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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악마을
1. 개관
계북면 소재지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3.5km를 가면 도로가 원촌마을을 가로질러 지나가고 마을을 벗어나면 진안군 동향면으로 가는 635번 지방도가 나뉘는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를 지나 원촌교를 건너 바로 오른쪽으로 차선 없는 좁은 포장도로가 이어지는데 이 길이 제일 오랜 된 양악마을 진입로이다. 이 길을 따라 왼쪽으로 고인돌분포지, 장터거리를 지나 700m를 들어가면 2005년도에 새로 잘 지어진 양악마을 회관과 회관 앞 모정이 환한 햇빛을 받으며 맞는다.
마을 진입로의 초입에서 남동쪽 덕유산을 바라보면 마을로 흘러드는 힘찬 산맥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장수덕유산(長水德裕山, 서봉, 마을에서는 할미산이라고도 함)에서 남쪽으로 흐르던 백두대간이 서쪽을 향해 굵직한 첫 지류를 만든다. 이 지류는 한 번 크게 용트림을 하며 작은 삿갓봉을 우뚝 세우고 곧 세 지류로 나뉘는데 가운데 지류는 힘차게 흘러 파곡, 문성, 연동에 이르고 왼쪽 지류는 방향을 바꿔 북서로 흐르다가 분기하여 하나는 북쪽으로 또 하나는 북서로 흐른다. 북으로 곧장 흐르던 지류는 움푹 싸리목재를 만들고 우뚝 999 고지를 세운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방향을 바꿔 경쾌하게 흔들며 내려오다가 지추골, 물방아골, 병목안, 집은해(깊은해), 홍수네밭골, 텃골앞산, 외용골, 보건너 등 많은 골짜기를 만들며 내려와 비로소 용소에 머리를 담근다. 북서로 흐르던 줄기는 다시 서류 북류로 분기하여 작은 원지기를 만들고, 서류하던 줄기는 꿈틀거리며 내려와 역시 용연정 아래에서 긴 여정을 마치고 용소의 물을 마신다. 한편 향적봉을 향해 북으로 내닫던 대간은 월성치를 만들고 계속 내닫다가 큼지막한 삿갓봉을 세우며 북서지류를 만드는데 이 지류는 양악호에 이르기까지 군막골, 내운양지, 큰보적, 보적, 고정터, 말똥양지, 시양골, 중산골, 정지골, 말망골, 파산밭골, 수나무밭양지, 정삼, 송지까끔, 독종골, 심방골 등의 골짜기를 만들며 흐르다가 시루봉을 세우고 급회전하여 남쪽으로 향해 병풍처럼 둘러 마암, 당저, 양악의 배산이 되어 역시 용소를 향해 머리를 들고 긴 숨을 쉰다. 양악마을은 이 세 지류가 용소에 머리를 담그거가 물을 탐하며 혈을 맺는 곳에서 시작하여 시오리 토옥동에서 생성된 옥류가 흐르는 큰 하천을 따라 길게 형성되었다.
20만평이 넘는 원양들과 사철 풍부한 물이 흐르는 양악천은 사람이 살기에 최적의 조건이 되어 삼한시대에는 70여 마을을 관장했다는 양촌현이 터를 잡을 수 있었다는데 주변에서 발견되는 고인돌 등이 그것을 대변해주고 있다. 그 후 백제시대에는 백이현의 현터가 있었다. 백이현은 서기 166년에 설치되어 영역은 현재 진안군 동향면(銅鄕面)∙상전면(上田面)∙정천면(程川面)∙안천면(顔川面)과 무주군 안성면(安城面)∙설천면(雪天面)∙부남면(富南面)과 장수군 계북면(溪北面)∙장계면(長溪面)∙계남면(溪南面)과 천천면(天川面) 하부 등 11개면을 관할하였다. 서기 553년 백제 성왕이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관산성(管山城)을 치다가 전사하여 패전하고 신라군의 추격을 받아 완산주(현 전주)까지 빼앗겼다. 완산주를 빼앗은 신라는 서기555년 백제 위덕왕(威德王) 2년 정월에 완산주를 설치한 후 백이현(伯伊縣)을 폐하고 벽계군(壁谿郡)을 새로 설치하며 현을 지금의 장계면 삼봉리 노평들로 옮겼다. 서기 757년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에 양악소(陽岳所)를 설치해서 벽계군이 관할했다. 지금도 마을에 남아있는 동헌(東軒)터, 옥(獄)터거리, 장터거리 등의 지명이 당시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양악소는 서기 1895년 고종 32년에 전국을 23부(府) 331군(郡)을 두는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폐지되었다.
양악마을로 진입하는 길은 오래전부터 이용하던 길 외에도 자동차를 이용하여 양악마을에 들어설 수 있는 길은 세 갈래가 더 있다. 그 중 하나는 2000년도에 원양들을 가로질러 개설된 원촌 토옥동간 반듯한 길을 따라 19번 국도에서 1km를 따라 오르면서 아래에서부터 차례대로 양악마을로 진입하는 네 개의 길이 있는데 이 길을 이용하면 마을의 원하는 지점에 편리하게 이를 수 있다. 또 하나는 원촌 서낭댕이에서 농로를 따라 들어와 중바우 아래 용소막 다리를 건너 용소막이나 독가촌 쪽으로 나와 회관 앞으로 진입하는 1km 정도 되는 길이다 이 길은 도보나 대중 교통기관을 이용하여 걸어서 마을에 들어가던 사람들이 많이 이용했던 길이다. 다른 하나는 파곡마을에서 극락사 앞을 거치거나 공동묘지산 고개를 넘어 마을로 들어서는 1.2km 가량 되는 길이다. 이 길은 인근 오래 전부터 파곡과 왕래하거나 혹은 걸어서 계북면 소재지로 나가거나 장계장을 오갈 때 주로 이용하던 길이었으나 근래에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어 이용하는 사람이 드물다.
양악마을은 양악을 비롯해서 용소막, 독가촌, 구석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19번 국도에서 양악회관으로 진입하기 위해 200m 쯤 오르다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면 하천을 따라 5가구가 살고 있는데 이를 구석담이라고 한다. 구석담을 지나 100여m를 더 오르면 오른쪽 양지 언덕에 10여 채의 집단가옥이 모여 작은 촌락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독가촌(獨家村)이라 한다. 1960년대 말 무장공비 출현이 잦고 피해가 심해지자 정부에서 점골(산막)에 살던 인가를 현재의 위치에 소개(疏開)시키면서 작은 촌락이 형성되었다. 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10여 가구에 50여명이 살았으나 지금은 6가구에 2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용소막은 독가촌에서 마을 회관으로 오르다 보면 길 아래쪽에 해당하는 마을을 말한다. 지금은 18가호에 40여 주민이 살고 있다.
양악마을의 역대 이장을 보면 신현규씨(왜정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이기현씨, 이병기씨, 이성권씨, 정인철씨, 이상욱씨, 신문화씨, 이배현씨, 신영철씨(’67-’70), 이태석(’71-’73)씨, 이정우(’74)씨, 정진쇠(’75-’76)씨, 오성택(’77-’78)씨, 고재규(’79-’83)씨, 이정우(’84-’85)씨, 오인국(’86)씨, 백기종(’87-’88)씨, 이정우(’89)씨, 배상문(’90-’93)씨, 이승우(’94)씨, 강동렬(‘95-’96)씨, 정진쇠(‘97)씨, 박남용(’98-’99)씨, 홍원표(’00-’05)씨에 이어 현재는 오인국씨가 2006년부터 다시 마을 이장을 맡아 장재선 개발위원장과 더불어 8년 동안 110여억 원이 투자되는 전통테마 마을 사업을 주관하며 제2의 마을 중흥을 꿈꾸고 있다.
양악마을은 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110여 호에 700명이 넘는 주민이 살았으나 지금은 김해∙금릉∙광산 김(金)씨, 전주․경주∙인천 이(李)씨, 밀양․반남 박(朴)씨, 동래 정(鄭)씨, 인동 장(張)씨, 해주∙봉동 오(吳)씨, 순흥 안(安)씨, 분성 배(裵)씨, 진주 강(姜)씨, ․달성 서(徐)씨, 남평 문(文)씨, 옥천 전(全)씨, 문화 유(柳)씨, 000홍(홍)씨, 은진 임(林)씨, 제주 고(高)씨, 언진 송(宋)씨, 밀양 손(孫)씨, 밀양 허(許)씨, 옥천 육(陸)씨, 등 230여 주민이 90여 호의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는데 아직도 계북면에서는 어전 마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마을이다.
2) 산과 골짜기
•할미산(서봉, 장수덕유산)
오래 전부터 백두대간의 지도상에 나와 있는 서봉을 이곳 사람들은 할미산 혹은큰삿갓봉이라 부르다가 어느 날 덕유산이 별도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장수덕유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할미산이 만들어내는 대간줄기와 대간에서 다시 분기하는 산줄기와 봉우리 그리고 그 산줄기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계곡과 계곡이 모아 내려 보내는 물은 하천을 이루어 마을 앞을 흐르며 오랜 세월 양악마을 사람들의 삶의 근간이 되었다. 할미산 아래 돌무더기를 할미성이라 하고 그 아래 샘을 참샘이라 한다.
•월성재
백두대간의 삿갓봉과 남덕유산 중간지점에 움푹 들어간 안부(鞍部)에 있다. 남덕유산에서 북쪽으로 1.1km 가량 떨어진 월성재는 금강의 양악천과 황강의 월성천(月城川)을 곧장 이어주는 큰 고갯길이다. 고갯길 정상부가 반달모양을 닮아 월성치, 혹은 월성현(月城峴)이라고 불린다. 지금은 등산객들의 등산로 구실만 하고 있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큰 고갯길이었다.
•토옥동계곡
999고지에서 서류하는 지류와 삿갓봉에서 서류하는 지류는 20개가 넘는 크고 작은 골짜기를 만들어 깊고 굵은 계곡에 산줄기를 들이미는데 그 계곡의 깊이가 6km에 이른다. 양악마을에서 시작하여 중소와 지추골폭포에 이르기까지 왼쪽으로는 위에서부터 큰보적, 보적, 말똥양지, 시양골, 중산골, 정지골, 말망골, 파산밭골, 수나무밭양지, 정삼, 송지까끔, 독종골, 심방골 등의 골짜기가 토옥동 계곡에서 이어지고, 오른쪽으로는 위에서부터 지추골, 물방아골, 병목안, 집은해(깊은해), 홍수네밭골, 텃골앞산, 외용골, 보건너 등 많은 골짜기가 토옥동 골짜기와 닿아 있다.
이처럼 골이 깊고 수많은 골짜기와 이어진 토옥동 계곡은 울창한 숲만큼이나 애환의 역사를 안고 있다. 삼국시대를 거쳐 신작로가 만들어져 자동차를 이용하기 전까지는 신라와 백제의 전장이거나 군사이동로였고, 그후 고려와 조선조에는 영남의 서북부와 호남의 동부를 잇는 교통로였으며 구한말에는 호남의병장 문태서 장군과 호남의병선봉장 박춘실 장군이 일제에 맞서 항일구국 운동을 펼치던 격전장이기도 했다. 6∙25 한국전쟁 당시에는 이북으로의 퇴각로가 끊긴 북한군이 덕유산과 이 계곡에 은거하며 빨치산이라는 이름으로 토벌군과 발진티부스의 열병에 시달리다가 백두대간을 통해 지리산으로 이동하여 끝내 명확한 이유도 모르는 채 죽어야했던 동족상잔의 비극도 토옥동 계곡은 말없이 안고 있다.
지금은 청정한 숲과 맑은 물, 수려한 경관으로 사철 피서객과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사실 토옥동 계곡은 오래전부터 수탈의 대상이었다. 일제는 토옥동 계곡의 아름드리 소나무를 비롯한 침엽수와 참나무 등 질 좋은 낙엽활엽수들의 울창한 숲에 군침을 삼키며 깊은 계곡까지 수탈의 신작로를 닦았다. 골짜기 곳곳에 숯가마를 만들어 엄청난 나무를 베어내어 숯으로 구워 실어냈는데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광복 후에 산에 가면 눈에 흔히 띄는 게 숯가마였고 미처 꺼내지 못했거나 실어내지 못한 숯을 나무대신 짊어지고 내려오기도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자동차엔진으로 조립한 간이 제재기를 설치하고 아름드리나무들을 판자나 철도 침목으로 가공하여 실어냈는데 이를 실어내기 위한 GMC트럭이 쉴 새 없이 오르내렸다고 한다. 시대는 알 수 없으나 양악에서 5.1km 떨어진 곳에 철을 생산하던 야철지가 있었는데 이 때 이곳에 산판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이 마을은 보적과 큰보적 골짜기 초입에 형성되어 70년대 초반 양악으로의 소개가 이루어질 때까지 사람이 살았었는데 점골 혹은 산막이라 불렀다.
토옥동계곡의 수탈은 광복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백태기 백판용씨에서 1970년대 서성기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산판꾼들이 일제시대에 개설된 도로를 이용하여 끝도 없이 나무를 베어냈다. 그 폐해로 토옥동계곡에 소나무가 거의 없어지고 참나무를 주축으로 하는 낙엽활엽수마저도 밀도가 낮아져 숲이 훤하고 리기다소나무나 은사시나무 등 낯선 외국 품종들이 군데군데 대신 자리를 차지하며 현대인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있다.
•심방골 : 양악마을에서 남동쪽으로 1.5㎞쯤에 있는 골짜기이다. 양악호의 취수탑에서 길 건너 북쪽으로 보이는 작은 두개의 골짜기인데 오래전에 심방사(尋訪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독종골 : 양악마을에서 남동쪽으로 1.8㎞ 떨어진 곳으로 양악호를 도는 길의 중간쯤에서 북쪽으로 뻗은 골짜기이다.
•보건너 : 심방골에서 바라보면 남쪽으로 호수 건너에 있는 골짜기이다. 실제로 양악호가 막아지기 전에는 원양들에 물을 공급하는 보(洑)가 있었다.
•송지까끔 : 양악마을 남동쪽 2㎞ 지점에서 북쪽으로 뻗은 골짜기이다. 독종골 다음 골짜기이다.
•정삼 : 양악마을 남동쪽 2.2㎞지점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깊은 골짜기이다. 이 곳에는 명당이 있는데 그 명당을 찾아 조상을 모시면 삼정승이 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정삼골짜기에는 심배나무거리, 작은정삼 등 작은 골짜기가 이어지고 골짜기 끝에는 한계골이 있다.
•외용골 : 송지까끔에서 바라보면 호수 건너 남쪽으로 보이는 골짜기이다.
•토골앞산 : 지금은 수몰되었으나 양악호 상단부 남쪽에 10여 가호가 살던 토골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토골 앞산은 그 마을의 앞산이다. 정삼 입구에서 보면 호수건너 남쪽으로 외용골이 있는 산이다.
•홍소네밭골 : 양악마을에서 2.5㎞떨어진 깊은 골짜기이다. 정삼 입구에서 바라보면 저수지 입수지점에서 30m쯤 올라가 남쪽으로 깊게 뻗은 골짜기이다. 홍소네 밭골 너머가 큰원지기이다.
•지픈해(깊은해) : 양악마을에서 토옥동에 오르는 길 따라 남동쪽으로 2.7㎞지점에서 남쪽으로 길게 이어진 골짜기이다. 양악송어장 맞은편 골짜기로 매우 깊은 골짜기이다. 골짜기 정상이 999고지로 이어진다.
•수박밭양지 : 양악에서 남동쪽 2.5㎞지점 작은 폭포에서 북쪽으로 보이는 펑퍼짐하고 완만한 경사면 양지를 말한다. 수박밭양지 오른쪽 너머가 파산박골이다.
•파산박골 : 양악에서 남동쪽 2.7㎞지점에서 개울 건너 북쪽으로 제법 길게 이어지는 골짜기이다. 작은 산제당 맞은편 약간 아래쪽 골짜기이다.
•소코리골: 파산박골에서 보면 남쪽에 보이는 골짜기이다.
•정지골 : 양악에서 남동쪽 3.2㎞ 지점에서 개울 건너 북쪽으로 깊고 가파르게 이어진 큰 골짜기이다. 이 골짜기 하단부에는 가마소가 있고 상단부는 시루등날망으로 이어진다. 이 곳에는 고로쇠나무가 많아 이른 봄 마을 사람들의 고로쇠 수액 채취가 성한 곳이다.
•시루등날망 : 백두대간에서 시루봉으로 이어지는 큰 줄기가 크고 작은 골짜기를 만들며 내려오다가 중간쯤에 우뚝 솟은 봉우리 하나를 만드는데 이를 시루등날망이라 한다. 봉우리 정상에 마치 솥단지 위에 시루를 엎어 놓은 듯한 커다란 바위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봉우리에서 정지골 시양골 등의 큰 골짜기가 이어진다.
•말망골 : 파산박골에서 정지골로 넘어가는 사이에 끼어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병목안 : 정지골 입구에서 보면 남쪽으로 마주보이는 골짜기이다.
•중산골 : 양악에서 남동쪽 3.5㎞지점에서 개울 건너 북쪽으로 보이는 골짜기이다. 정지골과 시양골의 큰 골짜기 사이에 끼어있는 비교적 작은 골짜기이다. 큰산제당에서 마주보이는 산이다.
•시양골과 말똥양지 : 시양골은 양악에서 남동쪽 4㎞지점에서 개울 건너 북쪽으로 보이는 깊고 큰 골짜기이다. 시양골 상단부에는 낙엽활엽수가 분포하고 하단부는 넓고 완만한 경사면이 펼쳐지는데 이를 말똥양지라고 한다.
•채독바위와 고정터 : 양악마을에서 남동쪽 8㎞지점 백두대간에 멀리서도 우뚝 솟아 크게 보이는 바위봉이 있는데 이를 마을사람들은 채독바위라 한다. 차돌(석영石英)을 이 지역 방언으로 채독이라 하는데 이 커다란 바윗덩어리에 차돌이 많이 박혀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채독바위 아래 넓은 골짜기를 고정터라 한다.
•덕골 : 양악마을 남동쪽 4.5㎞지점에서 개울 건너 동쪽으로 깊게 이어지는 골짜기 이름이다. 이 골짜기의 상단부는 고정터를 지나 채독바위에 이르고 골이 깊어 상당량의 물이 흐르는 개울이 형성되었다. 입구에서 마주보면 왼쪽이 말똥양지 오른쪽이 보적이다.
•오소리골 : 양악마을 남동쪽 4㎞지점에서 남쪽으로 뻗어 오른 골짜기이다. 시양골 맞은편 골짜기이다.
•보적 : 양악마을에서 남동쪽 5.1㎞지점에서 시작되는 골짜기인데 보적과 큰 보적 초입에 1970년까지는 점골(산박)이라는 10여 호의 마을이 있었다.
•큰보적 : 보적 오른쪽 골짜기로 보적보다 큰 골짜기이다. 큰보적 하단에 중소가 있고 오른쪽 큰 개울을 따라 월성치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내운양지 : 양악마을에서 남동쪽으로 7.5㎞쯤 거리에 있는 양지바른 골짜기로서 군막골 옆 골짜기이다.
•군막골 : 내운양지에서 좀 더 올라가다가 월성평지 왼쪽 골짜기 이름이다.
•월성평지(월성치) : 월성치는 백두대간의 삿갓봉과 남덕유산 중간지점에 움푹 들어간 안부(鞍部)에 있다. 남덕유산에서 북쪽으로 1.1㎞가량 떨어진 월성치는 금강의 양악천과 황강의 월성천을 곧장 이어주는 고갯길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의 내왕이 잦았다. 월성평지는 월성치 근방이 펑퍼짐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덤부리골 : 월성평지 하단부 골짜기를 이르는 말이다.
•싸리목재 : 파곡마을의 고수칭이와 물방아골을 연결시켜주는 고개이름이다. 부근에 굵은 싸리나무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
•물방아골 : 양악마을에서 남동쪽으로 5㎞를 오르다가 다시 지추골을 거쳐 2㎞가량을 더 가면 물방아골이다. 골짜기의 이름처럼 물방아가 있었다는 제보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당번지 : 물방아골에서 1㎞를 더 오르다가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골짜기의 이름이다. 할미산(서봉)에서 내려다보면 북쪽 바로 아래이다.
∘지추골 : 양악마을에서 남동쪽으로 5㎞를 오르다가 남쪽으로 0.5㎞쯤 더 가면 오른쪽으로 깊게 이어지는 골짜기인데 전에 지초가 많이 자생하여 붙여졌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지추골의 초입에 높이 15m 가량의 지추골 폭포가 있어 여름철에는 많은 피서객이 찾는다.
3) 하천과 들
•양악천
20여 개의 깊고 너른 골짜기를 안고 있는 토옥동 골짜기는 그 만큼 수량도 풍부하다. 중심물줄기는 내운양지, 군막골, 월성평지에서 모아져 내려오는 줄기로서 중소를 지나자마자 당번지, 물방아골, 지추골에서 내려오는 물과 고정터, 보적을 거쳐 덕골로 내려오는 물이 합쳐지면서 하천의 형태를 갖추고 곳곳에 소(沼)와 담(潭)을 만든다. 이 물은 십리계곡을 흘러가며 20여개의 크고 작은 골짜기의 물을 모아 주변의 숲과 함께 빼어난 경관을 이루어 천혜의 피서지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정삼골짜기 물을 합쳐 양악호에서 모인다.
양악호의 물의 일부는 수로를 따라 계북의 문성, 갈벌, 버등들, 연경들, 농소들로 흘러가고, 일부는 무주군 안성면 마암, 공진, 죽장들로 흐른다. 나머지는 원양들을 적시고 양악천을 이루어 흐르는데 양악댐이 막아지면서 양악천이 마를 때가 많아 냇가 잡초가 무성해지고 수려한 용연정과 용소, 중바우, 삐닥보, 어덕보, 구암정 등 양악천 주변의 빼어난 환경을 황폐화 시켰다.
특히 을유년 8.3 수해 후 시멘트 위주의 수로 형태 복구로 풍부했던 수석(水石)들이 대부분 복구공사에 묻히고 어류의 종류와 양마저 심하게 줄어들어 양악천 주변에 사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여러 가지로 애환을 안은 양악천은 원촌을 지나 파곡 외림을 거쳐 지나온 물과 돌고지에서 합수하고 진안군 동향면 하신동 아래에서 무주군 안성면을 지나온 대량천과 만나 구량천으로 흘러 용담에서 모인다.
•지추골폭포 : 양악마을에서 남동쪽으로 5km를 올라가서 다시 남쪽으로 0.5km를 더 가면 지추골이 있다. 지추골 초입에 있는 높이 15m 가량의 폭포이다. 마을 사람들은 큰폭포라고도 한다.
•작은폭포 : 양악마을에서 남동쪽 2.3km 지점, 양악호 위 0.3km 지점에 있는 높이 5m 가량의 폭포이다.
•양악호 : 남원농지개량조합에서 지소지구농업용수개발사업으로 1985년 11월에 착공하여 1991년 12월에 준공한 댐으로서 제방높이 44.7m, 저수량 225만톤, 최고 수심 44m에 이른다. 양악마을 단위로만 보면 양악호는 양악마을에 환경파괴 등 부정적인 영향을 많이 주었다.
•원양들 : 양악마을과 당저마을 앞에 넓게 펼쳐진 20만여 평의 들이다. 양악마을 사람들의 삶의 근간이 되는 들이다. 모두 경지정리가 이루어져 있고 주로 미작농이나 하우스 재배를 하고 있다.
•전남백이들 : 양악마을에서 하천 건너 고속도로 아래로 이어지는 들판
4) 민속과 종교
•산제
음력 정월 초사흗날 새벽 묘시에 큰산제당에서 지낸다. 제주는 초이튿날 제수를 장만하는데 제수는 밤과 대추 곶감 등 삼실과와 삶은 돼지머리, 쇠고기 날것, 흰떡, 밥, 김, 어포를 쓴다. 제수를 장만해놓고 큰산제당에 가서 눈을 치우고 왼새끼 줄에 한지를 꽂아 금줄을 둘러 주변을 정갈히 한다.
초사흗날 새벽이 되면 제주는 동생들에게 제수를 들리고 큰산제당에 올라가서 자리를 펴고 제수를 진설한다. 촛불을 밝히고 향을 피운 후에 술을 올려 두 번 절한다. 이어서 마을에 아무 탈 없게 해달라고 빌며 소지 20매를 올린다. 산제를 지내고 내려와 점심에는 마을사람들을 초대하여 큰 돼지를 잡고 술을 내어 함께 나눠먹고 덕담을 나누며 즐긴다.
산제에 쓰이는 경비는 마을 답 7마지기를 경작하고 도조로 2가마 반을 마을에 내고 나머지를 가지고 쓴다. 별로 남는 것은 없으나 산제를 모시면서 집안 일이 잘 풀리고 형제들도 다 잘되는 것 같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제를 올린다고 한다.
양악마을 산제를 담당했던 역대 제주는 정호조씨가 오랫동안 지내오다가 강창수씨로 이어졌고 다시 안용운씨를 거쳐 김광용씨의 부친인 김봉희씨가 오랫동안 지내왔다. 1999년에 김봉희씨가 작고하자 그의 아들 김광용씨가 지금까지 7년째 지내오고 있다.
•귀일제
손 없이 죽은 김해 김씨가 남겨놓은 서낭당이 다랑이 논 두마지기를 경작하는 대신 귀일날 제사를 지내주다가 나중에 어찌될지 모르고, 또 다랑이 논이라서 경작하기 불편하므로 마을로 이전해 주면 경지정리도 하고 영원히 제사를 지내주겠다는 마을의 제의를 김해김씨 일가붙이가 거절하여 이때부터 귀일제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
•망월축제
정월 열 나흗날 양악마을 주민들이 트럭을 이용하여 독종골이나 간벌한 산에 가서 청솔가지를 해다가 회관 앞에 높다랗게 달집을 짓는다. 보름날 달이 떠오르기 전에 달집에 ‘厄送 - 陽岳마을 住民一同-’이라고 한지에 한자로 써서 꽂고 돼지머리와 삼실과 고기접시 등으로 상을 진설한 후 마을 이장을 필두로 개발위원장과 마을 주민들이 약간의 돈을 놓고 술을 올리며 절을 한다. 제의 의식이 끝나면 달집에 점화하고 주민 모두 술과 고기를 나눠 먹으며 풍물을 치는 치배들을 따라 달집 주위를 돌며 즐긴다. 이때 헌옷 등 액(厄)이 붙을 만한 것들을 가져와 함께 태우기도 한다.
•큰산제당 : 양악마을에서 남동쪽으로 3.2㎞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높은 바위 절벽에 고목이 된 박달나무가 뿌리를 박고 자라고 있고, 앞에는 댕강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매년 음력 초사흗날 새벽에 이곳에서 산제를 올린다.
•작은산제당 : 마을 산제를 지내는 큰산제당 위로 가서 민가의 사람들이 제르르 올리지 못하도록 큰산제당 아래에 만들어준 산제당으로 마을에서 3㎞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작은 산제당 앞에는 넓은 웅덩이가 형성되어 있어 무속인들이 용왕제를 올리기 위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양악탑
양악리 산기슭 밭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2m에 불과한 화강암으로 된 소형탑이다. 본래 이곳에 ‘심방사(尋訪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전한다. 몇 차례 이전과 재건축하는 과정에서 탑재(塔材)도 손실되고, 파손도 심하나 원형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방형 지대석 위에 그보다 너비가 좁혀진 방형대석을 놓고, 그 위에 방주석(方柱石)을 제1옥신(第一屋身)으로 하고, 그 위에 옥개석(屋蓋石)을 얹었다. 옥개석 위에 방형 옥신을 놓았는데, 우주(隅柱)가 모각되었다. 이 옥신 위에는, 옥개석과 상층옥신을 하나의 돌로 새긴 탑신(塔身)을 얹었다. 옥개석 추녀 밑은 경사를 이루고, 3단의 받침이 있다. 그 위에 다시 제3층 옥개석과 제3층 옥신을 하나의 돌로 새긴 탑신을 얹었다. 옥개석 아랫면에 3단 받침이 있고, 윗면에도 1단의 괴임이 있어, 상층 옥신을 새겼다. 옥신부도 형태는 하층과 같으며, 이 위에도 제4층 옥개석과 제5층 옥신을 하나의 돌로 새긴 탑신부가 있는데, 수법형태 모두 하층과 같다. 이와 같이 옥개석에 상층 옥신을 하나의 돌로 조각한 예는 매우 희귀한 것이며, 옥신의 상부 너비를 좁혀 형성한 것도 주목된다. 고려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원양교회
이 교회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원양교회이다.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749-7번지에 있다. 1959년 3월에 창설하였고, 13년 후인 1972년에 김재수 목사의 노력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이 지역 모든 사람들의 안정을 위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고, 열과 성을 다하여 노력하고 있다.
교회의 대지는 200평이며 교회 건물은 27평 1동과 부속 건물이 있다. 교도수는 70년대 중반에는 100명이 넘었으나 인구의 감소로 현재는 20여 명으로 줄었다.
5)유적과 전설
■ 유적
•토옥동절터
심방사지로 전해지는 곳은 댐이 건설된 곳에서 북쪽으로 시루봉을 향하여 이어지는 골짜기에 있는 편평한 대지로 규모는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주변에는 기와편과 토기편이 산재하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통일신라 때 창건된 것이라고 하나, 지표 수습된 유물을 보면 고려시대를 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사지에서 석조불이 출토된 바가 있는데 이를 마을 내의 민가에 버렸고 양악탑은 이곳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돌무더기 : 마을 맨 윗집(박춘용씨 집)을 두르고 있는 돌담 뒤안을 보면 직경 2m, 폭 1m, 높이 0.7m 가량의 정교하게 쌓은 돌무더기가 있다. 위에는 입석을 세웠는데 이와 같은 돌무더기가 현재 마을회관 뒤와 원양교회 위에도 있었다고 하는데 어떠한 기능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토골 집터
양악댐 상단부 외용골 앞에 있는 유적으로 1990년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집터는 댐이 축조된 곳에서 직선거리로 60m 남짓한 곳에 동서방향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6.25 한국전쟁 전까지만 하더라도 토골이라는 마을이 있었고 당시 하천 건너 논과 원양들의 약간의 논까지 경작하며 살았다고 한다. 집터에서 시루봉으로 향하는 북쪽 골짜기에는 ‘심방사’라 전하는 절터가 자리하고 있어 이와 관련된 집터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유구는 파괴가 심하여 전체적인 형태는 알 수 없으며, 다만 구들과 돌쩌귀와 같은 할석 유물 등이 파악되었을 뿐이다. 유물은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토기편, 자기편,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점골 야철지
점골은 양악마을에서 토옥동 계곡을 따라 5.1km 쯤 올라가면 나오는데, 남동쪽에 있는 월성치를 통해 금강과 황강 유역을 직접 연결해 주는 동서방향의 교통로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이곳은 70년대까지만 해도 10여 가구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예전에 이 마을 입구에는 ‘점터’라고 불리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불먹은 흙과 함께 쇠똥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지금은 그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양악리 와요지
양악마을에서 남쪽으로 250m 떨어진 밭에 와요지가 자리하고 있다. 1998년 군산대학교박물관에서 계북면 양악리 고분군 발굴조사를 실시하던 중 양악마을의 주민의 제보로 이곳에 와요지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와요지는 동쪽 기슭을 그대로 살려 동서로 장축방향을 두었으며, 당시 소성실 중앙에 뚫린 구멍을 통해 그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는데, 소성실 바닥에는 기와편이 상당량 쌓여있었으며, 유구의 보존상태는 매우 양호한 상태였다고 한다. 조사단에서는 두 차례의 현지조사를 실시하였지만 유구가 땅 속에 묻혀 그 위치를 확인하지 못했다. 해방직후 까지도 이곳에서 기와를 구웠고 마을 사람들은 구워진 기와를 줄을 지어 짊어지고 마을 앞 도로에 내놓으면 차가 와서 싣고 갔다고 한다.
•정인승생가
양악마을 정인승 기념관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몸채는 4칸 남향집으로 행랑채는 동향으로 지어졌다. 지붕은 현재 살고 있는 주인에 의해 스레트로 바뀌었고 몸채의 마루에도 미닫이창을 달았다. 군에서 매입하여 생가복원을 하려 했으나 현재 주인과의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생가복원을 미룬 채 남아 있다. 생가 앞에는 정인승선생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정인승 기념관
양악마을 정인승생가와 담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건립되었다. 건재 정인승 선생은 1897년 양악마을에서 출생했다. 1935년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고, 한글 큰사전 편찬과 학회기관지 ‘한글’ 편집을 전담하면서 한글운동을 통해 항일애국운동을 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우리의 말글과 얼을 가꾸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용연정
19번 국도에서 양악마을을 거쳐 남동쪽으로 1.7km를 올라가면 두개의 용소와 용소를 굽어보는 높은 암벽 위에 아름드리 소나무를 주위에 두르고 우뚝 선 정자가 있다. 덕유산의 계류가 흐르면서 층암을 타고 폭포를 이루고 양변 절벽 아래 떨어져 소를 이루며, 그 언덕위에 세워진 정자를 용연정이라 한다. 양촌 정존성(陽村 鄭存聖)이 소요하던 곳으로 그의 손자 정기수(鄭基洙)가 용연정(龍淵亭)을 세웠으며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 선생의 기문과 심석 최병심(心石 崔秉心) 선생의 제액이 있다. 정면 3칸, 측변2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바로 위에 댐이 막아져 수량이 줄고 물이 마르는 날이 많아 예전의 비경을 찾을 수 없게 되었고, 특히 댐 축조 과정에서 둑이 터져 용연(龍淵)을 메우는 바람에 그 깊이도 많이 낮아졌고 을유년 8.3 수해로 인해 주변 둑을 콘크리트로 복구하여 많은 전설을 담고 맴돌던 용연의 짙푸른 신비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용연정 경내에는 양악탑을 옮겨와 보존하고 있는데 사철 그늘이 지고 취객들에 의해 시달려 석재가 많이 훼손되고 있어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야한다는 여론이 높다.
•문태서∙박춘실 의병대장 전적비
양악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문태서 호남의병대장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조인되자 덕유산을 거점으로 호남의병단을 결성하여 신출귀몰하는 병법으로 덕유산 일대에서 500여회 왜병을 섬멸하였고, 이원역 습격작전, 장수주둔 일본수비대 기습작전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나 고향 안의에서 왜병에 체포되었다가 경성형무소에서 34세로 옥사했다.
박춘실 호남의병선봉장은 1875년 장수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조인되자 의병 50여 명을 이끌고 남덕유산에 들어가 토옥동 어구 양악에서 호남의병장 문태서 장군과 호남의병단을 조직하고 장수∙무주∙진안∙안의∙함양∙거창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쳐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1913년 11월 토옥동 전투에서 결사항전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어 대구로 이송되었으나, 감옥을 부수고 동지 100여 명을 탈옥시켜 투쟁케 하는 등 끝까지 굴하지 않다가 1914년 6월 3일 40세에 옥중에서 자결했다.
•양악리 지석묘
장수와 무주를 잇는 19번 국도에서 양악마을 쪽으로 170m 가량 떨어진 곳에 양악리 지석묘가 있다. 이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를 중심으로 북서쪽 밭둑과 남쪽으로 90m 쯤 떨어진 도로변에 각각 한기씩의 지석묘가 있다. 오래 전 민가의 조성과 도로를 개설하면서 적지 않은 지석묘가 이미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 전설
•양악용소
양악마을에서 남동쪽으로 1km쯤 가면 옛날 용이 등천했다는 용소가 있다. 주위에는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물빛은 푸르다 못해 검다. 대낮에도 가까이 가기가 으스스하다. 옛날에는 명주실꾸리 두서너 개가 풀릴 정도로 깊어서 이웃 칠연소와 통했다는 말도 있으나 지금은 많이 메워졌다고 한다.
이 소에는 괴이한 말이 전해 오는데 옛날 물구렁이 두 마리가 날마다 옥황상제에게 용이 되어 등천하기를 빌었는데 한 마리는 소원 성취하였으나 다른 한 마리는 먼저 등천하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끝내 용이 못되고 이무기가 되어 소에 남아서 심술만 부리게 됐다 한다. 어느 날 마을 노인이 소(沼) 주변에 황소 한 마리를 매어 두었는데 석양에 소를 몰러 가보니 소가 없어졌다. 사방을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고 도적의 소행으로 생각했다. 오랜 뒤에 한 노인이 우연히 소의 주위를 지나다가 소가에 매어 있는 소고삐기 물속으로 당겨지는데 소는 안 끌려가려고 발버둥치는 해괴한 꼴을 보게 되자 잠시 아찔한 정신을 가다듬고 고함을 지르며 돌을 던졌다 한다. 그러자 소(沼)에서는 물결이 소용돌이치며 괴물이 꼬리를 꿈틀거리다 물속으로 사라졌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노인은 소를 몰고 마을로 와서 용 못된 이무기에게 먹힐 뻔한 소를 뺏아 온 이야기를 하자 사람들은 지난 날 도둑맞은 소가 이무기의 소행인 것을 알고 그 후부터 소(沼) 가까이에는 소를 매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가마소
양악마을에서 남동쪽으로 3.2km쯤 올라가면 큰산제당이 있고 큰산제당에서 산죽을 헤치며 하천 쪽으로 내려가면 정지골이 이어지는 곳에 사철 검푸른 물이 맴도는 소(沼)가 있다. 낮에도 혼자 서 있으면 무섬증이 이는 곳인데 이를 가마소라 한다. 가마소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에는 월성치를 넘어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고 가끔 혼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혼사가 있어 신부를 태운 가마가 월성치를 넘어 전라도로 혹은 경상도로 넘어가기도 했는데 좁은 길에서 가마가 서로 만나면 가마꾼들끼리 서로 비키라며 밀고 밀리는 양보 없는 싸움이 벌어졌다고 한다. 어느 날 전라도 신부를 태운 가마와 경상도 신부를 태운 가마가 정지골 앞 좁은 산길에서 맞닥뜨렸다고 한다. 두 가마꾼들은 서로 비키기를 요구하며 밀고 밀리는 싸움이 벌어졌는데 힘이 엇비슷해서 우열이 가려지지 않다가 그만 낭떠러지로 떨어져 깊은 물에 모두 빠져죽고 말았다고 한다. 가마꾼들이 빠져죽었다 해서 이 소(沼)를 가마소라고 했다 한다.
5) 기타
•장터거리 : 19번 국도에서 양악으로 집입하는 길을 따라 300m쯤 오르면 왼쪽으로 원양교회와 마을 사이에 너른 밭이 펼쳐진다. 밭이긴 하나 아직도 둘레 돌담 흔적이 역력하다. 이곳을 마을 사람들은 장터거리라고 부르고 전에 백이현의 저자거리였다고 전한다.
•옥터거리 : 양악마을 중간쯤에서 마을을 벗어나 당저마을로 가는 길이 있다. 원양들을 가로질러 토옥동계곡으로 올라가는 길과 사거리를 이루는데 이곳을 예전부터 옥터거리라고 불린다. 그런데 실제로 몇 년 전에 논 경지정리를 위해 땅을 파는데 가로세로 열 석자 정도의 담을 쌓았던 흔적이 박혀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옥의 담으로 추정했으나 아쉽게도 지금은 민가가 들어섰다.
•솔박거리 : 마을 앞 천변에(지금은 정인승기념관 앞)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었는데 이를 솔박거리라고 한다. 마을에 화액이 비쳐 이곳에 소나무 숲을 조성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베어지고 밭으로 사용하고 있다.
•매산바위 : 양악마을에서 1km 쯤 올라가면 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자마자 양악호의 둑에 다다르기 전에 심하게 휘어지는 오른쪽에 작지만 힘 있게 솟아있는 바위가 있다. 여기에 매가 살았다 하여 매산바위라 한다.
•밤나무거리 : 정인승기념관 맞은편 양악천 건너에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크고 울창한 밤나무 숲이 있었다. 해마다 단오날이면 마을 장정들이 굵은 동아줄을 꼬아서 그네를 매줬고 아낙들은 양기 충천한 오월의 하늘에 여인네의 치맛자락을 맘껏 펄럭였다고 한다.
•우풍나무거리 : 지금은 양악호에 수몰되어 보이지 않지만 독종골 앞에 나뭇꾼들이 지게를 받쳐놓고 쉬면서 목공을 가지고 놀이를 할 만큼 너른 묏불이 있었는데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양악송어장 : 1987년에 양악마을에서 남동쪽 3.7km 지점에 토옥동계곡의 물을 이용하여 준공한 송어와 산천어 양식장이다. 지금은 양식과 더불어 즉석에서 회 요리를 해주는데 맛이 널리 알려서 명소가 되고 있다.
제보자와 제보내용
•장재선(남, 68세), 마을개발위원장, 양악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거주, 역사, 골짜기, 지명, 전설, 유적
•오인국(남, 61세), 현재 마을이장, 양악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거주, 역대이장, 지명, 성씨분포
•오성택(남, 72세), 전 마을이장, 양악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거주, 역대이장
•김광용(남, 57세), 양악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거주, 민속
•정진쇠(남, 59세), 전 마을이장, 양악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거주, 역대이장
•신영철(남, 74세), 전 마을이장, 양악에서 태어나 현재는 안성 거주, 역대이장,지명
첫댓글 양악마을에 유적지와 유서 깊은곳이 많이 있군요 수고 많으십니다
수고하십니다 바우님! 쉬어야 할 방학기간동안 이렇게 좋은일 하시니 복 받으실거예요.2006년도 주민자치 홍보위원으로 너무 많이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양악하면 너무도 잘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정인승생가와 토옥동 계곡 때문이었나 봅니다 한 마을씩 알아가면서 계북인의 자부심이 느껴지고 다음 마을이 기대 돼기도 하네여 다음 마을 또한 예시해 주심 기다리는 마음이 더 설랠것 같은데요? 들리시나요? 기립박수 보냅니다
대단하십니다,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