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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사회와 그 적들> 이란 책을 쓴 칼 포퍼 (Karl Popper) 는 이 책에서 플라톤 저서들의 연대기와 관련해서 <테아이테토스>가 후기 대화편이라는 학계의 통설을 비판하며 <테아이테토스>는 <국가> 보다 더 일찍이 만들어진 작품이다 라고 주장했다. 필자 역시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는 <테아이테토스>를 플라톤의 초기 저술로 보는 데, 이는 잘못이다. 중기의 작품으로 봐야 한다. 그 이유는 초기의 대화편은 주로 실천적인 문제를 다루는 반면 중기의 대화편은 주로 이론적인 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실천 철학의 문제는 바로 윤리와 도덕이며 다르게 표현하면 선(善)이란 무엇인가? 덕(德)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론 철학의 문제는 진리와 인식 그리고 존재자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론과 인식론이 바로 이론 철학이다.
더 나아가서 실천의 문제는 소크라테스와 깊은 관련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문하에서 철학을 시작한 플라톤은 스승의 핵심적인 관심사를 공유했다. 아시다시피 소크라테스의 핵심적인 관심은 오직 행동 즉 올바른 행동이다. 이를 덕(德) ㅡareteㅡ 라고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덕의 본질을 밝히지는 못했다. 그 대신 문답법과 산파술 등으로 기성 세대의 허위를 폭로하고 젊은이들에게 풍부한 정신적 영감을 주었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은 거의 이런 사회적 행위의 문제를 다룬다. 예를 들어 덕이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 우정이란 무엇인가?, 경건이란 무엇인가?, 절제란 무엇인가? 등이다. 여기서 좀 더 발전하여 법의 문제, 수사학의 문제도 다룬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답은 없고 대개 소크라테스적인 난관 ㅡ아포리아ㅡ에 봉착한다.
<테아이테토스> 편은 많은 철학적, 이론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 중에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프로타고라스의 “인간 척도론” , 헤라클레이투스의 “만물 유전 이론”(flux theory, panta rhei), 파르메니데스의 “부동적 존재”(immovable being), “새장의 비유”(the allegory of aviary), “전체와 부분” 등이 있다.
아마도 우리는 <테아이테토스> 대화의 집필의도를 당대의 유명한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의 이름하에 경험주의와 상대주의를 반박하고 극복하기 위한 플라톤의 노력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정답은 없고 그 대신 문제 해결을 위한 엄청난 노력의 과정이 나타난다. 지식의 본질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구하는 데는 실패를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많은 성과가 나타난다.
어쨌든 <테아이테토스>가 초기 대화들과 다른 점은 바로 진리와 인식의 방법의 문제를 진지하고 논증적으로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테아이테토스는 형이상학적인 진리를 위한 방법론을 탐구한 것으로 봐야 한다. 즉 인식론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테아이테토스> 대화편은 중기 대화편에 속한다.
또한 <테아이테토스> 가 후기 대화편이 아닌 것은 파르메니데스 사상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는 것이다.
즉 대화 중에서 플라톤을 상징하는 소크라테스와 파르메니데스의 관계가 전혀 다르다. 다시 말해서 <테아이테토스>에서 소크라테스는 파르메니데스를 만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 : 존재는 움직이지 않는다. 존재는 변하지 않는다, 존재는 영원하다. 그러나 소위 플라톤의 후기 대화편 <파르메니데스> 에서는 파르메니데스가 어린 소크라테스를 조롱한다. 또 다른 소위 후기 대화편 <소피스트>에서는 “엘레아에서 온 손님”이 나오는데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였다. 여기서는 파르메니데스의 “있는 것은 있다, 없는 것은 없다“ 이론이 부정되고 있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 추구하려는 플라톤의 노력은 먼저 인식론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은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시도이다. 그 질문이란 “도대체 지식은 무엇인가?” 이다. 그러나 인식론적 노력은 아무 성과도 없다. 지식의 본성에 도달하려는 소크라테스의 노력은 논리적 난관 봉착한다, 이를 흔히 아포리아 ㅡ aporia ㅡ 라고 한다.
“지식이 무엇인지? What is knowledge?”에 대한 해답은 이데아 이론으로서 Republic (국가)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따라서 테아이테토스는 “국가”를 위한 준비로 생각될 수 있다. 그래서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를 말한다면, 인간 인식의 기능을 분석하고 제한하는 칸트의 『순수 이성의 비판』에 비유할 수 있다.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는 지식의 단계적인 발전을 논한다. 즉 지각, 의견, 추론을 연속적으로 검토하는 3단계로서 이는 낮은 단계부터 높은 단계까지 진행하는데 그런 과정에서 지식의 (잘못된) 개념과 특정한 종류의 지식의 혼란을 제거한다.
플라톤 번역가 조웨트는 <테아이테토스>를 변증법(Dialectic)으로 보고 있다. 이는 대화와 문답 통해서 지식이 점차 발전하는 것을 말한다. 탐구의 과정에서 낮은 단계의 지식은 폐지되고, 그 대신 높은 단계의 지식이 나타난다. 그러나 필자는 이를 수정한다. 뒤에서 말하지만 조웨트가 말하는 지식의 3단계인 추론(reasoning)은 2단계 즉 의견의 보충이다.
(2) 생성과 존재의 싸움 ㅡ만물유전과 부동적인 존재의 싸움ㅡ
『테아이테토스』에서 지식의 초기 형태는 지각-지식이다. 「눈앞에 사과가 있다」 는 경우이다. 이는 상식이요 자명한 사실이다. 보는 것이 아는 것이요 동시에 있음을 의미한다.
플라톤 작품속의 소크라테스는 젊은 테아이테토스에게 지식의 본질을 묻는다. 이에 대해 테아이테토스는 <지식은 감각적 지각> (sensible perception) 이라고 말한다.
이런 태도를 헤겔은 그의 <정신 현상학>에서 “감각적 확신” (sensuous certainty) 이라고 개념화하였다. “지식은 감각이다” 혹은 “감각적 확신” 같은 태도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상식의 입장이다.
그러나 감각(sensation) 혹은 지각 (perception)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감각적 지각은 자연적으로 상대주의로 귀결된다. 각자는 모두가 다르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중의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
대체 바람이 불어 오고 있어도, 우리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추위를 느끼지만, 다른 사람은 느끼지 않는 경우가 있지 않겠나?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데도, 심히 느끼는 사람과 덜 느끼는 사람이 있지 않겠나?
이처럼 지각ㅡ지식 이론은 금방 그것이 잘못임이 드러난다. 이런 정보는 (객관적인) 지식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잘못된 지식이론을 당시의 위대한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가 옹호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지각ㅡ지식 이론은 프로타고라스의 인간 척도론의 근거가 된다는 점이다. 인간 척도론 (Man Measure Thesis) 란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사상이다: Man is the measure of all things. 척도(尺度)란 자를 말한다. 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자라는 것이다. 내가 평가와 판단의 기준이다.
여기서 인간은 개인을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ㅡ척도론을 실은 “개인ㅡ척도론” 이라고 불러야 옳은데 그 이유는 “개인이 모든 사물의 기준” 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나는 항상 옳다, 나의 판단이 항상 옳다” 는 말이다.
이는 말이 안 되는 궤변인데 어쨌든 당시 그리스 사회의 극심한 가치 혼란 상태 ㅡ 이를 아노미 (Anomie) 현상이라고 부른다ㅡ를 나타내는 말이다. 플라톤 역시 이 대화편에서 이를 효과적으로 논박하고 있다. 또 이는 당시 각종 송사(訟事)와 권리 주장이 남발되는 공동체에서 이를 이용해서 돈벌이를 하려고 한 지식의 장사꾼들의 철학이었다. 달리 말하면 프로타고라스의 「인간 척도론」은 법률 기업의 로고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지식은 지각이다」 라는 테아이테토스의 의견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
"음, 그대는 지식에 관한 아주 중요한 교리를 스스로 말하고 있구나. 그것은 바로 프로타고라스의 의견인데 그는 이를 달리 표현하였다. 즉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즉 있는 것은 있는 대로의 또 없는 것은 없는 대로의 척도라고 그는 말한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인간 척도론” (Man Measure Thesis) 은 소피스트 사업의 특징과 결부되어 있었다. 위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소피스트들은 지식의 상업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를 들어 법정 소송 문제 등이 발생할 때 ‘의뢰인의 주장이 무조건 옳다’고 편들어 주는 사람들이었다. 나의 약한 주장도 강하게 만들어 다툼에서 이기게 해주는 기술을 파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객관적 사실이나 진리를 무시하고 “손님들의 주장은 무조건 옳다” 라고 하면서 이를 통해서 돈을 벌려고 했다.
이는 또한 현대에도 많이 적용이 되는데, 아무리 죄를 지어도 실력있는 변호사들만 고용하면 재판에서 이기는 현상과도 닮아 있다.
소피스트의 지식 상업주의를 극히 경계하는 극중의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탐구하는 사람들의 대표자로서 탈레스를 언급한다. 그리스 철학의 시조 탈레스는 별에 대해서 고찰하면서 하늘만 쳐다보다가 구덩이 속에 빠진다. 이를 본 어떤 하녀가 “당신은 열심히 하늘의 일에 대하여 알려고 하지만, 당신의 눈앞의 일이나, 발밑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군요” 라고 비웃음을 당했다고 한다.
이런 맥락의 인간척도론을 플라톤은 감각ㅡ지식론과 결부시킨다. 이 둘은 서로 다른 맥락을 전제하지만, 굳이 말한다면 공통점은 있다. 그것은 유아독존(唯我獨尊)식의 개인주의 그리고 상대주의 등이다. “나만 옳다” 는 생각이다.
더 나아가서 각주 24에서 보는 것처럼 플라톤은 인간척도론을 존재와 비존재 문제로 해석한다. 이 말은 실제로 프로타고라스가 한 말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를 통해서 만물척도론이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철학과 연계성을 가지게 된다.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프로타고라스와 헤라클레이투스를 연결시키고 있다.
소크라테스 : 이제 내가 말하려고 하네. 그것은 실은 중요한 말이라네. 즉 아무 것도 인간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그 자체에 머물러 있는 채 단일한 것은 없다는 이야기가 되네. 그것을 자네가 이러저러하다느니 이런 것 같다드니 하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으로, 만일 자네가 그것을 크다고 말하면 그것은 또 작게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일세. 그리고 무겁다고 말하면, 가볍게 나타날 수 있어. 모든 것이 다 이런 식이라네. 그것은 모두가 단일한 무엇무엇이나 어떠한 모습이 하나도 없는데서 비롯되는 것으로 생각되네.
여기서 지금까지의 논의와는 다른 논의가 등장한다. 지금까지는 감각적 인식 즉 「추위와 더위의 인식」등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감각적 인식의 주관성과 상대성이 문제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감각과 인식의 상대성이 아니라 「존재의 상대성」이 문제이다. 이를 플라톤은 「만물이 움직인다」 혹은 「만물이 서로 혼합되어 있다」는 사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를 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 헤라클레이투스이고 더 나아가서 파르메니데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만물유전(萬物流轉)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오히려 만물은 운동 혹은 더욱 일반적인 움직임으로도 되어 있으며, 또한 서로 혼합되어 있다는 것일세.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있다고 말하지만, 이에 대하여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일세. 왜냐하면, 어떤 사물도 또 어떤 때에나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언제나 된다고 해야 할 테니까.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파르메니데스를 제외하고는 모든 지자(知者)들이 동일한 보조를 취하고 있다고 하여도 무방하네. 즉 프로타고라스나 헤라클레이토스가 그렇고 엠페도클레스가 그렇네. 그리고 작가들 중에는 두 가지 각각 정상에 서 있는 사람, 즉 희극에서는 에피카르모스가 그렇고 비극에서는 호머가 그렇네. 호머는
신들이 낳은 부친 오케아노스와 그 모친인 테튀스
라고 말하여 만물은 유동(流動)의 산물임을 말하였네. 자네는 이런 의미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테타이테토스 :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 인식론, 곧 지각-지식 이론을 비판하는 것이 『테아이테토스』 편의 주된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플라톤은 지각-지식 이론이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론」 뿐만 아니라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 유전 이론” (flux theory, panta rhei) 과도 관련을 가진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런 사상을 당대의 철학자들 즉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 그리고 프로타고라스가 공유한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당시 문학의 최고봉 두 사람 즉 「희극에서는 에피카르모스가 그렇고 비극에서는 호머가 그렇다」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필자가 보기에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즉 지각-지식론과 만물유전론은 각자 서로 다른 맥락을 가지고 있다 :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萬物流轉) 이론은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론」 내지 「지각-지식론」과는 무관하다.
만물유전(萬物流轉)이론은 일체의 존재는 부단한 생성, 변화 중에 있다, 그래서 “머물러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라는 사상이다. 이런 현상을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는 동일한 강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다” 라고 표현했다. 왜냐하면 물도 이미 다른 물이지만 우리 자신도 이미 달라졌기 때문이다.
즉 세상 자체가 생성, 소멸, 유전(流轉)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현상이 감각 때문에 발생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존재 혹은 세상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헤라클레이토스 역시 감각보다는 이성과 사고의 기능을 중시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알려진 바, 로고스(Logos)를 처음으로 철학의 주제적 개념으로 만든 사람이다.
로고스(Logos)라는 개념이 서양철학과 사상사 전반에 걸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실로 막중하다. 로고스라는 말은 그리스 정신을 한 마디로 대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서양문화를 지탱시켜주는 특징적 개념이다. 이 로고스에 철학적 의미를 처음으로 부여한 철학자는 다름 아닌 헤라클레이토스이다.
만물 유전 역시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Logos)인 것이다. 로고스는 정신, 이성 그리고 언어 등을 통해서 표현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50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만물은 나눌 수 있고 나눌 수 없으며, 태어나는 것이고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가사적이고 불사적이다. 이와 같이 로고스는 영원한 것이고, 아버지는 아들이며, 신은 정의라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한다. ‘나에게 귀를 기울이지 말고, 로고스에 기울이라. 모든 사물이 하나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일은 지혜롭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는 또 「영혼이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눈과 귀[감각]는 나쁜 증인들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를 통하여 감각-지식을 헤라클레이토스와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위의 여러 증거들을 볼 때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 이론이 감각적 지식과 연결된다는 것은 오류이다. 만물유전은 감각적 지식이 아니라 바로 로고스(이성)적인 지식인 것이다.
이처럼 <테아이테토스> 편은 “만물유전”의 대표자 헤라클레이토스와 “부동적인 존재”를 주장하는 파르메니데스를 대립시키고 다시 이들의 종합을 염두에 두고 있다. 물론 이 노력의 결실은 <국가>에서 비로소 열매를 거둔다.
앞에서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ㅡ철학에 대해서 상세하게 분석한 바 있다. 그것은 “있음은 있다” 그리고 “없음(無)은 없다” 라는 단순한 동어반복적인 사상이었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는 이런 존재일반의 의미와 더불어 ㅡ이와 깊은 관련은 있지만ㅡ 어떤 특수한 존재자를 추가하고 있다. 즉 존재자는 부동적이고 불변적이며 끝이 없고 심지어는 둥근 공처럼 생겼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ㅡ철학은 이처럼 상당히 다의적이다. 즉 (1) 무(無)가 없다는 사상은 자연철학을 송두리째 붕괴시켰다. (2) 존재가 부동적이다는 사상에서 운동을 부정하는 엘레아 학파, 제논의 역설 (Paradoxes of Zeno)이 탄생한다. (3) 「있음은 있다」 는 사상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의 3대 법칙이 나온다.
플라톤에게 측히 중요한 것은 (2), 즉 「존재는 움직이지 않는다, 존재는 변하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불변(不變), 부동(不動)하는 존재가 있다.
파르메니데스 글 자체에도 내부적인 부정합성이 있음을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즉 「존재자는 부동적이고 불변적이며 끝이 없고 심지어는 둥근 공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이런 부정합성 외에도 더 다른 부정합성이 있으니 그것은 하이데거가 말한 바와 같은 존재론적 차이 즉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이 안 되고 있다.
즉 ① 존재의 일반적인 속성과 ② 어떤 특수 존재자의 속성이 혼동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①에 해당하는 것은 「존재는 있고 무는 없다」 혹은 「존재는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 혹은 「존재와 사유는 동일하다」 등이다. ②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존재는 공과 같다」 혹은 「존재는 하나이고 움직이지 않는다」 등이 있다.
그런데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존재는 불변적이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존재는 부동적(不動的)이다.
이렇게 파르메니데스를 해석한 플라톤은 이번에는 파르메니데스의 “부동적인 존재”(immovable being)를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 명제”에 대립시킨다. 전자를 이데아로 보고 후자를 개체로 본다. 즉 다양하고 끝없이 변화하는 감각적인 세계 안에 불변적이고 영원한 이념 혹은 이데아가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ㅡ 이데아설, 형상이론. 물론 이 작업은 『테아이테토스』가 아니라 『국가』에서 이루어 진다.
플라톤의 해석에 따르면 프로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 등이 손을 잡는다. “만물유전 명제” 의 옹호자로서 그들은 모두 파르메니데스의 “부동적인 존재”(immovable being)이론에 반대한다. 심지어는 일리어드와 오디세이를 쓴 위대한 시인 호머도 “만물유전 명제” flux theory를 지지하는 구절을 남겼다.
이것은 역사적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일 수도 있다. 플라톤은 지식인의 대다수가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 유전 이론”(flux theory, panta rhei)을 선호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만이 그 당시의 모든 통념에 반하여 움직이지 않는 존재를 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파르메니네스를 찬양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생성에 대해서 존재를 대항시켜 싸운 영웅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 무방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 사람들보다, 오직 파르메니데스 한 사람에 대하여 더욱 이런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파르메니데스라는 사람은 내가보기에는, 호머의 이른바 경외(敬畏)해야하고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3) 지각ㅡ지식 이론의 반박
감각적 지각은 내 눈앞에 있는 존재들의 확실성을 보장해 준다.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 것은 나의 지각 판단에 의해 결정된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보통은 있다는 말은 무엇이 눈앞에 있다 는 말이다. 그래서 “지각이 지식이다” 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지각(知覺)이라는 것은 나에게는 참이라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나에게 유(有)를 지각하게 하는 것이니까. 다시 말해서 나는 프로타고라스의 말대로 나에게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 있다는 것과 있지 않다는 것의 판별자(判別者)니까.
비록 플라톤이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를 분석하기 위해 헤라클레이토스와 다른 사상가의 만물유전 이론을 불러내지만, 상대주의에 대한 성공적인 반박은 다른 방식으로 일어난다: 지식이 누군가의 감각적 지식일 때, 그는 항상 옳다. “내가 봤어” 하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이런 지식을 배울 수도 없고 배울 필요도 없다. 감각 지각에는 사람 사이에 차이가 없다. (나의) 감각에 대해 나만큼 확실한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경험한 진실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즉 어린 아이나 어른이나 사과가 있는 것을 보고 또 “사과가 있다”라고 말할 줄 아는 점에서는 똑 같다.
진리가 단지 감각일 뿐이고, 어떤 사람도 자기보다 다른 사람의 감각을 더 잘 분별할 수 없거나, 자기 의견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있는 어떤 우월적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가 몇 번이나 반복했듯이, 각각은 자기 자신의 유일한 재판관이고, 그가 판단하는 모든 것이 진실이고 옳다면, 왜, 내 친구인 프로타고라스는 이 진리와 가르침의 장소(=나의 감각)보다 더 선호되어야 하는가? 왜 그는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가난한 무식쟁이들은 각각이 자신의 지혜의 척도라고 하면서도 그에게로 가서 배워야 하는 것인가?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약점을 간결하게 말한다: 내 판단이 항상 옳고 나 자신이 지혜와 가르침의 장소라면, 나는 다른 누군가로부터 지혜와 지식을 배울 필요가 없다. 이것이 지각ㅡ 지식론의 문제점이다. 지식의 상대주의가 가지는 모순이 여기에 있다. 즉 지식의 무정부 상태를 초래한다. 결국 지식은 혹은 진리는 강자의 것이라는 지식의 약육강식(弱肉强食)을 초래한다. 이는 동시에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당시 소피스트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칼리클레스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또 문제는 감각적 지각의 단계에서는 어른이나 아이나 대학교수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당시 프로타고라스는 <테아이테토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종종 인용하는 <진리론> 이라는 책을 비롯해서 많은 책을 썼다고 전해진다. 그는 온갖 종류의 ㅡ이기는ㅡ 기술에 대하여 연구를 했고 수사학, 문법 등 다방면에 능통한 현자(賢者)였다. 소피스트라는 말도 지혜가 있는 자라는 뜻이다. 소피스트와 대척점에 서 있는 소크라테스 역시 당시에는 “소피스트” 라고 불리어졌다.
이처럼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 그는 아마 법률사업이나 교육사업의 광고로서 “모든 사람이 옳다”거나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주장을 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프로타고라스의 "사람"은 소피스트의 상담이나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고객이나 손님을 의미할 수 있다. 프로타고라스는 수업료로 대단히 많은 보수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모두가 옳다면 극중의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비싼 돈 주고 지식을 배우러 갈 필요가 없다. “가난한 무식쟁이들은 각각이 자신의 지혜의 척도라고 하면서도 그에게로 가서 배워야 하는 것인가?” 라는 말이 나온다.
소피스트들은 자신들의 교육이나 가르침을 받으면 사람들의 의견과 주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인간 척도> 명제는 그 자체로 볼 때는 모순적이다.
(4) 판단ㅡ지식 이론과 정신의 기능
극중의 테아이테토스가 “지식은 지각이다”라는 이론을 제기하나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는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철저히 논박을 당한다. 지각 혹은 감각 자체는 아무런 지식을 줄 수 없다. “보는 것이 곧 아는 것이다” 라는 소박한 감각주의는 더 이상 지지될 수가 없다.
보는 것, 듣는 것의 문제는 감각기관과 감각의 문제로 분석된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은 감각기관과 감각 그리고 지식의 연관성에 대한 고찰을 시도한다 : 감각기관 중 중요한 것들은 눈의 감각, 시각과 귀의 감각 청각이다. 시각이란 눈을 통해서 무엇을 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감각기관 자체가 지식을 창출하는지 아니면 감각기관은 감각대상이 전달되는 수단에 불과한지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의 번역은 다소 불분명하여 필자가 재해석을 했다. 즉 눈동자에 비친 사과의 이미지가 사과를 아는 것인지 아니면 현대적인 개념으로 뇌에서 사과로 인식된 이미지가 지식인지 하는 문제이다. 플라톤은 위의 도표에서 (C)의 과정을 지식으로 본다. 이를 정신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
(• • •) 다음의 어느 쪽이 옳은가 생각해 보게. 우리가 그것에 의해 보고 있는 것은, 눈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우리가 그것을 통하여 (사용하여) 보고 있는 것이 눈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 또한 그것에 의해 듣는 것이 귀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그것을 통하여 (사용하여) 듣는 것이 귀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
테아이테토스 :
그것을 통하여 (사용하여) 우리가 각각의 사물을 지각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에 의해 지각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소크라테스, 오히려 좋은 줄로 생각합니다.
이 본문에서 “그것에 의해 보고 있는 것은” 은 영어로 with which we see 라고 하고 “그것을 통하여 (사용하여) 보고 있는 것” 은 영어로 by means of which we see 라고 되어 있다. 영어 번역자 커릴(H. F. Carlill)은 with which 대신 through which를 쓸 수도 있다고 역주에서 밝혔다. 희랍어 원문으로도 뜻이 불분명할 수 있다. 이 경우 우리는 내용적인 분석을 하여 의미를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지식은 감각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것은 사과이다” 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지식은 문장의 형태로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문장(statement)은 논리적으로는 판단 (judgment) 이라고도 한다. 물론 모든 문장이 판단은 아니고 “A는 B 이다” 와 같이 진리를 주장하는 문장을 판단 (judgment) 혹은 명제 (proposotion) 이라고 한다.
감각기관들은 외부 세계를 반영하기는 하나 정신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를 플라톤은 트로이의 목마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트로이의 목마 속에는 많은 그리스의 용사들이 숨어 있었다. 그러나 이 용사들은 지휘본부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 여러 용사들은 각종 감각들에 비유하고 지휘관을 정신에 비유한다. 각종의 감각들을 하나로 묶는 중심이 없으면 작전없는 목마 속의 용사들같이 아무런 된다. 이런 모든 감각을 포괄하는 통일체를 정신 혹은 마음이라고 한다. 감각은 이런 정신의 도구와 수단이다. 마치 우리가 손을 이용하여 일을 하듯이 정신은 감각을 이용하여 지식 산출이라는 일을 한다.
여기서 일종의 통각(統覺) 이론이 등장한다. 통각은 경험이나 인식을 의식 속에서 종합하고 통일하는 정신의 작용이다. 칸트 철학의 핵심 원리이기도 한 통각(統覺) 개념이 실은 플라톤에서 나온다. 칸트의 선험적 통각 (transcendental apperception) 은 “다양성의 종합적 통일의 원리” 이다. 이런 기능이 인간의 정신 속에 있다. 플라톤은 정신의 포괄적인 통일 기능으로 말하고 있다: comprehensive unity, a soul, 둘이 똑 같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서양 철학 전통은 플라톤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다” 라고 말한 화이트헤드의 주장이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진다. 플라톤의 정신의 포괄적 혹은 종합적 통일 기능 역시 경험에 앞서기 때문에 선험적 통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정신은 공통감각 이론과 연결이 된다. 오감은 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 가령 사과의 색과 맛은 서로 뗄 수 없다. 이를 연결하여 하나의 지식을 만드는 것이 정신이다. 정신의 통각 기능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의 통일적인 대상을 인식할 수 없다. 플라톤 텍스트의 용어로는 “시각도 아니고 청각도 아니며 오히려 다른 무엇에 의해서이다”. 이것이 마음 혹은 정신이다.
테아이테토스 : (• • •) 공통된 것에는, 아까의 <지각되는 것>의 경우와 같은 그런 독특한 기관은 전혀 없다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모든 것에 대하여, 그 공통된 것을, 마음은 혼자서 자기 자신을 사용하여 고찰한다고 봅니다.
이처럼 플라톤은 서양 최초로 정신의 통각 기능과 감각의 도구적인 기능을 종합하여 인식론을 시도한다. 이런 사상이 루소와 라이프니쯔, 칸트 그리고 헤겔에게 까지 영향을 준다.
더 나아가서 플라톤은 정신의 기능을 범주(範疇: categories)와 연결을 시킨다: 정신이 지식을, 예를 들어 여기에 사과가 있다, 산출하기 위해서는 존재의 개념들, 즉 범주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있다와 없다, 유사하다와 유사하지 않다, 동일하다와 동일하지 않다 그리고 반대, 대립 등이다. 정신은 이런 범주들의 상호관련을 통하여 대상을 고찰한다.
소크라테스 :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대하여, 이와 같은 견고성과 유연성, 즉 양자가 있다는 것이나 또는 양자가 서로 반대된다는 것이나, 나아가서는 그 반대 자체가 있다는 것 등은, 마음이 스스로 그것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우리를 위해 판별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플라톤은 물체와 다른 정신의 몇 가지 특징을 말하고 있다. 즉 단단하다 (견고성) 이나 부드럽다 (유연성) 등은 물체가 지닌 속성이고 그것들은 감각을 통해서 들어온다. 그러나 두 성질이 반대라는 것은 물체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반대 혹은 대립 (opposition) 이란 개념은 사물에 붙어 있는 속성이 아니다. 이런 것은 칸트식의 표현을 빌린다면 오성(悟性) (understanding) 의 개념이다. 또 비교 (comparison)의 개념 역시 마찬가지이다. 즉 두 사물을 비교하고 같음과 다름을 판단하는 기능은 역시 정신의 작용이다. 이는, 물질과는 다른, 정신 혹은 이성의 독자적인 존재가 처음으로 밝혀지는 순간이다.
이런 면에서 플라톤은 선험적 관념론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논지는 앞으로 루소와 칸트를 다룰 때 한번 더 밝히겠다.
하여간 지식은 판단 혹은 명제의 형식을 취하고 이런 판단ㅡ지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신체와 감각 기능에 앞서 혹은 더불어서 영혼의 기능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은 지식을 영혼과 감각의 종합으로 본다. 이는 칸트가 인식을 오성과 감성의 종합으로 본 것과 같다.
(5) 판단ㅡ지식 이론의 문제점 : 오류 가능성
판단ㅡ지식 이론은 위에서 상세히 고찰한 것처럼 인간 정신의 독자성과 자유성을 통한 인식을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감각이나 감각기관에 대한 정신의 우위가 드러났다. 달리 말하면 신체보다 정신이 높다는 것이다. 신체가 가진 감각을 정신이 포괄적으로 통일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그것은 마치 트로이의 목마 속에 숨어 있던 용사들이 지휘부의 지휘를 받지 않으면 작전을 수행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영혼 또는 정신의 존재가 밝혀진다. 육신과 따로 존재하는 정신,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정신이 있다는 것이다. 지식이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판단ㅡ지식이다.
지식이 있다는 사실에서 영혼 혹은 정신의 존재가 도출되어 진다!
영육이원론은 이제는 상식이지만 이를 최초로 입증한 사람은 플라톤이다. 즉 육체에 붙어있는 여러 감각기관들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실체가 있다는 것이다. 영혼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여러 감각기관들을 종합적으로 통일하고 이를 통해서 (객관적인) 지식을 산출한다.
“지식은 판단(judgment)이다”, 혹은 “지식은 의견(opinion)이다”. 이로서 플라톤은 지식 혹은 인식의 본질을 밝혔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잘못된 지식 내지 오류의 문제를 연구한다. 그 이유는 판단 혹은 의견이란 항상 오류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단순한 판단이 아니라 「옳은 판단」을 지식이라고도 한다.
이와 관련되어 당시 널리 퍼져있는 소피스트들의 혹세무민하는 지식과 이론들 때문에 옳은 판단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플라톤은 “지식은 감각이 아니다” 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로서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론”은 논박(論駁)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외의 수많은 상대주의, 회의주의, 약육강식(弱肉强食)을 옹호하는 도덕과 사상들을 모두 논박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플라톤의 가장 큰 문제인 선(善)과 정의(正義)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오류와 비진리의 출처와 조건을 밝혀서 이들을 배척하는 것이 필요했다.
세상에는 올바른 지식과 잘못된 지식이 있다. 잘못된 지식은 달리 말해서 잘못된 판단이다.
우선 플라톤은 잘못된 판단은 오류 혹은 착각이라고 규정한다.
보통 사람들은 오류나 거짓이 있지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영향으로 이런 생각을 부정한다. 이 부분의 플라톤 논변은 복잡하고 때로 앞뒤가 안 맞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더러 있다. 그러나 결론은 이것이다: 있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크라테스 : 그러므로 그릇된 생각을 한다는 것은 있지 않는 것을 생각한다는 것과는 다르네.
있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보통 상상(想像)이나 허구 (虛構) 라고 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다루는 오류는 이런 것이 아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은 잘못인 경우이다. 다시 말해서 잘못된 판단이란 어디까지나 있는 것, 존재하는 것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말한다. 즉 어떤 존재하는 것을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지식 혹은 잘못된 판단이다. 결국 이는 착각을 말한다. 즉 A를 B로 보는 경우이다. 또한 파르메니데스의 영향력 즉 「사유와 존재는 같다」 는 생각이 반영된다.
소크라테스 : 그러므로 나로서는 생각한다는 것은 의견을 말하는 것을 가리키며, 이 경우 사고란 거기 진술된 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고, 생각하고 있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플라톤은 감각과 그 대상의 연관성 내지 소위 지향성(指向性)을 말하고 있다.
소크라테스 : 그리고 무엇인가를 만지고 있는 사람은, 적어도 어떤 하나를 만지고 있으며 또 적어도 하나를 만지고 있다면, 또한 있는 것을 만진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나?
감각의 대상은 그 자체로 지식은 아니지만 존재의 일종이다. 감각 역시 사고는 아니지만 그 자체의 기능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런 차원에서는 오류가 일어날 수 없다. 감각ㅡ지식을 부정한 플라톤은 이번에는 다시 이들을, 그 의미를 축소하여, 긍정한다. 즉 “보여지는 것”, “만져지는 것” 그리고 “들려지는 것”은 그 자체가 지식은 아니지만 (진실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사유의 대상과 마찬가지로 감각의 대상도 의심할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위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이 어떤 특정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즉 사유되는 모든 존재라는 것을 밝혔다. 단 그런 “존재의 변화는 없다”는 것이 파르메니데스 철학의 키포인트 였다. 잘못된 생각 역시 무(無)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유(有)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 정도로 오류의 기원을 밝힌 플라톤은 그러나 여기서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추측컨대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시대적 상황 ㅡ궤변론자들의 주장이 판을 치는 세상ㅡ 과 더불어, 다른 이유는 시대적인 상황과는 무관하게 단순히 「지식에는 잘못된 지식 곧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인식의 주체인 정신이 항상 바르지 않다는 말이 된다. 정신 혹은 마음이 틀릴 수 있다면 ㅡfallibleㅡ 그리고 그 궁극적인 원인을 알 수 없다면 이는 인식론의 큰 문제를 야기한다.
소크라테스 : 그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 때로는 자기가 모르고 있는 것을,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말이네.
이런 오류가 발생하는 경우를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 편에서 17가지의 경우로 분류를 하고 있다. 실로 엄청난 사고력을 보여준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과거의 지각과 현재의 지각의 비교 내지 일치 여부이다. 달리 말해서 지각ㅡ지식과 판단ㅡ지식의 관계가
다루어 진다. 인식에 있어서 지각 내지 감각의 문제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지각 자체를 인식으로 보는 소피스트들의 견해는 물리쳤으나 그렇다고 지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6) 밀납의 비유
『에우튀데모스』에서 제기된 「학습의 딜렘마」를 해결하기 위한 플라톤은 이 문제를 「인식의 발생」 혹은 「지식의 근원적 형성」 문제로 환원한다. 그런 노력의 한 결실이 위에서 소개한 감각-지식 이론이다. 물론 이는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론」을 비판한다는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감각-지식은 상대주의와 주관주의로 떨어지기 때문에 지식의 보편성 혹은 객관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큰 결점이 있었다.
거기다가 다른 문제는 여러 감각이 동시에 작용하여 하나의 대상을 만들 때 이들을 결합시키는 무엇이 있어야 하고 이는 결국 인간의 정신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플라톤은 「지식 = 감각+사고」라는 공식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바로 판단-지식론 혹은 명제-지식론이 발생했었다.
감각-지식론은 인식의 객관성은 보장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느끼는 자에게는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내가 지금 춥다」라고 할 때 아무도 이를 부정하거나 반박할 수 없다.
플라톤은 감각-지식론과 그것의 지양(止揚)된 형태인 판단-지식론 등을 통해서 「학습의 딜렘마」 혹은 「메논의 역설」을 해결했다. 즉 지식이나 학습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지식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 즉 외적인 대상이 우리의 감각과 사고에 반영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학습이 가능하다, 즉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가능하다는 일상적인 경험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테아이테토스』편의 큰 업적이다!
그런 면에서 비록 플라톤이 시종일관 비판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각-지식론」 역시 그 의미는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각-지식론 즉 「지식은 있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역시 존재를 생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소피스트들이 말하는 「학습의 딜렘마」와 「거짓말은 없다, 오류는 없다」는 「오류-불가능론」을 반박하기 위한 토대가 된다.
그런데 판단-지식론의 결점은 오류의 문제였다. 이는 「인식의 딜렘마」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판단-지식론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또 이를 통하여 어떻게 오류가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델이
이른바 「밀납(蜜蠟)의 비유」이다.
밀납이란 벌이 산출하는 천연의 왁스를 말한다. 일벌은 이것으로 벌집을 만든다고 한다. 플라톤은 지식의 가능성을 위해서 밀납 같은 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고 가정을 한다.
밀납의 특성은 그 가소성(可塑性) ㅡplasticityㅡ 이다. 이는 유연하고 외부에 대한 저항성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외부의 압력이 주어지면 주어진 대로 자신의 형체를 변화시킨다. 플라톤은 외부의 사물을 도장에 비유하고 그 도장이 밀납에 남긴 자국을 형적(形迹) ㅡimpressionㅡ 이라고 한다.
요즘 신경과학은 사람의 뇌가 가소성이 큰 신경조직으로 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물론 이는 뇌가 스스로 회복하고 구조를 조정할 수 있는 조직이라는 말이지만, 인간의 정신이 밀납같이 가소성이 크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밀납ㅡ형적 이론은 시대를 뛰어넘는다.
소크라테스 : 그럼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이렇게 간주해 주게. 즉 우리 마음 속에는 소재(素材) 그대로의 납(蠟)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해 주게.
(• • •)
소크라테스 : 그럼, 그것을 우리는 시가(詩歌)를 관리하는 신들의 모신인 므네모쉬네(記念 記憶)의 선물이라고 하세. 그리고 그 속에는 무엇이든지 우리가 기억하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보는 중에서나 듣는 중에서, 또는 자기가 생각해 낸 것 중에서도, 그 지각(知覺)이나 상기(想起)에 지금 말한 납으로 그 형적(形跡)을 남기게 했다고 하세. 그것은 바로 가락지에 달려있는 도장 자국을 내는 경우와 같은 걸세. 그리고 일단 새겨진 것은, 그 형상(刑像)이 납 위에 나타나 있는 한,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고 또 인지하게 되지만, 지워지거나 새겨지지 않은 것은 망각하거나 인지하지 못하였다고 하네.
B.C. 5세기 아테네의 철인 플라톤의 밀납이론은 근대 영국 경험론자 흄의 인식론을 방불한다. 지각의 대상은 지각에 인상(印象)을 –impression- 남긴다. 이를 번역가 최민홍은 형적(形跡)이라고 번역했다. 형적은 지각(知覺)이나 사고(상기)에서 올 수 있다. 근대 경험론자 흄은 인상에서 관념이 발생한다고 했다. 플라톤 역시 이와 유사하게 지각이 형적(인상)을 남긴다 라고 한다. 그리고 형적은 지각뿐만 아니라 기억에서도 온다고 한다. 이 점 역시 흄과 비슷한 면이 있다. 단 큰 차이점은 플라톤은 실재론자로서 외부의 대상에서 지각이 유래한다고 한다.
이는 마치 도장을 밀납에 찍으면 밀납에 그 자국이 남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밀납에 찍혀 있던 인상이나 흔적이 사라지면 우리는 그 대상을 망각하거나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이로서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의 출처가 밝혀진 셈이다. 그리고 아는 것 혹은 학습이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有)에서 유(有)로의 이동 혹은 변화라는 점이 밝혀진다. 이로서 학습의 역설은 일단 해결이 된다. 큰 발전이다!
그리고 다른 문제는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지각이 불일치할 때이다.
이런 사물의 과거 형적과 현재의 이미지가 불일치할 때 착각이나 오류가 생긴다. <테아이테토스> 편의 언어로는 이런 현상을 「형적과 지각의 불일치」라고 한다. 이 때 중요한 개념이 기억 혹은 상기(想起) ㅡrecollectionㅡ 이다. 착각은 현재 주어지는 지각과 과거의 형적을 잘못 연결시키거나 아예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경우 혹은 그 반대로 있는 것을 없다고 하는 등 현재와 과거의 불일치에서 발생한다. 그런 경우의 수가 총 17가지이다.
형적 곧 과거 지각이 남긴 흔적은 실은 관념(idea) 혹은 개념 (conception)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는 사고(thought)라고 할 수 있다. 형적과 지각의 불일치 내지 잘못된 연결을 이제는 사고와 감각의 잘못된 연결이라고 부른다. 결국 오류는 사고와 감각의 잘못된 연결이다. 이것은 대단한 발견이다. 그래서 극중의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자신의 발견을 감탄한다.
소크라테스 :
(• • •)
만일 누가 나에게 「소크라테스, 자네는 발견했다지? 잘못된 생각이란 지각(知覺) 상호간에도, 그리고 사고(思考) 상호간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지각이 사고와 함께 결합될 경우에만 존립하는 것이라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이것을 긍정하는 대답을 하려고 생각하네. 우리는 무슨 훌륭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의기 양양한 태도로 말이네.
이런 인식과 오류에 대한 훌륭한 발견에도 불구하고 아직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다. 즉 오류를 피하는 방법이나 참다운 인식에 이르는 방법은 규명이 아직 안 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위의 텍스트 내용처럼 감각 혹은 지각 자체는 비록 그것은 아직 지식은 아니지만 지식의 요소로 간주되었다는 점이다. 즉 지각ㅡ지식은 부정되었으나 지각 자체는 긍정된다는 점이다. 즉 지각도 사고도 다 참다운 존재이나 그 연결은 항상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참다운 지식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필요ㅡ충분한 답변은 아직 주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벌써 많은 진리들이 발견되었다.
이 문제는 또한 인간의 영혼 내지 정신을 완전히 긍정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국가>에서 플라톤은 영혼의 3분설을 설파한다. <테아이테토스>에서는 영혼의 두 가지 부분은 우선 완성이 되었다. 물론 주로 인식의 측면에서 그렇다.
오류를 개념과 그에 상응하는 감각 ㅡ 혹은 지각ㅡ 의 불일치로 규정한 플라톤은 이를 다시 소유(所有) ㅡhavingㅡ와 소지(所持) ㅡpossessionㅡ 의 관계로 풀이한다. 이를 적용하여 플라톤은 “새장의 비유” 라는 이야기를 통해서 지식의 문제와 더불어 학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새장의 비유는 진리와 오류의 문제보다는 학습의 가능성이 주된 테마이다.
학습의 문제를 다룬 최초의 대화편은 <에우튀데모스> 이다. 우선 <테아이테토스>에 나오는 새장의 비유를 먼저 소개하고
그 다음에 <에우튀데모스>와의 연관성을 알아보려한다.
(7) 플라톤의 대화 『에우튀데모스』에 나오는 학습의 문제
(7)-1 학습의 역설
플라톤의 대화 『에우튀데모스』는 소피스트들의 궤변의 실례를 보여주는 하나의 드라마이다.
그런데 그들의 궤변을 보여주는 가운데 실은 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두 가지 문제를 보여준다. 즉 ① 소위 「학습의 역설」이라는 교육의 문제와 ② 「거짓말은 없다」는 문제이다. ①의 문제는 『에우튀데모스』, 『테아이테토스』, 『메논』 그리고 『파이돈』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②의 문제는 『에우튀데모스』, 『테아이테토스』 그리고 『국가』로 연결이 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소피스트』의 핵심적인 주제를 형성한다.
디오뉘소도로스(兄)와 에우튀데모스(弟) 두 형제는 소피스트며 키오스 사람으로, 투리에서 추방되어, 전에 한번 아테네 시에 나타나 변론과 검술을 가르친 적이 있었으나, 다시 아테테에 나타나 종전의 학예 이외에 새로운 전술, 즉 말(言語)로 싸우는 법을 가르치고, 또 단시일에 가장 교묘한 방법으로 덕을 가르친다고 공언했다. 그리하여 덕의 스승을 구하던 소크라테스는, 아르키비아데스의 손자인 클레이니아스라는 소년을 이 형제 소피스트의 가르침을 받게 하기 위해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눈다. 이 <에우튀데모스>는 소크라테스가 그 문답 내용을 친구인 크리톤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 소피스트들은 자신들의 논쟁기술을 -이를 논쟁술(eristic)이라고 함- 과시하기 위하여 상대방에게 전략적인 어떤 질문을 하고 여기에 대해서 상대가 답을 하기를 기다린다. 작중에서 소피스트 동생 에우튀데모스는 순진한 클레이니아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클레이니아스, 배우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인가, 무지한 사람인가?
O Cleinias, are those who learn the wise or the ignorant?
멋도 모르고 이런 질문을 받으면 사람들은 대뜸 배우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래서 어린 클레이니아스도
「배우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다」 라고 말한다. 이처럼 상식의 허점을 노려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이 소피스트들의 수법이다. 한 마디로 클레이니아스는 궤변론자들에게 말려든 것이다.
이 때 형 소피스트인 디오뉘소도로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소크라테스, 그가 무어라고 대답하든지 나는 반드시 이를 논파할 걸세」라고 그들의 실력을 자랑한다.
어떤 면에서 배우는 자가 현명하다는 생각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보통은 이 말이 맞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틀릴 수도 있다. 하여간 일상적인 개념들은 대부분 애매모호하다. 「배움」이니 「현명하다」는 등의 일상적인 용어의 약점을 이용하여 소피스트는 농간(弄奸)을 부린다.
에우튀데모스는 「학습」 개념을 통해서 클레이니아스를 논파한다.
즉 클레이니아스가 아직 학생 즉 배우는 자라는 사실을 이용하여 「배우는 자는 모르는 것을 배운다. 따라서 모르는 자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모르는 자 즉 무식(無識)한 자이고 따라서 현명한 자가 아니다」라는 일련의 논증을 통해서 결국 어린 소년을 논박(論駁)한다.
그런데 이런 약간의 말장난을 통해서 상대방을 제압하는 일 외에 소피스트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배우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배우는가, 그렇지 않으면 모르는 것을 배우는가?」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흔히 「메논의 역설」 (Meno‘s Paradox) 이라고 불리어 진다. 즉 사람이 무엇을 탐구한다고 할 때 그 탐구의 대상을 모르고 있으면 탐구할 수가 없고 만약 안다면 탐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배우는 것에 대해서도 똑 같이 적용된다. 이를 「학습의 역설」이라고도 한다. 이런 학습의 역설을 최초로 언급한 곳이 바로 『에우튀데모스』 대화이다.
소피스트들의 「말장난」같은 학습 문제는 그러나 실은 중대한 철학적인 문제를 함축하고 있었다. 즉 :
「배우는 사람은 이미 아는 것을 배우는가, 그렇지 않으면 모르는 것을 배우는가?」
그런데 『에우튀데모스』 대화에서는 이 문제가 제대로 해명이 안 된 채로 넘어간다. 「배우는 사람은 무지(無知)한 사람이다」라는 소피스트의 궤변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그러나 제대로 된 반박을 못한다. 「아는 것을 배우느냐 모르는 것을 배우느냐」는 소피스트의 학습에 대한 양자택일 논리는 사실 대단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소피스트 형 디오뉘소도로스가 다시 동생의 논리를 이어받아 소년을 더욱 진창으로 밀어 넣는다, 즉
「안다는 것은, 그 때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겠지?」
그는 동의했네.
「어떤 사물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것을 소유한 자인가, 소유하지 못한 자인가?」 「그것을 갖지 못한 자입니다.」 「무지한 자는 갖지 못한 자들과 동일한 계급에 속하는 자임을 자네는 인정하는가?」 그는 이에 동의하였네. 「그럼 배우는 사람은 지식을 획득하는 사람과 같은 계급이고 지식을 소유한 사람과는 다른 것인가?」 그는 이 말에 동의했네.
「클레이니아스, 그럼 배우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고, 아는 사람은 배우지 않겠지?」
「배우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고, 아는 사람은 배우지 않는다」는 「디오뉘소도로스」의 말이 후일 「학습의 역설」이라고 알려진 사상을 드러낸다. 만일 이 말이 맞다면 학습이 불필요해 진다. 좀 더 자세히 분석하면 학습 혹은 탐구는 ①불필요하거나 ②불가능해진다. 즉 이미 아는 사람은 ①학습이 불필요하고 아직 모르는 사람 혹은 배우는 사람은 ②학습이 불가능하다. 이른바 「학습의 딜렘마」가 발생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학습은 선생님에게서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풀이해 봐야 소용이 없다. 즉 그 선생님은 어떻게 알았나요? 라고 되물으면 할 말이 없게 된다. 무언가 원천적으로 학습의 가능성 혹은 탐구의 가능성 내지 인식의 가능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작중에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난문(難問)에 대해서 이리저리 추구해 보지만 이렇다 할 똑 부러진 해결책은 아니다. 깊은 물속에 빠진 소년을 돕기 위해서 소크라테스가 나선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제 이 두 신사는, 자네가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배운다>는 말에 두 개의 의미가 있으며, 두 가지로 사용된다는 것을 설명하려 하네. 그 첫째 의미는 자네가 알지 못하는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고, 둘째의 의미는 자네가 만일 어떤 지식을 갖고 있을 경우에, 새로 얻은 지식의 빛으로 더 배우게 된다는 것이라네. 이 후자의 경우도 배운다기보다도 차라리 <이해한다>는 말을 사용하지만 배운다고도 말하네. 지금 이 두 사람이 말한 바와 같이 이 말은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의 쌍방에 사용되고 있지만, 자네는 이를 미처 모르고 있네.
소피스트들은 「학생무식론(學生無識論)」, 즉
「배우는 자는 모르는 것을 배운다. 따라서 모르는 자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모르는 자 즉 무식(無識)한 자이고 따라서 현명한 자가 아니다」라는 일련의 논증을 통해서 상식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던 어린 소년 클레이니아스를 궁지로 몰아 넣은 바가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를 배운다 말의 이중적인 의미를 통해서 논박한다. ① 「모르는 것을 처음 알게 된다」 혹은 「모르는 것과 접한다」. ② 이미 아는 것을 토대로 하여 더 배운다.
그리고 보통은 배운다 라고 할 때 대부분 ②를 뜻한다.
소피스트들의 「학습의 역설」 혹은 「학생무식론」은 여기서 완전히 끝난 줄 알았으나 후대의 저술에서 자꾸 이 문제가 거론되는 것을 보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① 「모르는 것을 처음 알게 된다」는 배움의 첫 번째 의미를 소크라테스는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그 대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선한 것을 소유하여 사용할 때 행복을 누릴 것이다 등의 주제에서 동떨어진 이야기를 한다. 또는 지혜가 선을 가져오고 무지가 악(惡)을 가져온다 등의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7)-2 : 거짓말은 없다.
소피스트들은 「배우는 자는 무지(無知)한 자이다, 지자(知者)는 배우지 않는다」는 논리를 더욱 발전시킨다.
미리 말해야 했지만, 소크라테스와 그의 친구 크리톤이 영리하지만, 아직은 순진한 클레이니아스를 교활한 소피스트들의 공격에 노출되도록 한 것은 그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였다.
즉 클레이니아스 주위의 사람들은 그가 지자(知者)가 되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위의 논리의 전개를 보면 지자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더 배울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지자(知者)는 이미 –무엇을- 아는 자이고 따라서 그것을 또 배울 필요는 없다. 여기서 학습 내지는 배움의 개념은 불필요한 말이거나 아니면 모순을 불러 일으키는 말이다.
디오니소로스는 소크라테스가 「학습 개념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나와서 학습의 역설을 반박하는 것을 보고 다시 재반박하기 위하여 칼날을 빼어든다. 이번에 그들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비존재의 2분법을 가지고 나온다.
「그렇다면 자네들은 클레이니아스가 지자(知者)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단 말인가?」
「물론이지」
「그럼 현재 클레이니아스는 지자가 아니란 말인가?」
(• • •)
「물론이네」.
「그럼 자네는 그가 아직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그런 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혹은 현재 도달하고 있는 그런 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여기서 현재 도달하지 못한 상태란 지식과 덕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지식을 더 배우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이는 아래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디오니소도로스: 자네는 그가 지자가 되기를 원하고, 어리석은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단 말이지
소크라테스 : 물론이네
학습은 어리석은 자에서 지자(知者)가 되는 것이다. 필자의 모교인 경부고등학교의 교훈이 1. 아는 사람 2. 생각하는 사람 3. 행하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교육의 목표는 아는 사람 즉 지자(知者)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너무나도 당연한 교육 혹은 학습을 소피스트들은 상태의 변화로 일반화 한 뒤 이를 다시 존재에서 비존재로의 이동으로 규정하고 이를 다시
파르메니데스의 2분법을 이용하여 불가능한 일로 치부한다. 이를 「학습 불가능론」 혹은 「교육불가능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현재 도달한 상태는 존재(存在)를 지시하고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상태는 무(無)를 지시한다. 위 인용문에서 「아직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그런 자」란 무(無)를 말한다. 「아직 가지지 못한 지식을 추구한다」 는 학습 개념을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상태로 변화한다」 라고 일반화시킨 다음 파르메니데스의 논리를 이용하여 이를 부정한다.
무식한 자가 배운다는 「학생무식론」 혹은 「학습의 딜렘마」는 급기야는 “배우기를 바라는 것은 「한 인간의 멸망」을 의미한다”는 기괴한 논리로 발전된다.
「자네들이 그가 현재 도달하고 있는 그러한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한다면, 이것은 그의 멸망을 원하는 것을 의미하네. 즉 애자나 친구로서 그 애인의 멸망을 원하다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나?」
미리 말하지만 소피스트들이 이렇게 상식을 파괴하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이면에는 <위대한> 파르메니데스의 이분법이 깔려 있다. 즉 「있거나 없다 그 사이의 이동은 없다」.
학습도 변화의 일종이다. 발전이라고도 한다. 파르메니데스는 변화와 생성 등을 부정한다. 소피스트들은 이를 이용하여 학습 개념을 부정한다.
「학습이 멸망이다」는 표현은 물론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은 파르메니데스의 2분법을 이용하여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즉 학습이 「아직 도달하고 있지 못한 상태」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무(無)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런 생각이 멸망 운운의 배경에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아직 도달하고 있지 못한 상태」란 아직 없는 것을 결국은 없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능성(possibility)이란 개념을 무시하고 있다.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있는 개념이 가능성이다.
이런 가능성의 개념을 부정하고 오직 있는냐, 없느냐 만을 따질 때에 교육이나 학습은 불가능해진다.
소피스트들은 교육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의 2분법을 이용했다.
이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다음에 이어질 대화에서 알려진다.
에우튀데모스는 「거짓말이란 있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상식적인 사실에서 출발하여 파르메니데스의 논리를 여기에 적용시켜 「거짓말이란 없다」는 궤변을 주장한다.
「있지 않는 것은 무(無)라네.」
「그렇네.」
「있지 않는 것이란, 아무데도 있을 수 없지 않은가?」
「그렇네. 아무데도 있을 수 없네.」
「있지 않는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할 수 없지.」
「그래 있지도 않고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클레이니아스에게 무엇을 행할 수 있단 말인가?」
「그야 아무 것도 할 수 없지.」
「그런데 변론가들은 대중 앞에서 아무 것도 행하지 못하는가?」
「그야 행하는 일이 있지.」
「그런데 행하는 일이란 또 이루는 일이 아닌가?」 그는 이에 동의하였네.
「그리고 아무도 있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없네. 왜냐하면, 설사 말은 하더라도 있지 않은 것을 행할 수 없으니 말이네. 이에 대해서는 자네가 이미 인정하였네. 그러므로 자네 자신의 논증(論證)에 의해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되네. 그러므로 디오뉘소도로스가 무엇인가 말한다면, 그는 지금 참된 것을 말하며, 또 있는 것을 말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네.」
소피스트의 논지는 파르메니데스의 그것을 역(逆)으로 이용한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비존재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하고 주장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이 말을 소피스트들은 「아무도 있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라고 조금 표현을 변화시킨 다음, 더 나아가서 이를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그들은 「①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고 ②따라서 말이란 모두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③그러므로 모든 말은 참되다」 라고 추론한다. 이 논증은 파르메니데스의 공식을 너무 빠르게 말에 적용시킨 것이다 : ①과 ②는 맞다. 그러나 ③단계에서 오류가 있다. 즉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고 그것이 반드시 참은 아니다. 가령 A라는 존재(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그가 교실의 유리창을 깨지 않았는데 B 라는 어떤 학생이 「A가 유리창을 깼다」라고 하면 B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해서 말한다고 그것이 참이라는 보장은 없다. 거짓말이나 참말이나 모두 존재에 대해서 말한다. 또는 어떤 불확정적인 존재 C에 대해서 그것은 닭이다 혹은 그것은 꿩이다 라고 서로 다툴 수가 있다. 이 둘 중 하나는 거짓말(오류)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고 그것이 거짓이 아니다」라는 소피스트들의 추론은 논리적인 비약이고 오류추리이다.
물론 상식에서는 「없는 것을 말한다」라는 표현은 「거짓말 한다」 는 뜻이기는 하다. 그래서 소피스트 에우튀데모스는 「그러므로 디오뉘소도로스가 무엇인가 말한다면, 그는 지금 참된 것을 말하며, 또 있는 것을 말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네」 라고 농간을 부렸다. 물론 그 자신도 자기의 말을 별로 믿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우선 「그리고 아무도 있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없네. 왜냐하면, 설사 말은 하더라도 있지 않은 것을 행할 수 없으니 말이네」 라고 하는 위의 인용문에서 드러난다. 즉 어떤 경우에는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말을 한다」는 고백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소피스트들의 주장이 일관적이지 못한 것이다.
그 밖에도 거짓말이 없다는 그들의 주장은 금방 반박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명제는 철학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래에서 언급하겠지만 소피스트들의 「거짓말 불가능」론은 ① 진리란 무엇인가? 하는 진리론의 형성에 기여를 했고 더 나아가서 ② 존재를 「실체와 속성」으로 구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발전에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거짓말이란 있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상식적인 거짓말의 정의(定義)에서 출발하여 「있지 않는 것은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거짓말이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궤변의 원조가 프로타고라스라는 것을 지적한다. 디오뉘소도로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디오뉘소도로스여, 자네가 하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네의 그러한 말은 내가 가끔 듣지만 놀랍기 짝이 없네. 이런 말은 프로타고라스의 제자들이나 그 이전의 사람들이 부르짖던 것이 아니겠나?
(• • •)
거짓말이란 있을 수 없다고 자네는 단정하고, 인간은 진리를 말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자네의 주장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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