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老子선양회善養會(http://cafe.daum.net/Noja
게 시 판 : 노자에 있는 한문 익히기
번 호 : 468
제 목 : 노자에 있는 한문 제대로 익히기 第一章
글 쓴 이 : 노자 善
조 회 수 : 18
날 짜 : 2004/05/10 21:46:08
내 용 :
노자에 있는 한문 제대로 익히기 第一章
老子는 노자책을 통하여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노자 전체의 내용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노자독법을 이노해노(以老解老)라고 합니다.
방동미(方東美)는 우리가 만약 노자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外在的 입장에서 노자를 이해하면 안 되고, 노자 자신의 입장에서 그를 이해해야 한다. 한비자의 말로 하면그것은 解老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 두 글자를 더 넣어 "以老解老"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노자사상 자체로 그의 철학적 함의(含意)를 해석하려는 것으로서, 이런 것이 비교적 객관적이라 합니다.
제가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동양사상학과에 제출할 논문을 정리하는 중에 공부한 내용을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고자 "노자와 노자책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여러분에게 한문을 읽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이왕 공부하는 차에 "노자에 있는 한문 제대로 익히기"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하여 앞으로 전개될 동아시아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의 고전을 이해하고 중국어와 일본어를 익힐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고자 한문을 읽는 방법(漢文讀法)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흔히 한문의 구성이 영어와 어순이 같다고 하지만 경전과 같은 오래된 문장일수록 옥편을 찾아보아도 해석이 잘 되지 않는 경우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한문(漢文)은 우리 민족인 동이족인 殷나라에서 만들어진 한문(韓文)이 후에 현재 중화민국(中華民國)인 화화족이 은왕조를 멸망시키고 세운 周나라가 한문(韓文)을 바탕으로 중국의 중국통일왕조시기 황제(皇帝)때 창힐(創詰)이 집대성한 후 수 천년 동안 만들어지고 변천하고 발전해 온 까닭에 의외로 우리말 어순과 같은 부분도 상당히 나옵니다, 따라서 한문은 단순히 옥편(玉篇)만 찾아본다고 해서 해석되지 않는 것은 그 시대적 상황과 글이 쓰여진 원전에 화자(話者)나 청자(聽者)가 대화를 할 때에 이미 서로 알고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생략하여 기록한 까닭에 그 본 뜻을 알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노자는 노자의 마음으로 노자를 읽어야 제대로 된 노자해석이 가능합니다. 이제부터 81회에 걸쳐서 여러분을 노자를 통한 한문독법을 할 수 있는 세계로 안내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논저(論著)를 통하여 한문의 변천과정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노자가 한문이 시대를 거치면서 변천한 과정을 볼 수 있는 좋은 교재가 되는 이유는 1973년 장사성 마왕퇴에서 전국 말기에 쓰여진 백서(帛書)본 노자가 출토되었고, 1993년 형문시 곽점촌에서 전국 중기에 쓰여진 곽점(郭店)본 노자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현대에 태어나서 여러 시기를 통하여 달리 기록된 노자의 두 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우리들에게 큰 행운이며 축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통행본을 왕필본을 저본(底本)으로 사용하였고, 백서본과 곽점본은 약칭(略稱)하여 백서와 곽점으로 부르겠습니다. 한글 세대가 대다수인 여러분들의 편의를 위하여 여기서 사용되는 모든 한문에는 한글로 독음을 달아 옥편을 찾지 않더라도 읽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글은 1주일이나 업무가 바쁘면 2주일에 한번 1장씩을 해설하는 정도로 연재를 하고자 합니다. "노자에 있는 한문 제대로 익히기"란 글을 마칠 때까지 여러 분들의 많은 지도와 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전개한 내용에 무리가 있고 잘못된 부분은 언제라도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第一章
[해석]
도라고 표현할 수 있는 도는 항상 있는 도가 아니다
이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 있는 이름이 아니다
이름 없는 것은 만물의 시작이고 이름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다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없음으로써 그 미묘한 것을 살펴보고
항상 욕심이 있음으로써 그 변두리를 보게 된다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이지만 나오게되면 이름이 달라진다
같은 것을 玄妙하다고 한다
현묘하고 현묘하여 모든 미묘한 것의 출입구다
① 여기서는 백서 1장을 취했다. "도(道)"를 말한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은 잘못으로 판단된다. 노자가 태어나서 활동하던 시대는 춘추(春秋) 말기(末期)로써 선진(先秦)의 전적(典籍) 어디를 보아도 말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후대(後代)에 성립된 어법을 가지고 그 時代語로 쓰여진 노자를 해석해서는 안 된다. 노자는 노자의 마음으로 노자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글자대로 道라고 풀이하였다.
또한 가도(可道)는 곽점의 성자출명(性者出名)이란 곳의 문장을 보면 "오직 인도만이 가도가 된다"(唯人道爲可道也)라는 구절이 나온다.(최진식 지음,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소나무, 2001, P25) 이를 통해 노자가 말한 "가도"를 문장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러한 가도는 인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가(儒家)에서는 군자가 가도를 인도(人道)로서 중요하게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지만, 노자는 가도는 항도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인도와는 다른 천도를 지향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노자가 천도(天道)를 지향하는 것은 인도라는 것은 항상 시대와 왕조를 달리하면서 변할 수 있는 것이고, 주(周)나라 왕실의 사관(史官)으로써 변하여 온 역사를 살펴볼 때 세상 사람들이 인도를 도라 하지만 그것은 항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② 항(恒)이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은 얼마 전인 1972년까지만 해도 누구나 상(常)으로 알았었다. 백서(帛書) 노자 1장의 非常道가 非恒道로 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常은 恒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1973년 백서의 발견으로 이것은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이름인 유항(劉恒)의 恒을 기휘(忌諱)하여 常으로 한 것에 기인된 데에 그 원인이 있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恒字와 常字가 의미는 같은 것으로 본다. 여기서는 백서본에 의하여 상을 항으로 원래대로 바꾸어 설명하고자 한다. 거기에 따라서 번역도 한글로 "늘"이라고 해도 되겠지만 이러한 한문의 변천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恒常"이라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항상이란 말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감(感)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굳이 항과 상의 차이를 구분하여 그 뜻을 헤아려 본다면, 恒은 천지운행과 같은 항구불변의 하늘의 법칙을 말하고, 常은 만물의 일정 불변의 만유인력의 법칙 같은 땅의 법칙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백서본에는 모두 항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단지 한 군데 16장에만 "지상왈명(知常曰明)"이하 두 번 표기되어 있다. 이것으로써 항과 상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도 恒은 常也로, 광운(廣韻))에서는 구(久)也로, 常은 玉篇(옥편)에서는 恒也로 되어 있다.
③ 해석에서는 위와 별 다를 것이 없다. 여기서는 "항명(恒名)"에 대해서만 살펴보자. 우리는 어떤 것과 다른 것을 구별짓기 위해서는 부득이 이름을 붙여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태어난 문화적 전통과 교육을 통하여 익히고 배워서 안다고 해서 그 이름을 고집하여 내가 아는 이름만이 변할 수 없는 "항상 있는 이름(恒名)"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내가 아는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은 틀렸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아는 이름만이 옳은 이름이라고 할 수 없다고 단호히 아니다고 말한다. 따라서 나도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사물을 어떤 고정된 이름으로 한정짓고 규정지을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근원적실재(根源的實在)에 대하여 다른 성인(聖人)인 석가는 부처라 예수는 야훼라고 하였듯이, 노자도 춘추말기 그 시대에 천지만물을 주재하는 신(神)인 상제(上帝)가 있었지만 그러한 규정성을 떠나 인격적(人格的)인 神보다 먼저 있은 것에 대하여 곽점 25장에서 "노자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이름이란 것은 이것과 저것을 구별짓고 규정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老子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그들과는 성격을 달리 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노자가 "나는 道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하여는 곽점 32장에서 ."도는 항상 이름이 없다"고 하였다.
④ "無名,萬物之始也"를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 지에 대한 논란이 과거에 많이 있었다. 그거에 대한 해답이 백서의 발견으로 분명해 졌지만 여전히 다르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학자들은 여기에 대하여 무명과 유명으로 끊어 읽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는데 여기에 대한 문제는 백서의 문체를 통해 보아도 간접적으로 그러한 사실이 증명된다. 이것은 바로 뒤에 "故恒無欲也,以觀其 ;恒有欲也,以觀其所 " 구절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어조사 야(也)가 있어 백서의 출현으로 이 부분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백서에서 보면, 欲자 뒤에 也자가 있으므로 "恒無欲也"ㆍ"恒有欲也"라 읽을 수 있지만 "恒無"ㆍ"恒有"라 읽을 수 없다. 때문에 어떤 사람은 1장에 의거하여 "恒無"ㆍ"恒有"를 도를 증명하는 "常無"ㆍ"常有"의 통일체의 관점으로 여겼다. 하지만 노자의 本意와는 부합되지 않아 보인다.(許抗生 지음, 유희재외 1명 옮김, 노자평전, 미다스북스, 2002. P70∼71) 이러한 점이 한번 자신의 관점을 세우면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기 힘든 학자들이 고집하고 있는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도덕경 안에서 무명과 유명은 노자사상을 구성하는 한 짝의 범주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보다는, 개념으로 규정되어 다른 것들과 구분을 꾀하는 상태[有名]와 그러기 이전의 상태[無名]를 드러내는 술어로 이해해야 한다(최진식 지음,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소나무, 2001, P29)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無, 名萬物之始. 有, 名萬物之母.라고 無와 有로 끊어 읽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한 해석은 노자적 사고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곽점 32장에서 "도는 항상 이름이 없다"고 하였고, 백서 1장에서는 이 말을 이어 받아 "이름 없는 것은 만물의 시작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백서 1장의 앞에서 "도라고 표현할 수 없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닌 것이다(道可道也, 非恒道也. 名可名也, 非恒名也.)"라고 하였다. 우주 본원의 도는 항도이며, 무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규정성이나 제한이 없다. 그래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제한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恒道는 無名일 뿐이다. 그러한 "무명은 만물의 시작"이라고 하였고, 說問解字(설문해자)에서도 "始는 여자의 처음이다[女之初也]"라고 하였다. 시는 원초적이고 순박하다는 의미이다. 원초적이고 순박한 도는 천지만물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처지만물보다 앞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는 무명의 존재이다.(許抗生지음: 유희재외 1명 옮김, 노자평전, 2002. P86∼87) 김형효 교수는 "데리다와 노장독법"에서 말하기를 설문해자의 처음이란 의미의 초(初)는 옷 의(衣)와 칼이나 가위 인(刃)이 합쳐진 글자이다. 여자가 옷감을 자르려고 가위를 옷감에 대고 힘을 가해 옷감에 갈라지는 틈이 생겼다면 이는 이미 시작이나 처음이 아니라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고, 아무 자국도 나지 않앗다면 이는 작업이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것이다. 시작은 바로 이 교차점이다. 벌어짐과 닫혀짐이 교차하는 지점인 것이다. 또 달리기 할 때 "출발"이라는 경우를 보자 사실 출발은 없다. 달리는 동작과 준비하는 동작 사이에 그 두 동작이 교차하는 그 지점, 그것을 출발이라고 부를 뿐이다.
⑤ 앞에서 검토하였듯이 이 구절에서 無欲과 有欲을 한 단어로 볼 것인가 아니면 無와 有자 아래에 쉼표를 찍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였다. 발견된 백서는 모두 無欲과 有欲자 아래에 쉼표를 찍는 것이 마땅한 것임을 다시 의심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로써 분쟁을 영원히 없앨 수 있게 되었다.(徐復觀 著, 유일환 옮김, 中國人性論史. 을유문화사, 1995, P351∼352) 그렇지만 백서가 출토되고 나서 학자들은 대부분 무욕과 유욕으로 끊어 읽었는데, 엄영봉만이 다수의 의견에 반대해서 "노자가 사물을 대하는 방법이 허정(虛靜)을 근본으로 하는데 유욕한 사람이라면 허정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그렇다면 어떻게 관묘(觀 )와 관요(觀 )할 수 있겠는가. 백서본이 오래는 되었지만 也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나도 개인적으로 엄선생의 견해에 동의한다는 일부 견해가 있다.(陳鼓應지음, 최진석 옮김, 老莊新論, 소나무, 1997, P166∼167) 이렇게 아직도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하물며 노자의 한문해독에는 여전히 이러한 부분이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사견(私見)을 가지고 자신이 한 번역만이 옳다고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로 여겨진다. 따라서 백서의 출현은 왕안석(王安石) 이래로 구두로 전해졌던 "상무"ㆍ"상유"의 착오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왕필에서 보면 이 구절은 어느 쪽으로 읽어도 모두 의미가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서에서 보면, 欲자 뒤에 也자가 있으므로 "恒無欲也"ㆍ"恒有欲也"라 읽을 수 있지만 "恒無"ㆍ"恒有"라 읽을 수 없다. 때문에 어떤 사람은 1장에 의거하여 "恒無"ㆍ"恒有"를 도를 증명하는 "常無"ㆍ"常有"의 통일체의 관점으로 여겼다. 하지만 노자의 본의(本意)와는 부합되지 않아 보인다.(許抗生 지음, 유희재외 1명 옮김, 노자평전, 미다스북스, 2002. P70∼71)
(miao): 유원(幽遠)하다. 아주 멀다는 뜻이다. 묘와 같은 뜻으로 본다. 妙는 미묘하다. 현묘하다는 뜻이다.
(jiao): 변두리. 변경(邊境). 변계(邊界).
⑥ 도를 본체(本體)로 보고, 도가 세상에 나타난 모습을 현상(現象)이라고 한다면 본체와 현상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같다는 것이다. 도와 현상으로 나누어 본다면 여기서의 도는 현상에 상대하는 도이지 근원적 실재로써의 도가 아니다. 도는 항상 무명이고 도의 경지에 이르면 무욕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현상계는 항상 유명이며 나타난 세계의 한 단면일 뿐이다. "현지우현(玄之又玄)"의 세계는 모든 미묘한 것의 출입구다. 무와 유가 상대적인 나타난 천지만물은 그보다 먼저 유와 무로 구별되지 않은 근원적인 무에서 생겨났고, 무명이나 유명으로 나타난 세상의 이름은 무명이나 유명으로 불리기 전부터 있었던 명제라는 것도 없는 것이다. 무명과 유명이나 무욕과 유욕으로 갈라지고 구별되지 않으며 함께 있는 그것을 우리가 알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세계는 세상에 나타나서 구별된 세계가 아닌 근원적인 세계를 노자는 현묘하고도 현묘하다고 할 것이니 모든 미묘한 것이 나오고 들어가는 문이라 하였다.
"현지우현"의 경계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은 도가 이러한 상태에서 이미 더 이상 근원적인 것을 찾을 수 없는 것을 말한다.(高懷民 著, 鄭炳碩 譯, 周易哲學의 理解, 文藝出版社, P490∼491) 이러한 道를 달리 표현하면 無가되는데, 결국 道는 노자의 철학적 관점에서는 유를 함유한 무보다도 한 단계 더 높은 것으로 도의 참된 의미는 안으로는 장애(障碍)되는 것이 없고 바깥으로는 무한(無限)한 경계(境界)를 가지는 것이다(.高懷民, 鄭炳碩역, 周易哲學의 理解, 1995, 486)
玄:깊은 검은 색으로 현묘 심원한 뜻을 가진다. (深黑色,玄妙深遠的含義.심흑색,현묘심원적함의.)
門:일체 요묘하고 변화하는 모든 실마리가 되고 이것을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우주만물의 유일한 근원인 도의 첫걸음이다.(一切奧妙變化的總門徑,此用來比喩宇宙萬物的唯一原“道”的門徑. 일체오묘변화적총문경,차용래비유우주만물적유일원“도”적문경. 여기서 門徑은 단서. 실마리. 첫걸음. )
※ 긴 내용을 읽어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이 1장(章)은 노자사상의 道를 전체적으로 조명(照明)하는 장이라 몇 글자를 제외하고는 한자(漢字)는 어렵지 않으면서도 원래 대단히 어렵고 난해한 것으로 소개된 부분입니다.
노자사상이 이런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위진남북조 시절부터 노자를 역경과 장자와 더불어 삼현학(三玄學)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소개한 것 외에도 무수한 설명이 가능하나 여기서는 중심적인 것만을 소개하였는데도 이 정도이니 노자사상은 이처럼 현묘한 사상입니다.
그러나 너무 어렵다고 실망하지 마시고. 가볍게 한문이나 익히자는 작은 목표를 두고 오래 노자를 접하시다가 보면 나중에는 이해가 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 노자 책을 보고서 저 역시 그런 세월을 33년 보냈습니다. 지금은 노자에 관한 책이 많으니 여러분들이 접근하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 회(回)에는 1장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먼저 노자의 생각과 마음을 유추하여 이노해노(以老解老)하는 노자독법(讀法)으로 문장을 해설하면서 노자의 음성으로 들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2장을 해설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