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처로운 몽유도원도와 수월관음도의 고향 나들이
강탈당한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때마침 오대산 사고의 93년만의 조선왕조실록 반환과 북관대첩비의 반환이 100여 년 만에 이루어졌고 이어 국민의 십시일반 모금으로 귀중한 문화재인 김시민 장군의 공신교서(국립진주박물관 소장)도 영구 귀향하게 되었다. 최근 몽유도원도와 고려 불화(수월관음도)의 고향 나들이가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강탈(반출)당한 문화재 중에 상징적인 것이 몽유도원도와 고려 불화이다.
과거 직장 생활 중 야유회로 간 용인 에버랜드 안의 호암미술관에서 본 자그마한 그림, 고려불화에 벅찬 감회를 짓누르고 겨우 합장의 예를 올린 적이 있다. 필자의 나이의 몇 곱이나 되는 나이를 자랑하는 그림이지만 귀향길은 너무 험난했다.
몽유도원도는 일본의 한국학 연구 본산인 텐리대(天理大) 중앙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10일 “일본 텐리대가 소장하고 있는 걸작 몽유도원도를 국립중앙박물관이 여는 ‘한국 박물관 100주년 특별전’(9월 27일∼12월 6일 예정)에서 4주간 공개한다”고 밝혔다. 몽유도원도는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앙청 이전 개관전, 1996년 호암미술관이 개최한 ‘조선 전기 국보전’ 때 한국에 전시 된 적이 있다. 88올림픽 전후 한국인에 의한 일본 원정 문화재 절취 사건 등이 있었고 일본으로 반환이 어려울 것이라는 일본 내 여론에 곤욕을 치렀지만 사실 그것도 모사본이었다. 보존과 전시가 어려워 모사본을 대여 했던 것이다. 최근 상영되고 있는 화제의 영화 <인사동 스캔들> 에서 언급되는 안견의 '벽안도' 와 함께 거론되는 몽유도원도인지라 일반인들도 관심이 크다.
우리나라에 대여될 때마다 국내 환수여론이 들끓어 대여를 극히 꺼리는 그림,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국보로까지 지정한 그림이 바로 조선 산수화의 걸작 중 걸작, 바로 현동자 안견의 몽유도원도이다. 몽유도원도에는 김종서, 이개, 성산문, 신숙주, 정인지, 서거정, 송처관 등 당대 최고의 문신이 참여하여 23편의 자필 찬시가 들어 있다. 그림을 그린 안견과 안평대군까지 포함하여 문신의 운명이 고작 6년 후의 계유정난에 엇갈릴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해방 후에 뜻이 있는 재일 교포에 의해서 국내에 반입 된 적이 있지만 어려운 시절 매입이 어려웠다고 한다.
웅장하면서도 꿈결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가 화면 전체에 은은하게 녹아져 있고, 그윽하면서도 신비스러우며 당대의 화풍이 거의 망라되어 있어 다양한 느낌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위사진.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조선 1447년, 견본 채색, 세로 38.6cm, 가로 106.2㎝, 일본 텐리대학교 소장
몽유도원도는 맨 오른쪽의 도원경 그리고 중간부분이 현실세계에서 도원경으로 연결되는 험난한 기암괴석군, 그리고 맨 왼쪽이 현실세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은 세종과 소헌 왕후 사이의 8왕자 중 셋째였다. 다양한 예술적 재능을 지녔던 세종의 기질을 온전히 지닌 왕자였다. 안평대군은 남해에 유배 온 자암 김구와 함께 조선 초기 4대 서예가이다.
고려시대의 회화로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작품들 중에 무엇보다도 우수한 그림들은 단연코 고려의 화려하고 세련미 있는 불화들이다. 고려의 불화는 그 어느 시대의 불화보다도 뛰어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 불화는 120여 점이 되는데, 모두가 13세기에서 14세기경에 그려진 것들로서 대부분 일본에 남아 있다. 대부분의 고려불화의 운명이 그러하듯 반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언론에서는 150점정도 남아 있다고는 하나 국내에서는 10점 내외 인 것으로 추정한다. 상기의 호암미술관 보관 고려 불화는 일본을 거쳐 미국에서 구입한 것이다. 2009년 4월30일부터 6월 7일까지 열리는 통도사 성보박물관 신관 개관 10주년을 기념, 한국 불교회화의 백미로 손꼽히는 일본 가가미신사(鏡神社) 소장 고려 수월관음도를 국내로 운송하여 전시하기로 확정하였다. 이 전시는 약 1년 전부터 원 소장처인 카라츠(唐津)시 가가미신사와 기탁처인 사가(佐賀)현립박물관의 대여승낙과 일본문화청의 최종승인으로 전시가 결정되었다.
위사진. 수월관음도, 고려 1310년, 견본 채색, 430×254cm, 전체 530×300cm, 현재 일본 사가현(佐賀縣) 현립박물관 소장
가가미 신사는 기기(記,紀)나 소설에 자주 등장하고 역사 왜곡의 많은 부분을 장식했던 진구(神功)황후를 모시고 있다. 일본의 역사서 고사기나 일본서기에는 진구의 신라 침공이 여러 차례 기록되어있고 전전의 일본 역사 교과서에는 신라정벌을 떠나는 일본군을 바닷가에서 환송하는 설명과 함께 바다를 응시하는 그림이 버젓이 실려 있었다.
1812년 이노 타다타카(伊能忠敬)가 적은 『측량일기(測量日記)』에 의하면 1391년(공양왕 3년)에 승려 료우켄(良賢)이 관음화상을 진상했다는 내용이 있고 바로 이 수월관음도를 의미한다. 채색의 결락으로 인해 현재는 명문이 보이지 않으나 이노는 당시에 남아있던 관음보살이 밟고 있는 왼쪽 연꽃 아래에 7행의 명문을 기록해 두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충선왕의 왕비였던 숙비(淑妃)가 8명의 궁정화가를 동원하여 1310년(문화9년 임신) 5월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작품은 당시 왕실 최고 권력자의 발원으로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화인들에 의해 공동 제작된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사』를 보면, 1310~1391년은 왜구들이 교동도에 진을 치고 개경 부근까지 노략질을 일삼아 천도까지 논의하던 시기였다. 개경 인근의 사찰에서 약탈해 간 것으로 추정된다.
수월관음을 나타낸 불화인데 화엄경 입법계품에 선재동자가 인도 남쪽 바닷가에 연한 보타락가산에서 법을 설하는 관세음보살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그 관음을 그림에서 표현한 수월 관음도이다. 수월관음이라 한 이유는 달이 높이 떠올라 휘영청 밝은 가운데 관음이 물가의 벼랑위에 앉아서 선재에게 법을 설했기 때문이다. 마치 해변에 위치한 보타락가산의 물위에 달처럼 아름다운 관음이 현신하듯 하다. 수월관음상은 중국에서 최초로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는 단독으로 모셔진 관음도 대부분은 화엄경 계통의 수월관음도인데 우리만이 간직하고 있는 수월관음도의 특징을 들라면 한결같이 선재동자가 등장하여 관세음보살에게 보리의 가르침을 구한다는 점, 관음 옆에 버드나무가지가 꽂힌 정병이 놓여있다는 점(돈황석굴 수월관음상은 손에 버드나무가지를 들고 있다)이다.
파랑새가 날며 염주가 등장한다는 점 등이 특색이다. 그윽한 자태는 고려 불화의 관세음보살이 그윽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은 고려 불화의 가치를 더 높인다. 카라츠(唐津) 시는 시명에 당(唐)과 한(韓)이 선진 외국이란 의미의 "카라"이고 항구라는 의미로 볼 때 왜구들의 활동과 함께 외국 왕래가 빈번했다. 따라서 왜구의 침범이 많았던 고려 시대에 약탈된 것으로 보인다.
우수한 한국의 회화 작품이 타향살이를 면치 못하고 있다. 전시마저도 간청을 해야 할 지경이다. 못난 선조들의 부끄러움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를 일이다. 독도도 우리 것이고 두 작품 모두 한국 것이다.
<참고>
1.반환 조선왕조실록 설명; 인조 임금 대에 들어 이 전주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4부를 병화를 피하기 위해 인출하여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마니산, 오대산 등 전국 5대 사고에 보관하게 되었다. 한일합병 이후 오대산 사고본은 1913년 일제에 강탈되었다. 역사연구의 미명하에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이관되었던 것이다. 10년 후인 1923년에 오대산 사고본은 관동대지진의 화재로 대부분 망실되는 참화를 겪게 되었다. 오대산 사고본은 모두 787책이었으며 그 중 지진화재의 참화를 면한 것은 오직 74책뿐이었는데 이 책들은 당시 개인에게 대출 중이었기 때문에 다행히 화를 면하게 되었다. 이 74책 중에서 27책은 곧 회수되었으나 도서관이 불탔으므로 둘 곳이 없어 서울대학교로 돌아왔고 뒤늦게 회수된 나머지 47책은 돌아오지 못한 채 남의 땅에서 남아 있다가 2007년 7월 14일 93년 만에 고국으로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2.북관대첩비 설명;1905년 러일전쟁 중 함경도 지방에 진출한 일본군 제2예비사단 여단장 소장 이케다 마시스케(池田正介)가 주민들을 협박하여 비석을 파내 일본으로 옮겨 도쿄 치요다(千代田)구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방치된 것을 한국연구원장 최서면(崔書勉)이 밝혀낸 후, 비문에 이름이 있는 의병의 후손들이 일본 정부에 청원서를 내는 등 반환운동을 벌인 끝에 2005년 10월 20일에 한국에 반환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안치되어 잠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으며, 2006년 3월 1일에 비석이 원래 있던 북한으로 전달되고, 2006년 4월 25일에는 아래의 복제비가 건립되어 경복궁의 국립고궁박물관 오른 쪽에 전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