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부군 묘표(先府君墓表)
옛날 고려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할 때 육신(六臣 신숭겸(申崇謙)ㆍ배현경(裴玄慶)ㆍ홍유(洪儒)ㆍ복지겸(卜智謙)ㆍ유검필(庾黔弼)ㆍ최응(崔凝))이라 불리는 이들이 실로 그 대사를 주도하여 모두 왕명으로 태사(太師)를 삼았다.
그중에 한 분이 신공 숭겸인데 공로가 가장 컸으며 마침내 순절하였다. 세상을 떠나자 임금은 장절(壯節)이란 시호를 내리고 춘천에 예장하게 했으며 본관을 평산(平山)으로 하사하였는가 하면, 묘정(廟庭)에 향사하고 고려의 사직이 무너진 뒤에도 숭의전(崇義殿 마전(麻田)에 있는 고려 태조를 모신 사당)에 배향되었으니, 이분이 곧 우리의 시조이다.
그리하여 신씨는 마침내 해동의 큰 문벌이 되었는데, 사가(史家)의 기록들에 나타나 계보를 댈 수 있는 것을 따져보면 원윤(元尹) 보장(甫莊), 개국성제자(開國聖帝子) 홍상(弘尙), 적경실 부사(積慶室副使) 경(勁), 근시(近侍) 유비(愈毗), 동정(同正) 명부(命夫), 전서(典書) 응시(應時), 도관(都官) 영재(令材), 병부 낭중(丙部郞中) 적(𥛚), 조봉랑(朝奉郞) 연(衍), 도관(都官) 중명(仲明), 전리 판서(典理判書) 즙(諿)이 곧 세계(世系)이다.
도관공(都官公)의 배필은 낙랑 김씨(樂浪金氏)이고 판서공의 배필은 무송 유씨(茂松庾氏)이다. 판서공이 안(晏)을 낳았는데 종부령(宗簿令)을 지냈고 고려가 망하자 절개를 지켜 벼슬하지 않았으며 배필은 장흥 임씨(長興任氏)이다.
묘소는 평산(平山) 진불산(眞佛山) 서쪽 광정리(廣庭里)에 있다. 이분이 효(曉)를 낳았는데 우리 태종조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우정언에 제배되어 국사를 말하다가 뜻이 맞지 않자 물러나 행주(幸州)에 살면서 임금이 불러도 나가지 않았으며 향년 81세로 세상을 마치고 도승지에 증직되었다.
배필은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전서(典書) 희충(希忠)의 따님이다. 이분이 자계(自繼)를 낳았는데, 전생서 주부를 지냈고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배필은 평강 채씨(平康蔡氏)로 학생 소(沼)의 따님이다. 이분이 세경(世卿)을 낳았는데, 사직서 영(社稷署令)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으며, 배필은 고령 박씨(高靈朴氏)로 전적(典籍) 사란(思孄)의 따님이다.
정언공으로부터 공까지는 묘소가 고양(高陽) 행주에 있다. 이분이 영(瑛)을 낳았는데 의정부 우참찬을 지냈으니 대대로 음덕을 쌓아오다가 공에게 이르러 발휘되어 조금 명성을 떨쳤다. 일찍이 묘당에 올라 삼조(三朝)를 섬겼고 삼대를 추은하였다. 배필은 단양 우씨(丹陽禹氏)로 학생 석규(錫圭)의 따님이다. 4남을 두었는데 그 둘째 분이 곧 나의 선부군이다.
선부군의 휘는 승서(承緖), 자는 중술(仲述)인데, 가정(嘉靖) 신묘년(1531, 중종26)에 태어났다. 무오년(1558, 명종13)에 생원에 급제하고 음직에 보임되어 귀후서 별제, 의금부 도사, 상의원ㆍ도화서 별제, 사도시 직장, 장악원 주부, 장례원 사평을 지냈으니 이것이 벼슬살이 이력이다.
병인년에 지방으로 나가 구례 현감이 되었다가 임기가 만료되어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고 임신년(1572, 선조5)에 호조 좌랑, 예빈시 판관, 개성부 도사를 지냈으며 그해 8월 재직 중에 세상을 떠나니 춘추는 겨우 41세였다.
선비 송씨는 선계가 은진(恩津)에서 나왔는데 고의 휘는 기수(麒壽)로 의정부 좌참찬이고 비(妣)는 채씨(蔡氏)로 대사헌 침(忱)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임진년(1532, 중종27)에 선비를 낳아 15세에 선부군에게 시집왔으며 임신년(1572, 선조5) 4월에 선부군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 춘추 또한 41세였다.
김포(金浦) 참찬공의 묘소 아래 곤좌(坤坐)에다 장사지냈는데 선부군과 같은 묘역에 봉문은 달리하였다. 아, 애통하다.
2남 2녀를 길러내어 딸은 생원 임경기(任慶基)와 종실 파원도정 응복(坡原都正應福)에게 시집가고 아들은 흠(欽)과 감(鑑)이다.
임씨는 3녀를 두어 허길(許佶)ㆍ정기(鄭沂)ㆍ김광보(金光輔)에게 시집가고, 도정도 3녀를 두어 조국철(趙國哲)ㆍ허양(許敭)ㆍ한인철(韓仁哲)에게 시집갔다. 흠은 병사(兵使) 이제신(李濟臣)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 5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익성(翊聖)과 익전(翊全)이다.
익성은 선조대왕의 셋째 따님인 정숙옹주(貞淑翁主)를 맞아들여 동양위(東陽尉)가 되었다. 딸은 진사 박호(朴濠)와 조계원(趙啓遠)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감은 승지 조인후(趙仁後)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익량(翊亮)으로 진사이고 다음은 익륭(翊隆)이며 딸은 홍명구(洪命耈)에게 시집가고 그 다음은 어리다. 익성은 3남 2녀, 익량은 1남, 박호는 2남 2녀, 조계원과 홍명구는 다 1남을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불초고(不肖孤) 흠(欽)은 선부군께서 구례 현감으로 나간 해에 태어났는데 일곱 살 때 선부군과 선비가 세상을 떠나 아우 감(鑑)과 함께 외갓집에 가서 자랐으니, 고아가 되어 의탁할 데 없는 가정환경은 구양자(歐陽子 송 나라 구양수(歐陽修))가 부친은 일찍이 잃었으나 모부인은 오히려 세상에 계셨던 경우보다도 못하였다.
선부군의 선행에 대해 대략이나마 들어보지 못하다가 장성한 뒤에 비로소 외왕부(外王父 외조부 곧 송기수를 말함) 및 백부(伯父 신홍서(申弘緖)를 말함)와 선부군 당시에 살았던 이들에게 얻어 들었는데, 모두 말하기를
“천성이 아름답고 자품이 온후하여 가정에서는 훌륭한 자제요, 관원으로 있을 때는 훌륭한 관리요, 지방 백성을 다스릴 때는 훌륭한 수령이
었으며 문장을 잘 하였으나 과거에 급제하길 원치 않았고 선행을 하되 혹시 명예를 얻을까 부끄러워했다.” 하였다.
불초는 그 말을 삼가 받아 글에 기록하였다. 만력(萬曆) 병신년(1596, 선조29)에 불초고가 사명을 띠고 구례현을 지나가는데 고을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찾아와 흠을 만나보았다. 그는 선부군의 치적을 기억하여 말하기를
“청백하면서도 능히 삼가고 성실하면서도 부지런히 하며 송사의 판결을 분명히 하여 사람들이 믿게 하므로 서리는 두려워하고 백성은 사모
하였으며 대로변에 비석을 세워 이제까지 여전히 그 덕을 칭송하고 있다.”
하였다.
그리하여 선부군께서 끼친 사랑이 아직까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다.
선비께서는 자질과 식견이 뛰어나고 심덕과 용모가 다 빼어났으며 친가부모에 순응하고 시부모에 복종하였는가 하면 끼니의 공급을 맡아 거르는 때가 없고 살림살이를 살찌게 하여 법도가 있었으므로 시숙ㆍ동서간과 일가 친인척에서부터 노복에 이르기까지 그 덕을 흠앙하고 그 선에 교화되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슬프게도 소자가 복이 없어 하늘이 돌보지 않았으니 아, 애통하다.
불초고 흠은 선대의 음덕을 입어 학문을 닦고 글공부를 하여 과거에 급제하여서는 대각(臺閣)의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8좌(座)의 반열에 오르고 1품의 자급을 지닌데다가 선종조(宣宗朝)의 원종훈(原從勳)으로 인하여 선부군은 의정부 영의정에, 선비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아우 감(鑑) 또한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과 시강원 벼슬을 역임하고 이제 목사가 되었다.
아, 불초고가 비록 조종을 빛내지는 못했지만 또한 감히 선대의 가르침을 실추하지 않았는데, 계축년 여름에 선종대왕의 유교(遺敎)로 죄에 걸려 파직되어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혼자 생각해보면 입신 양명한 것은 모두 선고비께서 끼쳐준 경사로 인한 것이고 재앙을 만난 것은 실로 시운이 불행하였기 때문이다.
오직 행실이 잘못되지 않고 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으로써 부모가 주신 몸을 고스란히 지니고 돌아가는 소지로 삼고 부모의 이름을 드러내는 의의로 삼을 뿐이다. 이제 어느 날 갑자기 죽기 이전에 묘도(墓道)에 그 행적을 드러내어 불초의 끝없는 사모의 정을 붙이는 바이다.
지극한 정은 글이 필요없고 지극한 슬픔은 말이 소용없는 법이나 후세의 자손이 선대의 덕을 살펴보려고 한다면 또한 이를 통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불초고 흠은 피눈물을 흘리며 기록한다.
[주해]
[주01] 계축년 …… 돌아갔다 : 광해군 5년(1613) 4월에 박응서(朴應犀)가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고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을 끼고 역모를 하였다고 허위 진술하여 김제남의 일족은 사사(賜死)되고 영창대군은 강화에 유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과거에 영창대군을 보호해 달라는 선조의 유교를 받았던 유영경(柳永慶)ㆍ한응인(韓應寅)ㆍ박동량(朴東亮)ㆍ서성(徐渻)ㆍ신흠ㆍ허성(許筬)ㆍ한준겸(韓浚謙) 등 일곱 신하들도 함께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전리(田里)로 방귀되었는데, 신흠은 김포(金浦) 선영 아래로 돌아갔다.
선조의 유교 내용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 있는 법이라서 성인도 모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대군이 아직 어려 미처 장성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바라건대 제공은 애호하고 붙잡아 달라. 감히 이로서 부탁한다.”하였다.
상촌선생집 제26권 / 묘표(墓表)
-------------------------------------------------------------------------------------------------------------------------------------------------------
[原文]
先府君墓表 後稿.
曰昔麗祖之合三韓也。有六臣者實左右之。俱命爲太師。其一曰申公崇謙。功伐最偉。竟以身殉節。卒諡壯節。賜葬春川。賜籍平山。享于廟庭。麗社旣屋。猶配食于崇義殿。卽我初祖也。肆申氏遂爲海東大閥。其見于史氏諸牒。可譜者曰。元尹甫莊。開國聖帝子弘尙。積慶室副使勁。近侍愈毗。同正命夫。典書應時。都官令材。兵部郞中䙗。朝奉郞衍。都官仲明。典理判書諿。
是其世也。都官公配曰樂浪金氏。判書公配曰茂松庾氏。判書公生晏。宗簿令。麗亡秉節不仕。配曰長興任氏。墓在平山眞佛山西廣庭里。寔生曉。我太宗朝文科狀元。拜右正言。言事不合。退居幸州。徵不起。年八十卒。贈都承旨。配曰南陽洪氏。典書希忠女。寔生自繼。典牲署主簿。贈戶曹參判。配曰平康蔡氏。學生沼女。寔生世卿。社稷署令。贈吏曹判書。配曰高靈朴氏。典籍思斕女。自正言至公。墓在高陽幸州。寔生瑛。議政府右參贊。代有畜德。及公而大。少振華問。早陟岩廊。歷事三朝。推恩三世。配曰丹陽禹氏。學生錫圭。有四男。第二公。卽我先府君也。先府君諱承緖。字仲述。生于嘉靖辛卯。戊午生員。補蔭職。歸厚署別提,義禁府都事,尙衣院,圖畫署別坐。司導寺直長,掌樂院主簿,掌隷院司評。是其莅歷也。丙寅。出守求禮。瓜滿授司憲府監察。壬申。戶曹佐郞,禮賓寺判官,開城府都事。是年八月。卒于官。春秋僅四十二。先妣宋氏。系出恩津。考諱麒壽。議政府左參贊。妣曰蔡氏。大司憲忱女。嘉靖壬辰生先妣。十五歸先府君。壬申四月。先先府君卒。春秋亦僅四十一。厝于金浦參贊公墓下坤坐之原。同兆異塋。嗚呼痛哉。育二男二女。女曰生員任慶基,坡原都正應福。宗室也。男曰欽,鑑。任有三女。許佶,鄭沂,金光輔。都正三女。趙國哲,許敭,韓仁哲。欽娶兵使李濟臣女。生二男五女。男曰翊聖,翊全。翊聖尙宣祖大王第三女貞淑翁主。爲東陽尉。女曰進士朴濠。曰趙啓遠。餘幼。鑑娶承旨趙仁後女。生二男二女。男曰翊亮進士。曰翊隆。女曰洪命耇。餘幼。翊聖三男二女。翊亮一男。朴濠二男二女。趙啓遠,洪命耇皆一男。幼。不肖孤欽生於先府君出守求禮之年。生七歲。先府君若先妣捐館舍。與弟鑑。往鞠于外氏。孤而無依。曾不若歐陽子之早喪而母夫人猶在世也。其於先府君懿行。莫能習聞其厓略。旣長。始有聞於外王父曁伯父諸及先府君時者矣。咸曰質美而資厚。在家爲賢子弟。居官爲賢郞吏。牧民爲賢守宰。文而不期射科。行而恥於近名。不肖謹受而載之矣。萬曆丙申。不肖孤以使事過求禮縣。縣之遺老扶杖來覿。能記先府君治行曰。淸而能愼。恪而能勤。判決明允。吏畏民懷。勒石大逵中。至于今頌德不替云。於是而愈信先府君遺愛在人不斬也。先妣資識超詣。德容竝秀。順父母叶尊章。主饋無遂。肥家有制。兄弟妯娌。族黨姻親。下逮僮御。莫不歆其德。化于善。噫。小子無祿而遽不弔。嗚呼痛哉。不肖孤欽獲庀先休。種學績文。忝竊科第。歷踐臺閣。班躋八座。階列一品。以宣宗朝原從勳。贈先府君議政府領議政。先妣貞敬夫人。弟鑑亦擢文科。歷給諫侍講。今爲牧使。噫。不肖孤雖不克光于祖宗。亦不敢覆墜前訓。而癸丑夏。以宣宗大王遺敎。株連姻媾。罷歸田里。自念成立顯揚罔非先考妣敷遺之餘慶。遘値災釁。良由時命之或舛。唯以不跲于行。無媿于中者。爲全歸之地。爲顯親之義。庶幾未及溘先朝露。庸揭烈于墓道。以寓不肖無窮之慕。至情無文。至哀無辭。來世雲仍。其欲考于世德。尙有徵于茲。不肖孤欽。泣血記。<끝>
상촌선생집 제26권 / 묘표(墓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