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은 그렇게 빛나기에
정혜목
고전 읽기에 푹 빠져 있고 나를 깜짝 놀래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매료된다.그 깜짝 놀란 이야기들을 모아서 널리 알리고자 이 글을 쓴다
제 7의 인간 (2)
이십대 초반 나이에 나는 다시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서울로 갈까? 해외 근로자로 갈까?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 신문에서 한길 문학 강좌에 대한 광고를 보았습니다. 한국 문학 예술 대학,뭐 이런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희성.임헌영 김남주 이런 사람들의 이름이 강사진에 나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광고를 보자 내가 유일하게 해보고 싶었던 일이 글쓰기였다는 생각이 가슴 아프게 떠올랐습니다. 나는 내 지긋지긋한 타락과 낙오.소외,치욕,내 삶의 지랄맞음에 대해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연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우디 공사 현장에 가는 해외 근로자로도 신청을 했습니다. 먼저 오라는 쪽으로 가자고 맘을 먹었습니다. 그것이 내 운명이려거니 받아들이기로요.
그런데 한길사에서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공부하고 싶으면 올라오라고. 그래서 나는 그때쯤이면 나를 아주 지긋지긋하게 보는 아버지에게 돈 삼만원만을 꿔서 가방 하나만 들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돈 삼만원을 내주며 아버지는 “네 깐 놈이 서울 가서 뭘 할래?” 라고 경멸조로 물었는데 그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문학이란 걸 하겠습니다.’ 그것이 나의 이차 서울 상경입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공사 현장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일할 사람 안 써요?” 라고 묻고 촌에서 올라왔는데 방이 없으니 잠 좀 재워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지하철 건설 현장 지하에서 스티로폼 깔아 놓고 자고 그리고 일주에 두 번은 한길사에 가서 문학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서울엔 지하철 공사가 한참이었습니다.
내가 만드는 데 참여한 역이 어디 어디인 줄 아십니까? 천호역, 영등포 구청역, 마천역, 광명역, 남태령역, 아 그리고 여의도 터널도 있네요. 그때 김씨 아저씨가 죽었죠. 새벽에 같이 일하기로 해놓고는 공사 현장에서 떨어져서 그만 죽고 말았죠. 나에게 감정 이입에 대해서 물었죠. 기억들, 기억들이 다 남아있어요. 우리는 450볼트 피복 벗겨진 전선을 들고 공정 맞추라는 닦달을 받아가며 비오는 날에도 일을 했습니다. “우리 이러다 그냥 갈지 모르것다”고 쓰라린 농담을 주고 받으면서요.그러던 김씨 아저씨는 정말로 죽었고요. 김씨 아저씨 상을 치르던 날도 오후에 빈소를 지키다 나는 문학 공부를 하러 갔었습니다. 그 날 얼마나 취했던지 아침에 깨보니 옷이 다 찢겨 나갔습니다.그래도 기억들 기억들이 내겐 너무나 뚜렷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그는 눈물을 참아보려고 했지만 그러다가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그는 김씨 아저씨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길 문학 강좌에 일년 반 정도 다니다가 구로 노동자 문학회란 데로 옮겼습니다. 그 때도 역시 사는 것은 똑같았습니다. 가방 싸들고 이 공사 저 공사 현장을 돌아 다니며 공부도 하고 일도 했습니다. 몸이 너무 축나서 내복 두 벌에 바지 그리고 그 위에 솜바지를 입고도 한기에 벌벌 떨면서 일했습니다. 그러고도 뭔가 쓰고 싶으면 “화장실 다녀올께요” 소리치고는 두루마리 화장지든 종이든 뭐든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는 화장실로 뛰어가서 뭔가 쓰고는 했습니다.아마 시였을 겁니다.
버스 기다리는 척 벼룩시장이나 교차로를 슬쩍 뽑던 손
무담보 신용대출 854-2514 전봇대에 붙은 번호표를 뜯던 손
전철이나 버스 손잡이를 잡지 않던 손
악수하기를 꺼리던 손
손톱 밑에 검은 때가 끼어 있던 손
괭이가 박혀 있던 손
어이, 하며 저쪽 철골 위에서 환하게 흔들던 손
야, 임마 하며 반가워 손아귀를 꽉 쥐면 얼얼하던 손
H빔 위에서 떨어질 뻔한 내 등을 꼭 붙잡아주던 그 손
- (송경동 -손)
지하철 공사할 때도 죽을 뻔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내 실수로 지하철 공사장에서 화재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 아주 깊은 지하였는데 바닥엔 포크레인이며 온갖 장비들이 있었죠. 우리들은 모두 비상 계단을 통해 정신없이 지상으로 올라갔습니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나는 사람들에게 “도망가 도망가”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내가 도망가는게 문제가 아니었죠.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죽을 뻔한 일을 수도 없이 겪고 살고 이만큼 시간이 흐른 뒤에도 이상하게도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꿈을 버려야할 이유를 찾지는 못했단 겁니다. 그것이 버티게 해주었던 것일까요? 꿈을 버릴 이유를 찾지 못한 것 말입니다.
그리고 어찌 어찌하다가 나는 시인이 되었습니다. 서울에 올라올 때 나는 이미 문학이란 걸 하고 싶었습니다. 문학이 뭔지 시가 뭔지 부끄러울 정도로 몰랐어도 뭘 쓰고 싶긴 싶었습니다.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은 내 가슴을 치는 것, 나를 울게 하는 것, 내 가슴에 너무나 깊숙이 남아 있는 것. 나에게 시와 삶은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만이 내가 살고 내가 해방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내가 살면서 그나마 배운 것 하나 이야기해 드릴까요? 이렇게 힘들게 사는 사람이 많은 세상에선 누구도 함부로 좌절해서도 안 되고 함부로 미래와 타인을 재단해서도 안 되고 그러니까 아무것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름 없이 정말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봤습니다.
나는 요새 지하철을 타고 가면 우리들 사이에 돌았던 말, 500미터 차량이 지나갈 때마다 한 명이 죽는다는 말을 떠올립니다. 천 미터 길이 지하철이면 두 명이 죽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때 나는 내가 죽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에 감사를 드려야하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마쳤다. 그리고 이것이 감정 이입에 대한 대답이 뭐 될까요? 라고 웃는다. 전혀 개인을 중시하지 않는 시대 그런데 묘하게도 모두가 개인이 되 버린 것처럼 느끼는 시대가 우리 시대가 아닌가 그동안 생각해오고 있었는데 송경동의 이야기를 듣자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송경동은 관계를 보고 있었다. 송경동의 시도 관계를 쓰고 있다. 송경동이 손에 대한 시를 쓰면 그는 손의 아름다움과 형태를 쓰지 않고 어디 내 손이 하나 필요한 곳이 없는가에 관해 쓸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했고) 송경동이 셔터에 대해 시를 쓰면 그 물질적 차가움에 대해 쓰지 않고 대신 내가 누군가에게 무겁게 닫힌 셔터였던 적은 없었는지에 관해 묻는 시를 쓸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했고) 송경동이 사랑의 상처에 대해 쓴다면 외로움과 씁쓸함에 대해 쓰지 않고 그때 붙잡고 울던 난간은 또 어디로 팔려가고 말았을까 라고 쓸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했고) 송경동은 ‘나는 내 것이 아니다.
나만이 무엇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라고 쓰고 있다. 이것이 그의 감정 이입의 시작점이었을까? 나는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나는 내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일까? 비극에는 적어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나는 내가 읽었던 책들 속에서 배웠다. 하나의 비극은 자신이 완전히 혼자라고 느끼는데서 오는 비극, 또 하나의 비극은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은 인간으로서의 의지에서 오는 비극. 그러나 두 번째 비극은 결코 낭만적일 수도 없고 개인적일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송 경동을 보면서 두 번째 비극을 생각한다. 두 번째 감정 이입도 가능할지 생각해본다. 내가 사회적 구조 안에서 예의 바르고 건전한 시민으로서 혹은 속물적 인간으로서 감정 이입을 하고 있는 동안에 송 경동은 존엄을 가진 인간으로서 감정 이입을 했다.
…
아침이면 건강센터로 달려가 호흡을 측정하고
저녁이면 영어 강습을 받으러 나간다
노동자가 아니기에 구조 조정엔 찬성하지만
임금 인상 투쟁엔 머리띠 묶고 참석한다
집주인이기에 쓰레기 매각장 건립엔 반대하지만
국가 경제를 위한 원전과 운하 건설은 찬성이다
한 사람의 시민이기에 광우병 소는 안되지만
농수산물 시장개방과 한미 FTA는 찬성이다 학부모로서
학교폭력은 안되지만 ,한남성으로서
원조 교제는 싫지 않다. 사람이기에
소말리아 아이들을 보면 눈물 나고
……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
- (송경동 -당신은 누구인가 중에서 )
나는 송경동이 감정 이입에 대해 시를 쓰면 어떨까,눈물에 대해 시를 쓰면 어떨까,환희에 대한 시를 쓰면 어떨까, 스무살의 비정규직에 대해 시를 쓰면 어떨까 계속 계속 상상해 본다.변함없이 출발이자 구심점은 삶에서 맺은 관계 들이고 그 관계에서 배운 것들일 것이다. 우연한 경험, 우연한 만남이 어떻게 공통의 소망이란 이름으로 탄생하는가? 그와 이야기를 마치고 나니 무척 그리운 감정이 가슴 하나, 잊고 있었던 감정 하나가 속에서 올라온다.그 감정에 대한 답이 바로 송경동의 이 시다.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어느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
애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
나는 고졸 출신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 해방 전선에 함께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하지 않았다
십수년이 지난 요즈음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 물결에 밀리고 있고
저 꽃잎 앞에서 밤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
걷어차인 좌판과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 받고 있다고.
- (엔 분의 1 정 혜윤)
여기까지가 내가 그를 인터뷰하고 쓴 글이다. 나는 이 글을 쓴 뒤에도 여러 차례 그를 만났다.그는 포크레인에서 떨어진 뒤 목발을 써서 걷기 때문에 결코 우리는 오래 걸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와 이야기할 때 내 마음 속 어딘가 바닷가에 닿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의 길고 강한 싸움은 깊은 사랑의 다른 표현이었다. 세상은 마음을 버리라 버리라 비우라 비우라 한다. 그러나 그 버려야 할 것들이 내가 가장 갖고 싶은 것들이었다. 이 또한 여행지에서 내가 수도 없이 물은 질문들이다. 돌아가면 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가?
버려야 할 것들과 이루고 싶은 것의 기준점은 사랑이었다.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가 싸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다비식도 열지 말고
지은 책들도 모두 절판하라곤
열반에 든 법정 스님은
생전 하루 한 가지씩만 버리며 살자 했다 한다
비슷한 때 다시 본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반대로 하루 여섯 가지씩 이루어질 수 없는 꿈들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빌자고 한다
두 이야기 모두 내겐 절실해
먼저 오늘 버릴 한 가지를 떠올려본 후
오늘 가질 꿈 하나를 빌어보기로 했는데
오늘 버리고 싶은 그 한 가지가
내가 오늘 가장 이루고 싶은 한 가지다
이룰 수 없어도
버릴 수 없는 것은 어떡해야 하는지
그것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는 매번 여섯 명의 형제들과 출발하는 제 7의 인간 같아 보였다. 괴테가 빌헬름 마이스터의 입을 빌어 한 말은 무엇이었던가?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 가슴으로부터 직접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오류만 저지를 뿐이란 말이 아니었던가?그리고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에게 높이 올라가는 여행에 대해 배웠다. 세상의 잔혹성을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머무르고,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의 그 모든 영혼들을 세상에 높이 던진 것이 송경동의 서울 여행이었다. 별은 아직도 그렇게 빛나건만.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가 싸우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별은 아직도 그렇게 빛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