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아버지
송 희 제
남편 중학교 친구 부인들의 모임 날이다. 남편들이 젊은 시절 현직에 있을 때는 남자들만 만났다. 여자들은 일 년에 한두 번쯤 부부 동반으로 만나다가 언제부턴가 따로 만나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동기동창이니 다 같은 나이다. 부인들은 조금씩 나이는 달라도 오랜 세월을 모임을 하다 보니 공감대가 같아 정든 친구들 같다. 오늘 모임은 몇 명이 일이 있어 빠지고 다섯 명만 모였다. 마침 모임 장소가 유성이라 우리 집에서 가까워 찾기가 쉬웠다. 호텔이었던 곳을 퓨전 음식점으로 고쳐 아늑한 곳이었다.
그동안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롯데 아파트에 사는 엄마의 부모님 이야기로 집중되었다. 우리는 60대 후반부터 70대 초반을 넘어서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 친정 부모님이 함께 사시다가 모친은 작년 11월에 96세로 돌아가셨다 한다. 아버지는 현재 99세로 육신은 건강하신데 4년 전부터 치매이시란다. 지금 우리 나이도 후반전인데 90대 후반까지 두 분이 해로하셨다는 게 놀랍고 부러웠다.
“자식으로서 그동안 부모님의 삶을 지켜보며 그 비결이 무엇인 것 같아요?"
하고 내가 물으니 답은 간단하다.
"엄마는 아버지께 늘 순종적이셨고, 식생활은 거의 채식이었어요. 너무 맵고, 짜 자극적인 음식은 멀리 하셨어요. 소식하시며 과식은 아니 하셨어요. 매사에 과하게 탐하지 않고 누구와도 다툼이나 갈등 없이 자신을 잘 다스리며 사셨죠. 천성적으로 두 분은 다 착하고 순하셔 조용한 분이셨어요. 그러나 늘 움직이셨지요. 아버지는 80대에도 등산을 하셨으니까요. 나중엔 산악회에서 원거리는 힘드실 테니 주변 산책을 권하셔서 등산은 삼가셨대요."
하고 둘째 딸인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지나온 부모님의 삶을 회상하며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공무원으로 퇴직하셨단다. 그 옛날 어렵고 힘든 시절, 공직에 몸을 담고 박봉에 6남매를 키웠다. 워낙 두 분이 알뜰하고 성실하셨다. 그 당시엔 학비 보조금도 없을 때인데 모두 고등교육 이상으로 다 가르치셨다. 그런데도 늘 무언가를 움직이며 알뜰히 일구어 소출하여 조금씩 땅을 사곤 했다. 청주 근교에 사셨는데 옛적 허름한 땅을 사둔 게 있었다. 거기에 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생각지도 못한 큰돈이 보상금으로 나왔다. 퇴직 몇 년 후에 목돈을 자녀들에게도 주셨고, 아들 넷은 집까지 사주었다. 1, 2층은 가게고 3층은 살림집으로 된 건물을 엄마 명의로 해주셨다. 아버지는 연금을 받으시고 엄마는 가겟세를 받아 쓰시게 했다. 그 당시 엄마 명의 건물을 사니 엄마도 너무 기뻐 행복해하셨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한다. 거기 3층 베란다에는 조그만 텃밭을 만들어 늘 유기농야채를 드셨다. 앞 베란다에 서서 전경을 보면 너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어머니는 정원 속 주인공 같다며 소녀같이 기뻐하셨다.
그 옛날에는 3층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늘 많이 일하시던 엄마가 약해진 무릎으로 계단에서 그만 넘어지셨다. 엉덩이관절을 두 번이나 다쳐 회복을 못 하시고 작년 11월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엄마가 다치시기 몇 년 전부터 그렇게 건강하시던 아버지는 치매가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식사도 잘하시고 아픈 곳은 없으시단다. 다만 착한 치매로 뇌 기능만 나빠진 것이다. 누구를 괴롭히거나 악습이 생긴 건 아니고 기억이 안 나는 인지 기능만 없어진 것이다. 식사도 잘하고 용변도 화장실만 안내하면 본인이 한다. 이렇게 아버지 육신은 건강하고 힘이 있으셨다. 그 연세에 비틀거리지 않고 침대도 홀에서 밀고 다닐 정도란다. 엄마가 엉덩이관절로 병원에 계실 때, 아버지가 치매로 집에 혼자 계시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요양원에 모셨다. 두 딸이 주로 부모님을 자주 찾아가 뵈었다. 아버지는 기억력이 없으니 엄마도 자식도 못 알아셨단다. 그래서 엄마의 존재를 모르니 엄마가 돌아가신 것도 모른다. 그런 아버지를 찾아뵙는 자식들의 안타깝고 애틋한 마음은 늘 짠하다. 맏이인 언니는 77세의 나이다. 그런데도 늘 자주 부모님을 찾아뵙고 그림자처럼 돌보며 수고는 그 언니가 주로 한단다.
우리 모임에 나오는 둘째 딸도 언니와 교대로 걸러서 나온다. 그러나 아들들은 드물게 와서는 자식도 몰라보는 아버지를 눈도장만 찍고 가곤 한단다. 시부모님 덕에 아들들 집까지 사준 그 며느리들은 별로 시아버질 찾아뵙지도 않는다.
그녀도 코로나 때문에 혼자 계신 아버지를 뵈러 면회가 허락될 때만 아버지를 뵈러 가곤 한단다. 며칠 전에 날도 덜 춥고 미세먼지도 찬바람도 약하여 아버질 뵈러 갔다. 엄마가 엉덩이관절로 누워 살아 계셨지만 그래도 그땐 맘이 덜 아팠다. 하지만 요즘은 시중을 평생 잘 들던 엄마가 떠난 줄도 모르는 아버지가 더 쓸쓸하고 딱해 보였다. 시간도 여유가 있어 그날은 남쪽 창가에 의자를 갖고 나와 딸과 둘이 앉았다. 그녀는 굽어진 아버지의 어깨와 등을 어루만지고 주물러 드렸다. 체격이 커서 그렇지 막상 가까이서 매만지니 전보다 마르고 수척해지셨다. 얼굴에도 검버섯이 더 늘어 예전에 수려했던 아버지의 인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엄마 생각도 겹치어 나며 그래도 그녀는 아버지가 좋고 든든하다.
“아버지! 사랑해요. 난 이렇게라도 아버지가 계시니 참 좋아요. 더 나빠지지 말고 언니 말대로 100세까지 만이라도 사세요. 네? 제가 누군지 아세요? 둘째 딸 현이에요.”
하며 그녀가 볼을 아버지 볼에 비빈 후 아버지를 안고 한참을 아버지 가슴에 기대어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70세가 넘은 딸이 자기도 모르게 한 아버지께 대한 사랑 표현이었다.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표정이 밝고 화색이 돌며
“가족이지?”
하고 묻더란다. 치매가 오면서부터 초점 없이 맹하게 보이기만 했던 아버지시다. 신체접촉과 사랑을 말과 행동으로 한참을 교감하니 잠깐 가족이 떠올랐나 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감전되는 듯 온몸에 전율이 오며 뭉클했다. 그녀는 순간 눈시울을 적시며 말을 하는데 우리도 그 말을 들으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곳에서 우리 5명은 점심을 맛나게 들고 차를 마시며 그녀의 부모님 이야기에 이렇게 한참을 빠져들었다. 모처럼 만나 그녀의 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도 언제 닥칠지도 모르는 미래를 상상해본다. 내 가족들에게도 황혼이 짙어져 가는 이 나이에 몸도 마음도 곱게 늙어야 할 텐데……. 짐이 되지 않는 고맙고 좋은 부모로 기억되고 싶은 게 지금 내 심정이다.
첫댓글 아버지를 진하게 느끼는 수필 작품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