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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존했던 여객선 ¶Titanic
처녀항해에서 빙산과 충돌해 침몰한 비운의 배. (선장 혹은 관련자가 "이 배는 하느님도 침몰시킬 수 없을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으나 결국엔... 1.1 스펙 ¶선적: 영국 모항: 리버풀(Liverpool) 선박 특성 [1]
1.2 건조20세기 초에 조선업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하란드 월프 사의 회장인 피리 경이, 런던메이 페어의 저녁식사 모임에서 화이트 스타 라인사의 이즈메이 사장에게 3척의 대형 여객선의 건조 계획을 말한 것이 타이타닉 호 건조의 발단이었다. 설계는 토머스 앤드루가 맡았다.
화이트 스타 라인 사는 "블루 리본"으로 불렸던 북대서양 여객선들의 속도 경쟁에는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느긋하고 쾌적한 여행에 중점을 두는 회사였다. 하지만 타이타닉은 속도부터 설비의 호화로움까지 모든 것에 중점을 두어 설계되고 있었다. 안전에도 신경을 써 설계에 방수구획을 도입하였다. 선체는 방수 격벽에 의해 16개의 구획으로 구분되었고, 그 중의 2구획(뱃머리의 경우 4구획)이 침수해도 침몰에 이르지 않는 구조였다. 게다가 격벽은 제어실의 원격 조작으로 즉시 폐쇄할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수대책의 도입으로 타이타닉호는 "불침선"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실제로 설계상의 구조는 지금 기준으로도 안전한 편. 그러나 갑판 아래 선체가 전부 방수구획으로 설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주 갑판을 통해 구획 모두가 연결되어 있어서 선체에 큰 손실이 발생하여 다량의 해수가 유입될 경우 도미노처럼 다른 구획까지 차례차례로 침수될 수도 있는 구조였으며 실제로 첫 항해 때 이런 일이 벌어졌다.
타이타닉 호는 올림픽 호와 거의 동시에 건조가 개시되어 대계단이나 식당의 장식, 식사의 메뉴나 객실의 서비스 등 외관에서나 내장 면에서 거의 동일했다고 한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마치 타이타닉 호가 전무후무한 초대형 선박인 냥 연출했지만 실제로는 올림픽 호가 클래스의 대표 선박으로, 타이타닉 호와 브리타닉 호라고 하는 2척의 자매선과 함께 올림픽 클래스라고 불리고 있었다. 타이타닉 호의 사진으로도 종종 올림픽 호 사진이 사용된다! 1.2.1 설계의 변경 ¶![]() 왼쪽이 올림픽 호, 오른쪽은 타이타닉 호. 그러나 앞서 항로에 투입된 올림픽 호에서 발생한 문제점을 타이타닉 호의 설계에 반영한 결과, 몇 군데 달라진 부분은 있었다. 예를 들면 A 갑판의 1등실 전용 산책용 갑판(Promenade)에 유리창이 설치되는데, 이는 북대서양의 추운 바람으로부터 승객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 점은 외관상으로 두 개의 자매선을 구분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위 사진은 전술한 유리창이 설치되기 전의 모습. 그 밖에도 올림픽호는 B 갑판의 창가 전체에도 산책용 갑판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타이타닉호의 설계도에서는 산책용 갑판 대신에 창가 전체에 1등 선실을 새롭게 마련하도록 변경되었다. 그 결과, 1등실의 수가 올림픽호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고 전용 산책용 갑판에 면한 스위트룸이 도입되었다.
자매선이니만큼 애초의 중량은 거의 비슷하게 설계되었지만 이상의 이유로 타이타닉의 객실 수가 증가, 최종적으로 타이타닉 호의 총톤수는 올림픽 호의 45,324톤보다 1,004톤 무거운 46,328톤으로 늘어났다. 타이타닉호가 올림픽호를 넘어 당시 세계 최대의 여객선이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 그러나 타이타닉 호가 지금까지도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은 그 크기 때문이 아니라 어두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탓이다. 수에즈 운하에 이 배가 너무 커서 안들어가 수에즈 운하가 확장 공사를 해야 했다는 말도 있지만 이 말은 확실한 과장. 수에즈 운하의 확장은 당시 선박의 대형화 추세 때문이지 타이타닉호 한 척의 통행 때문은 아니었다. 여담으로 말하자면, 타이타닉호와 자매선들은 최초로 배 안에 수영장을 설치해 놓은 여객선들이라고 한다. 1.4 승객과 선원들 ¶
1등실에는 총 329명의 부유한 승객들이 타고 있었으며, 급한 사정보다는 즐기려고 승선한 승객들이 많았다. 객실은 최상층인 보트 갑판부터 갑판 E(상갑판)까지 설치되어 있었으며 호화 호텔 수준이었고 개인 목욕탕이 있었다. 2등실에는 총 285명의 중산층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1등실만큼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비교적 많은 편리한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객실은 갑판 D부터 갑판 G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흡연실(갑판 B), 레스토랑(갑판 B), 도서관(갑판 C), 상점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3등실에는 총 710명의 가난한 승객들이 타고 있었으며, 주로 아메리칸 드림으로 미국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기 위해 승선한 승객들이었다. 객실은 2등실과 마찬가지로 갑판 D부터 갑판 G까지 설치되어 있었다.시설은 1등실과 2등실만 못하고 엔진이 가동되는 소리가 울려퍼졌으나 다른 배들에 비해서 비교적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배에 탑승하기 전에는 검역을 걸쳐서 전염병이나 이/벼룩을 확인했고 여자와 남자는 배의 앞머리와 뒷머리에 각각 따로 떨어져 승선했으나 가족 단위일 경우 같이 승선할 수 있었다. 1.5.1 항해 ¶타이타닉호의 침몰 시점 : 1912년 4월 15일 타이타닉호의 침몰 지점 : 캐나다 뉴펀들랜드 주 해안 동쪽 400마일(640km) 해상으로 추정 1912년 4월 10일, 영국의 사우샘프턴(Southampton)으로부터 타이타닉호는 첫 항해를 시작했다. E·J·스미스 선장과 승무원과 승객을 합쳐서 2,200명 이상이 승선하였다. 배가 항구를 떠날때, 실수로 정박되있던 뉴욕 호의 정박용 밧줄을 끊어버려 둘이 충돌할 뻔했던 사건(!)이 발생했다.프랑스의 셸부르(Cherbourg)과 아일랜드의 퀸즈타운에 기항한 후, 미국의 뉴욕 항구로 향했다.
출항 당시 쌍안경의 열쇠가 인계되지 않아서(!), 배 안에 있는 쌍안경을 꺼낼 수 없었다.(...) 때문에 감시원들은 쌍안경을 사용하지 못했고 육안으로 위험요소를 확인해야 했는데 사고 초기에는 이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었으나 나중에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 실제로 동일한 환경 속에서 당시 쌍안경을 사용하여 실험한 결과 이것조차도 무용지물이 되었다.(실험 결과 그냥 검은 원만 보였다고(...)) 애당초 당시의 차가운 공기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려웠고 칠흑같은 밤에 파도도 없어서 빙산을 발견하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출항 오전부터 빙하가 돌아다닌다는 위험한 소식이 선박 사이의 무선통신으로 경고되고 있었으며, 적어도 타이타닉 호는 4월 14일 6통의 경고를 통신으로 받았다. 그러나 타이타닉 호의 통신사들은 승객들의 통신 발신 업무에 쫓기고 있었고, 이 계절의 북대서양의 항해에는 자주 있는 일이라고 여겨서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다가 화물선 캘리포니안 호가 무선을 보낼 때에는 더 이상 참지 못한 통신사 필립스가 "닥쳐요! 지금 그쪽이 통신을 방해하고 있다고요!"...라고 일침을 놓았고 캘리포니안 호의 통신사 에반스는 빡쳐서 무전 스위치를 끄고 잠이 들었다(...). 문제는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당시 가장 가까이 있었던 배가 캘리포니안 호였는데, 하나뿐인 통신사가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에 구하러 오지 못했다. 이 설에 따르자면 겨우 통신사의 불친절함 때문에 1500여명이 죽어간 참사가 일어난 것이 되는데, 사실 이 주장에 대해서 사건 직후 청문회에 증인으로 불려간 통신사 에반스는 '그런 정도 문제 가지고 화를 낸 건 아니다'고 증언한 바가 있다. 애초에 통신장비를 갖춘 선박의 통신사는 24시간 근무를 하도록 되어 있었고, 당연히 혼자서 24시간 근무가 가능할 리가 없었기 때문에 통신사를 1인만 탑승시킨 캘리포니안 호가 규정을 위반하고 있었던 것. 다만 당시의 해운 관행상 이런 경우는 흔했기 때문에 캘리포니안 호만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당시 에반스는 빡쳐서 무전을 끄고 잔 게 아니라 그냥 고된 근무로 피곤해서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1.5.2 충돌 ¶그리고 운명의 밤 11시 40분, 레지날드 리와 함께 망을 보던 보초 프레드릭 플리트가 전방 450미터에 높이 20미터 미만의 빙산을 육안으로 발견했다.[5] 출항할 때 쌍안경을 사용할 수 없었고 빙산의 10분의 1은 숨어 있었기 때문에 빙산을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플리트가 빙산을 발견하고 급히 무전을 쳤고, 6등 항해사 제임스 무디가 조타실에서 그것을 받고 윌리엄 맥매스터 머독 1등 항해사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그는 바로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에게 우현 전타를 명령하고 (그런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조타수가 하필이면 실수로 키를 그대로 오른쪽으로 돌리고 말았다! 당시에는 오른쪽으로 돌려면 왼쪽으로 돌려야 했으므로 명백한 삽질. 잠깐 후에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제대로 왼쪽으로 돌렸지만 결국에는 배가 침몰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텔레모터(원격 조정 장치)를 "전속 후진"로 돌려놓아 엔진 역추진을 시도했다.(즉, 드리프트를 시도) 그러고 나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보일러실에 방수 격벽이 닫힐것을 알리는 알람을 울렸다. "속력을 떨어뜨리지 않고 있으면 빙산과의 충돌은 회피할 수 있었다." 라는 설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결과론일 뿐이었다. 실제로 충돌시에 상당한 속력이라 키와의 상관은 없었던 것 같다. 뱃머리 부분은 회피했지만 배 우현은 빙산 쪽으로 서서히 접근해 결국에는 충돌하게 된다. 아랫쪽 승객들은 큰 충격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윗쪽 승객들은 약간의 흔들림을 느꼈으나 잠에서 깨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6번과 5번 보일러실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화부들은 물을 피해 도망갔다. 1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은 방수 격벽의 스위치를 내렸다. 조타실과 망루에서는 빙산의 피해가 그렇게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충격을 느끼고 올라온 사람들이나 갑판 위에 있었던 승객들은 오히려 즐거운 분위기였다. 3등실 승객들은 올라나와 얼음조각으로 축구를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기념으로 위스키에 쓸 얼음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우현에는 수면 아래로 약 90미터에 걸쳐서 손상이 생겼다. (배와 빙산은 최대한 10초간 정도 밖에 접촉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고 선체의 흠집은 겨우 수 인치 정도로, 손상폭을 합계해도 1m란 것이 후에 해저 탐사에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5구획에 걸쳐서 엄청난 해수가 배 안으로 들왔다. 4번째 방수구역까지 물이 들어오면 타이타닉호가 침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지만 5번째 방수 구역에 물이 차면 그 한계를 넘는 것이었다. 애초에 격벽이 위 갑판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라, 해수는 격벽을 넘어서 차례차례로 다른 구역으로 흘러 들어갔다. 뱃머리에 실린 물로 배는 서서히 앞으로 기울고 뱃머리가 해수면 아래로 점점 들어갔다. 게다가 횡단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화이트 스타 라인 사의 회장이자 배의 이사 브루스 이스메이가 그대로 전진할 것을 지시하는 병크를 저질렀기 때문에 침몰이 가중되었다.바로 멈췄다면 침몰 시간이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침몰에 이를 정도의 손상을 받은 원인으로 "정면이 아닌 측면에 빙산이 충돌해 피해가 가중되었다."라고 하는 설도 있다. 만약 타이타닉 호가 빙산에 정면에서 충돌했으면 침수한 방수 구획은 일부의 좁은 범위(타이타닉 호의 방수 구역 내)에 머무르는 것으로 끝나고, 침몰을 면할 가능성도 있다. 결과적으로는 충돌을 회피하려고, 키를 돌려 어중간하게 방향을 바꾸었던 것이 피해를 가중했다. 당시의 낮은 제강 기술로 인해 당시 최고급 강철판을 사용했던 선체의 강철에 불순물인 황과 인이 많이 섞여 있었는데, 많은 인 성분은 균열을 만들고, 황은 이러한 균열을 더 확산시키고, 낮은 망간 비율은 강철의 탄력성을 낮추어 메진 성질을 더 크게 한다. 참고로 현대의 질 좋은 강철은 망간과 황의 비율이 200:1이지만, 타이타닉 호의 선체에 사용된 고급 강철은 겨우 6.8:1 수준이었다. 황과 인은 각각 4배, 2배 더 많았다는 게 밝혀졌다. 게다가 선체를 접합하는 데 사용했던 이음못(리벳)이 생각보다 훨씬 더 약했다는 것도 문제였다. 타이타닉 호의 잔해에서 채취한 이음못 48개를 분석한 결과, 이음못에 유리 성분의 슬러그가 높은 비율로 섞여 있었고 이로 인해 이음못이 메진 성질을 가져 쉽게 금이 간 것이다.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는 이쪽을 밀고 있는데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의 내용에 따르면 선수 부분은 곡선이다 보니 리벳머신으로 강철리벳을 써서 박을 수 없어서 인력으로 때려박을 수 있는 연철 리벳을 사용하였는데 테스트용으로 만든 연철리벳은 10,000psi의 압력을 견딜 수 없었고(타이타닉이 충돌할 당시의 충격에 의한 압력은 14,000psi로 추정하였음) 실제 타이타닉의 선수 부분의 리벳은 테스트용보다 휠씬 약한 수준이었고 그 때문에 충격으로 리벳이 박살나면서 생겨난 틈으로 침수가 되었다고 한다. 타이타닉 선장 스미스는 해수의 배수를 시도하려고 했지만 4월 15일 0시 15분 조난 신호 CQD를 발신, 인근 선박에 구조를 요청했다. 불과 20km 정도의 거리에 정박중인 화물선 캘리포니안 호가 있었지만 1명 밖에 없는 통신사가 취침중이라 연락을 받지 못했다. 대략 90km 떨어져 있던 여객선 카르파티아 호가 응답해 전속으로 구조로 향했지만 배의 최대 속도가 17노트(약 34km)밖에 안 되는 카르파티아 호가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4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5.3 탈출 ¶스미스 선장은 탈출 명령을 내렸다. 좌현에서는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가, 우현에서는 1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이 구명보트를 하선하기 시작했다. 2등 항해사 라이톨러는 혼란을 막기 위해 1등 승객의 여성과 어린이 우선의 당시 관습을 철저히 실시했지만 1등 항해사 머독은 더 이상 여성과 아이들이 보이지 않으면 남자를 태우는 것을 허용하는 등 비교적 남성에게도 관대한 대응을 했다. 타이타닉호가 참사가 된 원인 중 하나는 구명보트의 부족 때문이었는데, 당시의 영국 상무성의 규정을 보면 여객선은 여객 정원만큼 구명보트를 갖출 필요가 없었다. 당시 규정에서는 978명, 그나마도 배의 배수톤수 기준이었다! 또한, 미관, 비용 등의 이유로 인해 화이트 스타 라인사는 최종적으로 타이타닉 호에 1,178명 정도가 탈 수 있는 보트만 준비하는 병크를 저질렀지만 그나마도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다. 맨 처음 구명보트를 하선할 때에는 많은 승객들이 탈 수 있어도 타지 않았다. 이때 승객 대부분은 배가 침몰한다는 것을 믿지 못했는데 나무로 만든 조그만한 보트보다는 차라리 260미터의 강철로 만들어진 여객선이 훨씬 안전해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할 듯.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언비어가 승무원 사이에 떠돌았다. 정원 65인승의 보트에 70명을 태우는 실험을 했는데 배는 뜰 수 있었지만 추진과 균형 잡기가 불안정하다는 것이었다. 배에 타고 있던 배의 건축가를 포함해 관련자들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또한 급작스런 사고에 당황한 승무원들은 정원을 다 채우지 못하고 황급히 구명보트를 하선했다. 게다가 그 누구도 그런 배가 침몰할 거라고 생각을 못했기에 선원들도 정원이 얼마인지 헛갈렸고 사전에 안전 교육도 계획이 있었긴 했지만 예배 때문에 취소되어 전혀 하지 않았다. 많은 보트들이 정원을 채우지 않은 채로 바다에 내려졌다. 만약 정원이 완전히 채워졌다면 반이라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1.5.4 최후의 10분 ¶2시 5분, 접이식 구명보트 2개를 제외한 마지막 구명 보트인 접이식 보트 D가 떠났다. 선장은 남은 선원들에게 모두 제 살길을 찾으라고 했으며 배를 포기함을 선포했다. 남은 사람들은 접이식 보트 2개를 기다리거나 바다로 뛰어들거나 선미로 달려나갔다. 프로펠러가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2시 10분에는 바닷물이 최상층인 보트 갑판까지 다다랐다. 그때쯤 체육관 바깥쪽 휴식터에서 월리스 하틀리가 지휘를 맡은 악단은 구슬픈 찬송가를 마지막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이 곡이 어떤 곡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유력한 곡은 Nearer my God, to thee와 Autoume이다.) 선장은 확성기를 쥔 채로 선교에 들어가 그대로 그곳에 남았다고 한다. 2시 17분에는 배가 보트 갑판이 있는 곳까지 가라앉았다. 통신사 잭 필립스와 조수 해럴드 브리드는 더 이상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마지막 구조 신호를 보낸 후 침수되는 통신실에서 빠져나왔다. 남은 접이식 구명보트 두 척은 파도갑판 위를 떠다녔는데 접이식 보트 B는 30여명의 사람들이 선 상태로 뒤집혔고, 접이식 보트 A는 물이 반쯤 찼다. 그리고 굴뚝 1이 선교루 쪽으로 쓰러지면서 몇몇 사람들을 덮쳐버렸다. 조금 후 중앙계단의 유리 돔과 창문이 파도에 의해 깨져 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배가 급속도로 기울면서 가라앉기 시작하자 배 내부 물체들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굉음이 발생했고 이는 배의 침몰을 가속시켰다. 2시 18분, 물체들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굉음이 더 커졌다. 그러던 중 보일러실이 침수하면서 잠깐 깜박거리다가 완전히 정전되었다. 잠시 후, 바닷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선체는 굉음과 함께 3번째와 4번째 굴뚝(환기구) 사이의 신축 이음을 중심으로 금이 가면서 두 동강으로 쪼개졌다. 동시에 굴뚝 3과 환기구인 4가 부러졌다. 영화에서는 엄청 스펙타클하게 묘사됐지만 사실 이걸 본 사람은 소수인데다가 그나마 생존자 중 가장 등급이 높은 항해사인 2등 항해사 라이톨러가 회사가 망해 동료들이 일자리를 잃고 흩어지는 것을 염려해 절대 동강나지 않았다고 말했기 때문에 영국 상무성은 "동강나지 않고 침몰"이라고 결정내렸다. 1985년 로버트 발라드에 의해서 비로소 진실이 밝혀지지만. 그리고 바다 속에서는 3개로 갈라져 있었다. 이윽고 뱃머리 부분은 잠기고 배 뒤쪽은 바다로 내동댕이쳐져 다시 일직선이 되었으나 곧바로 다시 기울어 점차 수직에 가까워졌다. 마침내 운명의 시각 2시 20분, 배와 해수면 사이의 내부 압력이 같아지자 타이타닉호는 물을 뿜어내며 수직으로 서서 서서히 물속으로 들어가다가 완전히 침몰했다.
1.5.5 구조 ¶배에 남아 있던 1500여명의 사람들은 차가운 북대서양 한복판에 버려졌다. 구명보트에 탔던 사람들은 배가 침몰한 곳에서 울려퍼지는 아우성을 들었다. 가장 적은 탑승수인 12명을 태운 1번 보트에 탑승한 화부 헨더릭손은 현장에 돌아가자고 요구했으나 더프 고드만 부부와 배를 맡은 시몬스가 반대했고 나머지는 말이 없었고 결국 무산되었다. 5번 보트의 3등 항해사 허버트 피트만 또한 현장에 돌아가려 했으나 몇몇 여자들이 이에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6번 보트에서는 마가렛 몰리 브라운 또한 현장에 돌아가서 사람들을 구하자고 요구했고 사람들도 이에 동의했으나 배를 맡은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는 사람들이 배를 끌어당길 것이라며 거절했다.
결국 14번 보트의 5등 항해사 해롤드 로우가 구명 보트들을 재편성한 뒤 지원자는 남기고 다른 사람들을 다른 구명보트로 옮겨 구조에 나섰으나 이미 늦었다. 영하 2도의 차가운 바다에 있던 사람들은 저체온증으로 대부분이 30분 안에 죽었다. 저체온증 이전에 심장마비로 몇 분 이내에 사망했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별세자 중에는 갓난아기를 안은 모친도 있었다고 한다. 4명만이 그 곳에서 살아남았다. 이때 바닷물에 있었던 사람 중 가장 오래 버틴 사람은 주방장인 찰스 조그힌이었는데, 그렇게 오래 버티며 살아남은 이유는 침몰 중 술을 잔뜩 마셨기 때문(...) 무려 세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고 한다. 선미 끝에 매달려 있다가 배가 완전히 침몰함과 동시에 그냥 물 속에 떠올랐는데 신기하게도 머리카락이 하나도 젖지 않았다고 한다.(!) 침몰한 뒤 약 1시간 30분 후인 새벽 3시 55분에 도착한 카르파티아 호(선장 아서 로스톤)는 약 4시간 30분 동안에 20개의 구명보트에 타고 있는 생존자들을 구조했다. (5명의 사람은 구명보트에서 죽었다.) 배는 생존자들을 위해 따뜻한 커피, 담요, 의료 서비스를 곳곳에 제공했다. 8시 30분에 마지막 생존자를 구조한 후, 속도를 줄이고 현장으로 돌아가 다른 생존자들을 찾았으나 시신들은 파도에 쓸려가서 거의 보이질 않았고 흩어진 잔해들과 시신 1구밖에 보이질 않았으며, 이때까지 물 속에 살아있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더 이상의 수색은 포기하고 뒤늦게 사고 해역에 도착한 캘리포니안 호에게 생존자를 더 찾아달라고 한 뒤에, 3일 후 뉴욕에 도착했다. 타이타닉 호의 생존자와 사망자 비율[6]
사망 원인의 대다수는 영하 2도의 수온으로 인한 저체온증이었다. 물 속에서는 공기 중보다 체온 저하 속도가 훨씬 더 빠르며, 영상 20도의 해수에서도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수 있다. 사고가 발생한 북대서양 바다는 여객선이 통행하는 바다 가운데 가장 수온이 낮은 바다로, 영하의 바닷물에서는 10분 내외로 목숨을 잃는다. 남성과 2등급, 3등급 탑승자의 사망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는데, 2등급 탑승자 남성 중 92퍼센트가 사망했다.
타이타닉 사건의 생존자들 중 현재 생존한 사람은 없다. 마지막으로 생존한 사람은 밀리비나 딘(Millivina Dean)으로, 침몰 당시 9주밖에 안 된 아기였다. 그녀는 2009년 5월 31일 세상을 떠났으며, 사우햄프턴에 거주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타이타닉의 생존자 중에는 자매함인 올림픽에 승무원으로 탑승했었고 이후에 브리타닉에도 탑승하게 되는 바이올렛 제솝(Violet Jessop)도 있었는데, 올림픽에서는 영국 군함 HMS 호크와 충돌하는 사고를 겪었고, 브리타닉이 침몰할 때도 물에 빠졌다가 간신히 구조되었다. 이런 불운에도 불구하고 건강히 살다가 83세로 1971년에 사망. 타이타닉 탑승자 중에는 동양인도 있었다. 중국인 8명(10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앞서 언급되었듯 타이타닉 탑승자에 관한 기록은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과 일본인 1명이 있었는데 중국인 6명과 일본인 1명이 구조되어 생존률은 꽤 높았던 편이었다. 여담으로 이 일본인은 '여자와 아이를 우선으로 구한다' 라는 원칙을 무시하고 구차하게 보트에 탑승하려 했다고 해서 귀국하고도 갖은 욕을 먹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탑승한 보트 근처에 더 이상 여자와 어린이가 없어서 탑승한 것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한다.사실 이 호소노라는 일본인 말고도 뇌물을 주고 살아난 영국 준남작도 있고(...) 죽을 마당에 살려고 발버둥치는걸 뭐라고 하는 것도 좀 그렇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이후 출간된 여러 관련 서적에서도 도시전설급으로 나중에 밝혀진 이야기는 빠지고 비난을 받았는데.... 80년대 조선일보에서 기고를 자주하던 이규태 선생은 타이타닉 이야기를 하거나 타이타닉 영화[9]가 TV에서 방송될때마다 일본인의 민족성운운하면서 호소노를 까곤 했다. 1.6 사고의 영향 ¶최신 과학기술로 만든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문명의 진보에 낙관적인 희망을 갖고 있던 당시의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물론 이 낙관은 2년 후 발생한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확실하게 확인사살된다. 타이타닉호의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지만 영국 상무성의 조사에 따르면 1,513명에 달해, 현재까지도 "세계 최대의 해난사고"[10]이다. 생존자는 711명에 불과. 이 사고를 계기로 선박의 안전성 확보를 국제 조약의 형태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1914년 13개 주요 해운국 회의에서 "해상에서 인명의 안전을 위한 국제 조약(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afety of Life at Sea, 통칭 SOLAS)"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11] 당시 선박에 적용되는 안전규정이 얼마나 엉터리였냐면 지금까지도 해상법에 있어 가장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는 영국법에서도 구명보트의 설치 기준은 선박의 정원이 아닌 배수톤수에 맞춰져 있었을 정도. 화물선은 몰라도 여객선에서는 구명보트가 부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미국에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선박에 무선 통신 장비가 의무화, 무선 통신이 널리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긴급 상황을 의미하는 통신용어 메이데이(mayday)가 이때 등장한 표현. "구해 달라"는 의미의 프랑스어인 'venez m'aider'에서 뒷부분만을 몬데그린 현상이 일어나면서 생긴 단어이다. 또 하나의 같은 의미인 통신부호 SOS도 타이타닉에서 유래됐다 하는데 실은 떡밥이다. 하지만 타이타닉호가 최초로 SOS를 쓴 선박 중 하나인 건 맞다. 항목 참조. 1.7 타이타닉호에 대한 연구결과 ¶1985년 미국 심해탐험가 로버트 발라드(Robert Ballad)는 뉴펀들랜드 680킬로미터 지점에서 타이타닉 호 잔해를 심해 카메라로 촬영했으며, 미국과 영국 학자들의 노력으로 심해 잠수정을 이용한 선체 파편 인양 작업이 성사되었다. 1993년 9월에는 미국 조선 전문가 윌리엄 가츠케(Wiliam Garzke)가 당시 기록을 근거로 타이타닉 호 침몰 참사를 미리 막을 수 있었던 인재(人災)로 해석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생존자들은 배가 빙하와 충돌하는 순간 엄청나게 크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고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고 증언했는데, 그 소리는 저급 강철판이 만들어낸 대재앙의 신호였다는 것이다. 윌리엄은 건져올린 선체 파편을 연구한 결과 충돌시 휘지 않고 부서지는 질이 낮은 강철판을 사용한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고급 강철판을 사용했다면 침몰을 막았거나 침몰시간이 지연되어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2] 대형참사의 이면에 항상 부실공사가 존재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1.8 부록: 영웅들 ¶
승객들을 구하거나 품위있게 죽은 영웅들도 있었다.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은 구명보트 승선을 거부하고 끝까지 승객들을 지도하다가 죽었다. 배의 설계자인 토마스 앤드류스는 승객들이 뜰 만한 물건들을 던지는 것을 돕다가 1등실 흡연실에 조용히 들어가서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우등 기관사인 조셉. G. 벨을 포함한 많은 기관사들이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2분 전, 그러니까 배의 불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자리를 계속 지키면서 배의 전기를 작동시키는 작업을 하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월리스 하틀리가 지휘를 맡은 8명의 연주대는 배가 침몰하기 고작 10분 전까지 곡을 연주하고 서로에게 행운을 빈 후 헤어졌으나 비극적이게도 그들 모두는 죽었다. 토마스 바일스 신부는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고 사람들의 구명보트 승선을 돕고 구명보트를 타지 못하고 죽을 운명만을 기달리는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보고 갑판 위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다가 죽었다. 백만장자인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은 자신은 살 수 없음을 직감하고 현지처와 하인을 보트에 태우고 선원의 구명조끼를 거절하고 턱시도로 갈아입은 뒤, 자신을 따르는 하인과 함께 "우리는 가장 어울리는 복장을 입고 신사답게 갈 것이다"고 하며 마지막까지 시가와 브랜디를 즐기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뉴욕에서 유명한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하고 있는 노부부 스트라우스 부부는 금실이 좋은 노부부였다. 이사도라 스트라우스가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자 그의 부인은 선원의 구명보트 승선 제안을 거절하고 하인에게 모피 코트를 건네주고 구명보트에 태운 뒤 함께 죽었다. 1.9 부록: 타이타닉 자매선들의 운명 ¶타이타닉의 자매함 올림픽호와 브리타닉호 역시 뒤끝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브리타닉호는 건조되자마자 1차대전에서 병원선으로 징발되어 활동하던 중 1916년 독일해군이 설치한 기뢰 건드려 침몰하였다. 올림픽호 역시 병력/물자 수송선으로 징발되어 1차대전에 참전하는데, 독일의 유보트를 선체로 들이받는(!) 충각전술로 격침(...)시키는 희한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전후 올림픽호는 다시 호화 여객선으로 돌아왔으나 항공기의 발달로 호화 여객선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특히 올림픽호는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호화 여객선의 주요 기관이 터빈기관으로 바뀌고 있는 가운데 구식 왕복기관을 주 동력원으로 한 탓에 속력이 느렸고, 배 또한 1912년 건조 당시부터 끊임없는 사고로 인한 선체 노후화가 있어 결국 1934년에 퇴역, 35년에 고철로 처리되었다. 원래 항목에는 귀부인의저택이 되었다가 2000년에 크루즈 선사로 유명한 로열 캐리비안 사가 구매하여 자사의 크루즈선인 밀레니엄호의 부속 레스토랑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배 자체로서의 올림픽이 아니라, 1934년에 배가 폐함처분될 때 철거된 올림픽 호의 인테리어 파트, 특히 부설 레스토랑의 목제 내벽을 가리키는 것[13]이 아니면, 1969년에 퇴역해서 장기간 수상 레스토랑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아일랜드에서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올림픽 호의 1, 2등실 승객용 셔틀 선박인 SS 노매딕의 이야기가 복합된 착오라고 보인다. 수정바람 1.10 타이타닉과 관한 도시전설 ¶거의 모든 대형 사건들이 그렇듯, 타이타닉도 몇 가지 괴담과 음모론이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가장 유명한 괴담은 불행하게 죽은 이집트 공주의 미라가 발견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걸 소유하거나 관련된 사람들이 차례로 죽어나가다가 어느 고고학자에 의해서 어느 여객선에 실려갔는데 그 여객선이 바로 타이타닉이라는 것. 그밖에 선박 번호 390904를 거울로 뒤집어 보면 "NOPOPE"가 되며 이는 아일랜드 선박 노동자들이 카톨릭 교회에 대한 반감으로 꾸민 짓이라는 음모론도 있고 애초부터 선박사가 보험사기로 꾸민 짓이라는 음모론도 있다.
출처 엔하키미러 http://mirror.enha.kr/wiki/%ED%83%80%EC%9D%B4%ED%83%80%EB%8B%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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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스 및 외형
약 80X40X15 센티 정도의 큰 박스 입니다.
작년에 나온 한정판은 별도의 외부박스 없이 맨포장이였는데 올해 나온 100주년 기념판은 누런 보로지 박스로 겉포장이 되어 있어 택배를 보내기 아주 좋습니다.
[약 80X40X10 센티 정도의 큰 박스 입니다. 작년에 나온 한정판은 별도의 외부박스 없이 맨포장이였는데 올해 나온 100주년 기념판은 누런 보로지 박스로 겉포장이 되어 있어 택배를 보내기 아주 좋습니다.]
[보로지 겉박스를 걷어내면 비로서 원래 박스포장이 나옵니다. 올해 100주년판은 블랙 입니다. 작년 버젼은 푸른색이였는데 아마 검은 암흑속에 가라앉은 타이타닉을 의미하는듯... ]
[은은한 반광검정색의 박스느낌이 매우 고급스러워 보입니다.]
[타이타닉 항해 100주년을 의미하는 R.M.S TITANIC CENTURY ANNIVERSARY EDITION 로고가 회색으로 은은하게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박스가 너무커서 한번에 다 들어오지 않을정도로 부피가 엄청납니다.]
[검은색의 속박스를 벗겨내면 비로서 본박스가 나옵니다. 보로지의 겉박스..> 검정의 속박스..> 그리고 본박스로 이어지는 3중의 박스포장이네요.. 참 놀랍습니다. 박스아트가 아주 멋집니다.!! 누가 그렸다더라.. 암틈 외국 박스아티스트가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아카데미도 해외수출에 신경을 많이 쓰다보니 최근 박스 디자인이나 박스아트에 상당히 공을 많이 들이는 느낌 입니다.]
[박스측면에는 잘 만들어진 작례가....]
[한정판답게 고급스러운 홀로그램 스티커가 붙어있습니다. 가격은 작년버젼보다 2천원 정도 오른 10만원 입니다. 그나마 국내에 500개 정도가 풀려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입니다]
[자랑스런 한국산의 표시가!!]
여기서 잠시 작년에 나온 한정판 제품을 비교해 보죠.. 작년에도 타이타닉 한정판이 출시되었습니다. 작년 2010년 버젼은 박스가 푸른색이였고 가격이 2천원 정도 저렴한 98000원 이였습니다.
[차가운 북해에 침몰한 타이타닉을 표현한 듯한 푸른박스 디자인 죽인다!! ]
[물속에 가라앉으면서 바라본 하늘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침몰한 타이타닉의 느낌을 재대로 살린 박스아트로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외부의 파란박스를 벗기면 비로서 내부의 원래 박스가 나옵니다. 흰백색의 배경에 서페이서로만 처리된 타이타닉 작례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역시 이번에도 라벨링 놀이는 계속하고 있습니다. 중요번호대인 1번 100번 300번 같은 번호대는 이미 빼돌렸다는.. ] |
2. 내용 및 특징
제품구성은 작년에 나온 2010년도 버젼하고 98% 같습니다.
올해 나온 100주년 제품은 작년제품에 직소퍼즐추가와 자료집 그리고 화이트로 칠한 에칭이 추가된것만 다르고 나머지는 동일합니다.
[박스안의 구성품은 이렇게!! 작년 2010년버젼하고의 외형적인 차이는 직소퍼즐이 추가된 정도!! 아참 메탈스티커도 들어있습니다.]
[킷 자체의 구성은 작년이나 올해나 또같다!!]
[올해 차이는 이것!! 한곳에 곱게 포장된 추가구성품들이 사실상 6만원 정도의 가격을 한다고 하겠다]
[펼쳐보니 이런 구성입니다. 목갑판 2장 .. 사슬부품 .타이타닉 카드. 에칭부품 2장 ,자료집과 메뉴얼 그리고 직소퍼즐]
2010년도 제품 리뷰는 아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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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체 (HULL)
[헐 부품은 길이 약 70센티 정도로 통사출해놓고 있습니다.]
[여러개의 철판을 기워 만든듯한 선수 재현이 일품 입니다. 위에 구멍은 선창구]
[촘촘하게 뚫린 선창의 모습 타이타닉은 보통 LED 를 넣어 만드는데 그럴라면 이 구멍을 다 뚫어주어야 합니다.]
[선미의 모습 키와 프로펠러 연결부의 디테일이 뛰어납니다. 타이타닉은 여러곳에서 출시되고 있지만 결정판은 역시 아카데미 제품이 결정판 입니다.]
[1998년9월에 만들어진 로고가 선명합니다. 당시 IMF 사태로 온국민들이 실의속에 있는 가운데 카메론 감독의 영화 타이타닉의 개봉에 맞추어 이 제품의 수출이 엄청나 수출상을 받았다는 뉴스는 온국민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죠.. 사실 아카데미는 이 제품 이전에 1/200 스케일인가 영국메이커의 타이타닉 제품의 금형을 사들여 잠시 발매한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제품은 품질이 너무 조악스러워 파기하고 바로 새로 제작한 제품이 바로 이 제품입니다. 스케일는 다소 줄었지만 디테일이나 크기면에서는 역시 최고의 제품이라 할수 있죠]
[선체는 실 타이타닉 도면을 참고로 잘 뽑아내고 있습니다.]
[길이 약 70센티의 위엄이 끝내줍니다.!!]
(2) 갑판
[길이 70 센티의 선체를 덮을 갑판은 3분할되어져 3개의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갑판마다 구조물이 올라갈 위치가 몰드되어 있습니다.]
[갑판은 나무 느낌이 거칠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정판에 들어 있는 목갑판을 붙일려면 다 밀어내야하는데 일이네요..]
[갑판의 크기가 엄청납니다. 타이타닉이 얼마나 큰배였는지 잘 말해주는것 같네요..]
[원래는 내부재현까지 만들예정이였는지 곳곳에 위치 표시가 잘 되어 있습니다.]
[갑판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1층 갑판에 이어 2층 갑판은 별도 런너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역시 정교한 몰드가 인상적입니다. 거친 나무갑판 느낌은 최고인듯...]
[선수 부분의 닻줄 재현도 일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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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말씀하신 그 초창기 제품이 아마 1/350인가 1/300인가 그랬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1/350이었던 것 같네요.
그게 발매된 건 꽤 오래전이었고, 그러다가 영화 <타이타닉>이 히트치는 바람에 그 키트도 덩달아서 날개돋힌 듯이 팔려나갑니다.
여기에 재미가 꽤 짭짤하겠다고 생각했는지 아카데미가 결국 1/400 신금형 버전을 내놓게 되죠.
예전에 타이타닉 영화 한창 히트칠 무렵에, 그 당시 하이텔 작은세상 대화방에서 아카가 신금형 타이타닉을 내놓을 것인지 아닌지
서로 갑론을박하던 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네요. 그 당시엔 아마 안낼 거라는 의견이 대세이긴 했지만 말입니다 ^^;
아하 350이었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품질이 그다지 좋치 않았던 기억이... 하이텔 작은세상 간만에 듣는 단어네요..^^ 피씨통신을 막 시작하던 94년도경에 가입해서 인터넷으로 옮겨오기전까지 꽤 많이 들랐거렸는데...
저도 영화 보자마자 하나 사서 만들었었는데... 품질은 조악 그 자체였습니다. 결국 만들다가 포기해버렸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