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은교’
칼퇴근을 하고, 세탁소에 맡겼던 겨울옷들도 찾았다. 영화 ‘은교’를 보기위해 초과근무를 사양했기에 짧은 시간 동안 미루어두었던 일부터 해치웠다. 표를 사고 남은 20분은 비빔냉면 한 그릇으로 시간을 맞췄다. 아직도 혼자서 영화를 보려면 뭔가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할 때처럼 남 눈치를 봐가며 삐죽거리게 된다. 하지만 정말 영화를 깊이 보는 데는 역시 혼자서 볼 때가 최고다.
‘은교’는 참 잘 만든 영화다. 감독이 널어놓은 메타포들이 마치 시인 양 반짝거렸다. 박범신의 원작 소설이 어떠하였는지 모른다. 물론 소설에서도 영화 속에 다 넣지 못한 더 많은 메타포들이 있었을 것이다. 정지우 감독은 그것들을 선별하여 깔끔하게 한 상 차려놓았다. 예전에 그가 만든 ‘해피엔드’(1999년)를 보면서 돋았던 그 소름이 다시 기억났다.
영화는 초보 소설가처럼 정직한 복선을 사용하고 있었다. 전쟁판에서 목숨을 구해줬던 누이가 열일곱이었다는 고백, 감옥에서 배웠다는 자동차 정비기술, 특히 시인들이 늘 좋은 소설을 꿈꾸고 있다는 매우 사적인 복선. 그러나 무엇보다 샤워를 위해 옷을 벗으며 자신의 몸뚱아리를 바라보는 늙은이의 시선이 무엇보다 강렬한 이 영화의 복선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생뚱스럽게도 세 가지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첫째는 ‘플라톤의 감사’였다. 그는 짐승이 아니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과 야만인이 아니라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것,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동시대에 태어나 철학을 할 수 있었음을 감사했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나는 갑자기 나도 한 때 문학청년이었음이 너무 감사하였다. 이 영화를 혼자 보러 가는 것을 망설였던 것이 인터넷에 떠도는 원색적인 ‘떠돌이 말들’ 때문이었는데, 인터넷은 정말 쓰레기일 뿐이다.
두 번째는 노스님과 그의 제자 스님이 강을 건너는 이야기였다. 어느 겨울 두 스님이 나룻배가 없는 차가운 강을 건너게 되었다. 그곳에는 강을 건너야 할 한 젊은 여성이 있었는데 남자들보다 입성이 불편하다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 노승은 젊은 제자에게 그 여인을 업어서 건너 주라고 하였으나 젊은 중은 거절하였다. 결국 노승이 그 일을 해야 했다. 한참 뒤따라오던 제가가 스승에게 “스님께서는 수행승은 마땅히 여색을 멀리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시면서 어째서 스스로는 어기십니까?”라고 물었다. 스승은 “나는 강을 건너고는 그 여인을 내려놓았는데 그대는 아직도 업고 계시는가?”라고 했다는 말.
몸이 늙어진다 해도 마음마저 함께 늙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사랑은 순간순간의 ‘눈뜸’이다. 하지만 이적요의 사랑은 예전의 사랑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이다. 평생 샌드위치를 먹지 않았던 노 시인이 은교가 만들어준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는 것이 ‘새로움’이고 바로 사랑이다. 서지우가 이적요에게 퍼부었던 칠십 노인의 여고생을 향한 불륜이 아니라 새로운 ‘눈뜸’이다. 헤나를 그리는 동안 은교의 몸을 상상하는 것이나 높다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정사 장면을 훔쳐보는 관음증이 그 사랑을 타락시킬 순 없다. 상상과 관음은 예술가의 촉수이면서 모든 인간의 본능이지 죄는 아니다.
세 번째는 영화 ‘일 포스티노’가 떠올랐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우편배달부 마리오에게 바닷가에서 시를 가르치는 그 장면은 국어교사인 내게 항상 최고의 수업으로 각인되어 있다. 은교가 시인의 연필을 보고서,
- 할아버지, 은교가 연필 깎아 드릴까요?
- 놔둬라. 뾰족한 연필은 슬픈 거란다.
- 뾰족한 연필이 뭐가 슬퍼요? 뾰족하기 때문에... 슬픈 거예요?
시인에겐 연필에 대한 이미지가 슬픔이란 메타포로 변해있었다. 송진이 흘러내려 흙 속에서 오래오래 갈무리되면 호박이란 영롱한 보석으로 변하는 것처럼.
얼마 후 은교도 시인이 되어 있었다.
-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뾰족한 연필이 슬프다고 했죠? 나는 뾰족한 칼이 슬퍼요. 엄마가 내 연필을 깎다가 갑자기 발뒤꿈치를 잘라 내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엄마의 칼이 슬퍼요.
“별이 아름답다는 것은 주입된 것일 뿐”이라는 강의. 벼랑에 걸린 거울 때문에 울고 있는 은교를 위해 향가 ‘헌화가’의 소 몰고 가던 노인처럼 위험을 무릅쓴 모습. 이 모두가 ‘일 포스티노’ 못지않은 문학영화가 될 요소들이다.
많은 이들이 주연배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매끄럽지 못함과 쓸데없는 벗김에 대해 이미 말했지만 나도 췌사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다른 것은 다 그대로 두고 서지우와 은교의 정사 장면만 실루엣으로 처리했더라면 더 넓은 연령대가 공감할 수 있는 영화가 되었으리라는 안타까움. “너희 젊음이 너희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는 원작 소설가의 주제를 정 감독이 너무 무겁게 받아들인 것 같다. 그냥 늙어가는 사람의 푸념으로 넘겨도 되었을 것을 너무 깊이 새겨들어서 범한 과유불급이다. (2012.5.3.)
#. 옮긴이 주: 영화 '은교'가 작금의 화두다.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위의 이 글은 대학 때 한참 문명을 날리던 선배가 같이 드나드는 어느 카페에 쓴 글인데, 읽을 만해서 허락을 받지도 않고 무단으로 전재한 것임을 밝힌다.
첫댓글 은교 보러 고고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