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1: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니느웨 사람들이...정죄하리니 - 같은 논리가 이번에는 니느웨 사람들과 유대인들의 대조에 적용되고 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로 그곳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극심한 죄악을 범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였다.
니느웨 사람들은 일개 선지자의 선포를 듣고도 회개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요나보다 비교가 안될 만큼 위대하신 예수의 선포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다. 31-32에는 하나의 일관된 주제가 흐르고 있는데, 그것은 '이방인의 구원 받음'과 '유대인의 구원 받지 못함'이 대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요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저를 맏는 자는...벌써 - 앞의 두 절에서 요한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독생자 예수의 초림 목적이 바로 구원에 있었음을 강조했다. 이제 본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엄하고 무서운 심판이 불가피하게 될 것임을 설명한다. 그는 이 진리를 즐겨 사용하는 논리 전개 방식인 부정과 긍정의 연결을 통해 변증하고 있다.
심판 가운데 처해 있으므로 마지막 대심판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예로서 원죄와 자범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으며 따라서 구속주로 오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면 자연히 멸망과 정죄 가운데 있는 것이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볼 때 예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구원과 멸망 이 두 편으로 확연히 구분되었다. 심판을 받은 - 완료 시제 '케크리타이'는 심판은 이미 과거에 시작되어졌고 그 판결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임을 나타낸다. 불신자들은 장차 있을 종말론적인 대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진리 안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죄에 얽매여 죄에게 종노릇을 하고 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내 말을 듣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순종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단지 귀로만 듣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 "내 말을 듣고 ... 영생을 얻는다"는 어귀는, 말씀이 생명력을 마술적으로 전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부셋트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의 작용을 마술적인 것으로 간취하고, 그것을 헬라의 비지적 오묘란 것 과 동일하게 보았으니 잘못이다. 여기 "듣는다"함은, 헬라 신비주의의 범신론 사상이 가르친 마술적인 생명 전달이 아니다. 그 들음, "나 보내신 이"를 믿는데 이르게 하는 지석 요소를 가진 동시에, 신자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결과로 가져온다.
이것은, 지식성과 인격성이 제외된 마술적 작용과는 청양지차로 다르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곧, 신자가 현세에서부터 벌써 영생을 소유했다는 뜻이다. 이런 사상은, 성경 다른 부분에서도 가르친다.. 스밀데는, 이 점에 있어서 요한의 사상이 바울의 칭의론과 원리상으로 같다고 하였다. 곧, 신자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벌써 옳다 함이 되도록 현세에서부터 심판 보장의 칭의를 받았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