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포항은 옛 영일현 북쪽 바닷가 작은 고을이었다. 경주부 동쪽 해안과 인접한 영일현은 지형적으로 해풍이 심하고 습기가 많았다. 해안가는 백사장과 갯벌, 암반 지대가 많았다. 농사를 짓거나 사람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생산력은 고기잡이, 소금생산이 주류였고 극히 농산물 생산으로 생계를 이었다.
고려 말 우리나라 해안 삼면은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렸다. 약탈은 공민왕20년(1371년)부터 우왕(1375∼1387년)대까지 극에 달했다. 해안 고을 영일현도 예외가 아니었다. 백성들이 왜구의 등쌀을 피해 달아나는 바람에 해안가 고을은 무인지대로 변했다. 왜구의 피해가 가장 처참했던 해는 1380∼1381년경이었다. 이때 영일현 해안은 연이은 약탈로 피해가 엄청났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고려 우왕13년(1379년) 왜구 침탈을 막기 위해 영일현 해안에 성곽을 쌓고 수군과 군선을 주둔시킨다. 위치는 영일현과 흥해군 경계지점 바닷가 ‘통양포’로 기록돼 있다. 오늘날 경북 포항시 북구 두호동에서 흥해읍 죽천동 해안을 아우른다. 지금도 이 일대는 당시 쌓은 ‘통양포수군만호진성‘(이하 통양포진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진성은 국경이나 해안가 등 국방상 요지마다 축성한 군사적 성격의 성곽이다. 통양포 일대는 해안을 따라 높은 절벽이 길게 이어져 있다. 해안가 절벽은 바다에서 쳐들어오는 외적에게 난공불락의 성벽이나 다름없다. 통양포진성 위치는 천혜의 방어망으로 절벽이 바다를 가로막고 있다. 절벽을 따라 뻗은 산능선은 성벽보다 더 튼튼한 방어벽이 된다. 성 안에는 너른 대지가 펼쳐져 있고 식수원 저수지가 자리해 군사 장기 주둔지로 손색이 없다.
당시 고려는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이 지배하고 있었다. 수군진성 최고책임자는 몽골 계급 체계를 모방한 종4품 ‘수군만호’였다. 이에 따라 통양포진성은 초기 수군만호진성으로 불리게 된다. 만호, 천호, 백호는 지역을 관할하는 몽골 민가 수를 표시한 직책이었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이와 관계없이 군부대를 지휘하는 장수의 품계로 변했다. 이 품계는 고려 말 조선 초 육군보다 수군에서 더 오래 유지됐다.
국방력을 강화하던 조선 세조 때 군사관제가 개편된다. 이때 수군만호는 수군첨절제사로 바뀐다. 수군첨절제사는 줄여서 ‘첨사’라고도 부른다. 조선 세종2년 진관체제가 수립된다. 이에 따라 수군 진영은 규모에 따라 주진, 거진, 제진 등으로 편성된다. 수군첨사는 중간규모 거진에 파견된 지휘관이었다. 주 임무는 왜구 방어와 각 포구 제진 군사들의 통제와 관리였다. 그밖에 세곡선 조운로와 궁궐 진상품 전달 해로 보호 관리 등도 포함됐다. 휘하에 도만호, 만호, 부만호, 천호, 부천호 등이 파견됐다고 한다.
수군첨사는 세조12년(1466년) 관제를 정비할 때 고려후기에서 조선 초까지 존립해왔던 수군만호를 개칭한 품계다. 이는 1895년 군제개편 때까지 존립한다. 통양포 수군만호진성은 조선 초기 만호가 첨사로 바뀌면서 수군첨사진성이 된다. 규모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일정기간 왜구 감시와 방어 등 제 역할을 하면서 존속한다. 1425년 간행된 ‘경상도지리지’에 따르면 통양포수군첨사진성에는 병선 8척과 수군 218명이 주둔했다.
통양포는 지금도 그렇지만 해풍이 심하다. 이에 군선 정박 등이 어려워 수군진성의 이전이 거론되다 조선 중종5년 (1510년) 북쪽 6km 가량 떨어진 칠포로 옮긴다. 칠포에는 당시 쌓은 성곽 흔적이 남아있다. 중종5년(1510년) 시작해 7년 뒤 완공했다는 칠포진성이다. 축성 시기는 삼포왜란 발발 시기와 맞물린다. 칠포진성 또한 일본에 대한 경계 강화 조치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후 왜 선단이 주로 남해안을 약탈하면서 동해안 방어 기능은 점차 줄어든다. 칠포진성은 초기 통양포진성으로 불리었기 때문에 규모가 그대로 진성이었다. 그러나 이후 행영이 자리하는 영성으로 바뀌게 된다.
영일만과 경북 동해안을 한때 방어했던 통양포진성은 칠포이전 후 방치된다. 그러나 해병부대가 해안 감시초소 등을 운용하며 민간인 출입을 금지해 극히 일부나마 보존됐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지금은 데크가 설치돼 시민 휴식공간으로 개방돼 있다. 그러나 성안에는 민간인 채전 등 개간이 이뤄져 윤곽과 형태를 분간하기 어렵다.
통양포진성은 경북 포항시 북구 여남동 뒷산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데크를 따라 올라가 오른쪽 길을 따라 걸으면 절벽 끝을 따라 토축 흔적이 나온다. 절벽을 방어망으로 삼아 쌓은 여장(성가퀴) 흔적이다. 높이 50∼60cm가량 토축이 길게 이어진다. 고려조 흔한 성곽 축조방식인 토성 흔적이 엿보인다. 소나무 군락이 가리고 있지만 바다 방향 바깥은 깎아지른 절벽이다. 외적이 기어오르기에 만만찮아 보인다.
해안 성곽은 바다를 해자로 삼고 절벽을 체성으로 삼는다. 절벽은 따로 성벽을 쌓을 필요가 없는 지형이기 때문이다. 다만 계곡과 하천이 바다 만나는 저지대에는 석축을 쌓아야 한다. 통양포진성은 이러한 축성원칙에 충실하다. 절벽 안쪽에 회곽로가 있다. 지휘관 순시 또는 군인들이 물자를 옮기며 사용한 길이다. 지금은 시민 둘레 길로 이용되고 있다. 발을 잘못 내디디면 위험한지 양쪽에 줄로 이은 경계용 말뚝이 박혀 있다.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좌우로 시누대숲이 이어진다. 시누대는 화살을 제작하는 대나무다. 성곽 축조 당시 인위적으로 심은 것이 분명하다.
회곽로 끝 언덕배기에 1983년 세운 여남갑등대가 있다. 성곽이 제 역할을 할 즈음 외적을 감시하던 점장대 자리가 아닌가 싶다. 등대에서 북쪽 평지를 향해 회곽로가 낮아진다. 바로 아래 바다로 트인 공간과 만난다. 성곽이 활용될 당시 성문 터가 아마 이쯤일 것 같다. 바다에는 언제고 출동준비를 마친 군선이 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옆에 북서쪽 산자락을 타고 올라가는 옛 체성이 있다. 체성은 전형적인 성곽 석축이다. 규모는 높이 45m 폭 6m 길이 50m 가량이다. 인공적인 노력을 기울여 축성한 흔적이 역력하다.
성안에 넓은 평탄지가 많다. 지휘소나 무기를 보관하던 군기고, 양곡창고, 숙소 등이 있었음직하다. 체성 안 남서쪽으로 너른 산길이 나 있다. 이 길 바로 옆에 넓은 저수지가 보인다. 성곽 안 필수요건은 식수 확보다. 사방을 적이 에워싸 장기 농성 시 가장 필요하다. 저수지 옆으로 산자락을 타고 올라가는 길이 나 있고 잠시 후 고개가 나온다. 고개 마루에 올라서니 주민들이 개간한 채전이 가로막는다. 채전 가운데 좁은 밭둑을 타고 나오니 다시 처음 올라온 계단 끝 지점이다. 저 멀리 남쪽으로 호미곶과 영일만, 남쪽으로 포항제철소가 바라다 보인다.
출처 : 대경일보(https://www.d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