기브온 족속과 같았지만, <하나님의 편>에 서게 되므로,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었고, <해와 달이 멈추는 사건>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편>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현명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수15/약속의 땅의 분배/수13:1~7/말씀:안광복 목사님
여호수아서의 가장 중요한 단어는 <정복>과 <분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이 여호수아서 12장까지 소개를 하고, 오늘 13장의 말씀부터는 정복한 그 땅을 <분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분배하는 과정은 여호수아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늙고 나이가 많아지자,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늙고 나이가 많은데, 아직 소유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았구나"(수13:1)
여기를 보니까, "여호수아의 나이가 많았다"고 했어요.
그동안 12장까지 열심히 가나안 전투을 이끌면서 땅을 정복하였지만, 아직도 싸워야 할 일들 많이 남아 있는데, 하나님은 <늙은 나이>에 관해 서운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부터는 전투에 참가하여 12지파가 연합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각 지파별로 땅을 분배해 주면, 그 지파들이 알아서 싸움을 해서 땅을 차지 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 땅은 스스로 개척하고 점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나이가 많다"고 한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지도자에게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모양의 한계를 느낍니다.
우리 자신은 간절히 원하는데, <어떤 한계 때문에> 그 일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건강과 나이 때문에 자기의 생명을 다 누리지 못합니다.
여러분,
<생명과 사명>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물론, 둘 다 중요하지요.
그러나 건강이 있어야 생명을 감당 할수 있는 것이고, 그 반대로 사명이 없는 건강은 또한 무의미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자신이 건강할 동안에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는 거예요.
1. 첫째,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 생명을 연장시켜 주기도> 해요.
사도 바울의 경우 <유라굴라>라는 풍랑때문에 죽을 뻔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주어서 그를 지켜 주었어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로마의 황제에게 가서, 네 사명을 완수하게 될때까지,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고 했어요.
2. 두 번째로, 또 다른 어떤 경우에는 <그 사명을 완수하면, 그의 생명을 걷어 가기도> 해요.
모세의 경우는 120세에 죽었는데, "모세가 죽기 전에 눈이 흐리지도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도 않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어요.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생활에서 가나안까지 이끌어 주는데 까지>가 그의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 [사명]이 완료되자, 모세는 죽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사명을 더 이상 완수 할수 없다>고 했어요.
그럼, 여기서 의문이 생겨요?
사도바울처럼 생명을 지켜주든지, 모세처럼 건강을 지켜 주어야 하는데,
왜 여호수아는 그냥 순리대로 내 버려 두셨을까요?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초 자연적인 방법으로 채워주기도 하지만,
여호수아와 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리대로 그냥 <내버려 두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한계를 인정하면서, 생명을 마치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두 부류의 사람을 만납니다.
하나의 경우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과
또 다른 경우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예로써, <늙어진 주름살을 인정하는 사람> 과 <그 주름살을 수술해서 세월의 흔적을 감추려고 하는 사람> 입니다.
세월은 어쩔 수 없어, 아무리 가리고 위장을 해도, 어쩔수 없는 것이 있어요.
사실 <아름답게 늙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고왔던 얼굴이 늙어가면서 변하는 것은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예요.
그러나 그 한계를 모르고, 미리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사람이 더 문제가 되지요.
1. 첫 번째 예로, 지난 5월 26일날 브라질의 <호나우드> 선수가 은퇴를 선언했어요.
월드컵 경기에서만 15골을 기록했고, FIFA가 선정한 <올해의 선수상>을 3회 연속으로 수상한 우수한 선수이지요.
그런데 그런 유능한 선수가 왜 그렇게 빨리 은퇴를 하나요?
혹시 그 선수의 나이가 너무 많은가요? 아니예요. 그는 33살로, 그리 많치 않아요.
그러나 그가 은퇴하면서 한 말이 의미 심장하여, 감동적인 말을 했어요.
"<나의 몸이 이제 그만 멈추라>고 한다"는 거예요.
그는 자기 자신이 <선수로써 한계를 느끼고> 은퇴를 선언했지만, 오히려 그는 제2의, <제3의 인생>을 찾아 나설 꺼예요.
자기가 선수로써의 한계를 느끼는 것은 슬픔이나 절망이 아니지요.
비록 선수로는 자기의 한계를 느끼고 끝내지만, 이후에는 코치나 감독의 생활을 시작할 수도 있어요.
이처럼 자신을 인정할 때, 그에게는 또다른 <행복>과 <자유로움>이 찾아 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반대로 그런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때부터 선수로써의 비교하며 절망감을 느끼고, 더 나아가서는 자기 몸을 비하하게 만들어서, 자기 스스로를 파탄에 빠지게 만들 수도 있어요.
2. 또 한가지 <좋은 영화>를 한편 소개할께요.
오래 전에 나왔던 모짜르트 인생을 다룬 <아마데우스>라는 영화를 기억하세요.
천재 음악가인 <모짜르트의 삶>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 보았던 왕궁 악사장인 <살리에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모짜르트보다 경험도 많았고, 나이도 많았고, 지위도 높았어요.
그러나 그는 언제나 모짜르트의 천재적인 음악성을 부러워하고 질투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모짜르트 방에서 우연히 쳐다 본 악보를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분명히 자기가 볼 때에는 처음 작성한 연습용 습작인데, 그것이 기가막힌 작품(명곡)인 것을 발견하였어요.
그래서 <자기의 재능>과 <모짜르트의 천재성>을 비교하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하나님을 원망하고, 십자가를 불에 태워 버렸어요.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하나님,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불과같은 열정적인 음악성을 주면서, 모짜르트와 같은 재능을 주지 않았습니까? 그런 재능을 주지 않으려면, 불같은 열정도 주지 말것이지, 저는 하나님이 원망스럽습니다"라고 항의하는 기도를 했어요.
<살리에르>는 자기의 한계를 결국 인정하지 않았고, 받아 드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행복하지 못한 인생을 살았고, 하나님을 떠나는 人生이 되었습니다.
3. 또 한가지 예로, 최근에 많은 사람이 읽혀진 <죽을 때 후회하는 25가지>라는 책이 있어요.
저자는 일본 호스피스 전문가, <오츠 슈이치> 라는 호스피스 전문 의사입니다.
죽음이 임박한 말기 암환자 천여명을 돌보면서 그들이 마지막에 후회하는 모습을 주제로 뽑아 <죽을 때 후회하는 25가지>란 책을 발간했어요.
자신이 건강할 때 생각하지 못했거나, 후회스러웠던 항목들 중에 몇 가지만 추려 올려 봅니다
첫째, 사랑하는 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했더라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랑의 고백>을 했으면 좋았을 것" 을 후회하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맙다!" 또는 "감사하오!"라는 말을 많이 못했던 후회를 하는 겁니다.
그동안 너무 감사없이 살았고, 불평하면서 살았기에 때로는 마음속에 분노로 가득 차 있던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고맙다>는 덕담을 많이 하지못한 것에 대해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둘째, 진정으로 내가 진짜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았더라면.......
자기 인생을 뒤돌아 보니, 남의 강요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살아왔던 자신을 후회를 합니다.
셋째, 조금만 더 겸손(謙遜)했더라면... 넷째, 남에게 친절(親切)을 베풀었더라면...
다섯째,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神)의 가르침을 알았더라면...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최후의 인생의 교훈은 진솔하고 절절하게 들리는데, 그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진실이고 인생의 최후 순간에 깨닫는 위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 거창하고 대단한 일을 생각하기 보다도, <일상에서 평범하지만 사소한 일들을 후회하고 있어요.>
즉, 다시말해서 정작 <작은 일에 신경쓰지 못함을 후회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책 말미에 저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습니다.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은 후회가 적다. 왜나하면, 죽음을 염두에 둔 사람은 삶이 유한(有限)하다는 사실을 알고 열심히 살아간다.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하며,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는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죽고, 당신도 반드시 죽습니다.
죽을 때 후회할 것 같은 모든 일들을 기억하고, 바로 지금 그 일을 행하십시오.
바로 지금...."
교우 여러분,
<우리의 마자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여호수아에게는 큰 축복이었어요.
왜냐하면, <정말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신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이 멈추라>는 싸인을 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호인 <이제는 여기 까지야!> 라는 싸인을 알아 차려야 합니다.
이번 <2010 월드컵>에서 우리 축구선수가 16강에 멈췄어요.
이제 우리는 여기서 <멈춰야> 합니다.
운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경기에 진것도 있지만, 거기 까지가 <우리의 실력>이예요.
그동안 우리 선수는 잘 싸웠어요.
사람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지만,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순응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한 삶>을 누릴수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한계를 느끼고 계십니까? 혹시 나이에 대한 한계를 느끼십니까?
건강에 대한 한계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어떤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끼십니까?
우리는 그 한계를 느낄 때에 외면을 하거나 부인하지 마십시오.
단지 <그 한계의 끝이 어디인지?> 열심히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거기에 도전하십시오.
그러다가 <하나님이 받아 드리라>고 한다면, 그 한계를 받아 드리세요.
그리고 그 속에서 해야 할 중요한 두가지 [일]들을 찾아 내세요.
첫째는, 하나님이 나머지 모든 것은 <친히 이루신다>는 것을 깨닫고,
둘째는,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서둘러서 분배하라>는 것을 깨달으세요.
2절을 보면, "앞으로 정복할 땅은 블레셋과 그술의 모든 지역이다.(수13:2)
이 모든 지역을 하나님은 <친히 내가 담당하시겠다>고 했어요.
그것은 <아직 남아 있는 땅>과 북쪽에 있는 <정복당하지 않은 땅>에 대해 "하나님이 다스리겠다"고 언급한 거예요.
6~7절을 보세요. "레바논에서 미스 로봇마임까지 산지에 사는 모든 사람, 심지어 시돈 사람까지 내가 친히 이스라엘 백성앞에서 쫓아낼 것이다. 너는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이 땅을 이스라엘에게 유산으로 분배하되, 아홉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반에게 유산으로 나누어 주라"(수13:6~7)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쫓아낼 것이다"라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만약에 <내가 회사를 그만 두면, 우리 회사는 누가 지키나?"를 걱정하고 있어요.
그러나 염려 하지 마세요. 당신이 없어도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요.
물론 처음에는 혼란이 오겠지요. 그러나 좀 지나면, 하나님이 모두 다 알아서 하십니다.
<정복과 분배>는 여호수아서의 중요한 key word입니다.
이 말은 우리 인생에도 꼭 필요한 단어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생에도 <성취와 나눔>으로 모든 일들이 이루어 지고 있지요.
정해진 영역에서 전문성이 인정되고, 성취한 일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잘 몰라서 망서려 하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의미를 찾지 못해 그것을 모르니까, 더 <돈에 대해 집착>을 하고, 문제를 일으키지요.
교우 여러분,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정복과 분배>가 정확히 균형잡힌 인생이 되어야 해요.
그래서 얻은 것을 나누어 주는 <성취와 나눔>이 균형을 잡아서 사용할 줄 알아야 하고,
내가 처한 위치에서 <축적된 재능>을 필요한 곳에 사용할 줄 아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제가 한가지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단계에 있습니까?"
1. 혹시 뭔가를 성취하는 과정에 있습니까?
2. 아니면, 그것을 의미있게 사용하는 과정입니까?
3. 아니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정말로 중요한 일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계십니까?
4. 그것도 아니라면,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부인하고, 그냥 덮어 버리려고 애를 쓰십니까?
하나님조차도 신뢰하지 못하는 인생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인생입니까?
지금, 여호수아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한편으로 서운한 마음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위로>를 느꼈을 꺼예요.
하나님은 <쉬라>고 얘기할 때에 여호수아는 기꺼이 순종하며 인생을 마무리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는 항상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시간>을 내더라도 <기회와 건강>이 항상 계속되는 것은 아니지요.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뜻하지 않은 일로 이별을 할 수도 있어요.
5년후, 10년만 지나도 많은 것이 <변화>될 수 있어요.
그 때를 생각해서 <작은 일 하나라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귀하게 성취하면서, 그렇게 사십시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름에 가족여행을 한번 떠나 보세요.
아웃리치를 함께 가셔서, 이국 땅에서 무언가를 느껴 보고 오세요.
그러면 우리는 <영적인 가나안 땅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복하는 느낌이 드실 꺼예요!
그런 가운데 주변 사람들과 정을 나누면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 보세요.
그것은 꼭 <돈>이 아니어도 좋아요.
나의 귀한 <시간>과 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작은 <사랑>을 나누어 전하세요.
특히 가까운 가족과 이웃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자주 웃어 주세요.
<정복과 분배>와 같이 <성취와 나눔>이 있는 그런 균형있는 인생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런 한계 속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축복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수16/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수14:6~15/말씀: 안광복 목사님
지난 주에는 갈렙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땅을 백성들에게 분배하는 얘기였고, 오늘은 여호수아의 친구인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찾아와서 <그 땅을 내게 달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갈렙은 한 지역을 언급하면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여기에 담긴 "영적교훈이 무엇인지?" 를 알아 보기 전에
그럼, 그렇게 말한 "<갈렙>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 보겠습니다.
<갈렙>은 그니스 족속의 여분네의 아들입니다.
<갈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간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에 혈통이 섞였던 관계로, 순수한 히브리 족속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에 모세가 보냈던 12명의 정탐꾼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돌아온 10명과 달리 부정적인 보고를 하지는 않았고, <하나님이 함께하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고 긍정적인 답변을 전달한 사람입니다.
땅을 분배할 때에 갈렙은 8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분배하는 어려움에 직면한 여호수아에게 먼저 찾아가서, <헤브론 땅>을 자신에게 주도록 요청했습니다.
어쨋든 갈렙은 여호수아의 뒤를 이어서 큰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여호수아의 친구이고, 가나안 정복 전쟁의 일등 공신이지만, 좋은 당이 아닌, 험한 산지를 내가 공격하도록 해 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그런 갈렙이 여호수아를 찾아가서 14장 10절~12절과 같이 말을 합니다.
"이제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나를 살려주셨고, 광야생활을 거쳐 45년동안 나를 생존하게 하셨습니다. 지금내가 85세의 나이 이지만, 모세가 나를 정찰대원으로 보냈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건강하고, 기력이 왕성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날, 내게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십시오>. 당신도 그때 직접들었다시피 거거에는 아낙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의 성은 크고 강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여호와의 말씀대로 내가 반드시 그들을 쫓아 낼 수 있을 것 입니다.(수14:10~12)
갈렙은 용기를 가진 사람이고, 여호수아에게는 큰 힘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가 요구하는 그 땅은 <헤브론>지역의 땅을 말합니다.
<헤브론>은 예루살렘 남서쪽으로 약 30km정도에 위치한 유다 산지에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요단강 서편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였고, 워낙 어려운 지역이라, 아직까지 정복되지 않은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그래서 갈렙은 여호수아를 찾아가서, "그 땅을 내게 주면 내가 공격하여 차지하겠다"고 먼저 얘기합니다.
왜 갈렙은 그 땅을 요구했을까요?
더 좋은 땅이 많이 있는데, 원로이고 어른인 갈렙이 왜 그 땅을 요구했을까요?
갈렙은 전쟁의 공로가 많으므로 그런 요구를 당연히 할 수 있는 자격이 있고, 특권이 있는 사람인데,
어쩌면 <가장 좋은 땅을 달라>고 요구해도 되는 데, 왜 어려운 곳을 요구했을까요?
그 땅은 어떤 땅입니까?
1. 첫째 이유는, 45년 전에 자기가 밟았던 땅이고,
2. 둘째 이유는, 그 땅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통곡하게 되었고, 공포와 절망을 느꼈던 그 땅이고, 그 땅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방황하게 되었고, 20세 이상이 모두 죽게된 땅 입니다.
누구보다도 선뜻 나서기 어려운 땅을 갈렙이 나서서 <싸워보겠다>고 요구 하는 거예요.
이 말을 들은 여호수아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무척 감동했을 꺼예요. 당연히 <좋은 땅을 달라>고 해도 들어주어야 하는데, "어려운 그 땅을 자기가 책임지고 공격하겠다"고 하니, 너무나 고마웠을 꺼예요.
더구나 갈렙은 전쟁영웅으로 특권을 요구하지도 않았어요.
또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대단한 도전을 주는 말>이 되을 꺼예요.
그런 어려운 시기에 85세 되는 원로가 "어려운 헤브론을 자기가 공격하겠다"고 먼저 자기가 얘기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큰 의미를 주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그 곳은 오히려 남들이 피하고, 꺼려하는 곳이고, 두려운 장소인데도, 그 곳에 <자기가 가겠다>고 자청한 거예요.
이제는 좀 편안히 쉬어도 되는 시기에, "힘든 전투를 직접 참가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더군다나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복 전쟁>이 끝나고, 긴장이 풀어져 있어서, "어느 땅을 어떤 지파가 차지할 것인가?"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계산하는 싯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맥아더 장군은 이런 말을 했어요.
단순히 "오래 산다"고 해서 늙은 것이 아니고. 사람들은 늙어가는 이유는 목적과 이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월은 피부를 주름지게 만들뿐 이지만, 목적이 없는 무관심한 생활은 영혼을 주름지게 만듭니다.
당신은 믿는 것 만큼은 젊어지고, 의심하는 것 만큼 늙습니다.
당신은 자신감을 갖는 것 만큼 젊어지고, 두려워하는 것 만큼 늙습니다.
당신은 희망를 가지는 것 만큼 젊어지고, 절망하는 것 만큼 늙습니다.
사무엘 울만의 시, <청춘(靑春)>에서도 이런 글귀가 나옵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떠한 시기가 아니라 어떤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미빛 볼, 붉은 입술, 강인한 육신을 뜻하지 아니하고,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과 생활을 위한 소심성을 초월하는 용기, 안이함에서의 집착을 초월하는 모험심...
청춘이란 그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때로는 스무 살의 청년보다 예순 살의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네. 우리는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아니하고, 이상을 상실할 때 비로소 늙어가나니,
세월은 살결에 주름을 만들지만, 열정을 상실할 때 영혼은 주름지고,
근심, 두려움 , 자신감 상실은 기백을 죽이고 정신을 타락 시키네 ****"
<청춘>이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고,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때로는 20세 청춘보다 60살이 된 사람에게서 더 <청춘>과 같은 젊음을 느끼게 됩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늙는 것은 아니고, 이상을 잃어버렸을 때에 비로소 늙는 것입니다.
머리를 드높여 <희망>이란 파도를 타는 한, 그대는 80세 일찌라도 <영원한 청춘>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85세 나이인 갈렙은 여전히 <푸르른 상록수>와 같은 기상을 지닌 <청춘>인 것입니다.
<갈렙>의 용기를 보십시오. <갈렙>의 강인한 의지를 느껴 보십시오.
그의 굳은 입술과 그의 불꽃같은 눈빛에는 여호수아에게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있었을 것이고,
백성들에게는 도전과 자극이 되었을 꺼예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어요. 저와 여러분은 갈렙과 같은 패기와 솔선수범하는 이런 멋진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 갈렙은 <헤브론 땅을 달라>고 했을까요?
1. 첫째, 그가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8~9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나와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약하게 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마음을 다해 내 하나님 여호와를 따랐습니다. 그러자 그날 모세가 내게 맹세했습니다. <네가 마음을 다해 네 하나님여호와를 따랐으므로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유산이 될 것이다"(수14:8~9)
여기에 8절에서 반복되는 말이 나옵니다. 그것은 <마음을 다해 여호와를 따랐습니다.>
9절에서 <네 마음을 다해 네 여호와를 따랐으므로...> 가 계속 나옵니다.
14절을 또 보십시오. "따라서 헤브론은 오늘까지 그니스 사람이 여분네의 아들 갈럽의 유산이 되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마음을 다해 따랐기 때문입니다.(수14:9)
여기에 세번씩, 반복하여 나오는 <마음을 다해 따랐다>는 말이 나옵니다.
1. 첫번째는, 8절의 말은 <갈렙>이 스스로 한 말로써,
"자신이 마음을 다해 여호와를 따랐다"는 말이고,
2. 두번째는, 9절의 표현은 <모세>가 한 말입니다. 이 말은 모세가 갈렙을 보면서
"너, 참 귀하다. 네 마음을 다해 여호와를 따랐구나"라고 한 말이고,
3. 세번째는, 14절의 말씀을 성경에 나오는 <성경의 저자>가 한 말씀으로,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마음을 다해 따랐다"고 객관적으로 평가한 말입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에 이렇게 인정을 받은 사람이 <갈렙>입니다.
이렇게 각각 3번씩이나, <반복해서 평가 받았다>는 사실은 중요한 얘기입니다.
그것은 "빈틈없이 하나님을 붙어서 바짝 따라 다녔다"는 뜻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갈렙>은 "온전히 하나님을 따랐던 사람" 입니다.
신약에 나오는 사람중에서 이와같은 사람이 <베드로> 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씩이나 부인했지만, 그래도 성경은 <예견된 사건>이라고 했어요.
누가복음 22장 54절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잡아 대 제사장의 집으로 끌고 들어가자, 베드로도 멀찍이 뒤따라 갔다"(눅 22:54)고 했어요.
이렇게 "멀찍이 뒤를 따라 갔다"라고 말하는 것은 <베드로>가 물리적인 어떤 상황을 얘기 하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의 <심적인 상황>을 얘기하는 거예요.
베드로의 머리 속에는 "무엇이 나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를 계산하기 시작했고,
"두려운 마음에서 거리를 두고 따라 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차하면, "도망갈 준비를 했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요? 우리가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가야 하는 사람인가요?
우리는 예수님과 가까이 따라 가야 하는데, <베드로의 심리>는 이미 갈등이 있었던 거예요.
<베드로의 심리상태>는 예수님과 거리를 두고, 적당히 떨어져서 행동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예요.
그것은 "그가 그렇게 불안하고, 힘든 상황이라"는 얘기입니다.
안철수 씨는 그런 말을 했어요.
어떤 사람들을 평가할 때에 그 사람의 생각이나 말을 가지고는 평가할 수 없다.
"그 사람이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떤 행동을 했느냐?"는 것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했어요.
말은 얼마든지 바꾸어 얘기할 수 있으므로 말은 소용이 없고,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2. 두번째로, 갈렙은 그 땅을 요구하며,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말했을까요?
그것도 그냥 <그 산지를 달라>는 것이 아니고, "45년 전에 여호와께서 갈렙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그 근거를 제시하며,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분명히 요구합니다.
특별히 그는 "여호와께서 그날, 나에게 말씀하신, <그 산지를 나에게 달라>"고 45년 전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그 말씀을 간직했다가, 드디어 그 땅을 요구한 거예요.
<갈렙>은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그날 여호와가 자신에게 말씀했던, 그 [언약]을 분명히 기억하면서, <정말, 그 때의 그 열망을 잊지 않고 마음에 품고 있었던> 거예요.
45년전에, <네게 밟은 그 땅을...>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므로 <그 땅을 달라>고 요구한 거예요.
그날, 여호와가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바로 그 땅을 요구한 것>입니다.
갈렙은 <여호와는 언젠가 그 땅을 나에게 주실꺼야...>라는 말씀을 마음에 품고, 45년을 기다렸던 거예요. 그래서 갈렙은 그런 확실한 믿음의 바탕위에, <하나님 말씀에 기초하여, 분명한 확신을 갖고 달라>고 요구한 거예요.
여러분! 갈렙이 건강이 넘쳐서 이런 얘기를 한 것이 아니예요.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행될 것이라>는 말씀을 확실히 믿고, 그렇게 45년을 기다린 거예요.
오늘 본문은 <갈렙의 열정>과 <갈렙의 도전>을 배워야 하지만,
그것보다도 갈렙의 도전 의지는 <45년 전에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는 거예요.
지난 주에 유명한 탈렌트 박용하의 자살 사건이 있었어요.
그는 모든 행복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지만, 정작 그는 행복하지 않았어요.
나이 33살에 연기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 한류 스타가 된 그가, 무엇이 어려워서 자살을 했을까요? 상식적으로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이 왜 죽어야 하나요?
우리는 그의 속 마음을 잘 모르지만, 그의 선택은 분명히 잘못된 거예요.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예요.
세상의 인기와 명예가 왜 그렇게 끝내야 하나요?
세상에는 그 보다 훨씬 더 어려운 환경가운데서도, 잘 살려고 노력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는 너무나 기막힌 결정을 내린 거예요.
왜 그는 죽어야 하나요?
그 사람의 마음속에 인생의 참된 주인이신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그런 잘못된 결정을 한 거예요.
<자살>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그런 결정을 못해요.
자살은 [죄]이고, 하나님이 그런 달란트를 주신 것에 대한 <배신행위> 예요.
감정은 사물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우울증>은 사탄이 움직이는 장난이예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첫째,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사람의 말이나 판단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2. 둘째, 중요한 일일수록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판단하셔야 합니다.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냉정한 이성으로 판단 해야 합니다.
3. 셋째, 오랫동안 기도하며 준비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나의 한계를 인정하게 되지만, 그래도 갈렙과 같이 <이 산지를 나에게 주소서>라고
용기있게 말할 수 있는 <타이밍이 언제인지?>를 구별 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자! 보세요. 그러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정확한 타이밍에 맞추어, 여호수아에게 말한 갈렙의 용기 있는 이런 행동과 결정으로,
15절에 나오는 것과 같이 “그 땅에 전쟁이 그쳤다”고 했어요.
15절을 보십시오. 헤브론의 옛이름은 <기럇 아르바>라고 불렀는데, 이 아르바는 아낙사람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곳에 정착하자 전쟁이 그쳤습니다.” (수 14:15)
이스라엘 백성이 그 곳에 정착하자 <전쟁이 그쳤다>고 했어요.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세요. 이 말씀은 “가나안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고, "갈렙이 아낙 자손을 진멸하고, <헤브론 정복>이 이스라엘 정복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호수아의 두가지 키워드인 이미 <정복>과 <분배>라고 말씀해 드렸는데,
그 [정복]과 [분배]는 누구로부터 마무리가 되나요?
그 <정복>은 갈렙에 의해서 마무리가 되었고, 그 <분배>는 여호수아에 의해 마무리가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두사람, <갈렙과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나님이 가나안을 향한 그가 그린 <꿈과 기대>가 그대로 이루어 지게 됩니다.
결국, 그 <헤브론 땅>은 갈렙 자손의 유산으로 돌아가게 되며, 먼후일 다윗 통치가 시작될 때, 헤브론이 수도가 됩니다.
오늘은 7월 4일, 7월 들어서 첫 번째 주일입니다.
이제, 2010년 하반기가 시작됩니다. 년초의 새로운 희망을 갖고 시작했지만, 시간은 흘러 벌써 6개월이 지났어요. 그러나 지금 아쉬웠던 것은 모두 다 잊어버리고, 또다시 2010년의 절반을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게 되니, 지금부터 또다시 시작하세요.
특별히 갈렙의 생각과 믿음으로 <이 산지를 나에게 주소서>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들의 믿음에도 그런 도전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에게 이 산지를 주소서, 여기에서 안주하지 않게 하시고, 새로운 곳에서 도전할 수 있게, 내 인생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알려주는 <그 산지>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어쩌면 나이 때문에, 아니면 건강 때문에, 그것도 아니라면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혹시 미루어 왔던 것이 있다면, 그것을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은 편안한 평지를 원하지만, 갈렙처럼 어려운 곳을 선택하세요.
어쩌면 내가 까맣게 잊어버렸던 그런 장소를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에게 그런 새로운 비전을 주옵소서.
내가 꽁꽁 묶어 놓았던 것이 있으면, 이번 기회에 그곳을 향해 갈렙처럼 정복하는 도전을 주시고, 아직 내가 정복하지 않은 곳이 있거나, 내 마음 속에 담아 두었던 곳이 있으면,
그 곳이 오늘 말씀하신 <헤브론>이 될 수 있으니까, 제가 그 곳을 향해 갈렙처럼 나가게 도와 주세요.
우리는 그와같은 <새로운 도전>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수17/도피성을 만들어라/수20:1-9/말씀: 안광복 목사님
여호수아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과 분배의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심히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복한 땅을 분배하고, 그런 후에 하나님께서는 <도피성을 만들라>고 명령을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도피성>은 무엇입니까?
<도피성>은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끌어들이는 성읍>이라는 뜻입니다.
<도피성>은 의도적인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라도 피신할 수 있는 성읍을 말합니다. 실수로 살인을 했더라도 도피성에 가서, 장로들에게 얘기하고 재판을 받으면, 그 사정을 감안하여 그곳에서 살도록 받아 주어, 생명을 보호해 주는 장치입니다.
이 <도피성>은 이미 모세에게 명령했던 것이므로 민수기 35장이나, 신명기 19장에서 이미 말씀하셨던 내용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도피성을 만들라>고 했을까요?
그런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을 먼저 살펴 보겠습니다.
여호수아 20장 1-3절 까지 읽어 보십시오.
“그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모세를 통하여 지시한 <도피성들을 지정하라>고 말하여라. 그래서 뜻하지 않게 실수로 살인한 자가 그곳으로 피신해, 피로 복수하려는 사람으로부터 보호받게 하여라.”(수20 :1-3)
여호수아서를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무엇입니까?
1. 첫째로,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나 강압적이고, 무서운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기를 하나님은 <가나안 백성들을 다스리라>고 젊잖하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끝까지 진멸하라>고 강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철저하게 부수고, 죽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박살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무서운 하나님의 모습에서 <사랑의 하나님>이란 모습은 찾아 볼수 없고, <두려운 하나님>의 모습만 우리에게 나타 내십니다.
그러나 그런 무서운 하나님 속에서도 너무나 <섬세한 하나님>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단호하지만, “실수로 살인한 사람은 보호해 주어야 한다”고 하여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도피성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 때, <구약의 율법>은 본인이 실수로 인해 살인했어도 반드시 죽음을 당해야 하므로,
그것은 너무나 잘못된 율법이므로, 그런 억울한 사정을 시정하려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도피성>이란 제도를 만들은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섬세한 사랑>을 느끼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공동체에게 <섬세한 사랑>의 마음을 전해 주고 싶었던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으므로, 하나의 생명이라도 귀중하게 여기므로,
도피성을 만들어서 해결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복수심에 불타는 사회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라도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도피성>을 만드셨어요.
세상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실수를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건 어려운 사람에게 하나님은 <도피성>을 만들어서 보호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섬세한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사람 살리는데 관심이 있었어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1~13)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세심한 배려를 해 주십니다.
억울하게 죽은 한 사람을 위해서도 끝까지 챙기십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이 가인에게 죄를 직접 물었어요.
그것은 아벨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사건을 벌렸을 때, 이후에 그의 남편인 우리아 장군이 죽게 되었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아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셨고, 다윗의 못된 행동을 엄중하게 다스리셨어요.
바로 이와 같이 [죄]에 대해서는 엄격히 다스리지만, 그 약자들의 딱한 처지에 대해서는 언제나 긍휼이 여기셨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상이 창궐한 가나안 백성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자의 모습으로 나탄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바라보시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그 실수를 감싸주는 하나님 이십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감싸주지 않는 <약자의 편>에 서서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도피성>이 되시는 예수님,
우리는 그 하나님께 항상 가까이 접하며, 늘 함께 동행해야 합니다.
아까 부른 찬송가,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라는 찬송을 함께 부릅시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란을 면케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 께로다.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 주십니다. 여러분 그런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도피성>에 들어가는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4-6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 도피성 가운데 하나로 피신하면, 그는 그 성문 입구에 서서 그 성의 장로들 앞에서 자기 사건을 진술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그를 그 성으로 들이고, 그에게 살 곳을 주어 그들 가운데 살게 할 것이다. 만약 피로 복수하는 사람이 그를 쫓아 오더라도 그에게 그 피의자를 내주어서는 안 된다. 그가 어떻게 하다가 우연히 죽인 것이지, 전부터 미워서 죽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심판하는 회중 앞에 설 때까지나, 그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 성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 후에야 그는 자기 성으로 곧 그 도망쳐 나온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수 20:4-6)
도피성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도피성>으로 들어갈 때에도 규칙이 있어요.
과정과 절차를 따르지 않으면 보호 받을 수 없어요.
1. 첫째로, 먼저 살인자는 도피성에 찾아가서 장로들에게 사실을 진술해야 합니다.
2. 둘째로, 재판을 받아야 해요. 그렇게 하는 것은 그것을 악용한 사람도 있기 때문이지요.
3. 셋째로, 재판결과가 정말로 “우연히 죽였다”고 인정이 되면, 도피성에 살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고, 그 제사장이 죽으면 자유의 몸이 되어 자기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1. 죽기 전까지는 그 도피성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에 들어간 살인자도 자유를 얻게 됩니다.
살인자의 결과는 죽음이지만, 그 도피성을 통하여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과 <우리의 독특한 관계>를 상징해 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인해서 우리들에게는 참된 자유와 생명을 허락해 주셨어요.
그 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도피성>을 만들어 주셨어요.
2. 세상에는 이런 <도피성>과 비슷한 것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착각을 하지요.
어떤 사람은 <돈>과 <명예>를 도피성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재능 있는 자녀들>을 도피성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든든한 <재물>이나 자기가 갖고 있는 <자산>이 자신의 도피성으로 삼고, 안심하고 위로를 얻는 사람도 있어요.
3. 그러나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여러분의 도피성이 될 수는 없어요.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도피성이라도 <하나님이 인정하는 도피성>이라야 안전한 거예요.
여러분, 혹시 건강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것에 묶여 있는 것이 있나요?
혹시 경제적으로 묶이신 것이 있으시나요?
아니면,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주님에게 의지하고, 주님 안에서 자유를 느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대 제사장 되시는 예수님, 그 분 안에서 거할 때, 우리는 자유를 주셨으니까,
그 속박에서 벗어나고, 그 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세 번째, <도피성>의 위치와 대상을 살펴 봅시다.
7-9절을 보십시오. “그래서 백성들은 도피성으로 납달리 산간 지대에 있는 갈릴리의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간지대에 세겜과 헤브론으로 알려진 유다 산간 지대의 기럇아르바를 선정하고, 또 여리고 맞은편 요단강 동쪽으로 르우벤 지파의 광야 평원에서 바산의 골란을 선정하였다. 이 모든 도피성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 사는 외국인도 과실로 사람을 죽였을 경우, 그리로 도망가서 보복을 피해 공개 재판을 받을 때까지 피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곳입니다.” (수 20:7-9)
<도피성>은 어디에 두었나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요단강 북쪽과 중부지역, 남부지역에 하나씩 두었고, 각 지파마다 하나씩 두었어요.
대개 언덕과 산지에 해당하는 곳에 두었고, 이스라엘 전역 어디에서든지 하룻길에 도착할 수 있는 곳에 도피성을 두었어요. 그곳에는 누구든지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표지판을 만들었고, 밤에도 쉽게 들어가도록 안내판을 설치했던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교훈은 무엇일까요?
여기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인가요?
한 사람이라도 죄가 있지만, 한 생명이라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찾아 보세요.
그 사람이 히브리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다 받아 들였어요.
선교는 무엇입니까?
잘못된 도피성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진짜로 자유를 주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려 주기 위해, 세상에 있는 교회가 실질적인 <도피성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매주 찾아오는 새 가족들에게 우리 교회는 <도피성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짓눌려서 찾아 온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망과 위로를 주고 있을까요?
교회인 여기에서도 위로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완벽한 도피성>을 만들어 주셨는데, 우리가 그런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도피성으로 안내하는 <표지판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도피성>입니다.
그분을 의지하십시오.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도피성>입니다.
그들을 향해 우리는 <도피성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야 합니다.
여름철을 맞아, 각종 아웃리치에 참여하여 안내자의 역할을 하십시오.
우리를 그런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기 원합니다.
우리는 그 분을 신뢰하고, 그 분에게 영광 돌리는 우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수18/동편과 서편의 하나됨/수22:1-9 / 말씀: 안광복 목사님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어내서 <그들이 편안히 잘 먹고 잘 살라>고 애굽에서 [출애굽] 시킨 것이 아니예요.
1. 첫째,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고,
2. 둘째로,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실천하는 수준 높은 공동체를 만들기 원했어요.
그 과정에서 40년을 광야에서 훈련시켰고, 7년에 걸친 가나안 땅의 정복 전쟁의 기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이 백성에게 기대했던 기대는 무엇입니까?
또 하나님이 생각하는 훈련기간에는 어떤 의도를 가졌을까요?
오늘의 본문 22장에 나오는 대화를 살펴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숙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을 저는 3가지 장면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첫 번째는, <이별과 축복>입니다.
이스라엘 지파는 12지파인데, 서편으로 건너와서 모세에게 찾아와 “동편의 땅을 달라”고 먼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요청을 합니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같이 가서 정복전쟁을 해야 하는데 “자기들만 먼저 그곳에 정착하려고 한다”는데 마음이 부담되었지만, 그래도 동의해 줍니다.
그러나 그 가족들은 그곳에 거처를 정해 놓고, 남자들은 끝까지 정복전쟁에 참여하는 조건을 붙여서 허락해 주었고, 그들은 기꺼이 정복전쟁에 참여하여 끝까지 전쟁을 수행했고, 이제는 헤어지는 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여호수아가 떠나는 사람들에게 이별을 고합니다.
22장 1~6절을 보십시오.“그때 여호수아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 놓고, 너희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것을 다 지켰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도 순종을 하였고, 너희에게 준 사명을 잘 감당하였다. 이제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대로 너희 형제들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너희는 모세가 요단강 건너 편에서 너희에게 준 너희의 소유지에 있는 너희 장막으로 돌아가도 좋다. 그러나 모세가 너희에게 준 명령과 율법을 잘 지켜 행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 분의 길로 다니고, 그 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 분을 꼭 잡고, 너희의 마음과 영혼을 다해 그 분을 섬겨야 한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들을 축복하고, 떠나 보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기 장막으로 돌아 갔습니다.” (수22:1-6)
여호수아는 여기서 크게 2가지로 권면을 합니다.
1. 첫째는, “그동안 수고했다. 최선을 다해서 고맙다”
2. 둘째는, “그곳에 가더라도 신앙생활을 잘 해라. 아무리 그곳이 풍요하고, 넉넉함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고 축복하면서, 이별을 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지 몰라요.
이형기 시인의 <낙화>라는 시가 있습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가는, 너희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노래한 시,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여기서 제가 마음에 드는 부분은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쌓여도, 지금은 가야 할 때”
[이별]이라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떠나야 될 정확한 Timing 에서 서로를 보내 주는
<축복의 아름다운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장면을 여호수아와 그들이 오늘,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동안 7년 동안 전쟁을 치룬 전우들과 헤어지는 장면이라기 보다도,
어쩌면 40년간 광야에서 고생한 형제들과의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여러분, 혹시 군대에 자녀를 보내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방학을 맞이해서 돌아온 자녀를 외국으로 떠나보내는 부모의 심정이 이런 장면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특히 여호수아 22장 5절의 말씀과 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 분의 길로 다녀라. 그 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 분을 꼭 붙잡고, 너희의 마음과 영혼을 다해 그분을 온전히 섬겨라.”(수 22:5)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꼭 축복을 전해 주세요.
주변 사람들이 잘 되기를 축하해 주시고, 그런 축복을 전해 주세요.
우리 주변에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위로해 주고, 좋은 일이 있을 때 축복해 주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참 묘한 존재예요. 인간은 경쟁 구도 속에 있으므로 동료가 승진을 하면 시기심이 생기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거예요.
우리 아이는 재수하는데, “친구 아들은 명문대학에 갔다”고 하면, 가슴이 무너지는 것을 어찌 표현해야 하나요.
낚시하는 사람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자기가 월척을 잡는 것보다, “옆에서 월척을 당기다가 막판에 그것을 놓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진정, [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을 좋아해요.
옆 사람이 잘 되도록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축복해 주는 사람을 하나님은 좋아 하십니다.
2. 두 번째는, <오해와 갈등>입니다.
<성숙한 공동체>이더라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사는 곳에는 <오해와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오해와 갈등>이 생기면, 어떻게 빠른 시간에 오해를 풀어 나가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들은 전리품도 엄청 많았어요.
그러나 이들은 요단강 근처에서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이들은 갑자기 제단을 쌓았어요.
9절 - 10절의 말씀을 보십시오.“그리하여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에 있는 실로에서 이스라엘 자손들 곁을 떠나,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모세를 통해 소유하게 된 그들의 소유지 길르앗으로 돌아 갔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 요단강 경계에 이르러 요단 강가에 제단을 쌓았는데, 눈에 띄게 <큰 제단> 이었습니다.”(수 22:9-10)
그들은 요단 강을 그냥 건너갈 것이지, 왜 이들은 제단을 쌓았을까요?
이들이 쌓은 제단은 “눈에 띄게 큰 제단을 쌓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이들은 비상대책 회의를 하러 각 지파의 대표들을 모아 진상조사단을 파견합니다.
16장을 보십시오.“여호와의 모든 백성들을 대신하여 당신들은 어째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이런 악한 짓을 하였소? 당신들은 여호와를 떠나 자신들을 위해 단을 쌓고, 여호와를 거역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망했습니다. (수 22:16)
금방 헤어질 때 까지는 분위기가 좋았는데, 왜 이렇게 난리를 칠까요?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신명기 12장 13-1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고 너희 마음에 내키는 아무 곳에서나 너희 번제물을 드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여호와께서 너희 지파들에게 선택해 주신 한 곳에서만 드려야 할 것이니, 거기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지키도록 하라.” (신 12:13-14)
하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엉뚱한 제단을 쌓지 말라>고 이미 말씀을 했어요.
그것은 엉뚱한 곳에서 우상숭배를 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은 <일정한 곳에서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두 가지 과거의 일을 상기 시킵니다.
1. 첫째는, 모압의 우상인 바알 신을 숭배하다가 24,000명이 죽지 않았느냐?
2. 둘째는, 아간의 외투를 숨겼다가 아이 성에서 패배하지 않았느냐?
이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이므로, 같이 뭉쳐야 합니다.
18-19절 말씀을 보십시오.“너희가 지금 여호와께 등을 돌리는 것이냐? 너희가 오늘 여호와를 거역하는 것이라면, 그 분이 내일 이슬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할 것이다. 만약 너희 소유지가 깨끗하지 않다면,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께서 소유하신 땅으로 건너와 우리의 땅을 나눠 쓰자. 다만 우리 하나님 여호와 제단 외에 다른 것을 스스로 쌓아 여호와를 거역하거나 우리를 거역하는 일을 없어야 한다.” (수 22:18-19)
여기에 나오는 “너희 소유지가 깨끗하지 않다면”은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당신들이 소유한 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우리 땅으로 건너와서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살자>는 뜻입니다.
너희들이 사는 곳이 마땅치 않으면, 거룩한 성막이 있는 이곳에 와서 같이 살자.
너희들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이므로, <다 같이 모여 살자>는 제안입니다.
이들은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같이 살자>고 제안합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같은 공동체의 의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기 지파만이 누리는 유익을 고려하지 않는 의식입니다.
여러분, 공동체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대부분 많은 문제들이 <오해에서 비롯 된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요즘 이런 오해 때문에 서로가 갈등을 일으킨 적은 없으십니까?
문자를 보냈는데 “왜 답장이 없을까?“라는 오해에서 부터 친한 사이에 거리가 생깁니다.
<성숙한 공동체>는 이런 오해를 빨리 풀어 줘야 합니다.
갈등은 있을 수 있지만, 오해가 있으면 빨리 그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오랫동안 [좋은 관계]가 그런 오해로 인하여 거리가 생긴다면 <성숙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3. 세 번째는 <화해와 기쁨>입니다.
오해가 된 부분이 있었다면, 빨리 풀어서 해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입니다.
22절 말씀입니다. “신 가운데 신이신 여호와, 그 분은 아십니다! 이스라엘도 알게 하십시오. 이 일이 여호와께 대한 반역이거나 불순종하는 것이었다면, 오늘 우리를 구원하지 마십시오.” (수 22:22)
“아 ~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요”라고 말해야 합니다.
제단을 쌓은 것은 절대로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 아닙니다.
제단을 쌓은 것은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 후손을 위한 기념비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런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 후세에게 전하려고 제단을 만들은 것입니다. 후세에게 “우리들은 떨어져 있지만, 같은 백성이고, 같은 공동체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29절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오늘 여호와의 장막 앞에 서 있는 것은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외에 번제물이나 곡식 제물이나 기타의 제사를 드릴 다른 제단을 쌓아 여호와를 거역하거나 그 분께 등을 돌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수 22:29)
그들은 결코 제사를 드릴 목적이 아니고, “그냥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결코 하나님을 거역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미리 말씀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니까,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33-34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로 올라가 <그들과 싸워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을 치자>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르우벤 자손들과 갓 자손들은 그 제단을 <엣>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심에 대한 우리 사이의 증거물이 될 것이다”라는 뜻에서 였습니다. (수 22:33-34)
자! 보십시오. 진실을 알고 나서, 서로 기뻐서 찬양했어요.
자칫하면 오해로 전쟁이 일어날 뻔 했어요. 우리 모두 <하나님을 다 같이 섬기며 사랑했다>는 뜻에서 증거단을 세우고, 그곳을 [엣]이라고 불렀어요.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습을 보십시오.
1. 첫째, 서로를 축복하는 공동체이고
2, 둘째, 오해가 있었으나 잘 풀어 나가는 성숙한 공동체
3,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공동체
이 정도의 모습이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아름다운 <하나가 된 공동체>인 것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 됨>의 의미가 어려운데,“어떻게 이들이 하나가 되는 비결을 알았을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은 인격이나 자신의 노력으로 성숙한 사람이 된 게 아니예요.
이들이 하나가 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가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하나]가 된 비결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
이것은 마치 오케스트라가 좋은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전체 멤버들이 지휘자 한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되기를 원하세요.
교회와 가정이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온전히 만드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주님을 섬기는 <성숙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수19/ 마지막 권면/수23:1-13/ 말씀: 안광복 목사님
오늘의 말씀은 여호수와의 마지막 <고별사>입니다.
여호수와는 110살까지 살았는데, 믿음의 후배들에게 <유언과 같은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자기의 수명을 다 했을 때, ①하고 싶은 말을 하고, ②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③할 수 있는말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유언>이라고 합니다.
<유언>이라는 것은 첫째, 평생에 하고 싶은 말씀이거나, 둘째로, 정말 중요하게 생각한 것을 말로 전해 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와께서 이스라엘 주위를 둘러싼 모든 적들로 부터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신 후 오랜 세월이 흘러, 여호수와가 늙고 나이가 들었습니다.
그는 온 이스라엘 장로들과 지도자들과 재판관들과 관리들을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에게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 이 모든 민족들에게 하신 일을 보았다.
너희를 위해 싸우신 분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 이시다“(수23:1-3)
여호수와가 여러 지도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마지막 유언과 같은 말씀을 합니다.
그럼, 여호수와의 권면은 무엇입니까?
1. 첫번째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모두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싸우시는 분>입니다.
누구를 위해 싸우신 분입니까? 그들(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싸우셨어요.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 분입니까?
그들의 자유와 그들의 축복된 삶을 위해서, 그동안 싸우셨고, 지배하셨고, 인도하셨고, 돌봐주신 분입니다.
출애굽 과정에서 그들을 지켜 주셨고, 애굽의 폭정에서 이끌어 내셨고, 광야생활에서도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여호수와>는 누구입니까?
성경에서 처음에 그는 <용사>로, <싸움 꾼>으로, 여호수아를 소개했어요.
가난안 정복전쟁에서 선두에서 싸웠고, 여리고 전투와 아이 성 전투에서 승리한 사람입니다. 여호수와는 모세의 나이 80세부터 같이 동행을 했고 , 애굽에서 부터 나올 때에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경험을 했고, 광야에서 베푸시는 엄청난 기적들을 체험했고, 가나안의 정탐꾼으로 참여했고, 심지어는 백성들의 불평하는 장면도 보았어요.
또 구제 불능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금씩 변화되는 모습을 여호수와는 옆에서 늘 지켜 보고 있었던 거예요. 여호수아는 모세의 어려움을 옆에서 옆에서 지켜 본 사람입니다.
누구보다도 수고를 많이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인데, 여호수아는 오늘 고별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셨고, 그 하나님이 모두 다 이루셨다“고 하나님께 먼저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 나오는 <사도바울>도 고린도 전서 15장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어요
“그러나 오늘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내게 주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않아, 내가 어느 사도보다 수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로지 나와 함께 한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입니다.“(고전15:10)
<사도바울>도 마지막 순간에는 “하나님이 시켜서 그렇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생명과, 건강과, 재산과, 가정과, 비젼을 잘 사용 하시고, 우리에게 마지막순간이 오면,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2. 두 번째는,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의지하라>고 권면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가 오늘까지 행한 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굳게 붙들어야 한다.(수23:8)
여기서 “굳게 붙들어야 한다”는 말은 “떨어지지 않게 철저하게 꼭 붙들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여호와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고, 붙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광야]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을 의미합니다.
그런 광야에서 그런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에, [광야]는 하나님의 의지하고, 붙들어야 살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와는 <하나님을 붙잡으라>고 권면을 합니다.
하나님을 굳게 붙들지 않으면, “어려운 세파에 그냥 끌려 다닌다“는 경고의 의미입니다.
3. 세 번째의 권면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11절은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기울여 너의 하나님여호와를 사랑하라”(수23:11)
여기서 “마음을 기울인다”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울타리를 치라”라는 말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내 마음이 빠져 나가지 않도록 그렇게 울타리를 치라“는 뜻입니다.
다른 마음이 섞이지 않도록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와는 믿음의 후배들에게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12~13장을 보십시오. “그러나 만약 너희가 그들과 서로 결혼을 하고, 이리저리 어울려 지내면 그때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더 이상 너의 앞에서 <이 민족들을 내쫓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 둬라. 그리고 그들은 너희에게 [덧]이 되고, [함정]이 될 것이요, 너희 옆구리의 [채찍]이 되고,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 너희가 결국에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좋은 땅에서 [망]하게 될 것이다.(수23:12-13)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결국은 망하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것을 사랑하게 되므로, 잘못된 대상을 사랑하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경고입니다.
여호수와의 마지막 권면 중에서 핵심이 무엇입니까?
여호수아가 지적한 4가지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고, 어울리다 보면은 결혼도 하게 될 것이고, 그들이 믿는 다른 시도 접하게 되므로 여호수아는 4가지를 지적합니다.
1. 첫째, [덧]이 될 것이다. 2. 둘째, [함정]이 될 것이다.
3. 셋째, [채찍]이 될 것이다. 4. 넷째, [가시]가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악담같지만, 이 말씀을 깊이 음미하세요.
[덧]과, [함정]과, [채찍]과, [가시]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은 눈에 잘 보이지 않거나, 사소해 보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그대로 놔 두다 보면, 큰 문제를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눈에 가시는 아주 작은 것이지만, 그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을 때는 눈에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소해 보이지만, 그냥 지나치면, 내 인생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 옵니다.
어쩌면, 한순간에 가정을 뒤엎을 수 있고, 자신의 명예와 성과를 한 순간에 무너 뜨릴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상황은 언제 발생 하나요?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을 때> 발생합니다.
가나안 족속을 사랑하다보면, 그들과 어울릴 때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덧]에 빠지고, [채찍]과 [가시]가 생기게 됩니다. 또 그렇게 그들과 동화되어 살다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못된 가치관>을 심어주게 되어, 결국은 하나님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보십시오.
특히 서구 유럽 사회의 <영적 타락>을 주목해 보십시오.
특히 <영국의 교회>들을 자세히 들여 다 보십시오.
영국은 한 때에는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이제는 교회들이 텅텅 비어 있어요.
과거에 화려하게 지어진 교회에는 요즘은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과거의 화려한 모습을 구경시켜 주고 있으며, 대부분의 교회는 <마을 회관>이나 <나이트 클럽>으로 전락되어 사용되고 있어요.
그러면, 그들은 어디로 가나요? 모두 다 <축구장>으로 몰려가서 축구를 즐겨요.
그리고 성범죄와 마약에 취하여 인생을 즐기고 있어요.
그런 퇴폐풍조를 그것이 <새로운 문화>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왜 이렇게 되었나요? 그것은 마땅한 대상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사랑해야 할 대상을 제대로 찾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의지해야 할 대상을 정확하게 찾으셔야 해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와>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남긴 <마지막 권면>을 기억하십시오.
1. 첫째,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함께 하셨다“는 고백과
2. 둘째, “하나님을 굳게 붙잡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3. 셋째,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라”는 여호수아의 고백과 같이, 우리들도 이런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도 언젠가 이런 권면의 말씀을 후배들에게 나누어 줄 시간이 다가오면, 우리도 그런 고백을 나누어 주기 바랍니다.
수20/ 언약의 기념비/수24:14~25/ 말씀:안광복 목사님
오늘은 여호수아서 강해설교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여호수아서는 24장으로 끝나지만, 실제로는 출애굽기에서 시작되며 <하나님의 원대한 꿈>이 시작되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창세기 12장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이 여호수아서에서 종결되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창세기 12장 1~3절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네 고향, 네 친척,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할 것이니, 네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창12:1~3)
아브라함은 그래서 자기 고향을 버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가나안의 세겜 땅에서 정착하여 살았고, 거기서 이삭과 에서와 야곱 그리고 요셉으로 이어졌습니다.
거기서 잘 살다가 애굽의 종살이를 하게 되고, 그 후에 하나님의 의도로 [출애굽]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살면서도 그들은 성막을 지어 예배를 드렸어요.
모세의 지도력을 이어 받아, 여호수아는 <정복과 분배>의 원칙에 따라,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이제 나이가 들어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 세대를 끝내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맺으며, <언약식>을 체결하는 순간입니다.
출애굽기 19장 5~6절을 보십시오.
"이제 너희가 내게 온전히 순종하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 특별한 내 보물이 될 것이다. 온 땅이 내 것이지만, <너희는 내게 제사장 나라,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내 말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여라.(출19:5~6)
여러분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은 <첫 언약>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어떤 하나님입니까? 온 세계의 주인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고, 나는 천하의 온 세계의 주인이고, 이 세상은 내가 만들었다.
하나님은 세계는 내가 소유하고 있으니까 내 말을 잘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1. 첫째, 너희가 모든 민족 가운데 가장 소중한 백성이 될 것이고
2. 둘째, 제사장 나라가 되고
3. 셋째,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비전을 주셨습니다.
<언약>은 무엇입니까?
[갑]과 [을] 사이에 꼭 필요한 내용을 적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해, 만약의 문제를 생각하여 반드시 필요한 부분을 서면에 적어 서로 싸인하여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싸인을 하였다“는 것은 구속력이 있어서, 쌍방에 권리와 의무가 성립되어,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너희들을 부르신 분이고, 지켜 주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신을 섬기고, 애굽에서 평생을 종살이 하다가 끝낼 민족인데, 하나님은 [출애굽]시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언약(계약)은 아무하고나 맺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필요하고, 서로가 지키려고 할 때에 언약(계약)을 맺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셨나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서 “그들이 잘 먹고, 잘 살라“고 [출애굽]을 시켰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켜서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고, <예배하는 공동체>로 만들려고 그렇게 훈련시키시고, 고생을 하신 거예요.
죄와 사망의 골짜기에서 그들은 구원해 주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로 만들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거예요.
14~15절을 보십시오."이제 너희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성실하고 진실하게 그분을 섬기라.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 저편과 이집트에서 경배하던 신들을 던져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라.
그러나 만약 너희 마음에 여호와를 섬기는 일이 내키지 않으면, 그 때는 너희 스스로 누구를 섬길 것인지,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에서 섬겼던 신들이든, 지금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아모리 사람의 신들이든, 오늘 선택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길 것이다"(수24:14~15)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했어요
그러나 그들에게는 <강요하지 않고 선택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어요.
하나님 이외의 신들이 있었어요. 오래전에 이집트에서 섬겼던 신들이나, 바알 신, 그리고 아세라 신들 중에서 선택해서, <결정하라>고 요구하니까, 그들의 대답은
“무슨 말씀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섬겨야 하지요"라고 말하니까, 여호수아의 반응은 회의적이고 아주 싸늘한 반응을 보입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여호와를 섬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은 거룩한 하나님입니다. 그 분은 다른 신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이기에, 여러분의 반역 행위와 죄를 결코 용서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면, <지금까지 오랫동안 여러분을 보살펴 주신 분이라>고 해도 태도를 바꾸어 여러분을 쳐서 멸망시킬 것입니다.(수 24:19~20)
하나님은 거룩하지만 질투가 많으신 분이므로 "재앙을 내리고 죽일 수도 있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왜 여호수아는 관계가 깨질 때 나타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여, 그들에게 설명했을까요?” 그 이유는 여호수아의 마음속에는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을 하고, 정확하게 얘기해 주고 있는 거예요.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괜한 분위기에 휩쓸려서 <단순하게 계약을 체결하지 말라>고 얘기해 주고 있는 거예요. 이 계약은 심각한 것이니까 <신중히 하라>는 의미로 강조하고 있어요.
여러분, "내가 뭔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책임을 지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겠다"고 고백했다면, "나는 그 여자를 평생 책임지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어느 회사에 취직이 되었다면, "나는 그 회사에 충성을 다하여 열심히 일 하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여 섬기겠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섬긴다>는 것은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나의 열정을 다하여 그 분을 모시고, 따르겠다"는 의미입니다.
타 종교 얘기지만, <이슬람교의 헌신>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자신들이 섬기는 <알라 신>에 헌신합니다.
1. 첫째,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던지 <하루에 5번, 메카를 향해서> 아마를 땅에 대고 절을 해야 합니다.
2. 둘째, 라마단 기간에는 <반드시 금식>을 해야 하고
3. 셋째, 일 년에 한번은 성지인 메카를 다녀와야 하는 <순례의 길>에 대한 의무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방법과 타 종교와 비교하여 보십시오.
우리들의 헌신과 그들의 헌신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는 정말로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정을 했다면, <구체적인 행동이 뒤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22~25절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 일에 대한 증인을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가 증인입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우상을 모조리 부숴버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여러분의 충성을 다짐하십시오. 그러자 백성들이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그분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겠습니다"라고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날 세겜에서 백성들과 계약을 맺고, 그들이 지킬 법과 규정을 그들에게 일러 주었습니다"(수24:22~25)
너희가 하나님을 섬기겠다면 <스스로 증인이 되고, 이방신들을 버리라>고 요구합니다.
여호수아는 "이정도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구체적으로 헌신을 요구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헌신하고 계십니까?
나의 헌신과 사랑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하고 있나요?
혹시나 어느 정도의 선에서 정지하고, 멈춰 서 있지는 않으신가요?
스스로 생각해 보며, <자신의 헌신>을 스스로 가늠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여호수아의 호칭은 무엇입니까?
1. 첫째, <모세의 시종, 여호수아>
2. 둘째, <눈의 아들, 여호수아> 라고 성경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고 바꾸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110세에 죽었습니다"(수24:29)
여기에서 처음으로 새로운 호칭을 봅니다.
<여호아의 종>이라는 호칭은 그동안 모세에게만 붙여주신 호칭인데,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처음으로 <여호아의 종>이란 호칭을 여호수아에게 불러주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110세로 죽기 전에 하나님은 여호와의 헌신을 인정하고,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제가 작년에 호주에서 유학생들의 모임인 <코스타 집회>에 강사로 참가한 적이 있어요.
그 때 인도의 선교사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까?“라고 제안하여, 참석자 모두가 열정적으로 동의했어요.
그 다음에 강사가 “그렇게 헌신하겠습니까?”라고 재차 물으신 후,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갖고 계신, 여러분의 가장 중요한 물건을 하나님께 고백한대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라고 뜻밖의 제안을 하였어요.
그러면서 인도에 가면, 신발도 없고 모자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설명하면서
“숙소에 가서 MP3, 가방, 핸드폰등을 가져오라”고 제안 하니까, 그랬더니 대학생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다 내 놓았어요.
호주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너무나 열약한 환경에서 고생하는 어려운 학생들인데, 그렇게 아까운 [자기 것]을 아낌없이 내놓으며, 헌신했어요.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심정을
느끼게 하는 시간이 되었어요.
이런 뜨거운 모습을 보면서, 그 곳에 [성령충만]한 느낌을 받았어요.
여러분? 내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내가 드리는 헌신과 섬김은 어떤 모습일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1. 첫째, 먼저 <내가 버릴 것>을 버려야 해요.
세상의 친구들, 술, 담배, 그리고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모두 다 버려야 해요.
그리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향하고, 나가 즐기던 시간을 하나님께 더 드려야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헌신할 때 방해가 되는 것은 <모두 다 버려야>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는 거예요.
2. 둘째, 우리는 <드려야 할 것>을 더 드려야 해요.
내가 가진 <시간>과 내가 가진 <재능>을 모두 다 하나님에게 더 드려야 해요
내가 가진 <물질>과 <봉사하려는 마음>을 찾아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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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의 내용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었고,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셨어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인도의 강사처럼 <여러분의 중요한 것을 내 놓으라>고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주보 사이에 있는 [서약서]를 읽어 보시고, 동의하시면 싸인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준비한 [서약서]의 내용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나를 구원해 주셨고
2. 하나님은 나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3. 하나님께서는 나를 향한 큰 기대와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4. 그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겠습니다.
5.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버려야 할 것은 (내 생각)이고, 내가 더 드려야 할 것은 (시간과 물질)이므로
이것을 드림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겠습니다. ***각자 싸인하세요***
오늘은 8월1일입니다.
이 서약서는 최소한 금년 말까지 지키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누구에게 보여줄 필요도 없고, 교회에 제출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만이 간직하고, 지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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