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 바람꽃과 내소사
1. 일자: 2023. 3. 6 (월)
2. 산: 변산 관음봉(424m)
3. 행로와 시간
[내변산탐방센터(10:35) ~ 바람꽃 군락지(10:48~11:05) ~ 실상사터(11:20) ~ (봉래구곡) ~ 선녀탕(11:46) ~ 직소폭포 전망대(11:53) ~ (조릿대 숲길) ~ 재백이고개(12:50) ~ 관음봉(13:22~30) ~ 내소사(14:15~15:00) / 10km]
굳이 이 애매한 계절에 변산에 가려는 이유는 바람꽃 때문이다. 계절이 이른 게 아닌가 걱정했으나 다녀온 이들의 사진을 보니 바람꽃과 복수초, 노루귀가 제철이다. 들꽃 하나 만으로도 가야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오랜 만에 타는 산악회 버스는 아늑했다. 휴게소 무렵에서 행로를 바꾼다. 남녀치~월명암 구간은 이미 다녀온 곳이니, 내변산에서 난 등로 따라 직소폭포를 올라야겠다. 산에서도 가능하면 새로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 내변산 탐방센터 ~ 재백이고개 >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한적하고 널찍한 길을 따라 걷는다. 코끝에 닿는 공기의 느낌이 좋다. 10여분 걸었을까 좌측으로 바람꽃 서식지를 알리는 표식을 따라 비밀의 화원으로 들어선다. 듬성듬성, 변산의 자랑 바람꽃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몸을 낮춰 키를 맞추고 연신 셔터를 누른다. 초점이 쉽게 잡히지 않는다. 남들이 볼 때도 ‘와! 하는’ 꽃사진은 아무나 찍는 게 아닌가 보다.
짙은 갈색 낙엽 위로 다섯 마디 꽃잎에 쌓여 연초록 꽃술이 수줍게 말을 걸어온다. 화려함이나 요염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고은 자태로 겨울 숲에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전령의 역할만 충실히 하면 된다는 의젓함이 묻어난다. 연한 색에 반해 보고 또 보았다. 20여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땅바닥에 집중했다. 덕분에 내 손으로 귀한 사진 몇 장을 얻었다.
이어지는 길, 대숲터널을 지난다. 어둠과 빛 그리고 키 큰 대나무가 만들어내는 녹색의 향연에 반한다. 주변에 작은 온실도 보인다. 나뉘었던 길은 실상사 터에서 만난다. 카메라를 세우고 숙제 마냥 사진을 찍었다 그대로 지운다. 요즈음 부쩍 사진 욕심이 많다. 늙어가나 보다.
부근에 커다란 바위 봉우리들이 산재해 있어 변산 자락 깊숙이 들어왔음을 실감한다. 봉래구곡이라는 계곡 반석에도 잠시 들른다. 등로에 볼거리가 많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남여치를 버리고 이리로 오길 잘했다. 새 길에 대한 호기심이 충분히 충족되었다.
너른 길이 소로로 바뀐다. 월명암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 직소폭포로 향한다. 녹색과 푸른색이 섞인 직소보는 굽이를 돌아 산으로 향한다. 그 모습이 아득하다. 푸른 물길 따라 계단을 오른다. 호수에 봄 햇살이 가득하다. 시계를 본다. 남여치~월명암을 거쳐 오는 길에 비해 1시간이 단축되었다. 시간의 여유가 마음의 여유를 준다. 선녀탕에 잠시 들른다. 작은 폭포 밑에 너른 소가 있다. 시원한 느낌이 든다. 평소 같으면 엄두가 안 날 일이다. 직소폭포 전망대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본다. 장관이다.
계단을 내려선다. 한동안 호수 둘레길이 연결되더니 이내 조릿대가 무성한 숲길이 길게 이어진다. 약 2km 호젓한 길을 홀로 걸으며 마음의 평온을 되찾는다. 내 것이 아니될 것에 대한 욕심이 초조함을 낳는다. 생각을 멈추니 머리가 맑아진다. 오늘 최고의 길이다.
직소보 다리를 지나 언덕들 올라선다. 재백이고개다. 너럭바위에 선다. 멀리 희부연 대기 밖으로 바다의 흔적이 느껴진다. 위에 오르면 더 좋은 풍경이 나타날 것임을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서서 한참을 바라본다.
< 재백이고개 ~ 내소사 >
오르막이 이어진다. 기억은 변산 정상 가는 길은 한참을 치고 올라야 함을 알려준다. 갈림에서 암릉을 우회하고 계단을 한참 오른다. 11년 전 기억도, 8년도 추억도 길 사정을 불러오지 못한다. 다만, ‘변산 얕잡아 볼 산은 아니지’란 생각은 난다. 어렵사리 관음봉 정상에 선다. 관음봉 오름 길에 이리 많은 계단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 전망대 벤치에 앉는다. 사방이 막힘 없이 열린다. 바닷가 마을과 섬, 그리고 멀리 산들의 너울거림과 지나온 직소보가 한 눈에 들어온다. 424m 높이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풍경이다.
관음봉 삼거리를 거쳐 내소사로 향한다. 제법 거칠다. 바위 전망대에 서서 서해와 내소사의 전경을 바라보면 하산했다. A코스를 탄 이들이 날 앞서간다. 한때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하며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14:15 내소사 경내에 들어선다. 공터에 보라색 봄까치꽃이 지천이다. 혹시나 하여 바람꽃이나 노루귀 등이 있나 살폈으나 찾지 못했다. 아마도 내변산탐방센터로 오지 않았다면 바람꽃도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찾으려는 노력없이 어찌 꽃을 탐할 수 있겠는가?
내소사 전나무숲은 언제 보아도 멋지다. 멀리 점으로 앞서 가는 이들이 보인다. 넓고 호젓한 길을 독차지하며 걷는 기분이 그만이다. 평일 산행의 묘미다. 내소사 경내를 천천히 돌아본다. 지난 2번의 산행에서는 쫓기든 지나친 곳을 오늘은 여유를 가지고 찾아 나선다. 고목이 우뚝 선 절집 마당에서 변산의 바위 봉우리를 바라보고, 대웅전 문살의 문양도 살핀다. 목련은 꽃망울을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다. 봄이 곁에 다가와 있다.
오늘 내소사는 내 기억속에 있던 것보다 훨씬 멋 졌다.
< 에필로그 >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가 식당에 들른다. 따스한 물이 건내지고, 청국장이 맛난 소리를 내며 끓고 있다. 돌솥비빔밥을 시켜 오랜 만에 맛나게 먹었다. 보기 좋은 음식이 맛도 좋다는 내 생각은 옳았다.
커피 한 잔 사 들고 버스에 오른다. 사진을 정리한다. 대숲에서 찍은 사진의 색의 조화가 참 좋았다.
어느덧 길에 땅거미가 지고 강 넘어 꺼뭇해 진 산이 짙은 실루엣을 드리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경침이다. 봄의 시작이다. 내일은 해가 더 길어질 게다.
평일 원거리 산행의 묘미를 제대로 경험한 보람된 하루였다. 시간과 마음의 여유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