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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게는 3대 문제와 4대 의혹이 있습니다. 3대 문제는 건강, 사람, 재물입니다.
첫째, 건강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둘째,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셋째, 먹고 입고 자고 사람 만나려면 재물이 필요한데, 재물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이 세 가지를 위해서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 등 모든 학문이 발달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네 가지 의혹이 있습니다. 첫째, 인생이 어디서 왔는지 온 곳을 모릅니다.
둘째, 어디로 가는지 가는 곳을 모릅니다. 셋째, 가기는 가는데 언제 갈지 모릅니다. 내일 갈지 모레 갈지, 내년에 갈지 내후년에 갈지 모릅니다. 넷째, 내가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건강도 관리하고 사람도 관리하고 물질도 관리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네 가지 의혹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내가 누구인가?' 입니다. 마음공부는 바로 내가 나를 찾는 공부입니다. 건강을 관리하는 자연과학도 아니고, 사람 관리. 물질 관리하는 인문사회과학도 아닙니다.
오직 내가 나를 찾는 공부인데 이것은 철학도 아니고 심리학도 아닙니다. 오직 그 마음 자체를 공부하는 것이 마음공부입니다. 마음공부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길 수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공부를 발전시키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조그마한 마음 하나 못 다스려서 일어납니다. 작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큰일이 납니다.
그러니까 마음 다스리는 이 공부를 해 나가면 일이 없습니다.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고, 속상할 일도 없습니다. 마음 하나 알고 나면 일이 없습니다. 그만큼 이 마음공부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무엇이냐? 대승불교 경론 중에서 마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놓은 것에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 있습니다.『대승기신론』에서는 마음을 진심眞心과 망심妄心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달마達摩대사의 『관심론觀心論』에서는 마음을 정심淨心과 염심染心, 즉 깨끗한 마음과 물든 마음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들었다는 것은 밖으로 집착한다는 말입니다. 깨끗한 마음은 생멸이 없습니다.
그래서 허망하지 않고 변하지 않습니다. 진실불변眞實不變 을 진여眞如라 하고, 이 진실불변의 마음을 정심이라고 합니다. 반면 염심은 생멸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명심無明心 입니다. 정심은 진심이고 염심은 망심입니다. 그러면 허망한 것은 무엇이고 진실한 것은 무엇이냐?
『도서都序』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眞은 불변수연不變隨緣이라, 변하지 않고 인연을 따릅니다. 예를 들어 물은 그대로 물입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연을 따릅니다. 물이 국을 만나면 국이 되고, 사람 몸을 만나면 혈액이 되고, 구름으로 내려오면 비가 됩니다. 비나 구름이나 국이나 전부 물입니다. 하지만 물이라는 본질은 불변입니다. 마음도 이와 같아서 불변하는 그 진심이 인연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진심입니다. 그런데 망심은 불변수연처럼 본체가 없습니다. 이것을 체공體空이라고 합니다. 이 망심은 근본이 없습니다. 본체가 없는데 일은 만들어 냅니다. 이것을 성사成事라고 합니다. 길을 가다가 고목나무를 귀신으로 잘못 보면 그게 망妄입니다.
그런데 일단 보이면 겁이 납니다. 그래서 막 뜁니다. 뛰다가 물에도 빠지고, 나무에도 부딪치고 일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체공성사體空成事입니다.
세상의 망심이 다 그렇습니다. 무지無知 해서 그렇습니다.
또는 비단뱀이 도사리고 있는데 황금으로 착각합니다. 그런데 황금은 뱀에도 눈에도 없습니다. 본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일단 황금으로 봤으니까 그냥 지나가지 않고 욕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자기에 싸서 집에 갖다 놓습니다. 이 비단뱀이 잠에서 깨면 온 집안이 난리가 납니다. 이처럼 망은 허망한 것인데 일을 만듭니다. 본체는 공한데 일을 성사시켜서 엄청난 고통을 줍니다. 반면 진眞은 불변수연不變隨緣으로, 인연 따라서 여러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조금 더 설명하면 정심淨心은 조작된 것이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허공과 같습니다.
허공은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허공은 먼지나 더러운 것이 붙을 수 없어서 본래 깨끗합니다. 그래서 정심은 불생불멸의 자정심自淨心 이라, 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깨끗한 마음입니다. 깨끗하게 해서 깨끗한, 조작된 깨끗함이 아니라 스스로 깨끗한 마음입니다.염심染心은 고통이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서 괴로운 것입니다.
자박심自縛心, 즉 스스로 속박되는 마음입니다. 어떤 물질을 볼 때 그 물질이 '나를 사랑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물질에 스스로 애착을 느껴서 스스로 속박됩니다.사람도 마찬가지로 스스로 애착을 느껴서 스스로 속박됩니다. 죽음도 '나를 두려워하라.'고 하지 않지만 스스로 두려움을 느껴서 스스로 속박됩니다. 이것이 자박심입니다.자박심은 늘 반연攀緣을 합니다. 반연이라는 것은 서로 잡는 것입니다.이것을 보면 이것을 휘어잡고, 저것을 보면 저것을 휘어잡고, 보는 데마다 인연을 만듭니다.이것을 반연심攀緣心이고 집착심입니다. 반연하고 집착하는 것이 망심妄心입니다.또 정심은 묘체원명妙體圓明이라고 합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미묘한 본체인데, 왜냐하면 자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물의 속성도 아니고 불의 속성도 아니고, 보이는 속성도 아니고 안 보이는 속성도 아니고, 무자성無自性입니다.그리고 무장애無障碍, 즉 장애가 없습니다. 그리고 원명체圓明體, 즉 둥글고 밝습니다.이것이 묘체妙體이고, 나입니다. 자성이 없고 장애가 없고 둥글고 밝은 것이 나입니다.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몸과 사람과 물질에만 매달려서 살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언제 가는지도 모르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갑니다.따라서 해야 할 일은 나를 찾는 것입니다. 마음은 허공과 같은 것도 아니고, 물질과 같은 것도 아니고, 자성이 없습니다. 마음은 장애가 없습니다. 둥글고 밝은 원명체라는 것을 알면, 마음의 본성을 보았다고 해서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무자성. 무장애. 원명묘체를 확실히 깨달은 것을 견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비유하자면 청천일광靑天日光, 즉 푸른 하늘의 햇빛과 같습니다.이것이 우리 본래 마음입니다. 마음의 본체體. 상相. 작용用은 모두 둥글고 밝고 미묘한데, 이것을 모르고 반연攀緣 집착執着만 계속합니다.
반연 집착은 허망한데 거기 고통이 따릅니다. 예를 들어 친한 친구를 오해해서 미워져서 말하기 싫고, 그러다 싸움이 벌어졌다고 합시다. 처음에 내 멋대로 생각한 것이 망심인데, 여기에는 반드시 심행心行이 따릅니다. 이것을 무명심행無明心行이라고 합니다.
무명심이 움직이는 길이 바로 집착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생기는데, 이것을 생사윤회生死輪廻라고 합니다. 생사윤회는 전부 허망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 부두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면 배가 빠르게 가니까 땅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은 배가 가는 것이지 땅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원리가 그렇습니다.
깨달음이라든지, 성불이나 견성은 허망심에서 본래 청정심으로 확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몸을 돌린다고 해서 전신轉身이라고 합니다.
몸은 곧 마음입니다. 전신을 하는 것이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땅은 가만히 있지만 배가 빨리 가니까 땅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음은 가만히 있을 뿐입니다. 원명묘체, 둥글고 밝은 것뿐인데 내가 망상집착을 하니까 생멸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스님은 딱 한 가지 법문만 하십니다. 누구를 보든지 손을 둥글게 하고 "이 둥글고 밝은 것을 아느냐?" 라고만 묻습니다. 둥글고 밝은 것이 바로 나입니다. 그것을 깨달으면 성불입니다. 그런데 원명묘체를 모르고 반연 집착만 합니다. 그러니 끝없이 돌고 돕니다.
마음공부를 해야 돌고 도는 고통을 면할 수 있습니다.
마음공부는 아주 간단합니다. 복잡한 게 아닙니다. 자연과학을 하려면 기초학문이 아주 힘듭니다. 사회과학은 사회현상이 워낙 복잡해서 힘듭니다. 인문과학은 아는 게 많은 사람이 최고입니다. 역사, 철학, 어학 등등 많이 알아야 인문과학을 합니다.
그런데 마음공부는 다 필요 없습니다. 기초도 필요 없고, 과정도 필요 없고, 성과도 필요 없습니다. 시험도 안 봅니다. 마음공부 원리가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자안멱자안自眼覓自眼 자가귀자가自家歸自家' 라, 자기 눈이 자기 눈 찾고 자기 집에서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눈으로 자기 눈을 찾는 것이나 자기 집에서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게 얼마나 쉽습니까? 이것이 마음공부입니다.
그러면 자기 눈으로 자기 눈을 찾는다는 게 무엇이냐? 모를 때는 안외구안眼外求眼, 즉 자기 눈 밖에서 자기 눈을 찾습니다. 산에 가서도 찾고, 들에 가서도 찾고, 시장에 가서도 찾습니다. 이렇게 자기 눈 밖에서 눈을 찾으면 못 찾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마음에서 일어나는데,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 인문과학으로 해결하려 하고, 이 몸을 통해서 행복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몸을 관리하고 사람을 관리하고 물질을 관리하고 모든 것을 관리하는 것이 마음이므로, 그 마음에 들어가야 합니다. 호랑이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를 얻을 수 없듯이, 모든 것이 마음이 하므로 그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마음을 밖에서 찾으면 눈 밖에서 눈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눈 밖에서 눈을 찾다가 나중에는 자견자안自見自眼이라, 자기 눈을 자기 스스로 보는 수가 있습니다. 내 눈은 본래 하나뿐이라는 것을 보는 순간, 보는 눈과 보이는 눈이 둘이 아님을 알아서 눈으로 보려고 하는 마음이 싹 없어져 버립니다. 자기 눈을 딱 아는 순간에 자기 눈을 알려고 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보려는 마음이 없어지니까 자기 눈을 보지 못했다는 마음도 없어집니다. 그냥 그대로 눈입니다.
비 올 때는 비 오는 것 보고, 눈 올 때는 눈 오는 것 보고, 사람이 올 때는 사람이 오는 것을 보는 것이 불변수연입니다. 눈은 본래 불변인데 온갖 인연 따라 다 보는 것이 수연입니다.
이것이 마음공부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묶이는 허망심에 둘러싸여서 이것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자기 나름대로 내년을, 몇십 년 후를 꿈꿉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둥글고 밝은 본심을 아는 것이 마음공부입니다.
허망집착심에서 원명본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음공부인데, 내 눈이 내 눈을 보고 자기 집에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어려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안 뇌느냐?
잘못해서 그렇습니다. 마음공부하는 데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각찰覺察공부입니다. 진심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망심 자체가 어떤 놈인지 얼마나 나쁜 놈인지, 얼마나 이상한 놈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허망한 마음을 살피는 공부가 각찰 공부입니다. 그래서 마음공부를 하기 전에는 노여운 생각이 일어나면 화를 내고, 욕심나면 욕심내고, 좋으면 좋다고 하고, 나쁘면 나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공부가 시작되면 화가 나면 '아, 내가 화를 내고 있구나.' 하고 그 화를 내는 마음을 살펴봐야 합니다. 미운 놈이 생기면 가서 때리기부터 할 게 아니라 '내가 저놈을 미워한다.' 하고 먼저 살펴야 합니다.
이 각찰 공부만 해도 편안해집니다. '내가 저 사람을 해쳐야겠다.'는 생각이 일어나면 거기에 딸려 가니까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일어날 때 '아, 내가 이 생각을 일으키고 있구나.' 하고 각찰을 하면 마음이 아지랑이와 같아서 일어났다 금방 사라집니다.
좋아하는 마음도 일어났다 금방 사라집니다. 지금 원수지간이라고 해서 그것이 영원한 게 아니고, 지금 좋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한 게 아닙니다.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가서 싸울 게 아니라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있구나.'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있구나.' 하고 마음을 살피는 공부부터 해야 합니다.
그 공부가 안 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항상 거기서 맴돕니다.
둘째, 막념莫念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눈에 띄어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고, 과거의 어떤 기억이 떠올라도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밖의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안의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막념공부입니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것이 마음공부에 제일 방해가 됩니다. 무슨 생각이 나면 거기에 따라가는 작념作念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무엇이 보이든 그것에 신경 쓰지 않으면 됩니다. 아주 쉽습니다. 생각하는 게 어렵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쉽습니다. 무엇이 보이든 기억이 나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막념입니다.
잠이 와도 잠 온다고 생각할 것 없고 망상이 일어나도 망상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을 '끊는다.' 라고도 하고 '쉰다.' 라고도 합니다.
만약 지난 일 때문에 괴롭다면 생각하지 않으면 다 해결됩니다. 모든 것은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원수를 갚아야 한다.' 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원수 갚을 것이 없습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다 끝납니다. 셋째, 참구參究입니다. 둥글고 밝은 이 마음은 무엇인가?
모든 망상은 체體가 없고, 둥글고 밝은 그 마음이 변하지 않는 불변不變으로 수연隨緣을 해서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생각을 해서 움직이기도 합니다.
보는 이 마음이 무엇인가? 이 보는 것. 듣는 것. 움직이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다 진심眞心 하나가 수연해서 되는 것입니다. 귀로 나오면 듣게 되고, 눈으로 나오면 보게 되고, 발로 나오면 걷게 되는 것이 수연입니다. '둥글고 밝은 무자성無自性, 무장애無障碍인데, 이 보고 듣고 하는 이 마음이 무엇인가?' 이것이 참구공부입니다.
그런데 찾을 때 망상이 일어나면 절대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면 보기만 하지 거기 따라가면 안 됩니다. 보는 대로 따라가고 생각나는 대로 따라가면 안 됩니다. 참구공부를 해 보면 우리 중생이 생각이 얼마나 혼란하고 복잡한 지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이라는 게 얼마나 허망하고 아지랑이 같은 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서 살피고, 생각에 따라가지 말고,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본래 둥글고 밝은 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공부만 잘하면 깨달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눈이 내 눈을 보듯이 금방 압니다. '정말로 그럴까?' 라고 의심하면 안 됩니다. 그 생각에 벌써 딸려 갔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을 하지 말고 딱 들어가면 깨닫는데, 그것을 못합니다. 이것을 다생습기多生習氣 라고 합니다. 다생 동안 익힌 기운입니다. 그러니까 안 된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참구입니다. 손에서 놓지 않고, 잠이 와도 '잠 온다.' 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자다가 깨도 '깼구나.' 하고 그것에 따라가지 않고, '이것이 무엇인가?' 를 항상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허망한 마음은 다 사라지고, 원명묘체만 나옵니다.
이것을 견성, 성불,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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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체圓明體, 즉 둥글고 밝습니다.이것이 묘체妙體이고, 나입니다. 자성이 없고 장애가 없고 둥글고 밝은 것이 나입니다......감사합니다 무량공덕이 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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