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해 먹을 세상
김정옥
고희연이라고 딸들이 특별한 케이크를 준비했다. 떡 케이크라고 말하고 예술품이라고 불러야겠다. 가히 장인의 손길이 느껴진다. 아래층은 분명 흑임자설기인데 위층은 크고 작은 장미꽃과 작약이 다보록하다. 파스텔 톤의 은은한 핑크색, 바이올렛색, 연미색 꽃이 눈을 현혹한다. 꽃 수술엔 금가루까지 얹혀있다. 아까워서 이걸 어떻게 먹나.
예전에 생일에는 떡을 해 먹었다. 모든 게 힘들고 어려운 시절, 아이가 돌이 되기 전에 죽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첫 생일은 특별했다. 아기의 무병장수와 부귀를 염원하기 위해 백설기와 수수팥떡을 돌상에 높이 고였다. 백설기는 깨끗하여 병이 없으며 백이라는 숫자의 의미인 완전함을 뜻하고 수수팥떡은 이승에서 떠도는 온갖 잡귀, 잡신을 물리쳐 액을 면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귀한 자손이 무탈하길 바라는 부모 마음이 떡에 잔뜩 붙어있을 터였다.
아이가 태어나서 10살까지 생일에 수수팥떡을 해주면 액을 면하고 건강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나도 매년 손자, 손녀 생일에 백설기와 수수팥떡을 해서 보냈다. 물론 내가 직접 한 것은 아니고 전문가의 손을 빌렸지만 말이다. 그 덕분인지 무탈하게 잘 자라주어 할미로서 더할 나위 없이 고맙다.
떡은 우리 민족의 문화와 삶이다. 우리 조상들은 생일뿐 아니라 좋은 일에나 궂은일에나 떡을 했다. 아이 백일에 떡을 백 집이 나눠 먹으면 백수까지 오래 살고 복을 받는다고 하여 친척과 이웃들에게 떡을 돌렸다. 제사 지낼 때에나 고사 드릴 때도 떡이 빠지면 안 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사를 가도 떡을 돌려 이웃에게 얼굴을 알렸다. 대학 수능시험 볼 즈음에는 찹쌀떡이 불티난다. 시험 잘 치고 대학에 찰떡처럼 ‘떡하니’ 붙으라는 의미이다. 떡으로 마음을 대신하는 것이다.
요즈음은 집에서 떡을 잘 안하지만 예전에는 모두 집에서 했다. 추석 송편은 물론 동지 팥떡도 하고 정월대보름에도 떡을 했다. 어렸을 적 화덕에 시루떡을 앉혀놓고 불을 때면 턱을 괴고 끄먹끄먹하며 떡이 익기를 기다리던 생각이 난다. 어머니가 떡이 익었는지 젓가락으로 푹 찔러보던 모습도 생생하다. 이 세상에 온갖 맛있는 떡이 많지만 나는 어머니가 해주신 켜가 두툼한 메떡, 그때 금방 해서 먹었던 따끈따끈한 팥시루떡이 제일이지 싶다.
시어머니가 이사 간 집 부엌과 장독에 팥떡을 놓았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새며느리가 미신이라며 언짢아할까 봐 ‘아무 말하지 마라’고 미리 강다짐을 하셨다. 시어머니가 놓았던 떡은 집터를 눌러 자손이 잘 되고 귀신을 물리치라는 액막이였을 것이다.
옛날에 자손이 귀한 집에서는 영험한 신령님을 찾아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 점지해 주십사고 빌고 빌었다. 떡두꺼비 같다는 말은 덕德이 두꺼비 같이 두껍고 후덕한 사람이 되라는 말이라고 한다. 손자를 기다리시던 시어머니도 떡두꺼비 같은 손자 하나 점지해 주십사고 초하루 보름으로 빌었을 텐데, 결국 친손자를 못 보신 걸 보면 어머님의 비손에 효험이 없었나.
떡의 어원은 여러 가지가 설이 있다. 그중 한 가지가 덕德에서 나왔다고 한다. 덕이란 어진 행동으로 많은 사람에게 이롭게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떡을 해서는 반드시 나누며 베풀고 살라고 덕이, 떡이 된 것은 아닐까.
떡, 떡 하며 떡 타령하다 보니 ‘떡 해 먹을 세상’이라는 속담이 생각난다. 떡을 하여 고사를 지내야 할 세상이라는 뜻으로 뒤숭숭하고 궂은일만 있는 세상을 말한다. 이즈음에 시절이 어수선하고 좋은 일이 하나도 없으니 영락없이 ‘떡 해 먹을 세상’이다.
전국적으로 만 명이 넘게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에 걸려 200명 이상 죽었다. 치료하던 의료진도 죽고 젊은 사람도 죽어나간다. 사망자 수가 연일 늘어난다. 더 번질까 봐 서로 만나지도 못하게 모임도 여행도 행사도 제재를 한다. 아파트 헬스장과 탁구장을 폐쇄하여 운동도 못하게 하고,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벚꽃 구경도 못하게 완장 찬 공무원이 막는다, 육지에서 꽃구경하러 올까 봐 유채꽃을 갈아엎는 제주도. 학교 문을 굳게 닫아걸어 학생들이 두 달 가까이 학교도 못 가다가 이제는 선생님과 영상으로 만나는 세상. 사상초유다. 난세에 온갖 잡귀, 잡신이 판을 치는 것 같다. ‘코로나야 어서 빨리 물러가라’고 팥시루떡을 해서 고사를 지내야 할 판이다. 떡 해서 고사를 지내 온 나라에 퍼진 액운을 물리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남편이 맘 놓고 밖에 나가지도 못하니 온종일 텔레비전이 열이 난다. 트로트 가수가 구성진 목소리로 찾는 ‘진또베기’가 아까 나오더니 또 들린다. 오리 세 마리 솟대에 앉아/ 물불 바람을 막아주는/ 진또베기 진또베기 진또베기~~~ 귀에 쟁쟁 맴도는 진또베기가 낯설어 사전을 폈다. 아, 솟대의 강원도 방언이구나.
솟대는 높은 장대 위에 기러기나 오리 등 새를 형상화한 조형물을 올려놓은 것을 말한다. 오랜 옛날부터 인간들의 간절한 소망을 하늘에 전달해 주는 메신저 역할을 해왔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며 소통이라는 희망의 상징물로 세운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하늘이 도왔다고 하고 ‘천운’이라고 한다. 하늘이 도우면 안 될 일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 민족은 단군왕검으로 시작되었으니 하늘의 자손이 아닌가. 솟대의 힘을 빌리자. 진또베기, 소줏대, 솔대, 별신대 등 전국의 솟대가 단체로 나서야 하리라. 긴 장대 위에 앉은 새가 목을 길게 빼고 나래를 펼쳐 비상했으면 좋겠다. ‘내 당신의 바람을 대신 전하리다.’라고 하면서….
내 마음에도 솟대를 하나 세워야겠다. 아주 긴 장대에 청둥오리 한 마리 앉히자. 험한 세상살이에 닥쳐오는 물불 바람을 막아주게 말이다. 그리고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했는데 아쉬운 대로 생일 떡 케이크 놓고 고사를 지내는 건 어떨까. 훠이, 훠이, 잡귀, 잡신 물러가라.
입덕하다
김정옥
며칠 전, 선배언니와 점심 식사 자리에서 일이다. 맛있는 밥을 먹으며 둘은 신이 났다. 미스터트롯 출연자들 노래 솜씨를 칭찬하느라 입에 침이 말랐다. 서로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어떤 일로 만면에 웃음 띠며 이렇게 열을 올리면서 공감할 수가 있을까.
‘미스터트롯’ 프로그램 시청률이 32%를 넘었단다. 요즘 가장 핫한 프로그램이다. 제 2의 트롯 전성기를 이끌고 차세대 트롯 스타를 탄생시킬 신개념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월드컵 경기도 아니고 올림픽 경기도 아닌데 말이다. 참 신기하다. 칠십인 나와 마흔다섯 된 딸이 공감대를 형성한다. TV 시청 취미가 서로 엇갈렸던 남편과도 이 프로만큼은 나란히 앉아 맞장구치며 본다.
난 이미 ‘입덕하여 덕질하고’ 있었다. ‘입덕하다.’는 ‘어떤 분야나 사람을 열성적으로 좋아하기 시작하다’ ‘덕질’은 ‘어떤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며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일’이다. 미스터트롯 출연자 중 영*에게 이미 반해 푹 빠졌으니 시쳇말로 입덕한 것이다. 미스터트롯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 매일 영*에게 응원 투표도 하였다. 그가 올린 SNS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렀다. Y*uTube에서 구독을 누르고 연속으로 재생하여 듣고 있으니 이것이 ‘덕질’이 아닌가. 내 나이 70에 아들뻘 가수에게 열광하다니 딸들이 알면 주책이라고 하려나.
30대 중반의 풋풋한 젊은 남자 가수다. 표정 하나하나가 구김이 없고 밝다. 어찌나 리액션을 잘하는지, 입을 하마처럼 벌려 감탄하고, 흔연스레 웃는다. 웃을 때 눈가에 잡히는 주름까지도 매력적이다. 경연 후 다른 출연자에게 축하해 주는 모습이 경쟁자가 아닌 피를 나눈 혈육 같다. 그의 인간적이고 진솔한 모습에 완전히 홀렸다.
영*이는 예선부터 올 하트를 받았다. 본선 진출 관문을 통과한 기쁨에 방청객과 심사위원을 향해 큰절을 넙죽한다. 90도 구부린 인사로는 감사의 표현을 담기에 턱없이 부족했나 보다.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도 이렇게 큰절을 할 만큼의 감사한 표현을 한 적이 있었나.
본선 1차전에서도 올 하트를 받아 팀 전원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한다. 임*웅, 장*호, 영*, 영*, 신*, 신*선 여섯 멤버가 누구 하나 뒤처지는 사람이 없다. 각자 자기가 맡은 소절의 노래를 부르며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춘다. 경연이라기보다 즐기는 것 같았다.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못 당한다지 않던가.
1대1 데스 매치death match에서는 동생들 중에서 겨룰 사람을 뽑을 수 없다며 연장자를 지목한다. 결과는 압승이다. ‘황소처럼 일만 하셔도 살림살이는 마냥 그 자리’ 심금을 울리는 절절함에 세상의 아버지들이 운다. ‘아빠처럼 살기 싫다며 가슴에 대못을 박던’ 대목에선 자식들이 뒤늦은 후회로 가슴을 친다. 이번 라운드에서 그는 ’진‘의 왕관을 쓴다. 그는 사방팔방 인사를 하다가 또 한 번 너부죽이 절을 한다. ‘막걸리 한 잔’ 그의 노래에 나도 취해버렸다.
친근한 ‘훈남’에다가 시원스런 눈매의 쾌남이 싱글싱글 웃으며 노래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안구가 정화된다. 미성으로 쭈욱 뻗는 힘찬 목소리에 고막이 호강한다. 노래를 잘 부를 수는 있어도 모든 노래를 자신의 이야기처럼 감정을 실어 전달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나는 눈물이 핑 도는데, 방청객들은 그의 짙은 호소력에 취해 일어서서 환호하며 열광한다.
트롯에이드 전에서 팀원을 제일 먼저 뽑을 수 있는 선택권을 가졌다. ‘합격 불합격을 떠나서 내 마음속에 가장 훌륭했던 동생들’이라며 떨어졌다가 추가 합격한 자들을 그러모은다. ‘나만 믿어라, 나는 너희를 믿는다. 다른 팀 신경 쓰지 마라, 우리만 잘하면 된다.’고 믿음을 주며 리더십을 펼친다. 비교적 낮은 점수를 받았는데도 잘했다고 격려하는 모습에서 맏형의 서그러운 면모를 보며 성졸한 나를 되돌아본다.
2라운드 에이스 대결에서는 동생들에게 에이스 자리를 양보한다. 늡늡하고 그릇이 크다. 레전드 미션에서 레전드 노래를 재해석해서 좋은 노래로 들려주고 싶다는 그는 진정 프로다. 역시 절창을 하며 ‘리듬 탁’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그의 시원하게 내뿜는 고음에 꼼짝없이 매료되었다.
그는 삶을 달관한 사람처럼 노련하게 완급을 조절하고 강약을 살리며 리듬을 탄다. 자신의 노래에 흠뻑 빠져 부르는 실력파다. ‘사이다처럼 톡 쏘고 화살처럼 날아가 콕 박히는 재주를 지녔다’는 장윤정 마스터의 평이다. 노래가 맛깔나고 쫀득하며 차지다. 간도 양도 적절하니 부담이 없는데 은근히 중독성이 강하다. 그는 남은 경연과 무관하게 내 마음속에 이미 미스터트롯 ‘진’이다.
내가 영*이에게 입덕한 것은 그를 통해 뿜어져 나오는 우리네 삶에 한과 신명과 순정이라는 트롯의 본질에 반한 것은 아닐까. 세상에 대한 연민, 못 이룬 사랑에 대한 그리움, 잊어버렸던 내 청춘에 설렘, 부모님께 못다 한 한 맺힌 절규가 스멀스멀 목울대를 타고 올라온다. 의식의 어두컴컴한 심연으로부터 한줄기 빛으로 뻗어 올라와 내밀한 내 마음에 확 불을 댕긴다.
무심천변을 무심히 걷다가 발아래 땅바닥에 딱 붙은 눈록의 여린 풀싹들과 눈이 마주쳤다. 고 사이로 피어오른 작디작은 파란 하늘 조각 닮은 봄까치꽃에 이끌린다. 회원들 일이라면 무조건 홍알홍알한다는 수필 선생님 말씀에 감동이 여울진다. 좋은 수필 한편 읽고 가슴 울리는 일언일구에 전율한다. 영*에게 ‘입덕하다’가 자연과 사람과 경구驚句에 ‘덕질’한다.
영*이가 부르는 애절한 트롯 선율에 내 애간장이 녹아내린다.
첫댓글 ㅎㅎ 신나게 또 읽었습니다. 떡에 대한 사설도 의미있게 새겨 들었지만~~그 유명하다는 미스트롯 방송한 번 안본사람이라는 대목에서 제가 왜 움찔해지는지요~~ㅋ
내내 평온하시고 스트레칭도 자주하세요 쌤, ^^
열심히 읽고 답글로 응원해주는 아영샘, 고마워요.
요즘같으면 정말이지 떡해먹을 세상이란 말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트롯에 입덕하여 덕질을 하셨으니 부럽습니다.
어떻게든 이 시기를 잘 넘겨야할 텐데요.
시대에 맞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맞습니다. 코로나 화진자가 연일 1,000명을 넘습니다. 연내 백신을 확보한다는 소식이 있긴 합니다만.
얼른 지나가길 바랄뿐이지요.
답글 고마워요.
선생님 글 재미있게 잘 감상했습니다.
특히 떡에 대한 고증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고미화선생님, 읽어주고 답글 달아줘서 고마워요
나도 영*팬입니다. 아니 나는 영탁 팬입니다.
그제 시작된 미스트롯2를 보며 다시 즐거움이 시작 되었으니 덜 괴로울 겁니다.
이 지리한 싸움을 잘 견디시기 바랍니다. 재미난 글 잘 읽었습니다.
같은 영탁 팬이라니 정말 좋아요.
미스트롯2도 노래 잘~~하더라고요. ㅎ
고마워요.
@김정옥 미스트롯2는 몇 번 채널에서 언제 하나요? 알려주시면...ㅋ
@강현자 19번 TV 조선 목요일 10시 ㅋ
@김정옥 감사합니당~~^^ 꾸벅!
고희 맞으심을 축하합니다. 자녀들이 준비한 떡케잌을 보고도 수필을 생각하신 열정에 감탄합니다.
떡의 의미를 자세히도 쓰셨네요.
떡을 해놓고 기도해서 좋아질 세상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떡을 먹을 때마다 김선생님이 생각날 것 같아요.
고희 맞은 해가 어수선한 시국이라~~
두고두고 기억 될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벌써 고희를 맞으셨군요. 추가드립니다.
두편 글 아주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아직 어느것에도 입덕하지 못했는데 부럽습니다.
고희라고 떠벌려놓고
그 나잇값이나 제대로 하려는지~~
재미있게 읽어줘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