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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니체의 등장 p.169
1996년에 톰 울프(Tom Wolf)는 [포브스(Frobes)]에 발표한 "미안합니다만, 당신의 영혼은 방금 죽었습니다.(Sorry, But Your Soul Just Died)"라는 글에서 신경과학의 놀라운 발견들을 언급하면서, 2006~2026 기간에 새로운 니체가 나타나 "자아는 죽었다(The self is dead)"라고 선언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톰 울프는 2016년 현재 미국 펜실베니아 주지사이다.) 니체가 1885년에 "신은 죽었다.(God is dead)"라고 선언한 것에 빗댄 표현이다. 1885년이라는 해는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지 불과 26년 후이며, 1883년에 사망한 다윈의 자서전이 출판되기 겨우 2년 전이다. 다윈은 자서전에서 기독교 神에 대한 믿음을 버렸음을 처음으로 고백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두 거장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부터 신궁(神宮)으로 진격하여, 독립적인 신(神)을 죽인 것이다. 한 사람은 사변적(思辨的)으로, 다른 한 사람은 실증적(實證的)으로. 이들은 본시 신을 섬기는 기독교 신자였으므로, 사실은 신을 弑害(시해)한 것이다. 서양 지식인들은 19세기가 되어서야 '신'을 죽였고, 이제야 '자아'를 죽일 조짐이다.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신공ㆍ아공-神空ㆍ我空이다. 사람의 영혼은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신이 만든 것이므로 신의 죽음과 동시에 사라졌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영생을 사랑하는 인간의 욕망은 질기고 질긴 원초적인 욕망인지라, 신이 사망한 후에도 지금까지 꿋꿋하게 살아남아 있다) 이들은, 아미 2,500년 전에 부처님이 신(神)과 자아(自我)를 한꺼번에 죽여 버렸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 배달민족은 이 위대한 부처님의 무아론(無我論)을 버리고, 거꾸로 미개한 유아론(有我論)으로 후진하는가? 무슨 연유로, 과학문명이 선사하는 환한 빛을 피해서 어두운 몽매주의(蒙昧主義)의 동굴로 기어들어가는가?
기독교 『신약』에서 예수는 말한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쓸 곳이 없다." 그렇다! 불교가 무아론(無我論)이라는 고유한 정체성을 잃으면 어디다 쓸 것인가? 그냥 힌두교로 흡수되고 말 것이다.
유물론
35억 년 전에 정신(精神)은 어디 있었나? p.171
흔히, 유심론자(唯心論者)들과 유신론자(有神論者)들은 '마음에 관한 과학적인 연구'와 '종교에 대한 과학적인 비판'을 유물론(唯物論)이라고 공격하고 비난한다.
유아론자(有我論者) 눈에는 부처님은 유물론자(唯物論者)
그런 식으로 비난한다면 부처님도 유물론자이다. 인간을 5온(五蘊)의 무더기라고 선언하고, 아(我=아트만=영혼)는 五蘊 안에도, 五蘊 밖에도, 五蘊 중간에도 없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외도(外道)들은 그때까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소중한 아(我=아트만=영혼)을 잃어버린 듯, 강탈당한 듯, 공포와 분노를 느꼈다. 목련존자, 부루나존자, 용수보살 등의 부처님 제자들이 外道들에게 살해당한 이유이다. 현대의 기독교인 등의 有神論者들이 불교의 無神論과 無我論을 듣고는, '우리가 하나님의 고귀한 창조물이나 자식이 아니라면,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조차 없다면 우리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냐'라고 분개하는 것과 동일한 현상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무아(無我)'를 설하면 저들은 가지고 있던 '我'를 잃어버릴(린) 듯이 공포를 느낄 것(대열반경. 若說無我,衆生聞已,生大恐怖)이다."라고. 필자의 기독교인 제자 한 사람은 필자를 통해 접하게 된 '진화론과 불교' 양자에 기초한 '무아론'에 충격을 받고 고백했다. 어제까지 하나님의 품 안에서 누리던 安樂함과 安全함이 이제 사라져버렸노라고. 그래서 뭔가 아주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느낌이라고.
바로 부처님 당시의 外道들이 받은 충격이 그러했을 것이다. 흑백의 사람들이, 풀처럼 빼곡히 돋아난, 거뭇한 삼각형의 대지 위로, 하얗고 까마득하게 솟아오른, 거대한 히말라야 산들과, 힘찬 갠지스강과, 광대한 데칸고원과, 광활한 인도양을 천둥ㆍ번개ㆍ바람ㆍ빛으로 다스리는 위대한 神들을 잃어버린 느낌. 그들의 面前에서, 지고의 성스러움과 표현할 길 없는 신비감에, 영혼(靈魂)이 통째로 흔들리는 경험을 잃어버린 느낌. 우주 크기의 거대한 힘을 지닌 神들에 대한 찬가가 갑자기 그 모든 신성함, 웅장함, 예술성을 잃고 땅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아무것도 아닌 헛소리나 픽션으로 변해버렸다.
이 일은 그 빡빡머리 沙門(sramana)이 저지른 일이다. 갑자기 不仁한 天ㆍ地 사이에 내던져진 황량함, 불안, 쓸쓸함이 해일처럼 거세게 몰려온다. 부처님은 참 못할 일을 하셨다. 깊은 동굴 속 질긴 어둠에 묻혀 있는, 아직 잠이 한참 덜 깬 사람들에게 날카롭고 눈부신 탐조등(探照燈)을 비추어대다니. 그것도 아리안족의 최신형 탱크 탐조등을!
아마, '마음은 (분리되어, 독립하여, 별개로) 따로 없다'라는 뇌(腦) 과학의 선언은, '마음은 물질과 연기(緣紀)하지 않는다'라는 마음 독존주의자(心獨存主義者)들에게도 똑같은 충격을 던질 것이다. 하지만 '중력은 물질(higgs particle : 질량 힉스입자)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과 같은 말인데, 뭐 그리 놀랄 일이란 말인가?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중력만 존재할 수 있는가? 뇌가 없는 공간에 정신작용만 존재할 수 있는가? 눈이 없는 공간에 보는 기능만 남아있을 수 있는가? 봄(seeing)은 대상, 눈, 시신경 삼자의 연기 작용이 아닌가? (정확히 얘기하자면 봄은 대상, 눈, 시신경, 뇌 4자의 연기작용이다.
현대 뇌 과학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뇌는 '눈이 보지 않은 것을 만들어내서' 없는 것을 보게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뇌는 '눈이 보고 있는 것'을 안 보이게 하기도 한다.) 뇌나 시신경이 사라지고 나면, 어디 따로 '봄(seeing)'이 있다는 말인가? 만약 따로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아(我)가 5온(蘊) 밖에 존재한다는 주장이나 다를 바가 없다.
어떤 사람은 '대상이 없어도 볼 수 있다'라는 증거로 꿈을 든다. 하지만 시각중추에 이상이 생겨서 갑자기 색깔을 못 보게 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꿈도 흑백으로만 꾼다. 그러므로 꿈이란 대상이 없이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찍은 비디오는 실물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원래 대상이 없이도 모니터에 상영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체 비디오에, 즉 우리 마음에 보관된 영상을 보는 것이 꿈이다. 또 꿈은 저장된 기존의 영상을 이용해서 새로운 영상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생체 컴퓨터 그래픽이다. 꿈은 한 마음이 다른 마음이 저장한 것을 기초로 만들어낸 영상을 제삼의 마음이 보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눈이 없어도 볼 수 있다'라면서, 그 증거로서 독창적인 이론을 내놓는다. 눈이 없어도 깜깜한 것을 본다는 주장이다. 눈을 감으면 눈앞이 깜깜하다는 경험으로부터 유추한 주장이다. 시신경이 파괴된 맹인에게는 '깜깜하다' 또는 '검다'는 느낌조차 없다. 깜깜하다는 것은 시력이 정상인 사람이 눈을 감거나 또는 암실 같은 어두운 곳에 들어갈 때 생기지, 시신경이 완전히 파괴된 맹인에게는 생기지 않는다. 정상인의 동공으로 들어오는 빛이 (전혀 또는 거의) 없을 때, 디폴트-(기본설정)로 설치된 것이 검은색이다. 검은색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부재(不在) 현상일 뿐이다.
귀머거리 역시 무음(無音)을 듣는 것이 아니라, 아무 소리도 못 듣는 감각의 부재(不在)가 있을 뿐이다. 마음 독존주의(心獨存主義者)들 또는 마음 탈연기주의자(心脫緣起主義者-마음은 물질과 연기하지 않는다)들이 뇌 과학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은) '마음이 눈ㆍ귀ㆍ코ㆍ혀ㆍ피부ㆍ뇌가 없이도,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촉감(觸感,touch)하고 생각(지켜보는 등의 일체의 정신작용)할 수 있다'고 믿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물질의 창발(創發-처음으로 창조적으로 일으킴)적 현상
우주의 일체 모든 것을 프셀루트가 한다고 하면 믿겠는가 p.174
부처님의 (인간적인) 고민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 『초기 경전』이다. 부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너무 어려워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해 결국 자신만 쓸데없이 고생하지 않을까'라고 우려했다.
과학적 종교인들과 따뜻한 유물론자들의 주장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은 물질의 '창발적(創發的)인' 성질이라는 것이다. 컴퓨터는 기계 즉 물질이지만, 우리 눈을 속이는 컴퓨터그래픽을 만들어 우리를 거친 '명량'의 바다로 인도하여 울돌목과 같이 울게 한다. 배달민족의 한(恨)에, 그리고 못난 임금과 못된 지배계층 아래서 지옥 고(苦)를 겪는 백성의 고통에, 잠 못 이루는 성웅(聖雄) 이순신과 같은 마음이 되어서. 아무리 기계가 만든 컴퓨터 그래픽이지만 우리의 감정까지 거짓일 리 있으랴. 영화 「명량」은 우리로 하여금, 컴퓨터라는 기계가 만들어낸 컴퓨터 그래픽이 아니었다면 느끼기(하기) 힘든, 민족을 위해 위대한 희생을 한 고인에 대한 추모와 우리 후손들을 위한 우리 자신의 희생을 결의(決意)하게 만든다.
유교(儒敎)는 유물론이라 할 수 있지만, 무수한 아름다운 시와 그림 등의 예술품을 남겼다. 맹자(孟子)는 백성을 괴롭히는 무도한 왕은 (天命을 받은 天子가 아니라) 필부(匹夫)에 지나지 않으므로 (죽이고) 내쫓을 수 있다는 위대한 인본주의 사상을 만들었다. 孔ㆍ孟을 추종하는 유가들은 사후에 존재하는 영혼(靈魂)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후에 혼(魂)은 하늘로, 그리고 백(魄)은 땅으로 흩어지면 그걸로 끝이다. 3년 걸려서 육신(肉身)에서 분리된 혼백(魂魄)이 완전히 사라지면 그걸로 모든 것이 끝난다.
모든 종교는 다른 종교에 대한 유물론 p.175
모든 종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 유물론이다. 하지만 지극히 높고 아름다운 사랑(생명과 이성과 진리에 대한)과 예술품을 생산한다. 리처드 도킨스(영국의 동물행동학자, 진화생물학자 및 대중과학 저술가)가 어떤 기독교인에게 물었다. 중동 사람들이 이슬람교도로 남는 것과 무신론자가 되는 것, 이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선호하느냐고 물었다. 그 기독교인의 대답은 놀라웠다. '중동 사람들이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 일화는 '한 종교는 다른 종교에게 무신론보다도 못하다'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안전하게 말할 수 있다. '한 종교는 모든 다른 종교에 무신론이자 유물론이다'라고. 그리스 神들을 믿은 사람들은 유물론자인가. 유신론자인가? 고대 게르만족과 바이킹족의 神인 토르(Thor)를 믿는 사람들은 유물론자인가. 유신론자인가? 토르는 청둥, 번개, 폭풍, 전쟁을 관장하는 북유럽의 神으로서 인도의 인드라(Indra-제석천, 桓因-환인)에 대응되는 神이다. 토르는 영어에 목요일(Thursday =Thor's day)로 남아있다. 영원히. 북유럽신화의 主神 보탄(Wotan)을 믿는 사람들은 유물론자인가? 유신론자인가? 보탄(Wotan)은 영어에 수요일(Wednesday = Wotan's day)로 남아있다, 영원히.
태양신을 믿은 아즈텍인들은 유심론자인가. 유물론자인가? 기독교 『구약』의 야훼와 가나안 지역(지금의 이스라엘ㆍ레바논ㆍ요르단ㆍ시리아 지역)의 몰록(Moloch) 神에게 바친 인신공희(人身供犧)는 유물론인가. 유심론인가? 희생자들에게 제관들은 악마에 지나지 않는다.
★ 무기인 망치를 든 토르 : 망치는 인드라(제석천)의 금강저에 해당한다. 이 망치에 얻어맞아 죽지 않으려면 토르를 믿고 따라야만 한다. 즉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모든 종교의 벌은 이 망치질에 해당한다.
★ 아즈텍의 인신공희 : 태양신에게 펄떡펄떡 뛰는 사람의 심장을 바쳤다. 그림 왼쪽 위의 붉은 것이 심장이다.
800만 가미를 믿는 일본인들은 유심론자인가. 유물론자인가? 전범(戰犯)을 전신(戰神)으로 모시는 일본인들은 유심론자인가. 아니면 유물론자인가?
십자군은 이들의 희생자들에게 악마보다 더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특정 종교 경전상의 악마는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나(사실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엄청나게 크다. 거의 1에 가깝다), 십자군이 저지른 짓은, 악마의 존재와 관계없이, 사악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ㆍ이슬람교ㆍ유대교ㆍ마니교ㆍ조로아스터교ㆍ부두교ㆍ힌두교ㆍ불교의 악마가 동일인일 리가 없으므로 특정 종교의 악마가 존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뿐만 아니라 힌두교와 불교의 악마는 귀엽고 인간적인 측면까지 있다.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으려는 순간, 이 우주에서 가장 자극적인 즐거움을 제공하는 욕계 제6천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왕 마왕파순(魔王波旬) 은 큰일 났다 싶어서 급히 자기 딸 세 명을 보내 부처를 유혹했다. 그게 통하지 않자 우레 폭우 마귀들을 보내 위협도 해보았지만 별무신통이라, 마지막으로 통 크게 이 세상을 통째로 주겠노라고 회유했지만, 그것마저도 실패했다. 마왕파순은 "그대가 깨달음을 포기하면 나는 세상을 포기하겠노라"라고 빅딜을 제안했지만 먹히지 않은 것이다. (믿을 게 따로 있지, 악마 말을 믿을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참 잘 넘어간다. 왜냐하면 마왕파순이 우리에게 친숙하기 이를 데 없는 5蘊(온)의 모습으로, 즉 우리 몸과 마음의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담한 마왕파순은 중얼거린다. "죄다 넘어가는데, 이 어찌 된 일인가?" 큰 솥을 걸어놓고 끓여 죽이겠다거나 거열형이나 능지처사 형을 가하겠다고 위협을 하는 대신에, 먼저 아름다운 자기 딸들을, 그것도 셋씩이나, 보내 먼저 유혹하다니, 참으로 인간적인 악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위협이란 게 고작 천둥ㆍ폭우라니 정말 귀여운 악마이다. 그러니 더욱, (한 종교의 악마는 다른 종교의 악마와) 같은 존재일 리가 없다.
80세 노구(老軀) 부처님이 음식을 잘못 드시고 중병에 걸렸을 때, 악마는 부처님에게 당장 돌아가시라고 권한다. 가르침은 잘 전해지고 제자들은 공부를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말고 어서 죽으라는 것이었다. (우리 마음의 악마는 항상 엄청난 설득력을 대동하고 그럴듯하게 나타난다) 죽음에 임한 스승으로서 어찌 제자들에 대한 걱정이 없었을까? 부처는 '서둘지 말라'고 악마를 꾸짖으며, 석 달 뒤에 열반하겠노라고 한다. 아무튼 부처를 이 세상에서 빨리 제거하려는 자신의 악심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내미는 악마가 귀엽지 않은가?
유물론이란 인간의 자비와 지혜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믿지 않는 것 p.178
유물론이란 인간의 아름다움과 선함(사랑ㆍ자비)과 진실함(진리를 추구하는 마음)과 이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믿지 않는 것이다. 유신론이라도 또 유심론이라도 이런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면 유물론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세기독교는 유물론이다. 그 외에도 모든 근본주의적인 종교는 유물론이다. 이들이 섬기는 신이나 마음은,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은 그리고 얼음처럼 얼어붙은 물질이지, 낭창낭창 유연해서 무한한 변화를 허용하며 우리 유한한 능력으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무한한 방향으로 진화하는 창발성(創發性)이 아니다.
원자를 인정한다고 분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원자에는 부드러움, 맛, 냄새, 촉감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의 고유한 성질이 존재하지 않는다. 분자가 되면 갑자기 그런 성질들이 나타난다. 진공묘유(眞空妙有)이다. 그렇다고 해서 원자가 뭉쳐 분자가 되는 데 마음이 개입한 것이 아니며, 원자에는 없는 성질이 분자에 생기는 데 마음이 개입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예전처럼 누구나 하나같이 모를 때면 뭐든지 신의 뜻으로 둘러치면 되었으나, 신이, '과학 문명과 인식'의 발달에 따라 세상일(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차츰 설명됨에 따라, 변경으로 무한히 밀려나듯이 마음도 변경으로 밀려난다. 무한한 소실점(消失點)으로. 원근법의 소실점으로. 원근법(遠近法-일정한 시점에서 본 물체와 공간을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이 멀고 가까움을 느낄 수 있도록 평면 위에 표현하는 방법)은 실로 위대한 발견이었다. 이 발견으로 이차원 평면의 그림이 갑자기 삼차원 물체의 입체감을 갖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 원근법이 바로 과학과 진화론이다. 과학의 발전은 신(神)을 물질세계에서 쫓아냈으며, 진화론의 발견은 신(神)을 생명세계에서 쫓아냈다. 그리고 진실한 의미에서 다차원의 입체적인 신비를 드러냈다.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신비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은, 과학자들의 '물질의 마음에 대한 영향력'에 대한 연구를 유물론이라고 공격한다. 뇌 이외에 생각하는 기능이 따로 있다는 주장이다. (고대 이집트인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하는 기관은 심장이라고 믿었다) 그 따로 기능하는 놈은 왜 뇌가 망가지면 기능하지 못하는가? 뇌가 즉 뇌 시각중추가 망가지면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백 보 양보해도 그놈은 시각기관(眼根)ㆍ시각 대상(眼境)과의 연기(緣起)관계에 있으므로 그놈은 그냥 안식(眼識)이라 해도 그만이다. 즉, 그놈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부처님은 識을 초월적인 의미로 사용하신 적이 없다) 나머지 5개의 識인 이ㆍ비ㆍ설ㆍ신ㆍ의(耳ㆍ鼻ㆍ舌ㆍ身ㆍ意)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놈은, 육식을 뭉뚱그려서 지칭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바로 뇌 신경세포들의 작용이다!
연기법을 초월한 신성한 마음 p.179
마음 탈-연기주의자(心脫緣起主義者)-마음은 緣起法을 벗어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부처님 당시의 베다교도들과 다를 바가 없다. 緣起세계를 초월한 不生不滅의 실체적인 마음의 존재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런 마음을 '참나'라 하고, 혹자는 '眞我'라 하고, 혹자는 '主人公'이라 하고, 혹자는 '注視하는 놈'이라 하는데, 오래전에는 '昭昭靈靈(소소영령)한 놈(그 자리)'이라고 했다. (중국인들이 불교를 받아들일 때 처음에는 불교를 잘못 이해해서 불교를 일종의 '神不滅論:영혼불멸론'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이 殘影(잔영)이 소소영령한 놈으로 남은 것이다. 이런 경향은 僧(승) 신수 사후의 북쪽 불교가 아니라, 僧(승) 혜능 사후의 남쪽 불교에 심했다. 이는, 神秀가 마음을 맑은 거울에 비유했지만 慧能은 그런 거울은 없다고 주장한 점을 볼 때, 참으로 아이로니컬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이 가장 전형적으로 묘사된 것이 남쪽 통도사에 주석하며 일세를 風靡(풍미)한 鏡峰(경봉)스님-1892~1982)의 발언이다.
"참으로 나(참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몸을 운전하고 다니는 '소소영령한 그 자리'가 바로 곧 나의 몸을 운전하고 다니는 운전수요 나의 '주인공'인 것이다."
이 문장에는 참나, 소소영령한 자리, 주인공이라는 '있다파(新有部)'의 주요한 세 단어가 모두 나타난다. '주인공은 몸(기계)을 운전하고 다니는 운전사(유령)이다'라는 경봉 스님의 이 발언은 서구의 데카르트적인 '기계속의 유령(ghost in a machine)'의 불교적인 환생이다. '있다파'의 사상을 간결하고 충실하게 표현한 명문 중의 명문이다! 그리고 경봉 스님을 비롯한 선인들의 이런 종류의 발언들은 現(현) 조계 종정 진제 스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용하는 참나와 眞我의 기원이다. 이들은 참나, 진아, 소소영령한 놈(자리) 등의 '불생불멸의 실체론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무아론(無我論)의 적자(嫡子)인 '없다파(舊無部ㆍ舊無我派ㆍ緣起派)'를 마구 맹렬하게 공격한다. 唯物論자라는 주홍 글씨를 씌워서.
도대체 얼마나 소중한 걸 지니고 있기에 잃어버릴까 봐 저토록 조바심을 낸다는 말인가? 본시 잃어버릴 것이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無我論인데, 도대체 무엇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六祖 慧能 스님이 말씀하셨듯이 '本來無一物(본래 한 물건도 없다)' 아닌가?
출처 : 강병균 교수 역저. 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
첫댓글
오늘도
웃음으로 시작해서
행복으로 가득 채우는
즐거운 하루 되시기를 기원 합니다^^*
인간과 다른 동물의 결정적 차이는 思惟(사유)하는 능력의 有無와 차이입니다.
연기를 眼根(안근), 眼境(안경), 眼識(안식)의 3자의 상호 작용으로만 이해하면 이중표 교수 같은 사람이 새로운 불교 종파를 만들고 거기에 빠져드는 신도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강병균 불자와 이중표 종교 장사꾼의 차이입니다.
“봄은 대상, 눈, 시신경이 서로 인연(因緣)이 되어 일어나는 작용이 아닌가? 정확히 말하면, 봄은 대상, 눈, 시신경, 뇌의 상호작용으로 성립하는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