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계절의 끝에서
평소에 소설을 잘 읽지는 않지만 머리가 복잡할 때면 머리를 식힐 겸 소설책을 읽는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늘 그렇듯 읽는 재미가 가득하다. 그의 소설은 문장보다는 이야기 구조에 재미가 가득 담겼다. 이야기를 따라 추리를 하다보면 더위도 어느새 저만큼 물러선다.
그런데 일본 소설을 읽을 때면 늘 문제가 하나 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거의 소설을 다 읽을 때까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름이 길기도 하거니와 어떤 때는 성만을 쓰고 또 어떤 때는 이름만을 쓰고 또 어떤 때는 그 모두를 다 쓴다.
그런데도 안 헷갈린다면 이상하지 않을까 싶다. 이 소설은 <녹나무의 파수꾼>이라는 소설의 후속 편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전편을 읽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소설을 읽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만으로도 충분히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나. 간단한 줄거리
이야기는 월향신사를 관리하는 레이토라는 청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월향신사에는 영험한 녹나무가 있다. 녹나무 기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념인데, 초승달이 뜨는 초하루 무렵에 행한다. 녹나무 안에 들어가 밀초에 불을 켜고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것을 염원한다.
그러면 그 염원이 녹나무에 새겨진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수념인데, 염원을 받는 것을 말한다. 보름달이 뜨는 날 밤에 행한다. 예념한 이와 혈연관계인 사람이 녹나무 안에서 밀초에 불을 켜고 예념자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그 염원이 전해져 온다.
기적과도 같은 이 현상은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되기에 오랫동안 야나기사와 가문에 의해 엄중히 관리되었다. 그리고 현재 실질적인 관리자가 레이토였다. 소설은 레이토가 인터넷 기사를 통해 강도치상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탄탄한 그물처럼 잘 짜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하나씩 아픔을 가지고 있거나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다. 월향신사의 주인인 치후네는 나이가 들어 인지장애를 앓고 있다. 월향신사를 돌보는 레이토는 그의 조카이다.
그런데 사건이 교묘하게 레이토 주변을 맴돈다. 어느날 60대 노인이 월향신사 녹나무 참배를 왔는데 참배 중 심경근색으로 쓰러졌다. 레이토는 황급히 구급차를 부르고 조치를 일찍이 취하는 바람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호자와 연락이 닿지 않아 뜻하지 않게 병원에서 하루밤을 보내게 된다. 그 밤에 강도치상 사건의 범인이 그곳 녹나무 안에서 숨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도상해는 이야기에 살을 덧붙여 이야기 구조를 보다 더 흥미롭게 하려는 시쳇말로 ‘양념’ 같은 것이다.
다케다 녹나무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 숨겨져 있다. 유키나라는 고등학생은 어려운 집안의 살림살이를 위해 데이트교제를 하였다. 모토야는 중학생인데 뇌종양을 앓다가 수술을 했는데 기억을 잃어버리는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과거의 기억은 온전히 남아 있지만 오늘 일어난 일들은 잠을 자고나면 모두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그날 기억들을 일기에 꼬박고박 적어놓았다. 그 일기가 오늘을 다시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모리베의 집에 들어가 복면을 훔쳐낸 구메다는 실업자로 제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이 레오토 주변을 들락거리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형사는 강도치상 사건을 해결하려 월향신사를 들락거리고 유키나는 시집 판매로 역시 그곳을 찾았다.
그러다 우연히 병원에서 모토야를 알게 되고 그가 자기 어머니와 월향신사를 찾았다. 그곳에서 유키나를 만났다. 둘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재능을 서로 가지고 있을 것을 알고 함께 그림책을 만들기로 한다.
그 후로는 이야기는 그림책 만들기에 골몰하는 유키나와 모토야를 중심으로 펼쳐지지만 이야기는 여전히 레이토가 끌고 간다. 레이토도 과거에는 절도를 한 적이 있었고, 그 때문에 감방 신세를 질 뻔하기도 했다.
모리베를 재떨이로 내려친 사람이 유키나였다는 사실은 소설을 한층 긴박하게 몰아간다. 재떨이로 그를 내려치고 서랍에서 100만 엔을 훔쳐갔다. 적어도 자기를 신고하지 못하리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그가 불륜의 상대로 유키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레이토의 현명한 처신으로 그녀는 숨겨 두었던 100만 엔을 고스란히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다. 물론 거기에 둘이 만남을 가질 때 받았던 2만 엔을 포함했다. 그 만 엔짜리 지폐에 지문이 묻어있었고 그 지문에 레이토의 지문이 있었던 것이다.
형사들은 월향신사를 들락거리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지문을 채취하고 결국 유키나가 범인임을 밝혀낸다. 그러나 치휴네의 재치있는 법률 상식으로 인해 유키나는 구속되는 일을 피했다. 물론 구메다도 마찬가지였다. 그 뒤에는 언제나 레이토가 있었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유키나와 모토야의 그림책으로 좁혀진다. 그림책 이야기는 결국 미래에 대한 너무 큰 기대나 환상을 갖지 말하는 것이다. 오늘을 충실히 살면 미래도 장밋빛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다. 우리 안의 선의
따지고 보면 인간이란 본래부터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세상 속에 휘둘리면서 잠깐씩 악의에 물들기도 한다. 소설은 그런 악의까지도 보듬어 안는다.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선의를 끄집어내고 있다.
녹나무 여신이 보여주는 미래는 한결 같았다. 10년 후에도 여전히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20년, 30년 후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시선에 미래로 가 있는 동안 우리는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
결국 저자는 미래가 아니라 오늘을 오늘답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는 허황된 꿈을 버리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것은 먼저 우리가 욕심을 내려놓은 일에서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