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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입문
제1장 절을 찾아서
1. 불자의 자세와 행동
불교에 입문하여 부처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불자라면 행동이나 마음 가짐이 예전과는 달라야 한다. 부처님 말씀에 어긋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는지, 부끄러운 불자는 아닌지 늘 깨어있는 마음으로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불교에는 불교만의 예절과 의례가 있다. 처음 불교를 접하는 불자들에게 108배 등의 절 수련이나 경전 독송, 참선 등이 낯설고 어색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 예절의 근본정신은 부처님을 생각하고 그 가르침을 되새기며 행하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에 불교 예절을 익히고 행하는 것이 깨달음을 향한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불자는, 아침에는 하루를 참되게 보내겠다는 발원으로 시작하고, 잠자리에 들 때는 원망이나 미움을 품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해야 한다. 음식을 먹을 때도 먼저 합장하고 감사한 마음을 내며 온 생명을 살리는 정신을 마음 속 깊이 새기고, 맛에 탐닉해서 과식하지 말아야한다. 후회되는 일이 있거나 삿된 유혹에 흔들릴 때, 우환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스님께 상담하는 것이 좋다. 삼보에 귀의한 불자로서 평상시 모든 행이 겸허해야 하며, 특히 수행 도량인 절에서는 더욱 정숙하고 경건해야 한다. 행동과 자세는 마음을 담은 몸짓이기 때문이다. 경건하고 겸허한 마음가짐은 불자의 기본자세이다.
1) 차수와 합장
차수는 수행 도량에서 합장을 하지 않고 서 있거나 걸을 때 취하는 손의 자세다. 차수는 손을 어긋나게 마주 잡는다는 뜻으로, 왼손 손등 부분을 오른손으로 가볍게 잡는 것을 말한다. 서 있을 때는 차수한 손을 하단전 부분에 자연스럽게 갖다 대고, 앉아 있을 때는 차수한 채로 무릎 위에 단정히 올려놓으면 된다. 이 때 왼손과 오른손이 바뀌어도 괜찮다.
합장은 불자들이 가장 많이 취하는 자세로, 인도의 전통 인사법이다. 두 손바닥을 마주 대서 합하는 것을 합장이라고 하는데 마주 닿은 손바닥 사이에 틈이 있거나 손가락 사이가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두 손을 모아 마주하는 것은 마음을 모은다는 뜻이며, 나아가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 하나의 진리로 합쳐진 한 생명이라는 뜻을 담고 또한 상대를 존중하는 의미도 있다.
합장은 법회등 불교 의식이나 의례 때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자세이다. 불자끼리는 합장한 채 머리를 숙여 반배하고 상대방에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인사한다. 합장은 서 있거나 앉아 있을 때 취할 수 있다.
동작으로 볼 때는 차수에서 합장, 또는 합장에서 차수로 연결되어야 자연스럽다. 수계식 때에는 장궤합장을 하는데, 무릎을 바닥에 대고 다리를 세운 채 합장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차수
합장
2) 좌선 자세와 꿇어앉는 자세
좌선 자세는 앉아서 참선할 때의 기본자세이다. 부처님을 비롯하여 역대 위대한 수행자들이 이 자세로 수행 하셨고, 오늘날의 수행자들도 이 자세로 앉아 용맹정진한다. 좌선 자세에는 결가부좌와 반가부좌가 있다. 결가부좌는 오른쪽 다리를 왼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왼쪽 다리를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자세이다. 이 때 두다리를 허벅지 깊숙이 올려놓아야 자세도 안정되며 오래 유지할 수 있다. 반가부좌는 좌복 위에 앉아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위에 올려놓거나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위에 올려놓는다.
결가부좌
꿇어앉는 자세는 독경이나 염불을 할 때 주로 취한다. 오래 유지하기는 어렵지만 예경이나 축원을 할 때는 건강에 이상이 없는 한 이 자세를 취해야 한다. 무릎을 꿇고 앉을 때는 절할 때처럼 오른발을 밑에 두고 그 위에 왼발을 엑스(X)자로 올려놓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힘든 자세임을 감안하여 각자의 습관대로 발을 바꾸거나 두 발을 나란히 놓는 등 편하게 해도 좋다. 끓어 앉는 자세를 취할 때는 허리를 곧추세워 몸의 평형을 유지해야 한다.
꿇어앉는 자세
3) 절의 의미와 공덕
절은 불교 의식 때 가장 많이 하는 동작이다. 삼보(불. 법. 승)에 대한 예경과 상대방을 존경하는 마음의 표현이며,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하심(下心)의 수행방법 중 하나이다. 절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수행법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으며, 참회나기도의 방법으로 108배 1080배, 3000배 등을 한다.
예부터 절을 많이 하면 건강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남들에게서 신뢰와 호감을 얻으며, 스스로 두려움이 없어지고, 부처님께서 항상 보호해주시며, 훌륭한 위엄을 갖추게 되고, 죽어서 극락에 태어나며, 마침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1) 반배(半拜) 또는 합장저두(合掌低頭)
삼보에 예경을 올릴 때는 큰절을 하는 것이 원칙이나, 다음의 경우에는 반배를 한다.
★ 절 입구에서 법당을 향하여 절할 때
★ 길에서 스님이나 법우를 만났을 때
★ 법당 밖에서 법회를 할 때
★ 야외에서 법회를 할 때
★ 동참 대중이 많아서 큰절을 올리기 적합하지 않을 때
★ 3배나 108배, 3000배 등의 오체투지를 하기 전과 마친 뒤
★ 부처님께 헌화를 하거나 향, 초 등의 공양물을 올리기 직전과 올린 뒤
★ 법당에 들어가거나 나오기 전
★ 기타 필요 시
(2) 오체투지
삼보에 예경을 올릴 때는 오체투지의 큰절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오체는 몸의 다섯 부분인 두 팔꿈치와 두 무릎, 이마를 말한다. 오체투지는 몸의 다섯 부분을 땅에 닿게 엎드려 하는 절이다. 온몸을 땅에 던져 절을 하면서 공경하는 이를 마음 속 깊이 받는 것이다.
오체투지
접족례
오체투지하는 방법은, 우리나라에서는 전통 예법인 큰절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되, 반드시 몸의 다섯 부분이 땅에 닿아야 한다. 오체투지는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상대방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하는 동작으로서, 가장 경건한 예법이다.
큰 절하는 동작을 순서대로 따라해 보자.
먼저 서 있는 자세에서 합장 반배를 한다. 그런 다음 고개를 자연스럽게 숙이며 무릎을 꿇고 앉는다. 엉덩이를 발뒤꿈치에 붙이면서 양 손으로 바닥을 짚고 오른발 왼발을 엑스(☓)자로 올려놓는다. 양 손으로 바닥을 짚을 때는 손끝을 15도 정도 안으로 오므린다. 이마, 양 팔꿈치, 양 무릎을 바닥에 대고 엉덩이는 발뒤꿈치에 붙인 자세가 오체투지이다.
접족례는 엎드려 절하면서 부처님의 발을 받드는 것으로, 마음을 다해 부처님께 존경을 표하는 행위이다. 접족례를 할 때는 손바닥을 위로하여 귀밑 높이까지 올리되 부처님의 발을 조심스레 들어 올려서 내 머리를 부처님의 발을 댄다는 기분으로 한다.
일어설 때는 엎드릴 때와 정반대 순서로 하는데, 먼저 손바닥을 다시 뒤집어 두 손을 거두고 합장하면서 다리를 풀고 본래의 자세로 일어선다.
(3) 고두례(叩頭禮)
절을 아무리 많이 한다 해도 부처님을 향한 지극한 예경의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절을 다 마치고 일어서기 전,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생각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한번 더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고두례다. 유원반배(唯願半拜)라고도 하는데, 무수히 예경하고 싶은 마음의 아쉬움을 표하는 예법이라 할 수 있다. 고두례는 3배뿐만 아니라 108배를 비롯 1080배, 3000배 등 모든 절의 맨 마지막에 올린다.
고두례는 마지막 절을 마치고 나서 일어서기 직전, 오체투지한 상태에서 고개를 들고 두 손을 얼굴 앞에서 모아 합장하는 것이다. 이 때 손끝이 약간 들리도록 하되, 머리 바깥쪽으로 나가지 않도록 한다. 그런 다음 손바닥과 이마를 바닥에 대도 일어서는 것이 고두례이다.
고두례
고두례
4) 사찰예절
사찰은 부처님을 모시는 신성하고도 장엄한 곳이다. 속세의 번뇌를 씻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곳이며,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올바른 삶을 다짐하는 곳이다. 그리고 스님들이 상주하면서 공부하고 수행하는 도량이기도 하다.
사찰에 가면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불이문을 지나는 것이 통례다. 사찰의 중심인 큰 법당에 이르는 길은 여러개가 있지만, 반드시 정해진 출입문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사찰의 들머리인 일주문을 들어서면서부터는 부처님의 도량 이므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일주문에서 법당을 향해 합장 반배를 올리면서부터 사찰예절이 시작된다. 절에서는 항상 가운데 통로를 피해야 한다. 부처님 법을 믿고 따르는 이는 항상 자기를 낮추고 다른 이를 공경해야 한다. 사찰 안에서는 경건한 몸가짐으로 좌측통행을 하는 것이 좋다. 옷차림 또한 단정해야 한다. 지나치게 노출이 심한 옷이나 생명을 경시한 모피 옷 등은 절에서는 삼가야 할 옷차림이다.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을 만나면 같은 방법으로 반배의 예를 올린다. 사천왕은 불교를 보호하는 수호신이다. 법당에 이르기 전에 역대 조사스님의 부도를 지나게 되면 역시 반배를 한다. 도중에 스님이나 법우를 만나도 합장 반배를 해야 한다.
절에 와서는 제일 먼저 법당에 들어가 참배를 하고 나서 볼일을 보는 것이 불자의 예절이다. 격을 갖춘 사찰에서는 일주문, 천왕문, 해탈문을 지나서 곧바로 올라가면 대웅전 마당에 이른다. 마당에 모신 탑전에 예배를 드리고 계단을 올라가면 비로소 법당에 이른다. 법당 앞의 탑에는 부처님 사리가 모셔져 있다. 사리를 모신 탑은 부처님의 몸과 마음을 담고 있으므로 부처님 대하듯 반배로 3배의 예를 올린다. 탑을 돌며 기도할 때는 탑을 오른쪽으로 돈다. 이것은 왼쪽보다 오른쪽을 탑을 돌며 기도할 때는 탑을 오른쪽으로 돈다. 이것은 왼쪽보다 오른쪽을 중시하는 인도의 전통 예법을 따른 것이다. 이를 우요삼잡(右繞三匝)이라고 한다.
법당 아래 계단을 오를 때는 좌측 통행을 하는 것이 좋다. 중앙계단과 좌우에 계단이 따로 있으면 좌우 계단을 이용한다. 법당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아야 한다. 정갈한 마음은 신발 벗는 태도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지팡이나 우산을 가져온 경우, 법당 벽에 기대어 놓지 않도록 한다.
5) 법당 예절
법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여러 개가 있다. 정면에 중앙문이 있고 좌우양쪽 옆에 각각 하나씩 문이 더 있다. 그리고 법당 좌우의 측면에도 문이 하나씩 더 있는 것이 우리나라 법당의 일반적인 구조다.
법당 안에는 불보살님을 모신 상단과 좌우에 신중단이 설치되어 있다. 주존불이 모셔져 있는 주좌(主座)를 기준으로 가운데 통로가 어간(御間)이고, 정면으로 난 가운데 문이 어간문(御間門)이다. 법당을 출입할 때는 어간문을 이용해서는 안 되고 옆쪽이나 좌. 우측의 문을 이용해야 한다.
법당은 부처님을 모시고 스님과 불자들이 예불하고 정진하는 신성한 장소다. 문을 열고 닫을 때나 걸을 때 정숙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기도정진에 방해가 된다. 법당 문을 열고 닫을 때는 오른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왼손으로 오른손 손목을 공손히 받쳐 잡은 뒤, 문을 약간 들어 올려서 열고 닫아야 소리가 나지 않는다.
법당에 들어서면 상단의 부처님을 향해 합장하고 반배를 올린다. 공양물을 올리거나 참배하기 위해 움직일 때는 합장한 자세로 조용히 걸어야 한다. 가운데 통로인 어간으로 다녀서는 안 되며, 부득이 어간을 지나갈 때에는 합장한 자세로 허리를 굽히고 통과한다.
향과 초는 자기 몸을 태워 좋은 향기와 밝은 빛을 중생들에게 회향함으로써 공양의 참뜻을 보여주는 공양물이다. 촛불과 향불이 이미 피워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꼭 자기가 준비한 것을 다시 올리려는 것은 불자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니며, 공양의 참의미를 망각한 행동이다. 따라서 촛불과 향불이 피어 있을 때는 자신이 준비해온 공양물을 불전에 놓고 3배만 올리고 나온다.
향을 올릴 때는 합장한 자세로 조용히 걸어가 불단 앞에서 반배를 올린다. 오른손으로 향의 중간을 잡고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받쳐 잡고, 촛불에 대서 향에 불을 붙인다. 손으로 불꽃을 끄고, 향을 이마 높이로 올려 경건한 마음으로 예를 표한 뒤 향로 중앙에 반듯하게 꽂는다. 합장한 자세로 반배하고 제자리로 돌아가서 참배를 드린다.
불단에 향 공양을 올린 다음에는 신중단으로 가서 같은 방법으로 향을 올리고 참배한다. 법당 안이 복잡할 때는 그 자리에서 방향만 틀어 참배해도 된다.
법당을 나올 때는 먼저 법당안에 다른사람이 남아 있는지 학인한다. 아무도 없을 때는 촛불을 끄고 정돈한후 나온다. 촛불을 끌 때는 손이나 촛불을 끄는 도구를 사용하고, 입으로 불어 끄지 않는 것이 예의 이다. 법당은 대부분 목조건불이므로 화재를 조심해야 한다.
촛불을 끈 다음, 뒤로 물러서서 합장 반배하고 법당을 나온다. 나올 때에도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합장한 자세로 법당 옆문으로 와서 상단의 부처님 전에 합장 반배한 후 뒷걸음으로 법당 문을 나온다.
법당을 나와 신발을 찾아 신발도, 뒷사람은 앞사람이 다 신을 때까지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자기 신발을 다 신은 뒤에는 다른 법우들의 신발을 신기 편한 자리에 옮겨 놓거나 가지런히 정리한다.
다음은 법회나 예불 등 대중들이 많은 법당에서 자주 일어나는 눈에 거슬리는 행동들을 모아 보았다.
☹ 어간에 앉는 행위
☹ 아는 사람의 자리를 미리 잡아 놓는 행위
☹ 좌복(기도할 때 쓰는 방석)을 풀썩거리며 깔거나한 손으로 던져 놓은 행위
☹ 좌복을 밟고 다니는 행위
☹ 사용한 좌복을 정리하지 않고 나가는 행위
☹ 남이 올린 촛불을 빼내고 자기가 준비한 것으로 바꾸는 행위 등
6) 법회와 예불에서의 예절
법회와 예불은 불교신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예불은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 하면서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의식이고, 법회는 부처님 말씀을 배우고 익히며 불자로서의 삶을 다짐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법회와 예불이 있을 때는 반드시 참석하여 부처님께 정성스런 마음으로 참배하고 설법에 귀 기울여야 한다.
다만 예불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러 여건상 동참하기 힘들지만, 수련회 등의 행사나 기도 · 수행 및 기타의 일로사찰에서 자는 경우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새벽 예불에 참석할 때는 도량석 목탁소리가 들리며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자리를 정돈한 다음, 맑은 정신으로 동참해야 한다.
법회는 불자 신행 생활의 중심이다. 법회를 통해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고, 불자로서의 몸가짐을 익히며, 다른 불자들과 도반의 정을 도탑게 할 수 있다. 그렇게 익힌 부처님 말씀을 이웃에 널리 전하는 것도 불자의 의무이자 도리이다. 진리를 모르는 삶은 어둠 속에서 등불 없이 길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법회는 일정한 의식에 따라 진행된다. 그러므로 법회에는 시간에 맞춰 참석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동참해야 한다. 특히 바닥에 앉은 법당 구조상 법회 도중에 들어오거나 나가는 것은 경건한 분위기를 해치기 쉽다. 설법만 들으려고 설법 시간에 맞춰 들어오거나, 또는 설법이 끝나면 바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또한 적절하지 못한 행동이다. 급한 일이 있어 어쩔 수없이 도중에 나가야할 때는 미리 출입하기 쉬운 자리에 앉았다가 방해되지 않게 움직인다.
설법 내용을 잘 안다고 해서 가볍게 여기거나 너무 어렵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아는 내용은 다시 한번 새겨서 듣고, 모르는 것은 더 공부해서 이해하려 해야 한다.
다음은 일반적으로 사찰에서 행하는 법회 식순이다. 그러나 법회 식순은 각 사찰의 전통과 특성에 따라 다를 수 있다.
1. 삼귀의례 - 삼보께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는 의례. 노래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2. 반야심경 봉독 - 지혜의 완성을 염원하며 다 함께 읽는다.
3. 찬불가 - 부처님을 찬탄하는 노래
4. 청법가 - 법사를 청하는 노래
5. 입정 - 법문 듣기에 앞서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
6. 법문 - 부처님의 교법을 간절히 듣는다.
7. 정근 및 헌공 -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정성껏 마련한 보시금을 불전함에 넣는 의식
8. 발원문 - 부처님의 교법에 따라 수행하고 실천하겠다는 원을 세운다.
9. 사홍서원 - 네 가지 큰 서원을 실천하겠다는 다짐의 노래
10. 기타 - 공지 사항
7) 스님에 대한 예절
스님은 삼보에 속하는 출가자로서 재가불자에게는 스승과 같은 공경의 대상이다. 재가자는 스님 가까이에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고, 수행자의 진정한 모습을 본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스님을 대할 때는 존경의 마음으로 합장 반배해야 한다. 불교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재적 사찰의 스님이나 평소 존경하는 스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고 법문을 들으면서 신심을 견고히 해야 한다.
길에서 스님을 만나면 그 자리에 서서 합장 반배하고 실내에서는 3배의 예를 올려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1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스님이 좌선 중이거나 경행할 때, 양치질이나 목욕할 때, 누워 있을 때는 절을 하지 않아도 된다.
스님을 모실 때는 스님과 마주 서거나 스님보다 높이 서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작게 말해도 잘 들리도록 가까이에서 모셔야 하며, 불편하게 느끼시지 않도록 주의 한다. 또한 스님이 권하기 전에는 자리에 앉지 않으며,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것이 예의이다.
큰스님을 뵙고 가르침을 얻고자 할 때는 먼저 시자(侍者)를 통해 허락을 받는 것이 절차 이다. 스님 방에 들어갈 때는 법당에 들어갈 때와 같이 행동해야 하며, 큰스님께는 3배를 올리는 것이 예의다.
스님은 재가불자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기 위해 정진하는 출가 수행자이므로, 수행에 불편함이 없도록 옷이나 음식, 약 등을 정성껏 공양해야 한다. 스님들이 더욱 정진하여 참다운 스님이 될 때 재가불자 또한 그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진정한 불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8) 공양 예절
향. 초. 꽃. 쌀. 차. 과일 등의 시물(施物)을 부처님께 바쳐 목마르고 배고픈 중생에게 회향하고, 중생의 고통을 여의게 해주는 것을 공양(供養)이라고 한다.
전통적으로 향. 초. 꽃. 쌀. 차. 과일은 육법공양(六法供養)이라 해서 중요시해 왔다.
공양(供養)이란 원래 스님들에게 수행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이나 음식을 드려 깨달음의 텃밭을 일구게 한다는 의미이지만, 삼보께 올리는 정성스러운 모든 것은 다 공양의 의미로 확대되었다. 법회 때 찬탄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음성공양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온 마음을 다해 바치는 정성스러운 공양은 삼륜이 청정할 때, 즉 받는 이, 받는 물건, 주는 이가 청정할 때 크나큰 공덕이 뒤따른다고 한다.
한편 불교에서는 밥 먹는 것도 ‘공양’이라 한다. 밥 먹는 행위도 하나의 의식이자 수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양할 때 외우는 글>
한 방울의 물에도 부처님의 은혜가 스며 있고,
한 알의 곡식에도 많은 사람의 노고가 담겨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바로 하여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발원을 세웁니다. <공양게>
<오관게>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삼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이 <공양게>에는 공양을 하는 마음가짐이 잘 드러나 있다. 즉 위로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위한 이타행을 하고자 음식을 먹는 것이다. 한 톨의 쌀이 내 입에 들어오기까지 농부를 비롯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정성과 노력이 있었는지를 살피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 때문에 밥알 하나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것이 불가의 풍습이다.
공양법에는 크게 상공양(床供養)과 발우공양(鉢盂供養)이 있다.
상공양은 일반 가정에서처럼 밥상이나 식탁에서 공양하는 것으로 공양하는 사람 수가 적을 때하는 공양법이다.
발우공양은 불교 전통식 공양법으로, 많은 대중이 같이 공양하거나 수련회 및 수행시에 한다. 대중이 함께 모여 정진하는 도량에서는 발우공양을 하는데, 여러 사람이 함께한다고 해서 이를 '대중공양(大衆供養)'이라고도 한다.
발우는 스님들의 밥그릇을 말한다. ‘발(鉢)’은 산스크리트의 음역인 발다라의 약칭이며 ‘우(盂)’는 밥그릇을 뜻하는 한자이다. 발우는 수행자에게 합당한 크기의 그릇이라는 뜻으로 ‘응량기(應量器)’라고도 번역한다.
발우공양의 절차에는 부처님과 음식을 만든 사람들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중생의 고통을 깊이 생각하고, 공양을 먹고 얻은 힘을 모든 중생에게 회향하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다.
부처님께서는 당시 인도의 수행 풍습대로 매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한 끼 공양을 하셨는데, 커다란 그릇 하나에 시주 받은 음식을 다 담아 드신 데서 유래하였다. 발우공양은 음식물 쓰레기가 심각한 환경문제로 대두된 요즘,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이 되고 있다. 불교계에서 시작해 사회 전체로 퍼져가고 있는 ‘빈그릇운동’도 이 발우공양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9) 재가불자끼리의 예절
출가하지 않고 가정생활를 하면서 불법을 닦는 이들을 재가불자라고 한다. 재가불자끼리는 00법우님, 00거사님, 00보살님 등으로 불러야 하며, 법명이 있으면 앞에 법명을 붙여 부르는 것이 예의이다. 길이나 절에서 만나면 합장 반배로 정중히 인사하고 법회 중일 때는 목례를 나눈다.
가까운 불자가 경조사를 당했을 때는 즉시 찾아가 도와야 하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함께 해결해야 한다. 재가불자 사이에 시비가 있을 때는 화합정신으로 화해해야 한다.
2. 사찰의 구조
1) 사찰의 의미
사찰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불도를 닦는 수행 도량이자 불법을 널리펴서 중생을 제도하는 전법 도량이다. 스님들은 사찰에 거주하면서 수행 정진하며 중생을 교화. 제도하고, 재가자들은 사찰에서 행하는 법회나 예불에 동참하면서 부처님 말씀으로 세속의 때를 씻고 올바른 진리의 삶을 추구한다.
사찰은 많은 대중들 모여 살며 집회와 행사를 하는 곳이라 하여 가람(伽籃)이라고도 하고, 부처님이 상주하며 불법의 도를 선양하고 구현하는 곳이라 하여 도량(道場)이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절[寺]이라고 부르는데, 때로는 깨끗한 집이라는 뜻으로 정사(精舍)라고도 한다.
세계최초의 사찰은 인도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께 기증한 죽림정사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 지어진 이불란사와 초문사이다.
2) 전통사찰의 구조
(1) 전각(殿閣)
사찰의 건축물은 안에 모셔진 불상에 따라 그 이름이 다르다. 불보살이 모셔진 곳을 전(殿)이라 하며, 그 외에는 각(閣)이라 부른다.
①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신 법당이다. 대웅전은 절의 중심이 되는 전각으로, ‘법력(法力)으로 세상을 밝히는 영웅을 모신 전각’ 이라는 뜻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세상을 법으로 정복한 위대한 영웅인 대웅(大雄)이라 한 데서 유래한다.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의 좌우에 협시 하는 분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또는 십대제자 중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모신다.
삼세불(三世佛)이나 삼신불(三身佛: 법신불.보신불.화신불)을 모시기도 한다. 삼세를 통하여 불법으로 교화하는 삼세불은 현세의 석가모니불, 과거의 연등불인 제화갈라보살, 그리고 미래불인 미륵보살이다. 삼신불인 경우 석가모니불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봉안하기도 하며 이럴 경우 격을 높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부른다.
② 대적광전(大寂光殿)
대적광전의 본존불은 비로자나불이다. 비로자나불은 연화장세계의 교주이신데, 그분이 계시는 연화장세계는 진리의 빛이 가득한 대적정의 세계라 하여 대적광전이라 부른다. 화엄계통의 사찰에서는 대적광전을 본전으로 삼는다. 대적광전은 화엄세계를 드러내기 때문에 화엄전이라 부르며, 화엄세계의 본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다는 뜻에서 비로전이라고 한다.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한 삼신불을 모신다. 따라서 법신불인 비로나자불, 보신불인 아미타불, 화신불인 석가모니불을 봉안하는 것이 상례다. 다만 우리나라 선종 사찰에서는 선종의 삼신설에 따라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을 봉안한다.
③ 극락전(極樂殿)
극락전은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이다. 아미타불은 본래 임금의 지위와 부귀를 버리고 출가한 법장비구로서, 보살이 닦는 온갖 행을 다 닦아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48대원]을 세우고 마침내 아미타불이 되었다. 아미타불의 광명은 끝이 없어 백천억 불국토를 비추고, 수명이 한량없이 백천억 겁으로도 셀 수 없다 하여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또한 주불의 이름을 따라 미타전(彌陀殿)이라고도 한다. 경북 영주의 부석사 무량수전이 유명하다.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신다.
④ 미륵전(彌勒殿)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이신 미륵불을 모신 곳이다. 미륵불에 의해 새로이 펼쳐지는 불국토 ‘용화세계’를 상징한다. 하여 용화전(龍華殿)이라고도 하고, ‘미륵’의 한문 의역인 ‘자씨’를 붙여 자씨전(慈氏殿)이라고도 부른다. 미륵은 미래세의 세상에 출현해서 중생을 제도한다는 부처님이시다. 미륵전은 전북 김제의 금산사 미륵전이 대표적이다.
⑤ 원통전(圓通殿)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으로, 특히 그 사찰의 주불전(主佛殿)일 때 원통전이라고 부른다. 원통이란, 관세음보살이 모든 곳에 두루 원융통(圓通通)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소멸해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반면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부불전(副佛殿)일 경우에는 관음전(觀音殿)이라고 한다.
⑥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약사유리광여래(약사여래)를 모신 법당이다. 약사여래는 현세중생의 모든 재난과 질병을 없애주고 고통에서 구제해주는 현세이익적인 부처님이다. 만월보전, 유리광전, 보광전이라고도 부른다.
⑦ 팔상전(八相殿)
팔상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을 봉안한 곳이다. 여덟 폭의 그림에서 연유하여 팔상전 또는 부처님의 설법회상인 영산회상에서 유래하여 영산전(靈山殿)이라 부르기도 한다. 불단 없이 벽에 팔상도를 봉안하는 것이 보통이다. 주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고, 좌우 협시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봉안한다. 충북 보은의 법주사 팔상전이 대표적인 예다.
⑧ 나한전(羅漢殿)
나한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 중 아라한과를 성취한 성인, 즉 나한을 모신 곳이다. 나한은 아라한의 약칭으로, 번뇌를 남김없이 끊은 성자라는 뜻이다. 부처님에게는 열여섯 명의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16나한이라고 한다. 나한전은 영산회상의 모습을 재현했다고 해서 영산전(靈山殿)이라 하며, 또는 참된 진리와 완전히 합치한 분들을 모셨다는 의미에서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부른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좌우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봉안되어 있다. 그 좌우에 열여섯 명의 나한이 웃고, 졸고, 등을 긁는 등 자유자재한 형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나한의 숫자가 500명인 경우도 있는데 이는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 부처님 생전 설법을 정리하기 위해 최초로 집회를 열었을 때 모인 비구의 수가 500명인 데서 유래하였다. 이를 오백결집이라고 한다.
⑨ 명부전(冥府殿)
지장보살을 봉안한 경우는 지장전(地藏殿)이라고 부르고, 시왕을 모신 경우는 시왕전(十王殿)이라고 불린다. 시왕은 지옥에서 죄의 경중을 정하는 염라대왕을 비롯한 열 명의 왕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의 공간인 명부세계의 주존이므로 지장전을 명부전이라고 한다.
⑩ 대장전(大藏殿)
대장전은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축조한 건물이다. 대장전이란 편액을 건물로는 경북 예천의 용문사 대장전과 전북 김제의 금산사 대장전이 있다.
⑪ 적멸보궁(寂滅寶宮)
적멸보궁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전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심으로써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음을 상징한다. 적멸보궁에는 불상을 따로 봉안하지 않고 불단만 있다. 우리나라에는 5대 적멸보궁이 있는데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설악산 봉정암이다.
⑫ 조사당(祖師堂)
조사당은 한 종파를 세운 스님이나 후세에 존경받는 큰스님, 그리고 창건자나 역대 주지스님의 영정 또는 위패를 모신 당우이다. 국사가 배출된 절에는 조사전 대신 국사전이다. 전남 순천의 송광사 국사전이 대표적이다. 조사당은 부석사 조사당, 신륵사 조사당 등이 유명하다.
⑬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주로 법당의 뒤쪽 한켠에 있다. 삼성각 안에는 우리 고유의 토속신들, 즉 산신. 독성. 칠성 등을 모신다. 모신 신상에 따라, 산신각. 독성각. 칠성각이라고 부른다.
⑭ 범종각(梵鐘閣)
범종각은 범종을 보호하는 건물이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범종 외에 법고(法鼓), 운판(雲鈑), 목어(木魚) 등 불전사물(佛殿四物)을 함께 놓기도 한다.
⑮ 누각(樓閣)
누각은 2층의 다락집 형태로 대부분 주불전을 마주보고 서있다. 좌우에는 요사채가 마당을 둘러싸고 있어, 뜨락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구조를 이룬다. 그러나 사찰의 본래 배치는 중앙에 금당이 자리 잡고, 뒤로는 강당이, 앞에는 중문이 있는 형식이다. 그리고 이들을 회랑(廻廊)이 빙 둘러서 연결하는 구조 였다.
중문 대신 누각 형태로 달라진 것은 절이 산 속에 세워지면서부터인듯하다. 특히 누각은 사찰에 대중이 많이 운집하면서부터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누각은 출입 통로이면서 또한 불전사물 봉안, 대법회시 대중운집 장소 등의 용도로 쓰인다.
(2) 사찰의 문(門)
① 일주문(一柱門)
사찰에 들어갈 때 제일 처음 만나는 문으로,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일주문'이라고 부른다. 한 줄의 기둥은 세속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사찰에 들어서면서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한다. 즉 일심을 뜻한다. 바꾸어 말하면 사바세계에서 정토세계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가는 첫째 관문인 것이다. 이 문을 경계로 문 밖을 속계(俗界)라 하고 문안을 진계(眞界)라 하며, 일주문을 들어설 때 일심에 귀의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일주문에는 사찰 현판을 걸어놓는데, ‘영축산 통도사(靈鷲山 通度寺)’라는 식으로 산과 사찰 이름을 나란히 표기하고 있다. 또 좌우의 기둥에는 불지종가(佛之宗家), 국지대찰(國之大刹)등의 주련을 붙여서 사찰의 성격을 나타낸다.
② 천왕문(天王門)
천왕문은 불법을 지켜주는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四天王)을 봉안한 건물이다. 사천왕은 고대인도인들이 숭앙하던 세상을 지켜주는 신들로, 석모니부처님게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이들은 수미산 중턱에서 네방향을 지키면서 불법을 수호한다고 한다.
천왕문은 일주문과 불이문(不二門)사이에 서 있다. 이는 부처님이 계신 법당으로 오르는 중턱에서 불보살의 세계를 옹호하고 사찰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또 다른 의미는 일주문을 통과하면서 가졌던 구도자의 일심이 숱한 역경을 만나 한풀 꺾일 때쯤, 수미산 중턱의 사천왕이 나타나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수미산 정상까지 오르도록 독려하기 위해서이다.
동쪽을 수호하는 지국천왕은 온몸에 푸른색을 띠고 있고,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왼손은 주먹을 쥐어 허리에 대고 있거나, 보석을 손바닥에 위에 올려놓은 모습이다.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은 붉은색 몸에 노한 눈빛을 하고 있다. 오른손에는 용을 움켜쥐고 있고 왼손은 위로 들어 엄지와 중지로 여의주를 살짝 쥐고 있다.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의 몸은 흰색이며, 웅변으로 온갖 나쁜 이야기를 물리치려 입을 벌리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 손에는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의 몸은 흑색이며, 비파를 들고 비파줄을 튕기는 모습이다.
천왕문의 좌우는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천왕문 대문에 금강역사를 그려 놓은 경우가 많다. 금강문이라는 별도의 문을 갖춘 사찰도 있는데, 여기에는 금강역사가 조각으로 조성되어있다. 보통 금강문은 천왕문에 들어서기 이전에 자리 잡고 있다. 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평면 형태이며, 좌우 1칸에는 천왕을 2구씩 봉안하고, 중앙에는 출입로를 만든다.
③ 불이문(不二門)
천왕문을 지나면 불이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문를 만난다. 곧 해탈문이다.
불교 우주관에 따르면 수미산 정상에는 제석천왕의 도리천이 있다. 이 도리천의 본래 의미는 33천이다. 바로 그곳에 해탈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문이 서 있는 것이다. 도리천은 불교의 28천 가운데 욕계 6천이 제2천에 해당된다. 그 위계는 지상에서 가장 높으며, 하늘세계로는 아래에서 두 번째이다.
경주 불국사를 살펴보면 불이문의 사상적 의미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불국사의 경우 불이문에 해당하는 자하문에 도달하려면 청운교와 백운교의 33계단을 거쳐야 하는데, 이 다리들은 도리천의 33천을 상징적으로 조형화 것이다.
(3) 요사(寮舍)
요사는 사찰 경내의 전각과 문을 제외한, 스님들이 생활하는 건물을 통칭하는 말이다. 흔히 요사채라고 부른다. 큰방, 선방, 강당, 사무실, 후원(부엌), 창고, 수각(水閣), 해우소(解憂所 화장실)까지 포함한다.
요사는 기능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다. 생활공간과 선방 기능을 함께 갖고 있는 요사는, 지혜의 칼을 찾아 무명의 풀을 벤다는 뜻의 심검당(尋劍堂), 말없이 명상한다는 뜻의 적묵당(寂黙堂), 올바른 행과 참선하는 장소임을 뜻하는 해행당(解行堂).수선당(修禪堂) 등으로 불린다. 생활공간과 강당 기능을 함께 갖고 있는 요사는 참선과 강설의 의미가 복합된 설선당(設禪堂) 등으로 불린다.
의식을 집전하는 노전(爐殿)도 요사의 범주에 드는데, 이곳에서 스승들이 향을 피워 예불을 거행하기 때문에 봉향각(奉香閣), 일로향각(一爐香閣) 등으로 부른다. 조실스님이나 노장. 대덕스님의 처소는 염화실 또는 반야실(般若室) 등으로 불린다.
(4) 탑(塔)
탑은 산스크리트로 수투파, 팔리어로 투파,라 한다.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 여덟 날 국왕이 부처님 사리를 여덟 등분하여 각기 탑을 세우고 봉안했다는 경전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불교 탑의 기원이다. 탑은 부처님의 진실사리 또는 부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불자들의 숭배대상이다.
중국에서는 전탑(塼塔 벽돌탑), 우리나라에서는 석탑(石塔 돌탑), 일본에서는 목탑(木塔 나무탑)이 발달하였다. 탑은 초기 불교에서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사리의 수가 한계가 있어 탑을 세우기 어려워지자, 탑 대신 불상을 조성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하지만 탑은 여전히 부처님의 진신에 귀의하는 신앙 대상으로 도량을 장엄하고 있다. 탑의 양식은 3층탑, 5층탑, 9층탑, 13층탑 등으로 분류된다.
(5) 금강계단, 석등, 부도
탑과 조성 의미가 비슷한 조형물로 금강계단, 석등, 부도 등이 있다.
금강계단(金剛戒壇)은 본래 수계의식을 진행하는 장소를 말한다. 계를 지키는 마음이 금강과 같이 굳건하여 자칫 파계하는 일이 없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금강계단이라고 한다. 가운데에 부처님을 상징하는 사리가 모셔져 있다. 통도사의 금강계단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석등(石燈)은 본래 경내를 밝히는 등의 구실을 하는 시설물이었으나, 후대에 이르러 가람 배치의 기본 건축물로 변천하였다.
부도(浮屠)는 고승의 사리를 모신 묘탑이다. 조사 숭배를 중시하는 선종의 발달과 더불어 성행하였다. 부도와 탑은 둘 다 사리를 봉안하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모습은 다르다. 위치 또한 탑은 사찰의 중심인 법당 앞에 세우는데 반해, 부도는 사찰 경내 주변이나 외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부도를 모신 곳을 부도전(浮屠田)이라 한다.
3) 법당 안 구조
법당 안은 통상 상단, 중단, 하단(영단)의 구조로 되어 있다. 부처님상과 보살상을 모신 상단,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장을 모신 중단, 그리고 영가를 모신 하단(영단)이 그것이다.
(1) 상단(上壇)
상단은 법당의 앞쪽 정면에 설치한 단으로, 중앙에 불상을 모신다. 또한 불상과 보살상을 모신다. 하여 불보살단이라고 하는데 , 줄여서 불단(佛壇)이라고 한다. 상단에는 그 절의 주불과 후불탱화를 모신다.
(2) 중단(中壇)
중단은 호법신장을 모신 단으로, 신장단(神將壇) 또는 신중단(神衆壇)이라고도 부른다. 중단에는 제석천이나 사천왕, 대범천 등의 천상의 성중과 천,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긴나라, 가루라, 마후라가 등 팔부신장을 모신다. 우리 토속 신앙의 대상인 칠성신과 산신을 모시기도 한다.
(3) 하단(下壇) = 영단(靈壇)
연단은 영가의 위패를 모신 단상을 말한다. 아미타여래래영도와 감로탱화를 후불탱화로 모시며, 하단(下壇)이라고도 한다.
2. 불상과 수인
한 종파나 사찰의 불상 가운데 가장중심이 되는 불상을 본존불이라 한다 예를 들면 석가모니불, 아미타불(정토종), 비로자나불(화엄종), 미륵불(법상종), 약사여래 등이 있다.
불상에는 여래상, 보살상, 신장상, 나한상, 조사상 등이 있다. 여래상은 나발(螺髮 : 부처님의 32상 80종호 가운데 하나. 불상의 머리 형태로 소라모양의 머리 카락을 말함) 형상을 하고 있다. 보살상은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천의를 입고, 목걸이. 귀걸이 등의 장신구를 하고 있다. 신장상은 무장한 모습이며, 조사상은 스님 모습이다.
불상은 형식에 따라 단독상. 삼존상(三尊像). 병좌상(竝座像)으로 나누고, 자세에 따라 입상. 좌상. 와상(臥像). 유행상(遊行像) 등으로 나눈다. 좌상에도 결가부좌. 반가부좌. 의좌(倚座) 등이 있다.
1) 불상의 종류
(1) 여래상
여래상은 부처님상을 말한다. 수인(手印 : 손모양)이나 좌우 보처의 협시보살에 따라 구분되며, 각 사찰의 법당 명칭을 기준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본래 여래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가리킨다. 그러나 대승불교시대에 이르면서 수많은 부처님을 등장하고, 더불어 불상 형태도 다양해진다. 하지만 이름만 다를 뿐 '32상(相) 80종호(種好)'라는 기본 형식을 같으므로, 손 모양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같다. 즉 상이 원만하고 육계(肉髻 : 불상의 정수리에 솟아 있는 상투 모양)와 백호(白毫 : 불상의 눈썹 사이에 난 흰 터럭)가 있으며, 법의를 입고 장엄구가 없다.
① 석가모니불상
항마촉지인. 선정인 . 전법륜인 등의 수인을 하고 있고, 가사는 오른 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의 보습이다. 협시로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또는 가섭존자. 아난존자가 있다.
② 아미타불상
수인은 구품인을 하고 있으며, 가사를 양 어깨에 걸친 통견의 모습이다. 좌우 협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나, 많은 사찰에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시기도 한다.
③ 비로자나불상
지권인을 하고 있다. 좌우 협시로는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 또는 아미타불과 약사여래 등 삼존불과 함께 다섯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로 모시기도 한다.
④ 미륵불상
미래불인 미륵불은 대부분 전각 밖에 따로 모신다. 시무외인 또는 여원인 등의 수인을 하고 있다. 협시보살은 법화림보살과 대묘상보살을 모시기도 한다.
⑤ 약사여래상
약사여래는 질병 치료, 수명 연장, 재화 소멸, 의복과 음식 등을 구족시키고자 하는 부처님으로서 왼손에는 약병이나 약함,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좌우 협시는 일광변조 소재보살과 월광변조 식재보살이다.
(2) 보살상
보살상은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천의(天衣)를 걸치고, 장신구로 장엄한 온화한 모습이다. 보살은 부처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중생과 함께 있는 분이다.
보살상에는 단독상도 있지만 거의가 협시상이며, 입상과 좌상 등의 형태가 다양하다. 보살은 여래상의 좌우 보처이기 때문에 여래상을 보고 알 수 있으며, 손에 든 물건 즉 지물이나 보관의 형태에 따라서도 구분할 수 있다.
① 관세음보살상
관세음보살은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보관의 중앙에 아미타불의 화현을 모시고 있으며, 연꽃 . 감로수병 등을 손에 들고 있다. 십일면 또는 천수천안의 모습도 있다.
② 문수보살상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서, 주로 왼손에 연꽃을 들고 사자를 타고 있다.
③ 보현보살상
보현보살은 대자비의 실천행을 상징하는 보살로서, 코끼리를 타거나 연화대에 올라서 있는 모습이다.
④ 지장보살상
지장보살은 대비원력을 상징하는 보살이다. 스님 모습으로 삭발한 머리에 두건을 둘렀으며, 육환장(六環杖)을 들고 있다. 이 육환장 꼭대기에 아미타불의 화현을 모시고 있다.
(3) 천부신장상
본래 인도 재래의 신들로서,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교를 지켜주는 호법신장(護法神將)이 된 신들을 천부신장(天部神將)이라고 한다. 귀족 또는 장군, 온화한 모습 진노하는 모습 등 갖가지 형상을 하고 있다. 유명한 상으로는 인왕상, 사천왕상, 제석천상 등이 있다.
(4) 나한상과 조사상
부처님이 상수제자인 가섭존자와 안나 존자 등 훌륭한 제자들을 조성한 것이 나한상(羅漢像)이고, 한 종파의 큰스님을 조각한 것을 조사상(祖師像)이라고 하는데, 모두 스님상을 하고 있다. 나한상은 가섭존자. 아난존자 등 십대 제자를 중심으로 오백 나한. 천이백 아라한 등이 있고, 조사상은 용수.무착. 세친. 현장. 원효. 자장. 달마. 보조 선사 등 인도.중국.우리나라의 고승상이 있다.
2) 수인 (手印)
불상의 손모양을 수인이라고 하는데, 수인에는 특별한 뜻이 있다. 부처님의 덕을 나타내기 위해 열 손가락으로 여러 모양을 만들어 표현하는 것이다. 인계(印契), 인상(印相), 밀인(密印), 계인(契印)이라고도 한다.
수인은 교리상 중요한 의미가 잇으므로 불상을 만들때 함부로 현태를 바꾸거나 다른 불상의 수인을 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수인은 불상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수인의 종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근본5인, 아미타부처님의 구품인(九品印), 비로자나부처님의 지권인(智拳印) 등 매우 다양하다.
아미타부처님의 수인은 좌선자세에서 양손의 검지를 구부려 손가락끝을 붙이되 검지손가락의 등쪽이 서로 맞닿도록 하는 상품상생인 등 아홉가지가 있다. 아미타부처님의 구품인은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아홉가지 차별을 말하며, 상품.중품.하품을 각각 상.중.하로 세분한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의 근본5인은 다음과 같다.
(1) 선정인(禪定印)
결가부좌 상태로 참선, 즉 선정에 들 때 이 수인이다. 왼손의 손바닥을 위로해서 배꼽 앞에 놓고, 오른손도 손바닥을 위로 해서 그 위에 겹쳐 놓으면서 두 엄지손가락을 맞대는 형식이다.
(2)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부처님이 마왕 파순의 항복을 받기 위해 지신(地神)에게 부처님의 수행을 증명해 보라고 말하면서 지은 수인이다. 선정인에서 왼손은 그대로 두고, 우에 얹은 오른손을 풀어 손바닥을 무릎에 대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모습이다.
(3) 전법륜인(轉法輪印)
부처님이 성도 후 다섯 비구에게 첫 설법을 하며 취한 수인으로, 시대에 따라 약간씩 다른데 우리나라에는 그 예가 많지 않다.
(4)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如願印)
시무외인은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어 우환과 고난을 해소시키는 덕을 보이는 수인이다. 손의 모습은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위로 향하고 손 바닥을 밖으로 하여 어깨 높이까지 올린 형태이다.
여원인은 부처님이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고 중생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게 하는 덕을 표시한 수인이다.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손가락은 펴서 밑으로 향하며, 손 전체를 아래로 늘어뜨리는 모습이다. 시무외인과 여원인은 부처님마다 두루 취하는 수인으로 통인(通印)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불 입상(立像)의 경우 오른 손은 시무외인, 왼손은 여원인을 취하고 있다.
(5) 지권인 (智拳印)
비로자나 부처님의 인상으로, 오른손으로 왼손의 둘째 손가락 윗부분을 감싸는 모습인데, 손이 바뀌기도 한다. 오른손은 부처님의 세계를 표현하고 왼손은 중생계를 나타내는 수인으로 중생과 부처님이 하나임을 뜻한다.
(6) 아미타 구품인(阿彌陀 九品印)
아미타부처님의 수인은 좌선자세에서 양손의 검지를 구부려 손가락끝을 붙이되 검지손가락의 등쪽이 서로 맞닿도록 하는 상품상생인 등 아홉가지가 있다. 아미타부처님의 구품인은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아홉가지 차별을 말하며, 상품.중품.하품을 각각 상.중.하로 세분한 것이다.
3) 광배(光背)와 대좌(臺座)
광배는 부처님이 몸에서 나는 신령스럽고 밝은 빛을 상징화한 것이다. 불신의 뒤쪽에 둥그렇게 표현 되며, 형태는 시대와 지역, 혹은 불보살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빛이 머리에만 비추는 두광과 몸 전체에 두루 비추는 신광(身光)이 있다. 대좌는 불 . 보살상이나 조사상이 앉은 자리를 말한다.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사자좌(獅子座)와 연화좌(蓮花座)가 보편적이다.
3. 불교 회화
불교 회화는 예술성만을 추구하는 순수예술이 아니며, 불교 사상을 주제로 하는 성스러운 예술이다. 그러므로 좋은 불화는 기법이나 양식이 획기적인 작품성보다 불교 이념을 얼마나 훌륭하게 표현하였느냐가 더 중요하다.
(1) 탱화
탱화는 비단이나 삼베에다 불보살의 모습이나 경전 내용을 그려 벽등에 걸 수 있게 만든 그림이다.
탱화의 종류는 내용에 따라서 상단, 중단, 하단 탱화로 구분된다. 상단 탱화는 전각의 상단, 즉 불. 보살상의 뒷면에 거는 탱화로서, 석가모니 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약사불. 탱화 등이 있다. 중단 탱화는 불단 측면의 신중단에 모시는 탱화로서, 주로 불법을 수호 하는 다양한 호법신들을 그린다. 하단 탱화는 영단이나 명부전 등에 모시는 탱화이다.
(2) 벽화(壁畵)
사찰 전각의 벽에 그려 넣는 그림을 말한다. 부처님의 일생, 불보살의 모습, 비천, 조사스님 일화, 심우도 등이 주를 이룬다. 이 가운데 심우도는 수행자가 정진을 통해 본성을 깨달아가는 가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해서 그린 선화이다. 가장 대표적인 벽화로서 십우도(十牛圖) 또는 목우도(牧牛圖)라고도 한다.
(3) 감로도(甘露圖)
조상숭배나 영혼숭배 신앙을 표현한 그림이다. <불설우란분경> 내용을 그린 그림이라 해서 우란분경변상도, 영가단에 봉안하는 그림이라 해서 영가단 탱화 또는 감로탱화, 감로왕도라고도 한다.
(4) 괘불(掛佛)
법당 밖에서 불교의식을 행할 때 걸어놓는 예배용 그림이다. 야외에 괘불을 내걸고 법회나 의식을 베푸는 행사를 괘불재(掛佛齋)라고 하며, 괘불을 거는 것을 괘불이운(掛佛移運)이라고 한다.
(5) 변상도(變相圖)
불교 경전의 복잡한 내용이나 심오한 가르침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하여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기 위한 회화이다. 따라서 모든 불화의 형태를 변상도로 볼 수 있다. 그 종류는 화엄경 변상도, 관경 변상도, 법화 경변상도, 지옥 변상도 등 매우 다양하다.
4. 법구(法具)
법구는 불교 의식 등에 쓰이는 모든 도구를 가리키며, 불구(佛具)라고도 한다. 법구는 법답게 소중히 다루어야 하며 필요할 때만 법식에 맞취 사용해야 한다.
1) 불전 사물(四物)
조석 예불 때 치는 법고, 운판, 목어, 범종을 불교의 사물이라고 한다.
법고(法鼓)는 법을 전하는 북이라는 뜻이다. 쇠가죽으로 만들며, 짐승을 비롯한 중생을 깨우치기 위하여 울린다.
운판(雲版)은 청동이나 철로 만든 넓은 판으로, 원래 중국의 선종 사찰에서 부엌에 달아놓고 대중들에게 끼니때를 알리기 위해 쳤다고 한다. 운판은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과 허공을 떠도는 영혼을 제도하기 위해서 친다.
목어(木魚)는 나무를 물고기 모양으로 깎아 배 부분을 파낸 것으로, 두 개의 나무 막대기로 두드려서 소리를 낸다. 목어를 치는 까닭은 물에 사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이다. 늘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는 처럼, 수행자는 늘 깨어 있는 채로 정진해야 한다는 뜻이다.
범종(梵鐘)은 조석 예불과 사찰의 큰 행사 때 사용한다. 아침에는 28번, 저녁에는 33번을 친다. 범종을 치는 근본 뜻은 천상과 지옥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다.
2) 목탁(木鐸)
의식을 집전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법구로, 대중을 모을 때 신호용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3) 죽비(竹箄)
선방 등에서 수행자를 지도할 때 사용한다. 중국의 선원에서 처음 사용했으며, 통대나무나 그 뿌리로 만든다. 선방에서 입선과 방선, 그리고 공양할 때 신호하는 도구로 쓴다.
4) 발우(鉢盂)
발우는 부처님 당시부터 출가수행자들이 공양할 때 쓰던 밥그릇으로, 오늘날에도 소중한 법구이다.
5) 요령(搖鈴) - 금강령
요령은 법요식 등을 할 때 사용된다. 본래 밀교계통에서 사용했는데, 북방계통의 사찰로 전해져 지금은 모든 의식 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법구로 자리 잡았다.
6) 염주(念珠)
염주는 부처님께 기도하거나 절을 하면서 참회할 때 그 수를 세기 위해서 사용한다. 보통 108개로 되어 있다. 본래 부처님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보리수 열매로 만들었으나, 지역에 따라 독특한 나무나 그 밖에 재료(율무. 열매. 용안주. 금강주. 다양한 보석 등)로도 만든다.
5. 사리장엄과 복장물
사리장엄이란 사리를 봉안하는 갖가지 장엄구다. 사리를 담는 사리구와 이 사리구를 탑 속에 봉안하는 사리 장치를 통틀어 일컫는다. 사리장엄에는 사리를 담는 사리병과 그것을 보호하는 합이 있다. 사리병은 신라시대에는 유리와 수정으로 만들었으나, 고려시대에는 금속재가 많이 쓰였다.
복장물은 불상을 조성하면서 불상 속에 넣는 사리, 불경 등을 말한다. 넓은 의미로는 불상, 보살상, 나한상 등의 여러 존상 내부에 봉안 되는 모든 불교적 상징물을 가리킨다.
처음에는 불상을 조성할 때만 복장을 했지만, 후대에는 불상을 수리하거나 금칠을 다시 입힐 때도 복장을 했다. 그러므로 복장물은 해당 불사의 조성 연혁은 물론, 당시 신앙 형태, 사경미술 수준, 장인과 발원자의 신분 등을 알아내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6. 불교 조형물
1) 당간과 당간지주(幢竿支柱)
예전에는 사찰에서 기도나 법회 때 기를 내걸었다. 이 기를 당이라 고 하는데, 당을 걸어두는 기둥이 당간이다. 당간지주는 당간을 지탱하기위해 세우는 지주로서, 대개 사찰 입구에 세운다. 당간은 금동, 철 등 금속재를 사용하며, 당간지주는 거의가 돌로 만들어졌다. 현재 당간은 대부분 사라지고 당간지주만 남아 있다. 당간은 그곳이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구실을 한다.
2) 업경대(業鏡臺)
지옥의 염라대왕이 갖고 있다는 거울로, 죽은 이가 생전에 지은 선악의 행적이 그대로 비친다고 한다. 업경대는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지만 가끔 금속으로 된 것도 있다.
3) 윤장대(輪藏臺)
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회전하도록 만든 책장이다. 이것을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똑같이 공덕이 쌍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고려(1173년 명종3년)에 자엄대사가 세운 경북 예천의 용문사에 윤장대 2좌가 있다.
7. 불교 성보의 이해
한국불교는 17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마침내 민족문화의 뿌리와 줄기가 되었다. 방방곡곡에 불교 성지와 불교 문화재가 숨쉬고 있다. 우리나라 국보와 보물, 지방문화재 대부분이 불교 성보(聖寶)이다.
유네스코는 한국불교 문화재로 지난 1995년에 고려대장경을 보존하는 해인사 장경판전과 불국사 석굴암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2000년도에는 경주역사유적지구(이중 남산지구, 황룡사지구는 불교유산지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2001년에는 직지심체요절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2007년에는 해인사 대장경판과 제경판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2009년에는 영산재를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우리나라 불교 문화재의 우수성을 세계에서도 인정한다는 증거이다.
불교 문화재는 민족 문화유산이면서 한편으로 불교 성보라는 두 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부 국민들은 이를 민족 문화유산으로만 받아들일 뿐 불자들의 변함없는 신앙 대상이라는 본질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 전통사찰은 경관이 빼어난 단순한 관광지에 불과하고, 성보 문화재는 관광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불교 문화재는, 우리조상들이 지극한 불심과 뛰어난 기술로 구현한 신앙의 상징이며 영원한 신앙의 대상이다. 이를 바르게 인식할 때 사찰과 성보 문화재의 존재가치가 제되로 인정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성보와 민족 문화유산의 가치를 이해하고 보존하는 것은 바로우리 민족의 전통과 역사 그리고 사상과 문화를 창달하는 기초가 된다. 어떤 민족이든 고유의 전통문화와 사상을 보존하지 못하면 그 존재성을 확인하기 힘들다. 진정한 세계화. 국제화는 민족 고유의 전통과 문화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 가장 불교적인 것이 가장 국제적이고 세계적인 것임을 우리는 해인사 장경판전과 불국사 석굴암, 고려대장경 및 제경판, 직지심체요절, 영산재는 세계 문화유산 지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전통문화의 정수를 계승해 온 우리한국불교는 우수한 문화민족으로서 민족문화를 잘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할 역사적 사명이 있다. 한국불교의 이러한 문화적 과제를 새삼 인식하고, 이를 위해 정진해 나가야겠다.
제2장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란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신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바탕으로 수행을 통해 우리 마음의 영원한 평안과 모든 생명들의 안락과 행복을 동시에 추구하는 종교이다.
불교는 어떤 종교인가? 과연 부처님이 오랜 수행 끝에 깨달으신 것은 무엇이며, 감히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불교를 아는 것이 우리 삶에 어떤 도움이 될 것이며, 부처님 말씀대로 사는 삶이란 어떤 삶인가?
아마 불교에 입문하기에 앞서 누구나 이런 의문들을 한번쯤은 품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고 불교에 첫발을 내디뎠으리라. 물론 앞으로도 이런 의문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고, 또한 진리를 향해 정진하는데 소중한 동기로 작용할 것이다.
부처님은 분명 진리의 길을 가르쳐주셨지만 무엇을 추구하여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몫이다. 그 선택에 불교는 하나의 커다란 나침반이 될 것이다. 불교는 어떤 종교이며, 부처님이 말씀하신 지혜로운 삶은 어떤 것인지 공부해보자.
1. 종교란 무엇인가
지구상에는 다양한 민족이 고유의 문화를 이루며 어울려 살아왔다. 그래서 민족과 문화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종교가 생겨났다. 종교의 일반적 정의와 불교에서 말하는 종교에 대해 알아보자.
‘종교’란 한자 뜻 그대로 풀면 최고의 가르침, 인생과 세상에 대한 궁극적인 가르침이다. 그래서 종교는 인간의 삶 그 자체를 문제삼으며 그것을 몸소 해결하여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자하는 가르침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교주. 교리. 교도가 있어야 성립 된다.
올바른 종교를 찾아서 믿고 몸소 행하는 것은 한 사람의 삶에 대단히 중요하다. 어쩌면 삶 자체가 달라지는 일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 종교에 의지하여 그 질곡에서 빠져나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떤 전능한 존재에게 의지하려는 속성이 있다. 산, 해, 달, 하늘, 심지어는 태풍에도 신이 있다고 믿어 예배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인류 역사에 신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신이 인류를 다스린다고 한다. 이처럼 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가르침이 유신론적 종교이다. 유신론적 종교에서,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므로 절대적인 복종과 절대자의 품 안에서만 인간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종교를 부정하고 ‘인간이 무엇이며, 죽은 뒤 어디로 가는가’ 하는, 인생과 우주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결과 크게 두 가지 흐름의 종교가 정립되었다. 바로 신을 따르는 종교와 진리를 믿고 행하는 종교이다.
신을 믿는 종교는 세계가 신의 창조물이고, 인간은 신의 형상을 닮은 자로서 만물을 지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절대적 신을 믿는 것은 대체로 서양의 종교관이다. 서양 종교에서 신은 절대적 존재이므로 인간은 그 신에게 절대복종해야 한다.
그런데 교통과 통신 등 과학 문학이 발달하면서 동양 등 다른 세계를 접하게 되자, 서양에서는 자기 중심적인 틀에서 벗어나 종교를 새롭게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혀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만나게 된 것이다. 즉 걸림이 없는 자유와 지극한 행복이 신만이 아니라 내 자신 속에도 있고 삼라만상 속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양인들은 생각의 편협성을 깨닫고 마침내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는 안타깝게도 그들 스스로 편협하다고 인정한 서양의 종교관과 가치관에 갇혀 있는 형편이다.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은 이러한 서양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야만 비로소 참된 진리를 만날 수 있다.
깨달음을 믿고 행하는 종교는 인류 역사에 불교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가치는 인류 역사에서 더욱 빛이 나고, 부처님은 인류의 대스승으로서 손색이 없는 것이다.
진리를 모르고 사는 세상은 고달프지만 진리를 알고 행하는 삶은 자유롭고 평안하다. 불교를 처음 만난 사람들은 불교의 진리야말로 나를 바꾸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임을 믿고 열심히 정진해 나가면 마침내 참된 삶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2. 불교란 무엇인가
1) 진리에 대한 깨달음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행하는 종교다. 그러므로 불교의 교주는 부처님이다. 그러나 부처님 스스로 한 번도 당신이 세상이 세상의 절대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다만 세상의 진리를 먼저 깨달았다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불교’의 ‘불(佛)’이란 고대인도어인 산스크리트 ‘붓다(Buddha)’의 음사로, ‘깨달은 사람’ 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깨달음인가? 바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다.
불교에서는 누구라도 진리를 깨치면 부처가 될 수 있다. 진리를 깨치면 신조차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절 입구에서 있는 사천왕들은 본디 하늘에 사는 신이었는데, 부처님의 그르침을 받고 감격한 나머지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토록 부처님 법을 보호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스스로 발심하여 부처님 도량을 지키고 있다. 이처럼 불교의 진리는 하늘의 신을 감동시킬 뿐만 아니라, 그 경지조차 뛰어넘는 가장 수승한 가르침이다.
삶을 당당하게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은 삶의 결과도 자못 다르다. 불교의 진리는 우리가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지혜를 준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완성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그 믿음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자신의 목표에 더욱 가까워질 것이고, “난 안 돼” 하면서소극적인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그만큼 더 목표와 멀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 있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바른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진리를 깨닫고 행하면서 사는 삶은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하겠는가. 불교는 바로 이 길을 제시하고 있다.
2) 삶을 직시하여 그 해답을 제시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일까? 그것을 궁금해 하며 해답을 찾아 헤매다 일생을 마치는 사람들도 있다. 한 평생을 살면서 목숨 걸고 그 해답을 찾는 것은 진정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의 삶이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병로병사의 일대사 인연을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말은 쉽지만 태어나는 일만 생각해 봐도 얼마나 고생스럽고 힘든 일인가.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받는 작은 상처 하나에도 사느니, 못 사느니 힘겨워한다. 그리고 큰 병에 시달리거나 평생을 서로 의지하던 사람의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 고통과 아픔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렇듯 돌아보면 삶의 많은 시간이 즐거움보다 괴로움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환희의 시간보다 슬픔과 후회의 시간이 더 길고 많다. 그래서 삶을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왜 사는지, 왜 이 길을 가야 하고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끝도 모를 삶을 그저 안개 낀 다리를 건너는 사람처럼 어림짐작으로 살고 있다. 이렇듯 길을 모르면서 그저 어둠 속을 헤매듯 살아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인생은 모르면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모르고 사는 삶을 알고 살아가는 삶으로 바꾸어주는 가르침이 바로 불교이다. 모르고 짓는 죄가 더 무섭다는 말이 있다. 죄를 지어도 그것이 죄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런 가책 없이 그 행위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고, 그것이 나와 남에게 아픔을 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해답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벌판을 걷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뒤에서 성난코끼리가 달려왔다. 그는 코끼리를 피하기 위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 보니, 몸을 피할 작은 우물이 있었다. 우물에는 마침 칡넝쿨이 있어서 급한 나머지 그것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두려움에 위를 쳐다보았더니 코끼리가 아직도 성난 표정으로 우물 밖을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어디선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 주위를 살펴보니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가며 칡넝쿨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뿐만 아니라 우물 중간에서는 작은 뱀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그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두려움에 떨면서 칡넝쿨을 잡고 매달려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벌 다섯 마리가 날아와 칡넝쿨에 집을 지었는데, 그 벌집에서 꿀이 한 방울씩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그 꿀을 받아먹으면서 달콤한 꿀맛에 취해 자신의 위급한 상황을 잊은 채, 꿀이 왜 더 많이 떨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에 빠졌다.]
이 이야기는 <불설비유경(佛說譬喩經)>의 ‘안수정등도(岸樹井藤圖)’에 나오는 인생에 대한 비유다. 여기서 코끼리는 무상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의미하고, 칡넝쿨은 생명줄을, 검은 쥐와 흰 쥐는 밤과 낮을 의미하다. 작은 뱀들은 가끔씩 몸이 아픈 것이고, 독사는 죽음이며, 벌 다섯 마리는 인간의 오욕락(五欲樂)을 말한다. 오욕이란 재물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을 말한다. 이와 같이 자신의 처지를 잊은 채 탐욕의 꿀맛에 취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은 인생이다.
어떤 사람은 욕망이 없다며 인생의 의미가 없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욕망으로 얻는 것보다 욕망 때문에 잃는 것이 더 많다. 눈앞의 이익에 집착하는 마음은 지혜를 흐리게 한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없애고 참된 지혜를 발현토록 해야 한다. 어리석음으로부터 깨어날 때 우리는 코끼리와 독사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깨닫는 순간 코끼리도, 우물도, 두 말리의 쥐도, 독사와 뱀도 말끔히 사라지고 완전한 자유와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
3) 주인공은 나 자신
때때로 만원버스나 지하철에서“웬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거야!”라고 짜증을 내는 사람을 본다. 그 사람은 자신도 그곳을 복잡하게 만드는 장본인임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모든 일의 주인공은 바로 나이다. 어떤 일에서든 남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이 그 일의 주인공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지옥에 있는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산다. 먹을 것이 있어도 자기만 먹으려고 한다. 하지만 지옥의 숟가락은 너무 길어 자기 수저로 제 입에 밥을 넣을 수가 없다. 그래서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상대를 원망하면서 굶주리고 산다. 눈앞에 먹을 것을 두고도 말이다.
그러나 극락에 있는 사람들은 이웃을 먼저 생각하며 산다. 그래서 먹을 때는 서로서로 먹여주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은 지옥 사람들과 달리 모두 맛있게 먹으며 행복하게 산다.
이는 지옥과 천상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귀중한 교훈이다. 자신만을 위해 탐욕스럽게 사는 사람과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사람의 삶은 대조적이다. 이처럼 자기 중심적인 삶을 이웃과 함께 하는 삶으로 바꿀 때, 괴로움의 세계가 자유와 평안의 세계로 바뀔 것이다. 대립과 갈등, 고통으로 얼룩진 세계를 바꿔나가는 원동력은 세계의 구성원인 나 자신이다. 즉 세계를 바꾸는 것은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주인공인 자신의 지혜와 그 지혜로 말미암는 걸림 없는 행위이다.
4) 믿음과 수행을 겸비한 종교
불교는 믿음과 수행을 겸비한 종교이다. 그래서 불교는 믿음과 더불어 스스로 노력하는 수행을 강조하며, 그런 수행을 통해 인간의 정신과 삶을 획기적으로 바꾼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부처님을 믿고, 나아가 나 자신이 본래부처라는 사실과 진리를 믿어 자신을 비추어보며, 이웃 중생의 아픔을 덜어주고 함께 사는 아름다움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 불교이다. 절대자에게 무조건 빌어 용서를 받고 그에게 귀속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불성을 깨워 내자신의 주인공으로 사는 것이 곧 믿음과 수행을 겸비하는 불교의 참모습이다.
수행이란 혹독한 시련으로 자신을 단련하는 고행과는 다르다. 진리를 깨치기 위해 탐욕에 찌든 자신의 잘못된 습관을 좋은 습성으로 바꾸어 마침내 깨닫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의 근기(根機 :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근본 바탕)에 따라 다양한 수행체계가 형성되고, 그것이 사상체계를 이루면서, 다시 수많은 조사스님들과 수행들이 그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이처럼 수행을 중시하는 불교의 특징은 절대자로부터의 구원만을 중시하고 유일신을 강조하는 다른 종교와 차별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불교도 부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을 통한 구제의 길도 열어 놓지만, 결국에는 내면의 힘을 키워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의 길을 향한다. 나를 철저히 버리고 그것이 부처님 마음으로 변하는 내면의 변화는 믿음과 수행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 점을 강조한 것이 불교이다.
5) 지혜의 길
부처님 가르침을 '지혜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깨달음 얻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지혜이다. 지혜 없이는 깨달음도 없다. 그러면 지혜는 지능지수가 높은 것을 말하는가? 아니다. 지혜는 지능이나 지식과는 다른 개념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먼저, 생각를 바르게 해야 한다. 바른 생각에서 지혜가 나오기 때문이다. 즉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자신과 전체를 통찰할 때 지혜가 열린다. 부처님은 지혜의 길을 어떻게 설명하셨을까?
"너희들 비구여, 만일 지혜가 있으면 곧 탐착(貪着)이 없어지는 것이니, 항상 스스로 자세히 살피어 그것을 잃지 않도록 하라. 이것을 우리 법 중에서 능히 해탈을 얻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미 도인도 아니요 또 속인도 아니라, 무엇이라 이름 붙일 것이 없느니라. 실지혜(實智慧 : 진리를 달관하는 참 지혜)는 곧 늙음과 죽음과 병듦의 바다를 건너는 굳건한 배요, 또한 무명의 어둠 속의 큰 등불이며, 모든 병든 자의 좋은 약이요, 번뇌의 나무를 치는 날카로운 도끼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듣고, 생각하고 닦는 지혜로서 자기를 더욱 길러야 한다. 만일 사람이 지혜의 빛을 가졌다면, 그것은 비록 육안이지만 그는 밝게 보는 사람이다. 이것을 지혜라 하느니라."
그렇다면 지혜의 가르침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담고 있는가?
첫째, 무명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라는 말씀이다. 비록 원수 사이일지라도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거나 원망과 욕심을 버리면 함께 차 한 잔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우가 생긴다. 대립과 갈등의 원인은 자신의 욕망 때문이다.
화가 났을 때, 자기 마음을 잘 관찰해 보면 화의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도 있지만, 자신에게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상대가 자기가 바라는 만큼 해주지 않았거나 지기에게 불이익을 주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그 또한 자기 욕심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시간이 흐른 뒤에 돌이켜보면 당시의 화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이것이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무명이다. 이 무명에서 벗어나야만 비로소 밝은 지혜의 눈을 뜰 수 있다.
둘째, 자신의 무지가 모든 불행과 비극의 시초임을 알았다면, 그 다음은 남을 나처럼 생각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뒤에 오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혜로운 사람은 행동에 앞서 그 결과를 생각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생각에 앞서서 행동부터 한다. 잘못된 행동 때문에 고통과 아픔이 생긴다. 따라서 눈앞의 이익에 연연한 행동과 욕망에서 벗어나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불교는 바로 이러한 세계를 열어 보여주며, 그 길을 함께 가고자하는 가르침이다.
6) 참나를 찾아서
잠못 드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나그네에게 길이 멀 듯이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겐
생사의 밤길은 길고도 멀어라 <법구경 우암품>
우리 삶은 올바른 진리의 길에 들어설 줄 모르고 감정과 욕망에 이끌려, 마치 뱀의 꼬리가 앞장서서 길을 가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가시덩굴에도 들어가고 불 속에도 뛰어들고 결국에는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격이다.
이를 두고 원효 스님은 <발심수행장>에서 “중생이 불타는 집에서 윤회하는 것은 끝없는 세상에서 탐욕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라고 하였다.
참나, 본래의 청정한 나를 찾으려면 먼저 탐욕을 버려야 한다. 참 나는 곧 진리요 깨달음이다. 그래서 참 나를 찾아가는 길은 곧 깨달음을 향한 길이다. 참 나를 찾지 못한 사람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요, 그런 사람에게 생사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부처님께서 어느 날 숲 속 나무아래에서 좌선을 하고 계셨다. 이 때 젊은이들이 숲 여기저기 무엇인가를 찾아다니다가 나무 아래 조용히 앉아 있는 부처님을 보고 다급하게 물었다.
“한 여자가 도망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사연인 즉, 그들은 근처에 사는 지체 높은 집안 자제들인데, 50명이 저마다 아내를 데리고 숲에 놀러왔다. 그 중 총각 한 사람이 기생을 데리고 왔는데, 모두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그 기생이 여러 사람의 옷과 값진 물건을 가지고 달아나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 여인의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사정을 듣고 난 부처님은 그들에게 물으셨다.
“젊은이들이여, 달아난 여인을 찾는 것과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자기 자신을 잊고 여인을 찾아 헤매던 그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럼, 다들 거기 앉아라. 내가 이제 그대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찾는 법을 가르쳐주겠다.”
젊은이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모두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사분율 제32권>
이 젊은이들은 자신이 더 중요함을 깨달아 출가했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탐욕과 욕망의 세계로 계속 달려가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탐욕의 끝은 파멸이요 절망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항상 탐욕을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사십이장경>에 따르면, 부처님께서도 왕자의 지위를 문 틈에 비치는 먼지처럼 보고 금이니 옥 따위의 보배를 깨진 기왓장처럼 보며, 비단옷을 헌 누더기같이 보고, 삼천대천세계를 한 알의 겨자씨 같이 보아 궁궐을 버리고 출가하여 위대한 깨달음을 얻어셨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세속의 탐욕을 벗어났음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늘 당신을 ‘길을 가리키는 사람’이라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괴로움에서 벗어난 지혜와 평화의 길을 가르쳐 주셨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달음과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몸소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이루고, 못 이루고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고려시대 야운스님은 자신의 수행을 살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많은 사람이 부처님 법 안에서 도를 이루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아직도 고해에서 헤매고 있는가. 그대는 시작없는 옛적부터 이 생에 이르도록 깨달음을 등지고 속진(俗塵)에 묻혀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있구나. 항상 악업을 지어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고 착한 일을 하지 않으니, 생사의 바다에 빠진 것이 아닌가." <초발심자경문>
3. 진리를 향한 정진
1) 삼귀의 - 올바른 믿음의 출발
일상적인 삶을 살다 불교에 입문하려고 첫 마음을 냈다면 , 그 순간부터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사는 참다운 불자가 되어야 한다. 참다운 불자가 되려면 먼저 지극한 마음으로 삼보에 귀의해야 한다.
삼보란 세 가지 보배라는 말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를 말한다. 이 삼보에 신명을 바쳐 믿는 것을 '삼귀의'라고 한다. 귀의란 돌아가 의지한다는 말로, 지금까지의 잘못된 믿음과 생각을 버리고 참다운 진리의 세계에 안주하여 살아간다는 뜻이다.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진리를 깨쳐 우리에게 보여주신 따사롭고 인격적인 부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진리를 온몸으로 구현한 온화하고 대자대비한 부처님을 내가 안주할 수 있는 섬으로 여기고 귀의하여 흔들림없는 마음의 확신과 안정을 얻는 것이다. 그 다음 진리 그 자체인 법에 귀의하는 것이 법귀의이다. 스님들께 귀의하는 것은 부처님과 법에 따라 수행하고 가르치는 스님들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즉 좋은 벗과 복 밭인 거룩한 스승에게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삼귀의는 부처님 당시부터 수계식 등 여러 의식에서 실행되었고, 지금도 모든 불교 의식 때 빠짐없이 행하는 의례가 되었다. 초기 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은 정형구나 삼귀의 삼창을 통해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위대하셔라 세존이시여, 위대하셔라 세존이시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심과 같이, 덮인 것을 나타내심과 같이, 헤매는 이에게 길을 가리키심과 같이, 어둠 속에 등불을 들고 와서 눈 있는 이는 보라고 말씀하심과 같이, 세존께서는 온갖 방편으로 법을 설하여 밝히셨나이다.
저는 이제 세존께 귀의합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합니다. 원컨대 오늘부터 시작하여 목숨을 마칠 때까지 세존께 귀의하는 불자로서 저를 받아주시옵소서."<숫타니파타>
이토록 넘치는 환희로 부처님께 귀의한 불자들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깊은 믿음을 잃지 않고, 지극한 마음으로 삼보를 공경해야 하고, 모든 일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
"너희가 사람없는 광야를 갈 때에는 여러 가지 공포를 느낄 것이며, 마음은 놀라고 머리카락은 곤두서리라. 그런 때는 마땅히 여래(如來)를 염하라. 부처님은 응공(應供), 등정각(等正覺), 불(佛). 세존(世尊)이시라고. 이리 염하면 공포가 사라지리라.
또 마땅히 법(法)을 염하라. 부처님께서 설한 가르침은 현재 당장 효능이 있는 것, 때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것, 능히 안온하게 만들어주는 것, 지혜 있는 사람이면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리 염하면 공포가 사라지리라.
또 승(僧)을 염하라. 부처님 제자들은 잘 수행하고, 바르게 수행하는, 세간의 복전이라고. 이리 염하면 공포가 사라지리라. "<장아함경>
삼보에 귀의하면 이렇듯 평화와 안온함을 느끼게 된다. 불교를 믿기로 결심을 한 것도 대단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처음 발심한 마음을 잃지 않고 정진해 나가는 일이다.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하루하루 나태하지 말고 바르게 신행해야 한다. 이것이 발심(發心), 즉 발보리심(發菩提心)의 참다운 모습이다.
2) 자신을 낮춤 - 하심(下心)
불교의 수행은 자신을 낮추는 공부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수행하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이것을 하심(下心)이라 한다. 어느 누가 나를 멸시하더라도 털끝만큼도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겸손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켜켜이 쌓여 있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업, 그 때를 닦아내고 맑은 성품을 찾아내어 깨달음을 이루는 데는, 첫째도 둘째도 나를 낮추고 남을 공경하는 마음공부가 제일이다. 그런데 절에 다닌 지 오래된 사람인데도 “나는 무엇을 했네, 나는 무엇을 보았네” 하며 처음 발심했을 때의 겸손함을 잃고 아상만 높은 경우가 있다.
최고라고 우쭐대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이며, 특히 이런 태도는 수행에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점점 부처님의 법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불자는 자신을 낮추어야 함은 물론,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교만심을 버려야 한다.
부처님 당시, 스님들이 탁발을 한 것도 다른 이에게 복을 짓게 하고, 자기 자신을 낮추어 해탈을 향해 정진하기 위해서였다. 진정 자신을 낮출 때라야 남을 받아들일 수 있고, 자신의 마음을 부처님의 법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조계종에서는 탁발을 금하고 있다.)
3) 계를 지키고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며 - 지계(持戒)와 참회(懺悔)
"누구나 어두운 곳보다 밝고 환한 곳에 머물고 싶을 것이다. 빛은 생명을 품고, 어둠은 죽음에 가깝기 때문이다. "
어둠 속에서 헤매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과 밝은 곳을 향해 가는 우리의 발걸음일 것이다. 만일 등불이 없다면 우리는 잘못된 방향을 가기 쉽고, 발걸음이 잘못된 곳으로 우리를 이끌며 부딪이거나 넘어져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여기서 등불은 바로 진리의 가르침과 밝은 빛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계율이다. 진리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계율은 우리의 몸가짐을 바르게 한다. 그리하여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지 않게 하고, 넘지말야야 할 선을 넘지 않도록 도와준다.
부처님께서는 계율을 잘 지키면 저절로 밝은 지혜가 생겨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열심히 선정과 지혜를 닦는 공부를 할지라도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헛수고에 그칠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내뱉는 말 한 마디나 행동 하나가 죄나 복을 짓는 일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고, 항상 몸과 말과 생각을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불교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살면서 전혀 잘못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매순간 욕망이 싹트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때로는 잘못된 판단으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부처님 법을 따르는 불자임을 명심하고, 하루하루를 돌이켜보며 참회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처음 공부하는 보살이 비록 신심이 두터우나 전생부터의 무거운 죄와 나쁜 업장이 많으므로 때로 삿된 마왕에게 홀리기도 하고, 세상일에 끄달리기도 하며, 갖가지 병고에 시달리는 등 재난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불자들이 자칫 착한 법을 닦는 일을 멈추게 되나니, 반드시 밤낮으로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으로 참회하며 권청하고 수희하며 보리에 회향하기를 늘 쉬지 아니하면, 나쁜 업장이 차츰 소멸하고 선근이 늘어나리라. "<대승기신론>
참회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치고, 아주 끊어서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허물이 있으면 뉘우치는 것이다. 즉 허물이 있다면 바로 참회하고, 나쁜 짓을 저질렀다면 부끄워하며 곧바로 고쳐서 스스로 새롭게 해야 한다. 그러면 죄업은 날로 줄어들고 마침내 반드시 도를 얻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서 계실 때였다. 아니룻다(아나율)가 법회 중에 꾸벅꾸벅 조는 것을 보고, 법회가 끝난 뒤 부처님께서 아니룻다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다.
“아니룻다야, 너는 왜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느냐?”
아니룻다가 대답했다.
“생로병사와 근심 걱정의 괴로움이 싫어, 그것을 버리려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런데는 어찌하여 설법을 하는 자리에서 졸고 있느냐?”
아니룻다는 자신의 허물을 크게 뉘우치며 말하였다.
“이제부터는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다시는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 졸지 않겠습니다.”
이때부터 아니룻다는 밤에도 자지 않고 뜬눈으로 계속 정진하다가 마침내 눈병이 나고 말았다. 부처님은 아니룻다를 타이르셨다.
“아니룻다야, 너무 애쓰면 조바심이 생기고 너무 게으르면 번뇌가 생긴다. 너는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여라.” 그러나 아니룻다는 전에 부처님께 다시는 졸지 않겠다고 맹세한 일을 상기하면서 부처님의 타이름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룻다의 눈병은 날로 심해져 마침내 앞을 못보게 되었다. 그러나 힘써 정진한 끝에 마음의 눈이 열렸다. <증일아함경>
이처럼 참회는 자기 반성에서 출발하여 정진의 강한 동기가 된다. 끊임없는 반성을 통해 삶을 돌이켜보고, 올바르게 깨달음을 향해 가고 있는지, 또는 처음 귀의하였을 때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만약 허물을 발견하면 스스로 부처님 앞에 고백하고 3배, 108배, 1080배, 3000배 등으로 참회해야 한다.
4) 끊임없이 정진하라
처음 먹은 마음을 '초발심(初發心)'이라고 한다. <화엄경>에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이란 말이 있다. ‘처음 마음을 발할 때 곧 정각을 이룬다’ 고 풀이하는데, 이는 ‘처음 먹은 마음이 변치 않고 그대로 있으면 곧 부처님의 경지’라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원을 세우지만 그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변하기 쉽다. ‘차라리 다른 길이 낫지 않을까?’, ‘깨닫지도 못할 걸, 차라리 다른 일을 할까?' 하는 성급한 마음에 처음 마음을 접고 싶을 때가 적지 않을 것이다.
깨달음을 얻겠다는 결심,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의지가 바로 정진이다. 변함없이 정진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진정한 불자의 길이다.
부처님께서 왕사성 근처의 죽림정사에 계실 때였다. 소오나 비구는 영축산에서 쉬지 않고 선정을 닦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정진하는 성문 중에 나도 들어간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번뇌를 끊지 못했다.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집에 돌아가 보시를 행하면서 복을 짓는 것이 낫지 않을까?'
부처님은 소오나의 마음을 살펴 아시고 한 비구를 시켜 그를 불렸다.
“소오나야, 너는 세속에 있을 때 거문고를 잘 탔었다지?”
“네 그랬습니다.”
“네가 거문고를 탈 때 그 줄을 너무 조이면 어떻더냐?”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었을 때는 어떻더냐?”
“그 때도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거나 조이지 않고 알맞게 잘 골라야만 맑고 미묘한 소리가 납니다.”
부처님은 소오나를 기특하게 여기면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너의 공부도 그와 같다. 정진을 할 때 너무 조급해 하면 들뜨게 되고 너무 느리게 하면 게으르게 된다. 그러므로 알맞게 하여 집착하지도 말고 방일하지도 말라.”
소오나는 이때부터 항상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문고를 타는 비유를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오래지 않아 아라한이 되었다. <잡아함경>
아마 많은 수행자들이 소오나 비구처럼 생각한 적이 있을 것이다. 정진하는 과정에서 조급한 마음은 금물이다.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멈춤 없이 굳게 행하면 발원이 꼭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비록 처음의 발심이 약했다 할지라도 한마음으로 정진해 나갈 때, 낙숫물이 돌을 뚫는 것처럼 마침내 위대한 깨달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방일하지 말라.
나는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정각을 이루었다.
한량 없는 온갖 착함도 또한 방일하지 않음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장아함경>
5)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작은 일에서부터
우리는 반가운 이, 그리운 이를 만나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로 그 뜻을 표시한다. 불자들은 스님이나 법우를 만나면 합장을 예를 표한다. 손가락을 가지런하게 모으고, 양 손바닥을 맞대어 마음을 집중한다.
이렇게 다소곳이 고개 숙여 합장하는 마음이 바로 믿음의 출발이다. 합장은 자기 마음의 표현이며, 더 나아가 너와 나의 마음이 하나의 진리 위에서 서로 만났음을 뜻한다. 동시에 존경과 진실과 자비의 마음을 뜻한다.
절을 하고 합장하는 마음에는 자신을 낮추고 남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담겨 있다. 또한 매일 108배를 하면, 교만심을 버리고 하심하게 되어 매사에 성내지 않고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공양 전후에 항상 합장하며 “ 이 음식에 깃든 모든 이의 공덕을 생각하며 감사히 먹겠습니다.”라고 읊조릴 때 자신을 있게 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니, 다른 이에게 해로운 일을 감히 할 수 없을 것이다.
불공을 할 때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아야 한다. 불공은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하고,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며, 열반의 길로 인도하는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의 표시다. 또한 모든 중생에게 회향한다는 뜻도 담고 있기에 중생의 은혜를 갚는 길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을 베푸는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기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과 다름없다. 이러한 마음가짐과 실천이 이 세상을 더욱 맑고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머리를 숙여 합장하고, 공양을 하면서 이웃을 생각하고, 불공이나 발원을 하면서도 자신보다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생각하고, 주위 사람을 부처님 공경하듯이 받드는 자세가 몸에 배도록 노력해야 한다. 모든 불자들이 이런 자세를 취할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화합의 정신이 실현되는 것이다. 겨자씨만한 불씨하나로 수미산처럼 쌓여있는 마른 풀을 다 태울 수 있듯이, 우리들의 조그마한 신행의 불이 세상을 온갖 더러움을 태우고 불국정토를 이 땅에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제3장 부처님의 생애
석가모니 부처님은 룸비니동산에서 태어나 궁정에서 화려한 생활을 누리며 성장했다. 그러나 29세에 출가 수행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고 80세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오로지 길 위에서 삶을 살다가셨다.
부처님의 생애는 한 인간이 태어나 출가하여 진리를 깨치고 부처가 되는 과정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부처가 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을 부처님 같이 하면 반드시 부처가 될 수 있다. 불교를 믿고 행한다는 것은 부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부처님을 닮아가 결국에는 부처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부처님의 탄생, 청소년기의 고민, 출가 성도, 전법과 교화방법, 교단의 성립, 주요 제자들, 열반 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한다. 이를 통해 영원한 인류의 스승이며 등불이신 부처님의 생애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부처님을 본받아 부처님과 같은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하자.
1. 싯달타의 탄생
1) 룸비니의 기쁜 소식
지금으로부터 2600여 년 전, 히말라야산 기슭의 작은 왕국 카필라에 커다란 경사가 생겼다. 마흔이 넘도록 후사가 없던 정반왕에게 왕자가 태어난 것이다. 마야 왕비는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던 중 잠시 들른 룸비니 동산에서 무우수나무 가지를 잡고서 아기를 낳았다. 마야 왕비가 하얀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서 열 달 뒤의 일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는 동서남북의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내가 가장 존귀하다. 온 세상의 모든 괴로움을 내가 다 해결해 주리라(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는 말을 하였다. 소식을 전해들은 정반왕은 태자의 이름을 ‘싯달타’라고 지었다. ‘싯달타’는 모든 것을 이룬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들을 얻은 기쁨도 잠시, 자식을 낳은지 이레 만에 마야 왕비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왕은 마야왕비의 여동생인 마하프라자파티에게 싯달타의 양육을 맡긴다. 마하프라자파티는 그 후 정성을 다해 싯달타를 보살폈다.
왕자가 태어나자 왕은 곳곳에서 오랫동안 수행해온 선인들을 궁으로 초대하여 왕자를 선보였다. 궁으로 초대받은 선인들은 한결같이 왕자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왕자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였다.
“왕자께서는 앞으로 훌륭하게 자라나셔서 온 세상을 덕으로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궁을 떠나 수행자의 길을 택하신다면 깨달음을 이루어 세상에 빛을 비추는 부처가 될 것입니다.”
정반왕은 사랑하는 왕자가 혹시라도 궁을 떠나 구도자가 될까 걱정스러워 왕자의 성 밖 출입을 막고 궁에만 머물게 했다. 그리고 왕자의 주변에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일만 이어지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였다. 덕분에 싯달타 왕자는 자라면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었고 부족한 것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호사스런 나날을 보냈었다. 아버지의 왕궁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온갖 빛깔의 연꽃이 피어 있었다. 그런 것들은 모두가 나를 즐겁게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나는 카시 지방에서 나는 향밖에 쓰지 않았다. 내가 입던 옷도 역시 카시산 이었다. 내가 밖으로 나갈 때는 언제나 양산을 들어주는 시종이 따랐다. 게다가 나는 겨울과 여름과 장마철에 그때 그때 편리하도록 꾸며진 궁전을 세 채나 가지고 있었다. 나는 아름다운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장마철에도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불교성전>
2) 남달났던 어린 시절
(1) 부족함이 없던 소년 시절
왕자는 매우 영특하였다. 왕자가 6살이 되자 궁궐의 법도에 다라 스승에게 가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는 스승을 만나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세상에는 64개의 언어가 있는데 스승님께서는 어떤 언어로 학문을 가르쳐주시겠습니까?“
어린 왕자가 64개 언어의 이름을 하나씩 대면서 정중하지만 당당하게 질문을 던지자 스승은 자신의 한계를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왕자님, 죄송합니다만 저는 두 가지 언어밖에 모릅니다.” <불설보요경-현서품>
또한 왕자는 무예에도 능해서 왕가의 소년들 중에 그를 따를 자가 없었으며, 다른 왕가의 후예들은 그런 싯달타 왕자를 언제나 부러움과 공경, 질시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싯달타 왕자는 자주 깊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부족한 것 없고 오직 쾌락만이 넘쳐나는 궁전에서 지내면서도 종종 알 수 없는 사색에 몰두하였다.
(2) 농경제의 명상
화창한 봄, 한 해의 농사를 시작하며 풍작을 기원하는 농경제에 정반왕과 싯달타 왕자가 참석했다. 농부들의 힘차게 땅을 갈자 겨우내 굳어있던 흙이 따뜻한 햇살 아래 파헤쳐졌다. 그러자 땅속에 숨어 있던 애벌레들이 꿈틀거리며 기어 나왔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매 한 마리가 애벌레를 낚아채어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환희에 찬 봄날에 왕자는 약육강식의 현실을 목격한 것이다. 왕자는 그 광경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대체 이것은 무엇인가.? 생명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다른 생명에게 무참히 짓밟혔다. 하지만 매도 그것을 먹지 않고는 생명을 이어갈 수 없지 않는가.’
왕자는 깊은 사색에 잠겼다. 한참 후 축제에 정신이 팔려 있던 보모들이 왕자를 찾으러 왔을 때, 그들은 참으로 신기한 현상을 목격하였다. 주변의 나무들은 모두 해를 따라 그늘을 옮겨가는데 왕자가 앉아 있는 나무 그늘은 움직이지 않고 사색에 잠긴 왕자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광경을 목격한 정반왕은 자기도 모르게 아들인 싯달타 왕자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3) 세상의 실상을 목격하다
싯달타 왕자가 자주 깊은 사색에 잠기는 것을 우려한 왕은 서둘러 아름다운 여인 야소다라를 왕자의 배필로 맞아들였다. 싯달타가 19세 되던 해였다.
어느 날 왕자는 말을 타고 성의 동문 밖으로 나갔다가 지금까지 만나본 적 없는 아주 괴이한 사람과 마주쳤다. 그의 얼굴은 주름투성이인데다 눈물과 콧물, 그리고 침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몸을 지탱하기위해 지팡이를 짚고 있었고 등이 활처럼 굽어 사지를 덜덜 떨고 있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기는 왕자에게 마부가 말했다.
“왕자님, 저 사람은 노인입니다. 왕자님이나 저 역시 나이가 들면 저렇게 늙어갈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늙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싯달타는 노인의 모습에 놀라기도 하였지만, 자신도 저런 모습을 피할 길이 없다는 마부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왕자는 남문에서는 병자를, 서문에서는 죽은 이를 차례로 만났다.
‘대체 사람이 병에 걸리지 않을 수는 없단 말인가?“
“누구나 저 시체처럼 죽을 수밖에 없단 말인가?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 것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사람들은 저리도 슬피운단 말인가? 늙거나 병들거나 죽음이 없도록, 괴롭지 않도록 하면 되지 않는가?‘
다음날 왕자는 북문으로 나갔다가 남들과는 차림새가 다른 사람을 만났다.
“저 사람은 사문(沙門)입니다. 행복을 찾아서 집을 떠나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여기서 행복이란 바로 니르바나(nirvana)이다. 니르바나란 ‘불어서 끄다’라는 뜻이다. 불이 꺼지듯 번뇌의 불이 꺼지는 것을 말한다. 늙음과 병듦, 그리고 죽음이라는 고통의 불에 몸과 마음을 태우며 신음하는 사람들의 괴로움이 고요히 사라진 상태이다. 싯달타는 행복이란 말에 가슴 가득히 기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세상에는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넘어선 행복의 경지도 분명히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태어난 자는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언젠가는 소멸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생로병사의 엄연한 사실에 눈을 감게 하고 더 큰 쾌락으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부딪혀야 할 존재의 결말에 대해 인간은 두려워하고 피하다 끝내는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는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이런 괴로움의 순환이 시작되었을까?
이상 왕자가 네 문에서 보았던 일들을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 한다. 싯달타 왕자의 사문유관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현실적으로 인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유하기 시작하는, 즉 머나먼 구도를 위한 항해의 시작을 암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출가와 고행
1) 출가를 결심하다
(1) 아들의 탄생과 출가의 결심
사문을 만나고 돌아오는 싯달타 왕자의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윘다. 반면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정반왕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 잡혔다.
과연 정반왕의 예감은 들어맞았다. 그 후로 싯달타왕자는 부왕에게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여러 차례 청하였다. 그러 때마다 왕은 완강하게 거절하며 이렇게 달랬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 꼭 출가를 하지 않더라도 좋은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지만 왕자의 결심은 확고했다.
어느 늦은 밤, 홀로 궁전을 거닐며서 언제쯤 출가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싯달타는 자신의 아들이 태어 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싯달타 왕자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였다.
“아 , 네게 큰 장애가 생겼구나.”
왕자는 아기의 이름을 라훌라라고 지었다. 라훌라는 장애, 방해라는 뜻이다. 홀가분하게 가족과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려던 그에게 자식이 태어 났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출가를 막는 장애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일은 오히려 싯달타의 출가를 재촉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더 큰 애착이 생기기 전에 자신의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내와 아들의 얼굴을 보고 떠나려던 왕자는 자칫 그들을 깨울까 봐 그만두었다. 그는 모두가 잠든 밤에 가족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성문을 나섰다.
(2) 성을 나서다
싯달타는 말을 타고 서둘러 성을 빠져 나왔다. 정반왕이 이상한 조짐을 눈치채고 있던 터라 몇 겹으로 성문을 잠가 두었지만, 싯달타의 출가를 막을 수 없었다.
마부는 울면서 마지막까지 싯달타를 말렸다. 심지어는 악마까지 나타나서 이렇게 속삭였다.
“이제 7일만 지나면 당신은 세상을 다스릴 전륜성왕이 될 것이다. 7밀만 꾹 참고 기다려라. 그러면 온 세상의 부귀 영화가 모두 당신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악마의 속삭임도 왕자의 출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왕자가 탄 말발굽 소리가 정반왕과 도성의 사람들을 깨울까 봐 하늘의 신들이 말발굽 밑에 자신들의 손을 깔아서 소리가 나지 않게 하였다고 한다.
성을 나온 싯달타는 말과 마부를 돌려보낸 뒤, 가지고 있던 칼로 머리카락과 수염을 자르고 지나가던 사냥꾼과 옷을 바꿔 입었다. 이제는 누가 봐도 완벽한 수행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바이샬리를 향해 길을 떠났다.
왕위도 버리고 사랑하는 아내 야소다라와 아들 라훌라마저 뒤로한 채 깨달음의 길로 나와 간 이 날이 태자 나이 29세 되던 해 음력 2월 8일이었다.
2) 스승을 찾아서
(1) 요가행자를 찾아가다
부처님이 태어나실 무렵의 인도사회에는 매우 다양한 종교와 사상이 펴져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인도는 계급제도가 엄격한 곳이다. 부처님 당시 인도의 주로 종교는 브라만교였다. 당시 사람들은 태초에 브라만이라는 신이 있어 열을 일으켜 하늘과 땅을 낳고,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해냈다고 믿었다. 따라서 브라만은 우주를 창조한 인격신이고, 우주의 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브라만 신을 찬양하는 의식을 집전하고 제사를 올릴 수 있는 자격은 사회의 최상위 계급인 바라문들에게만 제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바라문 사상을 부정하며 나타난 혁신적인 종교 수행자들은 ‘부지런히 수행하는 사람’ 이라는 뜻으로 사문(沙門)이라고 불렸다. 그들은 바라문교의 성전인 <베다>의 권위를 부정하고, 집을 떠나서 걸식 생활을 하며 수행하였다. 이들은 당시 신흥 도시의 왕후, 귀족, 부호의 정치적. 경제적 원조 아래 활발하게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경전에는 당시 대표적인 사상가 여섯 명을 육사외도(당시 인도지방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6인의 철학자. 종교가의 유파)라고 부르며 여러 차례 소개하고 있다.
수행자 고타마(최상의 소란 뜻으로 부처님이 성)는 성을 나온 뒤에 이러한 사상가들이 대거 몰려 있는 바이샬리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요가의 대가인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를 찾아가 그들이 궁극의 경지라고 이야기하는 높은 선정의 단계를 체험하였다. 하지만 이 선정을 통해서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었다. 선정에 들었을 때는 번민도 괴로움이 사라지지만 선정에서 나오면 여전히 욕심과 어리석음의 존재 그 자체로 돌아갔다. 자신들의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고타마에게 그들은 자신들의 교단에 남아 함께 제자들을 가르쳐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고타마는 거절하고 그들 곁을 떠났다.
(2) 6년간의 치열한 고행
이제 고타마는 당시 많은 수행자들이 걸어갔던 치열한 고행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고행은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정도로 치열했다.
"나는 하루를 대추 한 알로 보냈으며, 멥쌀 한 알을 먹고도 지냈으며, 하루에 한 끼, 사흘에 한 끼, 이윽고 이레에 한 끼를 먹고 보름에 한 끼를 먹었다. 그래서 내 몸은 무척 수척해졌다. 내 볼기는 마치 낙타의 발 같았고, 내 갈비뼈는 마치 오래 묵은 집의 무너진 서까래 같았다. 내 뱃가죽은 등뼈에 들어 붙었기 때문에 일어서려고 하면 머리를 처박고 넘어졌다. 살갖은 오이가 말라비틀어진 것 같고, 손바닥으로 몸을 만지면 몸의 털이 뽑혔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말했다. ‘아, 싯달타 태자는 이미 목숨을 마쳤구나. 이제 곧 죽을 것이다'라고 ..."<불소행찬>
고타마의 고행은 6년이나 이어졌다. 그의 길고도 혹독한 고행은 그를 죽음 직전의 상태로까지 몰아갔다. 정반왕이 아들을 염려하여 보냈던 다섯명의 청년도 고타마와 함께 수행자로서 고행을 하였다.
당시 출가 사문이나 인도 사람들은 고행을 함으로서 욕망을 억제하고 정신생활의 향상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고행을 한 사람은 신비하고 초인간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고타마는 고행에 대해 깊은 회의를 품게 되었다. 고행은 육체를 극단적으로 학대하기만 할 뿐이었다. 몸의 피폐는 정신의 피폐를 가져왔고, 그 상태에서 맞게 되는 행복의 경지는 결코 진정한 열반의 단계라고 할 수 없었다.
결국 고타마는 고행을 포기하였다. 그것은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풍조는 고행을 매우 중시 하던 터라 고타마의 고행 포기는 다른 수행자들로부터 ‘타락한 사문’이라는 모진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3. 성도와 초전법륜
1) 보리수 아래로 가다
고타마는 고행으로 지친 몸을 보살펴야 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네란자라강으로 가서 깨끗이 목욕을 했다. 때마침 그곳을 지니던 수자타가 고타마에게 정성이 담긴 우유죽을 공양 올렸다. 고타마는 우유죽을 마시고 기력을 되찾았다.
그 광경을 본 다섯 명의 수행자들을 경악하였다.
“저럴 수가 있는가? 고타마는 타락했다. 고행하는 자가 목욕을 하고 우유죽까지 마시다니 ... 이제 저자는 동료가 아니다.”
그들은 고타마를 비난하며 바라나시의 녹야원으로 떠나갔다. 동료들마저 떠나자 고타마는 이제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외롭지 않았다. 그의 머릿 속에는 어떻게 하면 바르고 완전하게 행복한 경지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주변을 둘러본 고타마는 보리수 한 그루를 발견하였다. 마침 근처에서 꼴을 베던 사람이 자리에 깔고 앉을 짚을 공손하게 바쳤다. 경전에서는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고타마를 '보살'이라 부르고 있다. 보리수 아래에 짚을 깔고 앉은 보살은 결심하였다.
“바른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결코 이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으리라.”
2) 악마를 물리치다
보살이 보리수 아래에 반듯하게 자리를 잡고 앉자 악마가 나타났다.
“일어서라, 수행자여. 그곳은 네 자리가 아니다.”
악마는 부처님의 일생 중 여러 번 출현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를 부처님이 인간적인 내면의 속삭임 또는 갈등이라고 설명하기도 하고, 상황을 좀 더 극적으로 이끌기 위한 문학적 장치라고도 한다.
악마가 나타나 보살에게 온갖 공세를 퍼부으며 어서 보리수 아래에서 떠나라고 협박하자 보살은 차분하게 말하였다.
“나는 전생에 착한 일을 하였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
그러자 악마가 기세등등하게 물었다.
“그대가 전생에 지은 착한 일을 누가 증명하겠는가? 주변을 둘러보아라. 그대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과연 악마의 위세에 눌려 보리수 주변에 있던 모든 신들마저 도망치고 아무도 없었다. 보살은 철저하게 혼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보살은 겁에 질리거나 당황하지 않고 참선 자세에서 조용히 오른손을 풀어 손가락을 땅을 가리켰다.
“이 대지가 내가 지난 생에 선업을 쌓아온 것을 증명하리라.”
그러자 대지가 크게 진동하였다. 이에 놀란 악마와 그 무리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하고 사라졌다.
악마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보살은 이윽고 고요히 삼매에 들었다.
3) 부처가 되다
'사람은 왜 그리도 괴로움에 몸부림치는가?
그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소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왜 생겨난 것일까? 그것은 태어나기 때문이다. 태어남이란 왜 생겼을까? 그것은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보살은 자신이 품고 있던 의문들을 하나씩 사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찾아낸 근원에는 바로 존재에 대한 무지, 어리석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어리석음이 있기에 생명들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고통의 시간 속에서 나고 죽기를 반복하였던 것이다.
보살은 깊은 선정에 잠긴 채 천천히 사색해 나갔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는 연기의 진리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토록 끈질기게 자신을 따라 다니며 괴롭혔던 악마도 물리쳤고 세상은 지금 깊은 잠에 잠겨있다. 적막한 세상 속에서 보살만이 홀로 깨어 있었다.
그리하여 새벽별이 반짝이는 순간 보살에게는 더할 나의 없이 눈부신 세계가 문을 열었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어가며 고통의 눈물을 흘리는 이 사바세계로부터 생사가 사라진 해탈열반의 세계가 보살을 향해 문을 활짝 열었던 것이다.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진 존재인지를 확연하게 아는 순간, 보살에게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이 열렸다. 지금까지 지녀왔던 세상과 존재에 대한 그릇된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에게는 밝은 지혜만이 자리 잡았다. 오직 지혜로만 충만해졌다. 그에게는 이제 나고 죽는 일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보살은 이제 깨달았다. 그는 부처가 되었다. 이 때가 부처님이 35세 되던 해 음력 12월 8일 이었다. 이 날은 성도절 이라 하여, 사실상 ‘불교’가 시작된 매우 뜻 깊은 날이다.
4)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은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오직 깨끗한 기쁨만이 가득 치올라 49일 동안 보리수 아래에서 진리를 깨달은 자로서의 완전히 기쁨을 만끽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기쁨을 누리던 부처님에게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사랑하는 가족과 제대로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궁을 나선 것, 이제나 저제나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정반왕, 그리고 그를 따르던 무수한 사람들, 깨달으면 이내 찾아와서 그 소식을 전해주겠다고 약속한 사람들..... .
마침내 연꽃 같은 눈을 들어 사방을 천천히 살피며 가장 먼저 이 가르침을 들을만한 사람이 어디에 있을지 찾아보았다. 부처님은 자신을 성을 나와서 찾아갔던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를 기억해 냈지만,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부처님은 다음으로 마지막까지 고행을 함께하였던 다섯 명의 수행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들이 고행하고 있는 녹야원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녹야원에서 고행하고 있던 다섯 수행자들은 부처님이 다가가자 처음에는 무시하기로 약속하였다. 하지만 부처님의 위엄과 자비에 압도 되어 자신들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난 정중하게 맞이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친구여.”
그리고 부처님은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그들이 현재 닦고 있는 고행이 왜 그릇된 것인가를 지적하기 위해 ‘중도’의 가르침을 펼치셨다.
천천히 눈이 뜨이고 마음이 열리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부처님은, 곧이어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사라짐, 괴로움을 사라 지게 하는 여덟 가지 바른 길(팔정도)의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를 들려주셨다. 다섯 명의 수행자 중에서 교진여가 가장 먼저 모든 번뇌를 완전히 없애 버린 성자의 경지에 들어 갔다. 곧이어 네 명의 수행자가 차례로 번뇌의 속박에서 완전히 풀려나 아라한이 되었다.
며칠 뒤 야사라는 청년이 친구들과 함께 부처님 계신 곳으로 와 법문을 들었다. 야사와 그의 친구들은 법문을 듣는 순간 마음이 열려 번뇌가 완전히 사라진 아라한이 되었다. 그리하여 세상에는 부처님과 그 제자인 60명의 아라한이 생겨나게 되었다. 아들을 찾자온 야사의 부모도 부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듣고 최초의 재가신자가 되었다.
이리하여 세상에는 법을 설하는 부처님과 진리 이 가르침, 그리고 그 진리를 수행하는 제자들이 세 가지 보물, 즉 삼보가 갖추어졌다. 나아가 출가 제자와 재가신자가 모두 갖추어져 수행공동체인 승가가 이루어졌다.
부처님은 아라한의 경지에 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간과 신들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전도를 떠나되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이여, 처음도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을 설하라. 사람 중에는 마음의 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거니와 법을 듣지 못한다면 그들도 악에 떨어지고 말리라. 들으면 법을 깨달을 것이 아닌가. 비구들이여, 나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로 가리라.
인도의 북쪽 땅, 녹야원에서 구르기 시작한 진리의 수레바퀴는 이제 세상을 향해 튼실하게 자취를 남기며 그르기 시작하였다. 진리의 수레가 닿는 곳이면 사람들은 더 이상 슬픔과 괴로움과 번민의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되었다. 괴로움의 원인을 찾아내고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는 묘약이 수레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4. 제자들의 귀의
1) 가섭 삼형제의 귀의
전도선언을 한 부처님은 마가다국 우루벨라도 향하였다. 그곳에는 마가다국의 위대한 종교가인 가섭 삼형제가 살고 있었다. 불을 숭배하며 제사를 지내면서 사람들의 두터운 신망과 귀의를 받고 있던 가섭 삼형제는 자신들을 추종하던 천 명의 제자들과 함께 부처님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고 귀의하였다.
젊은 청년 석가모니(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으로 깨달은 후의 고타마 싯달타를 말한다)가 이들 모두를 교화한 사건은 마가다국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 이 사건으로 사람들은 부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께 귀의하게 되었다. 빔비사라왕은 부처님께 자신이 벨루바나 동산을 기증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불교 최초의 절 죽림정사이다.
2) 십대 제자
(1) 지혜제일 사리불과 신통제일 목련
사리불과 목련존자를 비롯한 뛰어난 수행자들의 귀의도 이어졌다. 사리불과 목련존자는 어려서부터 아주 절친한 친구 사이였는데, 진리의 스승을 찾아 함께 집을 나섰다. 둘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그런 분을 만나면 서로에게 제일 먼저 알려주어 한 스승 아래에서 제자가 될 것을 약속하였다.
사리불은 지혜가 매우 뛰어나서, 부처님께서 간략하게 법을 설하시고 자리를 뜨면 도반들에게 자세히 설명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훗날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교화한 뒤에 열반에 들었다.
목련존자는 신통력이 가장 뛰어난 제자였다. 그는 신통력으로 중생이 죽은 뒤에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는지를 환희 볼 수 있었다. 살아생전 악행을 일삼았던 자신의 어머니가 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를 구제하기 위해 우란분재를 올린 주인공이다.
부처님은 이 두 사람을 가리켜 중생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라고 칭찬하셨으며, 두 사람이 부처님보다 앞서 열반에 들자 법회의 자리가 텅 빈 것 같다는 탄식을 하실 정도로 슬퍼하셨다
.
(2) 두타제일 가섭과 다문제일 아난
‘두타’는 먼지를 털어내다는 뜻으로, 원리 원칙에 따라 철저하게 수행한 가섭존자를 상징하는 말이다. 부유한 집안 출신인 그는 아름다운 아내를 맞아들인 뒤에 아내와 함께 스승을 찾아 출가하였다. 부처님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자신의 옷을 부처님께 바치고 부처님의 허름한 가사를 무려 받았다. 가섭존자는 부처님이 열반에 들고난 후 부처님이 가르침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을 염려하여, 5백 명의 아라한을 칠엽굴에 모이게 해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계율을 모두 모으는 데 앞장섰다.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시자이다. 서서히 노년에 접어든 부처님이 아난을 시자로 삼고 싶어 하자. 자신에게 주어질 특혜를 거절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시자가 되었다. 온화한 성품의 아난은 부처님을 지극히 시봉하는 데에 자신의 출가생활을 다 바쳤다. 특히 기억력과 집중력이 매우 뛰어나 부처님 열반 직후 열린 결집에서 교리에 관한 부분을 전부 암송해내는 역할을 맡았다.
(3) 밀행제일 라훌라와 지계제일 우팔리
라훌라는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에 낳은 아들이다. 처음에는 수행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많이 방황하였으나 부처님의 일깨움을 계기로 마음을 다잡고 조용히 정진에 임하여 큰 깨달음을 이루었다. 남의 눈에 뛰지 않을 때도 은밀하게 스스로 행할 바를 실천하여 밀행제일 이라 한다.
우팔리는 본래 석가족의 이발사였다. 석가족의 왕자들이 부처님을 따라나설 때 그들의 머리를 깎기 위해 함께 나섰다가 출가한 사람이다. 신분이 낮은 만큼 행동거지에 더욱 세밀하게 신경을 써 조금이라도 규율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한 결과, 부처님 열반 직후 거행된 결집에서 율을 암송하는 큰 역할을 맡았다.
(4) 천안제일 아나율과 해공제일 수보리
아나율이 눈이 멀게 된 일화는 유명하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다가 꾸벅꾸벅 졸던 아나율은 부처님의 꾸중을 듣고 평생 잠들지 않겠다고 맹세를 한다. 결국 시력을 잃고 말았지만 그 대신 사람들의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생겼다.
수보리는 ‘공’의 이치를 가장 잘 이해한 제자이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하늘에 있는 생모인 마야 왕비에게 법문을 하고 내려오신 적이 있었다. 그때 모든 제자들은 부처님을 맞이하러 몰려 나갔다. 하지만 수보리는 육신의 부처가 아닌 공한 성품으로서의 세존을 맞이하는 것이 진정한 가치가 있음을 깨달아 고요히 선정 속에서 부처님을 가장 먼저 맞이한 일화로 유명하다.
(5) 논의제일 가전연과 전법제일 부루나
가전연은 부처님이 활동하던 지역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서인도 출신으로, 불교가 전파 되지 않았던 변방지역에 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퍼뜨린 사람이다. 특히 까다로운 교리에 대해 치밀한 의견을 개진하는 데에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부루나는 전법의 상징이다. 거칠기 짝이 없는 지역에 포교하러 갈 때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굳은 의지를 밝혀 부처님 마저 감탄하게 한 제자이다.
3) 비구니 교단이 만들어지다
부왕인 정반왕의 간곡한 요청으로 이루어진 부처님의 귀향은 카필라국 사람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왕가의 왕자들이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였고, 싯달타 왕자를 길러준 마하프라자파티와 아내인 야소다라를 비롯한 카필라국 여인들도 부처님을 따라 출가제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맨발로 부처님을 따라나섰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출가를 하락 받지 못하였다.
다행히 아난존자가 그들을 대신하여 부처님께 간곡하게 청하였고, 부처님은 여덟 가지의 조건을 내세운 뒤에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셨다. 이로써 마침내 여성 출가자, 즉 비구니 승가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4) 승가의 정신
부처님께서 진리를 전파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앞다 투어 제자가 되었다.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공통된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이들은 하나의 수행공동체 공동체를 이루었는데, 이것이 바로 승가이다. 온갖 강물이 제각각의 이름으로 불렸다가도 바다로 흘러들면 그 이름들을 모두 버리고 오직 바다라는 하나의 이름만을 지니듯이, 사람들은 출가하기 전에는 각자의 성과 이름과 계급을 지녔지만 출가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되면 부처님을 따라 ‘석’이라는 성을 갖는다.
승가에는 엄격한 계율이 적용되지만 부처님은 상황에 따라서 매우 탄력적으로 대응하셨다. 이런 부처님의 방침을 못마땅하게 여긴 데바닷다는 엄격한 계율을 내세우며 엄수할 것을 촉구하였지만, 부처님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하였다. 부처님은 규율과 귄위 아래획일화 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구성원 각자의 개성과 특성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공통된 목표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울타리를 만들고자 하셨던 것이다.
부처님은 열반에 드실 때에도 후계자를 두지 않았는데, 그것은 바로 승가 구성원들의 자율성, 자발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승가의 덕목이 화합인 점, 의견을 수렴할 때는 만장일치제를 선택한 점 등도 승가에 대한 부처님의 운영방침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5. 길에서 만난 사람들
1) 급고독장자의 기원정사 건립
죽림정사와 함께 불교의 2대 정사로 꼽히는 기원장서는 사위국의 부유한 상인인 급고독장자가 부처님께 기증한 절이다.
급고독장자는 마가다국의 친구 집에 들렀다가 부처님의 이름을 듣고 전률을 금치 못하였다. 그는 부처님을 찾아가 설법을 듣고 크게 감화를 받아 고향으로 부처님을 초대 하였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건립된 기원정사는 불교의 거점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급고독장자는 평생 동안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으며, 마음속 깊이 부처님을 향한 신심을 품은 재가불자이다. 그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이 따랐다. 부처님은 그런 급고독장자에게 대중들을 거느리는 네 가지방법인 보시하고, 다정한 말을 건네며, 이로운 일을 하고, 함께 일을 하는 사섭법을 갖춘 사람이라고 친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는 재가불자의 가장 완벽한 본보기로 경전에 자주등장하고 있다.
2) 똥치기 니이다나를 만나다
인도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신분제도가 매우 엄격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성제도이다. 이 네 가지 계층에도 들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상위 계급의 사람들은 부정탄다하여 그들과의 접촉을 아예 금하고 있었다. 똥치기 니이다나는 바로 그런 불가촉 천민이었다.
어느 날 아침, 부처님은 그런 니이다나에게 다가가셨다. 그는 부처님이 다가오자 당황하여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결국 등에지고 있던 오물을 쏟고 말았다. 부처님이 니이다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일부러 그대를 찾아왔는데 나를 피해 어디로가려 하느냐?”
“제 몸이 더러워 감히 부처님을 가까이 할 수없습니다. 저같이 천하디 천한 죄업 중생도 도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헤아릴 수 없시 오랜 세월 동안 수행하면서 부처가 된 것은 바로 죄업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을 위해서이다.”
교단에는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올곧게 수행하여 깨달은 이들이 많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가 전생에 무엇을 했으며 어떤 팔자를 타고 났는가 보다는 현재 그가 어떤 생각을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가를 가장 중시하기 때문이다.
3)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주리반특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려면 머리가 좋아야 할까? 그렇지 않다. 부처님 당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제자로 승단에 들어왔으니. 그 이름은 주리반특이다.
그는 너무 머리가 나빠서 아무리 간단한 가르침를 주어도 단 한 마디도 외우지 못하였다. 결국 사람들의 조롱을 받고 승단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자신의 처지가 가여워 슬피 우는 주리반특에게 부처님은 빗자루를 건네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라 ‘먼지를 털자’라는 말만 반복해서 외워라.”
주리반특은 그날부터 오직 ‘먼지를 털자’라는 말만 반복해서 외웠다. 하지만 머리가 나빠서 ‘먼지’를 생각하면 ‘털자’라는 말이 생가나지 않았다. 하지만 열심히 그 두 단어만을 생각한 결과, 그는 먼지가 마음 속의 번뇌를 가르키며, 털어낸다는 것은 오직 지혜를 닦음으로써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서서히 뛰어난 경지를 다가갔던 것이다.
진리를 깨우치는 데에는 머리가 좋고 나쁜 것이 중요하지 않으며, 자신의 온 몸과 마음으로 절실하게 체험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것만이 성자의 길에 제대로 들어서는 길임을 부처님은 가르쳐주신 것이다.
3) 희대의 살인마 앙굴라마라
앙굴라마라는 스승의 아내의 모함으로 스승에게 무시무시한 지시를 받았다.
“백명의 사람을 죽여서 그들의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라. 그러면 그대는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
너무나 순수했던 앙굴리마라는 스승의 지시를 어길 수가 없었다. 그는 이내 칼을 들고 거리로 나섰으며 결국 99명의 목숨을 빼앗고 말았다. 그리고 마지막 백 번째 희생자로 자신의 어머니를 해치려고 하였다. 그 순간 부처님이 그곳으로 나아가서 앙굴리마라의 끔찍한 살인을 막았다.
희대의 살인마를 잡기 위해 당시 군대까지 동원될 정도였지만, 부처님은 평온하고 담담한 보습으로 앙굴리마라의 손에서 흉기를 내려놓게 하였다. 그리고 그를 제자로 받아들여 진리 속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셨다.
출가 후에 탁발을 하러 나간 앙굴리마라는 사람들의 모진 비난과 매질을 받아야 했지만 자신의 죄업에 대한 과보로서 기꺼이 받아들였고, 완전한 참회를 통해 새롭게 수행자의 길을 걸어 갔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는 귀한 목숨이라는 사실을 입중해준 사례이다.
5) 물싸움을 조정하다
부처님의 고향인 카필라와 이웃 부족인 콜리야는 로히니강을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물을 끌어다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심한 가뭄이 계속되자 양쪽 부족 사람들은 물을 좀 더 확보하기 위해 강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몇 사람의 입씨름에서 비롯된 싸움이 급기야 군대까지 동원 되기에 이르렀다. 이 소식을 접한 부처님은 서둘러 분쟁지역으로 달려 가셨다. 그리고 이렇게 물으셨다.
“그대들은 물과 사람 중에 어느 쪽이 더 소중하오?”
“물보다는 사람이 훨씬 소중합니다.”
“그런데 물 때문에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버리려고 합니까? 그건 옳지 못한 일입니다. 부디 마음 속에 원한을 품지 말고 살아가시오. 원한을 벗고 고뇌도 벗고 탐욕도 벗어 좋고 살아가시오.”
부처님의 중재로 싸움은 끝났다. 하마터면 피로 물들 뻔한 로히니강은 다시 두 부족의 소중한 식수원이 되었다.
부처님은 세속의 이해관계를 완전히 떠난 분이셨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 먼 곳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현명하게 중재를 하셨고, 이런 부처님의 교화로 인해사람들은 마음 속에서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삼독의 불길을 끌 수 있었다.
6) 부왕의 임종
부처님 당시에는 가장 높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출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분이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가족과 집안의소중한 인연을 소홀하게 여기기 십상이었다.
부처님이 고향을 방문하였을 때 카필라국의 왕족들이 부처님께귀의하여 출가하였다. 홀로 남은 정반왕은 쓸쓸하게 여생을 보내야 했고 노년에는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부처님은 그 당시 마가다국에 머물고 계셨는데 부왕이 위독하다는 소리를 듣자 한걸음에 고향으로 달려가셨다.
임종을 앞두고 사랑하는 아들을 만난 정반왕은 부처님께 자신을 극락세계로 인도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부처님은 부왕의 이마에 손을 얹고서 고요한 목소리로 이렇게 축원하셨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왕의 덕은 청정하며 마음의 때도 없어 졌습니다. 조금도 걱정하거나 괴로워 마십시오. 지금까지 들어온 진리와 선행을 기억해 내십시오.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십시오.”
정반왕은 아난과 손자인 라훌라를 비롯한 뛰어난 수행자들에게 둘러 싸여 부처님의 손을 잡고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다.
부처님은 후세에 사람들이 포악해서 부모의 은혜를 저버리는 불효자들이 많이 생길 것을 우려해, 몸소 부왕의 관을 메고 화장터로 가려 하셨다. 그 때 하늘의 신들이 부처님의 뜻을 알고 부왕의 관을 자신들이 메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향로를 들고 관 앞에 서서 화장터로 향하였다.
7) 귀한 인연을 놓친 사람들
부처님은 누구를 만나든 단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법을 설하였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종종 아쉽게도 그 귀한 인연을 놓친 사람들에 대해소개하고 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직후 녹야원의 다섯 수행자를 만나려 가기 직전에 우파카라는 이교도를 만났다. 우파카가 부처님께 물었다.
“당신은 얼굴이 매우 환하게 빛이 납니다. 대체 어느 분 밑에서 수행을 하십니까?”
부처님 대답했다.
“나는 모든 것을 이긴 자요, 모든 것을 안 자이다. 나를 견줄 만한 자도 없고 나를 가르친 자도 없다. 나는 깨달은 자 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파타는 “어, 그래요?”라고만 대답하고는 지나쳐 가버렸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부처님께서 사위국에 계실 때 그 나라에 80세가 된 부자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관찰해 보니 이 사람은 그날 이 다가기전에 세상을 떠날 목숨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런 줄도 모르고 열심히 집을 증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부처님 그를 찾아가서 물으셨다.
“노인장, 얼마나 고생스럽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 집들은 누가 살려고 이렇게 화려하게 증축하십니까?”
“사랑채는 손님용이고, 별당은 내가 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식솔들을 모두모아서 각각 방을 하나씩 줄 것이고, 하인들이 잘 방도 마련 중입니다.”
그런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노인장의 이름은 익히들어 왔습니다. 마침 생사와 관견된 중요한 게송이 하나 있어 들려주고 싶은데, 잠 깐 일을 멈추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 제가 지금 너무나 바쁩니다. 뒷날 다시 오시면 그 때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노인은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부처님의 설법을 거절하였다 부처님께서 안타가운 심정으로 그곳을 떠나셨고, 잠시 후 노인의 머리위에 서까래가 떨어져 노인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법구비유경>
불교는 그 무엇보다도 자발성을 강조하는 종교이다. 자신에게 생로병사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아무리 채워도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법문을 들어도 단지 듣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그 법문이 자기 것이 되고 내면에 커다란 변화가 생길 때까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왜야하면 부처님은 그런 진정한 자기를 찾아가는 길은 안내자일 뿐, 나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6. 위대한 최후
1) 부처님 말년의 슬픈 일
사람들에게 괴로움과 번뇌, 탐욕과 성냄을 벗어나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함 설법을 해온 부처님도 어느덧 노년에 달셨다. 그러나 부처님이일생은 순타하지만은 않았다. 노년의 부처님에게는 세가지 불행한 일있었다. 코살라국의 유리왕이 카필라국을 치기위해 군대를 몰고 간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부처님은 서둘러 길을 나섰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큰 길 한가운데에 고요히 정좌하시고 코살라국 군대가 오기를 기다리셨다. 부처님을 발견한 유리왕은 마차에서 내려 절을하고 여쭈었다.
“길가에 서늘한 나무 그늘이 있는데도 어찌하여 길 한가운데 뙤약볕아래에 계십니까?”
주처님은 대답하셨다.
“친족의 그늘이 나무 그늘보다 더 시원합니다.”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린 유리왕은 군대를 돌렸다. 이렇게 하기를 세 차례, 하지만 카필라국이 빌미를 제공한 터였으므로 부처님도 유리왕을 더이상 말릴 수 없었다. 결국 카필라국은 멸망하였다.
두 번째는 부처님이 너무나 소중하게 여겼던 사리불과 목련존자가 부처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건이다. 사리불은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집에서 최후를 맞이하였고, 목련존자는 이교도들의 박해를 받아 순교하였다. 부처님은 두사람이 떠난 후 교단을 둘러보며 매우 허전해하시면서 세상의 덧없음을 거듭 말씀하셨다.
세 번째는 부처님의 사촌 동생인 데바닷다가 교단을 분열시킨 일어었다. 그는 마가다국의 왕자 아사세를 부추겨 왕위를 찬탈하게 하고 자신이 교단의 제일인자가 되려고 계획하였다. 아사세는 부왕인 빔비사라를 추출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데바닷다는 끝내 부처님을 해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사촌이자 제자인 데바닷다가 교단을 분열시키고 부처님에게 해를 가하려 한 것은 부처님의 일생과 교단에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2) 마지막 여정
부처님께서 35세에 깨달음을 이루신 뒤 45년의 세월이 흘렀다. 45년 동안 부처님은 인도 곳곳을 맨발로 다니시며 숱한 사람들을 만나 자비의 마음으로 가르침을 펼치셨다. 어느덧 80세에 이른 부처님은 이제 마지막 전법의 여행에 나셨다. 아직까지 부처님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전파하면서 천천히 쿠시나가라로 나아가셨다.
어느 날 시자 아난은 두 손으로 부처님의 발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탄식하였다.
“거룩하신 몸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심하게 주름이 졌습니다.”
그러자 주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렇다, 아난아. 그대의 말과 같다. 지금 여래의 몸은 온통 주름 투성이다. 오늘의 이 몸은 예전의 몸과 다르다 몸이란 병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병들어야 할 중생은 병의 핍박을 받고, 죽어야할 중생은 죽음의 핍박을 받는 법이다. 지금 여래는 나이 80이 넘었구나.” <증일아함경>
이 세상에 영원하거나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아무리 불생불멸의 진리를 깨달은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 육신은 인연에 따라 무너지기 마련이다.
또한 틈나는 대로제자와 신자들에게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자주 들려주셨다.
아난이여, 나는 이제 늙고 지쳤다. 인생의 기나긴 길을 걸어와 어느 새 노령에 이르렀다. 여든 이 되니 이 몸을 움직이는 것이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끈의 도움으로 간신히 움직이는 것과 같구나. 세상은 이 처럼 덧 없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부디 이 세상에서 스스로를 섬으로 삼고 스스로를 의지하라.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 <마하파리닙바나경>
부처님의 이와 같은 유언은 [대반열반경]에도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 (自燈明 法燈明 자등명 법등명)
스스로에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自歸依 法歸依 자귀의 법귀의)
인간은 덧없는 준재이다. 그러면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렇게 불완한 자기 자신이 바로 깨달음을 이루어가는 중임을 거듭 강조하셨다. 부처님이 세상을 떠나신 뒤에 믿고 의지할 만한 대상은 자기 자신과 부처님이 남겨놓은 법 밖에 없다는 말씀은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부처님은 서서히 최후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리셨다. 어느 날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앞으로 석 달 뒤에 열반에 들겠다.”
아난은 부처님 안 계신 세상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디 가서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듣고, 마음 속 의문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만연했던 것이다. 마지막 당부를 거듭 간청하는 아난에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아난이여, 수행자들은 내게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나는 안팎의 차이를 두지 않고 진리를 설하였다. 제자들에게 마지막 진리를 숨기는 ‘스승의 주먹’은 내게 없다. <마하파리닙바나경>
한 종교의 지도자가 마지막까지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가장 심오한 경지를 끝가지 제자들에게 일러 주지 않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마지막 경지를 알기 위해 스승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이요, 이를 통해 스승의 권위를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활짝 열었다. 그르침을 청하는 모든 이들에게 조금도 숨김없이 그대로 설명해주었다. 주먹 속에 뭔가를 감추어 두고서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강조하는 다른 교조들과는 처음부터 달랐다.
나아가 부처님은 자신이 떠나고 난 뒤 제자들이 당황하거나 방황할 것을 우려하여 틈틈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이미 경과 율을 말했으니 너희들은 그것을 잘 받들고 실천해라. 그러면 나는 항상 너희들 속에 있는 것과 같으리라. <불반니경>
3) 최후의 안식
이제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대장장이 춘다에게 공양을 받으신 뒤 에 부처님은 혹독한 병에 걸리셨다. 병든 몸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쿠시나가라의 조용한 들판, 사라나무 두 그루가 형제처럼 나란히 서 있는 곳이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이르셨다.
“피곤하구나. 내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서 저 나무 사이에 깔아다오. 누워야겠다.”
부처님은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고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누우셨다. 아난은 슬픔에 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부처님을 가까이 섬긴지 25년. 그 에게 있어 부처님은 위대한 진리의 스승이기 이전에 따뜻한 피가 통하는 형님과도 같은 존재,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다. 늙고 병들어 최후를 향해 가고 있는 부처님을 지켜보는 일은 그 에게 고통이었다. 아난은 부처님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 통곡을 하였다. 부처님은 사람을 시켜 아난을 불러온 뒤에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셨다.
아난아, 슬퍼하지 말라. 내가 이미 사랑하는 것과는 헤어지게 마련임을 말하지 않았더냐? 생겨난 것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아난아, 그대는 오랫동안 자비롭고 순수하고 한결같은 몸과 마음으로 고타마를 보살펴 왔다. 그대는 내게 참 좋은 일을 해주었다. 머지않아 번뇌의 티끌이 사라진 사람이 되리니 쉬지 말고 정진하라. <마하파리닙바나경>
사람들은 자기 마을에 부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그들은 병석에 누운 부처님을 꼭 한 번만이라도 뵙고 말씀을 듣고 싶어 하였다. 아난은 쇠약한 부처님을 염려하여 그들의 부탁을 거절했지만, 부처님은 그런 아난을 말리며 사람들에게 가르침를 베푸셨다.
그 후 부처님은 제자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물어셨다.
“수행자들이여, 무엇이든 물어 보아라. 훗날 여래가 세상에 머무셨을 때 물었더라면 하고 후회하지 말고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 지금 물어 보아라.”
그 지리에 있던 제자들은 이미 성자의 경지에 들어 있었기에 아무도 부처님께 질문하지 않았다. 잠시 제자들의 대답을 기다리다 부처님은 마지막 말씀을 베푸셨다.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름 피지 말고 정진하라.”
그리고 나서 조용히 선정에 드신채로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셨다.(음력 2월 15일)
이때 사라나무가 홀연히 아름다운 꽃을 치우더니 열반에 드신 부처님 몸 위로 향기로운 꽃을 흩뿌렸다. 길에서 태어나 일평생 맨발로 길을 다니시며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의 가르침을 베푸신 인류의 스승, 위대한 성자는 그렇게 길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신 것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여래가 세상에 나올 때에는 다섯 가지 일을 하니, 첫째는 법의 바퀴를 굴리는 일이요, 둘째는 부모를 제도하는 일이요, 셋째는 믿음이 없는 사람을 믿음의 땅에 세우는 일이요, 넷째는 보살의 마음을 내지 않는 사람에게 보살의 마음을 내게 하는 일이요, 다섯째는 장래의 일을 예언하는 것이다. <증일아함경>
이 다섯 가지 일을 모두 이루고 우리 곁을 떠나신 석가모니 부처님. 만약 내게 부처가 될 자질이 없었다면 이 때에 서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하여 법을 펼칠 이유는 없다. 아직은 마음 속에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가득차 세상과 자꾸 다툼을 벌이며 괴로워하는 중생이지만, 팔십 평생 부처님이 살아가신 길과 베푸신 말씀을 의지하여 신앙생활을 이어가다 보면 내 생명의 참주인인 진정한 자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중생인 내 자신에게도 여래와 같은 지혜가 있음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부처님은 이 땅에 오셨고 그렇게 열반에 드셨다. <법화경>
제4장 진리의 세계
불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하고 불교로서의 특색을 보여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이다. 법은 진리이다. 하지만 그 법은 불교에만 한정되지 않는 보편적인 진리라는데 불교의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배우고 실천하여 하루하루의 삶이 평화롭고 행복하며 자신감이 넘쳐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세상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 실천 수행이 동반되었을 때 불자로서의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여기서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의 구조와 내용을 살펴보겠다. 부처님이 설하신 법의 특징이 무엇인지, 그 법의 구조는 어떠한지, 세상은 어떻게 움직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알아본다.
1. 법(法) - 열반으로 인도하는 진리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나이다. 이 법은 현실에서 밝혀진 것이며, 머지않아 과보(果報)가 있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열반으로 잘 인도하는 것이며, 또 지혜 있는 이가 저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잡아함경>
불교에서는 진리를 깨달으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진리의 내용은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에 이미 설해져 있다.
이 진리의 말씀을 바로 법보(法寶)라고 한다. 법은 곧 진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법을 깨닫는다’, ‘법을 본다’는 것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체험이다. 이것은 깨달음, 즉 열반과 성불을 뜻하기 때문이다.
법의 언어인 ‘다르마(dharma)’는 산스크리트로, 기원을 찾자면 인도 고전인<베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베다시대에 법은 ‘자연계의 법칙’, ‘인간계의 질서’를 나타내는 용어였고, 팔리어 주석에 따르면 ‘인(因)’, ‘덕(德)’, ‘가르침’, ‘사물’의 네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다르마가 불교에서 ‘법의 내용을 이루는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의 가르침’을 나타내는 말이 되어 ‘깨달음을 얻는 진리’ 또는 ‘진리를 제자들에게 가르친 교법(敎法)’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불교에서 자주 쓰는 ‘법’이라는 말은 바로‘진리’을 의미 한다.
그리고 이 법의 의미가 존재(存在), 물(物)이라는 의미로 확대되고, 결국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제법(諸法), 연기(緣起)에 의해 성립한 존재를 말하는 의미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때 법의 의미는 모든 현상과 그 현상을 성립시키고 있는 근본적 존재를 말한다. 이런 법의 개념은 불교만의 독자적인 것이다.
이러한 법(法)의 의미에 대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와 그것을 제자에게 가르치신 교법을 일컫는다. 삼보 중 법보를 비롯하여 일상적으로 법이라고 말할 때 이에 해당된다.
둘째, 존재하는 모든 것, 즉 모든 사물을 일컫는다. 제법무아의 법, 연기에 의해 성립된 존재인 세상의 모든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금경경>과 같은 대승 경전에서 ‘모든 법의 공한 모양[제법공상(諸法空相)]’이라고 말할 때가 이에 해당 된다.
셋째, 불교 경전을 일컫는다.
이와 같이 법의 개념은 다양하며, 경전과 논서에 쓰일 때는 '진리와 교법'이라는 의미 외에 '존재'라는 뜻으로 쓰일 때가 많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2. 연기(緣起) - 공존의 세계관
"비구들이여. 내가 아직 정각을 이루지 못했을 때 이렇게 생각했다.
‘이 세상은 모두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그리고 다시 태어나면서 그 고통에서 헤어나는 길은 모르고 있다. 언제 이 고통에서 헤어나는 도리를 알 수 있을 것인가? 라고. 비구들이여, 나는 그 때 다시 ’무슨 연유가 있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바른 사유와 지혜로써 해답을 얻었다. ’태어나기 때문에 늙고 죽음에 이른다.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늙음과 죽음이 있다‘라고.." <잡아함경>
구도자 고타마가 진리, 즉 법을 깨달아 마침내 부처가 되었다. 6년 간의 모진 고행을 버리고 선정에 든 지 7일째 되는 날 새벽별을 보고 깨달은 진리,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연기법(緣起法)이다. 태어남이 있으므로 늙음과 죽음이 있다는 ‘생성과 소멸의 관계성’을 깨달은 것이다.
연기(緣起)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로, 모든 것은 원인이 있으며 원인을 근거로 생겨나고, 원인이 사라지면 소멸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此有故彼有(차유고피유)
이것이 생김으로써 저것이 생긴다 此生故彼生(차생고피생)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此無故彼無(차무고피무)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此滅故彼滅(차멸고피멸) <잡아함경>
연기법은 인연법(因緣法) 또는 인과법(因果法)이라고도 한다. 모든 것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진리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바로 이런 연기의 법칙, 즉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되어 서로 의존하며 생겨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산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홀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섶에 붙은 불 때문에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사라진다’는 말은 존재의 소멸을 설명한다. 이처럼 연기법은 존재의 ‘생성과 소멸의 상호 관계성’의 진리를 밝혀준다.
이 연기법에 따르면, 고통과 슬픔은 홀로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의 뜻이나 숙명에 따르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원인과 조건이 있게 마련이다.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홍수가 나는 원인은 북경에서 나비가 날개 짓을 했기 때문이라는 ‘나비 효과’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경전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한 알의 겨자씨에 수미산이 포함된다고 했다. 하나의 티끌에 시방세계가 들어간다고 했다. 그만큼 아무리 사소한 하나의 파동, 하나의 물결, 하나의 날개 짓 일지라도 그것이 우주의 움직임과 관련 된다는 연기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듯 어떤 사소한 원인이든 그것은 여러 가지조건과 결합되어 카다란 결과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부처님은 ‘어떠한 이유가 있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이며, 어떠한 법을 조건을 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깊은 사유와 명상을 통해 마침내 그 해답을 찾아낸다. 십이연기가 바로 그것이다.
십이연기는 중생의 삶이 12가지로 윤회하는 과정이다. 12가지가 무엇인지 종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를 12연기(緣起)라고 한다.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부처님은 연기의 법칙은 당신이 만든 것이 아니며, 부처가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간에 진리로서 변함이 없으며, 당신은 다만 이 진리를 깨달았을 뿐이라고 하셨다. 요컨대 연기법이 세계와 존재에 대한 불변의 진리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아함부 경전에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그리고 연기를 보는 자는 부처를 본다.”는 구절이 있다. 이 말씀은 수행자 고타마가 연기의 진리를 깨달아 비로소 부처가 되었으며, 그 깨달음의 핵심이 바로 연기법임을 잘 말해준다.
연기법은 사실 세계의 현상관계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이유에서 고통과 불행이 생겨나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극복하여 즐거움과 행복의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인생의 실상을 바르게 깨닫게 해준다. 인생의 실상을 바르게 알고, 바른 인생관에 따라 노력하고 수행해서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또 연기법은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공생하므로, 나만이 아닌 너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인간과 자연계의 공생 관계를 설명한다. 연기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것은 각각 주인이요, 소중한 존재이다. 그러나 각각의 소중함은 여러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신뢰와 상호 존중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연기의 도리를 이론이 아닌 몸과 마음으로 깨우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다.
3. 중도(中道) - 두 극단을 떠난 바른 길
"제자들아, 그대들은 두 극단으로 달려가서는 안 되나니, 그 둘이란 무엇인가? 온갖 욕망에 깊이 집착함은 어리석고 추하다. 범부의 소행이어서 성스럽지 못하며 또 이로움이 없느니라.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으면 오직 괴로울 뿐이며, 역시 성스럽지 못하고 이로움이 없느니라. 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으니, 그것은 눈을 뜨게하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적정(寂靜)과 증지(證智)와 등각(等覺)과 열반(涅槃)을 돕느니라." <잡아함경>
중도는 쉽게 말해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유(有)와 무(無)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진실한 도리, 고(苦)와 낙(樂)의 양쪽을 떠난 올바른 행법을 가르친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직후, 수행자 시절에 함께 수행하다 떠난 다섯 명의 수행자를 찾아가 처음으로 설법을 하셨다. 이를 초전법륜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중도와 사성제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중도와 사성제는 부처님이 깨친 연기법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당시 인도 사회의 분위기를 알아야 한다. 부처님 당시의 인도 사회는 사상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전통 사상가와 육사외도를 비롯한 신흥 사상가들은 크게 상주론(常住論)과 단멸론(斷滅論)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고정불변의 개별 아(我)인 아트만의 끊임없는 윤회를 인정하는 부류는 상주론을 주장하고, 윤회를 부정하고 한번의 생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부류는 단멸론을 주장 했다.
상주론을 주장하는 사상가들은 엄격한 고행을 통해서만 우주의 주재자인 브라만과 아트만이 합일할 수 있다는 주장 아래 고행주의를 강조한 반면, 모든 것은 단 한번의 생으로 끝난다고 주장하는 부류들은 인과를 부정하고 현실에서 쾌락을 즐겼다.
이런 상황에서 부처님은 왕위가 보장된 왕궁을 떠나 6년 동안 고행주의 수행을 택했다. 그런데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고행의 수행법이 결코 깨달음에 이르는 바른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 수행을 중단하였다.
그러자 다시 함께 수행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고타마가 타락했다” 며 부처님을 비난하고 떠나버렸다.
그래서 고행주의에 빠져 있던 그 다섯 비구에게 양 극단을 벗어난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것이 그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이해시키는 첩경이었던 것이다. 즉 중도와 사성제는 설법을 듣는 대상의 근기에 맞게 연기법을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중도의 중요한 가치가 숨어 있다.
‘연기는 곧 중도다’라는 말이 있다. 중도란 양 극단을 떠나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요, 조화로운 관계는 바로 나와 너를 고집하지 않고 상호 연결되는 연기 관계를 일컫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에 입각해야만 중도의 자리에 서게 된다. 사성제 또한 인과의 법칙, 즉 연기의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도, 연기, 사성제는 입장에 따른 차이일 뿐 그 근본 구조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중도의 가르침을 구분하여 ‘고락중도(苦樂中道)’, ‘단상중도(斷常中道)’, 유무중도(有無中道)‘라고 한다. 고행주의와 쾌락주의라는 극단, 단멸론과 상주론이라는 극단, 유 아니면 무라는 극단을 떠난 길이 바로 중도이다. 여기서 지적하는 세 가지는 부처님 당시에 횡행하던 극단적 사상과 사조를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중도를 실천할 것인가? 중도를 양 극단의 가운데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중간일 뿐 중도가 아니다. 예를 들어 흑백논리가 틀리기 때문에 어중간한 회색논리를 펴는 것은 옳지 않다.
중도는 잘못된 것을 떠나 옳은 위치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중도는 곧 정도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중도는 나와 너, 옳음과 그름, 이것과 저것, 내편과 네 편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갈등하는 고통을 치유하는 바른 길이다. 즉 중도의 실천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팔정도이다.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의 양 극단을 떠난 바른 길이 바로 팔정도이며, 이 팔정도는 사성제와 연결되어 있다.
부처님은 내세나 영혼의 문제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하셨다. 이를 무기라고 한다. 어느 질문에 대답하면 삿된 소견이나 의혹만 더해질 뿐이며, 연기와 중도의 자리에서야만 진실을 볼 수 있다.고 설하신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그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논의에 얽매기보다 올바른 생활과 수행, 즉 중도의 실천을 통해 해탈의 길을 찾으라고 권하신다.
독화살을 맞은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독화살을 빼고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독의 성분과 화살이 날아온 방향 등을 알아야 한다며 독화살 빼는 것을 늦추니 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삶도 마찬가지다 팔정도를 통해 중도를 실천함으로써 하루 빨리 깨달음에 다다라야할 것이다.
이와 같이 중도는 부처님의 초전법륜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릇된 견해나 극단의 견해를 떠난 바른 견해와 실천을 제시하여 올바른 삶을 살도록 하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성철스님의 말씀처럼 중도는 시비선악 등과 같은 상대적 대립의 양쪽을 버리고, 그의 모순, 갈등이 상통하여 융합하는 절대의 경지로서, 불자들이 추구해야 할 바이다.
4. 삼법인(三法印) - 존재의 참모습
부처님은 흙을 조금 손톱 위에 얹어 놓고 그 비구에게 보이면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겨우 이 정도의 물질이라 해도, 이 세상에 항상 존재하여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비구여, 만약 손톱 위에 얹어 놓은 이 정도의 물질에서 항상 존재하여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내가 가르치는 청정의 행으로 고(苦)를 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구여, 겨우 이정도의 불질이라도 항상 존재하며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가르침인 청정행을 따른다면 충분히 고를 멸(滅)할 수 있으리라.” <증일아함경>
우주 만유를 관통하는 법칙이 연기법이라면, 존재의 실상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삼법인이다. 삼법인 은 ‘세 가지 진실한 가르침’이란 뜻이다. ‘도장 인(印)’자를 쓴 것은 도장이 언제나 똑같이 찍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도 언제 어디서나 똑같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삼법인은 불교의 인감도장인 셈이다.
삼법인에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제행무상, 모든 변하는 것에는 실체가 없다는 제법무아, 그리고 거기에다 변하는 모든 것은 괴로움을 낳는다는 일체개고를 넣거나 일체개고 대신 모든 괴로움을 없앤 열반적정을 넣기도 한다. 때로는 이 네 가지를 다 넣어 사법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첫째, 제행무상은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한다는 뜻이다. 한때 ‘인생무상’이란 말이 유행어가 된적이 있는데, 그 때의 무상은 ‘허무하다’는 뜻으로 제행무상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제행무상은 모든 존재의 속성이 항상 그대로 있지 않고 변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드러나는 존재의 속성은 모든 적이 변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천년만년 죽지 않고 살 것처럼 생각한다. 권세와 명예, 재산도 영원할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하거나 권력가나 재벌가의 몰락을 지켜본 사람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평범한 진리 앞에서 겸허하게 마음을 비운다. 그리고 차분히 모든 사물을 사려보면 지금까지 자신이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잘못된 생각이 바로전도몽상 이다. 모든 것이 영원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버릴 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그 속에서 바르게 사는 길을 알게 된다.
둘째, 제법무아는 모든 변하는 것에는 자아라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 의 가르침이다. 모든 것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즉 인연 따라 생긴 것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기 때문에 고정불변의 실체란 없다. 무아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자기 중심적 사고와 아집이 허망한 것임을 일깨워준다.
무아가 되어 나를 텅 비우고 아집과 소유욕을 버리면 인연으로 형성된 존재의 실상을 깨칠 수 있다. 모든 사람과 사물이 어우러져 더불어 사는 삼라만상의 세계를 깨닫게 되면, 인류의 화합과 평화가 앞당겨 질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변하는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는 일체개고이다. 즉 무상하기 때문에 괴롭다는 것이다. 세상사는 희로애락이 다 있어 괴로움만 있는 것이 아닌데, 왜 모든 것을 고통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은 일시 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영원할 것이라고 믿고 그것에 집착아기 때문에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므로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 기쁨과 즐거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중생은 언제나 자기 중심의 습성에 길들어 있어서 기쁨과 즐거움을 어떻게든 지속시키려고 애쓴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 쳤어도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 쳤어도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진시황뿐 아니라 동서고금의 영웅호걸에서부터 미천한 신분의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항상 풍족하고 즐겁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이 가진 이루어지지 않는 욕망을 간파하시고, 모든 것이 괴로움이라고 설파하신 것이다.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욕망의 불을 끄고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면,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마음은 평안을 구할 수 있다. 마지막 열반적정이다. 열반은 진리의 구현이다. 무상과 무아의 진리를 완전히 깨쳐 모든 번뇌와 고통의 불을 끈 상태가 바로 열반이다. 열반은 깨달음을 성취하여 모든 번뇌와 욕망, 대립과 고통이 사라진 고요한 평화의 상태를 말한다.
우리 불자들은 삼법인의 가르침을 자신의 생활에 구현하여, 최상의 평화와 대자유인 열반을 향해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5.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
연기와 삼법인의 가르침은 세상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진리를 구현하는 수행의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사성제이다. 사성제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으로, 부처님이 바라나시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행한 첫 설법의 내용이기도하다. 사성제는 듣는 사람이 쉽게 이해하도록, 부처님께서 연기법의 진리를 현실에 맞게 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네 가지 진리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 진리인가? 이른바 괴로움의 진리,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진리, 괴로움의 진리,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에 대한 진리를 말한다.
사성제란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이를 줄여서 고. 집. 멸. 도 사성제라고 한다. 이 네 가지는 서로 두 가지씩 원인과 결과를 이루며,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대비를 설명하고 있다. 삼법인에서도 설명했듯이 인간은 생로병사의 고통속에 있다. 인간에게는 이 네 가지 고통 외에도 여러 가지 고통이 있다. 이것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현실이다. 이것이 고성제이다.
그러면 고통은 왜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집착에서 비롯된다. 무상한 세계에서 영원한 것을 찾고, 자기 것이 본래 없는데도 헛되이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이 생기는 것이다. 이를 설명한 것이 집성제이다.
이 세상에 고통이 있다면, 고통 없는 세계도 있고 , 거기에 이르는 길도 있을 것이다. 멸성제는 고통의 원인이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고통에서 벗어난 해탈, 열반의 경지가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멸성제이다.
그러면 고통의 원인을 없애고 열반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열반으로 가는 길은 여덟가지 가 있으니 바로 도성제인 팔정도가 그것이다.
팔정도란 여덟가지 바른 수행의 길이라는 뜻으로 다음과 같다.
1) 정견 : 바른 견해로 편견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으로, 여실지견이라고 부른다. 사물을 바로 보는 것 이바른 삶의 시작이다. 바른 가치관이 확립될 때 우리는 어떻게 사유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그 길이 보인다.
2) 정사유 : 바른 생각이다. 바른 견해를 가져야만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치에 맞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행동하기 전에 깊이, 그리고 바르게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는 것이다. 행동하기 전에 깊이, 그리고 바르게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3) 정어 : 바른 말이다. 말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거짓말, 이간질 하는 말 욕이나 비방하는 말은 그 사람의 비뜰어진 생각과 시각을 나타낸다. 항상 바른 생각을 하고 바른 말을 하여 구업을 짓지 않도록 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말을 해야 한다.
4) 정업 : 바른 행동이다. 모든 행동을 바르게 해야 한다. 바른 생각과 바른 말에서 나아가 이치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5) 정명 : 바른 생활이다, 즉 바른 직업이다. 옳은 일에 종사하고 몸과 마음과 말, 즉 신구의 삼업을 청정히 하면서 바르게 사는 것을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른 직업관을 가지고 생업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6) 정정진 :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쉼없는 노력을 말한다. 아울러 옳은 일에 대해서 물러섬 없이 밀고 나가는 정열과 용기를 뜻하기도 한다.
7) 정념 : 바른 마음 챙김이요, 바른 마음 집중이다. 마음의 움직임과 느낌에 대해서 마음을 챙겨 바로 깨어있는 것이다.
8) 정정 : 바른 선정이다. 마음 챙김과 마음 집중을 통하여 마음이 바른 삼매의 상태에 들어가 고요한 평정에 머무는 것이다. 정정의 상태에서 지혜를 얻게 된다.
팔정도는 도성제의 내용이다. 괴로움과 집착의 상태를 벗어나 열반의 길로 들어가는 방법이 바로 팔정도이기 때문이다. 이 팔정도의 첫째 방법이 ‘올바르게 보는 것’ 이라는 점은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세상의 이치를 올바로 보지 못하면, 올바른 생각도 올바른 행동도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극단적인 견해로 바라 보면 극단적인 행동밖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모든 행동이 좌우된다. 즉 정견이 없으면 팔정도는 실현되지 않는다. 정견은 팔정도의 출발점인 것이다.
그러면 정견의 구체적인 내용을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을 연기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만물이 모두 서로 의지 하여 존재하는 것이며, 모든 현상과 사건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을 잇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여실지견‘, 즉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고 경전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어떠한 편견이나 선입견도 버리고,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서 정견을 성립된다. 즉 연기의 관점에서 볼 때만이 잘 못된 양 극단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극단을 떠난 바른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불교적 시각으로 삶과 세상을 보는, 올바른 가치관이 정견이다.
불자들은 중도적 사고와 실천을 삶의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중도의 가르침은 부처님 초전법륜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관통하는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지정한 불자라면 중도, 즉 정도를 걷는 사유와 실천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생활에서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 그리고 그 전제 조건은 정견, 즉 연기적 관점을 갖는 것이 올바르게 살 수 있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자들 스스로 갖고 있는 선입견이나 편견을 버리고 만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유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사성제와 팔정도는 고통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참된 불자라면 항상 이것을 잊지 않고 잘 익혀 생활에서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6. 업과 인과
부처님 당시에 많은 사상가들 이 출현하여 갖가지 주장을 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섯 명의 외도(六師外道)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대개 운명론을 주장을 비판하고, 이들의 가르침이 가져올 윤리적 폐해를 경계하셨다.
허공도 아니요 바다도 아니다.
깊은 산 바위틈에 들어가 숨어도,
일찍이 내가지은 악업의 재앙은
이 세상 어디서도 피할 곳 없나니 <법구경>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과의 법칙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따른 다는 것이다. 착한 일을 하면 즐거운 결과가 따르며, 악한 일을 하면 고통스러운 결과가 온다. 이를 ‘선인락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의 인과응보라고 한다.
또한 그 결과를 낳는 근원적인 행동을 업이라 한다. 업은 산스크리트의 까르마에서 나온 말로, ‘의도를 가진 행동’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은 절대자의 섭리나 정해진 운명을 부정하고, 모든 것은 자신의 의지와 행동에 따라 성립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자신의 의지나 행동으로 자기 운명를 개척할 수 있으며, 삶의 결과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것 처럼 보이는 출신계급이나 삶의 조건조차도 사실은 모두 자신의 업에 따른 가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나쁜 짓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당장 그 죄 값을 받지 않는다고 언짢아 할 필요가 없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 악업의 과보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사람의 지금 모습을 보면 전생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행위를 보면 내생을 알 수 있다.고 <삼세인과경>에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고통스러움 과보를 낳는 악업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미혹이다. 번뇌에 물들어 진리에 어둡고 마음이 흐려져 악업을 짓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과보를 받는 것이다. 이것을 혹-업-고의 삼도라고 부른다.
반대로 진리와 깨달음을 지향하는 마음은 선업을 낳고, 그 결과 선한 과보를 받는다. 진리와 깨달음을 지향하는 마음을 보리심이라 한다. 업이 헤어날 수 없는 굴레라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와 행동으로 삶을 변화시켜 나가는 긍정적인 지향과 원리를 담고 있다.
수행의 길도 마찬 가지다. 전생이나 과거에 길들여진 나쁜 습성과 잘못된 행동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진정으로 참회하고 바르게 수행하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삼업의 과보는 매우 정확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이것을 인과 율이라고 한다. 악업을 많이 지을수록 그 삶은 구속받고 고통스러워 진다.
반면 선업을 쌓을수록 삶은 자유로워지고, 깨달음을 향해 나아갈 때 장애가 없어진다. 즉 자신을 구속하는 것도,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도 모두 자기 자신이다. 악행을 멀리하고 선행을 닦으며, 또한 수행에 정진함으로써 중생의 마음을 벗어 버리고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7. 공(空)과 마음
무아와 무상은 대승불교에 오게 되면 공으로 개념이 확대된다. 공이란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성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허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비유하면 허공과 같다. 허공은 줄거나 줄지 않으며 생기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바로 텅빈 공에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모든 것이 창조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허공과 같은 마음이 바로 공이다.
우리가 법회 때 암송하는 <반야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라는 말이 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공의 의미를 더 자세히 살펴보자. 근본 불교시대를 지나 부파불교시대에는 나는 무아로서 공하지만, 그 나를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법은 실체로서 언제나 변함없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나 대승 불교에 접어들어 불교도들은 반야의 초월적 지혜를 높이 내걸고 법도 역시 공하다고 천명한다.
이와 관련하여 역시 <반야심경>을 보면 ‘조견오온개공’이라는 구절이 있다. 나를 구성하는 법으로서의 다섯 가지 요소를 지혜의 눈으로 비추어 보니 모두 공이라는 것이다.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고, 느끼고, 행동하고, 생각하며 판단하는 모든 것이 공이라는 뜻이다. 왜 그런가? 어떤 요서이든지, 그것이 아무리 단단한 다이아모드 일지라도 , 언젠가는 소멸하고 만다. 모든 본체들은 쪼개고 쪼개 보면 분자나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 원자 자체도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으며 뭐라고 규정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대승의 공은 이러한 사물의 모습을 물리적으로 쪼개어 공이라고 판단하기보다는 사물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 그 모습이 비어있음을 투시하는 길을 제시한다, 어떤 사건이나 물건, 어떤 사람의 모습을 보더라도 바로 그 본래 모습이 공함을 그 자리에서 보는 것이다.
또 하나 대승불교의 공은 모든 지적인 분별을 타파하는 데 그 주안점이 있다. 모든 분별작용으로 인한 견해와 판단은 사물이나 사태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므로, 그러한 이성적인 생각. 판단. 입장. 주장 등을 철저히 부수어 버린다. 공의 견지에서 보면 사람들이 저마다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사람의 편견이나 앎의 조그마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런데 마치 사람들은 그것이 전부인양 자기 주장을 내세우며 대립하고 편을 가르며 싸운다. 공은 그러한 억측과 편견을 철저히 부수어 버린다. 어느 입장에 서서 집착하는 그 마음을 모조리 타파해 버린다.
그래서 색, 즉 물질이란 것도 실체가 없으니 공이라 부정하고, 모든 판단과 분별작용도 공이라고 부정한다. 나아가 공마저도 부정하여 그 공에 집착하는 것도 철저히 부정한다. 고에 집착하거나 머무는 것을 허무주의적 견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것도 긍정하지 않는가? 그것이 아니다. 공마저 공으로 비워 다시 색을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견해를 베어버리는 절대 부정을 거쳐 절대 긍정에 도달 한다. 이렇게 해서 다시 색은 공으로 살아난다. 그것은 공으로서의 부정을 통해서 살아난 묘유로서의 색이다. 이러한 묘유로서의 색은 도처에 있다. 머무는 곳마다 진리가 살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색은 공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없고 쓸모가 없는 무가 아니라, 형태를 갖춘 색으로 존재한다. 공은 색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밥 먹고 세수하고 일하는 그 색의 움직임 속에 공은 살아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묘유의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이슬이나 물거품처럼 금방 사라지고 말 색에 집착해서는 안되며, 모든 것이 사라진 허무에도 집착하지 말아야한다. 즉 색과 공, 둘 다에 집착하지 않는 걸림 없는 자세로서, 묘유의 움직임을 보고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색에서 공를 보고,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색에서 공을 보고, 공에서 색을 보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에 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 중심 수행으로 내거는 선은 이 묘유의 움직임을 바로 이 자리에서 보게 하는 수행법이다. 진공묘유로서의 나를 바로 이 자리에서 찾는 것이 선이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라고 한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었다고 해서 일체유심조라 한다. 그 마음이 바로 공의 마음이다. 그 공한 마음에서 모든 것이 창조된다. 유일신이 창조주가 아니라, 마음이 창조주요 주인공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서 그리면 그리는 대로 보이고,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반드시 이루어진다. 마음먹기에 다려 있다는 말이 있다. 마음을 가다듬고 간절히 노력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내 마음이 닫혀 있으면 어떤 사물도 보이지 않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중요하다 마음이 감응하고 느낄 때 제대로 보이며 널리 이루어진다. 그래서 공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공으로 자기를 비우고 하심 하면서 자기를 허공처럼 열어 보라. 그렇게 자기를 비우면 그 빈 마음에 모든 것이 들어온다. 자기를 비우고 자비와 사랑, 나눔과 베품을 실천하면 실천하는 만큼 나는 넓어지고 전 우주와 하나가 된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육바라밀의 실천은 이러한 마음을 바탕에 두고 나를 한 없이 열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부처님의 마음이요, 보살의 마음이며, 진정한 불자의 마음이다.
8. 계율 - 불자의 생활 규범
계는 산스크리트 실라엣, 율은 비나야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계와 율은 불교도의 생활 윤리, 또는 삶과 수행의 규범이다. 계율은 일반적으로 승가를 구성하는 사부대중이 준수해야 하는 삶의 방식과 규율로서 함께 통칭된다.
그러나 계와 율은 엄밀하게 말하면 그 뜻이 다르다. 계는 불교 수행을 하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지켜야 하는 도덕적 수행이며, 율은 승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타율적인 행위 규범이다. 따라서 계는 주체적이며 자율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고, 율은 타율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율의 조항을 위반했을 때에는 규제나 벌칙이 가해지지만, 계에는 그 같은 벌칙이 없는 것이 원칙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중도는 어디까지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법에 근거를 둔 생활방식을 자각하고,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행위였다. 그러한 생활 방식을 계라고 한다.
그러나 교단이 커지고 수행자가 늘어나면서 수행자 개개인의 자각만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 가운데는 출가자로서 훈련이 덜 된 사람이나 전혀 자각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따라서 수행자로서 허용 될 수 없는 행위가 등장하게 되었고, 그런 옳지 않는 행위가 있을 때마다 부처님은 그것을 규제하는 금지조항을 만드셨다. 이것을 수범수제라고 한다.
그러므로 불교의 율은 일정한 어느 때에 부처님께서 여러 가지 상황를 예측하고 일시에 율장으로 제정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그때 그때 제정한 것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렇게 수행자로서 개인적으로나 교단의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행위 규범을 율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율은 경전 결집 과정에서 계속 전승되어 왔고, 출가자와 재가자의 규범으로서 계속 지켜지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정기적인 점검이 자자와 포살이다.
믿음 있으면 계 절로 이뤄지고
계를 따르면 이름이 높아진다.
이름을 좇아 어진 벗 많으리니
가는 곳 어디서나 공양 받는다. <법구경>
그런데 대승불교가 발전하면서 율보다오히려 계를 더 중요하게여기는 풍조가 생겨났다. 즉 율의 조항을 중시하면서도 더자각적이고 적극적인계의관점에서 율을 새로이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분위기가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대승불교가 가진 적극적이고자율적인 자세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계율 외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선종 불교의 특색으로 청규를 들 수 있다. 청규는 청정한 규칙이라는 뜻으로 , 대중생활의 규율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당나라 백장 회해 선사가 제정하고시행한 ‘백장청규’가 대표적이다. 백장 회해 선사가 총림에서시행해야 할 규칙을 제정하였고, 그뒤 각 사찰에서 자기 절에서 시행할 규칙을 마련하여 이를 청규라 하였다.
청규에는일 반적인 계율과어긋나는 조항이 있다. 출가자의 생산행위를 금하고 잇는 계율과 반대로, 백장 청규에는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 하여 ‘하루 일하지않으면 하루 먹지 마라’고 규정한 것이다. 이와같이청규에 계율과 어긋나는조항이있는 것은 노동을 통한 수행이라는 선종의정신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규의 정신에도 계율을 존중하면서대중생활의 화합을 도모하고자 하는 기본 원칙이 살아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재가불자가 수지해야 하는 오계,십선계, 보살계 등은 모두 이와 같은 계의 정신을 따르고 있다. 이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자율적인 것이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율의 각 조항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자구해석에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오계를 지키는 것은 불자의 도리라고 할 수 있다.
오계
첫째,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둘째, 주지 않는 것을 갖지 말라.
셋째,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넷째, 거짓말을 하지 말라.
다섯째, 술이나 마약처럼 중독성이 있는 것을 먹지 말라.
오계는 모든 악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다섯 가지 악을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지 말라’는 것은 금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을 전제로 한다. 이를 테면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의 경우, 모든 생명은 본래 불성을 지닌 고귀한 존재이므로 죽이지 말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오계의 목적은 악을 범하지 않고 선을 실천함으로써, 서로 존중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청정한 계를 지킴으로써 지혜와 선정의 온갖 좋은 공덕을 얻을 수 있다.
불자는 오계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즉 일상의 삶 구석구석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더불어 사는 이 세상을 청정정토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살생을 금하는 것이 가장 큰 계율임에도 불구하고 더 큰 살생을 막기 위해 그것을 열어야 할 때와 닫아야 할 때가 있다. 이것을 지범개차(持犯開遮) 또는 개차법(開遮法)이라고 한다. 지는 계율을 지킨다는 뜻이고 범은 못 지킨다는 뜻인데, 지킬 수 없는 부득이한 상황에선 이를 허용하는 것을 개라고 한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계를 어기고 사냥꾼에게서 사슴을 구해준 나무꾼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지면 원칙대로 다시 막아야 하는데, 그것을 차라 한다. 계율을 지키는 것이 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에 제약이 되거나. 또는 그 계를 지키기 위해 더 큰 계를 어겨야 하는 경우, 그 상황를 타개할 때까지 열고 상황이 다라지면 다시 닫을 수 있어야 한다.
계율은 또한 자기 스스로 그것에 얽매게 된다면, 계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계는 수행자의 심신이 더 이상 오욕 등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해주고, 번뇌에 휘둘리지 않고 두려움 없는 평온한 상태로 이끌어주는 동반자여야 한다. 계를 지키는 것은 성실하고 참된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이며 발원이므로, 자유롭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이것이 중도에 입각하여 계를 지키는 것이다.
계는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규범을 세우기 위해 지키는 것이다. 계율은 불교도의 생활 윤리 또는 삶과 수행의 규범이다. 계를 수지한 뒤에는 계율을 삶의 좌표이자, 가치관으로 삼아 자신의 삶을 참되게 하는 길잡이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불자들은 이러한 계를 지키기 위해서 항상 노력하고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제5장 불자의 신행
불교는 수행(修行)을 중심으로 하면서 자력(自力)적인 부분인 기도과 타력(他力)적인 부분인 수행의 조화를 통한 깨달음을 추구한다. 불교는 다양한 수행법을 지니고 있다.
하나의 수행법만 제시해주면 일목요연하게 좋을 텐데 불교의 수행은 왜 이렇게 다양한가? 그 이유는 중생이 저마다 타고난 성품과 능력이 다르기 때문으로, 각자의 근기에 맞추어 깨달음의 길로 다가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불교의 다양한 수행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가정이나 사찰에서 어떻게 신행 생활을 해야 하고, 불자로서의 어떤 수행 생활을 해야 하는지 살펴본다.
1. 수행과 기도
1) 수행
불교를 가리켜 ‘수행의 종교’ 혹은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절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앙과 그로부터의 구원을 강조하는 다른 종교와 달리 불교는 수행을 통해 스스로 깨닫는 길을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한 안심입명의 길도 열어놓는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의 길도 궁극적으로 깨달음과 연결되어 있다.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부처님의 가피에 의지하더라도 불교는 깨달음의 끈을 놓지 않는다.
믿음과 수행, 이 두 가지를 아울러 신행(信行)이라 한다. 불. 법. 승 삼보에 대한 믿음과 수행을 통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얻고, 궁극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를 믿는 불자들의 올바른 태도이다. 물론 그 믿음은 외부 대상으로서 부처님에 대한 믿음도 있고 나 자신이 본래 부처라는 철저한 믿음도 있다. 불교에서는 여러 가지 모두 믿음의 대상으로 중요시 한다.
그렇다면 수행(修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수행해야 하는가? 수행하려면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하며 어떠한 수행법이 있는가?
수행이란 자신을 닦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마음을 닦는 것이다. 이리저리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마음의 고삐를 잡아매 마음을 길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왜 닦는가? 깨끗한 본래의 마음이 탐욕, 화, 어리석음의 삼독에 의해서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청정한 마음이 번뇌와 티끌에 덮여 있기 때문이다. 그 번뇌를 걷어내 내 마음 속에 본래부터 자리 잡고 있는 부처의 모습을 찾기 위해 마음을 닦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 삼독을 제거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부처님 말씀에 근거하여 마음의 동요를 잠재우고 불성이 자리하고 있는 자신의 내면을 보는 방법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렇게 해서 업장을 소멸하고 폭포수처럼 흐르는 윤회의 흐름을 끊어버린다. 나를 무겁게 누르고 있던 모든 망상과 착각, 분별의 흔적을 없앤다. 나 중심으로 바라보던 편견과 억측과 아집을 단칼로 베어내듯 잘라낸다.
그 결과 자신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며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리저리 불어대는 여러 가지 내 삶의 주인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리저리 불어대는 여러 가지 좋고 싫은 순역의 경계에 휘둘려 헐떡거리지 않고 경계에 깨어 있으며 매사에 자기를 반조하고 자기의 중심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면 마음이 쉬어지고 여유로우며 편해진다. 세상을 넓고 깊게 보며 함께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지혜가 솟아나고 한 없는 자비심이 펼쳐진다. 자기를 절대긍정하며 내면에서 무한한 생명과 힘을 느끼기에 당당하고 적극적이다.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하며 두려움이 없다. 절대로 나 자신이나 타인, 그리고 사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 다시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렇다면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매개로 하는 기도는 수행의 범주에 들어가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기도 역시 수행에 포함된다. 불교에서 기도의 목적 역시 업장을 소멸하여 부처님의 가피, 즉 부처님의 생명 에너지를 얻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생명 에너지를 얻는다는 것은 달리 말해서 내가 부처로 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중생으로서 윤회의 흐름을 멈출 때 가능하다.
그리고 기도가 진정으로 성취되려면 아상을 녹여야 한다. 내가 철저히 없어지는 무아가 되어 부처님의 밝은 빛과 함께할 때 기도는 성취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 또한 수행이다. 다만 기도는 그 접근방법이 내 스스로의 힘보다는 부처님의 힘과 가피에 의지해서 닦아간다는 점에서 자력적인 수행과 다름 뿐이다.
엄밀히 나누자면 기도는 타력(他力)적이고, 수행은 자력(自力)적이다.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힘을 믿고 거기에 절대적으로 의지해서 들어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나오는 지점은 깨달음이라는 데서 똑 같다. 즉 맨 처음 접근방법에서만 차이가 날 뿐 도달 지점은 둘 다 오직 부처를 이루는데 있다.
기도의 방법으로는 염불. 주력. 간경. 절. 참회. 사경(寫經). 사불(寫佛) 등을 들 수 있고, 수행의 방법으로는 이것들을 모두 포함하면서 조사선. 간화선. 묵조선. 위빠사나. 대승불교의 여러 가지 관법. 염불선 등을 들 수 있다.
2) 기도
기도(祈禱)란 일반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거나 부족한 점을 얻기 위해 신이나 그 밖에 신비한 힘에 의지하여 간절하게 비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도 이런 차원의 기도를 인정한다. 부처님의 가피(加被)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바라는 바를 성취하는 것이다. 가피란 부처님의 중생 구제에 대한 원력과 연민이 작용하여 부처님의 은혜를 입어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기도 공덕의 힘은 참으로 크다. 부처님 앞에 모든 자신이 가치 판단을 내려놓고 간절하게 일심으로 구하면 기도는 이루어진다.
또한 불교에서 기도는 권청(勸請)이라 하여, 모든 중생들이 어리석은 마음을 떨쳐버리고 하루 속히 지혜의 눈이 열리도록 부처님께 청하는 의식으로 정의된다. 거리에는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여 모든 이웃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회향하겠다는 서원의 의미가 들어 있다. 다시 말해서 불교의 기도에는 나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중생들과 더불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겠다는 다짐의 의미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원으로서의 기도, 다짐으로서의 기도는 그런 다짐이 부처님이 가피로 더 굳세고 튼튼해져 쉽게 좌절되지 않는다는 데 그 진정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기도가 성취되면 업장이 소멸되어야 한다. 업장의 소멸은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없이는 불가능하다.
어쨌든 외부를 향한 기도가 점차적으로 내부지향적으로 바뀌어 가고, 궁극적으로는 ‘일념에서 무념으로’ 진전되어 나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의 업장의 소멸되고 업의 뿌리가 바뀌고, 내 몸과 마음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고, 하나하나의 마음가짐과 행동거지가 진리와 자연스럽게 일치 되어야 한다. 기도를 통해서 참된 성품을 개발하고 진리와 만나며, 결국에는 깨닫게 된다면 이는 수행과 연결되는 것이다.
기도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하며 이 생명 다하도록 실천하겠다는 깨끗한 마음에서부터 생긴다. 기도를 통해서 나와 이웃 그리고 모든 중생들에게 불보살님의 공덕이 함께하기를 서원하고, 또한 자신의 편협한 마음을 부처님 마음으로 되살리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기도는 진정한 자기와 이웃의 만남을 뜻한다.
따라서 기도의 마음가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부정이다. 즉 내 힘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이 적을수록 기도는 오히려 잘 된다. 무아가 되어 오직 모든 것을 부처님께 맡겨 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잘되고 못되고 까지도 부처님께 맡겨버릴 수 있다면, 이미 성취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자기를 비우는 이러한 헌신적인 기도를 통해 모든 업장은 얼음 녹듯 녹아내린다.
그리고 기도의 성취를 위해서는 정합이 되는 소원, 즉 앞과 뒤가 맞아 떨어지는 소원을 가져야 한다. 동쪽으로 가고자 하는 소원과 서쪽으로 가고자 하는 소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면 소원성취는 요원하다.
3) 기도와 수행의 마음가짐과 절차
기도는 넓은 의미에서 수행이든, 수행할 때는 온 몸과 마음을 다해야 한다.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 전신을 집중하여 전심전력으로 매달려야 한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온 몸과 마음을 다할 때 삼매의 상태에 이르고, 그 삼매의 상태에서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업장을 녹이기도 하며, 스스로 지혜를 발견하여 업장을 녹이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생명을 기울일 정도로 확신을 가지려면 부처님 법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결정적인 믿음이다. 반신반의하는 믿음이 아니다. 과연 수행의 결과가 제대로 나타날까, 기도가 이루어질까 하고 물러서는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불교도 모르고 불보살님이 어떠한 분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기도하고, 그래서 기도나 수행이 성취된다 한들 그것은 분명 불교의 수행과 기도가 아니다. 오로지 불보살의 가르침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그 가르침대로 행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마음을 품어야 우리는 온 몸과 마음을 다할 수 있으며, 삿된 길로 빠지지 않는다. 올바른 믿음과 정견의 확보, 이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이웃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내는 것이 중요한다. 세상의 모든 중생이 나와 한 몸 임을 알고 그들 모두에게 평화와 안락이 깃들기를 바라며 누구에게도 원망이나 미움을 갖지 않아야 한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수행에 임할 때 참다운 공덕이 쌓이는 것은 물론 진정한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매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방법으로 수행하는 것이 좋다. 작은 물방울의 바위를 뚫는 것은 지속적으로 같은 자리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에서, 이 시간에도 했다가 저 시간에도 했다가 해서는 수행이 진전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은 방해를 받지 않고 규칙적으로 낼 수 있는 시간을 정해 놓고 하는 것이 좋다. 장소도 가급적이면 가까운 법당이나 가정의 한 곳을 정결하게 단장하여 동일한 자리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 좋은 방법은 가정에서 지장을 받지 않고 행할 수 있는 편한 시간과 공간을 정해 정기적으로 수행하면서 법당에서의 수행을 병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번 더 나간다면 길을 걷거나 차를 타거나 누구를 기다리면서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마음을 지켜보고, 기도·수행의 고삐를 놓지 않을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람직한 것은 없을 것이다.
기도나 수행을 할 때는 몸과 마음의 자세와 호흡이 중요한다. 우선 일정한 장소에서 수행하고자 할 때 앉는 자세부터 바르게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앉는 자세는 두 무릎을 꿇고 앉는 방법을 취하며 그 밖에는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를 선택해서 앉으면 된다. 옷차림도 편안한 복장이 좋을 것이다.
앉는 법을 강조하는 것은 바른 자세에서 바른 호흡이 나오기 때문이다. 호흡이 중요한 이유는 호흡이 안정되어 있을 때 자연히 정신도 안정되어 쉽게 수행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수행을 하다 보면 호흡은 자연스레 안정이 되기 때문에 너무 호흡에 의식할 필요는 없다.
기도, 수행의 절차로는 부처님 말씀을 통한 정견의 확보, 믿음 또는 귀의, 참회, 발원, 각자가 택한 수행법, 그리고 회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그리고 대에 따라서는 회향하면서 발원을 다시 새길 수도 있다.
4) 참회
우리는 살아가다 보면 많은 잘못과 허물을 짓게 된다. 악한 일도 저지르고 남에게 상처도 준다. 이러한 과실과 허물은 대부분 세속적 욕망과 이기심, 분별과 망상에 의해 생겨난다. 이러한 잘못을 뉘우치고 깨끗이 씻어내지 않는다며, 나의 삶은 결코 편안하지 않고 행복하지 않으며 진리에 다가설 수 없다. 따라서 그런 행위에 대해서 뉘우치고 다시는 그러한 과오를 범하지 않겠다는 굳은 맹세를 해야 한다. 그것이 참회이다. 후회란 잘못된 마음을 억압해서 잠복시키는 데 비해, 참회는 마음의 뿌리를 뽑아 없애기 때문에 그 잘못된 마음이 모두 풀어져 없어진다.
참된 참회는 내 성품 속에 암세포처럼 자라나는 죄의 흔적과 자취를 없애는 것이다. 죄의 자취란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이라는 삼독의 나쁜 인연을 가리킨다. 만약 당장에 본래의 모습을 찾고자 한다면 바로 이 분별과 망상이 빚어낸 삼독의 악연을 마음속에서 씻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참회는 과거의 죄를 뉘우쳐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불교에서 바라볼 때 죄의 본성은 없다. 죄는 고정불변하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참회를 통해 죄지은 마음과 그 흔적은 씻은 듯 사라진다. 그러면 마음의 삼독이 사라져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두려움이 없게 된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자도, 아무리 나쁜 일을 저지른 자도 참회를 통해 본래 부처님의 마음을 회복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회를 하는가? 참회는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바로 그 순간 잘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참회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매일 108참회를 한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된 행위에 대해 108배를 하면서 절실히 참회하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참회의식을 할 때나 과거부터 현재가지 저질러진 잘못된 행위에 대해 참회할 때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삼독을 셋으로 나누어서 한 가지씩 씻어내면 된다. 그 요령은 108배를 하면서 부처님이 실제로 앞에 계시다는 가정 하에 한 번 절을 할 때마다 한 가지씩 참회를 해나가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108감사를 하도록 한다. 그것은 108배를 하거나, 108염주를 돌리면서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주위에서 감사할 이를 찾아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감사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공기나 불, 나무와 꽃들은 물론 부모, 친구, 모든 것들이 감사의 대상이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자기 긍정을 가져오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강력한 출발점이 된다.
5) 발원
우리는 욕심 없이 살 수 있을까? 불교에서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욕심이 없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가? 있다. 그 방법이 바로 발원이다.
욕망으로 인한 욕심이아니라, 내가 무엇이 되고자 하는 목표를 지향이라 한다. 자신의 삶의 목적을 확실히 하고 삶의 지향점을 찾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인생의 덕묵이다. 발원은 그 러한 보편적인 인류에의 견지에서 나를 비우며 성취해 나가는 몸과 마음의 몸짓이다.
욕망으로 인한 삶과 발원으로 인한 삶 중에 어느 것이 더 값진 것인가? 욕망은 항상 대립과 분열, 소외를 낳는다. 그러나 발원은 더불어 성장하는 진정한 행복을 낳는다. 발원하는 삶에는 대립이 없고 소외가 없으며 온전히 전체와 함께하는 삶이 있을 뿐이다.
욕심과 발원의 차이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욕심은 다분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바람이지만, 발원은 공통적 바람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것은 오직 나만을 위한 욕망이 아니라, 우리 모두, 인류 전체, 나아가서는 모든 중생을 행복과 평화의 세계로 이끈다. 여기에서 나와 남의 구분되지 않는다.
둘째, 욕심은 본능적인 것이지만, 발원은 능동적인 수행을 동반한다. 잘 먹고 잘 살고, 부와 명예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발원은 욕심보다 더 깊지만 욕망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욕망에 가려진 본능을 본래대로 되돌리려면 욕망을 제어하고 통제해야 한다. 그것이 수행이다. 자기 욕심을 제어하고 자신을 돌이키면서 원을 발하여 자꾸 베푸는 마음을 연습함으로써, 아상(我相)을 소멸해 가는 것이다.
셋째, 욕심은 의도된 의지이지만, 발원은 순수 의지를 지향한다. 순수 의지는 공과 무아에 바탕을 둔 깨끗한 마음이다. 선악의 분별, 나와 너의 분별, 가치와 반가치의 분별을 떠난, 참으로 선한 행위가 순수 의지이다. 거기에는 나도 없고 너도 없으며 순일 무잡한 전체가 있을 뿐이다.
넷째, 욕심은 결과를 중시하지만, 발원은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한다. 한마디로 발원은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없다. 욕심은 미래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욕망 달성을 위해서 때로는 현재의 희생을 강요한다. 하지만 발원은 현재에 중점을 두고 있다. 물론 스스로가 세운 원을 달성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기는 하지만,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노력하는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
발원은 참다운 자기전환의 시작이다. 끌려다니는 업생이 아니라 창조적인 원생으로 나아가는 첫 단추인 것이다. 업생이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과거에 지은 업에 이끌려 살다 가는 것이다. 반면 원생은 스스로의 삶을 갈무리해 나가는 창조적 삶이다.
창조적 삶은 걸림이 없으면 당당하고 활기차다. 걸림만 없다면 무엇이든 마음에 그리는 대로 된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마음을 집중하면서 노력하면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마음 속 어딘가에 걸림이 있기 때문에 즉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욕망에 따른 의욕이나 선입관을 가지고 할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원을 세워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
발원은 욕망으로 물들어 있는 에너지를 생명 창조로 방향 전환하는 것이다 부정을 긍정으로, 나에서 우리로, 부분에서 전체로, 고통에서 기쁨으로, 대립에서 평화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발원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사홍서원이 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어리다.
이 사홍서원은 대승 보살들이 깨달음 성취[上求菩提]와 중생 구제[下化衆生]를 위한 보편적인 실천덕목으로 제시한 것이다. 깨달음을 향해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은 어떠한 난관에도 물러서지 않는 견고한 결의를 일으켜야 한다. 이타행을 통해 모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제도하면서도 누구를 제도한다거나 누가 제도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그래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것이 바로 보살의 서원이다. 보살은 항상 무아로서 전체와 함께 하고 있다. 중생을 구제하는 일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기에, 한계가 없는 전체이기 때문에 무량하고 무수하고 무변하다. 그래서 큰 서원이라 한다.
이러한 사홍서원은 모든 보살이 지녀야 할, 모든 인류가 지녀야 할 보편적인 원이라 해서 총원(總願)이라 한다. 반면 각각의 보살들이 갖는 개별적인 원이 있는데, 그것을 별원(別願)이라 한다. 보현 보살의 십대원이라든가 문수보살의 원, 지장보살의 원 등이 그것이다.
서원은 클수록 좋겠지만 , 자신의 현재상황과 부합하는 것으로 하는 것도 괜찮다. 예컨대 지금 자기가 가장 절실하게 바라고 있는 것으로, 병고를 극복하거나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조그마한 생명이 아니라 전체로서 열려 있어야 한다. 병고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나 자신은 물론 '모든 중생이 다 병고에서 벗어나지이다‘ 하며, 마음의 안정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나 자신은 물론 '모든 중생이 다 마음이 편안하여 지이다’ 하는 식으로 발원해 나가야 한다.
2. 기도 및 수행의 종류
1) 절
절이란 몸을 굽혀 상대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예법이다. 절은 동양 문화권 어느 곳이나 있지만 , 불교에서는 두 무릎과 두 팔꿈치와 이마의 다섯 부분을 땅에 붙이고 양손으로는 상대방의 발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오체투지(五體投地)라 한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상대방의 맨 아랫부분이 발에 극진한 예를 표할 만큼 한없이 존경하는 마음과 귀의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이마를 존경하는 대상의 발밑에 대고 양 손으로 공경하는 것은 자기를 한 없이 낮추는 하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존경은 물론 귀의와 찬탄을 표하는 예절이 기도 및 수행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절을 할 때 상대에 자신의 마음을 낮추어 탐욕, 화, 어리석음이라는 삼독심을 없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이 단순히 몸의 굴신운동으로만 끝나고 자신을 낮추는 하심이 없다면 올바른 수행법이 될 수 없다. <원각경약소초>에서는 오체투지를 통해 다섯 가지 번뇌인 오개(五蓋)를 제거할 수 있다고 했다.
불교 수행에서 중요한 것은 지혜의 개발이다. 삼매의 체험만 있고 지혜가 드러나지 않아 번뇌를 소멸시킬 수 없다면 그것은 불교 수행법이라고 할 수 없다. 한결 같은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절을 하다 보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 불성이 드러나 지혜가 밝아지고 마음이 순일해져 부처님의 바른 법을 보게 된다.
아울러 절은 인욕하는 마음도 갖추게 되니 자연스럽게 육바라밀 수행과도 연결된다. 나아가 부수적으로 건강은 물론 몸과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도모해준다는 점에서는 현대인의 수행법으로 손색이 없다. 이 밖에 절은 대사회적인 참여의 수단으로서 활용되어 불교적 가치를 내외에 천명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특히 절은 육체를 움직이면서 하는 기도요 수행이다. 이는 다른 수행법이 지니지 못한 절이 간직하고 있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절은 몸을 통해 아상을 버리고 무아를 체험하는 구체적인 수행법인 것이다.
강조하건대 절 수행은 몸을 통해서 진짜 무아를 체험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몸이 나라고 생각해왔다면, 그러한 삶은 업력에 지배되는 삶이다. 반면 절을 통해서 몸을 극복하면 몸을 인한 업력에 지배받지 않는다.
절은 그 자체가 바로 나 자신의 욕망을 구체적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편하고자 하고, 많이 먹고자하고, 더 갖고자 하는 내 마음을 다스린다. 특히 몸을 조복시키면서 입으로 부처님 명호를 부르고, 마음으로 끊임없이 부처님을 생각하면 몸과 입과 뜻으로 지은 업장을 소멸시키는 것은 물론 몸과 마음을 모두 다 길들이게 된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편해지고 날마다 좋은 날이 된다. 나아가 천배, 삼천배, 만배 하는 마음 가짐으로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모든 생활에서 최선을 다하며 물러섬이 없을 것이다.
2) 주력
주력(呪力)이란 진실한 말의 힘이다. 그 진실한 말은 진짜 말이요 참말이기 때문에 한자로 진언(眞言)이라 한다. 이 진언을 외우는 수행이 주력 수행이다.
말에는 오묘한 힘이 있다. 우리는 말을 통해서 의사를 전달하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말의 의미가 곧 말의 힘이 된다. 이렇게 말에는 마음을 전달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열고 세상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의 힘이 종교와 결부되면 어떤 특별한 말은 인간세계를 비롯한 우주에 편만한 진리를 함축하게 된다. 그것은 우주적인 힘이요 초월적인 힘이다.
특히 최고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는 말은 진실한 말이기에, 그 속에 모든 것이 간직되어 있으며 모든 것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힘이 있다. 그래서 이러한 진실한 말을 외움으로써 실현 불가능할 것 같던 소원도 성취하게 된다. 이렇게 주력, 즉 진언은 진리를 담고 있다. 진언을 외우는 일 자체가 진리를 설한 말씀이나 경전을 잊지 않고 간직하게 하는 힘을 발휘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주력의 실천법은 현실생활에서 요청되는 악을 물리치고 복을 구하는 소원성취의 수단으로 삼기도 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수행의 단계로까지 끌어올렸다. 즉 주력 수행을 통해 성불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수력 수행은 기도 공덕을 성취하는 것은 물론이요, 기초 수행으로서 집중력을 키우고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며 업장을 소멸하는 역할을 한다.
주력의 종류로는 천수대비주, 능엄주, 육자대명왕진언, 광명진언 등이 대표적이다. 그 밖에 일상 의례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진언이 있다. 그런데 주력 수행을 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은 진언을 외우기 전에 그 진언은 설하게 된 불보살의 목적과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천수대비주를 외울 때는 무조건 진언을 외는 것이 아니라,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한 마음과 대비주를 설하게 된 목적을 떠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주력을 할 때는 입으로 또박또박 주문을 부르고 마음으로 그 주문을 떠올리며 귀로도 또박또박 들어야 한다. 그리고 마음으로 그 주문을 떠올릴 때도 해당 불보살의 정신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3) 간경
간경(看經)은 정기법회나 기도, 정진 법회 시 독경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경전을 이해하기 위한 경전 공부도 간경의 방법으로 널리 실시되고 있다.
원래 경전은 깨달음의 길을 널리 펴고자 편찬된 것이다. 처음에는 깨달음을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 경전을 읽었으나, 점차 읽고 외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수행법으로 정착되었다.
간경은 독경(讀經), 전경(轉經), 풍경(諷經)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독경은 경전 말씀을 소리 내어 외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도 모르고 무턱대고 외는 것이 아니라 , 그 의미를 알아내어 내 것을 삼았을 때 수행의 효과가 있다.
전경이란 경전을 마음속 깊이 굴려 그 경전의 말씀이 내안에서 살아 있도록 하는 것이다.
풍경은 안 보고 외우거나 노래한다는 뜻이다.
독경의 형태가 외우는 데까지 나아가고 그것이 곡조를 타 아름다운 노래가 된다면 가장 이상적인 간경법이라 할 것이다.
간경에는 소리 내어 경전을 읽는 독경을 포함하여 소리 없이 마음 속으로 읽는 것, 경전 공부하는 것, 그 경전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설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리고 경전의 말씀과 의미를 쓰면서 되새긴다는 의미에서 사경도 간경의 범주에 들어 간다.
간경은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을 받아 지니고 독송함으로써 그 경전의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경전을 읽는 순간은 나와 부처님이 함께하는 시간이요, 모든 사람들과 동시에 전체로 함께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열려 있을 때 경전의 뜻이 마음속에 드러나 그 마음을 밝힌다. 이것을 경전을 펴서 마음을 본다 하여 피경조심(披經照心)이라고 한다.
그 결과 경전과 마음이 상통해 마음이 밝아지면 경계도 함께 밝아진다. 이렇게 부처님 말씀이 마음 속으로 드러나고 그것을 실천할 때만이 경전의 가르침이 진실로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특히 경전의 말씀이 우리 몸에 체화되면 그 경전 구절을 망각하지 않고 마음 속에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다. 그래야만 경전 구절이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온다.
경전 내용에서 부처님의 참된 말씀을 찾아내는 데 간경의 진정한 목적이 있다. 그 진실한 말씀을 찾게 되면 지식이 지혜로 승화되기 마련이다. 그 지혜로 무명을 타파하게 되는 것이다. 업장을 녹여 깨달음을 향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경전의 말씀이 지혜로 승화되어 몸과 마음에 그대로 체화되면 그 경전을 말씀을 언제라도 자유롭게 꺼내 쓸 수 있으며 그 가르침대로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경전은 중생심을 벗고 불성을 드러내는 길로 향하는 나침반이자 기준 역할을 한다. 다른 모든 수행의 옳고 그름은 이 경전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그 기준을 삼아야 한다. 따라서 모든 기도 및 수행에 들어서기에 앞서 부처님 가르침을 마음 속 깊이 담아 둠으로써 바른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부터 경전을 읽기에 앞서 몸을 깨끗이 하고 단정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몸을 깨끗이 하는 과정을 통해 마음을 추슬러 경전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경전을 독경할 때는 마치 부처님이 내 앞에서 그 경전을 설하고 있고 내가 그 말씀을 듣고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그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마음속에 새겨야 한다.
4) 염불
염불이란 부처님을 마음속으로 간절히 생각하며 떠올리는 것이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서가모니불‘ 등 불보살님을 부르면서 자신의 마음을 부처님 마음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염불의 종류에는 칭명염불(稱名念佛), 관상염불(觀相念佛), 실상염불(實相念佛) 등이 있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염불선까지 포함한다.
칭명염불은 말 그대로 불보살이 명호를 부르면서 염하는 것이요, 관상염불은 불보살의 특징이나 모습을 보면서 염하는 것이며, 실상염불은 부처님의 본래 마음인 공의 이치를 염하는 것이다.
그러나 칭명염불을 하면서 관상염불이나 실상염불을 병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목소리를 내지 않더라도 마음 속으로 불보살을 염하면서 관상염불이나 실상염불을 병행한다.
염불하는 방법으로 소리를 내든 안 내든 그 불보살님의 명호를 또박또박 부르고 마음 속으로 떠올리고 귀로 들어야 한다. 염불을 하면서 자신의 소리를 언제나 생생하게 들을 수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산란해져 입으로는 염불을 하면서 속으로는 잡생각을 하게 된다. 부처님을 부르는 동작 하나에도 정신을 모아 흐트러짐이 없는 상태가 진정한 염불이다.
대승경전에서는 삼매에 들어 염불하는 염불 삼매를 설한다. 삼매 상태에서는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을 물론, 부처님의 나라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면 반드시 태어난다[염불왕생(念佛往生)]고 한다. 그래서 <아미타경>에서는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라도 임종할 때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열 번만 부르면 서방정토에 왕생한다고 하였다.
흔히 염불하면 ‘나무아미타불’을 떠올린다. 그러나 염불은 칭하는 불보살의 대상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누어진다. 즉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관세음보살 염불이요, ‘지장보살’을 염하면 지장보살 염불인 것이다. 어떤 불보살을 염하든 간절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간절히, 그리고 빈틈없이 부처님을 생각하고 떠올려 삼매의 경지에 도달해야 부처님을 친견하여 왕생할 수 있고, 왕생한 이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염불을 삼매에 들 정도로 지속하여 정진하는 것을 정근(精勤)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정근은 선법(善法)을 더욱 자라게 하고, 악법(惡法)을 멀리 여의려고 부지런히 쉬지 않고 수행한다는 뜻이다. 한 마음 한 뜻으로 불보살님의 지혜와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켜 평안하게 해주며, 어떤 환경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맑고 밝아지게 해준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3. 선(禪)
1) 선의 정의와 종류
불교의 수행법하면 누구나 선 또는 참선을 떠올린다. 선은 앞서 언급했던 수행법과는 차이가 있다.
물론 간경, 염불, 주력 등을 통해서도 선에 들어 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자력과 타력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면, 지금부터 언급하는 선은 철저히 내부지향적이며 자력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밖을 향해서 무언가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이켜 비춘다는 데 선의 특징이 있다.
참선이란 ‘선(禪)에 참입한다’는 뜻이다. '참입(參入)'이란 마치 물과 우유처럼 혼연일체가 된다는 의미로, 선에 깊이 들어선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좌선(坐禪)이란 앉아서 선에 드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선, 참선, 좌선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앉아서 선에 드는 모습이 참선의 대표적인 유형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선’이라고 하면 조사선이니 간화선을 떠올리는 이유도 그것들이 참선의 전통적인 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은 이보다 훨씬 넓은 개념이다.
선은 산스크리트어 드야나(dhyana)와 팔리어 '쟌나(jhana)'를 중국에서 선나(禪那) 혹은 선(禪)으로 음역한 것이다. 한국, 중국, 일본이 모두 ‘선(禪)’으로 표기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선(Seon)'으로, 중국은 '찬(Chan)'으로, 일본은 젠으로 각각 다르게 읽고 있다.
‘드야나’라는 말은 사유수(思惟修)를 뜻한다. 사유하면서 닦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사유는 어떤 사태에 직면해서그것을 분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모아 집중해 들어가며 닦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 과정이 깊어지다보면 마음이 한 가지 대상에 집중되어 안과 밖이 전일한 생태에 이른다. 외부의 어떠한 소리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와 대상이 온전하게 하나가 된 상태, 그것을 삼매(參昧 samadhi) 또는 정(定)이라고 부른다. 마치 맑은 거울과 같은 모습, 한 점 티끌도 없는 잔잔한 물과 같은 모습이다. 그러한 물 속에는 모든 것이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선은 이렇게 어느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해 들어가 삼매의 상태에 이르러 마음의 깨끗한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마음의 본래 자리로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자성 자리를 밝히는 것이며, 참나를 보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 없이, 걸림이 없이 , 막힘이 없이 행복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
선의 종류는 많다. 조사선, 간화선, 묵조선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 밖에 위빠사나, 대승불교의 관법 수행도 선의 일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태국,스리랑카,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의 남방 불교권에서는 위빠사나가,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 북방 불교권에서는 조사선, 간화선, 묵조선 등이 실천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선(禪)이라고 하면 이 조사선, 간화선, 묵조선을 지칭하며, 이것들이 선종의 주요 흐름을 형선하고 있다. 위빠사나는 이러한 선과 구별하여 관법(觀法)이라고 한다.
위빠사나에는 오정심관을 비롯한 여러 종류가 있다. 대승불교의 관법에는 일상관, 일몰관, 천태지관 등 다양하다.
선도 간화선, 묵조선 뿐만 아니라 염불선도 유행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간경, 주력 등도 선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간경선, 주력선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간화선을 핵심 수행법으로 삼고 있으며, 여타의 수행법으로 삼고 있으며, 여타의 수행법을 섭수 통합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불교계는 염불, 주력, 간경, 위빠사나, 대승 관법 등을 간화선에 들어가기 이전의 기초 수행으로 정립할 수 있다고 본다.
2) 위빠사나
위빠사나는 동남아시아 및 구미에 널리 퍼져 있으며, 근래 우리나라에서도 수행 인구가 늘고 있다. 위빠사나는 남방 상좌부 불교의 수행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초기 불교 수행의 원형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위빠사나(vipasana)에서 ‘위(vi)’란 분리하다, 쪼개다 , 관통하다 라는 의미이며, 빠사나(pasana)는 관찰, 식별, 봄을 의미한다. 즉 어원적 의미를 분석해 보면 위빠사나는 ‘꿰뚫어 봄’, ‘통찰’을 뜻한다. 이것을 한자로 ‘관(觀)’ 혹은 ‘관법(觀法)’이라 번역했다.
이 위빠사나와 어울리는 개념이 사마타(samata)라는 말이다. 사마타(samata)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수행으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위한 준비 단계이자 전제 조건이다. 사마타는 마음을 오로지 한 대상에 모아 집중해 들어가기 때문에 삼매에 들어 온갖 번뇌와 망상, 분별작용을 그치게 된다. 그래서 ‘지(止)'라고 번역한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어느 한 대상에 집중 되어 선에 들어 삼매 상태에 이른 것이다. 이를 선정(禪定)이라 한다.
수행을 하면서 마음이 여러 가지로 흔들려 정신이 집중되지 않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마음에서 모든 분별작용이 사라져 고요해 졌을 때, 즉 사마타가 이루어졌을 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위빠사나의 작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지혜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마타와 위빠사나, 즉 지(止)와 관(觀), 선정과 지혜는 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지관쌍운(止觀雙運), 성적등지(惺寂等持), 정혜균등(定慧均等)이라 한다. 마음이 지의 상태에 이르면 오락가락 흔들리는 마음의 동요가 사라지고 고요해진다. 그 상태에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관하는 지혜가 나온다.
이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의거한 대표적인 수행의 형태가 오정심관(五停心觀)이다. 오정심관이란 다섯 가지 중생의 이 마음을 정지시키는 관법이다.
부정관(不淨觀)
부정관은 우리 몸의 부정한 모습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탐욕이 많은 사람들이 닦는 관법이다. 물질적인 욕망과 애욕에 눈 먼 사람들은 우리들의 육체가 얼마나 더럽고 부질없는 모습인가를 봄으로써 탐욕을 멈추게 된다. 이 방법으로 우리들이 애지중지하는 육신의 덧없음과 더러운 모습을 관하는 것이다.
자비관(慈悲觀)
자비관은 사람들이 성내고 다투는 마음을 그쳐 자비로운 마음을 내게 하는 것이다. 자기 마음에 거슬리는 순간적인 불쾌감을 참지 못해 우리는 무심코 화를 내게 되고, 그 결과 인간관계가 불편해지고 신뢰가 깨지며 싸움과 분쟁이 일어난다. 상대방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결국은 자신의 마음도 괴롭다. 이러한 성내는 마음을 뒤집으면 자비가 된다. 자비심으로 화내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인연관(因緣觀)
욕망과 화보다 더 근본적인 인간의 번뇌는 어리석음이다. 이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욕망을 일으키고 화를 내는 것이다. 이러한 어리석은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인연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이치를 깊이 관찰하면 모든 것을 고정된 관점에서 보고 집착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지혜가 열리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계분별관(界分別觀)이라는 관법도 있다. 계분별관까지 포함하여 오정심관이라고 하지만, 이 계분별관과 인연관이 유사한 까닭에 계분별관 대신 불상관을 든다.
불상관(佛相觀)
이것은 부처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관하여 중생의 업장을 다스리는 관법이다.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를 관함으로써 그 결과 부처님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 명확하게 각인되어 나의 중생업이 소멸되고 부처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수식관(數息觀)
들어가고 나가는 숨을 관찰한다고 해서 입출식념(入出息念)이라고도 부른다. 주로 마음이 산란한 사람들이 닦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밖에 위빠사나에서는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사념처관(四念處觀)도 중요시 한다.
3) 조사선
참선의 진정한 의미는 태고적부터 자리 잡고 있는 본래 부처로서의 내 마음자리를 밝히는데 있다. 이 본래 부처로서의 ‘참나' 는 어느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으며, 허공처럼 청정하고 한계가 없어 풍진에 물들지 않고 손상되지 않는다. 어떠한 가식과 꾸밈도 없고 인위적인 발자취조차 남기지 않는다. 삼라만상과 다투지 않고 서로 어울려 고요한 평화로움만 감돌뿐이다.
세파에 찌들고 시달려 살아가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본래의 성품은 조금도 이지러짐이 없다. 이것을 ‘본래 마음’, ‘본래 면목’ 이라고도 하고 ‘참나’라고도 하며,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고도 한다.
조사선은 이러한 자성청정심에 관한 확고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즉 내가 본래 부처요, 완벽하다는 데서 출발하는 수행이다. 따라서 완벽을 향해서 나아가는 수행, 즉 불완전한 나를 완전한 나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부처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위적인 수행이 아니라 조작과 시비 분별을 떠나기 위한 수행이다.
이렇게 조사선은 조작과 시비 분별을 떠나기 위한 수행이다.
이렇게 조사선은 우주 만물은 모두 ‘본래 부처’이며 이미 다 그대로 완성되어 있다는 ‘본래성불’을 내세운다.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이니 바로 이 자리에서 자기가 완성되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임제 선사는 외친다. “바로 네 얼굴 앞에서 위없는 참사람이 왔다갔다 하고 있으니, 그것을 보라, 보라!”
이러한 임제 선사 같은 분을 조사(祖師)라 한다. 조사란 석가모니 부처님 이래 불심을 체득하여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수행력과 안목을 갖춘 선지식을 이르는 말이다. 이러한 조사들은 부처님과 같이 위없는 깨달음을 보여준다. 조사들의 위치는 부처님과 다를 것이 없다.
선은 문자 이전의 참마음을 곧바로 보여준다. 선지식은 어떤 매개도 통하지 않고 제자의 눈앞에서 그것을 역력히 보여준다. 제자가 그것을 보고 깨치는 순간 이심전심의 미소가 번지는 것이다. 영축산 정상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보이자 오직 백발이 성성한 가섭존자 한 분만 그 뜻을 알아듣고 고요히 미소짓듯이 말이다.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보인 것은 바로 본래 마음을, 진리를 보여준 것이다. 그 마음을 보면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도리를 일러 ‘자기 마음을 직관하여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된다(直指人心 見性成佛)’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조사선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특징이다.
조사선에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오간 선문답이 많이 있다. 이 모든 선문답은 스승이 제자에게 보여준 문자 이전의 참마음이요, 본래 면목을 가리킨다. 제자는 선사가 제시한 그 말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알아차리는 순간 깨닫는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깨닫는 것, 말 끝에 바로 깨닫는 것을 ‘언하변오(言下便悟)’라 한다. 말을 듣자마자, 어떤 행위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즉각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언하변오 또한 조사선의 큰 특징이다. 선종의 2대 조사인 혜가 선사는 달마 선사의 “불안한 마음을 가져 오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 깨쳤다.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단박에 떨쳐버리고 깨달음을 연 것이다.
이 언하변오(言下便悟)와 관련하여 우리는 돈오(頓悟)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돈오'란 단박 깨닫는 것이다. 단번에 핵심, 알맹이, 바닥, 샘물, 뿌리로 들어간다. 서서히 차츰차츰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전광석화처럼 단박에 완전히 깨닫는 것이다. 인도의 선이 점차로 깨달아 가는 선이라면, 중국의 조사선은 이렇게 단박에 깨닫는 돈오를 내건다. 이러한 돈오의 가치를 최초를 표방한 선이 달마조사로부터 시작된 조사선이다.
4. 간화선
1) 간화선과 화두 참구
간화선(看話禪)은 조사선의 정신을 고스란히 받들고 있다. 다만 조사들의 선문답을 화두로 정형화 시켜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조사선과 간화선 전통을 원형 그대로 간직하고 ,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이다. 특히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간화선을 중심 수행으로 내걸고 있다. 해마다 90여 개의 선원에서 2,000여 명의 수행자들이 정진하고 있으며, 시민선방에서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많은 재가불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간화선이라고 할 때 ‘간화’는 볼 간(看)자, 말 화(話)자가 결합된 단어이다. 여기서 화자는 화두를 의미한다. 화두를 간(看)하는 것, 즉 화두를 보는 것이 간화선이다. 화두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은 말이되 생각의 길과 말길, 마음의 길이 끊어진 말이다. 그것은 생각과 말이 나오기 이전의 본래 자리를 일컫는다. 한편 화두의 두(頭)자를 해석하며 말머리라고도 하는데, 이 또한 말이 나오기 이전의 근본 자리를 일컬는 근원인 키워드를 의미하는 것이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다. 간화선에서는 화두를 들고 부처의 자리를 확인한다. 그 일련의 과정을 일러 ‘화두를 든다’고 하고 ‘화두를 참구한다’ , ‘화두 공부를 한다.’고도 한다. 화두를 간할 때 그것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분석하여 헤아려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화두 속으로 사무치게 들어가야 한다. 화두와 나 사이에 빈틈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화두를 든다고 하면, 그것은 화두가 내 마음의 중심에 딱 걸리는 것을 말한다. 내 마음뿐만 아니라 삼백육십 개의 골절과 팔만사천개의 털구멍으로 , 온몸이 화두 하나로 뭉쳐 있어야 한다.
화두는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것이기에, 화두가 마음에 걸리면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간절한 의심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솟아 나온다. 이렇게 화두에 대해 커다란 의심을 일으켜 그 화두에 몰입해 들어가,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되어 화두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간(看)하는 것이며 참구이다.
우리의 본래 마음자리는 생각과 말로는 찾을 수 없다. 헤아리고 분석하는 알음알이로 내 자신의 본래 모습은 물론 진리를 바로 볼 수 없다. 본래 그 자리는 말과 생각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찰 입구에 ‘이문 안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이차문내 막존지해 : 以此門內 莫存知解)’ 라는 글귀가 붙어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알음알이란 지금까지 머릿속에 간직해 온갖지식과 분별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던가,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다던가, 이것은 이익이 되고 저것은 손해가 된다는 등의 판단 분별이 모두 알음알이에 불과한 것이다.
화두는 이러한 알음알이의 작용, 모든 생각이나 판단의 작용을 단칼에 베어버린다. 화두는 우리를 생각이 끊어진 자리로 인도하여 부처의 자리를 보게 해준다. 그래서 간화선에서는 화두를 들고 모든 사유작용을 끊고, 그 생각이 끊긴 자리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것을 특징으로 삼는다. 인도의 선이나 그 밖의 선이 마음을 어느 한 대상에 집중하여 차례차례 깊이 관찰해 들어간다면, 간화선은 화두를 들고 단박에 마음의 본바탕으로 들어간다.
쉽게 말해 간화선은 마음 바닥으로 곧바로 들어가 그 깨끗한 본바탕을 가리고 있는 모든 쓰레기를 치워내고 그 본바탕이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나무 가지 하나, 잎사귀 하나 하나를 윤기있게 하기 보다는 뿌리와 줄기 그자체의 생명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지가 무성하게 뻗어나가고 잎사귀에서 풀은 생명을 발하게 하는 것이다. 곁가지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을 바꾸는 것이다.
화두를 들고 화두 삼매에 이르러 화두가 타파되면 본래 내 자신을 발견한다. 나의 모든 고정관념, 생각, 판단, 가치기준, 무의식까지 철저히 타파되어 본래 내 자신 속에서 밝게 빛나는 태양을 보는 것이다.
2) 화두 참구의 중요한 요소
예로부터 화두 참구의 중요한 세 가지 요소로서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憤心), 대의심(大疑心)을 들었다. 이것을 삼요(三要)라고 한다.
대신심(大信心)이란 내가 본래 부처라는 믿음이다. 내가 본래 성불해 있다는 인간에 대한 큰 긍정이다. 본래 부처란 우리가 있는 그대로 조금의 가감도 없이 완벽한 부처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요, 없다가 어떤 계기를 만나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돈 많은 사람이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는 있고,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 아니다. 지위 고하, 신분, 성별, 능력에 관계없이 누구나 본래 부처로서의 마음을 갖추고 있다.
비록 일시적으로 큰 죄를 지어 지옥같은 고통을 받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부처의 생명이 숨기고 있기에 언제라도 부처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 용기가 충만해 있다. 비록 착각과 망상속에서 중생놀음을 하고 있지만 내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내가 본래 부처라는 커다는 믿음 위에서 간화선은 출발한다. 그리고 나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선지식에게 철저히 하심하고 믿고 따라야 한다. 여기에 하나 더, 화두에 대한 철두철미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즉 화두는 본래 면목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 화두를 타파하면 반드시 본래 부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대분심(大憤心)이란 내가 본래 부처인데 현재 중생놀음을 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분한 마음이다. 하루하루 망상과 착각 속에서 눈앞의 탐욕과 육체적 안락에 젖어 숨가쁘게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다.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며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생으로서의 삶에 대한 자책이다. 그래서 이러한 욕망과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확철대오하겠다는 서원이 마음에서 울컥울컥 솟구쳐 나와야 한다. 내 자신의 본래 모습을 확인하여 당당하고 걸림 없이 살아가겠다는 마음이 가슴 절절히 우러나와야 한다.
대의심(大疑心)이란 화두에 대한 철두철미한 의심이다. 화두는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으로도 알 수가 없다. 잡을 수도 없고 놓을 수도 없다. 이리 갈 수도 없고 저리 갈 수도 없으며 뒤로 물러 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사유의 통로가 차단된다. 어떠한 접근도 허용하지 않는다. 들어갈 만한 문이 없다. 그래서 무문(無門)이라 한다.
이렇게 철저하게 닫힌 문 앞에서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 철두철미하게 의심해 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큰 의심의 일어났을 때 온 몸과 마음이 하나의 화두덩어리가 되어 화두로 눕고 화두로 잠들게 된다. 온통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왜 그런가?’ ‘어째서 그런가?’ 하는 사무치는 의심이다. 그래야만 화두에 탁 고리가 걸려 화두와 나 사이에 빈틈이 없다. 그렇게 하다 보면 화두를 드는 데 힘을 얻게 된다. 화두 드는 힘을 얻게 되면 동시에 힘을 덜게 되어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
이 밖에 화두참구에서 중요한 것은 발심이다. 영원히 변치 않는 나,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나, 걸림 없는 나 자신을 찾아야겠다는 발심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이러한 발심이 되려면 우선 정견이 확보되어야 한다. 정견이란 무아, 연기, 공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이러한 부처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 속에, 이 도리를 머리가 아닌 온 몸으로 실천해 보겠다는 마음이 솟고쳐 나와야 한다. 이러한 발심과 앞서 말한 화두 참구의 세가지 요소가 연결될 때, 화두가 제대로 걸린다.
그리고 선이 무엇인지, 화두가 무엇인지, 화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 지, 화두를 들 때 경계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답해 줄 수 있는 스승, 즉 선지식의 지도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받았을 때 화두 드는 힘이 생긴다. 그렇다면 선지식은 어떻게 만나는가? 열심히 기도하고 수행하면 그 하는 만큼 선지식이 보인다.
3) 화두 참구와 일상생활
재가자들도 화두를 들고 일상생활을 활기 있게 해나갈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주변에서 전개되는 역경계와 순경계를 화두로 다스리고 현실에 깨어 있는 것이다. 화가 나려 할 때, 정신이 혼미해질 때, 어떤 대상에 한없이 집착하려 들 때, 화두를 들고 화두에 역력히 깨어 있게 되면 그러한 경계를 극복하게 된다. 그래서 하루하루 근심 걱정 없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간화선은 본래 생활선이다.
참선수행을 하면서 수행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굳이 선지식에게 묻지 않아도 어느 정도 점검이 가능하다. 그것은 우선 스스로 마음이 점차 너그러워지고 있는지 좁아지고 있는지 확인하면 된다. 시간이 갈수록 세간사에 담담해지고 공부가 재미있어지면 제대로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절이나 이웃에 망설임 없이 보시 하고싶고 그 보시하는 마음에 걸림이 없으면, 그야말로 열린 사람이다. 이와는 다리 남의 허물이 눈에 더 잘 보이고 세간사의 시비에 관심이 끊이지 않고 보시하는 일에 인색해진다면, 이는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배우자나 아이들에게서 우리 남편, 부인 혹은 어머니가 절에 다니더니 사람이 많이 달라졌다는 소리를 들으면 좋다. 그래서 주위의 다른 이에게도 우리 배우자 혹은 어머니처럼 절에 보내라고 추천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절에 다니면 생활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5년을 다니거나 10년을 다니는데도 전혀 변화의 조짐이 없거나, 주위에서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돌이켜 반성할 여지가 있다.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는 것은 ‘아집’을 없애는 것이다. 그것은 ‘작은 나’를 없애고 ‘큰 나’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이다. 그리하여 부처님 앞에서 겸허해지고 공경심을 갖듯이, 집이나 직장에서 겸허함과 공경심으로 모든 이들을 대할 수 있다면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된다. 궁극적으로 배우자나 직장 동료, 만나는 모든 이들을 부처님 대하듯 하면 절에 다니는 보람이요, 진정 수행하는 불자라고 할 수 있다.
간화선은 일찍이 가장 가치 있는 수행이요, 질러가는 수행법이라 해서 많은 이들로부터 찬사를 받아왔다. 불자들은 이러한 간화선과 만난 것을 감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재가 불자들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화두를 들고 정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수행을 할 때는 주변 환경에 구애받지 않아야 하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조용한 곳이 좋다. 예를 들면 절에서는 부처님 모셔진 법당이나 선방 등의 정해진 공간에서 하고, 집이나 직장에서는 특별히 참선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없기 때문에 조용하고 정갈한 일정한 곳을 선택해서 하면 될 것이다.
선의 자세도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서거나 어떤 자세를 취해도 되겠지만, 가장 안정적인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하는 것이 좋다. 참선을 한다고 억지로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몸에 무리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이 때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법당이나 방 안 또는 도량을 거닐면서 몸의 균형을 맞추어 조절해주어야 한다. 이것을 방선(放禪) 또는 경행(經行)이라 한다. 이 때도 화두를 잊고 잡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방선 또한 참선이 연장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활인은 걷거나 누군가를 기다릴 때도 화두 드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무심코 걸어가거나 누군가를 기다릴 때 나를 지배하는 것은 쓸데없는 망상과 잡념이다. 화두로 이러한 망상과 잡념을 거두어내고 마음 속 깊이 나를 찾아가는 공부를 해나가면, 비록 깨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화두 드는 힘으로 일상생활을 편히 해나갈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정신이 혼미해질 때 화두를 들어 보자.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고 생활에 중심이 잡힐 것이다.
5. 가정에서의 신행활동
가정은 우리들이 태어나서 인격이 성숙해 가는 곳이고, 인류사회에 봉사하기 위한 기초적인 장소이다.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조건없이 베풀고 돕는 기본적인 보살의 생활을 배우는 곳이 가정이다. 사회생활을 위한 기능과 지식은 학교에서 얻을지라도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품성과 지혜는 가정교육을 통해 길러진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일깨우고,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감을 키우는 곳이 가정이다. 그래서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나 행동 하나하나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으며 '본래 부처'라고 했다. 따라서 자식과 부모는 서로 부처님처럼 존중해야 한다. 자식은 부모님을 깊이 받들고, 부모는 자녀를 밝은 지혜와 덕성을 지닌 존재로서 사랑하고 존중하며 키워야 한다. 자식을 부모의 욕망 대상이나 소유물로 키워서는 안 되며, 있는 그대로 그들의 가치를 인정해줄 때 상호 소통이 되며 아름다운 관계가 형성된다.
그리고 가정은 수행 도량이 되어야 한다. 자기 삶을 참되게 살아가는 것이 수행이라면, 살아 있는 모든 시간은 바로 수행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재가자들이 출가한 스님들처럼 오로지 수행만 할 수는 없지만 하루 하루를 경건하게 보내고 수행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한다. 따라서 각자의 자질과 능력에 따라 앞서 소개한 수행법을 꾸준히 실천해 나가야 한다.
새벽 수행은 하루를 시작하여 그날 하루를 즐겁고 보람되게 하고, 저녁 수행은 하루를 정리하고 알찬 내일을 기약하며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게 한다. 또한 수행 시간만이 아니라 평소에 모든 일, 모든 사람에 대해 언제나 육바라밀을 실천하도록 자신의 생활을 가다듬는다면 나날이 복되고 좋은 날이 될 것이다.
가정에서 신행을 잘하기 위해서는 가정마다 원불(願佛)을 모시는 것도 좋다. 항간에는 집안에 부처님을 모시는 것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으나, 우리 조상들은 가정에 원불을 모시고 평상시에도 지극한 신행을 계속해 왔다. 가정마다 원불을 모시는 것은 항상 지극한 신행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다만 원불을 모신 후에는 정성을 다해 모셔야 한다. 그 밖에도 가정에서 종단의 법요의식에 따라 제사를 모시는 것도 가정 신행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1) 거룩한 생명
한 개인의 생명은 타인의 생명과 구별되는 독립된 인격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뗄 수 없는 여러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나를 낳아준 부모와의 인연이 없었다면 세상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불법을 만나는 소중한 인연을 '맹구우목(盲龜遇木)'의 비유로 설명한다.
큰 바다에 눈먼 거북이 한 마리가 살고 있다. 이 거북이는 백 년에 한 번씩 머리를 물 위로 내놓는데, 그 때 바다 한가운데 떠다니는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나면 잠시 거기에 목을 넣고 쉰다. 그러나 판자를 만나지 못하면 그냥 물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눈까지 먼 거북이가 넓은 바다에 떠돌아다니는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나는 것만큼 인간으로 태어나 불법을 만나기가 그토록 힘들다는 것이다. 실로 거룩한 인연이다.
그래서 우리의 옛 선조들은 거룩한 생명을 탯 속에 있을 때부터 소중히 여겨 바른 인성을 가질 수 있도록 태교에 정성을 다하였다. 불자들 또한 태교를 할 때부터 부처님 말씀을 듣고 부처님과 같이 아름답고 편한 마음으로 뱃속의 태아를 잘 보살펴야 한다. 낙태는 더욱 안 될 말이다.
아기가 갓 태어났을 때에는 가정과 사찰에서 바르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축원해준다. 아이가 성장하여 유치원 다닐 때부터 불교를 자연스럽게 접해서 사찰 법회에 나가도록 부모가 적극 지도해야 한다. 가정에서도 불교를 바탕으로 신행활동의 모범을 보여 아이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하면 더욱 좋다. 어릴 적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 불교적 덕성을 지닌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사찰에 자주 가서 절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친숙해지도록 해주고, 스님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리하여 어린아이가 부처님께 귀의하여 가르침을 배우고 스님들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가지고 자란다면 바른 인간, 바른 신행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바른 사람, 바른 불교인으로 교육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부처님은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똑같은 성품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불교의 교육관은 인간 각자가 지극히 거룩한 가치와 덕성을 지닌 고귀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자신에게 거룩한 부처님의 성품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은 남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 길러내는 데 불교 교육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계를 받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수계는 자기 삶을 경건하고 바르게 유지하겠다는 다짐이다. 다만 어린아이들에게는 삼귀의와 어린이 오계를 주고, 자라서 스스로의 의지로 계를 받아 지닐 수 있을 때에 정식으로 오계를 받도록 하는 것이 좋다.
청소년이 되어서도 사찰의 중고등학생회에 나가 신행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부모가 앞장서야 한다. 요즘 입시 과열로 인해 쉴새없이 아이들을 학원이나 과외로 내모는 부모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좋은 성적을 얻는 것보다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품성을 지닌 인격체로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2) 불교의 혼례와 인생길
사람들은 성인이 되면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요즘 결혼하는 풍속을 보면 진정한 사랑보다는 이해관계나 부귀, 학력, 외모에 많이 치우치는 듯 하다. 진정한 내면의 모습과 사랑보다는 욕망의 대상으로 배우자를 택한다. 그러나 보니 상대방이 자기의 기대를 벗어날 경우 증오하고 싸우며 심지어 이혼을 하기도 한다.
배우자는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며 가정을 통해 인생을 완성해가는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배우자를 그려 보고 그런 배우자를 찾기 위해 서원을 세우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도 상대방의 이상적인 배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이상적인 선남선녀가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혼례와 그 절차는, 과거 구원겁 전에 선혜선인과 구리선녀가 각각 꽃 다섯 송이와 두 송이를 연등 부처님께 바치면서 서원을 빌었다는 전생담에서 유래한다. 그들은 깨달음과 지혜를 성취하고 성불하기 전까지 부부의 인연을 보살도를 닦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꽃을 바친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혼례를 올릴 때 꽃을 바치는 헌화의식과 혼인을 고하는 고불식을 반드시 한다.
혼인하기 전에 두 사람이 부처님 전에 기도를 올리고 스님을 청해 법문을 듣고 미래의 행복한 삶을 약속하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행복한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장차 성불하겠노라는 서원을 세웠을 때 비로소 완벽한 결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 후에도 뜻 깊은 날에는 함께 서원을 발하며 그날을 기념하고, 인생의 고비도 함께 이겨 나간 다면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육바라밀을 비롯한 이타적 삶으로 인생을 풍부하게 갈무리해 가는 것도 필요하다. 인생을 마감할 때 지난 세월이 후회없는 삶이라면, 그래서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여 그 이별의 순간에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영가에게 집착을 놓게 해주는 법문과 평화로운 말을 들려주어 그 가시는 길을 진정 자유롭고 바람처럼 가볍게 해주어야 한다. 불자들은 죽을 때까지 부처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을 밝히는 불교의 장례의식은 그러한 절차로 짜여져 있다.
3) 역경을 이겨내는 불자의 자세
세상을 살다 보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나기도 한다. 그 때 우리는 불보살님의 가피력에 의지하여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나은 길은 수행의 힘으로 스스로 고난을 이겨 내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어려움과 역경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 그래서 남을 원망하고 세상을 한탄하다. 그러나 불자들은 우리에게 발생하는 재난이나 환경이 모두 내 마음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관을 당하면 무엇보다도 자기 스스로 지은 허물임을 알고 깊이 참회해야 한다. 그 허물은 금생의 것일 수도 있고 전생의 것일 수도 있다.
또한 고난을 다했다고 해서 절망에 빠질 필요는 없다. 역경은 과거에 지은 잘못된 과보가 현재에 나타나 소멸되는 것이니, 잠복 중에 있던 나쁜 원인이 소멸되면 다행스러운 일이며 새로운 희망이 싹틀 전조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불자는 고난 앞에서도 오히려 감사하고 불평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고난을 관조하여 극복하는 평온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지은 바 원인이 있어서 고난이 나타나는 것처럼, 희망은 오늘 새롭게 씨를 뿌림으로써 커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해서도 새 희망을 일으키고 용맹정진하여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가야 한다. 불자들은 고난과 역경을 당해서도 좌절하지 않고 당당하게 일어서, 끊임없이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켜 운명 그 자체를 바꿔 나가야 한다. 왜냐 하면 운명은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경을 이겨내는 불자의 마음가짐은 {보왕삼매론}에 잘 나타나 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공부하는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 하셨느니라.
수행하는데 마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魔)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을 수행의 벗으로 삼으라’ 하셨느니라.
일을 도모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이 경솔해지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 하셨느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하라’ 하셨느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써 원림(園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덕 베푸는 것을 헌신처럼 버리라’ 하셨느니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어라' 하셨느니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써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막히는 데서 도리어 통하는 것이요, 행함을 구하는 것이 도리어 막히는 것이니, 이래서 부처님께서는 저 장애 가운데서 보리도를 얻으셨느니라. 저 앙굴리라마와 데바닷다의 무리가 모두 반역의 짓을 했지만 우리 부처님께서는 모두 수기를 주셔서 성불하게 하셨으니, 어찌 저의 거슬리는 것이 나를 순종함이 아니며 제가 방해한 것이 오히려 나를 성취하게 함이 아니리요, 요즘 세상에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만일 먼저 역경에서 견디어 보지 못하면 장애에 부딪힐 때 능히 이겨내지 못해서 법왕의 큰 보배를 잃어버리게 되나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보왕삼매경>
6. 사찰에서의 신행 활동
1) 법회
참다운 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법회에 참석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 일요법회나 초하루법회 등에 적극 동참하여 매월 정기적인 신행 활동을 해야 한다.
법회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뜻 깊은 만남의 장이며, 부처님이 가르치신 진리를 배우고 전파하는 자리이다. 즉 불보살님께 공양을 올리고 찬양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우리들의 삶을 행복하고 평온하며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다.
요즘은 사찰마다 매달 같은 날이나 같은 요일에 정기법회가 있다. 부처님 당시에는 보름마다 포살을 정해 자신의 허물을 대중 앞에 고백하고 참회하는 의식이 있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정기법회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매달 10재일이 있는데, 음력으로 1일은 정광, 8일은 약사, 14일은 현겁, 15일은 미타, 18일은 지장, 23일은 대세지, 24일은 관음재일, 28일은 노사나, 29일은 양왕, 30일은 석가재일 등이다.
이 중 일반 대중이 동참하여 기도하는 법회는 초하루, 보름, 그리고 지장재일, 관음재일이며 사찰에 따라 약사재일, 미타재일 등 한두 번의 법회를 더 진행하기도 한다.
요즘은 양력에 익숙한 현대인의 생활에 맞게 일요법회, 수요법회 등의 요일 법회와 방학이나 휴가를 이용한 수련법회가 정기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보통 신도법회는 평일 오전이나 오후에 주로 봉행되고,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청년법회 등은 주로 토요일이나 일요일을 정기법회일로 하고 있다.
2) 불공과 공양
법회 때는 불공을 올린다. 불공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불공은 단순히 물질을 공급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귀의, 참회, 공양, 발원, 회향이 여법하게 갖추어지는 의식을 통틀어서 말하는 것이다.
불공의 핵심은 베품, 즉 공양이다. 공양이란 말은 불가에서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먼저 원래는 ‘수행에 필요한 음식과 옷가지, 주거지 등을 공급하여 깨달음으로 나가는 밑바탕을 기른다’ 는 의미로 스님들에게 올리는 것을 뜻했지만, 점차 그 의미가 확대되어 삼보님께 올리는 정성어린 모든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것은 불공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물론 이 공양은 삼보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을 위해 올릴 수 있다. 부처님은 “누구든지 나에게 금은 보화를 갖다 놓고 명과 복을 빌려하지 말고 너희가 참으로 나를 믿고 따른다면 중생을 위해 공양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음식이나 의복, 혹은 그 밖의 물건을 삼보와 부모님, 스승과 망자는 물론 모든 중생에게 공급하는 행위를 모두 공양하라고 할 수 있다.
공양하는 물건이나 공양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있다. 세간의 재물이나 향. 꽃 혹은 생활용구를 공양할 수도 있고, 보리심을 일으켜 자리이타의 행을 닦는 공양도 있다. 또한 공양은 중생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도 중생들의 깨달음을 위해 늘 법공양을 베푸신다. 부처님께서는 공양 중에서도 법공양이 으뜸이라 하셨다.
공양을 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공양이 항상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불자로서 정기적으로 법회에 참석하여 삼보를 예경하는 것은 기본적인 불공이라고 할 수 있고, 법회 중에 헌공을 하거나 일상적인 참배에서도 작은 정성이라도 불전(佛前)에 공양하는 것을 생활화해야 한다.
또 다른 의미의 공양은 불가에서 밥을 먹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밥 먹는 것을 공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불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 육신이 필요하고, 이 육신을 지탱하기 위한 약으로 생각하고 밥을 먹기 때문이다.
3) 불교의 중요한 명절 의례
(1) 부처님 오신날 - 탄생재일
음력 4월 8일은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날이다. 이날은 전국의 사찰에서 부처님 오신 날을 봉축하며 법요식을 봉행한다. 법요식 가운데는 관불(灌佛)의식이 있는데, 부처님이 탄생하신 것을 축복하며 향탕수로 아기 부처님을 목욕시키는 의식이다. 이 의식은 아기 부처님이 탄생하셨을 때 아홉 마리 용이 공중에서 향기로운 물을 솟아나게 하여 신체를 목욕시켰다는 데서 유래한다.
또 연등회는 부처님 당시에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께 일만 등을 켜서 공양한 예가 있고, 가난한 여인이 등을 하나 켜서 일만 등을 능가하는 정성을 보이기도 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촛불이 자기 몸을 태워 세상을 밝히듯이 등을 켜는 이유도 가정과 사회, 세계를 밝히겠다는 서원의 발로인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초파일부터 보름까지 경주에서는 남녀가 앞다투어 탑돌이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연등회가 전통문화행사로 치러졌음을 알 수 있다. 스님을 따라 염주를 들고 탑을 돌면서 자신의 소원을 빌며 등을 밝히고 복락과 극락왕생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2) 출가하신 날 - 출가재일
음력 2월 8일은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날이다. 출가재일은 부처님께서 모든 중생을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건지시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왕궁을 떠나 출가하신 날을 기념하는 법회이다. 불자들은 부처님을 본받아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위로는 진리를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 하겠다)’의 보살이 되겠다는 서원을 세우며 법회를 진행한다.
(3) 깨달음을 이루신 날 - 성도재일
음력 12월 8일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날이다. 이 날을 기념해 선방의 수행자들은 일주일간 철야 용맹정진을 하며, 일반 사찰에서도 발심 정진하는 철야법회를 갖는다. 불자들은 부처님께서 행하신 수행을 본받아 생사의 고해에서 벗어나 열반을 얻고,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 불국정토를 건설하겠다는 서원을 세우며 기념법회를 갖는 것이다.
(4) 열반에 드신 날 – 열반재일
음력 2월 15일은 부처님께서 일체의 번뇌를 끊어 열반에 드신 날이다. 부처님의 열반은 이 세상의 모든 번뇌를 확실히 끊었다는 점에서 반열반(般涅槃)이라고도 한다. 즉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교화하시던 시기는 꺼풀인 육체를 지니신 단계이지만, 그 꺼풀마저 벗었다는 점에서 깨달음의 큰 완성으로 보는 것이다. 불자들 또한 몸을 바르게 하고 화를 참고, 악한 마음과 탐욕을 버리고 열반의 경지를 성취하겠다는 서원을 세우며 기념법회를 갖는다.
(5) 우란분절 - 백중
음력 7월 15일은 하안거 해제일이며 백중이다. 백중(百衆)은 과일과 음식 등 백 가지를 공양한 백종(百種)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선방에서는 하안거 동안 정진하면서 생긴 스스로의 허물을 대중 앞에 사뢰고 참회하는 포살(布薩)을 행하며, 불자들은 선망부모를 천도하는 우란분절 법회를 가진다.
우란분절(盂蘭盆節)은 우란분재라고도 하는데, 그 본래의미는 지옥에서 고통으로 신음하는 영가들을 구원하는 법회이다.
이 우란분절 법회는 안거 수행 대중에게 공양을 올린 공덕을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제한 목련존자의 효행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에 음력 사월 초파일과 백중을 일년중 가장 큰 행사로 여겼다. 민간에서는 이 날이 고된 농사를 끝내고 벌이는 칠월의 세시 명절로,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최대 축제일이었다. 불자들은 한여름의 풍성한 과일이나 햇곡식을 들고 절을 찾아 스님들께 공양하거나 조상 천도를 위한 기도를 한다.
이상의 다섯 가지를 불교의 5대명절이라 한다.
(6) 그 밖의 명절 의례
정월은 새해의 풍요와 안정을 희구하는 새로운 출발의 시기인 동시에 쉬면서 다가올 농사일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예전에 사찰에서는 정월이 되면 마을 주민들과 더불어 여러 가지행사를 했다. 요즘은 신년 첫 법회를 사찰의 대중 스님들과 불자들이 함께 지내며 일년의 평안을 발원하기도 한다. 이 법회를 통알(通謁) 혹은 세알(歲謁) 이라고 하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하여 삼보와 호법 신중, 그리고 인연 있는 모든 대중에게 세배드리는 의식이다. 이와 더불어 며칠 동안 정초기도를 올린다.
입춘에는 홍수, 태풍, 화재의 세간 재난인 삼재를 벗어나게 하는 삼재풀이를 하고, 일년 내내 풍요로움이 가득하기를 기원한다.
그 외에도 삼월 삼짇날, 단오, 칠석 등 민속 절기마다 절에서는 불공과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동지에는 붉은 팥죽을 쑤어 먹으며 복덕을 기원하기도 한다.
민족의 세시풍속을 불교가 받아들여 불교 명절화된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민중들의 소망를 받아들여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이처럼 불교는 민간신앙을 수용, 전승하며 발전시켰기 때문에 민중과 함께 가꾸어 나가는 민족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방생 법회
나의 생명이 소중하다면 다른 생명도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일시적인 안락을 위해 다른 생명을 소홀히 여기면 안 된다. 방생은 연기적 세계관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한다. 연기적 세계관에서 볼 때 모든 존재는 한 몸으로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불살생과 자비의 구현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동체대비이다.
우주 만물이 나를 지탱해주는 존재이기에 어느 것 하나라도 파괴되기 시작하면 나도 역시 파괴된다는 것이 부처님이 가르침이다. 그래서 살생을 엄격히 금하고 방생을 권하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생명경시 풍조 속에서 방생이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보다 넓은 마음에서 생명계를 사랑하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연기적 세계관 위에 서는 것이며, 그렇게 했을 때 모든 생명과 함께 사는 사회가 이루어질 것이요, 방생의 공덕이 있을 것이다.
예부터 음력 정월 대보름, 삼월 삼일, 팔월 보름에 방생법회를 열어 왔다. 그러나 요즈음은 특별한 시기를 정하지 않고 수시로 하고 있다.
방생은 죽게된 생명을 살리는 운동이다. 바로 미물일지라도 그 생명을 소중히 여겨 보호하는 것이다. 작게는 사람의 손에 걸려 죽게 된 고기나 새 등을 사서 제 살던 곳으로 다시 놓아주는 것이지만, 본래는 불살생계를 적극적으로 실천해서 모든 생명을 살리는 일을 말한다.
그런데 최근 들어 물고기나 새를 놓아주는 일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생태를 먼저 고려하는 방생. 환경. 인권. 생명 등을 살리는 활동 등 방생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를 찾기 위한 실천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우리불자들도 이와 같은 방생의 본뜻을 살리는 활동에 앞장서서,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방문하는 등 어렵고 소외된 이웃에게 부처님의 자비를 베푸는 사회봉사를 실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5) 천도재
재는 깨끗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며 공덕을 닦는 의식이다. 재의 어원은 산스크리트 우포사다(uposadha)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스님들의 공양의식을 뜻한다. 대개 스님들에 대한 공양은 집안의 경사나 상사(喪事), 제사 때에 이루어졌으므로 나중에는 제사의 기원으로까지 전환되었다.
원래 재는 스님들에게 공양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간단히 불전의식을 집행하고 공양에 임했으나 그것이 점차 큰 법회의식화 되어 호국법회의 형식으로까지 발전했다. 나중에는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을 위해 베풀어지는 모든 행사를 통칭하는 뜻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요즘은 스님들에 대한 공양부터 기도, 불공, 시식, 제사, 낙성, 기타법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식에 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재(齋)라고 하면 천도재(薦度齋)를 떠올린다. 천도재는 망자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한 의식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재를 지냄으로써 죽은 영가가 살아생전에 지었던 모든 업을 소멸하고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의식이다.
그 내용은 영가에게<무상게>를 일러주어 죽음이라는 현실을 만물 변화의 자연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영가로 하여금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라 원래의 청정한 마음을 되찾도록 인도하고 극락세계의 왕생을 권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재는 영가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재에 참석하여 공덕을 짓는 이들에게도 생사의 슬픔을 승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천도재의 종류로 49재, 100일재, 기제(忌祭), 소상, 대상, 우란분재 등의 정기적인 것과 수륙재, 영산재 등 필요에 따라 행하는 비정기적인 천도재가 있다.
(1) 장례의식과 49재
사람이 죽어 인연이 다하면 육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흙. 물. 불. 바람) 네 가지 원소로 사라진다. 그러나 깨치지 못하는 한 중생의 마음은 여전히 미혹한 상태에 집착하여 어리석게도 세상을 헤매다 미혹한 몸을 받는다. 이것이 윤회(輪廻)이다. 아직 다음 생을 받지 못한 영혼을 중유(中有) 또는 중음(中陰)라고 부른다. 바로이 단계에서 부처님의 법을 설하여 극락으로 인도하는 천도의식을 치른다.
죽은 이를 위해 장례전에 행하는 의식을 시다림이라고 한다. 원래인도의 시타림에서 유래한 말로, 시체를 버리는 추운 숲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죽으면 망자에게 무상계를 일러주고 입관하기 전에 목욕의식을 행한다. 경은보통 <아미타경> <금강경> <반야심경>등을 독경하고 서방 극락세계에 계시는 아미타 부처님을 부르며 발원한다. 목욕을 시키고 수의를 입히는 매 단계마다 영가를 위한 법문이 있게 되는데, 이는 영가를 부처님께 귀의하게 하여 좋은 곳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의미이다.
장례절차가 끝나면 발인을 하게 되는데, 임시로 단을 만들고 제물을 정돈한 후 영구를 모시고 나와 제단 앞에 모신다. 법주가 거불과 청혼을 한 다음 제문을 낭독한다. 법주의 법문이 끝나면 대중이 다 함께 <반야심경>을 독송한 뒤 추도문을 낭독하고, 동참자들이 순서대로 분향한다. 발인이 끝나면 운구 행렬을 이끄는 깃발을 든 사람이 앞장서고 명정, 사진, 법주, 상제, 일가친척, 조문객의 순으로 진행한다.
불교의 전통적인 장례법은 화장이다. 이를 다비(茶毘)의식이라고도 한다. 다비식이 끝나면 유골을 납골당이나 영탑에 모시거나 산골(散骨)한다. 위패를 사찰에 봉안하고 반혼재를 모신 뒤 49재를 지내 영가의 극락왕생을 기원한다.
49재란 망자가 죽은 날로부터 7일마다 한 번씩 모두 일곱 번의 재를 올리는 것이다. 방자가 생전에 지은 업에 따라 다음 생을 받아 태어나게 되는데, 그 기간이 7일을 주기로 하며 7주 간 계속된다. 그 기간 동안 7일마다 재를 지내 망자가 좋은 곳에 태어나도록 천도하는 것이다.
49재를 마치고 탈상을 한 후에는 전통에 따라 차례와 제사를 모시게 된다. 전통적인 제사는 영혼을 위로하는 데 그치지만, 불교의 제사는 영가로 하여금 애착심을 버리고 미혹에서 벗어나 극락왕생하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불교식 제사는 거불, 다게, 청혼, 공양, 묵념, 보공양진언, 광명진언, 찬불가, 발원, 음복의 순으로 진행한다.
(2) 수륙재
수륙재란 물이나 육지에 있는 외로운 귀신이나 배고파 굶주리는 아귀에게 공양하는 법회이다. 자손이 있는 영가들은 자손들이 재를 지내준 덕분으로 편한세상으로 가지만 그렇지 못한 영가들은 사바세계의 물이며 땅에서 외롭게 떠돈다. 이들은 기아와 갈증으로 고통스러워한다. 이러한 외로운 영가들을 위해서 국가적으로 올리던 천도재가 수륙재이다. 이렇게 하여 천도된 영가들의 도움으로 국가의 환란을 막고 이익을 도모하고자 했다. 오늘날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올리지 않고 개별 사찰에서 수륙재를 거행하고 있다.
(3) 영산재
영산재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의 모습을 이 세상에 재현한 의식이다. 즉 온 세계 모든 성현들과 스님들을 청하여 봉양하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시방의 외로운 혼령들을 천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하는 의식이다.
(4) 예수재
예수재란 살아 생전에 미리 수행과 공덕을 닦아두는 재의식으로서, 속설에는 자신의 49재를 미리 지내는 것이라고 한다. 49재는 순수하게 죽은 이를 위한 재이나, 예수재는 살아 있는 이가 자신의 사후를 위해 미리 준비함으로써 살아서나 죽어서나 행복하기를 추구하는 의례이다.
7. 조계종도로서의 신행생활
1) 대한불교조계종이란
대한불교조계종은 한국불교의 전통과 정통을 이어받은 장자종단으로서 우리나라에 선법을 최초로 들여온 도의국사(道義國師)를 종조로 모시고 있다.
도의국사는 조사선을 실질적으로 정착시킨 육조 혜능(六祖 慧能)선사의 법을 이어 받아 이 땅에 선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 도의국사로 말미암아 부처님과 달마대사, 혜능선사, 마조선사로 이어지는 법맥이 우리나라에 면면이 이어진 것이다. ‘조계(曹溪)’라는 명칭은 혜능선사가 주석하던 중국 소주(韶州) 조계산(曹溪山)에서 유래된 것이다.
조계종의 종지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근본 교리를 받들어 배우며 바로 마음을 보아 부처가 되어 법을 널리 전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自覺覺他 覺行圓滿 直指人心 見性成佛 傳法度生]’이다. 부처님의 교법을 배우고 자기 마음을 바로 보아 성불하고 법을 널리 전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조계종의 근본 뜻이라는 것이다.
조계종의 소의경전은 <금강경>과 ‘전등법어’이다. 전등법어는 <육조단경> <마조록> <임제록> <벽암록>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기타 경전의 연구와 염불, 지주(持呪) 등 여러가지 수행법을 포섭하고 있다.
이 땅에 선법(禪法)을 처음 전한 조계종의 종조 도의국사는 784년(선덕여왕 5년) 당나라로 건너가 혜능선사가 설한 <육조단경> 설법처인 보단사(寶壇寺)에서 계를 받고 선종 스님이 되었다.
이후 강서 개원사(開元寺)로 가서 혜능선사의 정맥인 남악 회양을 이은 마조대사의 법제자인 서당 지장(西堂 智藏)선사의 문하에서 정진하여 법을 인가받았다.
도의선사는 청규로 유명한 백장선사를 찾아가 법요(法要)를 전해 받으면서 “강서의 선맥이 모두 동국으로 가는구나”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도의국사는 37년 동안 당나라에서 치열한 수행을 한 후, 821년(헌덕왕 13년) 선법(禪法)을 가지고 귀국하여 설악산 진전사에 주석하면서 염거선사에게 법을 전했다. 현재 우리 조계종의 근원이 되는 가지산문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조계종을 다시 천명한 중천조(重闡祖) 보조 지눌국사는 8세에 출가해 예천 보문사에서 선을 체험한 후 팔공산 거조사에서 정혜결사를 하면서 <권수정혜결사문>을 발표해 선풍을 일신했다. 그 뒤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참선.정진하던 중 <대혜어록>을 보고 깨침을 얻었다. 1200년에는 길상사(현재 순천 송광사)에서 간화선을 최초로 소개하는 등 선법을 널리 폈다.
태고 보우국사는 신라 이래 고려를 거친 5교9산의 전통을 통합하면서 조사선의 정통 선맥을 계승한 조계종의 중흥조이다. 보우국사는 13세에 출가해,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화두에 전념했다. 1346년 임제 의현선사의 18대 법손인 석옥 청공선사를 인가를 받았다. 귀국한 후 왕사가 되어 구산선문을 통합, 조계종을 중흥시켰다.
이후 조선시대를 지나 1937년 태고사(현재 서울 조계사)를 창건하고 1940년 31본산주지회의에서 ‘조선불교조계종’이라 이름하고 선풍을 진작시켰다.
해방 이후에는 1954년 정화운동을 통해 새롭게 종단을 정비하였으며, 1962년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출범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6장 우리도 부처님같이
1. 불교의 윤리관
1) 불교 윤리의 근간
윤리란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나 규범을 말한다. 즉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구분하여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여, 궁극적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윤리의 목적이다.
불교의 윤리사상은 업설과, 계율사상에 잘 나타나 있다. 업설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가장 포괄적인 개념으로, 불교 윤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과학문명의 발달로 많은 분야에서 생산성이 높아져 물질이 풍성해지고, 생활이 편리해졌다. 그러나 자연환경 파괴, 물질만능주의, 도덕과 규범의 상실, 가치관의 충돌 등 그 역기능 또한 적지 않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윤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불교는 세속을 떠난 종교이기 때문에 인간의 윤리에 대한 가르침이적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불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가르침을 펴고 있다. 그리고 그 바탕에 업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불교에서 업은 인간의 의지작용과 행위를 말하며, 거기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고 설하고 있다. 선업에는 즐거운 과보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과보가 따른다는 것이 경전의 말씀이다.
또한 선과 악의 판단 기준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중시되지만, 그 판단에는 사회 윤리적 책임이 함께 따른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1) 삼세 업보설
세상에는 나쁜 일을 저지르고도 잘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착한 일만 하는데도 불우하게 사는 이가 있는 등 인과의 법칙에 어긋나는 듯한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유신론자들은 신의 뜻이라고 하고, 운명론자들은 그 원인을 운명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만일 신의 뜻이나 운명 때문이라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설 자리를 잃고, 인간의 존재성마저 의미를 잃고 만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현상은 삼세업보설로 설명할 수 있다. 삼세란 전생과 현생, 내생을 뜻한다. 그래서 전생의 업에 대한 과보를 현생에서 받는 경우와, 현생의 업에 짓는다면 반드시 그 과보를 받되, 현세에 받을 수도 있고 내세에 받을 수도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윤회설이 등장한다. 윤회설은 인간 윤리의 대상을 현세에서 무한한 시간으로까지 펼쳐 놓는다. 즉 금생만 살고 말면 그만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순간적인 환락, 자포자기 등을 억제하고, 좋은 과보를 받기 위해 선을 행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생겨난다. 여기에서 미래 지향적인 불교의 인생관, 가치관 사회 윤리관을 엿볼 수 있다.
(2) 십악업과 십선업
인간은 행복하기를 바라면서도 불행을 불러올 악업을 일삼는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다. 부처님은 이렇게 악업을 열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몸으로 세 가지 억업 때문에 괴로운 보를 받는다. 살생과 도덕질과 사음이 그것이다.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 때문에 괴로움을 받는다. 그것은 거짓말, 이간질하는 말, 욕설, 아첨하는 말이다.
뜻으로 짓는 세 가지 악업 때문에 괴로움을 받는다. 곧 욕심, 성냄, 어리석음이다.
이상의 열 가지 악업에 반대되는 것이 십선업이다. 즉 살생하지 않는 것. 훔치지 않는 것. 간음하지 않는 것. 거짓말 하지 않는 것. 두말하지 않는 것. 악한 말을 하지 않는 것. 간사한 말을 하지 않는 것. 남의 것을 탐내지 않는 것. 성내지 않는 것. 바른 견해가 그것이다.
이 열 가지 업 가운데 어느 하나도 인간의 사회생활과 무관한 것은 없다.
작은 구멍 하나 때문에 거대한 댐이 무너지듯이, 사회라는 큰 틀도 개인의 변화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특히 문명의 이기와 개인주의가 범람하는 이 세대에 개인의 가치관과 삶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개인의 변화는 시대정신을 이끄는 출발점이자 완성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불자 개개인 들이 지켜야 할 생활규범의 원칙으로 제시하신 것이 바로 이 열 가지다. 이열 가지 원칙들은 몸과 입과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몸과 관련된 것이 세 가지, 입과 관련된 것은 네 가지 , 생각과 관련되 것이 세 가지다.
첫째, 몸과 관련된 규칙으로는, 산 목숨을 죽이지 말고 살려주는 것, 남의 것을 훔치지 말고 남에게 베풀 것, 다른 사람과 삿된 관계를 갖지 말고 정숙한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하셨다. 이 세 가지를 지키지 않을 경우 자신에게도 해로울 뿐 아니라 다른 이를 고통에 빠뜨리는 원인이 된다.
둘째, 말과 관련된 규칙이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상대방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경우가 있다. 언어 생활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먼저, 남에게 정직한 말을 해야 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조그마한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조그마한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자신감을 상실한 사람이나 숨길 것 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스스로 당당한 사람이 되어 거짓말에 쏟는 노력을 긍정적인 분야로 돌려 정직하게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부드러운 말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안온한 상태에서서로 흉금을 터놓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남을 속이는 것은 나를 속이는 일이다. 이런 행동이 계속되면 나중에는 습관적으로 남을 속이게 된다. 인간의 자의식은 언제나 잠재하고 있으므로 속이다 보면 나중에는 누가 나를 속이는 것은 아닌지 남을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깊어지면 좋지 않은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따라서 바른 말로 신뢰를 쌓아야 하며, 이상한 말로 남을 현혹시키지 말아야 한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봐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마음 상태가 지속될 경우, 믿음보다는 불신이 깊어져 사회가 혼란스러워진다. 이간질은 비윤리적임을 알아야 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으로 이끄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
셋째, 생각과 관련된 규칙들이다. 우리들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계율, 선정, 지혜의 삼학을 닦아 나아가는 것뿐이다. 잘못된 행동의 뒷면에는 탐욕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탐욕을 버리는 정신 수양이 필요하다. 부처님께서는 늘 무욕의 경지를 설하셨다. 재가불자들은 탐욕을 억제하고 지족하는 삶을 살아나가야 한다.
한편, 남을 배려하지 않고 화를 낼 경우 인간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고 돌이킬 수 없는 분열과 대립으로 몰고 간다. 따라서 자신의 조급한 마음과 남을 배려하지 않고 화내는 마음을 다루는 일이 중요하며, 그것은 수행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성냄이 없는 경지를 무진에라고 한다.
2) 일곱 부처님의 공통 계율 - 칠불통계(七佛通戒)
이러한 불교의 바탕에는 지헤와 자비가 있다. 지헤와 자비로 이러한 잘못된 행동의 원인을 없애고 진리의 입장에 서서 바로 보는 것(正見)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행동이다. 이러한 행동양식을 바탕으로 모든 생명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서로 위해주러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선을 추구하는 정도(正道)인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거칠불(過去七佛)]들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제악막작(諸惡莫作)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중선봉행(衆善奉行) 모든 선을 힘써 행하여
자정기의(自凈其意)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
시제불교(是諸佛敎)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칠불통계란 일곱 부처님(석가모니 부처님과 그전 여섯 분의 부처님)의 공통 계율이란 뜻으로 이 가르침에 따라 청정하고 맑은 마음으로 모든 더러운 생각을 떨쳐버린 사람은 절대 평화와 대자유의 경지인 해탈과 열반에 도달할 것이다.
중국 당나라때 나무 가지 위에 앉아서 선에 든다 하여 '새둥지'라는 뜻의 조과(鳥菓)로 잘 알려진 지도림(支道林)선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당대의 유명한 지식인 백거이(白居易)가 선사를 찾아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조과 선사는 '칠불통계'의 가르침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백거이가 웃으며
"그것은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오" 하자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선사가 백거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알지 모르나 여든 된 노인도 그것을 실천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렇다 생각만으로는 쉽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진리도 그대로 실천해 옮기기는 어렵다. 불자들은 이를 위해 정진하고 또 정진해야 한다. 억지로 하라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야 한다.
2. 깨달음을 향한 실천 덕목 - 육바라밀 수행
올바른 불자의 삶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실천하는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수행하는 사람을 대승불교에서는 보살(菩薩)이라고 한다. 보살은 부처가 되고자 원을 세운 사람이다.
보살은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을 이롭게 하는 수행을 해야한다.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보살 수행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이다.
지혜로운 이가 남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남을 위한 일이 결국 자신을 위한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자리이타행을 실천해야 하고 그 수행이 육바라밀(六波羅密) 수행 즉 여섯가지 실천 행동의 완성이다. 바라밀을 파라미타(Paramita)의 음역으로 '완성' 또는 '피안에 이르다'라는 뜻이다.
1) 보시바라밀(布施波羅密)
인색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베풀 줄을 모른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베푸는 것을 좋아하나니
그는 그 선행으로 인하여
더 높은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게 한다. <법구경><세속품>
부처님 당시의 인도 사람들은 남에게 많이 베풀면 그 공덕으로 자신에게 좋은 과보가 들어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과 수행자 등을 만나면 복을 짓는 일이라고 믿고 기쁜 마음으로 베풀었다. 그 까닭에 도움을 받는 사람을 복전 또는 복밭이라고 했다.
보시는 이웃에게 베푸는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주저없이 베푸는 것이다. 보시에는 재물을 베푸는 재시(財施),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시(無畏施),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법시(法施)가 있다.
자기 것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더 많이 갖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시는 자신을 비우지 않으면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이다. 그래서 보시는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과 그로 말미암아 모든 번뇌를 없애주는 길이기도 하다.
탐욕을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첫째 지혜의 눈을 뜨는 것이요, 둘째 나의 것을 남에게 베푸는 마음이라 하였다.
보시를 행할 때에는 주는 이와 받는 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내서는 안된다. 부처님은 보시할 때 어떠한 보답을 원해서는 안되며, 자신이 남에게 보시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준다는 생각조차 없이 주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강조한 것이다.
2) 지계바라밀(持戒波羅密)
지계는 계율을 지키는 것, 즉 올바른 생활 규범을 갖는 것이다. 오계, 십선계, 보살계 등 부처님과 한 약속을 일상생활 속에서 어기지 않는 것으로 수행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이다.
이미 저질렀거나 아직 저지르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의 결점은 일절 보지 말라.
이미 저질렀거나 아직 저지르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그대 자신의 잘못을 반드시 되돌아보라. <숫타니파타>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직전 전생의 과보로 등창이 생겨 고생하셨다는 내용이 <전생담>에 실려 있다. 이것은 부처님조차도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알게 모르게 하는 행동이 결국 다시 본인에게로 되돌아온다. 과보를 받지 않으려면 업을 짓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살면서 업을 전혀 짓지 않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좋은 일을 행하는 계를 지킴으로써 선업을 쌓고 악업을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오늘의 행동이 내일의 모습을 결정한다. 부처님은 모든 행동이 결국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하셨다. 한방울의 물이 모여 큰 항아리를 채우는 것처럼 우리가 '별거 아니겠지'하고 가볍게 생각하면서 저지른 악행이 결국 재앙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계를 스승으로 삼아 열심히 정진하라'고 당부하셨다.
3) 인욕바라밀(持戒波羅密)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행하기 어려운 것을 능히 행하는 것을 인욕바라밀이라고 한다. 참기 어련운 것에는 탐냄과 성냄, 또는 본능 등이 있다. 수행자가 화를 낸다면 이는 수행이 덜된 징조이다.
불교는 흔히 수행의 종교라고 한다 .수행은 모든 것을 참아가며 참사람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참는다는 것은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을 자제하는 것을 말하며, 이를 잘 참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지켜보아야 한다.성내는 마음을 잘 참기 위해서는 자신을 화나게 하는 사물이나 조건 또는 상대방을 이해해야 한다.
내게 분한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를 이해하거나, 혹은 그가 잘못된 판단으로 그와 같이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도 생기고 저절로 참을성이 생겨나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억지로 참는것이 아니어야 한다. 억지로 참으면 당장에는 좋을지 몰라도 내마음속에는 화가 쌓여 병이 나고 언제가는 그 화가 폭발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참을 일마저 없는 것이다. 분별이 끊어진 수행자는 남을 용서하고 참을 일마저 없기 때문에 인욕한다는 생각조차 없다.
4) 정진바라밀(精進波羅密)
정진바라밀은 끊임없는 노력, 정법을 믿어 수행에 힘쓰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완성을 위하여 번뇌를 끊고 끊임없이 노력하되, 시작이 없는 과거에서부터 끝이 없는 미래에까지 영원히 계속해 나가는 것을 정진바라밀이라 한다.
과거의 버릇이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는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에도 잘 나타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실천하며 살려고 해도 탐욕에 길든 버릇을 하루 아침에 털어버리기란 참으로 어렵다.
몸과 말과 마음의 수행이 어느 정도 되는가 싶다가도 금방 그것을 허물어버리는 삼독심이 솟아나곤 한다. 그러므로 더 굳건한 마음으로 수행하면서 습관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 투철하게 깨달음을 이루어 다시는 어제의 생활로 돌아기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용감하게 전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5) 선정바라밀(禪定波羅密)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전혀 동요가 없는 상태를 선정이라 한다. 깊이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이 선정바라밀이다.
선정은"마음으로 고요히 집중해 들어간다"는 뜻인데, 분별로 인한 소란과 수면과 같은 멍한 상태에서 마음을 깨어 있게 해 정신을 맑게 해준다. 이 선정을 삼매라고도 하는데, 나와 대상이 하나가 되어 맑고 고요하며 흔들림 없는 경지를 일컫는다.
육바라밀의 근거가 되는 반야바라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선정바라밀을 닦아야만 한다.
6)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
반야바라밀은 지혜의 완성이다. 지혜는 선정을 통해 얻어진 것으로서, 배워서 얻는 지식과는 다르다. 앞에서 소개한 다섯 바라밀, 즉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의 다섯 가지 수행은 이 반야바라밀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공의 지혜로써,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실천적 지혜를 가리킨다.
지혜의 향기는 아주 멀리까지 전해진다. 마치 만리향의 그윽한 향내가 바람을 타고 먼 곳까지 전해지듯, 지혜로운 사람의 향기는 나와 이웃 그리고 온 세계를 맑게 정화한다.
반야바라밀이 없이는 다섯 가지 바라밀은
바라밀이라고 불리지 못한다.
마치 전륜성왕이 윤보가 없을 때에는
전륜성왕이라는 이름을 갖지 못하는 것과 같다. <대지도론>
3. 더불어 사는 삶
우리는 매순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런데 다른 환경에서 사회란 상호작용을 영위하는 개인들의 집합체이다. 그 개인들의 관계는 각자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여러 원칙과 실천에 의해 지배되고, 그 원칙과 실천은 개인들의 행동에 따라 각기 특징적인 의미가 부여된다.
일반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상호관계에서 개인이 먼저 있고 그 개인이 모여서 사회를 이룬다고 생각하기 쉽다. 개인주의의 입장에서는 자아를 가진 개인이 기본이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므로 당연히 개인이 모여 사회가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인이 우선하다고 하더라도 무(無)로부터 개인이 생겨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부모에 의해 태어나고, 각자 형제와 자매가 있다. 또 친구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즉 누구나 사회 속에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식량이나 의복, 문화 등 모든 것들은 사회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없이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사회 속에서 태어나며 사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개인이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신체와 정신이 끊임없이 변한다고 보고 있다. 개인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이며, 개인과 개인이 모여서 만들어진 이 사회도 변하고 있다. 개인도 변하고 사회도 변하기 때문에 상호 의존적인 인간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한 개인은 사회의 일부이자 사회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 요소로 개인과 사회는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과의 화합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단순히 교화를 위한 도덕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큰 진리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부처님은 이를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말로 설명하셨다.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가 나와 하나로 느껴져 모든 대상에 큰 자비심이 일어나는 동체대비의 깨달음은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경쟁사회를 살아가며 생기는 수많은 갈등과 대립의 인간관계를 협력과 우호의 관계로 바꾸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게 하는 지혜를 준다. 또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곳을 이상적인 사회로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나무의 뿌리가 상하면 줄기도 상하고, 그러면 잎이 시들고 꽃이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인간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부모가 건강하지 않고 행복하지 않다면 자식이 결코 행복할 수 없고, 또 손자 손녀가 병들거나 불행할 것이 뻔하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을 가질 때 다른 사람들과 가깝고 따뜻한 사이가 될 것이다.
불자로서 살기 좋은 부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대사회에 팽배해 있는 경쟁과 대립의 인간관계를 협력과 우호의 관계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 경전에 나타난 인간관계의 근본은 '자비'이다. 즉 자비는 너와 나를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생명과 체온을 함께 나누는 한 몸이라는 동체대비의 깨달음에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끝없는 사랑과 관심을 말한다.
1) 부모와 자녀
부모의 사랑을 넓은 바다와 끝없는 하늘에 비유한다. 한 생명을 잉태하여 스스로 독립할 때까지 길러주고 보살펴주는 것이 부모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물질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자식에게 중요한 존재이고 자식 또한 부모에게 분신과 같은 소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예부터 부모와 자식 사이는 인륜이 아니라 즉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여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부모로서 옳은 자세가 아니다. 자기가 낳아서 길렀을지 몰라도 자식은 하나의 인격체이다. 자기 뜻대로 자식의 장래를 결정하고 무소건 따르게 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며 자식을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
부처님께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해야할 일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첫째,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 자식이 악행을 멀리하고 착한 일을 하게 해야 한다.
셋째, 적절한 교육과 생계 수단인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해주어야 한다.
넷째, 결혼할 때가 되어 배우자가 정해지면 가정을 이루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 부모는 어느새 나이가 들어 자식에게 의지해야 한다. 자식이 어렸을 때 부모에게 의지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부처님께서는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효도라고 하셨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풀어준 은혜는 아루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말씀하셧다.
첫째, 늙어신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고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도록 보살펴 드려야 한다.
둘째, 부모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집안 일을 이어받아 바르게 처리해야한다.
셋째, 조상님께 제사를 올리며 그 뜻을 따라야 한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기 떄문에 부모와 자식간의 세대 차이가 예전보다 더 커졌다. 그러나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하기보다는 대화를 통해 서로 이해해야 한다. 어느 세대나 장점과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자기 것만을 고집하기보다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다정다감한 친구같은 부모가 되고 부모를 인생 선배로 존경할 줄 아는 자식이 되면 이른바 세대간의 벽도 허물어질 것이다.
2) 스승과 제자
아이가 스승 앞에 종아리를 걷고 서 있는 옛 그림은 보는 이의 마음에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매를 맞으면서 익살맞은 표정을 짓는 아이와 엄한 얼굴이지만 사랑이 느껴지는 스승의 모습에서 사제지간의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이런 풍경은 우리 시대와는 먼 옛날 이야기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스승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제자에게 가르치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스스로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제자는 또한 열심히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며 스승을 존경하고 받들면서 살아야 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스승의 도리
스승은 제자를 가르칠 때 다음의 다섯가지에 힘써야 한다.
법으로 훈육해야한다.
배우지 못한 것을 가르쳐야 한다.
질문하는 것을 잘 이해시켜야 한다.
착한 벗을 알려주어야 한다.
아는 것을 다 가르치는데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잡아함경 - 선생경>
제자의 도리
제자는 스승을 공경할 때 다섯가지 일에 힘써야 한다.
공경하고 높이 칭찬해야 한다.
스승의 은혜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
가르침대로 따라야 한다.
늘 사모하고 생각해야 한다.
스승의 뒤를 따르고 명예를 드날려야 한다.
3) 아내와 남편
불교에서는 부부로 만난 것은 전생부터 지금까지 5백 생의 인연이라고 한다. 그만큼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남녀의 만남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사이가 부부이다.
부부는 물이나 공기처럼 늘 가까이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서로 소중함을 잊고 살 때가 많다. 그러나 어느 한쪽을 잃으면 그 빈자리가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다. 가족을 이룬 두사람이 서로 이해하고 의지하면서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자식들은 의지할 곳을 잃고 헤멜 것이다. 문제있는 부모에게서 문제아가 생긴다는 말이 있다.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청소년들을 상담해보면 대부분 부모에게 문제가 있어서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의 불화는 자식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된다. 순간의 기분으로 남편으로서 또는 아내로서 그 책임과 의무를 저버린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그래서 부처님은 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남편의 도리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다섯가지에 힘써야 한다.
출입할 때 예절로써 대해야 한다.
위엄을 지켜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의식주 걱정이 없게 해야 한다.
때를 맞추어 장신구를 사주어야 한다.
집안 살림을 믿고 맡겨야 한다.
아내의 도리
아내는 남편을 섬길 때 다섯가지 일에 힘써야 한다.
남편이 밖에서 돌아오면 일어나서 맞이해야 한다.
집안을 잘 정리하고 음식을 잘 만들어야 한다.
다른 남자를 생각하지 말고 얼굴을 붉혀 다투지 말아야 한다.
남편의 의사를 존중하고 재산을 잘 관리해야 한다.
남편이 휴식할 때 편안하게 해야한다.
4) 친구
친구는 제2의 자신이라고 한다. 성실하게 살아가던 사람도 친구를 잘못 만나면 나쁜 길로 빠지기 쉽다. 그래서 친구를 사귈 때는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좋은 벗을 만나는 것은 도의 전체를 이룬다고 했다. 자신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친구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성공한 인생이다. 얼마나 많은 친구가 있느냐 보다 진정한 친구가 한 사람이라도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처님의 10대 제자중에 사리불과 목련존자가 있다. 둘은 한 스승 밑에서 같이 수행하던 친구였다. 그들은 좋은 스승을 만나면 서로 연락해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다가 부처님을 만나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님께서는 가까이 하면 좋은 친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첫째. 친구가 취했을 때 재산을 지켜주고, 두려워할 때 보호자가 되어주며, 필요할 때는 내게 필요한 두 배 이상의 재산이라도 줄 수 있는 친구이다.
둘째. 즐거우나 괴로우나 항상 변하지 않는 벗이란 자신의 결점을 일러주고 또한 나의 비밀을 지켜준다. 재산을 잃어 가난해졌을 때도 버리지 않고, 친구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버린다면 이는 진정한 친구이다.
셋째. 착한 말만하는 친구는 악한 일을 멀리하게 하고 선한 일을 행하게 한다. 새로운 정보와 성인의 가르침을 전해주고 인도해주는 친구이다.
넷째. 동정심이 있는 벗은 친구가 약해질 때 기뻐하지 않고,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기뻐한다. 비난하고 험담하는 사람을 멀리하고, 찬양하는 사람을 칭찬하는 친구이다.
나의 결점을 일러주는 친구.
나의 결점을 꾸짖어주는 친구.
이런 사람 만나거든 그를 따르라.
그는 내게 보물이 감춰진 곳을 일러주는 사람과 같다.
그를 따르면 많은 이익이 있다.《법구경》
또 멀리해야할 친구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첫째. 무엇이나 눈에 띄는 것은 가져가고, 작은 것을 주고 큰 것을 얻으려 한다. 자발적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일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일한다.
둘째. 교묘한 말로 우정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며, 필요없는 애교를 부린다. 해야할 일이 눈앞에 닥치면 태도가 달라진다.
셋째. 감언이설로 상대방의 나쁜 일에만 보조를 맞추고, 좋은 일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당사자 앞에서는 칭찬하고 돌아서면 비웃고 험담한다.
넷째. 생활이 문란하고 술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같이 즐길 때는 좋지만, 결국 무기력하고 사회에서 쓸모없는 사람으로 몰아간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친구마저 파멸시키므로 멀리해야 한다.
의롭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그릇된 일에 사로잡힌나쁜 벗을 멀리하라
탐욕에 빠져있거나 게으른 사람을 가까이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5) 직장동료
현대인의 스트레스는 절반 이상이 직장에서 받는 것이라고 한다.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보통 하루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가장 긴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는 것이다. 그런 만큼 직장에서의 인간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과중한 업무와 직장 동료와의 갈등으로 인해 받는 심리적 압박감은 다른 무엇보다 크고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 배려하는 마음을 조금씩 내면 서서히 해결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내가 달라지면 사회 전체가 달라질 것이다. 서로에 대한 작은 관심과 배려, 그리고 이해와 격려를 통해 직장을 편안하고 따뜻한 곳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상사는 부하 직원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일에 대한 흥미와 삶의 보람을 느낄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또 적당히 여가를 주어 생활의 활기를 찾도록 해주고, 잘못이 있을 경우에는 남이 보는 앞이 아닌 따로 불러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잘 타일러 준다.
반대로 부하 직원은 직장과 인생의 선배인 상사를 존중해야 한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상사가 없는 곳에서 험담을 해서는 안된다.
직장은 가정 다음으로 중요한 삶의 터전이다. 직장을 통해 개인의 능력을 발휘하고 그에 따라 보수를 받고 생활한다. 서로 존중하고,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자아 성취를 높여가야 한다.
4. 인류의 미래와 불교
오늘날 과학기술과 산업의 발달로 물질은 풍요롭고 생활은 편리해졌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발전이 우리 삶의 질을 높이고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준 것일까?
지금 우리 사회는 경제우선 논리를 앞세워 절제와 검소의 미덕이 사라지고 한탕주의나 과소비가 만연되었다. 그 결과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균형을 잃어 생태계가 위험에 처했다. 또 정보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전통적인 가치관이 파괴되고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하여 낙태.안락사.자살.인간복제 등의 문제가 새롭게 대두되었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리고 앞으로도 게속 발생할 새로운 문제들에 대처할 수 있는 불교적인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1) 환경에 대한 인식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환경문제와 사회 양극화 현상이다. 산 좋고 물 좋기로 이름난 우리나라 금수강산이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린지 이미 오래다. 수돗물은 물론 이제는 약수조차 믿을 수 없어 집집마다 생수를 사서 마시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동차와 각종 공장의 굴뚝에서 나오는 매연으로 공기가 탁해져 도심 길을 걷는 것마저 힘들어졌다. 비가 오면 산성비 때문에 농작물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환경문제는 물과 공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쓰레기, 중금속, 방사능, 새집증후군, 아토피성 피부 등 환경과 관련된 수많은 문제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예전에는 인간 스스로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아 자연을 크게 훼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나마 자연의 재생력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자연의 재생력이 둔화되었고, 이제는 그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인간에게 되돌아오고 있다.
물론 과학문명과 경제개발 정책만으로 이러한 상태가 된 것은 아니다. 과학문명과 결합된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들은 태양에너지를 공급받고 있으며, 이들은 서로 다양한 먹이 사슬을 유지하며 균형있는 생태계를 형성해왔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자연환경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나무를 베고 물을 끌어다가 전기를 만들어서 물질적 풍요을 누렸다. 좀 더 편한 생활을 원하는 욕구는 끝이 없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다양한 생산활동은 어느새 자연 생태계의 원활한 흐름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비해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걱정한 서양의 학자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인구의 증가보다 사람의 욕심이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을 미쳐 생각지 못한 것이다. 간디는 "자연 자원의 양은 인류가 생존하기 충분하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을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다" 라고 말했다. 인류의 탐욕으로 마침내 자연은 되돌릴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앞으로 이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 질 것이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문제에 대해 불자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연기의 가르침이 이에 대한 답이다, 자연과 우리는 본디 둘이 아니며 서로 의지하면서 조화롭게 살아야 한는 존재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동체대비(同體大비)를 이야기한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큰 자비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스스로 자심의 몸을 망치지 않듯이 자연을 훼손하는 일도 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인간 생활의 기본적 요소인 의식주 생활에서부터 만족을 아는 생활, 무소유와 근검절약이 환경을 살리는 길이며, 결국 불성을 소유한 자신을 살리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가장 좋은 불교적 실천의 예가 발우공양이다. 발우공양은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고, 수질 오염을 막는 차원을 넘어서서 지옥의 아귀 중생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겠다는 적극적 생명관을 기반으로 한다. 나 하나의 실천이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소극성에서 벗어나, 나부터 바뀌어야 세계가 바뀐다는 적극적 사명감으로 실천해야 하다. 요즘 한 불교 단체에서 펼치는 '빈그릇운동'이 바로 발우공양의 정신을 잘 살린 현대화된 발우공양법으로서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환경운동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가정에서는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반드시 분리수거를 하고, 합성세제나 일회용품 등 환경오염 우려가 있는 제품은 사용을 자제하며, 절제된 소비로 지나친 자원 낭비를 줄여나가는 것부터 실천에 옮겨야 한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그나마 청정한 지역으로 남아 있는 사찰 주변의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서 절에 갈 때는 가능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사찰 주변의 수려한 자연 경관과 호흡하며 걸어 올라가도록 하자. 기도하러 간다고 산 속 암자까지 자가용을 몰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남 보기에도 민망하다.
불교계에서는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조직을 구성해 푸른사찰운동과 환경보살운동 등을 펼치고 있다. 개인적으로 번거롭겠지만 생활에서 구현하는 작은 실천들이 자연환경 보호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명심하고 지켜나가야 한다.
환경보전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각종 노력도 필요하지만, 이보다 앞서야 하는 것이 바로 의식의 전환이다.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여 자연을 개발대상으로만 보고 자연파괴를 일삼는 인간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야 한다. "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여기에도 해당되는 진리이다. 자연이 파괴되면 인간 또한 삶을 지속할 수 없다. 자연의 아픔이 곧 우리의 아픔이다.
2) 사회 양극화의 본질
사회 양극화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살면서 한쪽이 불행하고 아프면 다른 쪽도 당연히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 좁은 대한민국에서 강남과 강북을 가르고, 호남이니 영남이니 충청이니 하며, 지역이기주의로 갈등하는 웃지 못할 일은 부처님 법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주변에 방황하며 엇나가는 청소년이 있는 한 내 자식의 행복도 보장될 수 없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심에서 어찌 나만이 안전할 수 있겠는가. 여의도처럼 넓은 광장에 작은 칸막이 하나 쳐놓고, 그곳만 깨끗하고 아름답게 가꾼다고 해서 광장 전체가 아름다워질 수는 없다. 이 뻔한 이치를 모르는 척 눈감는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내 이웃에게 눈을 돌려야 하는 가장 현실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불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인간성 회복 등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한다. 이데올로기와 지역, 계층간 갈등 구조, 상대적 박탈감에 따른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삿된 욕망을 제거하고, 불교의 화합정신을 바탕으로 절대 자유, 절대 평등의 세계를 추구해야 할 때이다. 또한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인간중심의 자연관에서 벗어나 인간과 자연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전일적(全一的) 우주관, 유기체적 세계관을 확립해야 할 때이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의 사상을 통해 생명의 무한한 자유와 가능성을 강조한 바 있다. 아무리 하찮은 생명체도 그 나름대로 존재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바르게 알고,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5. 한국불교의 사명
1) 새로운 세기의 대안
21세기에 접어든 세계는 새로운 질서를 향한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있다. 정치.경제.사회 분야는 물론 문화와 인간의 행동양식, 의식구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고 있고 가치관과 의식의 다양화, 국제질서의 급격한 이동과 재편 등 변화의 물결을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회가 이렇게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첨단 기술과 정보가 지배하는 사회와 달리 아직도 문맹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곳도 있다. 복지를 통해 높은 삶의 질을 축구하는 사회가 있는가 하면 질병과 굶주림, 기아 등으로 고통 받는 사회도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사회 내부에서도 양극화나 빈부 격차 등의 문제가 발생되기도 한다. 물론 인류의 역사나 문명을 하나의 논리만 가지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관심의 방향과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래를 조심스럽게 예측하자면 미래사회는 지식화 사회, 대중화 사회, 다원화 사회, 지구촌 사회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우리 주변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진행되고 있다. 다가오는 21세기에는 이것이 더욱 가속화되고 심화될 전망이다.
이처럼 사회가 점차 미래사회로 접어드는 상황에서 불교가 이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보기 힘든 다종교 사회이다.
수많은 사찰과 교회, 성당은 물론이고 사회가 다양화되면서 그 밖에 다른 종교들도 존재하고 있다. 많은 종교 단체들이 한결같이 인간 교화를 주장하고 있지만, 사회에는 여전히 갈등, 불평등, 부조리와 모순이 횡행하고 있다. 때로는 자기가 믿는 종교만이 우월한 것으로 여겨 종교 단체들 간의 반목과 대립이 발생한다. 이러한 갈등을 오히려 사회를 혼탁하게 하고 심할 경우에는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분열을 조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대립과 분열의 시대에 연기 사상에 입각한 불교의 조화와 관용의 원리는 불교인들만의 사상을 넘어서서 민족 전체의 사상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후기 산업사회의 정신적 갈등과 인간성 상실은 불성의 계발에 의해서 치유될 수 있다.
전쟁과 인구증가, 공해 등으로 인한 여러 문제는 결코 법과 제도의 외형적 요인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정견을 바탕으로 한 정신혁명, 의식혁명이 이러한 사회적 질병들을 치유할 수 있다.
“중생이 아프므로 나도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말처럼 병들어 있는 사회를 불자들이 앞장서서 치유해 나간다면 이 땅의 불국토화도 멀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출가 수행자와 재가신자가 합심하여 불교를 좀 더 활성화하고 내실화하여야 한다. 또 사회적 문제에 대해 시민사회운동도 펼쳐야 할 것이며, ‘중생 제도’라는 보살의 대원력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2) 민족문화의 창조적 계승
불교는 이 땅에 전래된 이래 민족정신과 융합하여 우리 민족의 문화와 사상을 이끌어왔다. 특히 불교는 1700여년의 시간을 거치는 과정에서 민족의 생활 이념으로 흡수, 통합되면서 우리들의 전통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우리는 근래에 이르기까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자신의 종교와 관계없이 불교 전통문화가 형성한 생활양식과 관습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요즈음은 달라졌다. 무분별한 서구적 가치관의 도입으로 전통적인 정신문화가 빛을 잃은 데다가 동족상전의 6.25전쟁으로 수많은 문화유산이 파괴되고 분실되었다.
그런 까닭에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그리고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불교의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키는 일이 한국불교의 시급한 과제로 등장하였다.
다행히 최근 우리 전통문화, 특히 불교문화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불교문화의 창조적 계승은 21세기의 세계화.국제화 시대를 맞이하여 한국의 새로운 정신문화 창달과 정체성 확립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민족의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데 기여할 것이다.
3) 통일을 준비하는 불교인
우리 민족이 분단된 지도 벌써 60년이 넘었다. 분단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이산가족이 되어 고통을 겪었으며, 남과 북의 대립으로 국민들은 수 세기 동안 긴장상태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러나 2000년과 2007년 두 번에 걸친 정상회담 이후 정치, 경제, 문화, 체육 등 여러 분야에서 교류가 이뤄지면서 남북 간의 대립과 긴장이 완화되고 교류 협력이 활성화됐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6.15 선언, 10.4 선언 등 지난 정부의 합의 이행 여부를 놓고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남북교류협력이 위축되고 있지만 빠른 시일 내에 경색 국면을 극복하고 남북관계를 복원하는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남북한 사이의 대립을 해소하고 화합을 이뤄낼 불교계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불교계도 통일 이후를 준비하고 대비해 가야한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통일을 위한 불교계의 노력은 이미 삼국통일시대부터 있어 왔다. 통일신라시대에 원효스님이 전쟁의 상처로 신음하는 민중에게 불교사상으로 동질감을 회복시켰고, 화쟁(和諍)사상으로 대립과 갈등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한 역사가 있었다. 고려시대 몽고 침입 때에도 호국불교의 정신으로 대장경을 조판하면서 민심을 통합하여 꿋꿋이 국난을 이겨내기도 했다.
미움과 증오를 버리는 민족의 화해가 통일을 준비하는 불자들의 첫 걸음이다. 민족의 동질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불자 개개인이 북한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풀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증오와 미움을 갖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미움과 증오를 간직한 채로는 손을 맞잡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통일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로 인한 또 다른 갈등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계가 민족통일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남북한 간의 불교 교류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교류를 통한 만남과 다양한 접촉은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고, 분단의 아픔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불교계가 서로 각 사찰을 방문이나 서신교류, 문화유산 공동 발굴 등 교류협력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민족 간의 통일뿐만 아니라 인종 간의 배타성도 극복해야 한다. 한국사회는 점차 다인종.다문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이미 우리 사회로 들어온 이민자 수는 100만 명을 넘어섰다. 따라서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소통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와 국제결혼으로 생긴 혼혈 가족 등의 문제에도 불교계의 관심과 지원이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특히 이주민의 대다수가 불교국가인 동남아시아 출신의 노동자들이므로 불교계가 이들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대사회적인 불교의 역할에 대해 나는 어떻게, 무엇으로 참여할 것인가를 스스로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처럼 살고자 하는 불자들의 바람직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