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종교계(그리고 의료계 일부)에서는 우두법을 반대했다.
하느님이 천벌로 내린 전염병을 인간이 극복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이라는 주장이었다
(이후 매독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전염병의 치료법이 발견될 때마다 유사한 논리가 재차 등장하곤 했다).
한편으로는 “소의 고름을 사람한테 넣는다”는 사실에 대한 거부감도 확산되어,
심지어 우두 접종을 받으면 사람이 소가 된다는 헛소문까지 나왔다.
접종 과정에서 위생 문제로 인한 부작용이 종종 생긴 것도 우두법의 악명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천연두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질병인지를 기억한다면
어느 누구도 결코 제너의 업적을 함부로 폄하할 수는 없으리라.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두법은 전 세계로 신속히 퍼져 나갔다.
제너의 논문이 발표된 지 불과 몇 년 뒤에는
멕시코, 필리핀, 중국 등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여러 국가의 오지에서도 우두 접종이 실시되었다.
미국의 작가이며 사서인 로버트 B. 다운스는 제너의 논문을 ‘세계를 바꾼 책들’ 가운데 하나로 선정한 바 있는데,
한때 천연두가 그랬던 것처럼 우두법이 이후의 역사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일리가 있다.
가령 1805년에 나폴레옹이 전쟁을 앞두고 전군에 우두접종을 실시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세계의 역사는 전혀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었으리라.
이후 제너는 일반의로서의 활동을 포기하다시피 하고 우두접종법 연구에만 전념했고,
영국 정부와 의료계에서는 이를 위해 거액의 후원금을 내놓았다.
1803년에는 천연두 백신 보급을 위한 ‘제너 연구소’가 설립되었고,
이 기관은 1808년에 ‘영국 국립 백신 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향과 런던을 오가며 천연두 백신 연구를 지속하던 제너는
1821년에 국왕 조지 4세의 특별 시의로 임명되는 영예를 누렸고, 고향 버클리에서는 시장과 치안판사를 역임했다.
1823년 1월 25일, 제너는 갑자기 뇌졸중을 일으켰고,
이튿날인 26일에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73세를 일기로 고향 버클리에서 사망했다.
천연두의 근절
토머스 제퍼슨은 1806년에 제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귀하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심각한 질병을 퇴치했습니다.
우두법으로 인해 인류는 귀하의 존재를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미래의 후손들은 역사 속에 천연두라는 끔찍한 질병이 존재한 바 있으며,
또한 귀하가 그것을 박멸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로버트 다운스의 [교과서가 죽인 책들]에서)
하지만 제퍼슨의 낙관은 너무 때 이른 감이 없지 않았다.
비록 천연두를 퇴치할 강력한 무기가 생기긴 했지만,
오늘날처럼 저렴한 백신이 대량 보급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천연두 사망자는 여전히 많았다.
가령 제너의 활동 시기인 18세기에만 해도 유럽에서 천연두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6천만 명에 달했다.
외국에서는 각광받았던 우두법이 유독 제너의 고국인 영국에서는 의외로 찬밥 대접을 받았다.
그러다가 제너의 사후인 1840년대에 들어서야 영국에서도 위험한 인두법을 금지하고
상대적으로 안전한 우두법을 무료로 실시하는 법률이 마련되었다.
18세기 초에 들어서야 천연두 퇴치에 관심을 보인 유럽과 달리
중동과 아프리카, 그리고 북아메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오래 전부터 인두법이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1880년에 지석영이 우두법을 도입했지만,
그 이전부터 인두법이 민간요법으로 실시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가령 중국에서도 11세기경에 인도를 통해 인두법이 전래되었다고 하니,
어쩌면 우리나라에서도 천연두와의 전쟁은 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960년대부터 천연두 근절을 목표로 삼은 세계보건기구(WHO)는
1979년 말에 이르러 천연두가 지구상에서 사실상 없어졌다고 발표했다.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 무서운 질병을 정복했다는 것은 대단한 위업이 아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