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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일제 박물관에 일본 청년이 그렸던 고구려 비천상 벽화!
일본이 경복궁의 300채 전각 을 허물고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 는 해방후 미군정청 청사로
사용되다가 1948년 부터는 대한민국 중앙청 으로 사용되었는데 80여년만인 1996년
1월 철거 하다가 놀라운 벽화 가 발견되었으니.... 대한민국 국무회의 가 열리던
홀의 천장에는 일본 건국 신화에 나오는 “이자나미신과 이자나기신의 벽화 그림” 이라!
중앙청 그러니까 조선총독부 청사는 가운데 돔이 유럽의 성당처럼 되어있는데, 49년 동안이나
총리와 장관들이 모여 일본 신들이 내려보는 자리에서 국무회의를 하면서도 천장을 올려다
볼 생각을 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던 것일까요? 벽화 그림 얘기가 나왔으니.... 동아일보에
유원모 기자가 쓴 “옛 총독부 박물관 ‘비천상’ 모티브는 고구려 벽화”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조선총독부가 경복궁내 동궁전을 헐고 지은 박물관 의 ‘비천상’ 은 104년전 일본 신예
미술가 2명 이 고구려 벽화에 감동받아 공동 창작했으니 여인이 새깃이 달린 화관
을 쓰고 푸른빛 피리 를 불고있는 모습인데, 1915년은 근대미술사에서 특기할
만한 시점이며 일본 청년이 조선의 경성(서울)을 찾아와 유화 대작을 그렸던 까닭이다.”
“당시 막 발견된 고구려 강서대묘 벽화의 비천상 을 본뜬 그림으로 길이 9m 넘는 큰
화폭에 비천상 벽화 를 그렸으니 푸른빛 하늘에 분홍빛 구름이 너울거리는
천상의 세계에서 피리 부는 팔등신의 풍만한 천녀 가 천의를 흩날리며 천상을
떠다녔으니 고구려 도상에 서구의 인상파 고전주의 화풍이 녹아든 ”비천“ 의 탄생이다.”
“경복궁내 조선물산공진회 미술관의 중앙홀 천장화 였는데 장식재로 고구려 미술
을 모델로 한 그림 이 들어가는 아이러니가 벌어진 셈이니 미술관은 박람회가
끝난 뒤 총독부 박물관 으로 바뀌어...... 고대 유산과 왕실 공예 유물의 요람
구실을 했으나 1996년 1월 김영삼 정부가 철거할 때 모두 사라질 위기를 맞았다”
“미술사적 가치를 알아본 백찬규와 이상수, 한경순 은 친일 유산 이란 곱지 않은
시선을 무릅쓰고 길이 9.8m, 폭 6.35m 에 이르는 대형 벽화 를 떼어내어
보존하는 공법 을 처음 시도해 근대미술의 태동기 역사를 증언하는 작품을
보존했다는 점에서 근대기 미술 유산 보존의 좋은 선례 를 남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 벽화는 근대미술사가 김영순 이 일본 각지를 수소문하면서 조사한 끝에, 일본 도쿄
미술학교 출신 일본 작가 안도 도이치로와 다나카 료 의 공동작업으로 그려졌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김씨는 안도의 유족이 갖고 있던 작가의 비천상 스케치 와
벽화의 최종 도안, 경성을 찾아와 작업했다는 기록이 담긴 스케치북, 편지도 확인 했다.”
“1915년 데라우치 조선 총독부는 미술관 을 건립하면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발췌한 비천상을 서양화 기법 으로 표현해 동서문화의 융합을 시도하고
일제 당국이 추구한 내선일체의 정신을 표상하려는 의도를 드러 내려고 했다”
“당시 서구에 일본이 아시아의 문명 제국으로 자리를 굳혔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면서 식민지 조선에는 조선의 고유문물을 보호 앙양하는 문화적
통치의 시책을 과시 하는 성격을 지녔다며 비천상의 제작 을 통해 조선 미술
은 모호한 동양화 장르, 동양의 미술로 흡수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분석했다.”
“비천 은 한국인의 시각에서는 불편하고 마뜩잖은 느낌을 주는 미술 유산 일 것이다.
하지만, 김영순씨의 지적처럼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미술관 전시가 이 땅에서
처음으로 고대 부터 근대 까지 미술유산을 한데 모은 계기가 됐고, 이를 통해
동양화, 서양화, 조각의 장르 개념 이 처음 제시되었다는 점 도....... 뚜렷한 역사다. ”
내 개인적으로 무덤의 벽화를 본 것은 중국과 일본에서 인데 오래 전에 선양에서
지안(集安 집안) 에 이르러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호태왕릉과 장수왕의 무덤인
장군총 내부에는 별로 볼게 없었지만, 오회분 5호묘를 찾으니 무용총과
각저총이 개방이 안되는 관계로 이곳이 고분 벽화를 볼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습니다.
30위안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니 예전에는 새로 낸 철문을 통해 무덤 내부로 들어가서 직접
관람을 했다지만 이제는 무덤의 훼손을 막기위해 실제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마치 병원의 내시경 수술 처럼 능 안의 카메라를 통해서 별도 건물에서 보는 식이었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비가 내리며 벼락이 치는 관계로 이마저 볼 수가 없다는지라 벽에
걸린 10여장의 벽화사진을 촬영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 밖에 없어 아쉬웠던 기억이
나는데 벽화가 너무나도 완전한 것을 보니... 채색을 다시 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로 벽화를 본 것은 일본 나라현 나라시 남쪽 아스카(飛鳥 비조, 明日香村 명일향촌) 의
타카마쓰 고분 高松古墳(고송고분) 으로 일본에서 야마토(大和 대화) 왕조가 들어선 땅입니다.
규슈로 건너가 왜 소국들을 통합한 김해 가야왕(스진? 숭신)의 후손인“호무타와케(오진, 응신)” 가
392년부터 왜군을 이끌고 한반도로 나와 김해가야 및 아라가야와 연합해 신라 수도 서라벌
을 포위해서 함락 직전에 광개토대왕이 내려 보낸 5만 고구려군에 패해 종발성(김해)이 함락됩니다.
서기 400년에 고구려군에 패한 김해가야인들이 왜군과 함께 대거 왜국으로 도망쳐서는
규슈에서 세력을 규합한후 세토나이카이를 지나 오사카 남쪽에 상륙해 현지 세력을
제압하고 동남쪽 가시하라에 야마토 大和(대화) 왕조를 건설한후 거대한 가시하라신궁
橿原神宮 을 세웠으며 왕릉도 많은데... 후손들은 아스카로 수도를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왜의 역사”는 이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서기 57년 중국 한(漢)나라로 부터 “왜노국왕”
이라는 금인을 받은 왜노국과 서기 238년 히미코의 야마대국, 그리고 웅습 등 그 이전
부터 큐슈 지방에 군소국가가 있었지만 통일 왕조로는 야마토 大和(대화) 왕조가 처음입니다.
서기 476년 서울의 한성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멸망당할 때 구원군을 요청하러 일본에
온 목리만치의 후손을 후일 왜국에서는 소가씨 蘇我 (소아만치) 라고 하니 그 후손은 소아만치
- 소아한자 - 소아고려.... 소아도목 - 소아마자(우마코) - 소아하이(에미시) - 소아입록(이루카) 에
이르는 것으로 불교를 받아들이기 위해 모노노베(物部)씨와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기반을 닦습니다.
일본왕 아키히토가 125대 인데, 현존하는 아스카 유적에서 소가씨가 세력을 떨치던
당시의 천황(일왕) 계보로는 29대 긴메이(欽明)천황(일왕) - 30대 비타츠(敏達)
천황(일왕) - 31대 요메이(用明)천황(일왕) - 32대 스슌(崇峻) 일왕에 해당 합니다.
소가씨의 후손에 소아도목은 백제성왕의 외손주인 긴메이 천황(일왕)에게 두딸 견염원
과 소시군을 시집보내고 비타쓰와 요메이 천황(일왕)에게도 딸을 출가시키며
그아들 소아마자도 딸을 스슌천황(일왕)에게 출가시키는등 외척으로 왜국의
조정을 장악 하고 천황(일왕) 을 제마음대로 폐위하고 죽이는 등.... 횡포를 부립니다.
이시부타이 石舞臺 (석무대, 390 개의 돌로 만든 2,300 톤 규모의 소아마자의 무덤) 에
도착해 지하로 내려가서 보면 무덤을 큰 바위로 육면체로 조성한후, 흙으로
봉분을 높이쌓고 거기다 깊은 해자를 파서 물을 채운 후 잡인의 침입을 막았다고 봅니다.
후일 소가 이루카가 천황(일왕)을 죽이고 세우는등, 횡포가 극에 달하자 마침내 645년
중신 가마타리가 마침 왜국을 방문 (고구려 - 백제 연합군을 저지하기 위한
원군 요청목적) 한 신라의 사신 김춘추 로 부터 훈수(?)를 받아...... 황태자
나카노오에와 손을 잡고 백제계인 소가씨를 몰살 시킨후 “대화개신”을 했다고 합니다.
소가씨 몰락 이후 사람들이 이 묘 이시부타이를 훼손했다고 하며 가마타리는
이 공으로 천황(일왕)으로 부터“후지와라(藤)”성씨를 하사 받아 귀족가문을
이루어 후일 나라시대와 교토 시대 초기에 천황(일왕)을 쥐락펴락 하게 됩니다.
인근에 고겐지 こうげんじ 向原寺 (향원사, 백제 성왕이 보내온 불상 2구를 소아도목이 집에
모신 곳으로 주지는 소가씨의 후손이며 옆에는 소아만치의 집터를 발굴중임) 가 있습니다.
또 근처에는 오카데라 おかでら 岡寺 ( 강사, 689년 백제 의연스님이 창건하고 왕인박사
의 후손인 행기와 양변을 제자로 가르치니 양변은 나라 동대사를 창건하고 화엄종
의 시조)와 백제대불을 모신 일본 최초의 절이라는 아스카사가 있는데 오사카
사천왕사와 함께 일본 최초의 절 타이틀을 다투는데 아스카사가 처음인 것이 맞습니다.
아스카역에 내려서는 우선 인포메이션센타 (飛鳥 びとの 館) 에서 한글 지도를 얻은 다음
광장에 오직 한 대뿐인 택시로 다가가 기사와 교섭하는데 표에 보니 택시 1시간
대절료가 4,500엔 이라 달리 애기할 것도 없는데..... 아니면 자전거를 빌릴수도 있습니다.
우선 남쪽으로 기토라 キトラ 古墳 에 이르니 고분은 폐쇄되어 들어 가지는 못하고 사진만 찍는데
고분 석실 “천문도” 가 7세기 고구려의 수도 평양의 별자리를 섬세하게 나타내어 화제가 되었던
곳으로 무덤의 주인이 고구려인 이거나... 아니면 무덤 제작자가 고구려 사람 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어 타카마쓰고분 高松古墳 에 이르러 무덤에서 50m 아래쪽에 건축한 벽화관 壁畵館
에 들러 일본 최초로 발굴된 고구려식 벽화고분을 보는데..... 고분의
여인들의 옷 모습과 색상이 평양의 고구려고분과 너무나도 흡사하여 놀란다고 합니다.
벽화관에도 중국 및 고구려 고분과 비교하는 사진이 있어서, 적어도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 유사함에 놀라는 것이니.... 이 박물관에는 적어도 역사 왜곡이란 없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2번째로 벽화를 본 곳은 무덤은 아니고 오다 노부나가가 비와호수에 쌓은 아즈치성
(安土城) 아래에 만들어진 아즈치성 천주 노부나가의 관(安土城天主信長の館) 인데
1992년에 개최된 스페인 세비야 만국 박람회에 출전하기 위해 아즈치성
천수각 5층과 6층 내부를 문헌 기록과 유물로 추정하여 복원한 박물관이라고 합니다.
국제 도시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던 아즈치성 유적은 이제는 전몰하여 빈 터만이 당시의
위용을 증언할 따름이니 성을 점거하고 있던 아케치 히데미쓰가 사카모토성으로
퇴각한 뒤 들어온 노부나가 차남 오다 노부카츠의 방화로 인해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는 아즈치모모야마 安土桃山 (안토도산) 시대는...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추방한 1573년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수립한 1603년 까지를 이르는 시대로 일본에서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본거지는 바로 비와 호숫가의 천수각을 가진 아즈치성 安土城(안토성)
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만년의 거처지가 교토 남쪽 모모야마 桃山(도산) 의
후시미성 伏見城 (복견성) 이었으므로 아즈치모모야마 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합니다.
30년간의 짧은 시대였지만 일본 역사상 중요한 전환기였으며 간파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만
대병을 동원해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범한 시기입니다.오다 · 도요토미 두 무장에 의하여
120여년간 일본 각지에 웅거한 센고쿠 다이묘 戰國大名(전국대명) 가 통일된 결과 근세적 봉건
체제가 정비되고 평화로운 통일 시대인 바쿠항 幕藩(막번) 체제의 기초가 형성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문화면에서는 국내 통일의 기운을 타고 지배자의 활달한 기풍이 반영
되고 체제의 안정화와 금 · 은의 산출로 뒷받침된 모모야마 문화가
출현하여 황금색의 호화스런 성곽과 현란한 벽화 등이 유행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교 가 전해지고 남만문화 가 수입되어 지구의·지도 ·인쇄기 ·의술 등의
과학적 지식이 보급되는 한편 재래 종교의 무력은 소멸하고 무사나 시민들
사이에는 다도(茶道) 가 유행하고 가무가 애호되는 등 문화적 풍조가 높아졌습니다.
기념관 건물에는 벽화로 둘러쌓였으니 삼황오제 로 부터 시작하는데 그들은 신선인양
하늘을 날고 있으니..... 3황은 복희씨(伏羲氏) · 신농씨(神農氏) · 여와씨(女媧氏)
를 말하는데 또는 여와씨는 수인씨(燧人氏) 나 축융씨 (祝融氏) 로 기록되기도 합니다.
복희씨 는 사람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신농씨 는 농사법을 전해주었고
여와씨는 인간을 창조 하였다는데 사마천(司馬遷) 은 3황의 전설을 믿을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는지‘사기(史記)’의 기술을 오제본기 (五帝本紀) 에서 시작합니다.
5제는 중국인의 조상이라 일컬어지는 황제(黃帝) 와 전욱(顓頊) · 제곡(帝嚳) ·요(堯) · 순(舜) 이니
진(秦)나라를 세워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의 황제(皇帝) 라는 호칭은 여기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석가여래(불교) 에다가 주(周)나라를 건국한 문왕과 주공 그리고 공자(유교)
와 공자 문하의 10철, 및 노자(도교) 가 함께 어우러진 것이 특이해 보입니다.
후쯔카(伏羲氏 복희씨)의 가슴에 그려진 태극과 8괘 가 눈길을 끄는데 왕필은 복희씨가
황허강 黃河 에서 나온 용마(龍馬) 의 등에 있는 도형을 보고 계시를 얻어
천문지리를 살피고 만물의 변화를 고찰하여 처음으로 "팔괘(八卦)" 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복희씨가 8괘" 를 만들고 문왕이 64괘를 만들었다고 하며
마융은 괘사는 문왕이 만들고 효사는 주공이, 십익은 공자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중국과 한국 및 일본등 동양사상의 원류는 음양오행설 곧 주역 이니 역은 양(陽)
과 음(陰)의 이원론 으로 이루어지는데 하늘은 양, 땅은 음, 해는 양,
달은 음, 모든 사물과 현상은 양·음으로 구분되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달은 차면 다시 기울기 시작하고, 여름이 가면 다시 가을· 겨울이 오는 현상은 끊임없이
변하나 그 "원칙은 영원불변" 한 것이니 인간사에 적용시켜 비교해 풀이한
것이 易(역) 인데 중국에서는 아침에 사람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태극권”운동을 합니다.
우리 국기 "태극기의 태극" 은 고대 중국에서 발생한 음양오행술 의 기본으로
주역에 보면 “역(易)에 태극 太極 이 있으니 음양을 낳는다” 라고
했는데 중국인들의 생활에 면면히 이어져 오는 중국인의 오랜 전통 인 것입니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 는 도일하는 배에서 일본주재 영국 영사가 국기가 있어야 된다고
하자 저 태극을 떠올리고는 일본인 선장의 조언을 받아들여 8괘중 4괘를 생략한
태극기 를 고안해 1882년 9월 25일 고베 여관 지붕에 게양하니 태극기 의 탄생 입니다.
박영효는 후쿠자와 유기치 를 만나 신문에 대한 조언을 받고 후쿠자와가 운영하는 시사신보
직원 이노우에 를 대동 귀국해 이듬해인 1883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를
발간하는데 후쿠자와는 서양식 금속활자와 윤전기에 잉크와 종이 까지 주선해 주었습니다.
문제는 오다 노부나가 가 그의 궁전에 왜 이런 인물들을 그렸느냐 하는 "의도" 인데 이는
동방세계가 탄생해 인류가 걸어온 선현들을 모두 나타낸 것이니.... 그럼 120년 전란의
세월을 끝내고 선현의 맥을 이어 일본땅에 이상세계를 건설 한다는 포부를 품은 것일까요?
오다 노부나가는 미노국(기후현)을 차지한후 1567년에 기후 岐阜 로 이름을 바꾸었으니
이는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산인 주나라 기산(岐山) 과 공자가 태어난 곳 그러니까
곡부(曲阜) 에서 각각 따온 것으로...... 이름을 기후성으로 고치고 본거지로 삼게 됩니다.
그러고는 “천하포무(天下布武)”라는 인장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니 직역하자면 “ 세상을
무(武)로 덮겠다” 는 뜻인데 이는 자신의 힘으로 천하를 손에 넣겠다는 뜻 이니 어쩌면
노부나가는 통일을 넘어 천황(일왕)에 오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무로마치 막부에서 내리는 관직을 거부했고 천황(일왕)이 주는 관직도
받지 않았으니 오로지 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과업을 달성하겠다" 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마음속에 이미 자신은 그들 위에 서겠다는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게 무력으로만 되는 일은 아닌지라 오다 노부나가는 중국
주나라의 건국이며 유교, 불교 및 도교 를 아우르는 그런 세계를 만들고 싶어했는지
모르겠는데..... 가톨릭 수사 지오바니 니콜로 가 16세기 말에 그린 초상이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