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 청계산 가는 길 오른쪽에 대원주말농장이라는 곳이 있다. 만 오천평의 넓은 밭인데 회원만
천 오백 명이라고 한다. 작년, 그 곳에 밭을 하나 가꾸던 사람에 자기가 기른 상추를 따다 먹으라고 하는
바람에 하루 가서 상추도, 얼갈이 배추도 뽑아오고 깻잎도 심으며 우리도 한번 해 볼까 했었다.
알아보니 워낙 인기 있는 곳이라 빈 자리가 없다며 신청을 하면 대기자 명단에 올렸다가 빈 자리가
나오면 배정을 해 준다고 했다. 그냥 포기하고 거의 잊고 있다가 올 4월 초, 얼핏 기억이 나서 인터넷을
찾아 들어가니 2월부터 분양하는 밭이 몇 개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얼른 10만 원을 내고 밭 한 고랑을 신청했다.
다음날 자랑하듯 남편에게 주말농장 이야기를 하자 이 남자, 한 술 더 뜬다. 한 개 갖고 누구 코에 붙이느냐는 거다.
자기 형제들, 어머니, 우리 엄마, 직원들... 모두 나누어 먹으려면 세 개는 해야 한다며 한사코 더 신청을 하라고
해서 한 개도 충분한데 세 개는 너무 많을 거라고 뜯어 말리다가 그냥 에라 모르겠다, 두 개를 더 신청했다.
4월 중순에 상추 모종을 옮겨 심고, 열무, 얼갈이 배추, 쑥갓, 치커리 등등 씨앗을 뿌리고 5월 초에는
토마토, 가지, 고추 등을 심었다. 점심 시간이면 가끔 직원들 몰래 밭에 가서 풀을 뽑고 물을 주었다.
갈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올라오는 고것들을 보며 어찌나 신기하고 기쁘던지... 심은 지 세 주 정도 지나
첫 수확을 한 상추에 밥과 쌈장을 듬뿍 얹어 먹으며 참 행복했다. 어찌나 맛있는지, 어찌나 싱싱한지,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어 갖다 주겠다고 전화를 하면 그거 갖고 오는 데 기름값이 더 든다며 너희나 먹어라, 너희나 먹어라...
딴은 그 말도 맞다 싶었다. 그런데 날씨가 더워지자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세 고랑에 심은
청상추, 꽃상추, 적상추가 무려 180주, 한 주에서 대여섯 이파리만 따도 그 양이 장난이 아니었다. 더구나 새로
만든 밭이라 이른 바 '땅심'이 좋아 다른 밭보다 훨씬 힘차게 쑥쑥 올라오는 상추는 이파리를 싹 돌려 따고
또 일 주일만 지나면 배추 포기만큼 퍼지는 거였다. 우리는 정신없이 상추를 따다 여기저기 나누어주기에
바빴다. 회사 직원들, 친구들, 아파트 위 아래층에 사시는 분들, 경비 아저씨... 다행히 정성껏 기른 무공해
야채라 정말 맛있다며 모두들 기쁘게 받아 주니 나로선 고맙기 그지없다. 그런데 열무도 얼갈이도 어찌나
잘 자라는지 갈 때마다 뽑아서 데쳐 놓았다가 된장국도 끓이고 김치도 담그고, 해도 해도 그 놈들의 자라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농장에서는 주인이 직접 멸치 국물에 말은 국수, 파전, 도토리 묵을 판다. 물론 막걸리도, 맥주도 있다.
또 한 켠에는 커다란 비닐 하우스가 있어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몇 주전 금요일엔 일찍 회사일을
마무리하고 직원들을 몽땅 끌고 가서 파티를 열었다. 돼지고기를 사다가 방금 딴 야채를 곁들여 먹으니 어찌나
맛있는지 모두들 서로 말도 없이 그 많은 고기를 다 먹고는 봉지봉지 야채를 담아서 싸갖고 갔다. 일요일이면
시동생과 동서들, 어머니까지 함께 모여 또 고기를 구워 먹고 상추를 따서 보냈다.
오늘도 여지없이 두 아들을 이끌고 농장에 갔다. 인천에서 올라온 시동생네와 따고 뽑고 먹고 싸서 보내고
싸들고 와서 나누어주고... 아, 안 그래도 까만 내 얼굴은 화장을 해도 까맣다. 안 그래도 못생긴 손은 시커멓게
그을었고 손톱 밑에는 새카맣게 흙때가 끼었다. 떨어져 사는 가족들이 한데 모여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하고 함께 앉아
풀을 뽑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 건 즐겁지만 매주 사 들고 가는 돼지고기 값도 장난이 아니다. 먹어대는 만큼
내 배도 점점 더 나온다. 다행히(?) 장마가 오면 상추를 더 이상 먹지 못한다니. 눈 질끈 감고 할 수 있는 데까지
부지런히 따다 나르고 사다 먹이련다.
오늘 보니 고추도 제법 열렸고 가지도 열렸다. 토마토도 주렁주렁 달렸다. 늘어진 토마토 가지는 다시 잘
묶어 주고 토마토 가지 밑 그늘진 곳에 있는 상추는 과감히 뽑아 버렸다. 너무 씁쓸해서 영 먹어지지 않는
치커리도 그냥 다 뽑아버렸다. 온통 벌레가 먹어 내가 먹을 건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허연 밑둥치 밖에 없는
얼갈이도 그냥 다 뽑아버렸다. 뽑을 때 마다 벌그죽죽한 지렁이가 함께 뽑혀 나와 내 입에선 쉴 새 없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긴 고놈들은 나보다 더 놀라서 온 몸으로 비명을 지른다. 그런 나를 보면서 두 아들은 지렁이
다치지 않게 조심하란다. 걔들이 있어 땅이 이렇게 비옥하다며... 두 주전에 심은 들깨도 제법 싹이 돋았다.
고것들도 솎아서 빈 곳에 나누어 심어야 하는데 아, 나는 며칠 후면 긴 여행을 떠난다. 나도 없으면 남편 혼자
땡볕에 고생을 좀 하게 생겼다.
농사라고는 생전 처음 흉내를 내 보는 건데 어느새 상추 따는 데 이골이 났다. 쪼그리고 앉아 상추를 따고
일어서면 그 짧은 시간의 노동에도 허리며 무릎이 욱신욱신 쑤신다. 세 평 짜리 밭 세 고랑, 그것도 주말에만 가서
물 주고 풀 뽑는 일도 이렇거늘 몇 백 몇 천 평씩 밭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그러고도 보람도 없이 제 값도
못 받고 수확한 작물을 넘기기라도 한다면 그 마음은 오죽할까 싶다. 그래도 작은 땅뙈기가 주는 기쁨이 참 크다.
고 작은 땅덩이 속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깃들어 있는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잡풀도 벌레도, 지렁이까지도 다
놀랍고 귀한 존재라는 걸 조금은 알 것 같다. 가지도 토마토도, 고추도 다 따먹고 나면 이제 그 땅에 김장배추며
무를 심어서 마지막 수확을 하게 된다고 한다. 아마도 올 겨울엔 내가 기른 배추와 무로 담근 더 맛있는 김장을 먹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기뻐도, 한국 사람이 아무리 석 삼 자를 좋아한다고 해도 난 죽어도 세 고랑을 다시 하진
않을 것이다. 너무 많아 채 먹지도 못하고 버려지는 것들로 속을 태우느니 모자라는 게 나을 테니까. 만에 하나 남편이
또 세 고랑을 하자고 한다면 난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 혼자 다 해요"
첫댓글 요즈음 택경님은 사는 보람을 흠뻑 누리고 있군요. 공부 많이 하는 모습 보이고 즐거운 비명도 들립니다.
좋게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
세 고랑의 밭을 영농하는 주말 농장주가 되었군요. 씨부리고 김매고 퇴비하고-- 농사 돌보는 일이 정말 힘겹지요? 긴 여행에서 돌아오면 잡초가 무성해 있을 터인데--- 농장 걱정이 되겠군요. 힘겨워도 내년에 다시 하게 될 것 같군요.
안 그래도 이 글을 쓰고 나서 말은 그래도 내년에도 세 고랑을 하게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받았습니다. 선생님께 속을 그만 다 들켜 버렸어요 ^^*
저도 견습 농부입니다. 그 싹 틔우고 기르고 수확하는 희열이 대단하더군요. 저는 반 평 정도 텃밭. - 한 평 정도의 꽃밭에는 해바라기, 채송화, 분꽃을 심고 자식같이 돌보고 있답니다.
호월님은 선비이면서 농부이면서 공학도이시기도 합니다. 가끔 그라지세일도 하시나요? 그렇다면 사.농.공.상, 그 모든 직업을 아우르는 수퍼맨이 되실 겁니다. ^^*
ㅎㅎ. 회사 경영할 때 팔기도 했지요. Garage sale을 해야 진짜 상인 인데......
"당신 혼자 다 해요." 어휴, 그게 되실까요? 저는 어려서부터 흙을 압니다. 말 하기를 정직하다고 하죠. 사랑을 주면 고마워 하고 사랑을 주지 않으면 배신처럼 풀이 키를 넘을 겁니다. 택경님,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즐겁게 뵈며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이제서야 모든자연님의 글을 보았습니다. 며칠 전 밭에 가 보니 꽃상추 적상추가 키를 넘을만큼 자랐습니다. 그것들은 다 뽑아 버리고 주렁주렁 열린 가지와 고추도 듬뿍 따 오고 붉게 익은 방울토마토도 따 먹었습니다. 참 신통한 흙입니다.
식물들과 친화력이 대단하신 분 같네요
별로 그렇진 못합니다. 그런데 밭에서 쑥쑥 자라 밥상에서 저와 한 몸이 되는 고것들을 볼 때마다 정말 신기합니다.
아마도 그러할 것입니다요
일시 농부가 되어 농민의 심정을 이해하고 공감했던것 자체가 수확의 일부이겠지요?감사합니다.
상추따서 공부하러 오실 때 가져 오시면 우리도 맛있게 먹을 텐대요.ㅎㅎ 농심을 이해하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되었네요. 저도 채소 농사 짖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