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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속도로를 타고 마산 가까이 가서 구마고속도로로 들어섰다. 현풍에서 88고속도로를 따라 거창까지 간다. 거창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어디로 소풍가는 아이들이 길게 한 줄로 앉아 뭔가를 먹고 있다. 점심은 아니고 아침? 입고 있는 옷들과 쓰고 있는 모자, 신고 있는 신들이 좋다. 부럽다. 소년시절을 회상하니. "칠월의 사과나무 밭 / 푸른 사과 아오리 배꼽으로 / 살금살금 기어가는 저 빨간 무당벌레 / 잇새에 생침을 흘리며 / 단내 나는 과피를 핥아 보지만 / 정작 그는 / 대형슈퍼마켓 사과코너에서 / 제일 먼저 칼질을 당할 것이다 / 니 색은 너무 붉구나 무당벌레야 라며 / 끝내 하얀 슬픔 글썽이는 / 푸른 사과 아오리" (푸른 사과 아오리-서미경) 푸른 사과 아오리가 지금도 나무에 매달려 있는지 모르겠다. 푸른 사과 아오리의 서미경은, 내가 사과꽃 피는 5월에 다녀온 거창군 고제면 내당마을의 사과나무 농장 안주인 이름이다. 내 중학교 한참 후배인 이동춘의 짝지이며 내 글의 가장 어린 독자 은솔이의, 그리고 그의 동생 철이의 엄마이고. 이날 철이는 없었다. 이동춘은 ['신토불이 우리 농산물을 우리가 지키자 거창 고제 삼봉산 고냉지 사과 거창 고제 삼봉산 사과는 해발 600M 이상의 고냉지에서 재배한 사과입니다. 전화 055-944-9915]라는 글을 사과상자 표지에 자신있게 써 붙이고 사과를 재배하는, 사과농장 주인이다. 전화로 청하면 택배로 보내준다. 서울서 아이들은 시외버스로 거창으로 오고 막내와 편은 내가 모는 차를 타고 거창으로 갔다. 거창 시외버스 터미날에서 합류, 먼저 도착한우리들은 터미날 앞 강가의 길옆에 차를 세우고 내려 기다렸다. 강은 한적했다. 나름대로 유유히 흘렀다. 우린 만났다. 전 가족 접선 성공. 고제리 삼봉산으로 향했다. 길을 두번이나 잘못들었다. 제법 헤맸다. 처음에 왔을 때 잘 찾은 길인지라 안 헤맬줄 알았는데... |
(2) 도착했다. 삼봉산. 떠날 때는 비가 아니였는데 거창의 지금 길은 비에 젖은 길이다. 삼봉산은 안개와 구름으로 뒤덮혀 있었다. 사과나무 농장의 사과나무님은 사과밭으로 먼저 우리를 안내했다. 트럭 뒤 짐칸에 우리 식구 모두는 올랐다. 트럭 짐칸 타고 서서 바람을 맞으며 과수원으로 달리는 씽씽 이 기분, 편도 난리고 아이들도 난리다. 나도 난리. 와, 신난다. 산골바람 시원한 줄 알앗지만 이리 시원할 줄은... 유태인 수용소 얘기다. 살아남은 어떤 이의 회상이다. 각색하여 옮긴다. "몹시 춥고 암울한 날들이다. 1942년 겨울, 수용소의 오늘도 다른 날들과 다를 바 없다. 걸치고 있는 옷은 옷이라고 말하기엔 한 장의 종잇장. 춥다. 떨린다. 이런 악몽이 내게 일어나다니... 어린 소년일 따름인 내게. 친구들과 뛰놀던 일이 생각난다. 자라서 결혼하고 가정을 가지는 꿈은 내게 너무 부풀었던가 보다. 지금은, 이룰 수 없는 찢어진 꿈일 따름... 그래, 꿈은 언제나 산자들의 몫이지. 난 살아 있어도 더 이상 산자가 아닌데. 붙잡혀 수만 명의 다른 유태인과 힘께 이곳에 끌려온 이후로 나는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간신히 목숨 이어가는, 거의 죽은 상태나 다를 바 없는 처지였었다. 나는 철조망이 둘러쳐진 담장 곁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고 있었다. 추위로부터 체온을 지키기 위해 앙상하게 마른 몸을 두 팔로 감싸고서. 무엇보다도 배가 고팠다.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너무도 오랫동안 배가 고팠다. 음식은 꿈속에나 있었다. 날마다 사람들은 사라져갔고, 행복한 과거는 단지 꿈속의 일에 불과했다. 나는 점점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때 철조망 건너편을 지나가고 있는 한 소녀가 눈에 띄었다. 그녀도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도 슬픈 눈이었다. 그 눈은 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한다는 그런 눈이었다. 나는 낯선 소녀가 가련한 모습의 나를 바라보는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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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철이는 없었다. 농촌 아이들을 돌보는 제도인 '공부방' 혹은 '놀이방'에 갔는데 오후 7시경에 돌아온다. 자기 집에서 젤 늦게 퇴근한다고 아빠가 웃으면서 말한다. 은솔이는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보여주고 싶어 했는 '사슴벌레"를 얼른 데리고 나왔다. 우린 이를 찌께벌레라 불렀다. 다시 유대인 수용소 이야기. "그때였다. 그 소녀가 호주머니 안에 손을 넣더니 빨간 사과 하나를 꺼냈다. 아름답고 광택이 나는 빨간 사과였다. 아, 사과! 저런 사과! 그래, 사과가 저렇게 생겼지!
그녀는 겁먹은 얼굴로 이쪽저쪽을 살피더니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그 사과를 철조망 너머로 던지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뛰어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추위에 얼어붙은 손가락을 떨면서......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나의 세계에 이 사과 한 알은 생명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나는 그 소녀가 멀리 사라져가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그 다음날, 나는 같은 시간에 다시 철조망 근처로 나갔다. 물론 그 소녀가 다시 나오리라고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갇혀 있는 나에게는 아무리 부질없는 것일지라도 한 줄기의 희망이 필요했다. 그녀는 나에게 희망의 끈을 던져 주었고, 난 그 끈을 단단히 붙들어야만 했다.
놀랍게도 그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는 어제와 똑같은 부드러운 미소와 더불어 철조망 너머로 사과를 던져주었다. 이번에는 내가 떨어지기 전에 얼른 그 사과를 잡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볼 수 있도록 그것을 높이 쳐들었다. 그녀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녀가 나를 동정하는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
(4) 사과, 사과나무는 나로부터는 늘 멀리 있었다. 사과는 대구 근방의 경산에만 있었고 밀양 얼음골에만 있었다. 내가 사는 부산 만덕동, 살았던 진주 사천 근방에는 사과밭이 없었다. 매달린 사과나무 아래, 이리 큰 밭의 많은 나무들 아래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 아래 서 보기는 처음이다. 전율.. 저리 진홍으로 투명하게 붉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그저 행복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아주 오랫만에 처음으로 난 내 가슴 속에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일곱 달 동안 우리는 그런 식으로 만났다. 어떤 때는 몇 마디 말을 주고받기도 했다. 어떤 때는 그냥 사과만 오갔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내 허기진 배만 채워 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나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내 영혼을 채워주었다. 그리고 나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그녀의 영혼을 채워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다른 수용소로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삶의 끝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나와 내 친구의 만남이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튿날, 소녀가 왔다. 인사를 했다. 인사하는 내 가슴은 무너질 것만 같았다. 떨려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이렇게 말했을 뿐. 내일부터는 사과를 갖고 오지 마. 다른 수용소로 가게 될 거야. 다시는 못 만나게 될 꺼야.
나는 자제력을 잃기 전에 등을 돌려 철조망으 로부터 달아났다. 차마 뒤돌아볼 수가 없었다. 뒤돌아보았다면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보았을 것이고, 그녀는 눈물로 뒤범벅이 된 내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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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편도 자기 손으로 사과를 따보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나도 처음이고, 우리들은 사과를 땄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다는데 우린 심기는 커녕 따기만 한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닌 여러 개... "여러 달이 지나고 악몽과도 같은 고통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 소녀에 대한 기억은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도 나를 붙들어 주었다. 언제라도 눈을 감기만 하면 마음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그 친절한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언제라도 그녀가 건네주는 사과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그렇듯이 갑자기 악몽이 끝 이 났다. 전쟁이 끝난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자유의 몸이 되었다. 나는 가족을 포함해 나에게 소중한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 소녀에 대한 기억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 기억이 나로 하여금 삶의 의지를 갖게 했고, 나는 미국으로 건너와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다시 여러 해가 흘러, 1957년이 되었다. 그 무렵 나는 뉴욕 시에 살고 있었다. 한 친구가 나에게 자기가 아는 어떤 여성을 소개해 주겠다고 말했다. 몇 번을 거절하다가 나는 마지못해 그 자리에 나갔다. 그런데 로마라는 이름의 그녀는 좋은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녀도 나처럼 이민자였기 때문에, 우리는 최소한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이민자들은 전쟁의 세월에 대해 물을 때 서로 상처를 주지 않지 위해 조심을 하곤 했다. 그녀도 그것을 의식해선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쟁 동안에는 어디에 있었나요? 내가 대답했다. 독일에 있는 유태인 수용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
(6) 역사를 바꾼 사과는 넷이란다. 에덴동산의 사과, 트로이 목마 신화 이야기에 나오는 사과, 뉴튼의 사과 그리고 윌리암 텔의 사과... 이 사과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자. "로마는 문득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을 지었다. 고통스럽지만 달콤한 어떤 기억을 떠올리는 듯했다. 내가 물었다. 왜 그러죠? 로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과거에 있었던 어떤 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린 소녀였을 때, 나는 유태인 강제 수용소 근처에 살고 있었어요. 그 곳에 한 소년이 갇혀있었는데, 꽤 오랫동안 나는 날마다 그 소년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사과를 갖다 주었어요. 철조망 너머로 사과를 던져 주면 그 소년은 무척 행복해했지요.
로마는 무겁게 한숨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가를 설명하기는 무척 어려워요. 어쨌든 우리는 그 때 너무 어렸고, 몇 마디 얘기밖에 주고받을 수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둘 다 서로를 무척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소년이 다른 많은 유태인처럼 처형되었으리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나는 우리가 서로 사랑의 눈길을 주고받았던 그 여러 달 동안의 그의 모습만을 기억하려고 애를 쓰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말을 더듬으며 로마에게 물었다. 그 소년이 어느 날 당신에게 내일부터는 사과를 가져오지 마, 난 다른 수용소로 끌려가니까 라고 말하지 않던가요? 로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그것을 알죠?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그 소년이니까요, 로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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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이들도 즐거워 했다. 모여 선 그들에게 디카를 들이대니 은솔이 엄마가, 은솔이, 빨랑 퇴각, 그긴 교쑤님 편들 자리. 네가 낄 자리 아님' 하고 외치니, 은솔이가 끼익하며 뛰쳐 나온다.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으라고 황급히 외쳤는데도. 이 사진 올린 줄 알면 아이들에게 내가 한참 부대껴야 하는데. 그래도 에라 올리자. 은솔이 엄마 아빠 함께 선 사진은 바로 찍었다. "한참 동안 우리 둘 다 그렇게 말이 없었다. 오직 침묵만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차츰 시간의 장막이 걷히면서 우리는 눈동자 뒤에 있는 서로의 영혼을 알아보았다. 우리가 한때 그토록 사랑했고, 그 이후에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그 영혼을.
마침내 내가 말했다. 로마, 난 한? 당신과 헤어져야만 했소. 하지만 이제 다시는 당신과 헤어지고 싶지 않소. 이제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고, 당신과 영원히 함께 하고 싶소. 나와 결혼해 주겠소? 나는 그녀의 눈에서 한때 내가 보았던 그 반짝임을 다시 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네,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우리는 서로를 껴안았다. 그 여러 달 동안 그토록 갈망했지만 철조망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간절한 포옹이었다. 이제 어떤 것도 다시는 우리를 방해할 수 없었다. 내가 로마와 다시 만난 그날로부터 40년이 흘렀다. 운명은 그 전쟁 기간 동안 나에게 희망의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를 만나게 했고, 이제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리를 다시 재회하게 한 것이다. " |
(8) "1996년 봄, 발렌타인 데이에 나는 로마와 함께 미국 전역에 방송되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했다. 나는 수천만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날마다 내 가슴으로 느끼는 것을 말했다. 로마, 당신은 그 강제 수용소에서 내가 배가 고플 때 사과 한 알로 나를 먹여 주었소. 그리고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오. 아무리 받아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오. 나에게는 매순간 당신의 사랑이 필요하오." 사과나무 그늘의 이 자리는 짐작한 대로 사과나무집네 사람들이 앉고 눕고 잠 청하고 책읽고 시상 떠올리는 자리였다. 은솔이 엄마 아빠는 일하다가 지치면 이 자리서 쉰다고 했다. 앉았을 때 보이는 하늘은 푸르게 웃고 구름은 하얗게 웃고 사과는 붉게 웃는다고 했다. 태풍이 온다고 했던가. 구름은 금방이라도 폭우로 변해 땅으로 내려 쏟아질 듯 등등한 기세였지만 우산을 준비해 가지 않은 후회를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생각한 듯, 쏟아지지는 않았다. 2km정도 덜어진 사과밭에서 달려오는 트럭 적재함의 바람은 더욱 상쾌하고 시웠했다. 우린 또 더더욱 신바람으로 흥겨워 했고. 두충나무숲이 기다리고 있었다. 은솔이를 앞세우고 두충나무숲으로 갔다. 5월의 숲과 8월의 숲은 어떻게 다를런지. 8월의 숲은 또 어떤 전율을 내게 줄런지... 아오리, 푸른 아오리, 푸른 사과 아오리는 없었다. 다 따고 없었다. 연극제의 밤은 밤 8시에 시작된단다. 볶은 돼지고기와 끓인 찌개를, 말린 죽순나물을 반찬으로 한, 풍성한 밥상을 내왔다. 이리 맛있을 수가. 연극제 출발... (계속) |
(Gigliola Cinquetti-Volano Le Rondini)
(물레방아가-'내 마음 제비처럼'으로 번안해 불렀음)
첫댓글 사과가 차지하는 지평이 이리 넓은 줄 새삼 느끼며, 다음을 기디립니다. 간절하게,
독두원장님, 거창 고제면은 사과밭 천지데요. 사과밭이 붉어서 좋다고 했더니, 추석무렵에 붉어져야 하는데 너무 빨리 불게 되었다는군요.
배교수님 방학이 짧아 어쪄지요. 사과 이야기며 귀하고 감사합니다. 벌써 9월입니다.
이을규교수님, 아침 저녁 바람이 이제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어설프고 싱거운 이야기를 잘 봐 주시니 감동... 아이와 좀 부족한 사람에겐 칭찬이 최고 / 하기사 노대통령도 창찬해 주면 물불 안가리고 잘 하겠다고 하던데... / 그 분도 남는 분은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