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탄 풍경
우리 집 현관 입구에 자전거 두 대가 2년째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남편이 당근 마켓에서 중고 자전거를 사 둔 이후로 한 번도 타 보지 못했다. 올 여름에는 회사 일이 바빠 휴가도 못내 숨 돌릴 틈이 없이 달린 남편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 그러던 그가 오늘 아침 일찍 말없이 나가더니 중인리 들녘 도랑에 그물망을 놓았다고 고기가 들어왔는지 보러 간단다. 먼지 묵은 자전거를 꺼내 타이어에 공기를 주입하고 나사를 조여 매만지고 흔들림이나 삐걱거린 곳이 없는지 살펴본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남편과 딸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자전거 산책을 나갔다. 집 근처 삼천 천변 길에는 이미 많은 이들이 집으로 가, 산책하기에 한적하고 상쾌했다. 자전거 도로와 도보 산책로는 안전하게 분리되어 정비가 잘되어 있었다. 함께 출발했지만 나는 산보를 하고, 남편과 딸은 자전거를 타고 가더니 벌써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호흡을 조절하면서 걷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산책을 나오면 휴대폰이 여간 불편하고 거슬려서 두고 오는데 오늘은 들고 나왔다. 모르는 번호가 뜬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친구 중 하나인 동하이다. 내 번호를 어찌 알았을까 물으니 친구가 알려 줬다며 오히려 내 안부를 묻는다. 여름휴가는 잘 다녀왔는지, 추석 명절은 잘 보냈는지, 날씨가 추워지니 감기 조심하라며 당부까지 곁들인다. 잔잔한 안부에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이어서 취직이 됐다 한다.발음이 어눌한데도 또박또박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잘 표현한다. 기쁜 소식 들려줘서 고맙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개울가는 온통 칡넝쿨과 갈대가 무성하고 어둑해지니 개울물 소리가 더 맑고 요란하다. 상류로 올라갈수록 길이 좁아진다. 봄철에 이 산책길은 벚꽃으로 유명하다. 만개한 꽃 무더기가 뭉게구름처럼 늘어서 있는 모습은 가슴 벅차게 하는 풍경이었다.
모악산 자락에 걸쳐 있는 구름이 놀다 들어가고, 중인리 들판에는 누렇게 익은 벼 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나 홀로 얼마쯤 걸었을까. 자전거 타고 달린 남편과 딸이 뒤처진 나를 찾아 다시 돌아온다. 딸아이는 어릴 적 엄마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며 제 키보다 조금 낮은 자전거 안장에 익숙하게 오른다. 내가 처음으로 자전거를 배울 때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여러 연습 끝에 용기를 내 타고 가다가 몇 미터도 못 가고 언덕 아래로 날아 논바닥에 떨어진 일도 있었다. 비 포장된 시골길에서는 앞에서 버스가 달려오면 겁이 나서 미리 자전거에서 홀짝 내리곤 하였다.
남편이 한참을 또 가다가 멈추더니 나와 걸음을 맞추려는지 나에게 자전거를 건네준다. 자전거를 탄 지 오래돼 망설이다가, 넘어지면서 배운 옛 담력으로 페달을 밟아 달렸다. 들녘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피로한 몸을 확 깨운다. 상류로 올라가니노란 돼지감자꽃이 우리를 반긴다. 여름부터 무릎 관절과 혈액 순환에 좋다며 엉겅퀴, 쇠무릎, 토사자, 어름 등을 여러 가지로 술을 담근 남편은 돼지감자의 효능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준다.
풀숲을 헤치고 통발이 있는 논두렁 작은 냇가로 더듬더듬 내려가니 찬기가 올라온다. 통발을 걷어 올리니 무언가 꼼지락거린다. 작은 미꾸라지 대여섯 마리였다. 너무 작아 다시 풀어 주니 순식간에 몸을 감춘다. 우리는 어둑해진 논둑길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멀리서 보이는 아파트 불빛들과 가로등 밤 풍경이 아름답다. 자전거 도로에 서 있는 보안등이 친절하게 우라를 안내한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자전거는 천천히, 보행자는 조심조심’이라 쓰여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의 느린 걸음을 보고 마음에 걸렸는지 남편은 자전거 뒷자리에 나를 태우고 가겠다고 한다. 어둠이 내린 천변길에서 남편이 내어 준 뒷자리에 내 몸을 맡겼다. 순간 앞바퀴가 갈팡질팡 흔들린다. 남편은 다행히 중심을 잘 잡고 간다. 그래도 나는 자전거가 덜컹거릴 때마다 같이 넘어지지 않을까 긴장됐다. 남편의 허리를 살짝 잡았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서 함박웃음이 지어진다. 자전거를 타고 오는 딸이 아빠 엄마의 자전거 탄 풍경이 보기 좋다고 박수를 보낸다.
자전거 두 바퀴가 잘도 굴러간다.남편은 나를 태우고 가는 게 무거웠는지 페달을 더 세게 밟는다. 페달을 세게 밟아도 자전거 살이 잘 잇대어 버티어 주니 안전하게 굴러가는 것 같다. 부부도 이처럼 두 바퀴로 가는 인생처럼 서로를 의지하고 기대고 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전주 기접놀이 전수관에서 농악 소리가 담장 너머로 들려온다. 꽹과리에 맞추어 얼쑤, 얼쑤, 지화자, 좋다! 흥을 돋우며 풍악이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