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해미읍성[瑞山海美邑城]
서산에 위치한 해미읍성 중 진남문 우측 성벽이다. 2009년 촬영.
유형시대성격건립시기·연도규모(면적)소재지소유자관리자문화재 지정번호문화재 지정일
유적 |
조선/조선전기 |
성곽, 읍성 |
1491년(성종 22) |
19만 6381㎡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6 |
국유, 사유 |
서산시 |
사적 |
1963년 1월 21일 |
정의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있는 조선전기 에 축조된 석축 성곽. 읍성. 사적.
내용
해미는 1414년(태종 14)에 충청병마절도사영이 덕산(德山)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뒤 1651년(효종 2)에 청주로 이전할 때까지 군사전략상 중심지였다. 읍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조되었으며, 영장(營將)이 머물면서 서해안 방어를 맡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당시 절도사영이 해미현의 동쪽 3리에 자리하였는데,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는 3,172척이고, 높이는 15척이며, 우물 3곳과 군창(軍倉)이 설비되어 있다고 기록되었다.『해미읍지(海美邑誌)』에는 성벽의 둘레가 6,630척이고, 높이가 13척이며,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雉城)이 380첩(堞)이며,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서 성문 앞을 가려 쌓은 옹성(甕城)이 2곳이라고 하였다. 또한 남문은 3칸인데 무지개 모양의 문인 홍예(虹霓)와 2층의 다락을 두었다고 하였고, 동문과 서문은 3칸이지만 북문은 없다고 하였으며, 우물이 6곳으로 성 밖에는 호(壕)가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설치된 충청병마절도사영과 해미읍성은 별개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순신(李舜臣)이 1579년(선조 12)에 충청병마절도사영에서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로 근무한 적이 있다.
현재 성벽의 둘레는 2㎞ 정도인데, 남문인 진남문(鎭南門)과 함께 동문·서문이 있다. 성 안에는 동헌(東軒)·어사(御舍)·교련청(敎鍊廳)·작청(作廳)·사령청(使令廳) 등의 관아(官衙) 건물이 분포해 있다. 해미읍성은 현재 전하는 우리나라의 읍성 가운데 가장 잘 남아 있는 유적이다. 읍성의 표본으로 삼기 위해서 성 안에 자리하였던 민가와 학교 등을 철거하고 연차적인 보수 공사를 실시하였다. 곧 1974년에는 동문과 서문을 복원하였고, 1981년에는 성 안의 일부 지역을 발굴하였다. 그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客舍)터가 확인되었고, 현재의 아문(衙門)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터가 발견되었으며, 관아를 둘러쌌던 돌담의 자취도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문화재대관』(충청남도, 1985)
『해미읍성내건물지발굴보고서』(충남대학교박물관, 1981)
『문화재대관』사적편(문화재관리국, 1976)서산군지』(서산군지편찬위원회, 1975)
「조선시대 ‘해미읍성’의 축성과 기능변천: 충청병영성에서 호서좌영으로」(임선빈,『역사와 담론』58, 2011)
출처:서산 해미읍성 [瑞山海美邑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10-10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