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기고처럼
2024. 7. 14. 주일오전예배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기도 제목도 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형편은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일꾼을 자처하지만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일꾼은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몸 된 교회는 지난 6월에 두기고처럼 살아보자고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 나타난 두기고의 대명사를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삼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7월이 되었어도 제 마음에는 두기고 형제의 중심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6월 한 달이 아니라 남은 여름, 제 남은 평생에 주님 앞에서 두기고처럼 살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이 솟아났습니다.
에베소서 6장과 골로새서 4장에 나타난 사도 바울 선생님이 증언하는 두기고의 모습,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인 두기고! 그의 이러한 이름이, 이렇게 형성된 생활과 인격이 오늘의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되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이 아름다운 이름, 사랑을 받는 형제, 신실한 일꾼! 우리 몸 된 교회 식구님들이 어린 아이로부터 할머니,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다 이러한 이름을 주님께로부터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열매적인 생활, 저는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기까지 두기고의 은밀이 무엇인지를! 두기고의 진정한 뿌리는 예수님이십니다. 따로 사도 바울 선생님이 설명을 안 하셨지만 두기고는 분명 내 주님과의 사귐이 생생했을 것입니다. 주님과의 사귐이라는 이 뿌리가 살아 있지 못하다면 형제의 관계도 퍼석거리고 맡겨진 일은 서툴기 그지 없을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와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면서 마지막에 선물을 안겨주듯이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을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 똑같이 기록해놓았습니다. 성령께서 왜 이렇게 똑같이 기록했을까요? 두기고는 언제나 생생한 주님의 사람으로 서 있었기에 어디다 보내 놓아도 주님의 빛을 드러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한 다섯 군데 두기고의 모습이 보입니다.
사도행전 20장 앞부분에 보면 사도 바울 선생님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사도 바울 선생님을 돕고 보좌하는 일곱 명의 귀한 형제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예전에 제가 어렸을 때 ‘황야의 칠인’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들은 총잡이에 불과하고 의리가 조금 있었다 하나 별 것 없었어요. 그런데 이 사도행전 20장에 소개하는 이 일곱 명의 형제들은 사도 바울 선생님이 얼마나 기뻐하고 사랑하고 아끼는 형제들인지, 우리 주님께서 드러내고 싶어하는 우리의 좋은 본이 되는지요.
그 중에서 아시아 사람 두기고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엡 6:22)” 이런 사람을 특사라고 하지요. 하늘 나라의 특별한 사절입니다. 그 은밀이 살아 있는 두기고! 그렇기 때문에 내 주님과의 사귐 속에 깨어 있었을 줄 압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마음을 따라 자신의 삶에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어요.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 형제를 사랑하는 길로 나아가기 마련입니다. 자기가 버젓이 살아 있으면서 육체의 중심을 가지고 있는 자가 형제와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내 주님과의 사귐이 살아 있고 자기 부인이 뚜렷한 사람이기 때문에 형제들이 대하기가 참 편했을 겁니다. 자기 부인이 뚜렷했기 때문에 형제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나에게 주어진 나의 십자가는 짊어질 마음으로 삶을 꾸려왔기 때문에 신실한 일꾼이라는 말을 들었을 줄 압니다. 작은 일에도 신실한 종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신실하였도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그 칭찬은 허공에 메아리치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의 가슴에 우리의 삶을 보고 주님이 그렇게 증언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디도에게 편지할 때 사도 바울 선생님은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과동하기로 작정하였노라(딛 3:12)” 겨울을 보내는 그곳에 사도 바울 선생님은 디도를 부르기를 원했습니다. 그 심부름도 역시 아데마 형제 아니면 두기고를 보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디도가 사역했던 현장은 쉽지 않은 그레데섬이었습니다. 그리스 연안에 섬들이 많은데 가장 큰 섬이 그레데섬, 요즘으로 말하면 크레타이지요. 그레데섬으로 보내든지 골로새로 보내든지, 에베소라는 그 소아시아에 보내든지 어디다 주님께서 보내더라도 준비된 사람 두기고는 그 역할을 신실하게 감당했습니다.
시편 12편에 성도가 그렇게 주님 앞에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이사야 59장에도 이런 말씀이 있어요.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주님께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고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없대요. 주님의 일을 감당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지금도! 이사야 6장에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지요.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저와 여러분은 어떠한 중심으로 삶을 꾸려가고 있습니까? 주님이 불러서 어떤 일을 시키시더라도 “예”하고 일어설 수 있는 준비된 일꾼들이 되셨으면 합니다. 스스로 나아가는 길 말고요, 형제들이 사랑 가운데 인정하면서 맡기신 조그만 일이라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일어서는 일꾼 말입니다. 순서가 뒤바뀌어서는 안되요. 신실한 일꾼이 먼저가 아니라 사랑을 받는 형제가 먼저입니다. 그 뿌리는 내 주님과의 사귐이라 했습니다. 사귐이 살아 있는 사람, 내 주님과의 사귐, 그리고 사랑을 받는 형제, 그는 신실한 일꾼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계시록 1장 9절에도 사도 요한 선생님이 말씀했지요.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가 먼저 나온 것이 아니라 ‘나 요한은 너희 형제’라는 말을 먼저 쓰셨습니다. 종종 생각해봅니다. 자주 생각이 납니다. 천국 가신 형님 목사님과 전화 통화를 할 때 너무 갑자기 목사님 목소리가 들리면 “오, 목사님” “내가 왜 오목사요? 형아잖아” “네, 형님”이라고 고쳐서 말씀드리지요. 그러면 그렇게 좋아하셔요. 아기같이 “율전동 어느 마트에 가더라도 내 이름 달고 맛있는 거 먹어” “네, 형님! 그럴랍니다.” 두고두고 가슴에 남습니다. 형제의 길에 서기를 원하셨다는 것이지요. 내 주님과의 사귐이 살아 있으면서 형제의 길에 서 있으라! 형제의 길 속에서 주님의 일꾼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쓰실 때 그 두 교회에 보내는 특사가 두기고였는데요, 그냥 편지만 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의 형편과 사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냥 미주알고주알 있는 대로 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형제에게 딱 합한 말만 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가나안 전쟁를 앞두고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을 때 열 명의 보고가 틀린 말은 아니예요. 그런데 주님 앞에 합당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형제는 말을 할 때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형제는 말을 할 때 정돈되고 꼭 필요한 말만 하므로 그 자리의 분위기가 살아나는 형제가 있어요. 찬물을 끼얹는 형제, 재미없습니다. 오히려 입을 다무는 것이 낫지요. 밥상머리나 아니면 단 둘이 이야기를 할 때에도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 주님이 말하는 것처럼, 주님의 심부름을 하는 것처럼 마음을 일으키는 형제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사도 바울 선생님의 심부름을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심부름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마음이 주저앉은 사람을 일으킬 수 있습니까? 주님께 매인 사람을 통해서, 겸손히 주님이 역사하시기를 기대하는 사람을 통해서, 단 몇 마디라도 주님의 심장으로 나아간 형제들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많은 이들의 마음이 위로받고 마른 뼈가 살아나듯이 곳곳에서 하나님 나라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전에 우리 양 군목님이 말씀했던 것이 생각나요. “부대 정위치” 저는 군대를 못 다녀와서 잘 모르겠지만 계급이 어떠하든지 간에 자기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감당하는 모습은 부대를 강력하게 만듭니다. 우리 교회는 항공모함이잖아요. 기관실에서 일하는 사람도 소중하고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도 소중하고 F35 전투기를 몰고 가는 사람도 소중합니다. 주님 앞에 깨어 있으면서 생생한 사귐을 이어가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자체가 목적이기도 하지만 사랑을 받는 형제로 주님이 내세울 때 전통에 꽂혀있는 화살처럼 주님의 신실한 심부름을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6월 한 달로 끝나는 주제가 아닙니다. 가슴에 새기고 내 삶이 되어서 오늘 내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고 형제들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고 주님 나라 일꾼으로 힘 있게 섬겨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