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용(金景庸)은 경주(慶州)사람이다. 아버지 김원황(金元晃)은 병부상서(兵部尙書)로 본래 신라(新羅)의 종실(宗室)이었다.
김경용은 용모가 뛰어나고 몸가짐이 수려하여 귀인(貴人)의 풍채가 있었으나 젊어서는 방탕하여 가무(歌舞)와 여색(女色)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어떤 사람과 길에서 다투니 송(宋)의 상인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제가 관상을 잘 보는데, 지금 당신의 관상을 보건대 골격이 빼어나고 특이하여 반드시 부귀와 장수를 누릴 것이니 자중자애하시오.”라고 하였다. 김경용이 이로 말미암아 자못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합문지후(閤門祗候)로 광주판관(廣州判官)이 되어 나가서 정사를 베푸는 데 가혹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존경하였다. 일찍이 겨울철에 크게 취하여 준마(駿馬)를 타고 한강(漢江)을 달려서 지나는데 말발굽이 닿는 곳마다 얼음이 깨져 물이 솟아올랐으나 빠지지 않으니 듣는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을 때 숙종(肅宗)이 동지(東池)로 나아가 활 쏘는 것을 구경하였는데, 김경용이 먼저 정곡(正鵠)을 쏘아 맞추니 은그릇(銀器)과 구마(廐馬)를 하사하였다. 이부시랑(吏部侍郞)과 병부(兵部), 호부(戶部), 공부(工部) 3부의 상서(尙書)를 역임하였다.
예종(睿宗) 초에 참지정사(叅知政事)가 되었다가 개부의동삼사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 승진하였으며, 문하시중 상주국(門下侍中 上柱國)에 올랐으며, 협모위사치리공신 수태보 판상서이 형부사 낙랑군개국백(協謀衛社致理功臣 守大保 判尙書吏 刑部事 樂浪郡開國伯) 식읍 1,000호 식실봉 200호를 더하였다. 여러 번 표를 올려 사직을 청하니, 왕이 좌부승선(左副承宣) 안당영(安唐穎)을 보내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곧 이어 치사(致仕)를 허락하였다.
후에 〈왕이〉 종실(宗室)과 재추(宰樞)를 불러 상춘정(賞春亭)에서 술을 마시는데 매우 기뻐하며 김경용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라의 원로는 오직 경만이 남았도다.”라고 하였다. 김경용이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절을 올렸다. 여러 차례 더하여 광국동덕익성공신(匡國同德翊聖功臣) 식읍 3,000호 식실봉(食實封) 700호가 되었고 작위를 올려 공(公)으로 삼았다.
권세를 믿고 재물을 함부로 거두어들여 재산을 늘렸으며 집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미니 세간의 비난을 받았다. 인종(仁宗) 3년(1125)에 죽으니 85세였으며 〈왕이〉 부의(賻儀)를 주어 장례를 치르고 시호를 추증하도록 명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