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오항녕 역사학자]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①
(☞연재 지난회 바로 가기 : 알고도 가는 길 ⑥)
못 외우겠어요!
역사 공부를 좋아하는 분들은 해당 사항이 없지만, 고민은 역시 '역사' 하면, 머리가 아픈 분들에게 쏠리게 마련이다. '역사'에 고개를 젓는 이유는 대부분 '머리가 아파서'다. 외울 것이 많다는 것이다. 관직, 이름, 연도 등등. 공감한다. 역사 공부를 업으로 삼고는 있는 필자도 그러한데, 일반 독자들은 어떠하겠는가.
나는 학과 강의든 특강이든 맨 먼저 꼭 공지하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말하는 연도는 나중에 반드시 확인하고 인용하라'는 것이다. 그렇다. 난 이상하게 연도나 사람 이름을 외우지 못한다. 30년 넘게 역사학을 전공하고 있지만, 실로 내가 기억하는 사건의 발생연도는 몇 개 되지 않는다. 나는 주자(朱子 송나라 주희(朱熹))라는 학자를 존경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그 분의 생몰(生沒) 연도가 기억하기 좋기 때문이다. 1130~1200.(주자 당대에는 이 서기(西紀) 연도가 사용되지 않았다. 연도 역시 인식의 방편이다.)
오죽하면 매 학기 시작할 때면 맨 먼저 하는 일이 사진 달린 출석부를 출력하여 매일 서너 번씩 이름을 소리 내어 낭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 달은 해야 50명 정도 되는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한다. 내 기억력이 나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이런 기억력을 가지고도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다. 물론 손이 고생하긴 한다. 글을 쓸 때면 늘 연표나 인명사전을 뒤적여 확인해야 안심이 되므로 불편하고 효율성이 떨어진다.
물론 여전히 박람강기(博覽强記), 널리 읽고 기억을 잘하는 것이 역사 공부를 할 때 매력적인 장점임은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필자의 경우를 너무 일반화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실상 역사공부나 취미는 '외워야 한다'는 통념은 과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런 의심에는 근거가 없는 게 아니다.
'모든' 역사라는 신화
이렇게 생각해보자. 시장에 있는 모든 물건을 알아야 내가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체를 알아야 역사를 안다고 생각해오지 않았는가? 세계사를 배워야 인류의 역사를 아는 것이고, 국사를 배워야 조선인의 역사를 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각 대학 역사학과마다 고대부터 현대사까지 쭉 교수를 뽑아놓고, 각 시대마다 균등하게 쭉 상품(커리큘럼)을 늘어놓고 고객(학생)들에게 다 알아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단언컨대, 이렇게 전체를 아는 역사는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바보 같은 짓이다. 이름하여 전체론적 오류(holist fallacy). 역사가의 증거는 항상 불완전하고, 관점은 항상 제한되게 마련이다. 역사학도는 '모든' 주제나 사건이 아니라, '어떤' 주제나 사건에 관심을 갖는다. 인간의 역사에 대한 자연스러운 호기심 또는 관심을 아예 전체론적 오류로 만들어버린 대표적인 학자는 내가 보기에 헤겔이다. 그의 1822~1831년 역사 강의를 묶은 <역사철학 강의> 서론을 보자.
"식물의 배아가 그 속에 나무의 전체 성질, 과실의 맛과 형태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정신의 최초 발자취 역시 이미 역사 전체를 잠재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동방 제국의 사람들은 정신(das Geist) 또는 인간이, 그 자체로서 자유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들은 다만 한 사람만의 자유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같은 자유는 단순한 자의 횡포, 둔감 또는 단순한 하나의 자연적 우연, 또는 자의에 불과한 열정이다. 따라서 이 한 사람은 전제군주이지 자유로운 성인은 아니다.
자유의 의식이 최초로 생긴 것은 그리스인에게서이고, 따라서 그들은 자유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또 로마인과 마찬가지로 자유라는 것을 알고 있던 데 불과하다. 인간 자체가 자유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이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리스인은 노예를 소유했고 그들의 생활 전체 및 그들의 빛나는 자유의 유지는 노예제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게르만 여러 민족이 비로소 그리스도교 영향을 받고서야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유이고, 정신의 자유야말로 인간의 본질을 이룬다는 의식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 요컨대 세계사란 자유의 의식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 진보를 그 필연성에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역사철학 강의>(김종호 옮김, 삼성출판사 펴냄, 1990) 서론 중. 이해하기 쉽도록 번역을 조금 수정하였다.)
'어떤' 사실만 알면 된다
▲ 전체론의 오류를 퍼뜨린 헤겔. '중국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중국이 존재한다는 사실뿐'이었던 그는 '동양에는 한 사람만 자유로웠다'고 단언할 정도로 용감하기도 했다. |
우리는 헤겔의 역사철학 전체를 논의할 이유도, 시간도 없다. 오늘의 주제는 사실의 의미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주제에 관해서만 다시 확인해보기로 하자. 러셀이 <서양철학사>(최문홍 옮김, 집문당 펴냄, 1982)에서 한 말을 들어보자.
"헤겔이나 다른 많은 철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 우주의 한 부분의 성격 역시, 다른 부분이나 혹은 전체에 대한 관계에 의해 근본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전체에 대한 그 부분의 위치를 설정하지 않고서는 어떤 부분에 대해서도 올바로 진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체에 대한 어떤 부분의 위치란 다른 부분에 의존해 있으므로 전체에 대한 그 부분의 위치에 대한 참된 진술은 동시에 전체에 대한 모든 다른 부분의 위치를 정하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참된 진술은 오직 하나밖에는 없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체의 진리 이외에는 진리가 없게 마련이다." (<서양철학사> 936, 939쪽)
다 알아야 한다는 콤플렉스를 심어준 헤겔은 불행하게도 다 알지 못했다. 또 앞으로도 그런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일 역사학자가 오직 전체 진리만을 말하겠다고 약속했다면 그는 영원히 침묵하겠다고 약속한 것과 같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전체 진리를 말하지 못하는 자신을 경멸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아니면 헤겔처럼 모르면서 아는 척하든지. (이상의 서술은 필자의 <신동아> 2012년 12월호 및 2013년 4월호, '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 원고에서 부분 발췌한 것입니다.)
결국 역사 공부는 자신이 관심 있는 주제나 사건을 탐구하는 데서 시작하여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역사학과라면, 역사학개론, 사료비판, 역사기록과 서술에서 고전이 된 훌륭한 역사서로 커리큘럼을 짜면 된다. 모든 시대에 교수를 배치하는 대신, 이런 커리큘럼을 담당할 교수를 뽑으면 된다.
근대 역사학에서 말하는 '국사(國史)'는 19세기 국민국가와 함께 탄생했다. 그래서 조선의 '국사'와 요즘 말하는 '국사'는 다르다. 전자는 과거를 차곡차곡 정리한 일기 같은 저장기억이고, 후자는 국민국가의 정체성을 위한 기능기억이다. 전자가 본연의 역사라면, 후자는 정치의 시녀를 자처한 역사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진정한 역사연구기관이 되려면 거기서 주관하고 있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폐기해야 하는 이유이다. 국가기관이니까 해도 되나?
'학문의 골짜기(文谷)'라는 호
문곡 김수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애당초 문곡을 통해 본 조선 중기라고 우리의 논의를 제한했을 때부터 조선 중기의 '모든 사실'을 전제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문곡을 통해보는 로드 뷰(road-view)라고 했거니와, 역사란 원래 로드 뷰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곡에 대한 '어떤' 사실만 알면 얼마든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 말은 문곡에 대해 어떤 사실은 꼭 알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범위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그 분야에서 꼭 알아야 하는 정보 이상을 넘어가지 않는다. 정말이다!
혹시 필자가 김수항이라고 했다가, 문곡이라고 했다가 하여 혼동이 있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문곡은 김수항의 호(號)이다.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 불편해서 호라는 게 생겼으리라. 문곡은 '글 골짜기', '학문의 골짜기'라는 뜻이 된다. 대개 호는 주인공이 살던 지명이나 경전의 글귀에서 따오는 경우가 많다.
죽은 다음에 조정에서 내려주는 시호(諡號)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 문(文) 자가 들어가면 영예로 친다. 그래서 퇴계 이황은 시호가 문순(文純), 즉 '학문이 순정하다'는 뜻이고, 율곡 이이는 문성(文成), 곧 '학문이 완성하였다'는 뜻이다.
무신(武臣)은 충(忠) 자가 들어가면 영예로 치는데, 이순신 장군의 시호가 충무(忠武)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간다. 비슷한 예로, 의병장이었던 김덕령(金德齡) 장군의 시호는 충장(忠壯)이었다.
문곡은 호에도 '문' 자가 들어갔지만, 그의 시호도 문충(文忠)으로 문 자가 또 들어간데다가 무신의 영예인 충 자까지 겸하였다. 아마 조선시대에 문형(文衡), '학문의 저울'이라고 불렸던 대제학을 지냈기 때문에 문 자가 시호에 들어갔으리라. 충 자가 들어간 것은 몇 차례에 걸쳐 우리가 다룬 그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희빈 장씨의 득세와 함께 시작된 사화(士禍)인 기사환국(己巳換局), 기사년(1689, 숙종15)에 일어난 변칙과 혼란의 상황에서 '목을 내놓고 했던 직언'을 기리는 글자로 충을 택했을 것이다.
'구지'라는 자(字)
친한 친구 사이에서는 자(字)를 부른다. 대개 어른이 되는 관례(冠禮)를 치르면서 자를 짓게 되는데, 문곡의 자는 구지(久之)였다. 자는 호보다 조금 가볍고 편한 느낌을 준다.
김수항의 자가 구지가 된 까닭은 그의 이름 때문일 것이다. 수항, 목숨 수(壽), 늘(항상) 항(恒)이다. 이 항 자에서 빌려와 '오래 간다'는 뜻의 구(久) 자를 가져다 자를 지었다. 지(之) 자는 별 의미 없이 글자 수를 맞추기 위한 구색이다.
이런 방식으로 문곡의 큰형인 곡운(谷雲) 김수증(1624~1701)과 작은형 퇴우당(退憂堂) 김수흥의 자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김수증의 자는 연지(延之)이고, 김수흥의 자는 기지(起之)이다. 김수증의 증(增) 자가 늘어난다는 뜻이니까 뜻이 비슷한 연(延), 늘어질 연 자를 쓴 것이고, 김수흥의 흥(興) 자가 일어난다는 뜻이니까 뜻이 비슷한 기(起), 일어날 기 자를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이야 자나 호를 부르는 것이 풍습이었으니까 그렇다 치고, 필자처럼 기억력이 좋지 않거나 역사는 외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이름 외에 자나 호까지 외워야 하는 것이 끔찍한 장벽일 수도 있다. 그래도 위와 같이 호나 자를 짓는 이치를 알면 기억하는 데 적잖이 도움이 된다.
참고삼아 예를 들어보자. 세조의 찬탈에 저항하여 한양을 버리고 은둔했던 지사(志士)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이름부터 재미있다. 시습(時習), <논어>의 첫머리에 나오는 "배우고 제때 익히면 엄청 즐겁다[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구절에서 글자를 따다가 이름을 지은 것이다. 매월당의 자는 열경(悅卿)인데, 경은 듣기 좋으라고 쓴 글자이고, 이 자의 포인트는 열(悅) 자에 있다. '불역열호'라고 할 때, 설(說) 자를 열로 읽는데, 이 글자가 기쁠 열(悅)과 같은 글자이다. 매월당이 자를 열경으로 한 것은 '시습'이라는 이름을 가져온 전거에서 짝을 맞춘 것이다.
문곡에 대한 '어떤' 정보
처음 만나는 남녀가 호구(戶口) 조사부터 하는 경우가 많듯이, 호구 조사는 서로를 이해하는 데 기초자료가 된다. 상대방이 시공간적으로 어디에 놓여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가계도(家系圖)는 대상 인물에 대한 간략한 좌표를 보여준다.
▲ 가계도 출처 : <안동김씨세보 安東金氏世譜>(화상사 펴냄, 1982). |
위의 표는 김수항의 가계도이다. 할아버지인 김상헌까지만 보여주었다. 아들 6명에 대한 얘기는 지난 호에서 했으므로 참고만 하면 된다. 당장은 대략 김상헌부터 김수항의 어린 시절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니까, 기억해둘 사실은 몇 개 되지 않고 그때그때 가계도를 참고하면 사건의 전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
차차 느끼게 되겠지만 문곡은 아버지 김광찬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고, 대개 할아버지 김상헌에 대한 언급이 많다. 많을 뿐 아니라, 그의 글 곳곳에서 할아버지의 영향력이 눈에 띤다. 셋째 아들 삼연(三淵) 김창흡이 편찬한 문집 <문곡집> 맨 앞에 실린 글이 문곡이 15살 되던 해인 계미년(1643, 인조22)에 지은 '할아버님이 중국에 가신 것을 그리워하다[憶王父西行]'라는 시이다.
할아버님이 중국으로 가신 후 王父西行後
해가 벌써 세 번이나 바뀌었기에 星霜已變三
하늘가의 이별이 괴로우니 天涯離別苦
슬하에서 받던 사랑 그립구나 膝下憶分甘
밤이면 꿈은 늘 북으로 가고 夜夢長歸北
가을이라 기러기 또 남으로 향하거늘 秋鴻又向南
까마귀 머리 아직 희어지지 않았으니 烏頭猶未白
어느 날에나 떠나간 말이 돌아올까? 幾日返征驂
(까마귀 (……) 않았으니 : 전국시대(戰國時代) 연(燕)나라 태자 단(丹)이 진(秦)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귀국을 요청하자, 진왕(秦王)이 말하기를 "까마귀가 희게 되고 말에 뿔이 난다면 돌아갈 수 있으리라."라고 답하였는데, 실제로 그런 현상이 일어나 태자는 귀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 <논형論衡 감허感虛>)
이 시는 병자호란(1636, 인조15) 뒤 청나라와 화친(和親)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심양(瀋陽)에 잡혀가 있던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지은 시이다. 이제 문곡의 할아버지 청음 김상헌부터 얘기를 풀어가 보자. 문곡에 태어나던 시절의 조선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 문곡이 어려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대략 30년 정도의 기간인데 알아야 할 정보는 몇 가지 안 된다.
계축옥사 : 1613(광해군5) 광해군과 북인이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을 앞세워 역모를 꾸몄다고 모함하여 일으킨 숙청. 이듬해 영창대군은 증살(蒸殺)된다.
인조반정 : 1623(광해군15) 궁궐공사, 거짓 옥사(獄事)로 민생을 파탄내고 정치를 어지럽힌 광해군을 쫓아내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옹립한 사건
정묘호란, 병자호란 : 1627년, 1636년에 후금(청)이 조선을 침략하여 벌어진 전쟁.
▲ 청음 김상헌의 묘소. 문곡의 어린 시절은 청음을 빼고 말하기 어렵다. 물론 당시 조선 사람이나 사회를 이해할 때도 청음은 반드시 거쳐야할 인물이다. ⓒ오항녕 |
오항녕 역사학자 (mal@pressian.com)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②
[프레시안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② :
시대의 아픔, 좌절, 희망 그리고 기상-할아버지 청음 김상헌의 발자취
(☞연재 지난회 바로 가기 :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①)
문곡 김수항의 문집인 <문곡집>의 맨 처음에 실린 시(詩)가 청나라 심양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있던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내용이었음을 지난번에 말하고 나왔다. 문곡 평생 할아버지 청음 김상헌은 그렇게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 영향은 스승 같은 할아버지였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아니다. 청음이 그 시대의 아픔, 좌절, 희망, 기상 같은 것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청음은 1590년(선조 23) 진사(進士)가 되었고, 1596년 임진왜란 중에 실시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 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후 홍문관 관원후보인 홍문록(弘文錄)에 뽑혀 들어갔다. 선조 33년(1600)에 작성된 홍문록에는 인조 이후 조정에서 같이 활동하였고 재상을 지냈던 오윤겸(吳允謙. 호는 추탄(秋灘), 1559(명종14)∼1636(인조14)), 홍서봉(洪瑞鳳. 호는 학곡(鶴谷). 1572(선조5)∼1645(인조23))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기억해둘 인물로는 김제남(金悌男. 1562(명종17)∼1613(광해군5))이 있다. 김제남은 이 홍문록에 들어간 지 2년 뒤인 선조 35년(1602)에 딸이 왕비에 책봉되는 경사를 맞이하는데, 이 왕비가 곧 인목왕후이다. 이 경사가 불과 10년 뒤인 광해군 5년(1613) 비극적인 계축옥사로 이어졌으니, 사람의 일은 장담할 수가 없다. 뒤에 말하겠지만, 김제남은 청음의 사돈이기도 하다.
촉망과 견제를 함께
이렇게 청음은 대표적인 청직(淸職)인 홍문관을 거의 떠나지 않았다. 곧 사간원 정언을 거쳐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는데, 이 무렵 홍여순의 무리들에게 배척당해 오래도록 평범한 직책에 머물러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이 직책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홍여순(洪汝諄)은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대북(大北)을 형성한 인물이었다.
이 무렵 영의정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었는데,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며 관직에서 물러나려고 하였다. 선조는 백사를 만류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렇게 국왕이 신하의 사직 등을 허락하지 않는 답변을 불윤(不允 허락하지 않음) 비답(批答)이라고 하는데, 이 글을 청음이 지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앓던 병이 이제 나았으니 약 효험을 본 것인데, 사직서를 계속 올리니 물러나려는 뜻이 정말 고집스럽도다. 어지러운 환란 속에서 감당하지 못할 나를 두고 경은 어찌 그리도 용감하게 급류에서 벗어나려 하는가. 오늘날 위급한 정세를 생각한다면 대신이 물러나 쉴 때가 못 된다. 한창 치성해지는 북쪽 변방의 근심을 어떻게 대처할 것이며, 급하기만 한 남쪽의 경보(驚報)는 누가 미리 대책을 세울 것인가? 바라건대 경은 이 어려움을 널리 구하라. 나에게 지워진 일을 다 하지 못할까 두렵도다."
윗글에서, '급류에서 용감하게 벗어나려 한다'는 말은 고사가 있다. 중국 송나라 때 전약수(錢若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고승(高僧)이 전약수를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급류에서 용감히 물러날 사람이다"라고 했다. 뒤에 전약수가 과연 벼슬이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에 이르렀을 때 40세의 나이로 즉시 물러났다. (<송사(宋史) 권266 전약수열전(錢若水列傳)>) 곧 앞날이 창창할 때 미련 없이 과감하게 물러나는 것을 비유한다. 요즘은 개나 소나 다 쓰는 말이 되어버린 '용퇴(勇退)'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
길운절 역적모의 사건
이 해에 청음은 제주에 다녀와야 했다. 제주 안무 어사(濟州安撫御史)의 자격이었다. <선조실록>에는 "김상헌은 전에 전랑(銓郞)으로 있을 때 의논에 변별(辨別)함이 많아 그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이 특별히 김상헌을 명하여 보낸 것이다." 아마 청음이 무슨 일이든 대충 넘어가지 않고 따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러나 제주에 보낸 것은 단순히 이런 형편을 고려해서 취한 조치는 아니었을 것이다. 제주에 안무(安撫), 즉 민심을 안정시키고 어루만지기 위해 파견되었던 것으로, 이는 길운절(吉云節)이라는 사람의 역모 사건을 수습하는 일이었다.
실록에도 이 사건이 어느 정도 나와 있지만, 조선시대 반역 사건에 대한 조사, 심문 기록인 <추안(推案)>을 보면 당시 길운절 사건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아마 임진왜란 뒤 민심이 흉흉한 틈을 타서 발생한 사건으로 보이는데, 사건 자체는 조금 허술하였다.
선산(善山) 사람으로, 자신이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후손이라고 하는 길운절이라는 자가 환속한 승려 소덕유(蘇德裕)라는 자와 함께 제주에 들어갔다가 일을 도모하였다고 한다. 길운절은 제주 대정현 향교에서 묵었는데, 양반이랍시고 그곳 무장(武將)의 여자였던 기생 구생(具生)을 빼앗아 살고 있었다.
길운절이 제주에서 쉽게 일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은 목사(牧使) 성윤문(成允文)이 마침 형장(刑杖)을 엄혹하게 다뤄 크게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를 틈타 선동하여 6월 6일을 기하여 기병(起兵)해서 목사와 서울에서 온 관리들을 다 죽이고 그 군량, 군기(軍器)를 확보하는 한편 전마(戰馬)를 조발하여 바다를 건너 곧바로 한양을 침범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성안에서 무리를 모아 거사를 모의하려는 참이었는데, 그때 마침 길운절이 그의 무리와 몰래 말을 나누는 것을 구생이 엿들었다.
구생이 다그치자, 당초 두 마음을 가지고 있던 길운절은 오히려 자신이 고변자로 나섰던 것이다. 자신은 증거를 확보하여 이들을 고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날짜는 점점 지나가고 증명할 문서는 없어서 마음속으로 걱정이 되어, 사람들이 모이는 곳과 날짜를 꼭 상세히 알아내어 거기서 체포하게끔 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 6월 2일에야 비로소 고변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의 고변은, 잡혀온 사람들의 진술에서 거짓으로 드러났다. 일은 자기가 다 꾸며놓고 마지막에 발을 빼며 남을 고변한 것이었다. 실록의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기록했다. "왜 '고변한 사람 누구를 죽였다'라고 쓰지 않은 것인가. 그 이유는 길운절은 자신이 수악(首惡 역모의 우두머리)으로서 어쩔 수 없게 된 뒤에야 비로소 고변하였으니, 고변한 것은 그의 본뜻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고변한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어사의 장계
이 일로 제주는 적지 않은 사람이 직간접으로 연루되어 한참 어수선하였다. 6월, 7월에 걸쳐 제주와 전라도, 조정에서 길운절 사건을 수습하는 한편, 8월에 청음이 제주에 안무 어사로 내려갔던 바, 11월에 청음은 민심 수습 방안에 관해 장계를 올렸다.
"신이 본주(本州)에 이른 지 한 달이 지났는데, 그 사이에 하루 이틀 이외에는 비가 오지 않는 날이 없고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없었으나 바다 섬의 기후가 본래 이와 같은 것으로 괴이할 것이 없다고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오래 지난 뒤에야 유생과 노인들에게 물어보았더니 "금년 9월 이후부터 항상 흐리고 계속 비가 내려 여러 달 개이지 않아 여름철보다 더 심하다. 지금 거센 바람이 크게 일어 밤낮 그치지 아니하니 이는 실로 근고(近古)에 없던 재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직접 본 바로는 도로가 진창이 되어 봄·여름의 장마철과 같고 들판에 가을 곡식이 손상되어 태반이나 잎이 시들고 썩어 문드러져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리하여 농민들은 손을 놓고 곳곳에서 울부짖고 있으니 굶주려서 곤핍한 상황은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가을인데도 이러하니 어떻게 해를 보낼 수 있겠습니까. 이곳 백성들의 처지가 실로 애처롭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이번 역옥(逆獄)을 다루는 데 있어 조정에서 아무리 공평하게 판결하려고 했더라도 연루된 자에 대해 오늘날까지 판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더러 억울한 죄가 있는 사람도 있고, 그 중 연좌된 많은 사람이 다 역모에 참여한 자인 줄도 모르는데 여러 날 동안 가두어 두어 장차 숨이 끊어져 죽으려는 상황이기 때문에 섬 안의 인심이 다 복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괴이한 기운이 재이를 초래하여 비상한 재앙이 내려진 것인 듯합니다. 그 허물의 소재는 감히 알 수 없으나 앞으로 무휼(撫恤 위로하고 챙겨줌)하는 정책은 조정에서 각별히 진념하여 너그러이 용서하는 은전을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살아남은 백성이 남은 목숨을 보전할 수 있고 또한 나라가 남쪽 지방을 돌아보는 근심을 조금은 풀 수 있을 것입니다."
고산으로, 경성으로
제주에서 돌아온 뒤 조정 복귀는 수월하지 못하였다. 청음을 견제하던 북인 당국자는 함경도 고산(高山)의 찰방(察訪)으로 내보냈다. 정인홍(鄭仁弘)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탄핵하였는데, 그 당여(黨與)가 김상헌도 함께 연루시켰던 것이다. <선조수정실록>에는, "김상헌은 강직하고 고아하여 세상의 존대를 받았다. 시론(時論)이 그를 꺼려 탐라(耽羅 제주)에서 돌아오자 곧 북쪽 변경의 마관(馬官 찰방)에 제수했으니, 질투하여 배척함이 심하다 하겠다"고 했다.
청음은 3년 뒤 다시 경성 판관(鏡城判官)이 되었다. 계속 함경도 근무였던 셈이다.(<선조수정실록> 권39 38년 8월 1일) 청음이 처음 인사권이 있는 전랑(銓郞)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이조 참판 기자헌이 같은 소북(小北) 계열인 유영경(柳永慶)을 대사헌으로 의망하려 하자 청음이 이를 힘써 막았다. 이 때문에 영경의 당이 깊이 유감을 품게 되었다. 얼마 있다가 유영경이 국정(國政)의 전권을 잡자 이 때문에 때를 보아 복수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먼저 청음을 배척하여 고산 찰방으로 삼았다가 파직되어 돌아오자마자 바로 경성 판관으로 보임시켰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모두 분해하며 탄식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덧붙인 대목이 재미있다. <선조수정실록>에 나오는 말이다.
"이 대목의 기록은 <실록>(곧 앞서 편찬한 <선조실록>)을 살피건대,
"김상헌이 일찍이 전랑이 되었을 때 일을 임의로 처리하니, 기자헌이 유영경을 끌어들여 응견(鷹犬 사냥할 때 쓰는 매나 개 같은 심복)을 삼으려 하였는데, 김상헌에게 저지당했다."
하였으니, 그 강직하고 방정하여 흔들리지 않았던 것을 여기에서 또한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에 미움을 받은 것이다. <선조실록>에 또,
"좌의정 기자헌은 성품이 너그럽고 일찍부터 덕망을 지니고 있었다."
하였는데, 기자헌이 <실록>을 감수할 때 자기 속셈대로 감행하면서 이토록 조금도 거리낌 없이 하였으니 주벌(誅伐)해도 모자라다 하겠다."
실제로 기록을 찾아보면 청음을 고산 찰방으로 임명할 당시, <선조실록>에는 기자헌이 홍문관 부제학으로 임명된 기록이 함께 기재되어 있다. 거기에는 기자헌과 김상헌에 대한 인물평도 함께 들어 있다.(<선조실록>권147권 35년 윤2월 13일)
기자헌(奇自獻) : 사람됨이 깊고 침착하며 지모가 있었다.
김상헌(金尙憲) : 위인이 교만하고 망령되었다.
기자헌은 방납(防納), 즉 특산물을 대신 납부하는 공물 브로커로 재산을 축적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민생 안정과 재정 확보에 도움이 되던 대동법(大同法) 개혁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4년 뒤 광해군은 이런 인물을 좌의정에 앉혔다.
은근히 멋진 사람들
이런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엇갈린 평가는 설명이 필요하다.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은 인물 평가의 불공정성 때문에 인조반정 이후 바로 수정 논의가 시작되었다.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던 이이첨, 기자헌 등 몇 사람을 빼고는 서인, 남인 할 것 없이 모두 비난, 폄하 일색이었기 때문에 공정성에 의심을 샀다. 또 사료가 부실한 것도 하나의 큰 이유였다.
그러나 재정이 부족하여 효종 때나 완성되었다. 인조 내내 광해군 때 파탄 낸 재정 때문에 고생했다. 그 여파로 북쪽 후금(청)에 대응 또한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농업생산력 이외에는 기댈 데가 없는 경제구조 아래서 피치 못할 상황이었다. 결국 <광해군일기>도 간행하지 못한 채 초고(중초, 정초)로 보관하기에 이르렀고, 효종 때는 <인조실록> 편찬에 밀려 <선조수정실록>은 효종 8년에야 완성되었다.
그런데 학계 일각에서는 <선조실록>을 서인(西人)이 수정하여 <선조수정실록>을 만들었기 때문에 <선조수정실록>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확한 논증이라면, '누가' 만들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 가 아니라, '어떤 부분이 어떤 이유로' 믿을 수 없다, 고 말해야 옳다.
우리가 아는 퇴계 이황, 고봉 기대승의 선조 초반 경연 강의, 의병 항쟁, 이순신 장군의 해전 등 많은 기록이 <선조수정실록>에 나온다. <선조수정실록>이 없었으면 이순신 장군의 해전 활약상을 매우 제한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선조수정실록> 편찬자들이 <선조수정실록>을 완성한 뒤에도 <선조실록>을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나 같으면 싹 없애버렸을 텐데…. 이유? 어떤 실록이 더 진실인지는 편찬자 자신들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판단하는 것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이 사람들, 은근히 멋진 데가 있었다.
[프레시안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② :
시대의 아픔, 좌절, 희망 그리고 기상-할아버지 청음 김상헌의 발자취
(☞연재 지난회 바로 가기 :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①)
문곡 김수항의 문집인 <문곡집>의 맨 처음에 실린 시(詩)가 청나라 심양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있던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내용이었음을 지난번에 말하고 나왔다. 문곡 평생 할아버지 청음 김상헌은 그렇게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 영향은 스승 같은 할아버지였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아니다. 청음이 그 시대의 아픔, 좌절, 희망, 기상 같은 것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청음은 1590년(선조 23) 진사(進士)가 되었고, 1596년 임진왜란 중에 실시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 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후 홍문관 관원후보인 홍문록(弘文錄)에 뽑혀 들어갔다. 선조 33년(1600)에 작성된 홍문록에는 인조 이후 조정에서 같이 활동하였고 재상을 지냈던 오윤겸(吳允謙. 호는 추탄(秋灘), 1559(명종14)∼1636(인조14)), 홍서봉(洪瑞鳳. 호는 학곡(鶴谷). 1572(선조5)∼1645(인조23))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기억해둘 인물로는 김제남(金悌男. 1562(명종17)∼1613(광해군5))이 있다. 김제남은 이 홍문록에 들어간 지 2년 뒤인 선조 35년(1602)에 딸이 왕비에 책봉되는 경사를 맞이하는데, 이 왕비가 곧 인목왕후이다. 이 경사가 불과 10년 뒤인 광해군 5년(1613) 비극적인 계축옥사로 이어졌으니, 사람의 일은 장담할 수가 없다. 뒤에 말하겠지만, 김제남은 청음의 사돈이기도 하다.
촉망과 견제를 함께
이렇게 청음은 대표적인 청직(淸職)인 홍문관을 거의 떠나지 않았다. 곧 사간원 정언을 거쳐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는데, 이 무렵 홍여순의 무리들에게 배척당해 오래도록 평범한 직책에 머물러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이 직책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홍여순(洪汝諄)은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대북(大北)을 형성한 인물이었다.
이 무렵 영의정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었는데,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며 관직에서 물러나려고 하였다. 선조는 백사를 만류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렇게 국왕이 신하의 사직 등을 허락하지 않는 답변을 불윤(不允 허락하지 않음) 비답(批答)이라고 하는데, 이 글을 청음이 지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앓던 병이 이제 나았으니 약 효험을 본 것인데, 사직서를 계속 올리니 물러나려는 뜻이 정말 고집스럽도다. 어지러운 환란 속에서 감당하지 못할 나를 두고 경은 어찌 그리도 용감하게 급류에서 벗어나려 하는가. 오늘날 위급한 정세를 생각한다면 대신이 물러나 쉴 때가 못 된다. 한창 치성해지는 북쪽 변방의 근심을 어떻게 대처할 것이며, 급하기만 한 남쪽의 경보(驚報)는 누가 미리 대책을 세울 것인가? 바라건대 경은 이 어려움을 널리 구하라. 나에게 지워진 일을 다 하지 못할까 두렵도다."
윗글에서, '급류에서 용감하게 벗어나려 한다'는 말은 고사가 있다. 중국 송나라 때 전약수(錢若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고승(高僧)이 전약수를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급류에서 용감히 물러날 사람이다"라고 했다. 뒤에 전약수가 과연 벼슬이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에 이르렀을 때 40세의 나이로 즉시 물러났다. (<송사(宋史) 권266 전약수열전(錢若水列傳)>) 곧 앞날이 창창할 때 미련 없이 과감하게 물러나는 것을 비유한다. 요즘은 개나 소나 다 쓰는 말이 되어버린 '용퇴(勇退)'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
길운절 역적모의 사건
이 해에 청음은 제주에 다녀와야 했다. 제주 안무 어사(濟州安撫御史)의 자격이었다. <선조실록>에는 "김상헌은 전에 전랑(銓郞)으로 있을 때 의논에 변별(辨別)함이 많아 그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이 특별히 김상헌을 명하여 보낸 것이다." 아마 청음이 무슨 일이든 대충 넘어가지 않고 따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러나 제주에 보낸 것은 단순히 이런 형편을 고려해서 취한 조치는 아니었을 것이다. 제주에 안무(安撫), 즉 민심을 안정시키고 어루만지기 위해 파견되었던 것으로, 이는 길운절(吉云節)이라는 사람의 역모 사건을 수습하는 일이었다.
실록에도 이 사건이 어느 정도 나와 있지만, 조선시대 반역 사건에 대한 조사, 심문 기록인 <추안(推案)>을 보면 당시 길운절 사건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아마 임진왜란 뒤 민심이 흉흉한 틈을 타서 발생한 사건으로 보이는데, 사건 자체는 조금 허술하였다.
선산(善山) 사람으로, 자신이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후손이라고 하는 길운절이라는 자가 환속한 승려 소덕유(蘇德裕)라는 자와 함께 제주에 들어갔다가 일을 도모하였다고 한다. 길운절은 제주 대정현 향교에서 묵었는데, 양반이랍시고 그곳 무장(武將)의 여자였던 기생 구생(具生)을 빼앗아 살고 있었다.
길운절이 제주에서 쉽게 일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은 목사(牧使) 성윤문(成允文)이 마침 형장(刑杖)을 엄혹하게 다뤄 크게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를 틈타 선동하여 6월 6일을 기하여 기병(起兵)해서 목사와 서울에서 온 관리들을 다 죽이고 그 군량, 군기(軍器)를 확보하는 한편 전마(戰馬)를 조발하여 바다를 건너 곧바로 한양을 침범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성안에서 무리를 모아 거사를 모의하려는 참이었는데, 그때 마침 길운절이 그의 무리와 몰래 말을 나누는 것을 구생이 엿들었다.
구생이 다그치자, 당초 두 마음을 가지고 있던 길운절은 오히려 자신이 고변자로 나섰던 것이다. 자신은 증거를 확보하여 이들을 고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날짜는 점점 지나가고 증명할 문서는 없어서 마음속으로 걱정이 되어, 사람들이 모이는 곳과 날짜를 꼭 상세히 알아내어 거기서 체포하게끔 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 6월 2일에야 비로소 고변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의 고변은, 잡혀온 사람들의 진술에서 거짓으로 드러났다. 일은 자기가 다 꾸며놓고 마지막에 발을 빼며 남을 고변한 것이었다. 실록의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기록했다. "왜 '고변한 사람 누구를 죽였다'라고 쓰지 않은 것인가. 그 이유는 길운절은 자신이 수악(首惡 역모의 우두머리)으로서 어쩔 수 없게 된 뒤에야 비로소 고변하였으니, 고변한 것은 그의 본뜻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고변한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어사의 장계
이 일로 제주는 적지 않은 사람이 직간접으로 연루되어 한참 어수선하였다. 6월, 7월에 걸쳐 제주와 전라도, 조정에서 길운절 사건을 수습하는 한편, 8월에 청음이 제주에 안무 어사로 내려갔던 바, 11월에 청음은 민심 수습 방안에 관해 장계를 올렸다.
"신이 본주(本州)에 이른 지 한 달이 지났는데, 그 사이에 하루 이틀 이외에는 비가 오지 않는 날이 없고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없었으나 바다 섬의 기후가 본래 이와 같은 것으로 괴이할 것이 없다고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오래 지난 뒤에야 유생과 노인들에게 물어보았더니 "금년 9월 이후부터 항상 흐리고 계속 비가 내려 여러 달 개이지 않아 여름철보다 더 심하다. 지금 거센 바람이 크게 일어 밤낮 그치지 아니하니 이는 실로 근고(近古)에 없던 재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직접 본 바로는 도로가 진창이 되어 봄·여름의 장마철과 같고 들판에 가을 곡식이 손상되어 태반이나 잎이 시들고 썩어 문드러져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리하여 농민들은 손을 놓고 곳곳에서 울부짖고 있으니 굶주려서 곤핍한 상황은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가을인데도 이러하니 어떻게 해를 보낼 수 있겠습니까. 이곳 백성들의 처지가 실로 애처롭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이번 역옥(逆獄)을 다루는 데 있어 조정에서 아무리 공평하게 판결하려고 했더라도 연루된 자에 대해 오늘날까지 판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더러 억울한 죄가 있는 사람도 있고, 그 중 연좌된 많은 사람이 다 역모에 참여한 자인 줄도 모르는데 여러 날 동안 가두어 두어 장차 숨이 끊어져 죽으려는 상황이기 때문에 섬 안의 인심이 다 복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괴이한 기운이 재이를 초래하여 비상한 재앙이 내려진 것인 듯합니다. 그 허물의 소재는 감히 알 수 없으나 앞으로 무휼(撫恤 위로하고 챙겨줌)하는 정책은 조정에서 각별히 진념하여 너그러이 용서하는 은전을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살아남은 백성이 남은 목숨을 보전할 수 있고 또한 나라가 남쪽 지방을 돌아보는 근심을 조금은 풀 수 있을 것입니다."
고산으로, 경성으로
제주에서 돌아온 뒤 조정 복귀는 수월하지 못하였다. 청음을 견제하던 북인 당국자는 함경도 고산(高山)의 찰방(察訪)으로 내보냈다. 정인홍(鄭仁弘)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탄핵하였는데, 그 당여(黨與)가 김상헌도 함께 연루시켰던 것이다. <선조수정실록>에는, "김상헌은 강직하고 고아하여 세상의 존대를 받았다. 시론(時論)이 그를 꺼려 탐라(耽羅 제주)에서 돌아오자 곧 북쪽 변경의 마관(馬官 찰방)에 제수했으니, 질투하여 배척함이 심하다 하겠다"고 했다.
청음은 3년 뒤 다시 경성 판관(鏡城判官)이 되었다. 계속 함경도 근무였던 셈이다.(<선조수정실록> 권39 38년 8월 1일) 청음이 처음 인사권이 있는 전랑(銓郞)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이조 참판 기자헌이 같은 소북(小北) 계열인 유영경(柳永慶)을 대사헌으로 의망하려 하자 청음이 이를 힘써 막았다. 이 때문에 영경의 당이 깊이 유감을 품게 되었다. 얼마 있다가 유영경이 국정(國政)의 전권을 잡자 이 때문에 때를 보아 복수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먼저 청음을 배척하여 고산 찰방으로 삼았다가 파직되어 돌아오자마자 바로 경성 판관으로 보임시켰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모두 분해하며 탄식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덧붙인 대목이 재미있다. <선조수정실록>에 나오는 말이다.
"이 대목의 기록은 <실록>(곧 앞서 편찬한 <선조실록>)을 살피건대,
"김상헌이 일찍이 전랑이 되었을 때 일을 임의로 처리하니, 기자헌이 유영경을 끌어들여 응견(鷹犬 사냥할 때 쓰는 매나 개 같은 심복)을 삼으려 하였는데, 김상헌에게 저지당했다."
하였으니, 그 강직하고 방정하여 흔들리지 않았던 것을 여기에서 또한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에 미움을 받은 것이다. <선조실록>에 또,
"좌의정 기자헌은 성품이 너그럽고 일찍부터 덕망을 지니고 있었다."
하였는데, 기자헌이 <실록>을 감수할 때 자기 속셈대로 감행하면서 이토록 조금도 거리낌 없이 하였으니 주벌(誅伐)해도 모자라다 하겠다."
실제로 기록을 찾아보면 청음을 고산 찰방으로 임명할 당시, <선조실록>에는 기자헌이 홍문관 부제학으로 임명된 기록이 함께 기재되어 있다. 거기에는 기자헌과 김상헌에 대한 인물평도 함께 들어 있다.(<선조실록>권147권 35년 윤2월 13일)
기자헌(奇自獻) : 사람됨이 깊고 침착하며 지모가 있었다.
김상헌(金尙憲) : 위인이 교만하고 망령되었다.
기자헌은 방납(防納), 즉 특산물을 대신 납부하는 공물 브로커로 재산을 축적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민생 안정과 재정 확보에 도움이 되던 대동법(大同法) 개혁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4년 뒤 광해군은 이런 인물을 좌의정에 앉혔다.
은근히 멋진 사람들
이런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엇갈린 평가는 설명이 필요하다.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은 인물 평가의 불공정성 때문에 인조반정 이후 바로 수정 논의가 시작되었다.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던 이이첨, 기자헌 등 몇 사람을 빼고는 서인, 남인 할 것 없이 모두 비난, 폄하 일색이었기 때문에 공정성에 의심을 샀다. 또 사료가 부실한 것도 하나의 큰 이유였다.
그러나 재정이 부족하여 효종 때나 완성되었다. 인조 내내 광해군 때 파탄 낸 재정 때문에 고생했다. 그 여파로 북쪽 후금(청)에 대응 또한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농업생산력 이외에는 기댈 데가 없는 경제구조 아래서 피치 못할 상황이었다. 결국 <광해군일기>도 간행하지 못한 채 초고(중초, 정초)로 보관하기에 이르렀고, 효종 때는 <인조실록> 편찬에 밀려 <선조수정실록>은 효종 8년에야 완성되었다.
그런데 학계 일각에서는 <선조실록>을 서인(西人)이 수정하여 <선조수정실록>을 만들었기 때문에 <선조수정실록>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확한 논증이라면, '누가' 만들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 가 아니라, '어떤 부분이 어떤 이유로' 믿을 수 없다, 고 말해야 옳다.
우리가 아는 퇴계 이황, 고봉 기대승의 선조 초반 경연 강의, 의병 항쟁, 이순신 장군의 해전 등 많은 기록이 <선조수정실록>에 나온다. <선조수정실록>이 없었으면 이순신 장군의 해전 활약상을 매우 제한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선조수정실록> 편찬자들이 <선조수정실록>을 완성한 뒤에도 <선조실록>을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나 같으면 싹 없애버렸을 텐데…. 이유? 어떤 실록이 더 진실인지는 편찬자 자신들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판단하는 것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이 사람들, 은근히 멋진 데가 있었다.
▲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과 인조~효종 연간에 편찬된 <선조수정실록>. <선조실록>은 인조반정 이후 잘못된 기록이 많다는 여론으로 수정되는 운명을 겪었다. 그것이 <선조수정실록>이다. 그런데 수정한 사람들은 <선조실록>을 없애지 않고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두 실록을 다 남기기로 했다. 어떤 역사기록이 진실인지는 후대 사람들이 판단할 몫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
광해군이 두 번이나 내친 충신, 결국…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③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 2013.06.14 18:36:00
☞연재 지난회 바로 가기 :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②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③
지방관을 전전하던 청음이 다시 조정으로 돌아온 것은 광해군 즉위년(1608) 11월이었다. 청음이 사가독서(賜暇讀書) 대상자로 뽑혔던 것이다. 사가독서는 주로 홍문관 관원을 대상으로 책만 보면서[讀書]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賜暇] 제도이다. 김상헌을 비롯하여 이이첨 등 12명이 선발되었다. 이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 청음의 시가 있다. '호당(湖堂)에서 한밤중에 바라보다가 회포가 있어 읊다'라는 시이다.
천 길 절벽 쌓인 눈이 옷에 비쳐 차갑고 千崖積雪照衣寒
산음 가는 배 한 척에 흥치는 끝이 없다 一棹山陰興未闌
끝이 없네 이 순간에 서쪽 향해 보는 뜻 無限此時西望意
이슥한 밤 달빛 따라 난간에 기대 있네 夜深隨月倚闌干
본문 중 산음(山陰) 가는 흥치란, 친구를 찾아가는 흥치를 말한다. 진(晉)나라 때 명필 왕휘지(王徽之)가 산음에 살았는데, 한밤중에 눈이 내리자 갑자기 친구인 대규(戴逵)가 생각났다. 그래서 바로 밤새워 배를 타고 대규가 사는 집 문 앞까지 갔다. 그러나 왕휘지는 갔다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되돌아왔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흥이 나서 갔다가 흥이 다해 돌아온 것일 뿐이다"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하였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
이렇게 홍문관 소속으로 연구만 하게 만든 공간이 곧 호당(湖堂), 독서당(讀書堂)이었다.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에서 압구정동으로 넘어가는 다리가 동호대교인데, 호당은 바로 이 옥수동에 있었다. 한강인데 호수[湖]라고 부를 이유는 완만히 흐르는 강은 호수처럼 보이기 때문인데, 시를 지을 때 종종 강을 호라고 부른다.
시에 나타난 시기로 보아도 겨울이니 호당에 뽑혀 들어가 지은 것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청음은 문득 서쪽을 바라보다 가슴에 떠오르는 것이 있어 이 시를 지었다. 이때 바라본 서쪽은 어디일까? 그렇다. 대궐이다. 곧 임금이다. 광해군이다. 광해군의 무엇을 생각했을까?
사료 하나
김상헌과 광해군 얘기는 잠시 뒤에 하고, 먼저 실록 기사 하나 살펴보겠다. 광해군 시대를 이해할 때 필수적인 사료가 <광해군 일기>인데, 이 실록은 조선시대 국왕들의 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활자로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이 필사본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중초본(中草本, 태백산 사고본)과 정초본(正草本, 정족산, 적상산 사고본)이 그것이다. 중초본은 초서로 쓰인 초초본(初草本, 초벌 원고)을 산삭(刪削)·수정(修正)한 미완성의 중간 교정본(校正本)이다. 정초본은 산삭이 끝난 원고이다. 이를 기초로 활자를 심어 인쇄하여 교정을 보고, 그 교정본을 토대로 최종 인쇄에 들어간다.
<광해군 일기> 중초본은 초서(草書, 흘림체)로 쓴 대본 위에 주묵(朱墨)이나 먹으로 산삭(刪削)·수정(修正)·보첨(補添)한 부분이 많고, 많은 부전지(附箋紙)가 붙어 있다. 본문 각 면의 위아래에 보충한 기록이 많다. 정초본은 극히 일부분(제1~5권 전 부분과 제6, 7권의 일부)만 인쇄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해서체(楷書體)로 정서되어 있다.
"애석하다"
청음이 호당에서 다시 조정으로 들어온 것은 대략 2년 뒤로 보인다. 위의 <광해군 일기> 기사가 청음이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다는 내용이다. 오른쪽 페이지 맨 끝에 '이김상헌위직제학(以金尙憲爲直提學)'으로 시작하여, 왼쪽 페이지 첫 줄에서 끝나는 부분이다. 거기를 번역해보면 이렇게 된다.
김상헌(金尙憲)을 직제학으로 삼았다.【상헌은 상용(尙容)의 동생이다. 조용하고 온아하며 또 문학에 재질이 있었다. 〈다만 궁액의 근친으로 오랫동안 요직에 있으면서 사양할 줄 몰랐던 것은 애석한 점이라 하겠다.〉 】(以金尙憲爲直提學【尙憲, 尙容之弟也。 恬靜溫雅, 且有翰墨之才。〈但以椒掖近親, 長據顯要, 而不知辭, 可惜哉!〉】)
실록에 보면 가끔 인사 기록 다음에 그 사람에 대해 논평을 단 경우가 있는데, 이 기사가 그런 경우이다. 논평은【 】로 묶은 부분이다. 원문에서는 별도 표시가 없다. 나중에 인쇄본을 만들었다면 '사신왈(史臣曰)'이라고 덧붙여 본 기사와 구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 〉로 묶은 부분은 원문에 빨간 먹으로 지우라고 표시했던 부분이다. 그 내용은 "다만 궁액의 근친으로 오랫동안 요직에 있으면서 사양할 줄 몰랐던 것은 애석한 점이라 하겠다"는 논평이다.
원래 논평은 장점과 단점을 다 기록하게 마련이다. 청음이라고 해서 단점이 없었을 리도 없으므로, 위와 같은 논평이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 한편, 실록을 편찬할 때 '산삭'이라는 것은 대개 긴 기사를 줄이는 일이고, 가끔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기도 한다. 위의 경우는 청음에 대한 부정적인 평론 내용을 산삭함으로써, 그 평론이 잘못되었다고 편찬자가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다행히 우리는 원래 논평이 정확했는지, 편찬자의 삭제가 정확했는지 판단할 수 있는 다른 자료를 가지고 있다.
청음과 광해군
청음을 두고 '궁액의 근친', 즉 왕실과 가까운 친척이라고 부른 것을 사실에 기초한 기술이다. 청음은 광해군의 왕비 유씨(柳氏)와 인척이었다. 김상헌의 아버지 김극효(金克孝)는 광해군의 장인 유자신(柳自新)과 동서 간으로, 김상헌은 왕비 유씨와 이종 사촌이 된다.
그런데 논평의 다음 부분, '오랫동안 요직에 있으면서 사양할 줄 몰랐던 것은 애석하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우선 선조 후반에도 청음이 지방관으로 전전했음을 지난 호에 우리가 살펴보았다. 광해군 즉위 후에 2년가량 독서당에 들어가 있었는데, 이런 자리는 청직(淸職)이지 요직(要職)은 아니다. 교서나 외교문서를 짓는 직제학 자리도 마찬가지이다.
청음이 요직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관직 경력은 승지(承旨)였다. 광해군 3년 동부승지로 있었으니, 처음 승지가 되었던 듯하다. 동부승지는 처음 승지가 된 사람이 맡는 관직이이 때문이다. 바로 이 무렵 정인홍(鄭仁弘)이 퇴계 이황과 회재 이언적을 문묘에 배향할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회퇴(晦退) 변척 사건이 일어났다.
정인홍의 상소는 아직 각 정파가 고루 등용되어 있던 광해군 3년(1611) 3월에 올라왔다. 광해군 2년(1610) 9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을 이른바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여 사표로 삼았는데, 이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황은 두 사람과 한 나라에 태어났고 또 같은 도에 살았습니다만, 평생에 한 번도 얼굴을 대면한 적이 없었고 또한 자리를 함께 한 적도 없었습니다. (…) 이황은 과거로 출신하여 완전히 나가지도 않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 서성대며 세상을 기롱하면서 스스로 중도라 여겼습니다. (…) 이언적과 이황이 지난날 가정(嘉靖) 을사년과 정미년 사이에 혹은 극도로 높은 벼슬을 하였고, 혹은 청직과 요직을 지냈으니, 그 뜻이 과연 벼슬할 만한 때라고 여겨서입니까? 이것은 진실로 논할 것도 못되거니와, 만년에 이르러서는 결연히 물러나 나라에서 여러 번 불러도 나가지 않았으니, 이 또한 하나의 높고 뻣뻣한 일이며 세상을 경멸하는 행실입니다."
요지는 스승 조식의 학문이 치우쳐 있고 노장을 숭상한다는 이황의 평가는 잘못된 것이며, 오히려 이황과 이언적이 세태에 영합했다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소에서 말한 을사년과 정미년 사이에 벼슬을 했다는 것은 을사사화(1545, 명종즉위)와 정미사화(1547, 명종2) 때 벼슬을 했다는 말이다. 당시 이황은 홍문관 전한(典翰)을 지냈다. 그러나 이황은 형 이해(李瀣)가 이기(李芑)와 윤원형(尹元衡)의 탄압으로 장(杖) 1백 대를 맞고 갑산(甲山)으로 유배 가던 도중 죽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권력을 쥔 간신과 대립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정인홍이 말한 것처럼 절의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막상 오현 종사가 진행될 때는 말이 없다가, 오현 종사가 끝난지 해를 넘기고 몇 달이 지나서야 이런 상소를 올렸다는 점은 여전히 미심쩍고 이유를 모르겠다. 정인홍의 상소는 거센 역풍을 맞았다. 임금의 지근거리인 승정원에서 정인홍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었다.
"정인홍은 그의 스승을 추존하려다가 저도 모르게 분에 못 이겨 말을 함부로 한 나머지 도리어 그 스승의 수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 이황이 조식에게 노장(老莊) 사상이 학문의 병통이 되었고 중도(中道)로서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한 것은, 그의 치우친 점과 병통이 되는 점을 논한 것에 불과할 따름이지, 조식이 벼슬을 하지 않은 일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 인홍이, 만일 이황이 그의 스승과 더불어 혹 서로 좋게 지내지 못한 점이 있었던 것을 이유로 이렇게 흡족하지 못한 얘기를 하였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겠으나, 그는 본정(本情) 이외에 스스로 허다한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 차자 중에 이른바 '식견이 투철하지 못했다'느니, '사의(私意)가 덮어 가리웠다'느니 한 것은, 정작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 승정원의 계(啓)는 광해군 3년 4월 8일에 올라왔다. 그리고 이 계를 기초한 사람이 청음이었다. 사관은 "좌부승지 오윤겸, 동부승지 김상헌이 함께 이 계사를 올렸는데 상헌이 계사를 기초(起草)하였다. 왕이 그것을 알고서 크게 노하여 책망을 하려고 하였는데, 상헌이 유씨(柳氏)와 인척이 되는 까닭에 궁중으로부터 전해 듣고는 즉시 병을 이유로 사직하는 소를 올리니, 왕이 그를 체직시켰다"라고 말했다.
외직에서 만난 계축옥사
이렇게 짧은 승지 경력을 뒤로 하고, 청음은 광주(廣州), 연안((延安) 등 외직을 맡았다. 이때 계축옥사가 터졌다. 영창대군을 옹립한다는 소문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옥사였다. 의금부에서는 "장단 부사(長湍府使) 김상관(金尙寬)의 아들은 연안 부사府使) 김상헌(金尙憲)의 양자인데 김래(金琜)의 딸과 혼인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김래는 바로 국구(國舅) 김제남의 아들이었고, 인목대비와 형제 간이었다.
살얼음판 같던 상황에서 청음은 인척관계 때문에 재앙을 맞기도 했고, 모면하기도 했다. 흔히 정치적 이합집산이 벌어질 때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 첫 번째로 고려하는 것이 집안, 가문이다.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청음의 경우 이런 추론이 들어맞지 않는다. 김제남과 광해군 중에 집안으로 따지면 권력이 있는 광해군을 지지하는 편이 실리(實利)에 부합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정인홍의 회퇴 변척을 비판할 때도 관직을 내놓았고, 부당하면서 처절했던 김제남의 옥사 때도 파직을 감수했다. 가끔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차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일까?
글을 잘 지었던 청음은 2년 뒤인 광해군 7년, 사과(司果)의 자격으로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를 공성 왕후(恭聖王后)로 추증하면서 지은 책봉 고명(誥命)에 대한 사은 전문(謝恩箋文) 때문에 다시 파직되었다. 그 글에 들어간 '관과(觀過)'라는 두 자 때문이었다. <논어>에,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은 각기 그 종류가 다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잘못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子曰: 人之過也, 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라는 말에서 나오는데, 사헌부에서 '관과'라는 말은 신하가 감히 말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는 이유로 김상헌을 탄핵했다.
돌아온 청음
어떤 이유로라도 당할 탄핵이었다. 광해군의 정치는 이후 인목대비 폐모, 끊임없는 궁궐 공사, 원칙 없는 외교로 갈팡질팡하다가 민심을 잃었고, 광해군은 결국 폐위되었다. 혹시 광해군 즉위년 동호의 독서당에서 시를 지으며 걱정했던 일이 이런 상황이었을까. 모를 일이다.
안동 풍산으로 낙향했던 청음은 광해군 12년(1620)경 남양주 석실(石室)로 돌아왔다. 그리고 3년 뒤 그곳에서 반정을 맞았다. 반정 당시 청음은 생모인 정씨의 상중이었다. 상을 마친 뒤 이조참의를 거쳐 인조 2년(1624) 대사간이 되었다. 그때까지의 행실을 사관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김상헌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깨끗하며 언동이 절도에 맞고 안팎이 순수하고 발라서 정금(精金)이나 미옥(美玉)과 같았다. 바라보면 위엄이 있어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뜻으로 범하지 못하였고, 문장도 굳세고 뛰어나며 고상하고 오묘하여 옛 사람들의 글짓기에 가까웠다. 조정에서 벼슬한 이래 처신이 구차하지 않았고 나쁜 짓을 원수처럼 미워하였기 때문에 여러 번 배척당하였으나, 이해와 화복 때문에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광해 때에는 버려져 시골에 있었는데, 반정 초기에는 상중이기 때문에 곧 등용되지 못했다가 상을 마치자 맨 먼저 이조참의에 제배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사간에 제배되니, 사람들이 다 그 풍채를 사모하였다."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③
지방관을 전전하던 청음이 다시 조정으로 돌아온 것은 광해군 즉위년(1608) 11월이었다. 청음이 사가독서(賜暇讀書) 대상자로 뽑혔던 것이다. 사가독서는 주로 홍문관 관원을 대상으로 책만 보면서[讀書]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賜暇] 제도이다. 김상헌을 비롯하여 이이첨 등 12명이 선발되었다. 이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 청음의 시가 있다. '호당(湖堂)에서 한밤중에 바라보다가 회포가 있어 읊다'라는 시이다.
천 길 절벽 쌓인 눈이 옷에 비쳐 차갑고 千崖積雪照衣寒
산음 가는 배 한 척에 흥치는 끝이 없다 一棹山陰興未闌
끝이 없네 이 순간에 서쪽 향해 보는 뜻 無限此時西望意
이슥한 밤 달빛 따라 난간에 기대 있네 夜深隨月倚闌干
본문 중 산음(山陰) 가는 흥치란, 친구를 찾아가는 흥치를 말한다. 진(晉)나라 때 명필 왕휘지(王徽之)가 산음에 살았는데, 한밤중에 눈이 내리자 갑자기 친구인 대규(戴逵)가 생각났다. 그래서 바로 밤새워 배를 타고 대규가 사는 집 문 앞까지 갔다. 그러나 왕휘지는 갔다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되돌아왔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흥이 나서 갔다가 흥이 다해 돌아온 것일 뿐이다"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하였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
이렇게 홍문관 소속으로 연구만 하게 만든 공간이 곧 호당(湖堂), 독서당(讀書堂)이었다.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에서 압구정동으로 넘어가는 다리가 동호대교인데, 호당은 바로 이 옥수동에 있었다. 한강인데 호수[湖]라고 부를 이유는 완만히 흐르는 강은 호수처럼 보이기 때문인데, 시를 지을 때 종종 강을 호라고 부른다.
시에 나타난 시기로 보아도 겨울이니 호당에 뽑혀 들어가 지은 것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청음은 문득 서쪽을 바라보다 가슴에 떠오르는 것이 있어 이 시를 지었다. 이때 바라본 서쪽은 어디일까? 그렇다. 대궐이다. 곧 임금이다. 광해군이다. 광해군의 무엇을 생각했을까?
사료 하나
김상헌과 광해군 얘기는 잠시 뒤에 하고, 먼저 실록 기사 하나 살펴보겠다. 광해군 시대를 이해할 때 필수적인 사료가 <광해군 일기>인데, 이 실록은 조선시대 국왕들의 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활자로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이 필사본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중초본(中草本, 태백산 사고본)과 정초본(正草本, 정족산, 적상산 사고본)이 그것이다. 중초본은 초서로 쓰인 초초본(初草本, 초벌 원고)을 산삭(刪削)·수정(修正)한 미완성의 중간 교정본(校正本)이다. 정초본은 산삭이 끝난 원고이다. 이를 기초로 활자를 심어 인쇄하여 교정을 보고, 그 교정본을 토대로 최종 인쇄에 들어간다.
<광해군 일기> 중초본은 초서(草書, 흘림체)로 쓴 대본 위에 주묵(朱墨)이나 먹으로 산삭(刪削)·수정(修正)·보첨(補添)한 부분이 많고, 많은 부전지(附箋紙)가 붙어 있다. 본문 각 면의 위아래에 보충한 기록이 많다. 정초본은 극히 일부분(제1~5권 전 부분과 제6, 7권의 일부)만 인쇄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해서체(楷書體)로 정서되어 있다.
▲ <광해군 일기> 중초본(태백산본) 광해군 2년 12월 26일 기사.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한다. 빨간 부분은 지우라는 표시이다. 궁궐공사로 재정을 파탄 낸 광해군 덕분에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일기>는 인쇄도 하지 못한 채 초고 형태로 보존해야 했다. 또 그 덕분에 우리는 <광해군 일기>를 통해 유일하게 중초본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실록을 편찬하지 못할 정도의 상황이었으니, 후금에 대한 방비 등 재정에 곤란을 겪었을 것은 자명하다. 그러고 보니 <광해군 일기>는 의외로 많은 얘기를 전해주고 있다. <광해군 일기>의 자료적 가치와 성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 필자의 책,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펴냄) 서문을 참고하면 된다. |
"애석하다"
청음이 호당에서 다시 조정으로 들어온 것은 대략 2년 뒤로 보인다. 위의 <광해군 일기> 기사가 청음이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다는 내용이다. 오른쪽 페이지 맨 끝에 '이김상헌위직제학(以金尙憲爲直提學)'으로 시작하여, 왼쪽 페이지 첫 줄에서 끝나는 부분이다. 거기를 번역해보면 이렇게 된다.
김상헌(金尙憲)을 직제학으로 삼았다.【상헌은 상용(尙容)의 동생이다. 조용하고 온아하며 또 문학에 재질이 있었다. 〈다만 궁액의 근친으로 오랫동안 요직에 있으면서 사양할 줄 몰랐던 것은 애석한 점이라 하겠다.〉 】(以金尙憲爲直提學【尙憲, 尙容之弟也。 恬靜溫雅, 且有翰墨之才。〈但以椒掖近親, 長據顯要, 而不知辭, 可惜哉!〉】)
실록에 보면 가끔 인사 기록 다음에 그 사람에 대해 논평을 단 경우가 있는데, 이 기사가 그런 경우이다. 논평은【 】로 묶은 부분이다. 원문에서는 별도 표시가 없다. 나중에 인쇄본을 만들었다면 '사신왈(史臣曰)'이라고 덧붙여 본 기사와 구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 〉로 묶은 부분은 원문에 빨간 먹으로 지우라고 표시했던 부분이다. 그 내용은 "다만 궁액의 근친으로 오랫동안 요직에 있으면서 사양할 줄 몰랐던 것은 애석한 점이라 하겠다"는 논평이다.
원래 논평은 장점과 단점을 다 기록하게 마련이다. 청음이라고 해서 단점이 없었을 리도 없으므로, 위와 같은 논평이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 한편, 실록을 편찬할 때 '산삭'이라는 것은 대개 긴 기사를 줄이는 일이고, 가끔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기도 한다. 위의 경우는 청음에 대한 부정적인 평론 내용을 산삭함으로써, 그 평론이 잘못되었다고 편찬자가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다행히 우리는 원래 논평이 정확했는지, 편찬자의 삭제가 정확했는지 판단할 수 있는 다른 자료를 가지고 있다.
청음과 광해군
청음을 두고 '궁액의 근친', 즉 왕실과 가까운 친척이라고 부른 것을 사실에 기초한 기술이다. 청음은 광해군의 왕비 유씨(柳氏)와 인척이었다. 김상헌의 아버지 김극효(金克孝)는 광해군의 장인 유자신(柳自新)과 동서 간으로, 김상헌은 왕비 유씨와 이종 사촌이 된다.
ⓒ오항녕 |
그런데 논평의 다음 부분, '오랫동안 요직에 있으면서 사양할 줄 몰랐던 것은 애석하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우선 선조 후반에도 청음이 지방관으로 전전했음을 지난 호에 우리가 살펴보았다. 광해군 즉위 후에 2년가량 독서당에 들어가 있었는데, 이런 자리는 청직(淸職)이지 요직(要職)은 아니다. 교서나 외교문서를 짓는 직제학 자리도 마찬가지이다.
청음이 요직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관직 경력은 승지(承旨)였다. 광해군 3년 동부승지로 있었으니, 처음 승지가 되었던 듯하다. 동부승지는 처음 승지가 된 사람이 맡는 관직이이 때문이다. 바로 이 무렵 정인홍(鄭仁弘)이 퇴계 이황과 회재 이언적을 문묘에 배향할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회퇴(晦退) 변척 사건이 일어났다.
정인홍의 상소는 아직 각 정파가 고루 등용되어 있던 광해군 3년(1611) 3월에 올라왔다. 광해군 2년(1610) 9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을 이른바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여 사표로 삼았는데, 이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황은 두 사람과 한 나라에 태어났고 또 같은 도에 살았습니다만, 평생에 한 번도 얼굴을 대면한 적이 없었고 또한 자리를 함께 한 적도 없었습니다. (…) 이황은 과거로 출신하여 완전히 나가지도 않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 서성대며 세상을 기롱하면서 스스로 중도라 여겼습니다. (…) 이언적과 이황이 지난날 가정(嘉靖) 을사년과 정미년 사이에 혹은 극도로 높은 벼슬을 하였고, 혹은 청직과 요직을 지냈으니, 그 뜻이 과연 벼슬할 만한 때라고 여겨서입니까? 이것은 진실로 논할 것도 못되거니와, 만년에 이르러서는 결연히 물러나 나라에서 여러 번 불러도 나가지 않았으니, 이 또한 하나의 높고 뻣뻣한 일이며 세상을 경멸하는 행실입니다."
요지는 스승 조식의 학문이 치우쳐 있고 노장을 숭상한다는 이황의 평가는 잘못된 것이며, 오히려 이황과 이언적이 세태에 영합했다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소에서 말한 을사년과 정미년 사이에 벼슬을 했다는 것은 을사사화(1545, 명종즉위)와 정미사화(1547, 명종2) 때 벼슬을 했다는 말이다. 당시 이황은 홍문관 전한(典翰)을 지냈다. 그러나 이황은 형 이해(李瀣)가 이기(李芑)와 윤원형(尹元衡)의 탄압으로 장(杖) 1백 대를 맞고 갑산(甲山)으로 유배 가던 도중 죽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권력을 쥔 간신과 대립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정인홍이 말한 것처럼 절의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막상 오현 종사가 진행될 때는 말이 없다가, 오현 종사가 끝난지 해를 넘기고 몇 달이 지나서야 이런 상소를 올렸다는 점은 여전히 미심쩍고 이유를 모르겠다. 정인홍의 상소는 거센 역풍을 맞았다. 임금의 지근거리인 승정원에서 정인홍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었다.
"정인홍은 그의 스승을 추존하려다가 저도 모르게 분에 못 이겨 말을 함부로 한 나머지 도리어 그 스승의 수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 이황이 조식에게 노장(老莊) 사상이 학문의 병통이 되었고 중도(中道)로서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한 것은, 그의 치우친 점과 병통이 되는 점을 논한 것에 불과할 따름이지, 조식이 벼슬을 하지 않은 일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 인홍이, 만일 이황이 그의 스승과 더불어 혹 서로 좋게 지내지 못한 점이 있었던 것을 이유로 이렇게 흡족하지 못한 얘기를 하였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겠으나, 그는 본정(本情) 이외에 스스로 허다한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 차자 중에 이른바 '식견이 투철하지 못했다'느니, '사의(私意)가 덮어 가리웠다'느니 한 것은, 정작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 승정원의 계(啓)는 광해군 3년 4월 8일에 올라왔다. 그리고 이 계를 기초한 사람이 청음이었다. 사관은 "좌부승지 오윤겸, 동부승지 김상헌이 함께 이 계사를 올렸는데 상헌이 계사를 기초(起草)하였다. 왕이 그것을 알고서 크게 노하여 책망을 하려고 하였는데, 상헌이 유씨(柳氏)와 인척이 되는 까닭에 궁중으로부터 전해 듣고는 즉시 병을 이유로 사직하는 소를 올리니, 왕이 그를 체직시켰다"라고 말했다.
외직에서 만난 계축옥사
이렇게 짧은 승지 경력을 뒤로 하고, 청음은 광주(廣州), 연안((延安) 등 외직을 맡았다. 이때 계축옥사가 터졌다. 영창대군을 옹립한다는 소문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옥사였다. 의금부에서는 "장단 부사(長湍府使) 김상관(金尙寬)의 아들은 연안 부사府使) 김상헌(金尙憲)의 양자인데 김래(金琜)의 딸과 혼인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김래는 바로 국구(國舅) 김제남의 아들이었고, 인목대비와 형제 간이었다.
살얼음판 같던 상황에서 청음은 인척관계 때문에 재앙을 맞기도 했고, 모면하기도 했다. 흔히 정치적 이합집산이 벌어질 때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 첫 번째로 고려하는 것이 집안, 가문이다.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청음의 경우 이런 추론이 들어맞지 않는다. 김제남과 광해군 중에 집안으로 따지면 권력이 있는 광해군을 지지하는 편이 실리(實利)에 부합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정인홍의 회퇴 변척을 비판할 때도 관직을 내놓았고, 부당하면서 처절했던 김제남의 옥사 때도 파직을 감수했다. 가끔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차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일까?
글을 잘 지었던 청음은 2년 뒤인 광해군 7년, 사과(司果)의 자격으로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를 공성 왕후(恭聖王后)로 추증하면서 지은 책봉 고명(誥命)에 대한 사은 전문(謝恩箋文) 때문에 다시 파직되었다. 그 글에 들어간 '관과(觀過)'라는 두 자 때문이었다. <논어>에,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은 각기 그 종류가 다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잘못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子曰: 人之過也, 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라는 말에서 나오는데, 사헌부에서 '관과'라는 말은 신하가 감히 말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는 이유로 김상헌을 탄핵했다.
돌아온 청음
어떤 이유로라도 당할 탄핵이었다. 광해군의 정치는 이후 인목대비 폐모, 끊임없는 궁궐 공사, 원칙 없는 외교로 갈팡질팡하다가 민심을 잃었고, 광해군은 결국 폐위되었다. 혹시 광해군 즉위년 동호의 독서당에서 시를 지으며 걱정했던 일이 이런 상황이었을까. 모를 일이다.
안동 풍산으로 낙향했던 청음은 광해군 12년(1620)경 남양주 석실(石室)로 돌아왔다. 그리고 3년 뒤 그곳에서 반정을 맞았다. 반정 당시 청음은 생모인 정씨의 상중이었다. 상을 마친 뒤 이조참의를 거쳐 인조 2년(1624) 대사간이 되었다. 그때까지의 행실을 사관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김상헌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깨끗하며 언동이 절도에 맞고 안팎이 순수하고 발라서 정금(精金)이나 미옥(美玉)과 같았다. 바라보면 위엄이 있어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뜻으로 범하지 못하였고, 문장도 굳세고 뛰어나며 고상하고 오묘하여 옛 사람들의 글짓기에 가까웠다. 조정에서 벼슬한 이래 처신이 구차하지 않았고 나쁜 짓을 원수처럼 미워하였기 때문에 여러 번 배척당하였으나, 이해와 화복 때문에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광해 때에는 버려져 시골에 있었는데, 반정 초기에는 상중이기 때문에 곧 등용되지 못했다가 상을 마치자 맨 먼저 이조참의에 제배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사간에 제배되니, 사람들이 다 그 풍채를 사모하였다."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④
[프레시안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
☞연재 지난회 바로 가기 :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③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④
비록 자강(自强)만 도모하는 자라고 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나라를 풍족하게 한 이후에야 인심을 결속시킬 수 있고, 인심을 결속시킨 후에야 외적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백성이 굶주리고 노약자가 골짜기에서 죽어 나뒹굴면서 나라를 강고하게 하고 외침(外侵)을 막아낼 수 있던 적은 없었습니다. (<노봉집(老峯集)>, '응지소(應旨疏)')
문곡 김수항(1629~1689)보다 한 살 위인 노봉 민정중(1628~1692)이 효종 8년(1657)경 올린 응지 상소, 그러니까 효종이 의견을 구했을 때 올린 상소였다. 문곡과 노봉은 돈독한 친구였다. 요즘 말로 절친(切親)이라고 해야겠다. 둘 다 장원급제를 했던 인재였다. 노봉은 숙종 왕비였던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의 작은형이니까, 인현왕후의 중부(仲父)이다.
효종 연간은 병자호란 뒤의 상처를 수습하는 일이 주된 관심사였다. 계속되는 청나라의 견제, 김자점(金自點) 같은 친청파의 발호를 뚫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심했다. 그러나 효종의 군사정책은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고, 정치세력을 규합하는 효종의 역량은 조금 모자랐다. 거기에 효종 5년, 6년에는 기근까지 겹쳤다. 실정을 도외시한 채 추진된 무리한 노비 추쇄는 거의 실패로 돌아갔다. 민정중의 상소는 바로 이런 시점에서 나왔다.
거꾸로 간 시대
그러고 보니 효종대와 광해군대는 비슷한 데가 있다. 둘 다 매우 큰 충격을 안겨준 외침 이후 그 외침을 수습하고 일상의 안정을 회복해야 하는 숙제를 짊어진 정권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효종은 군비에 치중하다보니 민생을 챙기지 못했던 반면, 광해군은 군비도 챙기지 않았고 민생도 돌보지 않았다는 점이리라. 아니 아예 파탄을 내버렸다.
한때 광해군이 대동법 시행을 위해 선혜청을 설치했다면서 마치 민생을 챙겼던 군주인 양 묘사했는데, 이제는 그런 경향은 수그러들었다. 사료만 찬찬히 볼 수 있다면 광해군이 대동법이란 정책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그렇지 않아도 전쟁으로 지친 삶에 과중한 세금을 때린 정신 나간 군주였는지는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논리가 고개를 든다. 내정(內政)에서는 대동법의 실패, 과중한 궁궐공사로 점수를 잃었지만, 대외 정책은 명분론에 빠지지 않는 중립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갔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런 걸 '균형 잡힌 시각'이라고 하나보다. 그러나 나는 역사 공부는 '시각의 균형'을 추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사료(史料)가 보여주는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립외교라는 전도된 시각
대동법과 궁궐공사는 공물(貢物)로 연결되어 있었다. 대동법이 공물을 합리적으로 줄이기 위한 정책이었다면 궁궐공사는 공물의 과대 소비였으므로, 둘은 상극의 정책이었다. 또 대동법과 계축옥사는 사람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계축옥사를 기점으로 호조판서가 이원익과 함께 대동법을 추진하던 황신(黃愼)에서 궁궐공사 전담맨이었던 이충(李沖)으로 바뀐다. 황신은 귀양을 갔다. 그걸로 대동법도 물 건너갔다. 그럼 궁궐공사와 심하 파병은?
기실 위에서 살펴본 민정중의 말에 답이 다 나와 있다.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들기는커녕 도탄에 빠져 허덕이게 만들어 인심이 떠난 지 오래였고, 군수물자는 군비가 아닌 궁궐공사에 투여되었다. 수군(水軍)은 목재, 석재를 나르는 데 동원되었고, 남한산성이나 강화에 비축해두었던 곡식 역시 공사비용에 충당되었다.
명나라 요청으로 심하(深河)에 파병할 때 역시 군사들은 변변한 훈련이나 추위를 막을 옷을 받지도 입지도 못하고 떠났다. 상황을 봐서 후금군에게 항복하라는 광해군의 지시를 받은 장군은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었다. 이 '중립외교'로 조선군은 파병된 1만 3000명(2만 명이란 기록도 있음) 중 9000명이 죽었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혀 노예보다 못한 중노동에 시달렸다.
학계 일각에서 흔히 주장하듯이 광해군이 파병을 주저한 것은 명나라에서 후금으로의 변화라는 국제정세를 통찰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난 3월 제주 문화방송(MBC) 초청으로 광해군 중립외교론자인 한명기 교수와 내가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한 교수도 이제 광해군이 대동법을 시행했다는 주장은 거둔 듯하다.
그렇지만 한 교수는 예의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높이 평가했다. 내정은 그렇지만 외교는 잘했다는 논지였다. 내 말은 간단하다. 그렇게 외교와 국방에 관심이 있는 군주였다면, 그 외교와 국방의 근원적, 실제적인 힘인 민생과 재정을 안정시켜야 했는데, 광해군은 거꾸로 갔다. 민생과 재정을 파탄내서 민심을 잃은 통치자가 외교에서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다. 아니, 하나 있다. 상황이 되는대로 그때그때 눈치껏 처신하는 것, 바로 기회주의이다.
자신의 역량을 주요 변수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선이 스스로 동아시아 주요 변수 또는 상수(常數)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광해군은 발로 차버린 셈이다. 한 교수의 광해군 외교 해석이 갖는 오류가 이 지점에 있다. 결과를 배경(원인)으로 착각한 것이다. 후금의 강성은 조선의 피폐를 배경으로 한다. 그것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겠지만, 유력한 원인이다.
광해군의 내면화
내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유훈을 예로 들어 주변 10여개 나라 중에 경계 대상 1호가 조선이었다는 사료를 소개하자, 한 교수는 그건 고려 말~조선 초의 상황이라며 내가 시대착오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내가 명나라 초기와 말기를 헷갈릴 정도로 정신이 어둡지는 않다. 내 말은 중국에서 조선을 볼 때 가늠할 수 있는 국제적 위상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로 놓고 보아도 고려 말에는 홍건적에게 쫓겨 공민왕이 공주까지 도망쳐야 했고, 해안은 왜구의 침입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이나 그때나 나라의 형세는 큰 차이가 없다. 반복하거니와 핵심적인 문제는 조선이 갖는 주요 변수의 지위를 아예 고려하지 않고 대외 관계사를 해석하는 왜소한 시각인 것이다. 나는 여기서 패배주의의 냄새를 맡는다. 광해군도 심하 전투를 두고 '패배가 예정된 전쟁'이라고 예감했다. 그래서 강홍립에게 전략 아닌 전략, 눈치보다 적절히 행동하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고. 결국 중립외교 운운하는 해석은 연구자가 광해군을 내면화한 데서 오는 오류이다. 더 나아가면 동일시한다. 연구자 자신이 광해군이 되어 역사를 설명하고 해석한다. 이거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나는 광해군이 위험한 거울이라고 했던 것이다.
지방자치체 행사의 우려
이 지면에서 한 교수는 반론할 기회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와의 토론을 소개하는 것이 다소 불공평할 수도 있다. 다만 논의의 흐름상 소개한 것이니 그리 헤아려주었으면 한다. 하지만 이 기회에 지방자치단체에서 벌어지는 역사전쟁에 대해 한 마디 해두어야겠다.
어디는 홍길동 가지고 다투고, 어디는 임꺽정 가지고 다투는 모양이다. 지방자치체가 자기 고장의 인물을 현창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워 보인다. 자부심도 주고 일체감도 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자칫 위험하기도 하다.
제주 MBC에서 토론에 초청한 이유는 폐위당한 광해군의 유배지가 제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제주에서 역사적인 인물로 광해군을 띄울 때 그의 '혼란했던 정치'를 자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당초 제주특별자치구와 제주 MBC가 생각하는 '광해군'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제주에서 우리의 토론에 이어 마련된 이벤트는 창극이었는데, 제목부터 '개혁군주 광해군'이었던 데서도 세팅의 성격은 잘 드러난다.
함께 참석한 패널 한 분에게 웃으며 내가 많이 불리하다고 했더니, 장단점이나 공과를 두루 살펴보자는 뜻이라고 짐짓 위로를 던졌다. 알고도 내가 참석한 이유는 올레 길을 한 번 더 걷고 싶었고, 어처구니없는 광해군 부활에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학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은 종종 자기 몫만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8월에는 광해군 묘가 있고, 광해군을 제사 지낸다는 봉인사(奉印寺)에서 토론회가 있다. 광해군~인조시대의 국내정치와 대외관계에 대한 발표이다. 불자들이 초청하는 모임이니 어떨지 모르겠다. 너도나도 들추어내고 있는 '내 맘대로 역사'의 하나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압록강에서 추도하다
우리가 광해군 때부터 정묘호란, 병자호란까지 세세히 다룰 여유도, 이유도 없다. 그 주제에 대한 다른 연구서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그래도 심하 전투에서 정묘호란까지 시기에 대비되는 흥미로운 두 인물이 있어서 소개해두려고 한다. 심하 전투가 벌어진 광해군 11년(1619) 이듬해인 1620년,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는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경신조천록(庚申朝天錄)'이란 글을 남겼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시 세 수가 있다.
지난해 바로 오늘 심하의 전쟁에서 去年今日戰深河
2만의 관군이 백사장을 피로 적셨네 二萬官軍血濺沙
한식날 백골 거둬주는 이 아무도 없고 寒食無人收白骨
집집마다 지전 태워 강물에 제사한다 家家燒紙賽江波
압록강 가에 새로이 선 사당 한 채 一片新祠鴨水隈
사라져간 외로운 넋 언제나 돌아올까 孤魂迢遆幾時廻
오늘 소낙비가 강기슭을 뒤집을 때 今朝急雨飜江岸
백마 탄 채 칼 잡고 파도 타고 오리라 白馬潮頭按劍來
한 곡조 금가 소리 달빛 아래 슬퍼라 一曲金笳月下悲
누각 수자리 서는 졸개 모두 고아로다 樓中戍卒盡孤兒
관산이라 이 밤에 〈양류곡〉이 들리니 關山此夜聞楊柳
몇몇 행인들이 눈물로 옷깃 적시누나 多少行人淚滿衣
월사는 이 시에 "4월 4일, 압록강을 건너려는 차에 북쪽으로부터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빗줄기가 마구 퍼부었다. 그러고 생각해 보니 이날이 바로 지난해 두 원수(元帥)가 적진에 빠지고 김응하(金應河) 장군 및 2만 명의 관군이 전사한 날이라 응당 원혼(冤魂)이 풍우(風雨)로 변하여 온 것일 터이다. 그래서 느꺼운 마음에 시를 지어 귀신을 맞이하는 노래로 삼았다."고 덧붙였다.
버드나무 아래에서
월사의 시에 나오는 인물, 심하 전투에 좌영장을 맡았던 김응하 장군(1580. 선조13~ 1619. 광해군11)에 대해 긴 말하기보다 <광해군일기> 1619년 3월 12일에 나오는 기록을 살펴보자. 심하 전투 이후 평안 감사가 올린 보고이다.
우리나라 좌영의 장수 김응하(金應河)가 뒤를 이어 전진하여 들판에 포진하고 말을 막는 나무를 설치하였으나 군사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습니다. 적이 승세를 타고 육박해 오자 김응하는 화포를 일제히 쏘도록 명했는데, 적의 기병 중에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재차 진격하였다가 재차 후퇴하는 순간 갑자기 서북풍이 거세게 불어 닥쳐 먼지와 모래로 천지가 캄캄해졌고, 화약이 날아가고 불이 꺼져서 화포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적이 철기로 짓밟아대는 바람에 좌영의 군대가 마침내 패하여 거의 다 죽고 말았습니다.
김응하는 혼자서 큰 나무에 의지하여 큰 활 3개를 번갈아 쏘았는데, 시위를 당기는 족족 명중시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적은 감히 다가갈 수가 없자 뒤쪽에서 찔렀는데, 철창이 가슴을 관통했는데도 그는 잡은 활을 놓지 않아 오랑캐조차도 감탄하고 애석해 하면서 '만약 이 같은 자가 두어 명만 있었다면 실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고 하고는, '의류 장군(依柳將軍)' 이라고 불렀습니다.
위에서 보듯 의류 장군이라고도 하고, 버드나무 아래에서 전사했다고 하여 '유하 장군(柳下將軍)'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무공으로 명나라에서는 요동백(遼東伯)에 추증했고, 광해군도 충렬사라는 사당을 세워주었다. 훗날 현종 11년(1670) 김응하 장군에겐 이순신 장군과 같은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주었다.
각기 기억하고 추모하는 방식은 비슷했더라도 그 이유는 달랐을 것이다. 임진왜란 파병 이후 국세가 기울어가던 명나라는 조선의 심하 파병에 어떤 형식으로든 사의를 표해야 했을 것이다. 특히 명나라 군대의 변변치 않은 전투가 주요 패인이었지 않았는가. 김응하 장군을 요동백으로 봉함으로써 그 패배의 모멸감을 달래고 황제의 위엄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광해군 역시 신속하게 김응하 장군에 대한 추모작업에 나섰다. 제사도 지내주고 사당도 세워주었다. 그러나 패전 소식이 전해지던 3월에 광해군이 내린 명령은 "궁궐 완공이 늦어지고 있다. 서둘러라"는 전교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것일까? 보통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생각 없음'이다.(아렌트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학살했던 아이히만 재판을 보며 내린 결론이 '악(惡)의 평범성'이었다. 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그 평범성! 어떻게 하면? 생각이 없으면(thought-less)!)
그래도 김응하 장군의 추모에 공통된 점이 있다면, 아마 자신이 할 일을 하다 죽은 사람에 대한 경의가 아닐까? 장군으로써 전투에 나가 싸우다 죽었다는 그 사실, 얼핏 보면 당연한 삶이지만 쉽지 않은 삶에 대한 사람들의 공감 같은 것……. 김응하 장군이 자기가 할 일을 하다가 죽은 사람이라면, 자기가 할 일을 이상하게 했던 또 하나의 인생이 있었다.
'중립외교' 파트너, 강홍립-정명수
김응하 장군과는 달리 도원수(총사령관) 강홍립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항복하였다. 다 알다시피 학계 일각에서는 강홍립의 항복을 광해군의 중립외교, 실리외교의 연장으로 설명한다. 문관인 강홍립을 도원수도 삼은 것도 광해군이 글과 말로 오고 가는 외교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한다.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강홍립이 '관형향배(觀形向背)', 즉 '형세를 보고 싸우든지 말든지 하는 전략(?)'을 취하다가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금에 어쩔 수 없이 참전했음을 알린 뒤 항복했다는 것이다. 전후의 사정으로 보아 광해군의 밀지는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강홍립은 이후 광해군과 후금의 핫-라인이 된다.
잠시 한 사람 더. 인조반정 이후, 곧바로 이괄(李适)의 난이 있었다. 당시 기익헌(奇益獻)이 이괄과 한명련(韓明璉)의 목을 베었다. 이때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은 탈출하여 구성(龜城)에 숨어있었다. 한 해가 지나서야 구성 부사 조시준(趙時俊)이 듣고 잡으려고 했더니, 한윤은 기미를 알아채고 후금으로 도망쳤다. 여기서 한윤은 강홍립을 만난다. 도망친 한윤은 강홍립 등에게 말하기를, "본국에서 변란이 일어나 당신들의 처자식을 모두 죽였습니다. 나와 함께 만주(滿州) 군사를 빌려 복수하십시오."라고 했으며, 인조 4년(1626) 조선을 침략할 계획을 세웠다.(<연려실기술>에서 <일월록(日月錄)>을 인용함)
당시 강홍립은 한윤과 함께 여러 차례 계책을 꾸며 오랑캐[후금] 추장에게 조선으로 쳐들어 갈 것을 청하였으나, 누루하치는 그들이 자기 나라를 배반한 것을 미워하여 꾸짖고 물리쳤다고 한다. 이후 홍타시(弘他時)가 대를 이어 즉위하자 강홍립과 한윤이 간청하여 드디어 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결국 이듬해인 1627년(인조5)에 후금은 8만여 기(騎)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을 침략하는 바, 정묘호란이 그것이다. 강홍립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침략할 때는 길잡이였고, 조선과 후금이 휴전협정을 맺을 때는 통역을 맡았다. 어떤 사람은 강홍립이 앞잡이가 되었기 때문에 황해도 백성들이 덜 죽었다고 한다. 어찌 이런 해석을 할 수 있는지.
박해일 씨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최종병기 활>을 보면, 인조 때 조정에서 탁상공론을 일삼는 동안 후금이 침략한 것으로 나온다. 거기서 빠진 것, 침략하는 후금의 앞잡이로 광해군이 보냈던 강홍립이 있었다는 점이다.
같은 시대, 다른 인생
문곡 김수항의 할아버지 김상헌(金尙憲) 등은 사신으로 명나라 북경에 있었는데, 조선이 병란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병부(兵部)에 글을 올려 본국을 구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황제가 순무(巡撫)에게 명하여 정예병을 뽑아 후금의 배후를 공격했으나 패하고 돌아갔다. 국내에서 평안 병사 남이흥은 안주 목사(安州牧使) 김준(金浚) 등과 함께 안주성(安州城)에서 이들을 맞아 전투를 벌이다가 불가항력의 싸움임을 알고 화약을 터뜨려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다.
또 다른 중립외교의 증인이 있다. 정명수(鄭命壽). 광해군 때 강홍립을 따라 출정하였다가 후금의 포로가 되었다. 거기에 눌러 살면서 조선 사정을 밀고함으로써 후에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받았다. 병자호란 때는 용골대(龍骨大)의 통역으로 나와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앞잡이 노릇을 하였고, 청나라의 힘을 믿고 조선 조정을 압박하여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까지 올랐다. 효종 연간에도 친청파 김자점 등과 결탁하여 청나라와 내통하고 급기야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효종 3년 김자점 등은 처형되었고, 정명수도 이듬해 청나라로부터 관직을 빼앗겼다.
어찌, 떠오르는 군상들이 있는가? 광해군의 외교가 중립외교라면, 광해군-강홍립-정명수로 이어지는 외교 라인이 보여준 행적이 과연 친일 매국노들과 무엇이 다른가? 이렇게 된 이유가 있다.
첫째, 바로 국제 관계에서 주체적인 역량을 배양하거나 행사하지 못했고, 둘째, 그러다보니 정세에 기회주의적으로 대응하여 지역의 평화 같은 공통, 공존의 명분은 고려하지 않고 힘의 우열에 따라 처신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람들이 이런 삶보다는 김응하 장군 같은 삶을 기려왔다는 점이다. 나로 말하자면 김응하 장군처럼 싸우다 죽을 무용(武勇)도 없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이름 없이 사라져갈 용기도 없다. 아마 적절히 보신하며 그럭저럭 한 평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렇다고 강홍립-정명수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아니, 설사 강홍립-정명수처럼 살았다고 해도 그것이 제대로 된 삶이었다고 강변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러한 최소한의 수오지심(羞惡之心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김응하 장군 같은 분들, 이름 없는 독립군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아닐까.
[프레시안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
☞연재 지난회 바로 가기 :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③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④
비록 자강(自强)만 도모하는 자라고 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나라를 풍족하게 한 이후에야 인심을 결속시킬 수 있고, 인심을 결속시킨 후에야 외적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백성이 굶주리고 노약자가 골짜기에서 죽어 나뒹굴면서 나라를 강고하게 하고 외침(外侵)을 막아낼 수 있던 적은 없었습니다. (<노봉집(老峯集)>, '응지소(應旨疏)')
문곡 김수항(1629~1689)보다 한 살 위인 노봉 민정중(1628~1692)이 효종 8년(1657)경 올린 응지 상소, 그러니까 효종이 의견을 구했을 때 올린 상소였다. 문곡과 노봉은 돈독한 친구였다. 요즘 말로 절친(切親)이라고 해야겠다. 둘 다 장원급제를 했던 인재였다. 노봉은 숙종 왕비였던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의 작은형이니까, 인현왕후의 중부(仲父)이다.
효종 연간은 병자호란 뒤의 상처를 수습하는 일이 주된 관심사였다. 계속되는 청나라의 견제, 김자점(金自點) 같은 친청파의 발호를 뚫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심했다. 그러나 효종의 군사정책은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고, 정치세력을 규합하는 효종의 역량은 조금 모자랐다. 거기에 효종 5년, 6년에는 기근까지 겹쳤다. 실정을 도외시한 채 추진된 무리한 노비 추쇄는 거의 실패로 돌아갔다. 민정중의 상소는 바로 이런 시점에서 나왔다.
거꾸로 간 시대
그러고 보니 효종대와 광해군대는 비슷한 데가 있다. 둘 다 매우 큰 충격을 안겨준 외침 이후 그 외침을 수습하고 일상의 안정을 회복해야 하는 숙제를 짊어진 정권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효종은 군비에 치중하다보니 민생을 챙기지 못했던 반면, 광해군은 군비도 챙기지 않았고 민생도 돌보지 않았다는 점이리라. 아니 아예 파탄을 내버렸다.
한때 광해군이 대동법 시행을 위해 선혜청을 설치했다면서 마치 민생을 챙겼던 군주인 양 묘사했는데, 이제는 그런 경향은 수그러들었다. 사료만 찬찬히 볼 수 있다면 광해군이 대동법이란 정책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그렇지 않아도 전쟁으로 지친 삶에 과중한 세금을 때린 정신 나간 군주였는지는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논리가 고개를 든다. 내정(內政)에서는 대동법의 실패, 과중한 궁궐공사로 점수를 잃었지만, 대외 정책은 명분론에 빠지지 않는 중립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갔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런 걸 '균형 잡힌 시각'이라고 하나보다. 그러나 나는 역사 공부는 '시각의 균형'을 추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사료(史料)가 보여주는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립외교라는 전도된 시각
대동법과 궁궐공사는 공물(貢物)로 연결되어 있었다. 대동법이 공물을 합리적으로 줄이기 위한 정책이었다면 궁궐공사는 공물의 과대 소비였으므로, 둘은 상극의 정책이었다. 또 대동법과 계축옥사는 사람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계축옥사를 기점으로 호조판서가 이원익과 함께 대동법을 추진하던 황신(黃愼)에서 궁궐공사 전담맨이었던 이충(李沖)으로 바뀐다. 황신은 귀양을 갔다. 그걸로 대동법도 물 건너갔다. 그럼 궁궐공사와 심하 파병은?
기실 위에서 살펴본 민정중의 말에 답이 다 나와 있다.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들기는커녕 도탄에 빠져 허덕이게 만들어 인심이 떠난 지 오래였고, 군수물자는 군비가 아닌 궁궐공사에 투여되었다. 수군(水軍)은 목재, 석재를 나르는 데 동원되었고, 남한산성이나 강화에 비축해두었던 곡식 역시 공사비용에 충당되었다.
명나라 요청으로 심하(深河)에 파병할 때 역시 군사들은 변변한 훈련이나 추위를 막을 옷을 받지도 입지도 못하고 떠났다. 상황을 봐서 후금군에게 항복하라는 광해군의 지시를 받은 장군은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었다. 이 '중립외교'로 조선군은 파병된 1만 3000명(2만 명이란 기록도 있음) 중 9000명이 죽었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혀 노예보다 못한 중노동에 시달렸다.
학계 일각에서 흔히 주장하듯이 광해군이 파병을 주저한 것은 명나라에서 후금으로의 변화라는 국제정세를 통찰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난 3월 제주 문화방송(MBC) 초청으로 광해군 중립외교론자인 한명기 교수와 내가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한 교수도 이제 광해군이 대동법을 시행했다는 주장은 거둔 듯하다.
그렇지만 한 교수는 예의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높이 평가했다. 내정은 그렇지만 외교는 잘했다는 논지였다. 내 말은 간단하다. 그렇게 외교와 국방에 관심이 있는 군주였다면, 그 외교와 국방의 근원적, 실제적인 힘인 민생과 재정을 안정시켜야 했는데, 광해군은 거꾸로 갔다. 민생과 재정을 파탄내서 민심을 잃은 통치자가 외교에서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다. 아니, 하나 있다. 상황이 되는대로 그때그때 눈치껏 처신하는 것, 바로 기회주의이다.
자신의 역량을 주요 변수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선이 스스로 동아시아 주요 변수 또는 상수(常數)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광해군은 발로 차버린 셈이다. 한 교수의 광해군 외교 해석이 갖는 오류가 이 지점에 있다. 결과를 배경(원인)으로 착각한 것이다. 후금의 강성은 조선의 피폐를 배경으로 한다. 그것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겠지만, 유력한 원인이다.
광해군의 내면화
내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유훈을 예로 들어 주변 10여개 나라 중에 경계 대상 1호가 조선이었다는 사료를 소개하자, 한 교수는 그건 고려 말~조선 초의 상황이라며 내가 시대착오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내가 명나라 초기와 말기를 헷갈릴 정도로 정신이 어둡지는 않다. 내 말은 중국에서 조선을 볼 때 가늠할 수 있는 국제적 위상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로 놓고 보아도 고려 말에는 홍건적에게 쫓겨 공민왕이 공주까지 도망쳐야 했고, 해안은 왜구의 침입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이나 그때나 나라의 형세는 큰 차이가 없다. 반복하거니와 핵심적인 문제는 조선이 갖는 주요 변수의 지위를 아예 고려하지 않고 대외 관계사를 해석하는 왜소한 시각인 것이다. 나는 여기서 패배주의의 냄새를 맡는다. 광해군도 심하 전투를 두고 '패배가 예정된 전쟁'이라고 예감했다. 그래서 강홍립에게 전략 아닌 전략, 눈치보다 적절히 행동하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고. 결국 중립외교 운운하는 해석은 연구자가 광해군을 내면화한 데서 오는 오류이다. 더 나아가면 동일시한다. 연구자 자신이 광해군이 되어 역사를 설명하고 해석한다. 이거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나는 광해군이 위험한 거울이라고 했던 것이다.
지방자치체 행사의 우려
이 지면에서 한 교수는 반론할 기회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와의 토론을 소개하는 것이 다소 불공평할 수도 있다. 다만 논의의 흐름상 소개한 것이니 그리 헤아려주었으면 한다. 하지만 이 기회에 지방자치단체에서 벌어지는 역사전쟁에 대해 한 마디 해두어야겠다.
어디는 홍길동 가지고 다투고, 어디는 임꺽정 가지고 다투는 모양이다. 지방자치체가 자기 고장의 인물을 현창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워 보인다. 자부심도 주고 일체감도 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자칫 위험하기도 하다.
제주 MBC에서 토론에 초청한 이유는 폐위당한 광해군의 유배지가 제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제주에서 역사적인 인물로 광해군을 띄울 때 그의 '혼란했던 정치'를 자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당초 제주특별자치구와 제주 MBC가 생각하는 '광해군'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제주에서 우리의 토론에 이어 마련된 이벤트는 창극이었는데, 제목부터 '개혁군주 광해군'이었던 데서도 세팅의 성격은 잘 드러난다.
함께 참석한 패널 한 분에게 웃으며 내가 많이 불리하다고 했더니, 장단점이나 공과를 두루 살펴보자는 뜻이라고 짐짓 위로를 던졌다. 알고도 내가 참석한 이유는 올레 길을 한 번 더 걷고 싶었고, 어처구니없는 광해군 부활에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학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은 종종 자기 몫만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8월에는 광해군 묘가 있고, 광해군을 제사 지낸다는 봉인사(奉印寺)에서 토론회가 있다. 광해군~인조시대의 국내정치와 대외관계에 대한 발표이다. 불자들이 초청하는 모임이니 어떨지 모르겠다. 너도나도 들추어내고 있는 '내 맘대로 역사'의 하나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압록강에서 추도하다
우리가 광해군 때부터 정묘호란, 병자호란까지 세세히 다룰 여유도, 이유도 없다. 그 주제에 대한 다른 연구서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그래도 심하 전투에서 정묘호란까지 시기에 대비되는 흥미로운 두 인물이 있어서 소개해두려고 한다. 심하 전투가 벌어진 광해군 11년(1619) 이듬해인 1620년,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는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경신조천록(庚申朝天錄)'이란 글을 남겼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시 세 수가 있다.
지난해 바로 오늘 심하의 전쟁에서 去年今日戰深河
2만의 관군이 백사장을 피로 적셨네 二萬官軍血濺沙
한식날 백골 거둬주는 이 아무도 없고 寒食無人收白骨
집집마다 지전 태워 강물에 제사한다 家家燒紙賽江波
압록강 가에 새로이 선 사당 한 채 一片新祠鴨水隈
사라져간 외로운 넋 언제나 돌아올까 孤魂迢遆幾時廻
오늘 소낙비가 강기슭을 뒤집을 때 今朝急雨飜江岸
백마 탄 채 칼 잡고 파도 타고 오리라 白馬潮頭按劍來
한 곡조 금가 소리 달빛 아래 슬퍼라 一曲金笳月下悲
누각 수자리 서는 졸개 모두 고아로다 樓中戍卒盡孤兒
관산이라 이 밤에 〈양류곡〉이 들리니 關山此夜聞楊柳
몇몇 행인들이 눈물로 옷깃 적시누나 多少行人淚滿衣
월사는 이 시에 "4월 4일, 압록강을 건너려는 차에 북쪽으로부터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빗줄기가 마구 퍼부었다. 그러고 생각해 보니 이날이 바로 지난해 두 원수(元帥)가 적진에 빠지고 김응하(金應河) 장군 및 2만 명의 관군이 전사한 날이라 응당 원혼(冤魂)이 풍우(風雨)로 변하여 온 것일 터이다. 그래서 느꺼운 마음에 시를 지어 귀신을 맞이하는 노래로 삼았다."고 덧붙였다.
버드나무 아래에서
▲ 한국전쟁 때 맞은 총탄 자욱이 선명한 김응하 장군 신도비. 마치 후금군사들의 창칼에 죽음을 당했던 장군의 재현 같다. 동생인 김응해 장군(1588~1666)도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와 항전을 펼쳤다. 이 신도비는 1899년 건립된 것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
우리나라 좌영의 장수 김응하(金應河)가 뒤를 이어 전진하여 들판에 포진하고 말을 막는 나무를 설치하였으나 군사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습니다. 적이 승세를 타고 육박해 오자 김응하는 화포를 일제히 쏘도록 명했는데, 적의 기병 중에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재차 진격하였다가 재차 후퇴하는 순간 갑자기 서북풍이 거세게 불어 닥쳐 먼지와 모래로 천지가 캄캄해졌고, 화약이 날아가고 불이 꺼져서 화포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적이 철기로 짓밟아대는 바람에 좌영의 군대가 마침내 패하여 거의 다 죽고 말았습니다.
김응하는 혼자서 큰 나무에 의지하여 큰 활 3개를 번갈아 쏘았는데, 시위를 당기는 족족 명중시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적은 감히 다가갈 수가 없자 뒤쪽에서 찔렀는데, 철창이 가슴을 관통했는데도 그는 잡은 활을 놓지 않아 오랑캐조차도 감탄하고 애석해 하면서 '만약 이 같은 자가 두어 명만 있었다면 실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고 하고는, '의류 장군(依柳將軍)' 이라고 불렀습니다.
위에서 보듯 의류 장군이라고도 하고, 버드나무 아래에서 전사했다고 하여 '유하 장군(柳下將軍)'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무공으로 명나라에서는 요동백(遼東伯)에 추증했고, 광해군도 충렬사라는 사당을 세워주었다. 훗날 현종 11년(1670) 김응하 장군에겐 이순신 장군과 같은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주었다.
각기 기억하고 추모하는 방식은 비슷했더라도 그 이유는 달랐을 것이다. 임진왜란 파병 이후 국세가 기울어가던 명나라는 조선의 심하 파병에 어떤 형식으로든 사의를 표해야 했을 것이다. 특히 명나라 군대의 변변치 않은 전투가 주요 패인이었지 않았는가. 김응하 장군을 요동백으로 봉함으로써 그 패배의 모멸감을 달래고 황제의 위엄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광해군 역시 신속하게 김응하 장군에 대한 추모작업에 나섰다. 제사도 지내주고 사당도 세워주었다. 그러나 패전 소식이 전해지던 3월에 광해군이 내린 명령은 "궁궐 완공이 늦어지고 있다. 서둘러라"는 전교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것일까? 보통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생각 없음'이다.(아렌트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학살했던 아이히만 재판을 보며 내린 결론이 '악(惡)의 평범성'이었다. 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그 평범성! 어떻게 하면? 생각이 없으면(thought-less)!)
그래도 김응하 장군의 추모에 공통된 점이 있다면, 아마 자신이 할 일을 하다 죽은 사람에 대한 경의가 아닐까? 장군으로써 전투에 나가 싸우다 죽었다는 그 사실, 얼핏 보면 당연한 삶이지만 쉽지 않은 삶에 대한 사람들의 공감 같은 것……. 김응하 장군이 자기가 할 일을 하다가 죽은 사람이라면, 자기가 할 일을 이상하게 했던 또 하나의 인생이 있었다.
'중립외교' 파트너, 강홍립-정명수
김응하 장군과는 달리 도원수(총사령관) 강홍립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항복하였다. 다 알다시피 학계 일각에서는 강홍립의 항복을 광해군의 중립외교, 실리외교의 연장으로 설명한다. 문관인 강홍립을 도원수도 삼은 것도 광해군이 글과 말로 오고 가는 외교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한다.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강홍립이 '관형향배(觀形向背)', 즉 '형세를 보고 싸우든지 말든지 하는 전략(?)'을 취하다가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금에 어쩔 수 없이 참전했음을 알린 뒤 항복했다는 것이다. 전후의 사정으로 보아 광해군의 밀지는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강홍립은 이후 광해군과 후금의 핫-라인이 된다.
잠시 한 사람 더. 인조반정 이후, 곧바로 이괄(李适)의 난이 있었다. 당시 기익헌(奇益獻)이 이괄과 한명련(韓明璉)의 목을 베었다. 이때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은 탈출하여 구성(龜城)에 숨어있었다. 한 해가 지나서야 구성 부사 조시준(趙時俊)이 듣고 잡으려고 했더니, 한윤은 기미를 알아채고 후금으로 도망쳤다. 여기서 한윤은 강홍립을 만난다. 도망친 한윤은 강홍립 등에게 말하기를, "본국에서 변란이 일어나 당신들의 처자식을 모두 죽였습니다. 나와 함께 만주(滿州) 군사를 빌려 복수하십시오."라고 했으며, 인조 4년(1626) 조선을 침략할 계획을 세웠다.(<연려실기술>에서 <일월록(日月錄)>을 인용함)
당시 강홍립은 한윤과 함께 여러 차례 계책을 꾸며 오랑캐[후금] 추장에게 조선으로 쳐들어 갈 것을 청하였으나, 누루하치는 그들이 자기 나라를 배반한 것을 미워하여 꾸짖고 물리쳤다고 한다. 이후 홍타시(弘他時)가 대를 이어 즉위하자 강홍립과 한윤이 간청하여 드디어 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결국 이듬해인 1627년(인조5)에 후금은 8만여 기(騎)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을 침략하는 바, 정묘호란이 그것이다. 강홍립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침략할 때는 길잡이였고, 조선과 후금이 휴전협정을 맺을 때는 통역을 맡았다. 어떤 사람은 강홍립이 앞잡이가 되었기 때문에 황해도 백성들이 덜 죽었다고 한다. 어찌 이런 해석을 할 수 있는지.
박해일 씨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최종병기 활>을 보면, 인조 때 조정에서 탁상공론을 일삼는 동안 후금이 침략한 것으로 나온다. 거기서 빠진 것, 침략하는 후금의 앞잡이로 광해군이 보냈던 강홍립이 있었다는 점이다.
▲ '민초의 생명력'에 기대어 패배주의를 벗어날 가능성을 보인 영화 <최종병기 활>의 한 장면. 여전히 허접한 조선 관군과 용맹한 만주 용사들을 대비시키는 한계를 노정했다. 이 후금 침략군의 앞잡이가 다름 아닌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맡겼던 총사령관 강홍립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물론 영화 책임은 아니다. |
같은 시대, 다른 인생
문곡 김수항의 할아버지 김상헌(金尙憲) 등은 사신으로 명나라 북경에 있었는데, 조선이 병란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병부(兵部)에 글을 올려 본국을 구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황제가 순무(巡撫)에게 명하여 정예병을 뽑아 후금의 배후를 공격했으나 패하고 돌아갔다. 국내에서 평안 병사 남이흥은 안주 목사(安州牧使) 김준(金浚) 등과 함께 안주성(安州城)에서 이들을 맞아 전투를 벌이다가 불가항력의 싸움임을 알고 화약을 터뜨려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다.
또 다른 중립외교의 증인이 있다. 정명수(鄭命壽). 광해군 때 강홍립을 따라 출정하였다가 후금의 포로가 되었다. 거기에 눌러 살면서 조선 사정을 밀고함으로써 후에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받았다. 병자호란 때는 용골대(龍骨大)의 통역으로 나와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앞잡이 노릇을 하였고, 청나라의 힘을 믿고 조선 조정을 압박하여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까지 올랐다. 효종 연간에도 친청파 김자점 등과 결탁하여 청나라와 내통하고 급기야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효종 3년 김자점 등은 처형되었고, 정명수도 이듬해 청나라로부터 관직을 빼앗겼다.
▲ 철원군에 있는 김응하 장군의 묘정비 탁본. 무덤이 아니라 사당 앞에 세운 비석이다. 탁본 하는 중이라 글자가 잘 보이지 않지만 맨 위 예서(隸書)로 쓴 '김장군묘비(金將軍廟碑)'라는 글씨는 문곡 김수항이 썼다. ⓒ국립문화재연구소 |
첫째, 바로 국제 관계에서 주체적인 역량을 배양하거나 행사하지 못했고, 둘째, 그러다보니 정세에 기회주의적으로 대응하여 지역의 평화 같은 공통, 공존의 명분은 고려하지 않고 힘의 우열에 따라 처신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람들이 이런 삶보다는 김응하 장군 같은 삶을 기려왔다는 점이다. 나로 말하자면 김응하 장군처럼 싸우다 죽을 무용(武勇)도 없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이름 없이 사라져갈 용기도 없다. 아마 적절히 보신하며 그럭저럭 한 평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렇다고 강홍립-정명수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아니, 설사 강홍립-정명수처럼 살았다고 해도 그것이 제대로 된 삶이었다고 강변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러한 최소한의 수오지심(羞惡之心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김응하 장군 같은 분들, 이름 없는 독립군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아닐까.
'고구려 타령' 좀 그만! 조선은 충분히 강했다!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⑤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 2013.08.02 18:59:00
☞전체 연재 :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예전 중·고등학교에는 '시련과 극복'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입에 발린 상투어로 '숱한 외침을 극복하면서 면면이 이어온 민족의 역사'를 운운할 때마다 나는 '시련과 극복' 과목을 떠올린다. 마침 광해군-인조 시대를 다루다보니 또 자연스럽게 생각이 나서, 시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몇 가지 관점을 정리하고 가겠다.
2.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⑤
"박정희 같은 독재자는 아예 처음부터 역사에 대한 관심을 꺼주는 것이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발전을 위해서 좋은 일이련만, 그는 유달리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전혀 상관없는 역사적 사실을 끌어다가 자신을 정당화하곤 했다. 고려시대 무인정권 이래 군인으로서는 처음 최고 권력을 잡아서인지, 그는 무인정권을 즐겨 찬양했고, 미국과의 관계가 불편해지자 강화도의 신미양요 유적을 대대적으로 복원하기도 했다. 이 무렵 박정희는 이선근이라는 사학자와 죽이 맞아서 그를 초빙 해다가 국무회의에서 '국난 극복사' 강의를 정기적으로 들었는데, <시련과 극복>도 그 아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홍구, <대한민국사-3>(한겨레출판 펴냄))
국무회의에서 '국난 극복사' 강의를 들었다는 대목이 인상적인데, 당시 학교를 다닌 사람들의 뇌리에는 '국사'가 '숱한 외침'이라는 한 마디로 정리되는 경향이 있다. 아마 한홍구 교수가 말한 박정희 정권의 성격과 국정교과서 정책의 영향이었던가 보다.
그러나 이런 인상은 두 가지 점에서 재고할 측면이 있다. 첫째, 단군-고구려로 소급되는 이른바 민족사를 당연시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도 '아국(我國)', '동국(東國)' 등의 표현을 써서 '국사(國史)'를 의미하는 용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역사시험은 보았어도 요즘처럼 국사시험은 없었다. 단군-고구려로 연결하려는 긴 역사는 후대, 그러니까 요즘 사람들의 '인식'이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국사의 탄생은 근대역사학이 국민국가의 탄생에 기여하면서, 즉 정치-역사학을 자임하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공론이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배웠던 것이다.
'숱한 외침'은 없다
둘째, 대략 한반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역사 일반을 인정하더라도 이 땅에 상투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전쟁, 침략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비장한 얼굴로 어깨에 힘주고 '극복'할 전란은 오히려 적었다.
전쟁사가 히로세 다카시가 그려놓은 전쟁 지도를 보면, 1945년 이래 세계에서 전쟁을 하고 있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다.(히로세의 책은 계발성이 없어서 권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류제승 옮김, 책세상 펴냄)을 보라.) 한반도만 해도 3년간의 길고 치명적인 전쟁을 겪었고, 남한은 베트남전에 개입했다. 혹시 우리가 너무 전쟁이 흔한 시대와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도 전쟁이 흔했다고, '시련과 극복'이라는 교과서를 만들어야 할 만큼 흔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조선시대의 경우, 큰 전쟁 두 차례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왜란(정유재란)과 병자호란(정묘호란). 6진 개척, 대마도정벌, 삼포왜란으로 불리는 국지적 전투를 제외하고 대외 전쟁은 없었다. 혹자는 거꾸로 이렇게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문약(文弱)으로 흘렀다는 진단도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만들어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조작된 약소국 의식
'숱한 외침'을 받았다는 세뇌는 그 정치적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조작된 자기피해의식'이다.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피해의식을 뒷받침하는 편견이면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전제가 또 하나 있다. 조선은 약소국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은 약소국이 아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명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은 그의 유훈(遺訓)에서 주변에 정복할 수 없는 16국이 있는데, 첫째가 '고려'(조선)이고, 그 다음이 안남(安南, 월남)이라고 하였다. 말은 '정복할 수 없는 나라'이지만, 실은 명을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있어주면 고마운 나라라는 말도 될 것이다. 명의 기초를 닦은 성조(成祖, 영락제)는 이 유훈을 지키지 않고 안남 여창(黎蒼)의 반란을 토벌한다는 구실로 오랫동안 안남을 공격했다가 엄청난 전비만 들이고 실익 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이 와중에 조선이 불안하였던지 엄청난 전비만 낭비한 그 전쟁을 놓고 '안남을 평정했다'고 허풍을 떠는 조서를 조선에 보내 미리 조선의 움직임을 단속하였다.(<태종실록> 권13, 7년 5월 1일)
중국의 입장에서 주변을 빙 둘러보면 사방이 적인 듯한 느낌이 된다. 한 곳이라도 터지면 어느 곳에서 또 사단이 발생할지 모르는 형국이다. 그러므로 사대(事大)라는 외교 정책에 따라 조선과 명이 우호관계를 유지했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긴장하는 '멀리 할 수도 가까이할 수도 없는[不可遠, 不可近]' 관계였던 데는 이렇듯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의 파병은 조선과 명의 관계를 실질과 명분의 측면에서 한 편, 즉 동맹국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측에서 후금과 가까울 수 없었던 데는 이 시기 확인된 명나라와의 관계도 한몫 했다고 생각한다. 미심쩍고 불안했던 관계가 실제로 안정적인 우호관계임이 확인되었는데, 그걸 어떻게 포기하겠는가.
조선은 주요 상수(常數)이다
병자호란은 후금이 청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황제로 칭하면서 이를 조선에 강요함으로써 발생한 침략 전쟁이었다. 이 무렵 후금의 요구를 놓고 조정에서 논란이 벌어졌는데, 그중 홍익한(洪翼漢)의 말을 살펴보자.
"오랑캐가 황제라 일컫는 것은, 오랑캐가 스스로 황제라고 일컫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조정에서 황제라 일컫게 해서 오랑캐가 할 수 없이 황제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진실로 천자라 일컫고 대위(大位)에 오르고 싶으면 스스로 제 나라에서 황제가 되고 제 나라에 호령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누가 그것을 금하기에 반드시 우리나라에게 물어본 뒤에 황제의 일을 행하려 한단 말입니까." (<인조실록> 권32, 14년 2월 21일)
후금은 조선이 자국을 황제라고 불렀기 때문에 칭제한다는 명분이 필요했다. 후금은 사신 용골대를 보내 그걸 조선에 요구했는데 조선의 홍문관 관원인 홍익한은 그 의도를 꿰뚫어 보고 위와 같이 말했던 것이다. 황제든 청이든 부르고 싶으면 니들끼리 부르면 되지, 왜 조선에 그걸 요구하느냐는 것이었다. 홍문관에서는 "그들이 반드시 우리나라를 이웃 나라로 대우하지 않고 장차 신첩(臣妾)으로 여길 것이며 속국(屬國)으로 여길 것"이라고 경계했다.
결국 요구가 통하지 않자 후금은 군사를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했고, 이것이 병자호란이었다. 이 사실에서도 조선이 동아시아, 아니 당시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중국을 제외하고 가장 윗자리에 있는 나라였다. 그 점을 알기 때문에 청나라는 조선을 무력으로라도 굴복시켜 칭제의 명분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거듭, 조선은 당시 아시아 정세의 상수(常數)였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을 침략했던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정권(조선으로 치면 왕조)이 바뀌었고, 중국에서도 명과 청의 교체가 일어났다.
요즘도 마찬가지이다. 종종 주변 4대 강대국(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틈바구니에 끼어 생존을 모색해야하는 나라로 생각한다. 물론 조선과는 다르다. 남한, 북한이 갈려 있는 탓에, 주변국들은 그 점을 악용하여 분할, 지배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은 인구, 경제력, 군사력 수준에서 세계 10위권이다. 도대체 이런 나라가 약소국이면 강대국은 과연 어디란 말인가?(혹 문화 수준이 낮아서 그렇게 생각하는가?) 제발 주눅 들지 말자. 이제 '시련과 극복' 수준의 멘털리티 좀 벗어나자.
사건의 원인이라는 난제
역사 공부를 할 때 저지르기 쉬운 오류는 대부분 어떤 사건의 원인을 따질 때 일어난다. 이런 사실은 우리를 난처하게 하는데, 왜냐하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다름 아닌 원인에 대한 호기심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좀 달랐지만, 서양에서 역사학의 아버지라도 불리는 헤로도토스도 "이 글은 할리카르낫소스 출신 헤로도토스가 제출하는 탐사 보고서이다. 그 목적은 인간들의 행적이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되고, 헬라스인들과 비(非)-헬라스인들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업적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무엇보다도 헬라스인들과 비헬라스인들이 서로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을 밝히는 데 있다"고 쓰지 않았던가. (헤로도토스, <역사>(천병희 옮김, 숲 펴냄))
그러나 그 '원인'이라는 말이 참 오묘하다. 원인이란 말에는 직접적인 이유도 있지만, 명분, 목적, 토대, 조건 등이 포함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외로 간단치 않은 셈이다. 그래서 심지어 원인-결과에 대한 탐구, 즉 인과관계란 단지 복잡한 것이 아니라, 아예 해결 불가능한 문제라고까지 말하는 학자도 있다. 실제로 역사학자들은 원인이란 말 대신 '영향(influences)', '원동력(impulses)', '요소(elements)', '뿌리(roots)', '기초(bases)', '토대(foundation)'와 같은 표현을 썼다.
원인과 책임의 혼동
원인을 둘러싼 난제 중 하나로, '원인과 책임의 혼동'이라는 오류가 있다. 지난 호에 "후금의 강성은 조선의 피폐를 배경으로 한다. 그것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겠지만, 유력한 원인이다"라고 썼다. 조선이라는 동아시아 외교사의 유력했던 상수를 하잘것없는 변수로 만들어놓은 시기가 바로 광해군 재위 15년간이었기 때문에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정묘호란, 병자호란은 인조 때 일어났다. 여러 정황을 보면 인조를 비롯한 위정자들이 후금과 전쟁을 피하려고 할 수 있는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전쟁의 패배, 특히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굴욕적 패배 때문에 그때나 지금이나 인민들의 심사가 편치 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원인이 무엇이든 위정자는 무한 책임을 진다. 그런 책임을 지라고 정치를 맡긴 것이니까. 그래서 임진왜란 때 선조가 파천하자마자 경복궁이 불탔던 것이다. 왜군들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 백성들의 손에 의해서.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당시 살았던 백성들만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연구하고 읽는 학자나 독자들도 묻는다. 감정이 이입될수록 그 책임 추궁은 심해진다. 역사를 탐구할 때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기도 하다.
인조 때 일어난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경우도 연구자들 사이에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인조 정권, 반정(反正) 세력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 극단적 해석 중 하나가 명나라에 대한 명분(名分)에 사로잡혀 현실 판단을 그르쳤다는 평가이다. 그런 평가가 사실에 비추어 타당한지는 다음번에 검증할 것이지만, 이런 평가가 바로 '책임을 원인으로 착각하는 오류'이다.
거듭 말하지만, 선조든 인조든 위정자는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정치가이다. 그러나 이들 또는 이들의 정책이 전쟁의 원인은 아니다. 원인은 왜군과 후금(청)의 침략이다. 이런 점을 혼동하면 우리는 원인의 늪에 빠져버린다. 이 오류는 윤리적인 문제를 수행자의 문제와 혼동함으로써, 둘 다에 대한 이해를 그르친다. 원래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라는 질문과, "누가 비난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다른 것이다. 이런데 위의 오류는 '왜'라는 질문에 두 가지 질문을 섞고, 대답은 하나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오류를 피하는 방법, 불행하게도 몸도 마음도 조금 떨어져서 보는 것밖에 달리 묘책이 없다.
부국강병의 허상
한 가지만 더하고 마치자. 이상한 약소국 콤플렉스(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는 식민지라는 역사적 경험이 낳은 콤플렉스이다.) 때문에 갖게 된 망상 중의 하나가 거창하게 '웅비사관'이라고도 불리는 '아, 고구려 사관'이다. 그 목표는 곧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슬로건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고려나 조선 문명의 성격은 분명 평화적이다. 흔히 이런 말을 하면, '당하고만 사는 게 무슨 평화주의냐'고 비아냥거리는 분들도 있는데, '부국강병(富國强兵)'에 성공한 나라, 아직 역사상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가 되어야 '부'와 '강'일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은 도대체 돈이 얼마나 있어야 만족하는가, 하는 질문과 같다. 과연 누가 알겠는가? '부'와 '강'은 단지 '어떤 바람직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조건, 그것도 '조절되어야 할 조건'의 하나일 뿐이다." (오항녕,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펴냄)
나는 전형적인 태음인이다. 간대폐소(肝大肺小). 100미터 달리기, 수영 등 숨 차는 운동은 잘 못한다. 대신 술은 잘 마시는 편이다. 알코올 분해 능력이 뛰어나므로. 이런 체질은 해부학적으로도 간이 크단다. 해부해보지 않아서 미처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반면 아내는 술을 못한다. 자, 질문이다. 그러면 누가 술로 인해 죽을병에 걸릴 확률이 높을까?
왜 그토록 숱한 인류의 현자(賢者)들이 부국강병을 패도(覇道), 즉 깡패 논리라고 비판했는지 이쯤 되면 알 수 있다. 부국강병에 앞서 해야 할 일은 어떻게 공존, 공영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일 것이다. 그게 생명에 이롭다.
예전 중·고등학교에는 '시련과 극복'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입에 발린 상투어로 '숱한 외침을 극복하면서 면면이 이어온 민족의 역사'를 운운할 때마다 나는 '시련과 극복' 과목을 떠올린다. 마침 광해군-인조 시대를 다루다보니 또 자연스럽게 생각이 나서, 시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몇 가지 관점을 정리하고 가겠다.
2.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⑤
"박정희 같은 독재자는 아예 처음부터 역사에 대한 관심을 꺼주는 것이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발전을 위해서 좋은 일이련만, 그는 유달리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전혀 상관없는 역사적 사실을 끌어다가 자신을 정당화하곤 했다. 고려시대 무인정권 이래 군인으로서는 처음 최고 권력을 잡아서인지, 그는 무인정권을 즐겨 찬양했고, 미국과의 관계가 불편해지자 강화도의 신미양요 유적을 대대적으로 복원하기도 했다. 이 무렵 박정희는 이선근이라는 사학자와 죽이 맞아서 그를 초빙 해다가 국무회의에서 '국난 극복사' 강의를 정기적으로 들었는데, <시련과 극복>도 그 아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홍구, <대한민국사-3>(한겨레출판 펴냄))
▲ 1972년에 간행된 '시련과 극복' 교과서 : 정말 나는 '민족의 역사'가 숱한 침략에 시달렸던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극복'은 별로 기억이 남지 않는다. 과목의 소속도 불분명했던 '시련과 극복'이라는 교과서를 배운 소회이다. (네이버 블로그 '한옹가'에서 퍼옴.) ⓒ한옹가 |
그러나 이런 인상은 두 가지 점에서 재고할 측면이 있다. 첫째, 단군-고구려로 소급되는 이른바 민족사를 당연시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도 '아국(我國)', '동국(東國)' 등의 표현을 써서 '국사(國史)'를 의미하는 용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역사시험은 보았어도 요즘처럼 국사시험은 없었다. 단군-고구려로 연결하려는 긴 역사는 후대, 그러니까 요즘 사람들의 '인식'이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국사의 탄생은 근대역사학이 국민국가의 탄생에 기여하면서, 즉 정치-역사학을 자임하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공론이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배웠던 것이다.
'숱한 외침'은 없다
둘째, 대략 한반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역사 일반을 인정하더라도 이 땅에 상투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전쟁, 침략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비장한 얼굴로 어깨에 힘주고 '극복'할 전란은 오히려 적었다.
전쟁사가 히로세 다카시가 그려놓은 전쟁 지도를 보면, 1945년 이래 세계에서 전쟁을 하고 있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다.(히로세의 책은 계발성이 없어서 권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류제승 옮김, 책세상 펴냄)을 보라.) 한반도만 해도 3년간의 길고 치명적인 전쟁을 겪었고, 남한은 베트남전에 개입했다. 혹시 우리가 너무 전쟁이 흔한 시대와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도 전쟁이 흔했다고, '시련과 극복'이라는 교과서를 만들어야 할 만큼 흔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조선시대의 경우, 큰 전쟁 두 차례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왜란(정유재란)과 병자호란(정묘호란). 6진 개척, 대마도정벌, 삼포왜란으로 불리는 국지적 전투를 제외하고 대외 전쟁은 없었다. 혹자는 거꾸로 이렇게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문약(文弱)으로 흘렀다는 진단도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만들어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조작된 약소국 의식
'숱한 외침'을 받았다는 세뇌는 그 정치적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조작된 자기피해의식'이다.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피해의식을 뒷받침하는 편견이면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전제가 또 하나 있다. 조선은 약소국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은 약소국이 아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명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은 그의 유훈(遺訓)에서 주변에 정복할 수 없는 16국이 있는데, 첫째가 '고려'(조선)이고, 그 다음이 안남(安南, 월남)이라고 하였다. 말은 '정복할 수 없는 나라'이지만, 실은 명을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있어주면 고마운 나라라는 말도 될 것이다. 명의 기초를 닦은 성조(成祖, 영락제)는 이 유훈을 지키지 않고 안남 여창(黎蒼)의 반란을 토벌한다는 구실로 오랫동안 안남을 공격했다가 엄청난 전비만 들이고 실익 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이 와중에 조선이 불안하였던지 엄청난 전비만 낭비한 그 전쟁을 놓고 '안남을 평정했다'고 허풍을 떠는 조서를 조선에 보내 미리 조선의 움직임을 단속하였다.(<태종실록> 권13, 7년 5월 1일)
중국의 입장에서 주변을 빙 둘러보면 사방이 적인 듯한 느낌이 된다. 한 곳이라도 터지면 어느 곳에서 또 사단이 발생할지 모르는 형국이다. 그러므로 사대(事大)라는 외교 정책에 따라 조선과 명이 우호관계를 유지했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긴장하는 '멀리 할 수도 가까이할 수도 없는[不可遠, 不可近]' 관계였던 데는 이렇듯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의 파병은 조선과 명의 관계를 실질과 명분의 측면에서 한 편, 즉 동맹국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측에서 후금과 가까울 수 없었던 데는 이 시기 확인된 명나라와의 관계도 한몫 했다고 생각한다. 미심쩍고 불안했던 관계가 실제로 안정적인 우호관계임이 확인되었는데, 그걸 어떻게 포기하겠는가.
조선은 주요 상수(常數)이다
병자호란은 후금이 청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황제로 칭하면서 이를 조선에 강요함으로써 발생한 침략 전쟁이었다. 이 무렵 후금의 요구를 놓고 조정에서 논란이 벌어졌는데, 그중 홍익한(洪翼漢)의 말을 살펴보자.
"오랑캐가 황제라 일컫는 것은, 오랑캐가 스스로 황제라고 일컫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조정에서 황제라 일컫게 해서 오랑캐가 할 수 없이 황제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진실로 천자라 일컫고 대위(大位)에 오르고 싶으면 스스로 제 나라에서 황제가 되고 제 나라에 호령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누가 그것을 금하기에 반드시 우리나라에게 물어본 뒤에 황제의 일을 행하려 한단 말입니까." (<인조실록> 권32, 14년 2월 21일)
후금은 조선이 자국을 황제라고 불렀기 때문에 칭제한다는 명분이 필요했다. 후금은 사신 용골대를 보내 그걸 조선에 요구했는데 조선의 홍문관 관원인 홍익한은 그 의도를 꿰뚫어 보고 위와 같이 말했던 것이다. 황제든 청이든 부르고 싶으면 니들끼리 부르면 되지, 왜 조선에 그걸 요구하느냐는 것이었다. 홍문관에서는 "그들이 반드시 우리나라를 이웃 나라로 대우하지 않고 장차 신첩(臣妾)으로 여길 것이며 속국(屬國)으로 여길 것"이라고 경계했다.
결국 요구가 통하지 않자 후금은 군사를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했고, 이것이 병자호란이었다. 이 사실에서도 조선이 동아시아, 아니 당시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중국을 제외하고 가장 윗자리에 있는 나라였다. 그 점을 알기 때문에 청나라는 조선을 무력으로라도 굴복시켜 칭제의 명분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거듭, 조선은 당시 아시아 정세의 상수(常數)였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을 침략했던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정권(조선으로 치면 왕조)이 바뀌었고, 중국에서도 명과 청의 교체가 일어났다.
요즘도 마찬가지이다. 종종 주변 4대 강대국(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틈바구니에 끼어 생존을 모색해야하는 나라로 생각한다. 물론 조선과는 다르다. 남한, 북한이 갈려 있는 탓에, 주변국들은 그 점을 악용하여 분할, 지배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은 인구, 경제력, 군사력 수준에서 세계 10위권이다. 도대체 이런 나라가 약소국이면 강대국은 과연 어디란 말인가?(혹 문화 수준이 낮아서 그렇게 생각하는가?) 제발 주눅 들지 말자. 이제 '시련과 극복' 수준의 멘털리티 좀 벗어나자.
사건의 원인이라는 난제
역사 공부를 할 때 저지르기 쉬운 오류는 대부분 어떤 사건의 원인을 따질 때 일어난다. 이런 사실은 우리를 난처하게 하는데, 왜냐하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다름 아닌 원인에 대한 호기심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좀 달랐지만, 서양에서 역사학의 아버지라도 불리는 헤로도토스도 "이 글은 할리카르낫소스 출신 헤로도토스가 제출하는 탐사 보고서이다. 그 목적은 인간들의 행적이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되고, 헬라스인들과 비(非)-헬라스인들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업적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무엇보다도 헬라스인들과 비헬라스인들이 서로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을 밝히는 데 있다"고 쓰지 않았던가. (헤로도토스, <역사>(천병희 옮김, 숲 펴냄))
그러나 그 '원인'이라는 말이 참 오묘하다. 원인이란 말에는 직접적인 이유도 있지만, 명분, 목적, 토대, 조건 등이 포함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외로 간단치 않은 셈이다. 그래서 심지어 원인-결과에 대한 탐구, 즉 인과관계란 단지 복잡한 것이 아니라, 아예 해결 불가능한 문제라고까지 말하는 학자도 있다. 실제로 역사학자들은 원인이란 말 대신 '영향(influences)', '원동력(impulses)', '요소(elements)', '뿌리(roots)', '기초(bases)', '토대(foundation)'와 같은 표현을 썼다.
원인과 책임의 혼동
원인을 둘러싼 난제 중 하나로, '원인과 책임의 혼동'이라는 오류가 있다. 지난 호에 "후금의 강성은 조선의 피폐를 배경으로 한다. 그것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겠지만, 유력한 원인이다"라고 썼다. 조선이라는 동아시아 외교사의 유력했던 상수를 하잘것없는 변수로 만들어놓은 시기가 바로 광해군 재위 15년간이었기 때문에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정묘호란, 병자호란은 인조 때 일어났다. 여러 정황을 보면 인조를 비롯한 위정자들이 후금과 전쟁을 피하려고 할 수 있는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전쟁의 패배, 특히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굴욕적 패배 때문에 그때나 지금이나 인민들의 심사가 편치 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원인이 무엇이든 위정자는 무한 책임을 진다. 그런 책임을 지라고 정치를 맡긴 것이니까. 그래서 임진왜란 때 선조가 파천하자마자 경복궁이 불탔던 것이다. 왜군들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 백성들의 손에 의해서.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당시 살았던 백성들만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연구하고 읽는 학자나 독자들도 묻는다. 감정이 이입될수록 그 책임 추궁은 심해진다. 역사를 탐구할 때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기도 하다.
인조 때 일어난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경우도 연구자들 사이에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인조 정권, 반정(反正) 세력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 극단적 해석 중 하나가 명나라에 대한 명분(名分)에 사로잡혀 현실 판단을 그르쳤다는 평가이다. 그런 평가가 사실에 비추어 타당한지는 다음번에 검증할 것이지만, 이런 평가가 바로 '책임을 원인으로 착각하는 오류'이다.
거듭 말하지만, 선조든 인조든 위정자는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정치가이다. 그러나 이들 또는 이들의 정책이 전쟁의 원인은 아니다. 원인은 왜군과 후금(청)의 침략이다. 이런 점을 혼동하면 우리는 원인의 늪에 빠져버린다. 이 오류는 윤리적인 문제를 수행자의 문제와 혼동함으로써, 둘 다에 대한 이해를 그르친다. 원래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라는 질문과, "누가 비난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다른 것이다. 이런데 위의 오류는 '왜'라는 질문에 두 가지 질문을 섞고, 대답은 하나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오류를 피하는 방법, 불행하게도 몸도 마음도 조금 떨어져서 보는 것밖에 달리 묘책이 없다.
부국강병의 허상
한 가지만 더하고 마치자. 이상한 약소국 콤플렉스(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는 식민지라는 역사적 경험이 낳은 콤플렉스이다.) 때문에 갖게 된 망상 중의 하나가 거창하게 '웅비사관'이라고도 불리는 '아, 고구려 사관'이다. 그 목표는 곧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슬로건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고려나 조선 문명의 성격은 분명 평화적이다. 흔히 이런 말을 하면, '당하고만 사는 게 무슨 평화주의냐'고 비아냥거리는 분들도 있는데, '부국강병(富國强兵)'에 성공한 나라, 아직 역사상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가 되어야 '부'와 '강'일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은 도대체 돈이 얼마나 있어야 만족하는가, 하는 질문과 같다. 과연 누가 알겠는가? '부'와 '강'은 단지 '어떤 바람직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조건, 그것도 '조절되어야 할 조건'의 하나일 뿐이다." (오항녕,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펴냄)
▲ 술 못 마시는 사람은 술로 죽지 않는다. 술 잘 마시는 사람이 술로 죽는다. 군대가 약한 나라는 전쟁으로 망하지 않는다. 군대가 강한 나라가 전쟁 하다가 망한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저만 죽지만, 후자는 저도 죽고 상대도 죽는다. |
나는 전형적인 태음인이다. 간대폐소(肝大肺小). 100미터 달리기, 수영 등 숨 차는 운동은 잘 못한다. 대신 술은 잘 마시는 편이다. 알코올 분해 능력이 뛰어나므로. 이런 체질은 해부학적으로도 간이 크단다. 해부해보지 않아서 미처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반면 아내는 술을 못한다. 자, 질문이다. 그러면 누가 술로 인해 죽을병에 걸릴 확률이 높을까?
왜 그토록 숱한 인류의 현자(賢者)들이 부국강병을 패도(覇道), 즉 깡패 논리라고 비판했는지 이쯤 되면 알 수 있다. 부국강병에 앞서 해야 할 일은 어떻게 공존, 공영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일 것이다. 그게 생명에 이롭다.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⑥
[프레시안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
☞전체 연재 :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2.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⑥
가깝고도 먼 사람들
종종 역사에는 어려운 운명을 보여주는 인물이 있는데, 문곡 김수항도 그런 경우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할아버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이모부는 유자신(柳自新, 1533~1612)이었고, 광해군의 부인, 즉 왕비 유씨는 청음의 이종 4촌 누이였다. 그러니까 청음과 광해군은 4촌 처남매부 사이이다.
그런데 문곡의 어머니는 연안 김씨로, 김래(金琜, 1576~1613)의 딸이고 김제남(金悌男, 1562~1613)의 손녀였다. 김래와 김제남이 세상을 뜬 해가 1613년이다. 그렇다. 광해군 5년 계축옥사가 있었던 해이다. 김래는 인목대비의 오빠이다. 김제남은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였고. 그러므로 인목대비는 문곡의 외고모할머니이다.
당시 문곡은 태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문곡은 할아버지의 매형인 광해군에게 외조부 김래, 외증조부 김제남을 잃은 것이다. 계축옥사 이듬해에 살해된 영창대군은 살아있었다면 문곡의 당숙이 되었을 것이다.
청음은 최고 권력자인 국왕과 인척이었고, 또 그 국왕이 사지에 몰아넣은 집안과도 인척이었다. 대개 사람들은 이럴 때 어떻게 처신할까? 청음의 처신은 이미 다루었으니 반복할 것은 없다. 다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묻는 것이다.
문곡의 기억
나중에 문곡은 외조부인 김래의 동생 김선(金瑄, 1599~1614)의 묘지명을 썼다. 묘지명은 죽은 사람과 함께 무덤에 묻는 그 사람의 일대기를 말한다. 그가 광해군대의 사건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불과 16세에 세상을 뜬 김선에 대한 문곡의 기록을 보자.
선조께서 승하하신 뒤 간신(姦臣)이 광해군(光海君)에게 아첨하여 모후(母后)를 폐위하려 모의했고, 없는 죄를 교묘하게 꾸며 큰 옥사를 만들어냈다. 의민공(懿愍公, 김제남)이 가장 먼저 재앙을 입었으며 나의 외조부(김래)와 중씨(仲氏) 진사공(進士公, 김규(金珪))도 비명에 세상을 떠났다.
공은 당시 아직 어렸으므로 홀로 감옥에 갇힌 채 형을 받을 나이만을 기다렸다. 공은 부형(父兄) 모두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보고 괴로워하며 하루도 혼자서는 살고 싶지 않아 옥중에서 상소하여, "나이가 실제로 찼으니 법을 시행해야 하고, 처음에 바른대로 대답하지 않은 것도 죄이니 속히 죽여주십시오"라고 했다. 그 문장이 너무 슬프고 아파서 듣는 사람이 목이 멜 정도였다.
이듬해에 이르러 마침내 해를 당하니 갑인년(1614, 광해군6) 2월 4일이었다.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仁祖)께서 사직을 안정시키고 억울한 무옥(誣獄)을 씻어주며 의민공에게 영의정 및 시호를 추증하고, 공에게도 사헌부 지평을 추증했다. (<문곡집> '지평으로 추증된 김공의 묘지명[贈持平金公墓誌銘]')
'의민공'은 김제남에게 인조반정 이후 준 시호이다. 이 '민(愍)' 자는 안타깝게 여긴다는 뜻이다. 시호는 대개 훌륭하다고 기리는 칭호이지만, 이렇게 화를 당해 비명에 세상을 뜬 사람들에게 주기도 한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세자빈이었던 강씨(姜氏)는 저주의 혐의를 받고 인조 24년(1646) 3월에 폐출되어 사사되었다. 나중에 이 역시 억울한 사건으로 인정되어 숙종 44년(1718) 위패와 시호를 회복하였는데, 그 때 시호가 '민회(愍懷)'였다. 실록에서는 이를 두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가 지위를 잃고 죽은 것을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게 만들었다는 뜻을 가져온 것이다"라고 하였다. (<국역 숙종실록> 권61 44년 4월 17일(을미)) 역사공부를 하다가 시호가 좀 낯설면 무슨 일이 있었나 살펴볼 일이다.
계축옥사는 서양갑(徐羊甲) 등이 김제남 등과 함께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했다면서 이이첨 등이 만들어낸 거짓 옥사였다. 이 묘지명의 주인공인 김선은 계축옥사 당시 15세였기 때문에, <대명률>에 따라 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었다. 이듬해인 광해군 6년, 김선이 16세가 되어 형장을 가해도 될 나이가 되자 광해군은 그에게 압슬(壓膝) 등의 형문을 가하였다. 그리고 김선은 죽었다.
축소의 혐의
이렇게 광해군대가 흘러갔고, 계해반정이 일어났다. 그동안 연구자들은 광해군을 쫓아낸 명분으로 흔히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였다[廢母殺弟]', '명나라를 저버리고 후금과 친했다[背明親金]'는 죄명을 거론해 왔다. 전자는 '원래 정치는 비정한 것'이라는 상투어 속에서 그 부당성이 희석되었고, 후자는 '반정 주체들의 맹목적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대한 비난 속에서 오히려 광해군의 중립외교로 높이 되었다. 계해반정 때문에 조선의 정책은 사대주의의 강화로 이어졌고, 두 차례에 걸친 후금(청)의 침략을 자초했다는 인식의 결과였다. 그러나 반정교서를 보면 그동안 연구자들의 해석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습 삼아 반정교서에서 밝힌 반정 사유를 알아보자.
① 선묘(宣廟)의 아들이 된 자는 나를 어미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광해는 참소하는 간신의 말을 믿고 스스로 시기하여 나의 부모를 형살하고 나의 종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품안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주는 등 인륜의 도리라곤 다시 없었다.
② 형을 해치고 아우를 죽였으며 여러 조카를 도륙하고 서모(庶母)를 쳐 죽였으며,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다.
③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두 채의 궁궐을 건축하는 등 토목 공사를 10년 동안 그치지 않았다.
④ 선왕조의 옛 신하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내쫓고, 오직 악행을 조장하며 아첨하는 인아(姻婭. 혼인관계가 있는 친척)와 부시(婦寺. 후궁, 궁녀나 환관)들만을 높이고 신임했다.
⑤ 인사는 뇌물만으로 이루어져서 혼암한 자들이 조정에 차있고, 돈을 실어 나르며 벼슬을 사고파는 것이 마치 장사꾼 같았다.
⑥ 부역이 번다하고 가렴주구는 한이 없어 백성들은 그 학정을 견디지 못하여 도탄에서 울부짖으므로 종묘사직의 위태로움은 마치 가느다란 실끈과 같았다.
⑦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00여 년이라,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그리고 임진년에 재조(再造)해 준 그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기미년(광해군 11년) 오랑캐를 정벌할 때는 은밀히 장수에게 동태를 보아 행동하라고 지시했고, 끝내 모든 군사가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온 세상에 퍼지게 했다. (<국역 인조실록> 권1 원년 3월 14일. 일곱 가지로 분류한 것은 필자.)
흔히 '폐모살제'라는 말은 1항과 2항 일부를 줄인 표현이며, 광해군의 '배명친금'을 비판한 반정 슬로건에 일치하는 항목은 7항이다. 2항(일부)·3항·4항·5항·6항은 지금까지 연구자들 사이에서 광해군의 실정(失政)으로 그다지 언급되지 않았거나 애매하게 처리되었다. ② 옥사로 인한 왕실 및 정치기반의 이탈, ③ 궁궐 공사에 쏟아 부은 재정 부담, ④ 문치주의 시스템 붕괴 및 외척과 내시나 내명부(內命婦)는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조선시대 내내 지켜졌던 원칙의 파기, ⑤ 매관매직으로 인한 관료제 시스템의 붕괴, ⑥ 세금과 부역의 과중 등으로 백성들의 피폐함 등이 결코 사소한 이유는 아닌데도 말이다.
물론 '폐모살제'와 '배명친금' 역시 중요한 반정 사유였다. 그러나 나머지 5개 항목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반정의 이유였다. 나아가 '폐모살제'와 '배명친금'이 5개 항목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태였다면? 그동안 '폐모살제' 따로, '배명친금' 따로, 4개 항목은 눈감거나 얼버무리는 방식으로 광해군대를 이해했던 태도는, 사실의 측면에서 부정확하고, 관점의 측면에서 불합리하며, 윤리의 측면에서는 불공정하다. (이 문제는 나의 저서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펴냄)에서 다루었는데, 조금 수정하였다. 다만, 숭명배금(崇明背金)은 물론, 배명친금(背明親金)이란 말도 조선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배명'이란 말은 간혹 쓰였다. 반정 명분이 폐모살제와 배명친금이라는 두 가지로 단순화된 과정 역시 흥미로운 '현대 사학사'의 연구 주제이다.)
불행한 유산
반정 직후, 15년 이상 지속되던 궁궐공사를 즉시 중단했다. 그리고 궁궐을 짓기 위해 설치했던 영건도감을 비롯하여, 나례도감(儺禮都監) 등 12개의 난립했던 도감도 혁파하였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던 조도성책(調度成冊, 특별 세금 징수대장)을 소각하는 한편, 민간에 부과되었던 쌀과 포를 탕감해주었다. 인조 즉위 후 탕감한 양이 원곡(元穀) 11만 석이었다. 당시 호조에서 거두던 1년 세금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삭감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라 살림도 아끼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공상지(供上紙)가 각도의 폐단이 된다는 말에, 대비전(大妃殿)에 바치는 것을 제외한 그 나머지는 모두 혁파하여 민생을 소생시키도록 하였다. 사간원의 건의로, 광해군의 토목공사 때 석재와 철물을 헌납하고 자급을 뛰어 넘어 수령 및 동반의 실직을 차지하거나 종실로 봉군된 자들을 찾아내어 도태시켜 혼탁해진 관직 상황을 바로잡았다.
인조 2년이 되어도 재정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흉년이 겹쳤기 때문이다. 광흥창(廣興倉)의 비축분이 모자라 관원의 녹봉을 반으로 줄이는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조선 초유의 사태였다. 또한 종묘·사직·능침(陵寢)의 제향과 삼전(三殿)의 어공, 진상하는 방물, 모든 관원의 녹봉을 임진년(1592) 이후의 전례에 따라 모두 줄였다. 광해군이 남긴 실정의 영향은 임진왜란과 비슷했던 셈이다.
특히 기억해둘 일이 있다. <광해군일기>는 조선시대 유일하게 간행되지 못했다. 활자본으로 5부를 찍어 춘추관과 지방 4대 사고에 보관하지 못하고, 중초본과 정초본의 형태로 <광해군일기>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이유는, 바로 재정의 부족이다. 재정이 궁핍하여 국왕이 즉위하면 제일 먼저 1~2년 만에 간행하던 관례를 어길 수밖에 없었던 사실 그 자체에, <광해군일기>가 전해주는 또 다른 역사의 진실이 있다.
상시가(傷時歌)의 앞과 뒤
계해반정 이후 반정세력은 즉시 정치시스템의 복구를 시도했다. 광해군대 중단되었던 경연(經筵)을 개시하여 국왕과 신하들이 소통하는 문치주의 체제를 다시 가동시켰다. 이는 당장 국정에 필요한 의사결정을 위해서도 시급했고, 새로운 국왕 인조에게 전통적인 시스템을 훈련시킬 필요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정은 필연적으로 정치세력의 교체를 초래하기 마련이었고, 정권의 연착륙은 바로 이러한 정치세력 교체의 연착륙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때는 그리 좋지 않았다. 일단 반정으로 혼군(昏君) 광해군을 교체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반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반정과 함께 한달 여 동안 광해조 권신인 이이첨 등을 비롯하여 상궁, 나인(內人)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조사와 신문이 이어졌다.
15년의 기득권이 일거에 사라질 수는 없었다. 인조 원년 7월 말, 기자헌을 우두머리로 삼았다는 유전(柳湔)과 유응형(柳應泂) 역모사건이 터졌다. 직접 연관되지 않았으나, 유몽인(柳夢寅)은 아들 유약(柳瀹)으로 인해 이 사건과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유전의 옥사가 끝나기 무섭게 10월 1일 저녁에 이시언(李時言)이 이유림(李有林)의 반역을 고변하였다.
주목할 만한 사건은 단연 이괄(李适)의 난이었다. 이괄은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계해반정의 주축이기도 했다. 반정 이후 북방 방어가 시급했던 까닭에 조정에서는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의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에 이괄을 임명되어 영변에 주둔하게 했다. 1624년 1월에 문회(文晦), 이우(李佑) 등은 이괄과 그의 아들 전(旃)·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이시언(李時言)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했다.
이괄 군대가 개성으로 진격함에 따라 인조는 공주로 피난 갔고, 2월 11일 반군은 서울에 입성하여 경복궁 옛터에 주둔하여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들은 도원수 장만 군사와 안현(鞍峴) 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위세를 떨쳤고, 2월 15일 이천(利川)에서 부하 장수인 기익헌과 이수백에게 이괄이 죽음을 당함으로써 궤멸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대북 잔여 세력의 반역은 계속되었다. 인조 2년 4월, 이괄의 난의 여파로 김정립(金廷立)의 무고 사건이 발생하였는가 하면, 같은 해 10월 경상도에서 "정인홍(鄭仁弘)의 나머지 자손[餘孼]으로 이 현에 살고 있는 박건갑(朴乾甲) 3부자 등이, 병사또[兵使道]가 통제사(統制使)와 군사를 이끌고 임금님을 모실 때, 길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몰래 해치워 부형(父兄)들의 원수를 갚을 계획"이었다가 군대의 위세가 무척 엄격하자 원하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뒤를 이어 11월 8일에는 박홍구(朴弘耈)의 옥사가 있었다. 다음 해인 인조 3년(1625) 9월 8일에는 문회(文晦)가 인성군(麟城君) 이우(李佑)를 둘러싼 역모를 고발했는데, 이것이 박응성(朴應晟) 역모사건이다. 가까스로 정묘호란을 수습했던 인조 6년(1628) 1월 3일에도 반역 사건이 있었다. 죽산(竹山)에 사는 김진성(金振聲)·김득성(金得聲)·신서회(申瑞檜)·이두견(李斗堅) 등이 승정원에 나아와 허유(許逌)와 이우명(李友明)이 반역을 일으킨 사실을 고변하였다. 이어 송광유(宋匡裕), 끝치(唜致), 이충경(李忠慶), 한선내(韓善乃), 김대기(金大器), 원충립(元忠立), 이경검(李景儉), 정한(鄭澣) 등 크고 작은 반역 사건이 계속 발생하였다.
인조반정의 허구성, 또는 쿠데타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연구자들이 종종 인용하는 <상시가(傷時歌)>라는 글이 있다. <인조실록>에도 나오고, 조선시대 반역사건 심문 기록을 모아놓은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도 나온다. 인조 3년 6월 19일, '흉한 격서(激書)'가 군영(軍營)에 투입되었다. 군영은 곧 반정을 일으킨 4대장 중 한 명인 신경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직숙(直宿)하는 곳이었다.
아, 너희 훈신들아 嗟爾勳臣
스스로 뽐내지 말라 毋庸自誇
그의 집에 살면서 爰處其室
그의 전토를 점유하고 乃占其田
그의 말을 타며 且乘其馬
그의 일을 행한다면 又行其事
너희들과 그 사람이 爾與其人
다를 게 뭐가 있나 顧何異哉!
반정 뒤의 공신들이 갖는 권력은 하늘을 찔렀을지 모른다. 실제로 광해군 때 권세를 부린 자들의 가옥과 재산을 훈신(勳臣)들에게 나누어줄 때 광해군 때 권신들이 도둑질했던 것도 차지하고 백성들에게 돌려주지 않음으로써 원성을 사기도 했다. 그런데 '상시가'와 함께 기억할 사실은 공신(功臣)에게 주는 세곡(稅穀)도 일시 중지시켰다는 점이다.
선조(宣祖) 때 광국(光國)·호성(扈聖) 등 여러 공신에게 세곡을 주지 않은 것은 시세를 참작하여 어쩔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정사(靖社)의 공은 막대한 공적이기는 하나 공로를 보답하는 은전(恩典)은 물력을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오늘날 공사(公私)간에 재물이 바닥나고 세입(稅入)이 부족하여 제향(祭享)과 어공(御供)도 모두 줄였습니다. 많은 공신들에게 전례대로 세곡을 지급하는 것은 결코 이어갈 방도가 없습니다. 서쪽 변방의 일이 진정되고 나라의 저축이 조금 넉넉해질 때까지 선조 때의 옛 규례에 따라 세곡을 주는 일을 거행하지 마십시오. (<국역 인조실록> 권5 2년 3월 27일(신사))
사헌부에서는 공신에게 세곡을 주도록 법전에 나와 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세곡 지급을 중지하자고 청하였고, 인조는 3년 동안 세곡을 주지 말도록 조치하였다. 이 역시 조선 초유의 일이었다. 공신이 세곡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시가>를 인용하여 광해군대나 인조대나 마찬가지라고, "갈아봤자 별 수 없다"고 주장할 때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렇듯 농업 생산력이 거의 전부였던 시대에 광해군이 도탄에 빠트린 나라의 업(業)은 착실하게 고스란히 인조 시대로 전이되었다. 재정과 민생의 파탄에서만 불행한 유산이 남겨진 것은 아니었다. 반정에 반대하는 광해군대의 기득권 세력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반정에 동의한 세력은 동의한 세력대로, 정치권력에서 배제된 세력은 배제된 세력대로 정리가 필요했고 나름의 길을 선택하였다. 어느 경우든 거기에는 업(業)을 풀기 위한 수행이 필요했다.
대명의리란?
청음과 관련된 척화론과 대명의리의 실제에 대한 자료를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청음은 인조반정 당시 어머니 이씨의 상중이었으므로 조정에 들어오지 않았다가 이듬해인 1624년 55세에 승문원 부제조로 입조하였다. 정묘호란 때는 명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가 있었으므로 전란을 국내에서 겪지 않았다. 그러나 모문룡의 조선을 명나라 조정에 무함한 일을 석명하였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병부에 글을 올려 출병을 청하였고, 그에 따라 명나라는 수병(水兵) 수천 명을 압록강으로 보내는 등 외교력을 발휘하였다.
궁금한 대목은 청음이 귀국한 뒤의 일이다. 청음은 인조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명나라 조정은 내관(內官)이 정권을 독단하며 현사가 배척받고 언관이 삭적되어 조정을 떠난다"고 말하였다. 한편 병자호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 국사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사간원은 인조에게 "숭정황제가 국사에 나태하여 나라를 망친 일과 광해군의 일을 인용하여 거울로 삼으라"고 하거나, "숭정 시기는 안으로 현명한 재상도 없었고 밖으로 이름난 장수도 없었다. 이교(異敎)를 숭상하고 환관(宦官)을 총애했으니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명나라의 실정 상황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므로 흔히 생각하듯 척화론자들의 명나라에 대한 인식이 맹목적이었다고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 명나라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조선 후기 정치가나 학자들 사이에서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다.
특히 병자호란 무렵 후금과 화의(和議)를 거부하겠다는 척화(斥和) 의리는 홍익한(洪翼漢)이 천자(天子)로 칭하려는 청의 의도를 명료히 표현한 데서 확인하였듯이 조선의 자주성에 대한 침해를 거부하는 논리였다. 이러한 자기의식은 "내 스스로 애걸하면 적은 더욱 조선을 경멸하여 진정한 화의는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오직 한 마음으로 싸워 지킬 수 있음을 보여준 후에야 강화를 의논할 수 있습니다"라는 홍문관 교리 윤집(尹集)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토양 위에서 당색을 불문하고 척화 의리는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후금이 천자라고 칭하는 것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것이지 상관할 바 아니며 조선은 조선대로 판단하겠다는 자기의식이 가능했던 것이다. 만일 명나라의 현실에 대해 맹목적인 추종을 보였다면, 그런 조선 사람들의 태도는 자기의식이 아니라 소외의식이라고 해야 마땅하겠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았다. '주체의식과 대립되지 않는 대명의리', 앞으로 좀 더 진중히 검토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문곡의 미래를 결정하는 시기라 좀 길게 다루었다. 이제 문곡의 어린 시절부터 하나하나 그의 삶의 궤적을 훑어보자.
[프레시안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
☞전체 연재 :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2.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⑥
가깝고도 먼 사람들
종종 역사에는 어려운 운명을 보여주는 인물이 있는데, 문곡 김수항도 그런 경우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할아버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이모부는 유자신(柳自新, 1533~1612)이었고, 광해군의 부인, 즉 왕비 유씨는 청음의 이종 4촌 누이였다. 그러니까 청음과 광해군은 4촌 처남매부 사이이다.
그런데 문곡의 어머니는 연안 김씨로, 김래(金琜, 1576~1613)의 딸이고 김제남(金悌男, 1562~1613)의 손녀였다. 김래와 김제남이 세상을 뜬 해가 1613년이다. 그렇다. 광해군 5년 계축옥사가 있었던 해이다. 김래는 인목대비의 오빠이다. 김제남은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였고. 그러므로 인목대비는 문곡의 외고모할머니이다.
당시 문곡은 태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문곡은 할아버지의 매형인 광해군에게 외조부 김래, 외증조부 김제남을 잃은 것이다. 계축옥사 이듬해에 살해된 영창대군은 살아있었다면 문곡의 당숙이 되었을 것이다.
청음은 최고 권력자인 국왕과 인척이었고, 또 그 국왕이 사지에 몰아넣은 집안과도 인척이었다. 대개 사람들은 이럴 때 어떻게 처신할까? 청음의 처신은 이미 다루었으니 반복할 것은 없다. 다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묻는 것이다.
문곡의 기억
나중에 문곡은 외조부인 김래의 동생 김선(金瑄, 1599~1614)의 묘지명을 썼다. 묘지명은 죽은 사람과 함께 무덤에 묻는 그 사람의 일대기를 말한다. 그가 광해군대의 사건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불과 16세에 세상을 뜬 김선에 대한 문곡의 기록을 보자.
선조께서 승하하신 뒤 간신(姦臣)이 광해군(光海君)에게 아첨하여 모후(母后)를 폐위하려 모의했고, 없는 죄를 교묘하게 꾸며 큰 옥사를 만들어냈다. 의민공(懿愍公, 김제남)이 가장 먼저 재앙을 입었으며 나의 외조부(김래)와 중씨(仲氏) 진사공(進士公, 김규(金珪))도 비명에 세상을 떠났다.
공은 당시 아직 어렸으므로 홀로 감옥에 갇힌 채 형을 받을 나이만을 기다렸다. 공은 부형(父兄) 모두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보고 괴로워하며 하루도 혼자서는 살고 싶지 않아 옥중에서 상소하여, "나이가 실제로 찼으니 법을 시행해야 하고, 처음에 바른대로 대답하지 않은 것도 죄이니 속히 죽여주십시오"라고 했다. 그 문장이 너무 슬프고 아파서 듣는 사람이 목이 멜 정도였다.
이듬해에 이르러 마침내 해를 당하니 갑인년(1614, 광해군6) 2월 4일이었다.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仁祖)께서 사직을 안정시키고 억울한 무옥(誣獄)을 씻어주며 의민공에게 영의정 및 시호를 추증하고, 공에게도 사헌부 지평을 추증했다. (<문곡집> '지평으로 추증된 김공의 묘지명[贈持平金公墓誌銘]')
'의민공'은 김제남에게 인조반정 이후 준 시호이다. 이 '민(愍)' 자는 안타깝게 여긴다는 뜻이다. 시호는 대개 훌륭하다고 기리는 칭호이지만, 이렇게 화를 당해 비명에 세상을 뜬 사람들에게 주기도 한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세자빈이었던 강씨(姜氏)는 저주의 혐의를 받고 인조 24년(1646) 3월에 폐출되어 사사되었다. 나중에 이 역시 억울한 사건으로 인정되어 숙종 44년(1718) 위패와 시호를 회복하였는데, 그 때 시호가 '민회(愍懷)'였다. 실록에서는 이를 두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가 지위를 잃고 죽은 것을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게 만들었다는 뜻을 가져온 것이다"라고 하였다. (<국역 숙종실록> 권61 44년 4월 17일(을미)) 역사공부를 하다가 시호가 좀 낯설면 무슨 일이 있었나 살펴볼 일이다.
계축옥사는 서양갑(徐羊甲) 등이 김제남 등과 함께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했다면서 이이첨 등이 만들어낸 거짓 옥사였다. 이 묘지명의 주인공인 김선은 계축옥사 당시 15세였기 때문에, <대명률>에 따라 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었다. 이듬해인 광해군 6년, 김선이 16세가 되어 형장을 가해도 될 나이가 되자 광해군은 그에게 압슬(壓膝) 등의 형문을 가하였다. 그리고 김선은 죽었다.
축소의 혐의
이렇게 광해군대가 흘러갔고, 계해반정이 일어났다. 그동안 연구자들은 광해군을 쫓아낸 명분으로 흔히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였다[廢母殺弟]', '명나라를 저버리고 후금과 친했다[背明親金]'는 죄명을 거론해 왔다. 전자는 '원래 정치는 비정한 것'이라는 상투어 속에서 그 부당성이 희석되었고, 후자는 '반정 주체들의 맹목적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대한 비난 속에서 오히려 광해군의 중립외교로 높이 되었다. 계해반정 때문에 조선의 정책은 사대주의의 강화로 이어졌고, 두 차례에 걸친 후금(청)의 침략을 자초했다는 인식의 결과였다. 그러나 반정교서를 보면 그동안 연구자들의 해석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습 삼아 반정교서에서 밝힌 반정 사유를 알아보자.
① 선묘(宣廟)의 아들이 된 자는 나를 어미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광해는 참소하는 간신의 말을 믿고 스스로 시기하여 나의 부모를 형살하고 나의 종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품안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주는 등 인륜의 도리라곤 다시 없었다.
② 형을 해치고 아우를 죽였으며 여러 조카를 도륙하고 서모(庶母)를 쳐 죽였으며,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다.
③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두 채의 궁궐을 건축하는 등 토목 공사를 10년 동안 그치지 않았다.
④ 선왕조의 옛 신하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내쫓고, 오직 악행을 조장하며 아첨하는 인아(姻婭. 혼인관계가 있는 친척)와 부시(婦寺. 후궁, 궁녀나 환관)들만을 높이고 신임했다.
⑤ 인사는 뇌물만으로 이루어져서 혼암한 자들이 조정에 차있고, 돈을 실어 나르며 벼슬을 사고파는 것이 마치 장사꾼 같았다.
⑥ 부역이 번다하고 가렴주구는 한이 없어 백성들은 그 학정을 견디지 못하여 도탄에서 울부짖으므로 종묘사직의 위태로움은 마치 가느다란 실끈과 같았다.
⑦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00여 년이라,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그리고 임진년에 재조(再造)해 준 그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기미년(광해군 11년) 오랑캐를 정벌할 때는 은밀히 장수에게 동태를 보아 행동하라고 지시했고, 끝내 모든 군사가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온 세상에 퍼지게 했다. (<국역 인조실록> 권1 원년 3월 14일. 일곱 가지로 분류한 것은 필자.)
▲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오항녕 지음, 너머북스 펴냄). ⓒ너머북스 |
물론 '폐모살제'와 '배명친금' 역시 중요한 반정 사유였다. 그러나 나머지 5개 항목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반정의 이유였다. 나아가 '폐모살제'와 '배명친금'이 5개 항목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태였다면? 그동안 '폐모살제' 따로, '배명친금' 따로, 4개 항목은 눈감거나 얼버무리는 방식으로 광해군대를 이해했던 태도는, 사실의 측면에서 부정확하고, 관점의 측면에서 불합리하며, 윤리의 측면에서는 불공정하다. (이 문제는 나의 저서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펴냄)에서 다루었는데, 조금 수정하였다. 다만, 숭명배금(崇明背金)은 물론, 배명친금(背明親金)이란 말도 조선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배명'이란 말은 간혹 쓰였다. 반정 명분이 폐모살제와 배명친금이라는 두 가지로 단순화된 과정 역시 흥미로운 '현대 사학사'의 연구 주제이다.)
불행한 유산
반정 직후, 15년 이상 지속되던 궁궐공사를 즉시 중단했다. 그리고 궁궐을 짓기 위해 설치했던 영건도감을 비롯하여, 나례도감(儺禮都監) 등 12개의 난립했던 도감도 혁파하였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던 조도성책(調度成冊, 특별 세금 징수대장)을 소각하는 한편, 민간에 부과되었던 쌀과 포를 탕감해주었다. 인조 즉위 후 탕감한 양이 원곡(元穀) 11만 석이었다. 당시 호조에서 거두던 1년 세금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삭감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라 살림도 아끼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공상지(供上紙)가 각도의 폐단이 된다는 말에, 대비전(大妃殿)에 바치는 것을 제외한 그 나머지는 모두 혁파하여 민생을 소생시키도록 하였다. 사간원의 건의로, 광해군의 토목공사 때 석재와 철물을 헌납하고 자급을 뛰어 넘어 수령 및 동반의 실직을 차지하거나 종실로 봉군된 자들을 찾아내어 도태시켜 혼탁해진 관직 상황을 바로잡았다.
▲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특히 기억해둘 일이 있다. <광해군일기>는 조선시대 유일하게 간행되지 못했다. 활자본으로 5부를 찍어 춘추관과 지방 4대 사고에 보관하지 못하고, 중초본과 정초본의 형태로 <광해군일기>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이유는, 바로 재정의 부족이다. 재정이 궁핍하여 국왕이 즉위하면 제일 먼저 1~2년 만에 간행하던 관례를 어길 수밖에 없었던 사실 그 자체에, <광해군일기>가 전해주는 또 다른 역사의 진실이 있다.
상시가(傷時歌)의 앞과 뒤
계해반정 이후 반정세력은 즉시 정치시스템의 복구를 시도했다. 광해군대 중단되었던 경연(經筵)을 개시하여 국왕과 신하들이 소통하는 문치주의 체제를 다시 가동시켰다. 이는 당장 국정에 필요한 의사결정을 위해서도 시급했고, 새로운 국왕 인조에게 전통적인 시스템을 훈련시킬 필요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정은 필연적으로 정치세력의 교체를 초래하기 마련이었고, 정권의 연착륙은 바로 이러한 정치세력 교체의 연착륙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때는 그리 좋지 않았다. 일단 반정으로 혼군(昏君) 광해군을 교체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반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반정과 함께 한달 여 동안 광해조 권신인 이이첨 등을 비롯하여 상궁, 나인(內人)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조사와 신문이 이어졌다.
15년의 기득권이 일거에 사라질 수는 없었다. 인조 원년 7월 말, 기자헌을 우두머리로 삼았다는 유전(柳湔)과 유응형(柳應泂) 역모사건이 터졌다. 직접 연관되지 않았으나, 유몽인(柳夢寅)은 아들 유약(柳瀹)으로 인해 이 사건과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유전의 옥사가 끝나기 무섭게 10월 1일 저녁에 이시언(李時言)이 이유림(李有林)의 반역을 고변하였다.
주목할 만한 사건은 단연 이괄(李适)의 난이었다. 이괄은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계해반정의 주축이기도 했다. 반정 이후 북방 방어가 시급했던 까닭에 조정에서는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의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에 이괄을 임명되어 영변에 주둔하게 했다. 1624년 1월에 문회(文晦), 이우(李佑) 등은 이괄과 그의 아들 전(旃)·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이시언(李時言)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했다.
이괄 군대가 개성으로 진격함에 따라 인조는 공주로 피난 갔고, 2월 11일 반군은 서울에 입성하여 경복궁 옛터에 주둔하여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들은 도원수 장만 군사와 안현(鞍峴) 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위세를 떨쳤고, 2월 15일 이천(利川)에서 부하 장수인 기익헌과 이수백에게 이괄이 죽음을 당함으로써 궤멸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대북 잔여 세력의 반역은 계속되었다. 인조 2년 4월, 이괄의 난의 여파로 김정립(金廷立)의 무고 사건이 발생하였는가 하면, 같은 해 10월 경상도에서 "정인홍(鄭仁弘)의 나머지 자손[餘孼]으로 이 현에 살고 있는 박건갑(朴乾甲) 3부자 등이, 병사또[兵使道]가 통제사(統制使)와 군사를 이끌고 임금님을 모실 때, 길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몰래 해치워 부형(父兄)들의 원수를 갚을 계획"이었다가 군대의 위세가 무척 엄격하자 원하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뒤를 이어 11월 8일에는 박홍구(朴弘耈)의 옥사가 있었다. 다음 해인 인조 3년(1625) 9월 8일에는 문회(文晦)가 인성군(麟城君) 이우(李佑)를 둘러싼 역모를 고발했는데, 이것이 박응성(朴應晟) 역모사건이다. 가까스로 정묘호란을 수습했던 인조 6년(1628) 1월 3일에도 반역 사건이 있었다. 죽산(竹山)에 사는 김진성(金振聲)·김득성(金得聲)·신서회(申瑞檜)·이두견(李斗堅) 등이 승정원에 나아와 허유(許逌)와 이우명(李友明)이 반역을 일으킨 사실을 고변하였다. 이어 송광유(宋匡裕), 끝치(唜致), 이충경(李忠慶), 한선내(韓善乃), 김대기(金大器), 원충립(元忠立), 이경검(李景儉), 정한(鄭澣) 등 크고 작은 반역 사건이 계속 발생하였다.
인조반정의 허구성, 또는 쿠데타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연구자들이 종종 인용하는 <상시가(傷時歌)>라는 글이 있다. <인조실록>에도 나오고, 조선시대 반역사건 심문 기록을 모아놓은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도 나온다. 인조 3년 6월 19일, '흉한 격서(激書)'가 군영(軍營)에 투입되었다. 군영은 곧 반정을 일으킨 4대장 중 한 명인 신경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직숙(直宿)하는 곳이었다.
아, 너희 훈신들아 嗟爾勳臣
스스로 뽐내지 말라 毋庸自誇
그의 집에 살면서 爰處其室
그의 전토를 점유하고 乃占其田
그의 말을 타며 且乘其馬
그의 일을 행한다면 又行其事
너희들과 그 사람이 爾與其人
다를 게 뭐가 있나 顧何異哉!
반정 뒤의 공신들이 갖는 권력은 하늘을 찔렀을지 모른다. 실제로 광해군 때 권세를 부린 자들의 가옥과 재산을 훈신(勳臣)들에게 나누어줄 때 광해군 때 권신들이 도둑질했던 것도 차지하고 백성들에게 돌려주지 않음으로써 원성을 사기도 했다. 그런데 '상시가'와 함께 기억할 사실은 공신(功臣)에게 주는 세곡(稅穀)도 일시 중지시켰다는 점이다.
선조(宣祖) 때 광국(光國)·호성(扈聖) 등 여러 공신에게 세곡을 주지 않은 것은 시세를 참작하여 어쩔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정사(靖社)의 공은 막대한 공적이기는 하나 공로를 보답하는 은전(恩典)은 물력을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오늘날 공사(公私)간에 재물이 바닥나고 세입(稅入)이 부족하여 제향(祭享)과 어공(御供)도 모두 줄였습니다. 많은 공신들에게 전례대로 세곡을 지급하는 것은 결코 이어갈 방도가 없습니다. 서쪽 변방의 일이 진정되고 나라의 저축이 조금 넉넉해질 때까지 선조 때의 옛 규례에 따라 세곡을 주는 일을 거행하지 마십시오. (<국역 인조실록> 권5 2년 3월 27일(신사))
사헌부에서는 공신에게 세곡을 주도록 법전에 나와 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세곡 지급을 중지하자고 청하였고, 인조는 3년 동안 세곡을 주지 말도록 조치하였다. 이 역시 조선 초유의 일이었다. 공신이 세곡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시가>를 인용하여 광해군대나 인조대나 마찬가지라고, "갈아봤자 별 수 없다"고 주장할 때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렇듯 농업 생산력이 거의 전부였던 시대에 광해군이 도탄에 빠트린 나라의 업(業)은 착실하게 고스란히 인조 시대로 전이되었다. 재정과 민생의 파탄에서만 불행한 유산이 남겨진 것은 아니었다. 반정에 반대하는 광해군대의 기득권 세력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반정에 동의한 세력은 동의한 세력대로, 정치권력에서 배제된 세력은 배제된 세력대로 정리가 필요했고 나름의 길을 선택하였다. 어느 경우든 거기에는 업(業)을 풀기 위한 수행이 필요했다.
대명의리란?
청음과 관련된 척화론과 대명의리의 실제에 대한 자료를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청음은 인조반정 당시 어머니 이씨의 상중이었으므로 조정에 들어오지 않았다가 이듬해인 1624년 55세에 승문원 부제조로 입조하였다. 정묘호란 때는 명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가 있었으므로 전란을 국내에서 겪지 않았다. 그러나 모문룡의 조선을 명나라 조정에 무함한 일을 석명하였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병부에 글을 올려 출병을 청하였고, 그에 따라 명나라는 수병(水兵) 수천 명을 압록강으로 보내는 등 외교력을 발휘하였다.
궁금한 대목은 청음이 귀국한 뒤의 일이다. 청음은 인조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명나라 조정은 내관(內官)이 정권을 독단하며 현사가 배척받고 언관이 삭적되어 조정을 떠난다"고 말하였다. 한편 병자호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 국사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사간원은 인조에게 "숭정황제가 국사에 나태하여 나라를 망친 일과 광해군의 일을 인용하여 거울로 삼으라"고 하거나, "숭정 시기는 안으로 현명한 재상도 없었고 밖으로 이름난 장수도 없었다. 이교(異敎)를 숭상하고 환관(宦官)을 총애했으니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명나라의 실정 상황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므로 흔히 생각하듯 척화론자들의 명나라에 대한 인식이 맹목적이었다고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 명나라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조선 후기 정치가나 학자들 사이에서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다.
특히 병자호란 무렵 후금과 화의(和議)를 거부하겠다는 척화(斥和) 의리는 홍익한(洪翼漢)이 천자(天子)로 칭하려는 청의 의도를 명료히 표현한 데서 확인하였듯이 조선의 자주성에 대한 침해를 거부하는 논리였다. 이러한 자기의식은 "내 스스로 애걸하면 적은 더욱 조선을 경멸하여 진정한 화의는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오직 한 마음으로 싸워 지킬 수 있음을 보여준 후에야 강화를 의논할 수 있습니다"라는 홍문관 교리 윤집(尹集)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토양 위에서 당색을 불문하고 척화 의리는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후금이 천자라고 칭하는 것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것이지 상관할 바 아니며 조선은 조선대로 판단하겠다는 자기의식이 가능했던 것이다. 만일 명나라의 현실에 대해 맹목적인 추종을 보였다면, 그런 조선 사람들의 태도는 자기의식이 아니라 소외의식이라고 해야 마땅하겠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았다. '주체의식과 대립되지 않는 대명의리', 앞으로 좀 더 진중히 검토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문곡의 미래를 결정하는 시기라 좀 길게 다루었다. 이제 문곡의 어린 시절부터 하나하나 그의 삶의 궤적을 훑어보자.
'용감한 형제', 2013년에도 나올까요?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눈 속에서도 꽃은 피나니 ①
[프레시안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
인사동에서 나다
문곡 김수항의 어린 시절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문곡의 둘째 아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에 따르면, 문곡은 기사년(1629, 인조7) 8월 1일 사시(巳時 오전9시~11시)에 경성(京城 한양) 대사동(大寺洞)에 있는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정묘호란 2년 뒤의 일이었다. 대사동은 '큰 절', 그러니까 원각사(圓覺寺)가 있었던 지금의 인사동이다.
원래 청음 김상헌에게 후사가 없어서 둘째 형인 김상관(金尙寬)의 아들인 김광찬(金光燦)을 아들로 삼았고, 따라서 김수항의 본생 할아버지는 김상관이 된다. 5세에 어머니 연안 김씨가 별세하여 외조모 정씨(鄭氏)에게서 컸다. 8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이미 스스로 부지런히 공부하여 번거롭게 꾸짖을 일이 없었다고 한다. 흔히 문집에서 나오는 '주례사 문구'가 아니라, 문곡은 정말 그랬을 듯하다.
어머니가 돌아간 이듬해에 병자호란이 있었다. 필력이 모자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걱정이지만, 내 느낌에 문곡에게는 묘한 차분함이 있다. 할 말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숙종이 장희빈에게 유혹되어 정치를 그르칠 때 문곡이 보여준 단호함은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이다. 그런데 상황을 다 깊이 있게 받아내면서도 차분하다.
겉모습은 '범생이'로 나타난다. 당시에는 그런 말이 없었겠지만 '엄친아' 느낌이 나는데, 색조가 그윽하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생각 깊은 아이. 이 총명하고 생각 깊은 아이에게 기개를 얹어준 것은 청음 김상헌과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두 할아버지였을 것이다.
"담배 피우다 사고 난 것"
문곡이 여섯 살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일곱 살에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였다. 그 한복판에 청음과 선원, 두 할아버지가 있었다. 선원이 청음보다 형이다. 선원의 생몰연도(1561~1637)에서 알 수 있듯이, 선원은 병자호란 당시 순절했다.
선원은 청음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은 형이었다. 광해군 1년, 막 시작된 공납제 개혁인 대동법이 광해군과 대북세력에 의해 좌절될 기미가 보이자 도승지로 있던 선원은 경기 백성들과 함께 대동법의 지속적인 추진을 요구하는 연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아마 선조 때 정주 목사로 지방관을 지낼 때 얻은 선정(善政)의 명성은 허명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형조판서까지 지냈으나 이이첨이 반대세력을 몰아내려고 조작한 계축옥사 때 연루되었다가 파직되었다. 광해군 6년 다시 등용되었으나, 광해군 9년(1617) 인목대비를 몰아내려는 폐모론에 반대하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계해반정 이후 다시 관직에 나왔는데, 이때 선원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624년(인조2) 5월, 인조는 체직된 병조판서의 후임으로 선원과 이정구(李廷龜), 이홍주(李弘冑) 세 사람 가운데 누가 나을지 대신들에게 물었다. 좌의정 윤방(尹昉)은 '이정구는 전에 이미 여러 차례 경력이 있으나 강직하기는 김상용에 미치치 못합니다.'라고 하였고, 우의정 신흠(申欽)은 "역량은 이홍주가 나으나, 처사가 공정하기로는 김상용이 낫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인조는 선원을 병조판서에 임명하였다.(<국역 인조실록> 권6 2년 5월 28일(신사))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후금을 청으로 고치고 조선에게 군신(君臣) 관계를 강요하였다. 이를 거부하자, 12월 1일 청 태종은 12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청나라 군대는 압록강을 건너 열흘 만에 한양에 육박하였고, 조정에서는 윤방과 선원에게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 등을 인도하여 강화로 피난하도록 하였다. 인조도 밤에 강화로 가려고 했으나 이미 길이 끊겨 남한산성에 피난하였다.
강화 수비의 실패는 수비대장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의 무책임이 지적된다. 1월 22일 적의 선발대가 두 척의 배에 수십 명을 싣고 건너왔는데, 강화유수 장신(張紳)과 김경징은 모두 배를 타고 달아났다. 이 일로 후일 조정에서는 장신과 김경징에게 사사(賜死)하였다.
선원은 일이 이미 끝난 것을 알고 다시 성에 있는 관사로 들어왔다. 성이 함락되려 하자 선원은 하인에게 입었던 옷을 벗어주며 아들에게 전하여 뒷날 허장(虛葬)의 제구로 쓸 수 있도록 부탁하고는 남문으로 향하였다. 선원은 남문에 있는 화약궤에 걸터앉아 불을 질렀다. 나이 77세였다. 폭발이 얼마나 세었던지, 남문루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선원의 시신은 물론 수습할 수도 없었다. 짧은 글이 절명시로 전해온다.
해는 강가에 저물어 가는데 日暮江頭
신의 힘 어찌할 수 없나이다 臣力無何
선원이 하인에게 선원이 "불을 가져오라"고 했을 때, 기미를 알아챈 하인이 불을 가져오지 않았다. 그러나 선원은 남초(담배)를 피우려고 한다고 말하여 불씨를 얻어냈고, 다른 사람들에게 떨어지라고 손짓을 했다. 이때 별좌인 권순장(權順長 1607~1637)과 생원 김익겸(金益兼 1614~1636)이 다가왔다.
"상공께서는 어찌 혼자만 좋은 일을 하려고 하십니까?" 선원은 이들을 말렸다. 특히 김익겸은 아내가 만삭이었다. 뱃속에는 훗날 <구운몽>의 저자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이 들어 있었다. 결국 권순장과 김익겸은 선원 곁을 떠나지 않았다.
곁에 13살 먹은 손자 수전(壽全)이 있었다. 하인에게 데려가라고 했음에도 아이는 한사코 할아버지를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비록 서손이었지만 수전은 문곡의 사촌 형이었다. 하인 승선(善承)도 운명을 같이 하였다. 이래서 알려진 인물은 다섯 명이었지만, 또 누가 있었는지 알겠는가.(김병기, <조선명가 안동김씨>(김영사 펴냄) 55~59쪽)
시신을 잃은 선원은 옷만 선영이 있는 양주군 도혈리(陶穴里) 언덕에 묻었다. 그런데 이 죽음을 둘러싸고 의혹이 제기되었다. 김상용이 담배를 피우려다 실수로 불이 화약에 옮겨 붙어 죽은 것이지, 순절한 것이 아니라는 소문이었다. 이 때문에 선원에 대한 제사를 일시 보류하고 제문도 짓지 못하게 하였다.(<국역 인조실록> 권35 15년 10월 28일(임술)) 이렇게 되자 승정원을 비롯, 신익성(申翊聖), 강화에 같이 피난했던 강석기(姜碩期)가 실상을 인조에게 적어 올렸다.
이어 아들 김광환(金光煥)·김광현(金光炫) 등이 상소하여 선원에 대한 소문이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냥 불을 가져오라고 하면 누가 주겠느냐, 담배를 피우겠다고 해야 주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하였다. 그 상소 중 일부이다.
신들이 강도에 들어가 죽은 아비의 유체를 거의 10일 동안 찾았는데, 성안 사람이 와서 신의 아비에 대한 일을 무척 상세히 말하였습니다. 더러 자기 친족이 남문에서 같이 죽은 자가 있어서, "어찌 혼자만 죽지 남도 같이 죽게 하였는가."라고 울부짖으며 원망하였습니다. 이렇듯 평범한 사람들의 칭찬하고 헐뜯는 말은 다르지만, 신의 아비가 자결한 사실은 자연 엄폐할 수 없습니다.
서울 사는 늙은이 염용운(廉龍雲)이라는 자는 강도로 피란하여 신의 아비가 자결할 때 문루 위에 있었습니다. 신의 아비가 낯빛을 돋우며 염용운을 꾸짖어 물리쳤으므로 결국 원망하면서도 문루를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가 겨우 문로(門路)에 이르자 불이 났으므로 비로소 신의 아비가 자신을 물리친 까닭을 알았다 합니다. 이것은 모두 사람들이 보고 들은 바, 신의 아비가 자결한 사적(事蹟)입니다.
상소가 올라가자 인조에서는 예조에 대대적인 재조사를 명하였고, 예조에서는 당시 사람들에게 묻고 살펴 상소의 내용이 사실과 부합하다고 보고하였다. 인조는 12월 18일에 선원에 대한 제사를 윤허하였다. 그로부터 3년 뒤, 강화 사람들은 선원을 비롯하여 순절한 이상길(李尙吉)·심현(沈誢) 등에게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자살하는 척 했겠지요"
형 선원이 강화에서 순절하던 비슷한 시기, 9살 어린 동생 청음은 남한산성에서 항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항복문서는 최명길(崔鳴吉)이 썼다. 최명길이 국서(國書)를 가지고 비변사에 물러가 앉아 다시 수정을 하고 있었는데, 예조판서 청음이 밖에서 들어와 그 글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 버렸다. 후금의 행태는, 중국 송나라 정강(靖康)의 변란에서 보듯이, 결코 나라를 보존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말이었다.(송나라는 흠종(欽宗) 정강 2년(1127)에 금(金)나라 태종(太宗)에게 변경(汴京)이 함락되어 휘종과 흠종 부자를 비롯해서 많은 황족과 신하가 사로잡혔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인조와 최명길은 당시 김상헌의 진정성을 신뢰하지 않았고, 후일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인조실록>은 그 상황을 거의 동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에는 절의를 중히 여겨야 하는데, 위급한 이때에 임금을 버리고 떠나니, 그 의리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나라의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다 시비가 밝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았다. 평소 벼슬이 영화롭고 녹이 많은 때에는 떠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나라가 위태로워 망하게 되자 앞 다투어 나를 버리니, 누가 동방을 예의의 나라라 하겠는가. 김상헌이 평소에 나라가 어지러우면 같이 죽겠다는 말을 하였으므로 나도 그렇게 여겼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먼저 나를 버리고서 젊고 무식한 자의 앞장을 섰으니, 내가 매우 아까워한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식자들은 다 김상헌이 심술을 압니다마는, 젊은 사람들 중에는 사모하여 본받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가 임금을 속인 것이 심하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그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려 할 때 그 아들이 옆에 있었습니다. 이러고도 죽을 수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상헌의 일은 한 번 웃을 거리도 못 되는데 무식한 무리는 오히려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니,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훔치기가 쉽다 하겠다. 호종한 공으로 준 자급까지도 받지 않아서 내가 매우 무안하였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그 임금은 범의 굴에 들어갔는데 그 신하는 북문(北門)으로 나갔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김상헌이 죽음을 가장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얻으려 하였으나, 인간 세상에 어찌 양주학(楊州鶴)이 있겠습니까. 신은 조금도 사사로운 뜻이 없이 나라 안에 시비를 밝히려 할 뿐입니다. 혹 김상헌의 처지를 두둔하는 자가 문산 뇌자(文山腦子)의 말도 끌어대니, 더욱이 우습습니다."
하였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양주학(楊州鶴)'이란 많은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예전에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각각 뜻을 말하는데, 한 사람은 양주 자사(楊州刺史)가 되고 싶다 하고 또 한사람은 재물을 많이 갖고 싶다 하고 또 한사람은 학을 타고 올라가고 싶다고 했더니, 한 사람이 "허리에 10만 과(貫)의 돈을 두르고 학을 타고 양주에 오르고 싶다" 하여, 세 사람이 욕망을 한꺼번에 바랐다는 일화에서 나왔다.(소식(蘇軾)의 〈녹균헌(綠筠軒)〉에 대한 주석)
또 '문산 뇌자(文山腦子)'는 문천상(文天祥)의 고사이다. 문산은 문천상의 호이고, 뇌자는 독약이다. 문천상이 오파령(五坡嶺)에서 장홍범(張弘範)의 급습을 당하여 휘하 군사가 미처 싸우지 못하고 달아나므로 문천상도 황급히 달아나다가 잡히자 뇌자를 마셨으나 죽지 않았다.(<송사(宋史)> 권418 문천상전(文天祥傳))
최명길과 인조의 말은 김상헌이 죽음을 각오한 듯 척화를 주장했지만 실은 쇼맨십이었다는 것이다. 그걸 보고 젊은 사람들이 따르는데,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비웃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호종한 데 대한 상으로 자급을 올려주었는데 그것을 청음이 받지 않은 것도 서운하게 생각했다. 이해할 수 있는 심정이다. 필자는 20년 전, 청음 김상헌에 대한 논문 발표를 했을 때, 청중석 누군가로부터 최명길이 했던 말과 똑같은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청음은 국서를 찢은 뒤 엿새 동안 단식을 하며 저항했었다. 68세였다. 청음이 단식을 중지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청나라에서 척화신을 색출하였기 때문이었다. "오랑캐 진영에 끌려가는 것이 싫어서 그걸 피하려고 굶어죽었다는 소리를 듣기 싫다." 그러나 항복은 또 미루어졌다.
마침내 항복하고 한양으로 돌아오던 날, 청음은 노끈과 바지끈으로 자결을 시도했다. 조카들은 삼촌을 알기에 구하지 못했으나, 병조참지 나만갑(羅萬甲)이 방으로 들어가 구해냈다. 이날로 청음은 조정을 떠나 안동 풍산의 청원루(淸遠樓)로 내려가 거처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청음이 안동에 있을 때, 청나라는 명나라 정벌을 위한 군사 징발을 요청했고 청음을 그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양으로 압송되었다. 이후 6년을 심양에서 보냈다. 그때 청음에 대한 용골대의 평가나, 최명길과 감옥 옆방을 쓰며 화해했던 일화는 앞서 소개한 적이 있다. 청음이 심양으로 끌려갈 때 남긴 시가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구절일 것이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세한(歲寒) 연후
선원과 청음, 두 형제는 모두 관리로 학자로 실력과 진정성, 책임과 기개를 갖춘 인물이었다. 실제로 병자호란이라는 전쟁 와중에서 극한 상황을 만났고, 그 극한 상황에서도 자신들이 축적해온 가치와 신념대로 살다가 죽거나 타국으로 끌려갔다. 조선 사람들은 이후 두 형제를 오래 기렸다.
사회가 그런대로 격이 있으면 고상한 사람들을 인정하고 북돋운다. 나도 어지간하면 고상하고 품격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동류의식을 갖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 사회는 전반적인 인격적 고양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사회가 허접할 때는 고상한 사람이 잘난 사람으로 보인다. 허접한 심성으로 보면 고상한 게 아니라 고상한 '척'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주는 것 없이 밉다. 이래서 그런 사회는 전반적인 인격적 타락을 경험하기 쉽다.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생 나이일 때 문곡은 선원과 청음을 둘러싼 실상과 소문을 보고 들었다. 어머니를 여의 뒤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기도 했지만, 청음이 잠시 안동에 은거할 때는 거기서 머물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할아버지 청음이 심양으로 끌려간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문곡은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시를 지었다.
할아버님이 중국으로 가신 뒤 王父西行後
해가 벌써 세 번 바뀌었기에 星霜已變三
하늘가의 이별이 괴로우니 天涯離別苦
슬하에서 받던 사랑 그립구나 膝下憶分甘
밤이면 꿈은 늘 북으로 가고 夜夢長歸北
가을이라 기러기 또 남으로 향하거늘 秋鴻又向南
까마귀 머리 아직 희어지지 않았으니 烏頭猶未白
어느 날에나 떠나간 말이 돌아올까? 幾日返征驂
(* 까마귀……않았으니 : 전국시대(戰國時代) 연(燕) 나라 태자 단(丹)이 진(秦) 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귀국을 요청하자, 진왕(秦王)이 말하기를 "까마귀가 희게 되고 말에 뿔이 난다면 돌아갈 수 있으리라"라고 답하였는데, 마침내 천지신명이 도왔는지 그런 현상이 일어나 태자는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論衡 感虛>)
'서쪽으로 가신 할아버님을 그리워하며[憶王父西行]'(<문곡집> 권1)라는 시로, 문곡이 15세 되던 1643년에 지은 시이다. 아마 청음을 모시고 갔다가 소식을 전해주곤 하던 인물로 보이는데, 만호(萬戶) 표정준(表廷俊)에게 준 시도 남아 있다. '할아버님의 시를 차운하여 만호 표정준에게 드리다[伏次王父詩韻贈表萬戶廷俊]'라는, 1644년 16세에 지은 시이다.
현우(賢愚)는 평소 분간하기 어렵지만 賢愚平日自難分
어려움 닥치면 비로소 진실 드러나네 及到窮途始見眞
염량에 따라 지조를 바꾸지 않았으니 不以炎涼移志操
그대가 책 읽는다는 사람보다 낫구나 嗟君猶勝讀書人
(* 염량 : 염량세태(炎凉世態)의 의 준말로, 권력이 성하면 아첨하면서 붙고, 권력을 잃으면 푸대접하고 배반하는 세속의 저급한 행태를 말한다.)
[프레시안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
인사동에서 나다
문곡 김수항의 어린 시절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문곡의 둘째 아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에 따르면, 문곡은 기사년(1629, 인조7) 8월 1일 사시(巳時 오전9시~11시)에 경성(京城 한양) 대사동(大寺洞)에 있는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정묘호란 2년 뒤의 일이었다. 대사동은 '큰 절', 그러니까 원각사(圓覺寺)가 있었던 지금의 인사동이다.
원래 청음 김상헌에게 후사가 없어서 둘째 형인 김상관(金尙寬)의 아들인 김광찬(金光燦)을 아들로 삼았고, 따라서 김수항의 본생 할아버지는 김상관이 된다. 5세에 어머니 연안 김씨가 별세하여 외조모 정씨(鄭氏)에게서 컸다. 8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이미 스스로 부지런히 공부하여 번거롭게 꾸짖을 일이 없었다고 한다. 흔히 문집에서 나오는 '주례사 문구'가 아니라, 문곡은 정말 그랬을 듯하다.
어머니가 돌아간 이듬해에 병자호란이 있었다. 필력이 모자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걱정이지만, 내 느낌에 문곡에게는 묘한 차분함이 있다. 할 말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숙종이 장희빈에게 유혹되어 정치를 그르칠 때 문곡이 보여준 단호함은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이다. 그런데 상황을 다 깊이 있게 받아내면서도 차분하다.
겉모습은 '범생이'로 나타난다. 당시에는 그런 말이 없었겠지만 '엄친아' 느낌이 나는데, 색조가 그윽하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생각 깊은 아이. 이 총명하고 생각 깊은 아이에게 기개를 얹어준 것은 청음 김상헌과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두 할아버지였을 것이다.
"담배 피우다 사고 난 것"
문곡이 여섯 살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일곱 살에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였다. 그 한복판에 청음과 선원, 두 할아버지가 있었다. 선원이 청음보다 형이다. 선원의 생몰연도(1561~1637)에서 알 수 있듯이, 선원은 병자호란 당시 순절했다.
선원은 청음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은 형이었다. 광해군 1년, 막 시작된 공납제 개혁인 대동법이 광해군과 대북세력에 의해 좌절될 기미가 보이자 도승지로 있던 선원은 경기 백성들과 함께 대동법의 지속적인 추진을 요구하는 연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아마 선조 때 정주 목사로 지방관을 지낼 때 얻은 선정(善政)의 명성은 허명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형조판서까지 지냈으나 이이첨이 반대세력을 몰아내려고 조작한 계축옥사 때 연루되었다가 파직되었다. 광해군 6년 다시 등용되었으나, 광해군 9년(1617) 인목대비를 몰아내려는 폐모론에 반대하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계해반정 이후 다시 관직에 나왔는데, 이때 선원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624년(인조2) 5월, 인조는 체직된 병조판서의 후임으로 선원과 이정구(李廷龜), 이홍주(李弘冑) 세 사람 가운데 누가 나을지 대신들에게 물었다. 좌의정 윤방(尹昉)은 '이정구는 전에 이미 여러 차례 경력이 있으나 강직하기는 김상용에 미치치 못합니다.'라고 하였고, 우의정 신흠(申欽)은 "역량은 이홍주가 나으나, 처사가 공정하기로는 김상용이 낫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인조는 선원을 병조판서에 임명하였다.(<국역 인조실록> 권6 2년 5월 28일(신사))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후금을 청으로 고치고 조선에게 군신(君臣) 관계를 강요하였다. 이를 거부하자, 12월 1일 청 태종은 12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청나라 군대는 압록강을 건너 열흘 만에 한양에 육박하였고, 조정에서는 윤방과 선원에게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 등을 인도하여 강화로 피난하도록 하였다. 인조도 밤에 강화로 가려고 했으나 이미 길이 끊겨 남한산성에 피난하였다.
강화 수비의 실패는 수비대장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의 무책임이 지적된다. 1월 22일 적의 선발대가 두 척의 배에 수십 명을 싣고 건너왔는데, 강화유수 장신(張紳)과 김경징은 모두 배를 타고 달아났다. 이 일로 후일 조정에서는 장신과 김경징에게 사사(賜死)하였다.
선원은 일이 이미 끝난 것을 알고 다시 성에 있는 관사로 들어왔다. 성이 함락되려 하자 선원은 하인에게 입었던 옷을 벗어주며 아들에게 전하여 뒷날 허장(虛葬)의 제구로 쓸 수 있도록 부탁하고는 남문으로 향하였다. 선원은 남문에 있는 화약궤에 걸터앉아 불을 질렀다. 나이 77세였다. 폭발이 얼마나 세었던지, 남문루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선원의 시신은 물론 수습할 수도 없었다. 짧은 글이 절명시로 전해온다.
해는 강가에 저물어 가는데 日暮江頭
신의 힘 어찌할 수 없나이다 臣力無何
선원이 하인에게 선원이 "불을 가져오라"고 했을 때, 기미를 알아챈 하인이 불을 가져오지 않았다. 그러나 선원은 남초(담배)를 피우려고 한다고 말하여 불씨를 얻어냈고, 다른 사람들에게 떨어지라고 손짓을 했다. 이때 별좌인 권순장(權順長 1607~1637)과 생원 김익겸(金益兼 1614~1636)이 다가왔다.
"상공께서는 어찌 혼자만 좋은 일을 하려고 하십니까?" 선원은 이들을 말렸다. 특히 김익겸은 아내가 만삭이었다. 뱃속에는 훗날 <구운몽>의 저자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이 들어 있었다. 결국 권순장과 김익겸은 선원 곁을 떠나지 않았다.
▲ 선원 김상용이 순절한 강화 남문. 문곡의 서(庶) 사촌형 수전도 13살의 나이로 할아버지를 따랐다. |
곁에 13살 먹은 손자 수전(壽全)이 있었다. 하인에게 데려가라고 했음에도 아이는 한사코 할아버지를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비록 서손이었지만 수전은 문곡의 사촌 형이었다. 하인 승선(善承)도 운명을 같이 하였다. 이래서 알려진 인물은 다섯 명이었지만, 또 누가 있었는지 알겠는가.(김병기, <조선명가 안동김씨>(김영사 펴냄) 55~59쪽)
시신을 잃은 선원은 옷만 선영이 있는 양주군 도혈리(陶穴里) 언덕에 묻었다. 그런데 이 죽음을 둘러싸고 의혹이 제기되었다. 김상용이 담배를 피우려다 실수로 불이 화약에 옮겨 붙어 죽은 것이지, 순절한 것이 아니라는 소문이었다. 이 때문에 선원에 대한 제사를 일시 보류하고 제문도 짓지 못하게 하였다.(<국역 인조실록> 권35 15년 10월 28일(임술)) 이렇게 되자 승정원을 비롯, 신익성(申翊聖), 강화에 같이 피난했던 강석기(姜碩期)가 실상을 인조에게 적어 올렸다.
이어 아들 김광환(金光煥)·김광현(金光炫) 등이 상소하여 선원에 대한 소문이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냥 불을 가져오라고 하면 누가 주겠느냐, 담배를 피우겠다고 해야 주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하였다. 그 상소 중 일부이다.
신들이 강도에 들어가 죽은 아비의 유체를 거의 10일 동안 찾았는데, 성안 사람이 와서 신의 아비에 대한 일을 무척 상세히 말하였습니다. 더러 자기 친족이 남문에서 같이 죽은 자가 있어서, "어찌 혼자만 죽지 남도 같이 죽게 하였는가."라고 울부짖으며 원망하였습니다. 이렇듯 평범한 사람들의 칭찬하고 헐뜯는 말은 다르지만, 신의 아비가 자결한 사실은 자연 엄폐할 수 없습니다.
서울 사는 늙은이 염용운(廉龍雲)이라는 자는 강도로 피란하여 신의 아비가 자결할 때 문루 위에 있었습니다. 신의 아비가 낯빛을 돋우며 염용운을 꾸짖어 물리쳤으므로 결국 원망하면서도 문루를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가 겨우 문로(門路)에 이르자 불이 났으므로 비로소 신의 아비가 자신을 물리친 까닭을 알았다 합니다. 이것은 모두 사람들이 보고 들은 바, 신의 아비가 자결한 사적(事蹟)입니다.
상소가 올라가자 인조에서는 예조에 대대적인 재조사를 명하였고, 예조에서는 당시 사람들에게 묻고 살펴 상소의 내용이 사실과 부합하다고 보고하였다. 인조는 12월 18일에 선원에 대한 제사를 윤허하였다. 그로부터 3년 뒤, 강화 사람들은 선원을 비롯하여 순절한 이상길(李尙吉)·심현(沈誢) 등에게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자살하는 척 했겠지요"
형 선원이 강화에서 순절하던 비슷한 시기, 9살 어린 동생 청음은 남한산성에서 항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항복문서는 최명길(崔鳴吉)이 썼다. 최명길이 국서(國書)를 가지고 비변사에 물러가 앉아 다시 수정을 하고 있었는데, 예조판서 청음이 밖에서 들어와 그 글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 버렸다. 후금의 행태는, 중국 송나라 정강(靖康)의 변란에서 보듯이, 결코 나라를 보존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말이었다.(송나라는 흠종(欽宗) 정강 2년(1127)에 금(金)나라 태종(太宗)에게 변경(汴京)이 함락되어 휘종과 흠종 부자를 비롯해서 많은 황족과 신하가 사로잡혔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인조와 최명길은 당시 김상헌의 진정성을 신뢰하지 않았고, 후일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인조실록>은 그 상황을 거의 동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에는 절의를 중히 여겨야 하는데, 위급한 이때에 임금을 버리고 떠나니, 그 의리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나라의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다 시비가 밝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았다. 평소 벼슬이 영화롭고 녹이 많은 때에는 떠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나라가 위태로워 망하게 되자 앞 다투어 나를 버리니, 누가 동방을 예의의 나라라 하겠는가. 김상헌이 평소에 나라가 어지러우면 같이 죽겠다는 말을 하였으므로 나도 그렇게 여겼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먼저 나를 버리고서 젊고 무식한 자의 앞장을 섰으니, 내가 매우 아까워한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식자들은 다 김상헌이 심술을 압니다마는, 젊은 사람들 중에는 사모하여 본받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가 임금을 속인 것이 심하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그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려 할 때 그 아들이 옆에 있었습니다. 이러고도 죽을 수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상헌의 일은 한 번 웃을 거리도 못 되는데 무식한 무리는 오히려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니,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훔치기가 쉽다 하겠다. 호종한 공으로 준 자급까지도 받지 않아서 내가 매우 무안하였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그 임금은 범의 굴에 들어갔는데 그 신하는 북문(北門)으로 나갔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김상헌이 죽음을 가장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얻으려 하였으나, 인간 세상에 어찌 양주학(楊州鶴)이 있겠습니까. 신은 조금도 사사로운 뜻이 없이 나라 안에 시비를 밝히려 할 뿐입니다. 혹 김상헌의 처지를 두둔하는 자가 문산 뇌자(文山腦子)의 말도 끌어대니, 더욱이 우습습니다."
하였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양주학(楊州鶴)'이란 많은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예전에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각각 뜻을 말하는데, 한 사람은 양주 자사(楊州刺史)가 되고 싶다 하고 또 한사람은 재물을 많이 갖고 싶다 하고 또 한사람은 학을 타고 올라가고 싶다고 했더니, 한 사람이 "허리에 10만 과(貫)의 돈을 두르고 학을 타고 양주에 오르고 싶다" 하여, 세 사람이 욕망을 한꺼번에 바랐다는 일화에서 나왔다.(소식(蘇軾)의 〈녹균헌(綠筠軒)〉에 대한 주석)
또 '문산 뇌자(文山腦子)'는 문천상(文天祥)의 고사이다. 문산은 문천상의 호이고, 뇌자는 독약이다. 문천상이 오파령(五坡嶺)에서 장홍범(張弘範)의 급습을 당하여 휘하 군사가 미처 싸우지 못하고 달아나므로 문천상도 황급히 달아나다가 잡히자 뇌자를 마셨으나 죽지 않았다.(<송사(宋史)> 권418 문천상전(文天祥傳))
최명길과 인조의 말은 김상헌이 죽음을 각오한 듯 척화를 주장했지만 실은 쇼맨십이었다는 것이다. 그걸 보고 젊은 사람들이 따르는데,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비웃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호종한 데 대한 상으로 자급을 올려주었는데 그것을 청음이 받지 않은 것도 서운하게 생각했다. 이해할 수 있는 심정이다. 필자는 20년 전, 청음 김상헌에 대한 논문 발표를 했을 때, 청중석 누군가로부터 최명길이 했던 말과 똑같은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청음은 국서를 찢은 뒤 엿새 동안 단식을 하며 저항했었다. 68세였다. 청음이 단식을 중지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청나라에서 척화신을 색출하였기 때문이었다. "오랑캐 진영에 끌려가는 것이 싫어서 그걸 피하려고 굶어죽었다는 소리를 듣기 싫다." 그러나 항복은 또 미루어졌다.
마침내 항복하고 한양으로 돌아오던 날, 청음은 노끈과 바지끈으로 자결을 시도했다. 조카들은 삼촌을 알기에 구하지 못했으나, 병조참지 나만갑(羅萬甲)이 방으로 들어가 구해냈다. 이날로 청음은 조정을 떠나 안동 풍산의 청원루(淸遠樓)로 내려가 거처하였다.
▲ 안동 풍산의 청원루. 원래 집은 김반이 지었는데, 누각은 청음이 청나라에서 풀려난 뒤 돌아와 새로 지었다. ⓒ문화재청 |
전쟁이 끝나고 청음이 안동에 있을 때, 청나라는 명나라 정벌을 위한 군사 징발을 요청했고 청음을 그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양으로 압송되었다. 이후 6년을 심양에서 보냈다. 그때 청음에 대한 용골대의 평가나, 최명길과 감옥 옆방을 쓰며 화해했던 일화는 앞서 소개한 적이 있다. 청음이 심양으로 끌려갈 때 남긴 시가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구절일 것이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세한(歲寒) 연후
선원과 청음, 두 형제는 모두 관리로 학자로 실력과 진정성, 책임과 기개를 갖춘 인물이었다. 실제로 병자호란이라는 전쟁 와중에서 극한 상황을 만났고, 그 극한 상황에서도 자신들이 축적해온 가치와 신념대로 살다가 죽거나 타국으로 끌려갔다. 조선 사람들은 이후 두 형제를 오래 기렸다.
사회가 그런대로 격이 있으면 고상한 사람들을 인정하고 북돋운다. 나도 어지간하면 고상하고 품격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동류의식을 갖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 사회는 전반적인 인격적 고양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사회가 허접할 때는 고상한 사람이 잘난 사람으로 보인다. 허접한 심성으로 보면 고상한 게 아니라 고상한 '척'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주는 것 없이 밉다. 이래서 그런 사회는 전반적인 인격적 타락을 경험하기 쉽다.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생 나이일 때 문곡은 선원과 청음을 둘러싼 실상과 소문을 보고 들었다. 어머니를 여의 뒤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기도 했지만, 청음이 잠시 안동에 은거할 때는 거기서 머물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할아버지 청음이 심양으로 끌려간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문곡은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시를 지었다.
할아버님이 중국으로 가신 뒤 王父西行後
해가 벌써 세 번 바뀌었기에 星霜已變三
하늘가의 이별이 괴로우니 天涯離別苦
슬하에서 받던 사랑 그립구나 膝下憶分甘
밤이면 꿈은 늘 북으로 가고 夜夢長歸北
가을이라 기러기 또 남으로 향하거늘 秋鴻又向南
까마귀 머리 아직 희어지지 않았으니 烏頭猶未白
어느 날에나 떠나간 말이 돌아올까? 幾日返征驂
(* 까마귀……않았으니 : 전국시대(戰國時代) 연(燕) 나라 태자 단(丹)이 진(秦) 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귀국을 요청하자, 진왕(秦王)이 말하기를 "까마귀가 희게 되고 말에 뿔이 난다면 돌아갈 수 있으리라"라고 답하였는데, 마침내 천지신명이 도왔는지 그런 현상이 일어나 태자는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論衡 感虛>)
'서쪽으로 가신 할아버님을 그리워하며[憶王父西行]'(<문곡집> 권1)라는 시로, 문곡이 15세 되던 1643년에 지은 시이다. 아마 청음을 모시고 갔다가 소식을 전해주곤 하던 인물로 보이는데, 만호(萬戶) 표정준(表廷俊)에게 준 시도 남아 있다. '할아버님의 시를 차운하여 만호 표정준에게 드리다[伏次王父詩韻贈表萬戶廷俊]'라는, 1644년 16세에 지은 시이다.
현우(賢愚)는 평소 분간하기 어렵지만 賢愚平日自難分
어려움 닥치면 비로소 진실 드러나네 及到窮途始見眞
염량에 따라 지조를 바꾸지 않았으니 不以炎涼移志操
그대가 책 읽는다는 사람보다 낫구나 嗟君猶勝讀書人
(* 염량 : 염량세태(炎凉世態)의 의 준말로, 권력이 성하면 아첨하면서 붙고, 권력을 잃으면 푸대접하고 배반하는 세속의 저급한 행태를 말한다.)
죽는 이 있으면 태어나는 이도 있으리라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눈 속에서도 꽃은 피나니 ②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9.13 19:50:00
☞연재 지난 회 바로 가기 : 눈 속에서 꽃은 피나니 ①
배우고 살던 곳
5세에 어머니를 잃은 문곡은 8살에 외할머니 정씨의 손에서 자랐다. 외삼촌인 김천석(金天錫)이 홍산(鴻山) 현감으로 나가면서 같이 따라갔다고 한다. 홍산은 부여군 홍산면이다. 문곡은 글을 정씨에게서 배웠는데, 자애로운 외할머니의 가르침 덕분인지 정씨가 먼저 잠든 뒤에도 문곡은 홀로 늦게까지 글을 읽곤 했다고 한다.
문곡 나이 7세 때 끝난 병자호란은 그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큰할아버지 선원 김상용은 강화에서 순절하였고, 할아버지 청음 김상헌은 낙향했다가 오랜 심양의 억류 생활을 거쳐야 했음은 이미 살펴본 바 있다.
문곡은 외할머니를 따라 서천(舒川)에 있는 섬으로 피난을 갔다. 9세가 되던 1637년에는 외할머니를 따라 원주로 갔다. 외증조모 노씨가 세상을 떠서 상주가 된 외삼촌이 원주에 있는 선영(先塋)으로 반장(返葬 고향에 묻힘)하러 갔기 때문이다. 문곡은 외할머니의 동생인 정기방(鄭基磅)에게 학문을 배우기도 했다.
12세 되던 해, 문곡은 아버지 김광찬을 따라 안동으로 갔다. 외할머니 정씨가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아버지가 원주에 와서 안동으로 데려간 것이다. 이때부터 문곡은 할아버지 청음에게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겨울에 청음은 심양으로 끌려갔다. 13세 때 할머니 이씨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일가가 경기도 양주 석실(石室)로 이사를 왔다. 이씨를 석실 선영에 반장했던 길이었다.
할아버지의 편지
11세 때 안동에 내려가 있던 할아버지 청음이 어린 문곡에게 글을 하나 보냈다. <구용사물(九容四勿)>이라는 글이다. 문곡은 이 일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었다.
고애(孤哀 부모가 모두 돌아가신 자신)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외가에서 컸으며, 기묘년(1639, 인조17)에는 원주(原州)에 의탁하여 지냈습니다. 그때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영남(嶺南)에 은거하셨는데, 큰형님에게 구용(九容)과 사물(四勿)을 쓰게 하여 제게 부치시고, 직접 편지를 써서 이르시기를, "네가 이걸 아침저녁으로 보고, 언제나 마음에 두고 잊지 않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당시 10살이 갓 넘었을 때였으므로 어리고 몽매하여 가르침을 이해하질 못했고, 조금 컸을 때도 여전히 즐겨 노는 데 습관이 들어 체득하여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문곡집> 권27 <우재 선생께 올리는 편지[上尤齋 戊申]>)
이 글은 문곡이 현종 9년(1688) 우재, 즉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에게 보낸 편지다. 근 20여 년 뒤 일인데, 청음이 보낸 글이 문곡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음을 짐할 수 있다.
구용(九容)이란 사람이 수행하고 처신할 때 지녀야할 태도 아홉 가지를 말한다. <예기> <옥조(玉藻)>에 보면 "걸음걸이는 무게가 있어야 하고, 손놀림은 공손해야 하고, 눈은 단정해야 하고, 입은 조용해야 하고, 목소리는 고요해야 하고, 머리 모양은 곧아야 하고, 기상은 엄숙해야 하고, 서 있는 모습은 덕이 흘러야 하고, 얼굴은 해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는 말에서 나왔다.
사물(四勿)은 공자가 제자인 안연(顔淵)에게 가르친 인(仁)의 실천 태도를 말한다. <논어> <안연(顔淵)>에,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고 한 데서 나왔다.
청음은 이 글귀와 함께 편지를 보내, "이걸 아침저녁으로 보고 언제나 마음에 두고 잊지 않도록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할아버지의 당부를 지키지 못했다고 자책하던 문곡은 자신의 집 당호를 아예 구사재(九四齋)라고 붙였다.
소현세자의 죽음
인조 23년(1645) 2월, 청음은 76세의 노구를 이끌고 심양에서 귀국했다. 청나라가 북경을 함락한 뒤에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비롯한 인질들을 풀어주었기 때문이다.(물론 '소현'은 사후에 내린 시호이다.) 문곡은 파주(坡州)로 할아버지 마중을 나갔다. 그리고 청음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석실에서 모셨다. 남한산성에서 항복할 때 청음이 낙향했던 기억 때문인지 인조는 '살아 돌아왔는데도 궁궐에 오지 않았다'고 서운해 했다. 문곡이 17세 되던 해였다.
그런데 5월 소현세자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떴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억측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거니와 당시에도 파란이 컸다. 이식(李植)은 "세자는 타국에 오랫동안 억류되어 있는 동안 자주 군대를 따라 동쪽으로 가 삭황(朔荒)에서 사냥을 하고 서쪽으로 연새(燕塞)를 왕래하면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위험한 고생을 두루 겪었으므로, 비록 정신은 태연자약하였으나 속으로는 노고로 인해 손상을 받았다. 그리하여 환궁한 이후 계속해서 한열(寒熱)의 증세가 있었는데, 의술(醫術)을 잘못 시행하여 끝내 별세하기에 이르렀다."고 썼다.(<인조실록> 권46 23년 6월 10일(신유))
인조에게 벼루에 맞아 죽었다는 설, 독약에 죽었다는 설이 있을 만큼 소현세자의 죽음은 급작스러웠던가 보다. 한편 청나라가 인조에게 양위를 강요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한 해 전인 1644년 3월 심기원(沈器遠)의 옥사가 발생했을 때, 심기원이 '주상은 한 단계 높여 상왕의 자리에 앉히고, 정사는 다른 한 종실에게 맡기면 주상의 입장에서 편할 것'이라고 말했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전혀 양위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일을 근거로 인조가 소현세자를 해쳤다고 추정하기는 어렵다.
진사 수석 합격
문곡은 심기원의 옥사가 있던 16세에 관례를 올렸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성균관 시제(試製)에서 수석을 했다. 대제학이던 택당 이식은 입격한 사람들을 불러 얘기할 때, 문곡의 시가 시속(時俗)을 벗어난 고풍(古風)이 있다고 칭찬했다. 또 이번 사마시(司馬試), 곧 생원진사 시험에서는 '김 아무개'를 장원으로 삼아 과거시험장의 퇴락한 습속을 씻어야 한다고 누차 강조했다고 한다. 과거시험을 주재하는 대제학이 수석 합격자를 공공연히 언급하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당시 문곡을 둘러싼 중망을 보여주는 일화임에는 틀림없다.
문곡은 택당의 말대로 이듬해 2월 18세로 진사에 장원을 차지했다. 이어 3월에 아버지를 따라 통진(通津)으로 갔다. 그리고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그리웠던지 원주에 있는 외가의 선영에도 다녀왔다.
문곡의 비교적 평온한 일상과는 달리 조정은 그리 조용하지 못하였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함께, 원손(元孫)이 책봉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세자로 책봉되었기 때문이다.
"나라에 장성한 군주가 필요하다"
인조가 원손을 제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기 위한 명분은 '나라에 장성한 군주가 있어야 한다[國有長君]'는 논리였다. 인조의 생각은 1645년 윤6월 세자 책봉에 대한 의견을 나눌 때 가시화하였지만, 인조의 이와 같은 생각은 봉림대군이 심양에서 귀환할 당시에 이미 감지되고 있었다. 봉림대군은 계속 심양에 남아 있다가 소현세자가 죽은 뒤 귀국하였는데, 사관은 "봉림대군이 돌아왔다. 이때 국본(國本)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데다 봉림대군은 본디 훌륭한 명성이 있어 상이 자못 그에게 뜻을 두고 있다고 하므로 숙배할 적에 금중(禁中)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보았다"라고 기록하였다. 사관의 말은 편찬할 때가 아니고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에 적어둔 것이므로 결과론에 입각한 평론은 아니었다.(<인조실록> 권46 23년 5월 14일(을미))
아마 이런 기류를 알았기 때문인지 같은 달, 지평으로 재직하던 송준길(宋浚吉)은 원손을 세자로 정하고 스승을 두어 교육시킬 것을 인조에게 청하였다. 그러나 송준길은 이 상소에 대한 답도 듣지 못하고 체직되었다. 상소에는 소현세자를 잘못 진료한 의사 이형익에 대한 문책 요청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의(御醫) 이형익
이형익(李馨益)은 소현세자를 치료하던 의사이다. 원래 인조가 이형익의 침술을 인정하여 이해 정월에 이미 특명으로 서용한 바 있었다. 과거에 병을 치료하러 인조의 후궁 조 소용(趙昭容)의 어미 집에 왕래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추한 소문이 있었다고도 한다.(같은 해, 1월 4일 무자)
그러나 인조는 약방(藥房) 관원이나 의원들과 상의도 없이 이형익을 불러 침을 놓고 뜸질을 할 정도로 그를 아꼈다. 아낀 정도가 아니라 날마다 침을 맞았다. 그 와중에 소현세자가 병이 났는데, 어의(御醫) 박군(朴頵)이 들어가 진맥을 해보고는 학질로 진찰하였다. 약방이 다음날 새벽에 이형익에게 명하여 침을 놓아서 학질의 열(熱)을 내리게 할 것을 청하였고, 인조도 이에 따랐다.
치료를 받던 중 소현세자는 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떴고, 이형익을 벌하라는 논의가 빗발쳤다. 그러나 인조는 듣지 않았다. 사관은 "이형익은 어리석고 도리에 어긋난 위인으로서 스스로 상의 뜻을 얻었다고 여겨, 무릇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마다 은밀히 상께 말하여 그의 형제와 자식이 모두 음직(蔭職)을 외람되이 차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분개하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이형익이 혼자서 뭇사람의 의논을 물리치고 망령되이 요안혈에 뜸질을 하였는데, 상은 그의 의술에 미혹되어 매양 번침을 맞을 때마다 '효험이 있다.'고 말씀하였으므로, 뭇 신하들이 모두 감히 극력 논쟁하지 못했다."고 하였다.(<인조실록> 권46, 23년 6월 12일(계해))
세자가 된 봉림대군의 감기가 오래 계속된 적이 있었다. 인조는 이형익에게 진맥을 명하였다. 이형익은 사기(邪氣)를 다스리는 혈에 침을 놓아야 한다고 했다. 인조가 세자에게 침을 맞으라고 하자 세자는 극구 사양하며 침을 맞지 않았다. 감기는 곧 나았다. 이형익에 관한 한 인조는 다소 맹목적인 듯하였고, 봉림대군은 형인 소현세자의 경험 때문이었는지 멀리하는 형국이었다.(<인조실록> 권46, 23년 11월 3일(신해))
인조가 멀리 하다
이 무렵, 인조는 "청나라의 연호[大年號]를 쓰지 않은 상소를 감히 들여올 경우에는, 자세히 살피지 못한 과실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강력히 승정원에 전교하였다. 이 일은 김광현(金光炫)의 상소 때문이었다. 전말은 이렇다.
김광현은 바로 선원 김상용(金尙容)의 아들이며 청음 김상헌의 조카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청나라의 침략 때문에 강화에서 죽은 것 때문에 청나라 사람과 서로 접하기를 싫어했고, 벼슬이 제수되어도 늘 병을 칭탁해서 사양하였다. 그리고 외직(外職)에 있으면서 사용하던 공문서에는 간지(干支)만을 쓰고 숭덕(崇德)이나 순치(順治) 같은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상소문이나 차자에도 그렇게 하였으나, 인조도 그것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런데 소현세자가 세상을 뜬 뒤 김광현이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병간호와 치료를 형편없이 했다며 이형익 등의 죄를 극력 논박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인조는 김광현이 세자빈 강씨(姜氏) 집안의 사주를 받고 그런다고 생각하여 매우 노하였다. 강빈(姜嬪)의 오라비 강문명(姜文明)이 곧 김광현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인조는 이 때문에 김광현을 싫어하였고, 또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부끄럽게 여기는 신하들을 항상 미워했기 때문에 이런 전교가 있었고 한다. (<인조실록> 권46, 23년 윤6월 1일(신사))
흐릿한 강빈(姜嬪) 옥사
인조는 당시에 이미 원손인 석철(石鐵)의 왕위 계승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은 공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되었다. 적장자 상속의 종법(宗法)을 어기고, 전례를 왜곡하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찬성한 이는 김류와 김자점이었다. 김류는 예종이 차자(次子)로 왕위를 이은 것을 마치 덕종의 적장자인 성종이 세자로 책봉된 뒤 교체하고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여 사실을 왜곡하였다.
여기에는 후궁 조 귀인(趙貴人)이 개입되어 있었다. 인조는 '나라에 장성한 군주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세자 책봉 이후 조 귀인의 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金世龍)이 혼인하여 두 집안의 관계는 더욱 밀착하였다.(불과 몇 년 뒤인 효종 3년에 김자점, 김세룡, 조 귀인은 반역죄로 처벌을 받는다.)
그러면서 강빈의 옥사가 터졌다. 강빈이 심양에서부터 불순한 마음을 먹었으며, 귀국한 뒤 저주를 통해 군주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것이었다. 반역은 곧 죽음이었다. 김류와 이시백도 강빈의 사사(賜死)는 지나치다고 반대했다. 이경여(李敬輿)는 사사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진도로 귀양 갔다. 사간원에서는 강빈의 죄에 억측이 있다고 논계하였다.
여론이 비등해지자 인조는 강빈을 구원하는 자는 역률(逆律)로 다스리겠다고 하교하고, 서인(西人)을 지목하여 비난할 정도였다. 인조 및 김자점 등 궁궐 세력과 일반 조정 신하들의 대립이 격화된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강빈의 죄목을 기정사실화 했던 조경(趙絅),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강빈의 구원 논의를 중지시켰던 공으로 이조판서에 오른 이행원(李行遠)은 사헌부의 비판을 받았다. 조경은 상소를 올린 뒤에 자신이 말한 강빈의 죄상이 근거가 없었다고 후회하였다. 뭔가 판단을 해야 하는데, 판단의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사건 속으로 조정은 휘말려 들어갔다. 여기서도 안동 김문(金門)은 논란을 피해갈 수 없었다.
원두표(元斗杓)가 청음의 중망을 빌려 인조의 비위를 맞추려는 의도에서 '김상헌도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는 없다고 했다'고 허위보고를 했다. 즉, 강빈 옥사에서 청음 김상헌도 인조의 편을 들었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청음은 20여 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리면서 강빈 옥사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인조는 청음을 계속 만류했다. 이것이 대략 인조 24년(1646) 2월경부터 6월경까지의 상황이었다.
죽음과 태어남
강빈은 결국 3월에 폐출, 사사되었다. 종묘와 숙녕전에 이 사실을 고했는데, 사관은 "흉한 물건을 파묻고 독을 넣은 것을 비망기에는 추측이라고 하교하였는데, 제문(祭文)과 교서(敎書)에는 다 곧바로 단정하여 죄안(罪案 죄목)으로 삼으니, 보는 이가 해괴하게 여겼다"고 못내 아쉬워했다. 확정할 수 없는 사안을 단정했다는 비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강빈 옥사는 다음 임금인 효종대에도 불화의 불씨로 남아 있었다. 대체로 이 시기의 기록을 종합하면, "김자점은 인조가 소현세자의 빈(嬪) 강씨(姜氏)를 죽이려는 내심을 간파하고 인조의 수라상에 독약을 넣은 뒤 그 혐의를 강빈에게 뒤집어 씌워 죽게 하였고, 이듬해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濟州)에 유배 보내게 하였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역사의 큰 변화는 사람이 죽었을 때 일어난다. 조금 허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터무니없는 말도 아니다. 역사는 자연적, 생물학적 조건을 가진 인간이 만들어가는 문명에 대한 기록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의 무늬, 곧 인문(人文)이다. 사람에게 죽고 사는 일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개인이나 가문, 단체나 나라의 역사에서도 단연 사람의 죽음은 변화의 정점이나 전환점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죽는 이가 있으면 태어나는 이가 있는 법이다. 20세 되던 인조 26년(1648) 문곡은 아들 창집(昌集)을 얻었다. 부인 안정(安定) 나씨(羅氏) 사이에 처음으로 얻은 아들이었다. 자식 복이 많기도 했고, 자식 때문에 안타까운 일도 많았던 문곡의 첫째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그렇게 인조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배우고 살던 곳
5세에 어머니를 잃은 문곡은 8살에 외할머니 정씨의 손에서 자랐다. 외삼촌인 김천석(金天錫)이 홍산(鴻山) 현감으로 나가면서 같이 따라갔다고 한다. 홍산은 부여군 홍산면이다. 문곡은 글을 정씨에게서 배웠는데, 자애로운 외할머니의 가르침 덕분인지 정씨가 먼저 잠든 뒤에도 문곡은 홀로 늦게까지 글을 읽곤 했다고 한다.
문곡 나이 7세 때 끝난 병자호란은 그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큰할아버지 선원 김상용은 강화에서 순절하였고, 할아버지 청음 김상헌은 낙향했다가 오랜 심양의 억류 생활을 거쳐야 했음은 이미 살펴본 바 있다.
문곡은 외할머니를 따라 서천(舒川)에 있는 섬으로 피난을 갔다. 9세가 되던 1637년에는 외할머니를 따라 원주로 갔다. 외증조모 노씨가 세상을 떠서 상주가 된 외삼촌이 원주에 있는 선영(先塋)으로 반장(返葬 고향에 묻힘)하러 갔기 때문이다. 문곡은 외할머니의 동생인 정기방(鄭基磅)에게 학문을 배우기도 했다.
12세 되던 해, 문곡은 아버지 김광찬을 따라 안동으로 갔다. 외할머니 정씨가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아버지가 원주에 와서 안동으로 데려간 것이다. 이때부터 문곡은 할아버지 청음에게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겨울에 청음은 심양으로 끌려갔다. 13세 때 할머니 이씨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일가가 경기도 양주 석실(石室)로 이사를 왔다. 이씨를 석실 선영에 반장했던 길이었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석실. 남양주시 지금동 일대이다. 석실서원이 있었다는데, 전에 답사 가서 보니 '석실서원터'라는 작은 빗돌만 덜렁 서 있었다. |
할아버지의 편지
11세 때 안동에 내려가 있던 할아버지 청음이 어린 문곡에게 글을 하나 보냈다. <구용사물(九容四勿)>이라는 글이다. 문곡은 이 일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었다.
고애(孤哀 부모가 모두 돌아가신 자신)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외가에서 컸으며, 기묘년(1639, 인조17)에는 원주(原州)에 의탁하여 지냈습니다. 그때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영남(嶺南)에 은거하셨는데, 큰형님에게 구용(九容)과 사물(四勿)을 쓰게 하여 제게 부치시고, 직접 편지를 써서 이르시기를, "네가 이걸 아침저녁으로 보고, 언제나 마음에 두고 잊지 않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당시 10살이 갓 넘었을 때였으므로 어리고 몽매하여 가르침을 이해하질 못했고, 조금 컸을 때도 여전히 즐겨 노는 데 습관이 들어 체득하여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문곡집> 권27 <우재 선생께 올리는 편지[上尤齋 戊申]>)
이 글은 문곡이 현종 9년(1688) 우재, 즉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에게 보낸 편지다. 근 20여 년 뒤 일인데, 청음이 보낸 글이 문곡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음을 짐할 수 있다.
구용(九容)이란 사람이 수행하고 처신할 때 지녀야할 태도 아홉 가지를 말한다. <예기> <옥조(玉藻)>에 보면 "걸음걸이는 무게가 있어야 하고, 손놀림은 공손해야 하고, 눈은 단정해야 하고, 입은 조용해야 하고, 목소리는 고요해야 하고, 머리 모양은 곧아야 하고, 기상은 엄숙해야 하고, 서 있는 모습은 덕이 흘러야 하고, 얼굴은 해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는 말에서 나왔다.
사물(四勿)은 공자가 제자인 안연(顔淵)에게 가르친 인(仁)의 실천 태도를 말한다. <논어> <안연(顔淵)>에,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고 한 데서 나왔다.
청음은 이 글귀와 함께 편지를 보내, "이걸 아침저녁으로 보고 언제나 마음에 두고 잊지 않도록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할아버지의 당부를 지키지 못했다고 자책하던 문곡은 자신의 집 당호를 아예 구사재(九四齋)라고 붙였다.
소현세자의 죽음
인조 23년(1645) 2월, 청음은 76세의 노구를 이끌고 심양에서 귀국했다. 청나라가 북경을 함락한 뒤에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비롯한 인질들을 풀어주었기 때문이다.(물론 '소현'은 사후에 내린 시호이다.) 문곡은 파주(坡州)로 할아버지 마중을 나갔다. 그리고 청음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석실에서 모셨다. 남한산성에서 항복할 때 청음이 낙향했던 기억 때문인지 인조는 '살아 돌아왔는데도 궁궐에 오지 않았다'고 서운해 했다. 문곡이 17세 되던 해였다.
그런데 5월 소현세자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떴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억측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거니와 당시에도 파란이 컸다. 이식(李植)은 "세자는 타국에 오랫동안 억류되어 있는 동안 자주 군대를 따라 동쪽으로 가 삭황(朔荒)에서 사냥을 하고 서쪽으로 연새(燕塞)를 왕래하면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위험한 고생을 두루 겪었으므로, 비록 정신은 태연자약하였으나 속으로는 노고로 인해 손상을 받았다. 그리하여 환궁한 이후 계속해서 한열(寒熱)의 증세가 있었는데, 의술(醫術)을 잘못 시행하여 끝내 별세하기에 이르렀다."고 썼다.(<인조실록> 권46 23년 6월 10일(신유))
인조에게 벼루에 맞아 죽었다는 설, 독약에 죽었다는 설이 있을 만큼 소현세자의 죽음은 급작스러웠던가 보다. 한편 청나라가 인조에게 양위를 강요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한 해 전인 1644년 3월 심기원(沈器遠)의 옥사가 발생했을 때, 심기원이 '주상은 한 단계 높여 상왕의 자리에 앉히고, 정사는 다른 한 종실에게 맡기면 주상의 입장에서 편할 것'이라고 말했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전혀 양위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일을 근거로 인조가 소현세자를 해쳤다고 추정하기는 어렵다.
▲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이 인질로 억류되었던 심양관 옛터. 지금은 심양 소년아동도서관이 되었다. ⓒ심양시소년아동도서관 |
진사 수석 합격
문곡은 심기원의 옥사가 있던 16세에 관례를 올렸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성균관 시제(試製)에서 수석을 했다. 대제학이던 택당 이식은 입격한 사람들을 불러 얘기할 때, 문곡의 시가 시속(時俗)을 벗어난 고풍(古風)이 있다고 칭찬했다. 또 이번 사마시(司馬試), 곧 생원진사 시험에서는 '김 아무개'를 장원으로 삼아 과거시험장의 퇴락한 습속을 씻어야 한다고 누차 강조했다고 한다. 과거시험을 주재하는 대제학이 수석 합격자를 공공연히 언급하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당시 문곡을 둘러싼 중망을 보여주는 일화임에는 틀림없다.
문곡은 택당의 말대로 이듬해 2월 18세로 진사에 장원을 차지했다. 이어 3월에 아버지를 따라 통진(通津)으로 갔다. 그리고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그리웠던지 원주에 있는 외가의 선영에도 다녀왔다.
문곡의 비교적 평온한 일상과는 달리 조정은 그리 조용하지 못하였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함께, 원손(元孫)이 책봉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세자로 책봉되었기 때문이다.
"나라에 장성한 군주가 필요하다"
인조가 원손을 제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기 위한 명분은 '나라에 장성한 군주가 있어야 한다[國有長君]'는 논리였다. 인조의 생각은 1645년 윤6월 세자 책봉에 대한 의견을 나눌 때 가시화하였지만, 인조의 이와 같은 생각은 봉림대군이 심양에서 귀환할 당시에 이미 감지되고 있었다. 봉림대군은 계속 심양에 남아 있다가 소현세자가 죽은 뒤 귀국하였는데, 사관은 "봉림대군이 돌아왔다. 이때 국본(國本)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데다 봉림대군은 본디 훌륭한 명성이 있어 상이 자못 그에게 뜻을 두고 있다고 하므로 숙배할 적에 금중(禁中)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보았다"라고 기록하였다. 사관의 말은 편찬할 때가 아니고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에 적어둔 것이므로 결과론에 입각한 평론은 아니었다.(<인조실록> 권46 23년 5월 14일(을미))
아마 이런 기류를 알았기 때문인지 같은 달, 지평으로 재직하던 송준길(宋浚吉)은 원손을 세자로 정하고 스승을 두어 교육시킬 것을 인조에게 청하였다. 그러나 송준길은 이 상소에 대한 답도 듣지 못하고 체직되었다. 상소에는 소현세자를 잘못 진료한 의사 이형익에 대한 문책 요청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의(御醫) 이형익
이형익(李馨益)은 소현세자를 치료하던 의사이다. 원래 인조가 이형익의 침술을 인정하여 이해 정월에 이미 특명으로 서용한 바 있었다. 과거에 병을 치료하러 인조의 후궁 조 소용(趙昭容)의 어미 집에 왕래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추한 소문이 있었다고도 한다.(같은 해, 1월 4일 무자)
그러나 인조는 약방(藥房) 관원이나 의원들과 상의도 없이 이형익을 불러 침을 놓고 뜸질을 할 정도로 그를 아꼈다. 아낀 정도가 아니라 날마다 침을 맞았다. 그 와중에 소현세자가 병이 났는데, 어의(御醫) 박군(朴頵)이 들어가 진맥을 해보고는 학질로 진찰하였다. 약방이 다음날 새벽에 이형익에게 명하여 침을 놓아서 학질의 열(熱)을 내리게 할 것을 청하였고, 인조도 이에 따랐다.
치료를 받던 중 소현세자는 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떴고, 이형익을 벌하라는 논의가 빗발쳤다. 그러나 인조는 듣지 않았다. 사관은 "이형익은 어리석고 도리에 어긋난 위인으로서 스스로 상의 뜻을 얻었다고 여겨, 무릇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마다 은밀히 상께 말하여 그의 형제와 자식이 모두 음직(蔭職)을 외람되이 차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분개하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이형익이 혼자서 뭇사람의 의논을 물리치고 망령되이 요안혈에 뜸질을 하였는데, 상은 그의 의술에 미혹되어 매양 번침을 맞을 때마다 '효험이 있다.'고 말씀하였으므로, 뭇 신하들이 모두 감히 극력 논쟁하지 못했다."고 하였다.(<인조실록> 권46, 23년 6월 12일(계해))
세자가 된 봉림대군의 감기가 오래 계속된 적이 있었다. 인조는 이형익에게 진맥을 명하였다. 이형익은 사기(邪氣)를 다스리는 혈에 침을 놓아야 한다고 했다. 인조가 세자에게 침을 맞으라고 하자 세자는 극구 사양하며 침을 맞지 않았다. 감기는 곧 나았다. 이형익에 관한 한 인조는 다소 맹목적인 듯하였고, 봉림대군은 형인 소현세자의 경험 때문이었는지 멀리하는 형국이었다.(<인조실록> 권46, 23년 11월 3일(신해))
인조가 멀리 하다
이 무렵, 인조는 "청나라의 연호[大年號]를 쓰지 않은 상소를 감히 들여올 경우에는, 자세히 살피지 못한 과실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강력히 승정원에 전교하였다. 이 일은 김광현(金光炫)의 상소 때문이었다. 전말은 이렇다.
김광현은 바로 선원 김상용(金尙容)의 아들이며 청음 김상헌의 조카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청나라의 침략 때문에 강화에서 죽은 것 때문에 청나라 사람과 서로 접하기를 싫어했고, 벼슬이 제수되어도 늘 병을 칭탁해서 사양하였다. 그리고 외직(外職)에 있으면서 사용하던 공문서에는 간지(干支)만을 쓰고 숭덕(崇德)이나 순치(順治) 같은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상소문이나 차자에도 그렇게 하였으나, 인조도 그것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런데 소현세자가 세상을 뜬 뒤 김광현이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병간호와 치료를 형편없이 했다며 이형익 등의 죄를 극력 논박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인조는 김광현이 세자빈 강씨(姜氏) 집안의 사주를 받고 그런다고 생각하여 매우 노하였다. 강빈(姜嬪)의 오라비 강문명(姜文明)이 곧 김광현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인조는 이 때문에 김광현을 싫어하였고, 또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부끄럽게 여기는 신하들을 항상 미워했기 때문에 이런 전교가 있었고 한다. (<인조실록> 권46, 23년 윤6월 1일(신사))
흐릿한 강빈(姜嬪) 옥사
인조는 당시에 이미 원손인 석철(石鐵)의 왕위 계승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은 공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되었다. 적장자 상속의 종법(宗法)을 어기고, 전례를 왜곡하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찬성한 이는 김류와 김자점이었다. 김류는 예종이 차자(次子)로 왕위를 이은 것을 마치 덕종의 적장자인 성종이 세자로 책봉된 뒤 교체하고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여 사실을 왜곡하였다.
여기에는 후궁 조 귀인(趙貴人)이 개입되어 있었다. 인조는 '나라에 장성한 군주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세자 책봉 이후 조 귀인의 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金世龍)이 혼인하여 두 집안의 관계는 더욱 밀착하였다.(불과 몇 년 뒤인 효종 3년에 김자점, 김세룡, 조 귀인은 반역죄로 처벌을 받는다.)
그러면서 강빈의 옥사가 터졌다. 강빈이 심양에서부터 불순한 마음을 먹었으며, 귀국한 뒤 저주를 통해 군주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것이었다. 반역은 곧 죽음이었다. 김류와 이시백도 강빈의 사사(賜死)는 지나치다고 반대했다. 이경여(李敬輿)는 사사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진도로 귀양 갔다. 사간원에서는 강빈의 죄에 억측이 있다고 논계하였다.
여론이 비등해지자 인조는 강빈을 구원하는 자는 역률(逆律)로 다스리겠다고 하교하고, 서인(西人)을 지목하여 비난할 정도였다. 인조 및 김자점 등 궁궐 세력과 일반 조정 신하들의 대립이 격화된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강빈의 죄목을 기정사실화 했던 조경(趙絅),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강빈의 구원 논의를 중지시켰던 공으로 이조판서에 오른 이행원(李行遠)은 사헌부의 비판을 받았다. 조경은 상소를 올린 뒤에 자신이 말한 강빈의 죄상이 근거가 없었다고 후회하였다. 뭔가 판단을 해야 하는데, 판단의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사건 속으로 조정은 휘말려 들어갔다. 여기서도 안동 김문(金門)은 논란을 피해갈 수 없었다.
원두표(元斗杓)가 청음의 중망을 빌려 인조의 비위를 맞추려는 의도에서 '김상헌도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는 없다고 했다'고 허위보고를 했다. 즉, 강빈 옥사에서 청음 김상헌도 인조의 편을 들었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청음은 20여 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리면서 강빈 옥사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인조는 청음을 계속 만류했다. 이것이 대략 인조 24년(1646) 2월경부터 6월경까지의 상황이었다.
죽음과 태어남
강빈은 결국 3월에 폐출, 사사되었다. 종묘와 숙녕전에 이 사실을 고했는데, 사관은 "흉한 물건을 파묻고 독을 넣은 것을 비망기에는 추측이라고 하교하였는데, 제문(祭文)과 교서(敎書)에는 다 곧바로 단정하여 죄안(罪案 죄목)으로 삼으니, 보는 이가 해괴하게 여겼다"고 못내 아쉬워했다. 확정할 수 없는 사안을 단정했다는 비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강빈 옥사는 다음 임금인 효종대에도 불화의 불씨로 남아 있었다. 대체로 이 시기의 기록을 종합하면, "김자점은 인조가 소현세자의 빈(嬪) 강씨(姜氏)를 죽이려는 내심을 간파하고 인조의 수라상에 독약을 넣은 뒤 그 혐의를 강빈에게 뒤집어 씌워 죽게 하였고, 이듬해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濟州)에 유배 보내게 하였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역사의 큰 변화는 사람이 죽었을 때 일어난다. 조금 허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터무니없는 말도 아니다. 역사는 자연적, 생물학적 조건을 가진 인간이 만들어가는 문명에 대한 기록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의 무늬, 곧 인문(人文)이다. 사람에게 죽고 사는 일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개인이나 가문, 단체나 나라의 역사에서도 단연 사람의 죽음은 변화의 정점이나 전환점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죽는 이가 있으면 태어나는 이가 있는 법이다. 20세 되던 인조 26년(1648) 문곡은 아들 창집(昌集)을 얻었다. 부인 안정(安定) 나씨(羅氏) 사이에 처음으로 얻은 아들이었다. 자식 복이 많기도 했고, 자식 때문에 안타까운 일도 많았던 문곡의 첫째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그렇게 인조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눈 속에서도 꽃은 피나니 ③
[프레시안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
☞연재 지난 글 바로 가기 : 눈 속에서 꽃은 피나니 ②
곡절 끝에 효종이 즉위하였다. 인조가 궁궐 안의 조귀인(趙貴人) 세력이나 친청파(親淸派) 김자점(金自點) 세력에 편중되어 국정을 운영하면서 조선의 정세와 행보는 매우 혼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소현세자의 죽음도 급작스러웠거니와 뒤를 이어 벌어진 옥사로 인한 세자빈 강씨(姜氏)의 죽음에 대해서는 억울하다는 여론이 훨씬 많았다. 조정 신하들도 그다지 수긍하지 못했던 인조의 처사였다.
사관은 인조가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부끄럽게 여기는 신하들을 항상 미워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인조는 척화파를 싫어했다는 말이다. 이는 인조가 친청파 김자점과 가까웠던 이유이기도 하고, 동시에 결과이기도 하다.
하물며 소현세자의 세 아들이 제주로 유배를 갔지 않은가. 소현세자의 큰아들 석철(石鐵)은 귀양 간 지 한 해만인 1648년 9월 제주에서 죽었고, 둘째 석린(石麟)은 12월에 죽었다. 셋째 석견(石堅)만 살아남았으나, 그 역시 22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1665, 현종 6년) 민심이 편할 리 없었다. 석철과 석견이 죽은 이듬해 효종이 즉위했다.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자 효종은 인조대 후반 정치상황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서인(西人) 산림(山林)들을 먼저 조정에 초빙하였다. 문곡 김수항의 할아버지 청음 김상헌에 대해서는 인조가 내내 편치 않게 생각하였던 바 있었다. 남한산성에서 항복하던 때 청음이 안동으로 내려간 일은 그렇다 쳐도, 심양에서 귀국했을 때에도 인조는 청음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강빈(姜嬪)의 오라비 강문명(姜文明)은 김광현의 사위였는데, 김광현은 강화도에서 순절한 선원 김상용의 아들이니 청음의 조카이고, 문곡의 당숙이었다. 결국 문곡 집안은 인조와 편치 않았다.
경상도에서 온 상소
18세 때(1446) 성균관 진사시험에 장원을 했던 문곡은 곧바로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마 인조 말 불편한 상황도 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다. 부친을 따라 통진(通津, 지금의 김포)을 다녀오든지, 장인 나성두(羅星斗)가 나가 있던 황해도 봉산(鳳山)에 다녀왔다. 22세 되던 효종 원년(1450)에는 성균관에 들어와 있었다.
그때 경상도의 진사 유직(柳稷) 등 900여 명이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효종 즉위년 12월 홍위(洪葳)와 이원상(李元相) 등이 율곡과 성혼의 종사를 청했다가 효종이 일단 신중히 처리하자고 반려했는데, 그에 대한 반론이었다.
문묘는 공자(孔子)의 사당으로, 성균관 대성전(大成殿)을 말한다. 나라에 국왕의 종묘가 있듯이, 학문의 기준을 공자로 삼는 상징이 곧 문묘였다. 문묘에 배향(配享, 함께 제사를 받음)된다는 것은 곧 학문의 정통성이 사회에서 인정받았다는 뜻이었다. 유직 등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이가 천륜(天倫)을 끊고서 공문(空門, 불교)에 도망하여 숨은 것은 참으로 명교(名敎)에 죄를 얻은 것이니, 그 당시에도 사마시에 뽑혀서 성묘(聖廟)에 배알하는 것을 오히려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혼은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고서도 임금이 파천하던 날 달려오지 않은 것은 참으로 왕법에 용서받지 못할 바로서 선묘(宣廟)께서 내린 준엄한 하교가 어제의 일 같습니다.(<효종실록> 권3 1년 2월 22일(을사))
양현(兩賢, 율곡과 우계)의 종사는 인조 때에도 제기된 적이 있었으나 조정에서는 시기상조라며 일단 유예한 바 있었다. 유직 등의 상소에 따르면, 이이는 젊어서 불교에 귀의한 적이 있으므로 실절(失節)한 것이고, 성혼은 임진왜란 때 파주에 있었으면서 의주로 파천하던 선조를 호종하지 않았으므로 실절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단이다"
또 하나,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이이의 학문이 기를 위주로 하고 기(氣)를 리(理)로 인식하여 이기(理氣)를 일물(一物)로 처리한 나머지 양자의 범주적 차이를 무시하고 심(心)을 기로 보았다는 것이었다.
이이의 학(學)은 오로지 기(氣)자만을 주장하여 기를 이(理)로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와 기를 같은 것으로 여겨 다시 분별함이 없었으며, 심지어 마음이 바로 기이고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 모두 기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병통의 근본은 원래 도(道)와 기(器)를 변별하지 않은 육구연(陸九淵)의 견해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 폐해는 작용(作用)을 성(性)의 체(體)라고 한 석씨(釋氏)의 주장과 같습니다.
유직 등은 이이가 평소 이러한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퇴계가 죽은 뒤에 퇴계의 학문을 공격했다고 비난했다. 아울러 "주자의 설을 살펴보면 '이(理)가 있은 연후에 기(氣)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와 기는 결단코 둘이며 '사단(四端)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七情)은 기에서 발한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와 기가 호발(互發)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자의 정론(定論)이 이토록 명백한데도 오히려 믿지 않았습니다. 이황의 학은 바로 주자의 학이었으니 이이에게서 배척을 당한 것은 당연합니다."라고 하여, 퇴계야말로 주자의 이론과 같았는데, 이이가 헐뜯었다고 강조하였다. 결국 율곡의 학설은 불교의 학설과 같다는 말이고, 곧 이단(異端)이란 뜻이었다.
주리(主理)와 주기(主氣)
그런데 유직의 상소에 '주기'란 말이 나온다. 잠시 주리론과 주기론이라는 용어의 어원을 살펴보겠다. "또한 이이의 학문은 기(氣)자를 오로지 주로 하였다.[且珥之學, 專主氣字]"라는 말이 그것이다.
현재 한국 사상사 논문을 보면 '주리론'이니 '주기론'이니 하는 말이 많이 나온다. 아마 조선시대사에 관심 있는 분들은 들어보셨을 것이다. 나는 '주리론'과 '주기론'이라는 용어에 석사논문을 쓰면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데, 사료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고 당황한 기억이 있다. 지금 거론하는 유직의 상소에서 '주기(主氣)'라는 표현을 보고 반가웠을 정도로 희귀한 용어였다.(실록에서 '주리'라는 말은 여기에서 딱 한 번 나온다.)
하지만 주리-주기라는 용어는 이미 훨씬 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이미 잘 알려진 퇴계와 고봉 간의 사단칠정 논쟁에서도 주리-주기라는 개념을 통해 논의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빈도나 강도로 보아 퇴계나 고봉 당시보다 바로 이 유직의 상소를 전후하여 주리-주기 구도는 훨씬 늘어나고 강화되었다.
퇴계와 고봉(율곡도 고봉과 같은 견해이다.) 사이의 사단칠정 논쟁은, 성리학의 근본적 문제의식, 즉 기(인욕 人慾)의 세계에서 이(천리 天理)의 주재성과 내재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데서 파생된 두 경향, 곧 이(理)의 주재성을 기(氣)의 현실성과 별개로 확보하려는 노력(퇴계)과, 이의 내재성을 기의 현실성 속에서 확보하려는 노력(고봉, 율곡)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다. 둘은 얼핏 같은 말 같지만 상이한 편차를 낳는다. 사단칠정 논쟁에서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는 퇴계와 고봉(율곡)의 입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난감한 개념-구도
유직 등의 상소 전후로 주리-주기라는 말이 쓰이기는 했지만 그걸 사상사의 구도로 정착시킨 것은 일제 강점기의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의 <조선유학사>였다. 그리고 그의 분류가 지금까지 학계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분류에는 문제가 있다.
숙종~영조 연간에 '성인(聖人)과 보통 사람의 마음[心]이 같은가, 다른가', '인간과 동물은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를 주제로 한 또 한 번의 굵직한 논쟁에서 문제점이 드러난다. 이 논쟁을 호락(湖洛) 논쟁이라고 하는데, 충청도의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은 차별성을 주장했기에 호론이라고 불렀고, 같은 충청도 출신이지만 외암(巍巖) 이간(李柬), 문곡의 아들인 농암 김창협 등과 함께 동론(同論)을 주장했으므로 낙론이라고 불린 데서 연유한다.
호락 논쟁에서 굳이 '주기-주리'라는 용어를 쓴다면 당연히 호론이 주리파가 되고, 낙론이 주기파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론을 주기파라고 보거나 낙론을 주리파라고 한다. 같은 율곡 제자들인데 호론의 경우 완전히 주리-주기가 뒤바뀌게 되어 '같은 학파-다른 이론'이 되는 것이다. '같은 학파-다른 이론'이란 실로 형용모순이다. 즉 이런 학파는 학파가 아닌 것이다. 분류 자체로도 적절하지 않다.
한원진 같은 율곡학파의 호론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한때 실학의 발달을 '주기론'에서 찾기도 했는데, 그러자니 율곡의 기호학파에 연원을 둔 북학파는 상관이 없지만, 성호(星湖) 이익(李瀷)이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연원은, 굳이 연결하자면, '주리론'인 퇴계에 닿아있어서 앞뒤가 맞지 않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주기-주리'라는 개념이 조선에서 보이는 성리학의 자기화 과정의 역사성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었으면 되었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개념-구도라고 생각한다. 이 병폐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주기-주리'의 개념을 통해 정치사를 설명하면 '실제적인 사상사와 정치사의 분리 현상'이 나타난다. '학파 따로, 정파 따로', 정치에 이념이나 사상이 없고, 학문에 정책이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곧 조선시대 정치는 권력 투쟁이었을 뿐이고, 학문은 현실과 무관한 관념놀음, 공리공담이었다는 뜻이다.
다카하시 도오루의 '주리-주기' 논리를 이어받은 이병도(李丙燾)가 여러 유보적 언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단칠정 논쟁과 호락 논쟁을 '관념적 독단' 정도로 이해하고, 나아가 조선 정치사의 흐름을 식민지 시대 일본 학자들의 당쟁론 정도에서 이해하게 되는 근원적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올라온 경상도의 상소
유직의 상소가 있고 난 뒤, 다시 경상도의 진사(進士) 신석형(申碩亨) 등 40여 명이 상소하였다. 그들은 유직과는 달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들이 살피건대, 이이가 문순공(文純公) 신 이황(李滉)을 찾아가 만난 것은 무오년(1558, 명종 13)의 일로서 이때 이이의 나이가 23세였는데, 이황이 즉시 문인 조목(趙穆)에게 글을 보내기를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했는데, 옛 성현이 나를 속이지 않았구나'라고 하였습니다. …… 처음에 이이가 승려였다고 헐뜯으면서 '사마시(司馬試) 때에 알성(謁聖)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계미년에 올린 송응개(宋應漑)의 질투어린 계사(啓辭)이며, 성혼을 처음으로 무함하여 '임금을 버리고 선비를 해쳤다.'고 한 것은 이홍로(李弘老)와 정인홍(鄭仁弘)이 지어내서 모함한 이야기였습니다. (<효종실록> 권4 1년 5월 1일(계축))
이들은 이미 퇴계가 율곡을 인정했다는 점을 들어 둘 사이의 이론적 간극이 문제되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또 율곡과 우계에 대한 비방은 곧 송응개와 정인홍이 지어내어 모함한 논거라는 점도 상기시켰다. 송응개는 1583년 율곡의 전력을 문제 삼아 탄핵했다가, 선조가 직접 교서(敎書)를 지어 유배시켰던 일이 있었다, 이홍로와 정인홍은 광해군 때 성혼을 비난했다가 정홍명(鄭弘溟) 등의 반론을 받았고 반정 이후 복주(伏誅)되었다, 그러니 유직 등의 논거는 이미 기각된 논리라는 뜻이었다.
이기(理氣)에 대한 견해도 퇴계와 우계가 같은데 퇴계의 것은 높이고 우계의 것은 내쳤으며, 정인홍 한 사람이 퇴계와 우계 모두 헐뜯었는데 퇴계를 무고한 것은 놔두고 성혼을 무고한 것만 그대로 따라했으므로 공정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결국 이는 율곡과 우계만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퇴계까지도 모르는 것이며, 율곡과 우계만 무고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퇴계까지도 무고하는 것이라고 맹박하였다.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이황은 주돈이(周敦頤)와 정자(程子)에 비유되고 이이와 성혼은 이황에 대해 주희와 장식에 비유됩니다. 후학이 주돈이와 정자는 받들면서 주희와 장식을 배척하는 것은 실로 도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시기하고 편벽된 풍조의 결과로 번번이 이황을 편들고 이이와 성혼을 배척하려고 합니다."라는 말로 상소를 정리하였다. 이리하여 상황은 조정 전체의 중대 사안으로 발전하였다. (<효종실록> 권4 1년 5월 1일(계축))
[프레시안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
☞연재 지난 글 바로 가기 : 눈 속에서 꽃은 피나니 ②
곡절 끝에 효종이 즉위하였다. 인조가 궁궐 안의 조귀인(趙貴人) 세력이나 친청파(親淸派) 김자점(金自點) 세력에 편중되어 국정을 운영하면서 조선의 정세와 행보는 매우 혼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소현세자의 죽음도 급작스러웠거니와 뒤를 이어 벌어진 옥사로 인한 세자빈 강씨(姜氏)의 죽음에 대해서는 억울하다는 여론이 훨씬 많았다. 조정 신하들도 그다지 수긍하지 못했던 인조의 처사였다.
사관은 인조가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부끄럽게 여기는 신하들을 항상 미워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인조는 척화파를 싫어했다는 말이다. 이는 인조가 친청파 김자점과 가까웠던 이유이기도 하고, 동시에 결과이기도 하다.
하물며 소현세자의 세 아들이 제주로 유배를 갔지 않은가. 소현세자의 큰아들 석철(石鐵)은 귀양 간 지 한 해만인 1648년 9월 제주에서 죽었고, 둘째 석린(石麟)은 12월에 죽었다. 셋째 석견(石堅)만 살아남았으나, 그 역시 22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1665, 현종 6년) 민심이 편할 리 없었다. 석철과 석견이 죽은 이듬해 효종이 즉위했다.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자 효종은 인조대 후반 정치상황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서인(西人) 산림(山林)들을 먼저 조정에 초빙하였다. 문곡 김수항의 할아버지 청음 김상헌에 대해서는 인조가 내내 편치 않게 생각하였던 바 있었다. 남한산성에서 항복하던 때 청음이 안동으로 내려간 일은 그렇다 쳐도, 심양에서 귀국했을 때에도 인조는 청음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강빈(姜嬪)의 오라비 강문명(姜文明)은 김광현의 사위였는데, 김광현은 강화도에서 순절한 선원 김상용의 아들이니 청음의 조카이고, 문곡의 당숙이었다. 결국 문곡 집안은 인조와 편치 않았다.
경상도에서 온 상소
18세 때(1446) 성균관 진사시험에 장원을 했던 문곡은 곧바로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마 인조 말 불편한 상황도 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다. 부친을 따라 통진(通津, 지금의 김포)을 다녀오든지, 장인 나성두(羅星斗)가 나가 있던 황해도 봉산(鳳山)에 다녀왔다. 22세 되던 효종 원년(1450)에는 성균관에 들어와 있었다.
그때 경상도의 진사 유직(柳稷) 등 900여 명이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효종 즉위년 12월 홍위(洪葳)와 이원상(李元相) 등이 율곡과 성혼의 종사를 청했다가 효종이 일단 신중히 처리하자고 반려했는데, 그에 대한 반론이었다.
문묘는 공자(孔子)의 사당으로, 성균관 대성전(大成殿)을 말한다. 나라에 국왕의 종묘가 있듯이, 학문의 기준을 공자로 삼는 상징이 곧 문묘였다. 문묘에 배향(配享, 함께 제사를 받음)된다는 것은 곧 학문의 정통성이 사회에서 인정받았다는 뜻이었다. 유직 등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이가 천륜(天倫)을 끊고서 공문(空門, 불교)에 도망하여 숨은 것은 참으로 명교(名敎)에 죄를 얻은 것이니, 그 당시에도 사마시에 뽑혀서 성묘(聖廟)에 배알하는 것을 오히려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혼은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고서도 임금이 파천하던 날 달려오지 않은 것은 참으로 왕법에 용서받지 못할 바로서 선묘(宣廟)께서 내린 준엄한 하교가 어제의 일 같습니다.(<효종실록> 권3 1년 2월 22일(을사))
양현(兩賢, 율곡과 우계)의 종사는 인조 때에도 제기된 적이 있었으나 조정에서는 시기상조라며 일단 유예한 바 있었다. 유직 등의 상소에 따르면, 이이는 젊어서 불교에 귀의한 적이 있으므로 실절(失節)한 것이고, 성혼은 임진왜란 때 파주에 있었으면서 의주로 파천하던 선조를 호종하지 않았으므로 실절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단이다"
또 하나,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이이의 학문이 기를 위주로 하고 기(氣)를 리(理)로 인식하여 이기(理氣)를 일물(一物)로 처리한 나머지 양자의 범주적 차이를 무시하고 심(心)을 기로 보았다는 것이었다.
이이의 학(學)은 오로지 기(氣)자만을 주장하여 기를 이(理)로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와 기를 같은 것으로 여겨 다시 분별함이 없었으며, 심지어 마음이 바로 기이고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 모두 기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병통의 근본은 원래 도(道)와 기(器)를 변별하지 않은 육구연(陸九淵)의 견해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 폐해는 작용(作用)을 성(性)의 체(體)라고 한 석씨(釋氏)의 주장과 같습니다.
유직 등은 이이가 평소 이러한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퇴계가 죽은 뒤에 퇴계의 학문을 공격했다고 비난했다. 아울러 "주자의 설을 살펴보면 '이(理)가 있은 연후에 기(氣)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와 기는 결단코 둘이며 '사단(四端)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七情)은 기에서 발한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와 기가 호발(互發)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자의 정론(定論)이 이토록 명백한데도 오히려 믿지 않았습니다. 이황의 학은 바로 주자의 학이었으니 이이에게서 배척을 당한 것은 당연합니다."라고 하여, 퇴계야말로 주자의 이론과 같았는데, 이이가 헐뜯었다고 강조하였다. 결국 율곡의 학설은 불교의 학설과 같다는 말이고, 곧 이단(異端)이란 뜻이었다.
주리(主理)와 주기(主氣)
그런데 유직의 상소에 '주기'란 말이 나온다. 잠시 주리론과 주기론이라는 용어의 어원을 살펴보겠다. "또한 이이의 학문은 기(氣)자를 오로지 주로 하였다.[且珥之學, 專主氣字]"라는 말이 그것이다.
현재 한국 사상사 논문을 보면 '주리론'이니 '주기론'이니 하는 말이 많이 나온다. 아마 조선시대사에 관심 있는 분들은 들어보셨을 것이다. 나는 '주리론'과 '주기론'이라는 용어에 석사논문을 쓰면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데, 사료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고 당황한 기억이 있다. 지금 거론하는 유직의 상소에서 '주기(主氣)'라는 표현을 보고 반가웠을 정도로 희귀한 용어였다.(실록에서 '주리'라는 말은 여기에서 딱 한 번 나온다.)
하지만 주리-주기라는 용어는 이미 훨씬 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이미 잘 알려진 퇴계와 고봉 간의 사단칠정 논쟁에서도 주리-주기라는 개념을 통해 논의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빈도나 강도로 보아 퇴계나 고봉 당시보다 바로 이 유직의 상소를 전후하여 주리-주기 구도는 훨씬 늘어나고 강화되었다.
퇴계와 고봉(율곡도 고봉과 같은 견해이다.) 사이의 사단칠정 논쟁은, 성리학의 근본적 문제의식, 즉 기(인욕 人慾)의 세계에서 이(천리 天理)의 주재성과 내재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데서 파생된 두 경향, 곧 이(理)의 주재성을 기(氣)의 현실성과 별개로 확보하려는 노력(퇴계)과, 이의 내재성을 기의 현실성 속에서 확보하려는 노력(고봉, 율곡)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다. 둘은 얼핏 같은 말 같지만 상이한 편차를 낳는다. 사단칠정 논쟁에서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는 퇴계와 고봉(율곡)의 입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난감한 개념-구도
유직 등의 상소 전후로 주리-주기라는 말이 쓰이기는 했지만 그걸 사상사의 구도로 정착시킨 것은 일제 강점기의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의 <조선유학사>였다. 그리고 그의 분류가 지금까지 학계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분류에는 문제가 있다.
숙종~영조 연간에 '성인(聖人)과 보통 사람의 마음[心]이 같은가, 다른가', '인간과 동물은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를 주제로 한 또 한 번의 굵직한 논쟁에서 문제점이 드러난다. 이 논쟁을 호락(湖洛) 논쟁이라고 하는데, 충청도의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은 차별성을 주장했기에 호론이라고 불렀고, 같은 충청도 출신이지만 외암(巍巖) 이간(李柬), 문곡의 아들인 농암 김창협 등과 함께 동론(同論)을 주장했으므로 낙론이라고 불린 데서 연유한다.
호락 논쟁에서 굳이 '주기-주리'라는 용어를 쓴다면 당연히 호론이 주리파가 되고, 낙론이 주기파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론을 주기파라고 보거나 낙론을 주리파라고 한다. 같은 율곡 제자들인데 호론의 경우 완전히 주리-주기가 뒤바뀌게 되어 '같은 학파-다른 이론'이 되는 것이다. '같은 학파-다른 이론'이란 실로 형용모순이다. 즉 이런 학파는 학파가 아닌 것이다. 분류 자체로도 적절하지 않다.
▲ <한국유학사>의 저자 이병도. 그는 다카하시 도오루가 <조선유학사>에서 썼던 조선시대 사상사를 도식화하기 위해 '주리-주기' 구도를 그대로 차용했다. 그 구도 속에서 조선의 정치는 당쟁(黨爭)이 되고, 사상은 공담(空談)이 되었다. 모르고 차용했다면 어리석은 것이거나 압도된 것이고, 알고도 차용했다면 식민주의자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그래서 나는 '주기-주리'라는 개념이 조선에서 보이는 성리학의 자기화 과정의 역사성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었으면 되었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개념-구도라고 생각한다. 이 병폐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주기-주리'의 개념을 통해 정치사를 설명하면 '실제적인 사상사와 정치사의 분리 현상'이 나타난다. '학파 따로, 정파 따로', 정치에 이념이나 사상이 없고, 학문에 정책이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곧 조선시대 정치는 권력 투쟁이었을 뿐이고, 학문은 현실과 무관한 관념놀음, 공리공담이었다는 뜻이다.
다카하시 도오루의 '주리-주기' 논리를 이어받은 이병도(李丙燾)가 여러 유보적 언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단칠정 논쟁과 호락 논쟁을 '관념적 독단' 정도로 이해하고, 나아가 조선 정치사의 흐름을 식민지 시대 일본 학자들의 당쟁론 정도에서 이해하게 되는 근원적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올라온 경상도의 상소
유직의 상소가 있고 난 뒤, 다시 경상도의 진사(進士) 신석형(申碩亨) 등 40여 명이 상소하였다. 그들은 유직과는 달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들이 살피건대, 이이가 문순공(文純公) 신 이황(李滉)을 찾아가 만난 것은 무오년(1558, 명종 13)의 일로서 이때 이이의 나이가 23세였는데, 이황이 즉시 문인 조목(趙穆)에게 글을 보내기를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했는데, 옛 성현이 나를 속이지 않았구나'라고 하였습니다. …… 처음에 이이가 승려였다고 헐뜯으면서 '사마시(司馬試) 때에 알성(謁聖)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계미년에 올린 송응개(宋應漑)의 질투어린 계사(啓辭)이며, 성혼을 처음으로 무함하여 '임금을 버리고 선비를 해쳤다.'고 한 것은 이홍로(李弘老)와 정인홍(鄭仁弘)이 지어내서 모함한 이야기였습니다. (<효종실록> 권4 1년 5월 1일(계축))
이들은 이미 퇴계가 율곡을 인정했다는 점을 들어 둘 사이의 이론적 간극이 문제되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또 율곡과 우계에 대한 비방은 곧 송응개와 정인홍이 지어내어 모함한 논거라는 점도 상기시켰다. 송응개는 1583년 율곡의 전력을 문제 삼아 탄핵했다가, 선조가 직접 교서(敎書)를 지어 유배시켰던 일이 있었다, 이홍로와 정인홍은 광해군 때 성혼을 비난했다가 정홍명(鄭弘溟) 등의 반론을 받았고 반정 이후 복주(伏誅)되었다, 그러니 유직 등의 논거는 이미 기각된 논리라는 뜻이었다.
이기(理氣)에 대한 견해도 퇴계와 우계가 같은데 퇴계의 것은 높이고 우계의 것은 내쳤으며, 정인홍 한 사람이 퇴계와 우계 모두 헐뜯었는데 퇴계를 무고한 것은 놔두고 성혼을 무고한 것만 그대로 따라했으므로 공정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결국 이는 율곡과 우계만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퇴계까지도 모르는 것이며, 율곡과 우계만 무고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퇴계까지도 무고하는 것이라고 맹박하였다.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이황은 주돈이(周敦頤)와 정자(程子)에 비유되고 이이와 성혼은 이황에 대해 주희와 장식에 비유됩니다. 후학이 주돈이와 정자는 받들면서 주희와 장식을 배척하는 것은 실로 도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시기하고 편벽된 풍조의 결과로 번번이 이황을 편들고 이이와 성혼을 배척하려고 합니다."라는 말로 상소를 정리하였다. 이리하여 상황은 조정 전체의 중대 사안으로 발전하였다. (<효종실록> 권4 1년 5월 1일(계축))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눈 속에서도 꽃은 피나니 ④
[프레시안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
☞연재 지난 글 바로 가기 : 눈 속에서도 꽃은 피나니 ③
시험 보이콧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종사에서 시작된 논란은 점차 지방에까지 격화되어 갔다. 경상도에서는 공도회(公都會), 즉 관찰사가 주관하는 소과, 초시를 열고 제술 시험을 보려고 했으나, 도내 유생들이 모두 시험에 응하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성균관 태학생들이 경상도 유직(柳稷) 등이 율곡과 우계를 무함하였다는 이유로 유직 등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한 데 대한 반발이었다. '유적'은 성균관이나 향교, 서원(書院) 등에 있는 선비의 명단을 말한다.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유적에서 삭제된 유직 등은 신석형(申碩亨) 등이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에 찬성하면서 자기들 의논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과거장에서 쫓아냈다. 조정에서는 그것은 폐습이라고 보고 경상도 감사 민응협(閔應協)에게 조사해서 다스리게 했는데, 유직 등 경상도 유생이 모두 분개하여 시험 날 한 사람도 응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조에서는, "영남 선비들의 습속이 매우 아름답지 못하긴 하나 위엄으로 제압해서는 안 되니, 감사로 하여금 여러 유생들을 잘 타일러 가능한 한 진정시키도록 하라."고 청했고, 효종도 동의하였다. (<효종실록> 권4 1년 7월 1일(임자))
아름답지 않은 인연
이렇게 되자 성균관 태학생들이 행동에 나섰다. 학생 대표 박세채(朴世采) 등(문곡 김수항도 학생 대표자였다.)이 상소하여 유직의 상소에 반박했다. 유직이 율곡과 우계를 두고 '어버이를 버리고, 임금을 뒤로 하여 명분을 저버렸다'는 말이야말로 무함이라는 것이다. 성균관 학생회인 재회(齋會)에서는 이미 유적에서 이름을 뺀 유직에 대해 다시 부황하는 조치를 내렸다. 부황은 영원히 사대부에서 제적하는 벌이다.
성균관 유생 중 유직의 처벌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목래선(睦來善 1617 광해군9∼1704 숙종30)이나 이희년(李喜年)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남인(南人)이었는데, 이미 남인 일각에서 율곡을 이단시하는 풍조가 형성되고 있었던 듯하다. 목래선은 문곡이 장원을 했던 병술년(1646 인조24) 사마시에 같이 합격한 동년(同年)으로,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와 있었다.
목래선은 유직의 처벌에 참여하지 않고 나간 이유를 세 가지 내세웠다. 첫째는 '유직을 부황하였기 때문에 나간 것이다'라고 하였고, 둘째는 '재회에서 논의할 때에 가부(可否)를 묻지 않았기 때문에 나간 것이다'라고 하였고, 셋째는 '동료들이 모두 나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나간 것이다'라고 하였다. 둘째, 셋째 이유는 부수적인 것이고, 실제 이유는 유직을 처벌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목래선은 이 해(1650 효종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헌부 지평 등 청요직을 거치고, 훗날 갑인예송(1674 숙종즉위년)으로 서인이 실각한 뒤 형조판서, 대사헌,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 때 삭직되지만, 장희빈의 등장과 함께 1689년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그가 좌의정이었을 때, 남계(南溪) 박세채의 손자 박태보(朴泰輔)가 인현왕후의 폐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극심한 고문을 겪고 귀양 가는 도중 세상을 떴다. 이미 문곡이 귀양 갔다가 사사될 무렵에 벌어진 이 사건을 앞서 다룬 바 있다. 그 좋지 않은 인연이 40년 전인 이 때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건 유생들의 일입니다"
남계와 문곡은 목래선이 삭적이나 부황에 대해 한마디 말도 언급하지 않다가 물러간 뒤에야 뒷말을 한다고 비판하면서, '참으로 알 수 없는 자들'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유생들이 권당(捲堂)한 것은 부득이하여 취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권당'은 식당을 가지 않는 것인데, 일종의 수업거부 방식이라고 보면 된다. 나아가 남계, 문곡 등은 흥미로운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유직에게 벌을 더한 것은 실로 공공(公共)의 논의에서 나온 것인 만큼 한때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조치 때문에 구차하게 올리고 낮추어서는 안 될 것이 분명합니다. 어진 사람을 무함한 벌에 대해서 더하기도 하고 풀어주기도 하는 것은 본래 유생들의 책임이지 결코 대신(大臣)과 조정(朝廷)이 지휘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 길이 한번 열리면 뒷날 있을 무궁한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감히 명을 받들지 않았던 것인데, 어찌 엄한 비답을 갑자기 내리시면서 준엄하게 말씀하실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효종실록> 권4 1년 7월 3일(갑인))
주목할 대목은 유직에 대한 유벌(儒罰 유생에 대한 벌, 유생들이 주는 벌) 여부가 아니다. 남계 등은 유직에 대한 처벌이 유생들끼리 처리할 문제이지, 대신이나 조정에서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성균관 학생회인 재회가 갖는 자율성을 침해하지 말라는 요구였다.
최고 권력자인 왕이나, 신하 중 최고위직이라고 할 수 있는 대신들조차 재회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없었던 것이 조선 사회 선비들의 세계였다. 위 상소는 사림(士林)을 나라의 원기(元氣 으뜸가는 기운)로 치던 사회 모습과 정치와 학문을 분리하려던 사회적 긴장감이 묻어난다.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역할과 차이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다시 확인시키는 글이기도 하다.
"상소는 왜 올리나?"
그러나 효종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태학생들의 상소가 올라오자마자 효종은 "이미 '결코 대신과 조정이 지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해놓고, 뭐 하러 글은 올리는가. 이 상소를 도로 내어 주라."고 대답했다. 상소를 돌려준다는 것은 안 받은 걸로 치겠다는 의미이다. 효종은 불쾌했다.
그러자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조정에 나섰다. 유생들의 상소에 답을 내리지 않는 것은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에 결함이 있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분명한 비답을 내려 위아래가 막히지 않게 하고 유생들이 스스로 안정되게 하라고 촉구했다. 이 '위아래가 막히지 않아야 한다'는 말, 참으로 중요하다.
국무회의를 보면 대통령만 말하고 나머지는 묵묵히 듣기만 한다. 이를 두고 '위아래가 막혔다'고 한다. 오히려 대통령은 듣고 비서나 국무위원들이 말해야 한다. 이것이 <주역>에서 말하는 태(泰)괘이다. 태괘는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형상이다. 얼핏 보면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어야 제대로 된 형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옛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으면 소통,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하늘이 아래에 있고 땅이 위에 있어야, 하늘은 오르려고 하고 땅은 내려오려고 하면서 우주의 운동이 생기고, 위아래가 소통한다고 본 것이다.
승정원의 충언에도 불구하고 효종은 마음을 풀지 않았다. 자신과 대신이 다 사체(事體)에 어두워 마땅한 거조를 잃었고, 결국 유생들로 하여금 더욱더 불평하는 마음만 갖게 만들었다면서, "내가 매우 부끄러워 답할 말이 없다."고 했다. 이 정도면 삐진 것이다.
총장의 중재 노력
사실 효종이 이렇게 될 때까지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유직의 상소는 2월에 있었고, 반박 상소인 신석형의 상소는 5월, 남계 등이 올린 태학생 상소는 7월이었다. 태학생들은 효종의 조치가 '간섭'으로 느껴졌겠지만, 효종도 나름대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성균관을 중심으로 사태가 돌아갔으니, 성균관 대사성이 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국립대 총장격인 대사성은 정유성(鄭維城)이었다. 태학생들이 권당을 하고 성균관을 비웠을 때 정유성은 효종에게 상황을 보고하면서 사태의 책임을 지고 체직을 청하였다.
당시만 해도 효종은, 오늘 여러 태학생들이 바로 훗날 조정에 설 선비들이기 때문에 힘써 조정하여 함께 화합하도록 한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다면서 정유성의 사직을 만류하였다. 또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나라에서 널리 인재를 취하는 길에 흠이 없도록 하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와 우의정 조익(趙翼)도 나서서 '선비는 국가의 원기(元氣)이며 과거는 인재를 등용하는 중요한 방도'라고 말하면서, 즉위 초이니만큼 경사(慶事)를 함께 하자고 건의하였다. 또 유생들이란 위엄으로 제어하기 어렵고 제왕의 도량은 포용하는 것을 더욱 귀하게 여긴다고 강조하였다. 유생들이 젊기 때문에 윽박지른다고 될 일이 아니라 포용하고 설득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유직의 처벌 수위에 대해서도 삭적에 그치고 부황은 취소하자고 중재안을 제시했다. 경상도에서 과거시험을 거부하는 사태에 대해서는, 영남 선비들의 수가 만여 명에 이르고 유직의 상소에 따른 숫자는 십분의 일에 불과한데 온 도의 선비들이 모두 과거에 응하지 않는다는 말은 매우 괴이하다며, 이는 선비들의 풍조가 잘못된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효종실록> 권4 1년 6월 29일(신해))
"간섭도 윽박도 안 됩니다"
기실 대사성은 성균관의 책임자니까 그렇다 치고, 효종이나 대신들이 못할 말을 한 것은 아니지 않나 싶다. 유직에 대한 처벌 수위에 대해서만 삭적만 하고 부황은 하지 말도록 하자고 제기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태학생들은 조정에서 부당하게 간섭한다고 여겼다.
효종의 비답이 의외로 강경하자, 상소를 올린 남계, 문곡 등 유생들은 거취를 결정해야 했다. 자신들이 올린 상소를 임금이 내쳤으니 그대로 현관(賢關 성균관)에 거처하고 있을 수 없다고 결론내리고, 대궐에서 물러나와 태학에 돌아가 성묘(聖廟 문묘)에 하직 인사를 올리고 그 길로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또 권당(수업거부)을 한 것이다. 이번엔 다시 공이 효종(곧, 조정)으로 넘어간 셈이었다. 효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효종의 심정에 재미있는 변화가 눈에 띤다.
내가 선처하지 못하여 유생들이 지금 또 성균관을 비웠다. 처음에는 나도 앞서 말한 것에 대한 잘못을 뉘우치고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타일렀다. …… 유생은 매양 염치를 소중하게 여기는데, 임금인 나만 유독 염치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그래서 답하지 않고 그저 부끄럽다고만 한 것인데, 이것이 어찌 공관(空館)까지 할 일인가. 사방에서 보고 들으면 반드시 해괴하게 여길 것이다.
사실 효종은 태학생들의 상소에 언짢았고, 유생들의 상소를 물리쳐서는 안 된다는 승정원의 권유에도 속이 편치 않았다. 앞서 효종이 '부끄럽다'고 한 말도 정말 부끄러워서 부끄럽다고 한 게 아니라, 빈정거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종은 마치 정말 부끄럽다고 말한 것처럼 응대하고 있다. 물론 효종은 아직 맘이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유생들의 염치(廉恥)만 생각하지 말고 내 염치도 생각해달라고 말하며, 성균관을 비운 유생들에게 서운함을 내비쳤다.
다시 우의정 조익은 '유생은 본디 지휘해서는 안 되고 또 위협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특별히 포용하는 아량을 보여 온화한 비답을 내리면 유생들이 어찌 끝까지 들어오지 않겠느냐며 효종을 설득하였다. 새로 대사성에 임명된 이후원(李厚源)도 자신이 대사성이지만 유생들의 논의에는 간여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효종으로서도 그냥 물러날 수 없었다. "유생들이 자기들의 뜻을 펼 목적으로 번번이 이런 식으로 임금을 협박할 계획을 하니, 이런 폐단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경의 뜻으로 타이르는 것이 온당하겠다." 효종도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약간의 절차가 필요했다.
조익이 윤순지, 이후원 등과 함께 성균관에 가서 유생들을 불러 모으고 효종의 분부라며 설득하였다. 이쯤 되면 유생들도 받아들이는 게 도리였다. 대신과 사장(師長 대사성)이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받아들이자면서 서로서로 의견을 모아 성균관으로 복귀하였다.
문과 장원급제
문곡은 곧바로 성균관으로 복귀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가을 나들이에 나섰다. 충청도 회덕(懷德)으로 가서 동춘당 송준길을 찾아 인사하였고, 진잠(鎭岑)에 있던 우암 송시열도 가서 뵈었다. 넷째 누이가 송규렴(宋奎濂)과 혼인하였는데 시댁이 회덕에 있었고, 시집갈 때 문곡이 동행하면서 함께 인사를 드린 것이다.
성균관의 수업거부가 있은 이듬해, 문곡은 둘째 아들 창협(昌協)을 얻었다. 문곡의 둘째아들 창협은 숙종 12년(1686)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장씨에게 골몰하여 궁궐에 몰래 별당을 지어주려고 거짓말을 했던 숙종에게 '장씨를 위해 별당을 짓는 일은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안으로는 별당을 짓고, 밖으로는 신하들의 말을 막는다,' '이는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이다'라며 숙종의 잘못을 일깨운 인물이다. 숙종은 그로부터 3년 뒤까지 정신 차리지 못하고 문곡에게 죽음을 내렸으며 인현왕후를 사가로 내쫓았다. 사관조차 "임금의 마음에 불평이 생겨 그의 아비에게 화풀이하게 된 것이라고도 몰래 말하는 자가 많았다."고 기록하지 않았던가.
문곡은 1651(효종2) 가을 다시 회덕으로 갔다가 동춘당에게 인사드렸다. 송규렴에게 시집갔던 누이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수십 일을 머물렀다고 한다. 거기서 지역 여러 선비들과도 만난 듯하다.
9월에 과거가 있었다. 알성 문과였다. 효종이 알성(謁聖), 즉 공자를 모신 문묘에 인사를 온 길에 베푼 과거에서 문곡은 장원으로 뽑혔다. 성균관에서 수업거부를 한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백강(白江) 이경여가 독권관(讀券官 시험문제를 읽어주는 관원)을 맡았었는데, 백강은 문곡의 할아버지 청음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가 외람되이 공원(貢院 시험장)을 주관하였는데, 실로 제대로 된 사람 뽑은 걸 축하해야겠습니다."
그날 합격자 발표를 할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졌다. 효종은 어전에 있던 촛불 두 자루를 가져오게 하여 문과, 무과 장원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대들은 내가 촛불을 주는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프레시안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
☞연재 지난 글 바로 가기 : 눈 속에서도 꽃은 피나니 ③
시험 보이콧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종사에서 시작된 논란은 점차 지방에까지 격화되어 갔다. 경상도에서는 공도회(公都會), 즉 관찰사가 주관하는 소과, 초시를 열고 제술 시험을 보려고 했으나, 도내 유생들이 모두 시험에 응하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성균관 태학생들이 경상도 유직(柳稷) 등이 율곡과 우계를 무함하였다는 이유로 유직 등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한 데 대한 반발이었다. '유적'은 성균관이나 향교, 서원(書院) 등에 있는 선비의 명단을 말한다.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유적에서 삭제된 유직 등은 신석형(申碩亨) 등이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에 찬성하면서 자기들 의논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과거장에서 쫓아냈다. 조정에서는 그것은 폐습이라고 보고 경상도 감사 민응협(閔應協)에게 조사해서 다스리게 했는데, 유직 등 경상도 유생이 모두 분개하여 시험 날 한 사람도 응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조에서는, "영남 선비들의 습속이 매우 아름답지 못하긴 하나 위엄으로 제압해서는 안 되니, 감사로 하여금 여러 유생들을 잘 타일러 가능한 한 진정시키도록 하라."고 청했고, 효종도 동의하였다. (<효종실록> 권4 1년 7월 1일(임자))
아름답지 않은 인연
이렇게 되자 성균관 태학생들이 행동에 나섰다. 학생 대표 박세채(朴世采) 등(문곡 김수항도 학생 대표자였다.)이 상소하여 유직의 상소에 반박했다. 유직이 율곡과 우계를 두고 '어버이를 버리고, 임금을 뒤로 하여 명분을 저버렸다'는 말이야말로 무함이라는 것이다. 성균관 학생회인 재회(齋會)에서는 이미 유적에서 이름을 뺀 유직에 대해 다시 부황하는 조치를 내렸다. 부황은 영원히 사대부에서 제적하는 벌이다.
성균관 유생 중 유직의 처벌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목래선(睦來善 1617 광해군9∼1704 숙종30)이나 이희년(李喜年)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남인(南人)이었는데, 이미 남인 일각에서 율곡을 이단시하는 풍조가 형성되고 있었던 듯하다. 목래선은 문곡이 장원을 했던 병술년(1646 인조24) 사마시에 같이 합격한 동년(同年)으로,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와 있었다.
목래선은 유직의 처벌에 참여하지 않고 나간 이유를 세 가지 내세웠다. 첫째는 '유직을 부황하였기 때문에 나간 것이다'라고 하였고, 둘째는 '재회에서 논의할 때에 가부(可否)를 묻지 않았기 때문에 나간 것이다'라고 하였고, 셋째는 '동료들이 모두 나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나간 것이다'라고 하였다. 둘째, 셋째 이유는 부수적인 것이고, 실제 이유는 유직을 처벌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목래선은 이 해(1650 효종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헌부 지평 등 청요직을 거치고, 훗날 갑인예송(1674 숙종즉위년)으로 서인이 실각한 뒤 형조판서, 대사헌,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 때 삭직되지만, 장희빈의 등장과 함께 1689년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그가 좌의정이었을 때, 남계(南溪) 박세채의 손자 박태보(朴泰輔)가 인현왕후의 폐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극심한 고문을 겪고 귀양 가는 도중 세상을 떴다. 이미 문곡이 귀양 갔다가 사사될 무렵에 벌어진 이 사건을 앞서 다룬 바 있다. 그 좋지 않은 인연이 40년 전인 이 때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건 유생들의 일입니다"
남계와 문곡은 목래선이 삭적이나 부황에 대해 한마디 말도 언급하지 않다가 물러간 뒤에야 뒷말을 한다고 비판하면서, '참으로 알 수 없는 자들'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유생들이 권당(捲堂)한 것은 부득이하여 취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권당'은 식당을 가지 않는 것인데, 일종의 수업거부 방식이라고 보면 된다. 나아가 남계, 문곡 등은 흥미로운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유직에게 벌을 더한 것은 실로 공공(公共)의 논의에서 나온 것인 만큼 한때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조치 때문에 구차하게 올리고 낮추어서는 안 될 것이 분명합니다. 어진 사람을 무함한 벌에 대해서 더하기도 하고 풀어주기도 하는 것은 본래 유생들의 책임이지 결코 대신(大臣)과 조정(朝廷)이 지휘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 길이 한번 열리면 뒷날 있을 무궁한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감히 명을 받들지 않았던 것인데, 어찌 엄한 비답을 갑자기 내리시면서 준엄하게 말씀하실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효종실록> 권4 1년 7월 3일(갑인))
주목할 대목은 유직에 대한 유벌(儒罰 유생에 대한 벌, 유생들이 주는 벌) 여부가 아니다. 남계 등은 유직에 대한 처벌이 유생들끼리 처리할 문제이지, 대신이나 조정에서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성균관 학생회인 재회가 갖는 자율성을 침해하지 말라는 요구였다.
최고 권력자인 왕이나, 신하 중 최고위직이라고 할 수 있는 대신들조차 재회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없었던 것이 조선 사회 선비들의 세계였다. 위 상소는 사림(士林)을 나라의 원기(元氣 으뜸가는 기운)로 치던 사회 모습과 정치와 학문을 분리하려던 사회적 긴장감이 묻어난다.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역할과 차이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다시 확인시키는 글이기도 하다.
"상소는 왜 올리나?"
그러나 효종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태학생들의 상소가 올라오자마자 효종은 "이미 '결코 대신과 조정이 지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해놓고, 뭐 하러 글은 올리는가. 이 상소를 도로 내어 주라."고 대답했다. 상소를 돌려준다는 것은 안 받은 걸로 치겠다는 의미이다. 효종은 불쾌했다.
그러자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조정에 나섰다. 유생들의 상소에 답을 내리지 않는 것은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에 결함이 있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분명한 비답을 내려 위아래가 막히지 않게 하고 유생들이 스스로 안정되게 하라고 촉구했다. 이 '위아래가 막히지 않아야 한다'는 말, 참으로 중요하다.
국무회의를 보면 대통령만 말하고 나머지는 묵묵히 듣기만 한다. 이를 두고 '위아래가 막혔다'고 한다. 오히려 대통령은 듣고 비서나 국무위원들이 말해야 한다. 이것이 <주역>에서 말하는 태(泰)괘이다. 태괘는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형상이다. 얼핏 보면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어야 제대로 된 형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옛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으면 소통,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하늘이 아래에 있고 땅이 위에 있어야, 하늘은 오르려고 하고 땅은 내려오려고 하면서 우주의 운동이 생기고, 위아래가 소통한다고 본 것이다.
승정원의 충언에도 불구하고 효종은 마음을 풀지 않았다. 자신과 대신이 다 사체(事體)에 어두워 마땅한 거조를 잃었고, 결국 유생들로 하여금 더욱더 불평하는 마음만 갖게 만들었다면서, "내가 매우 부끄러워 답할 말이 없다."고 했다. 이 정도면 삐진 것이다.
총장의 중재 노력
사실 효종이 이렇게 될 때까지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유직의 상소는 2월에 있었고, 반박 상소인 신석형의 상소는 5월, 남계 등이 올린 태학생 상소는 7월이었다. 태학생들은 효종의 조치가 '간섭'으로 느껴졌겠지만, 효종도 나름대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성균관을 중심으로 사태가 돌아갔으니, 성균관 대사성이 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국립대 총장격인 대사성은 정유성(鄭維城)이었다. 태학생들이 권당을 하고 성균관을 비웠을 때 정유성은 효종에게 상황을 보고하면서 사태의 책임을 지고 체직을 청하였다.
당시만 해도 효종은, 오늘 여러 태학생들이 바로 훗날 조정에 설 선비들이기 때문에 힘써 조정하여 함께 화합하도록 한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다면서 정유성의 사직을 만류하였다. 또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나라에서 널리 인재를 취하는 길에 흠이 없도록 하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와 우의정 조익(趙翼)도 나서서 '선비는 국가의 원기(元氣)이며 과거는 인재를 등용하는 중요한 방도'라고 말하면서, 즉위 초이니만큼 경사(慶事)를 함께 하자고 건의하였다. 또 유생들이란 위엄으로 제어하기 어렵고 제왕의 도량은 포용하는 것을 더욱 귀하게 여긴다고 강조하였다. 유생들이 젊기 때문에 윽박지른다고 될 일이 아니라 포용하고 설득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유직의 처벌 수위에 대해서도 삭적에 그치고 부황은 취소하자고 중재안을 제시했다. 경상도에서 과거시험을 거부하는 사태에 대해서는, 영남 선비들의 수가 만여 명에 이르고 유직의 상소에 따른 숫자는 십분의 일에 불과한데 온 도의 선비들이 모두 과거에 응하지 않는다는 말은 매우 괴이하다며, 이는 선비들의 풍조가 잘못된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효종실록> 권4 1년 6월 29일(신해))
"간섭도 윽박도 안 됩니다"
기실 대사성은 성균관의 책임자니까 그렇다 치고, 효종이나 대신들이 못할 말을 한 것은 아니지 않나 싶다. 유직에 대한 처벌 수위에 대해서만 삭적만 하고 부황은 하지 말도록 하자고 제기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태학생들은 조정에서 부당하게 간섭한다고 여겼다.
효종의 비답이 의외로 강경하자, 상소를 올린 남계, 문곡 등 유생들은 거취를 결정해야 했다. 자신들이 올린 상소를 임금이 내쳤으니 그대로 현관(賢關 성균관)에 거처하고 있을 수 없다고 결론내리고, 대궐에서 물러나와 태학에 돌아가 성묘(聖廟 문묘)에 하직 인사를 올리고 그 길로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또 권당(수업거부)을 한 것이다. 이번엔 다시 공이 효종(곧, 조정)으로 넘어간 셈이었다. 효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효종의 심정에 재미있는 변화가 눈에 띤다.
내가 선처하지 못하여 유생들이 지금 또 성균관을 비웠다. 처음에는 나도 앞서 말한 것에 대한 잘못을 뉘우치고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타일렀다. …… 유생은 매양 염치를 소중하게 여기는데, 임금인 나만 유독 염치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그래서 답하지 않고 그저 부끄럽다고만 한 것인데, 이것이 어찌 공관(空館)까지 할 일인가. 사방에서 보고 들으면 반드시 해괴하게 여길 것이다.
▲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이정철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 포저(浦渚) 조익(趙翼), 정치적 경륜 뿐 아니라 이론과 경세에 빼어난 인물이었는데 연구가 부족하다. 이정철 박사의 위 책은 포저 조익을 율곡 이이, 오리 이원익, 잠곡 김육과 함께 조선 시대 대표적 경세가 4명에 포함시켜 다루고 있다. ⓒ역사비평사 |
다시 우의정 조익은 '유생은 본디 지휘해서는 안 되고 또 위협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특별히 포용하는 아량을 보여 온화한 비답을 내리면 유생들이 어찌 끝까지 들어오지 않겠느냐며 효종을 설득하였다. 새로 대사성에 임명된 이후원(李厚源)도 자신이 대사성이지만 유생들의 논의에는 간여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효종으로서도 그냥 물러날 수 없었다. "유생들이 자기들의 뜻을 펼 목적으로 번번이 이런 식으로 임금을 협박할 계획을 하니, 이런 폐단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경의 뜻으로 타이르는 것이 온당하겠다." 효종도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약간의 절차가 필요했다.
조익이 윤순지, 이후원 등과 함께 성균관에 가서 유생들을 불러 모으고 효종의 분부라며 설득하였다. 이쯤 되면 유생들도 받아들이는 게 도리였다. 대신과 사장(師長 대사성)이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받아들이자면서 서로서로 의견을 모아 성균관으로 복귀하였다.
문과 장원급제
문곡은 곧바로 성균관으로 복귀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가을 나들이에 나섰다. 충청도 회덕(懷德)으로 가서 동춘당 송준길을 찾아 인사하였고, 진잠(鎭岑)에 있던 우암 송시열도 가서 뵈었다. 넷째 누이가 송규렴(宋奎濂)과 혼인하였는데 시댁이 회덕에 있었고, 시집갈 때 문곡이 동행하면서 함께 인사를 드린 것이다.
▲ 문곡 김수항의 누이가 시집간 회덕 송규렴의 집 대문. 호를 따서 제월당(霽月堂)이라고 불렀다. '제월'이란 달이 갠다는 뜻이다. 사진출처(blog.naver.com/jcjkks) ⓒjcjkks |
성균관의 수업거부가 있은 이듬해, 문곡은 둘째 아들 창협(昌協)을 얻었다. 문곡의 둘째아들 창협은 숙종 12년(1686)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장씨에게 골몰하여 궁궐에 몰래 별당을 지어주려고 거짓말을 했던 숙종에게 '장씨를 위해 별당을 짓는 일은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안으로는 별당을 짓고, 밖으로는 신하들의 말을 막는다,' '이는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이다'라며 숙종의 잘못을 일깨운 인물이다. 숙종은 그로부터 3년 뒤까지 정신 차리지 못하고 문곡에게 죽음을 내렸으며 인현왕후를 사가로 내쫓았다. 사관조차 "임금의 마음에 불평이 생겨 그의 아비에게 화풀이하게 된 것이라고도 몰래 말하는 자가 많았다."고 기록하지 않았던가.
문곡은 1651(효종2) 가을 다시 회덕으로 갔다가 동춘당에게 인사드렸다. 송규렴에게 시집갔던 누이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수십 일을 머물렀다고 한다. 거기서 지역 여러 선비들과도 만난 듯하다.
9월에 과거가 있었다. 알성 문과였다. 효종이 알성(謁聖), 즉 공자를 모신 문묘에 인사를 온 길에 베푼 과거에서 문곡은 장원으로 뽑혔다. 성균관에서 수업거부를 한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백강(白江) 이경여가 독권관(讀券官 시험문제를 읽어주는 관원)을 맡았었는데, 백강은 문곡의 할아버지 청음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가 외람되이 공원(貢院 시험장)을 주관하였는데, 실로 제대로 된 사람 뽑은 걸 축하해야겠습니다."
그날 합격자 발표를 할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졌다. 효종은 어전에 있던 촛불 두 자루를 가져오게 하여 문과, 무과 장원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대들은 내가 촛불을 주는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