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1684년, 서쪽 향해 앉아서 입적한 현변(懸辯) 스님
숙종 10년(1684)
『해동불조원류(海東佛祖源流)』, 佛書普及社, 1978.
(국립박물관 디지털자료).
李能和, 『朝鮮佛敎通史』, 新久館, 1918. 권1
활안 한정섭 · 해월 오청환, 『한국고승전』(下 조선편),
불교정신문화원, 2014
침굉 현변懸辯 선사는 자는 이눌而訥, 호는 침굉枕肱이다. 나주 사람으로 성은 윤씨이고, 만력 44년 병진년(광해군 8, 1616) 6월 12일 태어났다. 처음 보광법사葆光法師를 따라 천풍사 탑암塔菴에서 출가하였고, 나주에 방장으로 들어갔다. 소요당을 뵙고 법을 배웠는데, 20장 남짓한 경전을 주면 한 번 읽고 모두 외웠다. 평생 목욕을 하지 않았으나 더러움이 없었으며, 발은 날마다 씻었는데 비록 아교풀이 부러지는 추운 겨울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갑자년(숙종 10, 1684) 4월 12일, 서쪽으로 향하고 앉아서 돌아가셨다(面西坐浙).
시신을 금화산 제2봉에 받들어 모셨는데, 작은 돌을 층층이 쌓고 전신을 봉하였는데 날짐승이나 들짐승이 침범하지 않았다.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땔나무 하는 아이나 궁녀들이 한 그릇의 밥을 낮밥으로 이바지하는데 마치 여래에게 하듯이 하였다.
일찍이 스님이 하루는 손수 글을 써서 후대에 부탁했는데, 부탁받은 율律 제자 약휴若休가 (그 내용을) 말했다.
”만약에 내가 죽은 뒤 화장하면 나와 더불어 백 대의 원수가 될 것이다. 모름지기 거친 숲과 들판에 그대로 두어 새들의 배를 채워 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세수 69세이며 법랍이 57년이었다.
순천 선암사 구내 비로암毘盧庵 현판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몸을 던져 호랑이의 배고픔을 걱정하고, 몸을 갈라 까마귀와 솔개의 배고픔을 구제한다는 말이 어찌 헛된 것이겠는가. 나 또한 그를 본받을지니, 내가 죽은 후에 물가나 숲에 두어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하라. 만약 다비 하면 실로 백 대의 원수가 되리라.“
스님은 문집이 있었는데 스스로 불에 던져 버렸다. 문하의 제자 약휴 등이 몇 편을 모아 새기기를 부탁하니, 은암隱巖 · 청광자淸狂子 · 박세형朴世亨이 그를 위해 서문을 짓고 또한 스님의 행장을 찬술하였다.
운무송雲霧頌
눈 뜨면 등망봉登望峰
눈 감으면 시루봉(甑峯)
높은 산 올라서 산허리 매달리니
별안간 감도는 구름, 선뜻 몸을 감는구나.
▣ 문집 『침굉집枕肱集』(上下)은 숙종 21년(1695) 순천 선암사仙巖寺에서 목판본으로 출판되었다.
卍 보정의 꼬리말
이 짧은 침굉 현변枕肱懸辯(광해8년 1616~숙종 10년, 1684) 행장도『해동불조원류 海東佛祖源流』에 실려 있는 것인데, 얼굴을 서쪽으로 하고(面西)라고 해서 극락을 향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였다. 앞에서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염불요문念佛要門』에 보면 ‘계신염불戒身念佛’을 설명하면서 ”살생과 도둑질과 음행을 버려, 몸을 단정히 하고 바로 앉아 서쪽을 향해(面西) 합장하고 한 마음으로 나무아미따불을 공경히 생각하되, 부르는 수가 끝이 없고 생각이 끊이지 않아, 심지어 앉은 것도 잊고 한 생각이 앞에 나타날 때를 계신염불이라 한다“라고 했다. 여기서는 앞뒤 줄이고 ”서쪽을 향해(面西)“로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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