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고 전체 회원이 7대의 차량에 분승을 하고 실상사로 갔다. 실상사에 도착을 하니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기는 것은 해탈교를 건너기전의 석장승(옹호금사축귀대장군)이고 해탈교를 건너니 양쪽의 석장석(대장군과 상원주장군)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실상사의 주입문은 사천왕문이고 사천오아상은 비록 오행색을 갖추어 단청을 하지는 않았으되 위엄은 갖추었고 그리 겁을 주는 편은 아니지만 형식을 갖추고 최근 새로 단청을 올렸다.사천왕문을 지나 바로 우측에 범종각이 자리를 하고있는데 종은 최근 불사로 이루었으나 생황과 피리를 부는 주악천인상은 제법 눈길을 끌었다.
그 뒤가 바로 천년전 목탑이 있었던 자리인데 경주 황룡사의 구층목탑보다 가로, 세로 약 1미터 약 10평이 커다고 하니 그 규모에 놀랍다.
당시 놓았던 심초석과 추춧돌을 보면서 위용을 상상해 본다.
약사전은 4천근의 철을 주조하여 만든 거대한 철불인데 대좌는 없이 흙바닥에 앉아 지리산 천왕봉과 일본 후지산을 바라 보고 계시단다.
그 옛날 우리나라의 상서로운 기운이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거운 철불을 세운거라고 한다.
수인으로 보면 아미타여래이나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다. 불상의 크기에 비해 눈이 가늘에 중생을 굽어보고 깊은 생각을 하는 부처님처럼 보였다.
다음은 보광전 앞의 석등인데 석등의 높이도 큼직하고 특히 귀꽃 높다랗게 장식되어 있으며 화창이 8개이며 앙련과 연꽃을 8개씩 새겨두었는데 가운데 중대석이 장고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석등의 앞에서 석등에 불을 켜기위한 계단이 있어 특이했다.
석등의 바로 앞에는 좌우로 석탑이 2기 있는데 높이와 비례가 비교적 아름다운 신라시대탑으로 보인다. 각 탑에 상륜부가 완전하게 남아있는데 중심에 찰주가 있고 찰주를 중심으로 노반,복발,앙화,보륜,수연,용차,보주 순으로 있다. 상륜부가 이정도 남아 있는 경우가 별로없다.
다음은 실상사의 개산조인 증각대사응료탑이다. 스님의 이름은 홍척인데 사후에 시호가 증각이고 응료는 이 부도의 이름이란다.일반적인 팔각원당형이고 몸돌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있고 안상에는 비천상과 보살좌상이 새겨져있다. 그리고 상륜부에는 앙화와 보주가 남아있고 낙수면에는 기왓골과 추녀가 조각되어 있어 완전히 사람이 거주하는 집의 느낌을 주었다.
바로 옆에는 극락전이 있고 극락전 바로앞에 거북이가 이수만 등에 이고 응료탑비임을 말없이 대변하고 있다.
바로 옆 15미터쯤에 홍척스님의 제자인 수철화상능가보월탑이 자리를 하고 있다. 양식은 팔각원당형이고 몸돌에는 문비와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바로 지근거리에 수철화상의부도비가 이끼를 뒤집에쓴채 자리를 하고 있는데 스승에 비해 귀부는 없고 대신 비좌에 비를 세우고 이수를 올린 모습인데 현재로 글은 알아보기 어렵고 전에 탁본을 한것으로 내용은 파악되고 있다고 한다.
다음은 지리산의 뱀사골과 노고단을 해서 구례 화엄사로 갔다.
화엄사는 그 옛날 나라에서 지리산에 제사를 지내던 그런 사당을 복원해 두었는데 남악사이다. 모두들 남악사에는 눈길한번 주지않고 지나가길래 그냥 사진만 한장찍고말았다.
이제 지리산화엄사이다. `병자년중추의창군광'이 썻다고 현판에 나와있다. 6.25때 각황전을 구한 차일혁총겨의 공적비와 당간지주를 보고 보제루를 보면서 각황전과 대웅전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각황전의 크기에 대웅전의 위세가 많이 눌릴것으로 보았는데 전체적인 지붕선은 그리많이 차이가 나지않았다. 각황전앞의 석등과 사사자감로탑 그리고 원통보전,영전,나한전의 전각들을 구경하고 각황전 내부를 구경하였다.특히 각황전앞의 석등의 규모면에서 세계제일이요 아름다움으로도 세계제일의 문화유산같아 더욱 마음이 미쁘다.
각황전에 얽힌 이야기는 춘추공님을 통해서 들어서 잘 아실터이고 이에 대한 다른 한가지를 소개하고자한다. 6.25전쟁때 이곳 지리산 화엄사 경내인근은 인민군과 빨치산의 주활동 무대였단다. 당시 지리산공비토벌대장인 차일혁총경이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고 고민을 했단다. 전투는 또 이기면 그만이지만 한번 불탄 문화유산은 다시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닿고 각황전의 문짝하나만 떼내어 불태우고 상부에 불태웠다고 보고를 해서 그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껏 우리가 이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볼수 있는것이다. 그당시 불교계에서는 차총경에게 감사장을 전달하고 1998년 10월경 불교계에서 그분의 공로를 기려 경내에 공적비를 세웠다. 사실 사찰경내에 민간인의 공적비가 있는경우는 드물다.
다음은 각황전 바로 북서쪽 언덕, 통상 효대에 있는 사사자 3층석탑과 화엄사 동,서5층석탑을 보고 화엄사 답사를 마무리한다.
점심식사를 하고 찾아간 곳은 구산선문중 하나인 동리산파의 주된 사찰인 태안사이다. 좁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계곡사이에 다리를 대신하는 건물겸 다리가 능파각이다. 자연바위에 큰나무를 대고 지붕을 이은것인데 최근 기둥과 다리의 목재를 바뀌 새로놓은 다리같았으나 징붕과 서까래를 보면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아래로 바라보는 계곡의 물은 맑은 느낌을 주었다. 전나무가 가득한 길을 한참가다보니 일주문이 서있는데 일주문 바로옆에 부도밭이 있었다. 부도밭에는 태안사의 중흥조 광자대사의 부도와 부도비 그리고 석종형부도, 팔가원당형부도가 자리를 하고 있었다. 부도밭의 왼쪽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는데 연못의 한가운데에는 삼층석탑이 자리를 하고있는데 신라때 양식이나 고려때 만들었을껄로 추정되며 최근 부재를 다시 만들어 복원을 한것으로 보였다.
선원 바로 뒤에 있는 배알문에 들어서면 문의 높이가 낮아 자연적으로 적인선사의 부도에 예의를 표하게끔 되어있다. 배알문의 가운데 기둥을 둥글게하여 그 아름다움을 더했고 적인대사의 부도는 소박한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옆에 있는 적인대사의 비는 파손되어 그 내용은 알수가 없고 새로이 비를 세워두었는데 비의 이수가 아래에 있는 광자대사비의 것과 바뀌었다고한다.
이제 마지막 답사처로 간곳이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이다.연곡사는 아름다운 부도로 가장 유명한 절이다. 일주문을 지나 대적광전의 영역전 왼쪽에 신라여초의 3층석탑이 있고 그보다 조금위에 서부도가 자리를 하고 있다. 서부도의 입구에 현각선사의 부도비가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는데 상당히 조형미가 뛰어나고 조각숫법이 뛰어나다. 특히 전체적으로 적갈색옷을 입어있는 느낌이 들고 코구멍이 상당히 크다. 귀부 뒤에는 의병장 고광순의 순절비가 동백나무숲가운데 서있었다.그위에 있는 서부도는 소요대사부도라고한다. 1649년에 부도를 세웠다고하며 동부도나 북부도에 비하여 조각솜씨는 상당히 떨어지며 주위에 석종형 작은 부도가 셋있다.
북부도는 누구의 것인지는 잘 알순없지만 팔각원당형에 몸돌에 문비형과 사천왕상 그리고 가릉빈가가 각면마다 새겨져있다. 상륜부에도 가릉빈가와 보륜이 새겨져있었는데 불행하게도 가릉빈가의 목이 모두 떨어져나가있어 아쉬웠다.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본존인 대적광전의 바로뒤인데 동부도가 자리를 하고있다. 동부도를 보는순간 오늘까지 보아온것중 가장 뛰어난 작품임에 단번에 알아볼수가 있었다. 화려하고 단아한 것이 오래동안 감상할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문비형과 사천왕상 그리고 향로등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그 솜씨가 너무 정교하였다. 상륜부의 기왓골과 서까리 추녀, 수막새까지 새겨져있으며 상륜부에는 네방향에 가릉빈가가 새겨져있었다.그위에 연꽃과 앙황,복발,보륜등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이 역시 불행히도 가릉빈가의 목이 잘려있어 안타까웠다.
바로옆에는 동부도비가 서있는데 거북의 등에 날개가 새겨져있어 특이했다.
없는 글솜씨에 메모했던것을 옮겨보았습니다.
=====================================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터넷①』
(≫≪) 미군 희생 여중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