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새, 무수, 씨앗이 등 진도말하고 고어에서 사라진 글자 28자 중 4자 외
나새, 무수, 씨앗이... 등 진도에서 쓰던 말덜
이 가운덴 옛날에깐날에 고어(古語)에서넌 있었제만 현대에서 사라진 글자덜로 표준말보담 더 오래된 고어덜이 진도에가 지법 많애람짜.
진도서 이전에 보릿국덜 낋일찍에 풋노물얼 여므는 더 맛낭께 보릿국엔 모도 풋노물얼 항꾼에 옇고 그케덜 낋엤지라? 덜?
그란데 고맘때 온 들녘엔 나새도 푸지게 널렜었어라?
개논엔 갯노물덜도 많앴었고라.
그라다가 풋노물이랑 나새랑 꽃이 필 찍에가 되므는
읍내 멘화수뜰에다가 우장춘 박사가 맨든 육종장서넌 배추꽃, 무수꽃덜도 흐드러지게덜 폈었고라.
무수는 표준말인 무(무우는 비표준어) 보담 더 오래된 고어로 ㅿ(반시옷)이 쓰인 두시언해초(杜詩諺解初, 1481년)에 기록이 댜있어람짜.
◎<두시언해-초>무→ 무우→ 무
※일부 옛글자들이 카톡이나 카페 글에서 지원이 안되어서 빈칸으로 보이는 점은 이해하시고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나새란 진도말 역시 표준말로 냉이를 뜻하는데 무수(무)처럼 반시옷(ㅿ)이 쓰인 고어의 하나로 진도에서넌 나새로 남은 옛말이지라.
두시언해초(杜詩諺解初, 1481년)에 보믄 ‘나(薺)’는 ‘냉이’라넌 최초 문헌 기록이 있어람짜.
◎<두시언해-초>나→ 나시→ 나이→ 낭이→ 냉이
씨아의 어원이 씨앗이-
진도 읍내 ‘멘화수뜰’이란 이름이 본래 면화(綿花)고 목화(木花)로
우덜 에릴찍에 명다래 따먹었든 소캐(솜)가 되넌 그 명이 곧 무명이고 목면(木綿)임시로 명다래(목화다래)가 열리든 그 꽃이 면화(綿花)고 목화(木花)여가꼬 육종장이 생기기 전에 그 도랑에다 목화럴 많썩 싱겠었답디다.
일제강점기 때 내나 진도서 목화 공출얼 무쟈게 많썩 해갔든 기록덜도 있어람짜.
명 싱개가꼬 소캐럴 낼라므는 씨앗이에다 옇고 돌림시로 명씨하고 소캐하고 분리시키지라.
그란데 옛날 고서(古書)인 <역어유해(譯語類解, 1690년)>에 반시옷(ㅿ)이 들어간 ‘이(씨앗이)’라고 발음했던 기록이 나와람짜.
◎<역어유해>이→ 양이→ 씨아
항가쿠도 표준말 엉겅퀴보다 더 오래전에 고어로 큰 가시를 뜻하는 한가시가 한가쿠로 변했고 엉겅퀴는 이보다 더 변한 말이라 하지람짜.
엉겅퀴의 한자명 대계(大薊)에 대해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 1489년, 許琮 외)>에는 ‘한거싀’라고 적었고, ‘대거새(大居塞)’나 한글로 ‘큰거시’란 기록도 있답디다.
옛말에 ‘한’이나 ‘항’은 ‘크다(大)’는 의미를, ‘가새’, ‘가시’, ‘거새’ , ‘거시’는 ‘가시’를 뜻하지라.
즉, 한가시(큰 가시)→ 항가새→ 엉거시→ 엉겅퀴로 변한 것이라고, 학계에선 '가시가 큰 식물'이라고 그케 보지람짜.
국화과(Compositae)를 엉거싯과라고도 항께,
여그서 엉거시란 곧 엉겅퀴의 총칭인 셈이겄지라.
상우당(尙友堂) 허종(許琮, 1434~1494년) 등이 편찬한 구급간이방보담 200년 뒤에 나온 책인 역어유해(譯語類解, 1690년)에는 ‘엉것귀’로 적혔답디다.
진도 ‘풋노물’이 전라도 딴 데서넌 ‘곰밤부리’로 불리기도 하는데
표준어로는 ‘별꽃’이고 쪼깐 딸르게 생긴 ‘쇠별꽃’이란 풀도 있습디다.
** 옛 한글 관련 자료 **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은 모두 스물네 자다.
사라진 네 개의 글자는 ‘ㆆ(여린히읗)’ ‘ㅿ(반시옷)’ ‘ㆁ(옛이응)’ ‘ㆍ(아래 아)’다.
1. “ㅿ” 반치음 시옷으로 ㅈ 과 ㅅ의 중간 발음이었다. 반시옷, 반치음, 반잇소리, 가벼운시옷, 여린시옷, 반치음 등으로 불린다.
2. “ㆁ” 꼭지 이응(옛이응)으로 원래 옛날에는 꼭지 ‘ㅇ’ 이 진짜로 ‘ㅇ’ 의 발음이 났다.
3. “ㆆ” 여린히읗으로 히읗의 약한 발음이 났다. 된이응, 여린히읗, ᅙᅵ으ᇹ으로 불린다.
4. “ㆍ” ‘아래 아’로 모음이었다. ‘ㅏ와ㅓ’의 중간쯤 되는 발음이었다.
그리고 고어에서, 입술을 거쳐 나오는 가벼운 소리로 순경음 또는 가벼운입술소리, 경순음, 입술가벼운소리로도 불리는 ≪훈민정음≫에서 순음 아래 ‘ㅇ’을 연서(連書)하여 표시했던 음인 ‘ㅱ’, ‘ㅸ’, ‘ㅹ’, ‘ㆄ’ 따위도 없어졌고 'ㅳ'과 'ㅄ'은 1443년 창제된 훈민정음(언해본)에서부터 사용된 ‘합용병서(合用竝書)’로 당시에 존재했던 독특한 어두 발음을 표기하기 위해 만든 '합용병서'이다. 중세 국어 특유의 발음을 표현하던 이 기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현대의 쌍자음 체계로 변천하거나 소멸하게 되었다.
'ㅄ'은 'ᄡᆞ'와 같이 'ㅅ' 계열의 합용병서 중 하나로, 초기에는 된소리보다는 복합적인 자음의 형태를 표기하는 데 쓰였지만 시간에 따른 변화로 16~17세기를 거치며 어두의 자음들이 점차 된소리(경음)로 변하면서, 이러한 'ㅅ'계 합용병서들은 'ㄸ', 'ㅃ', 'ㅆ' 같은 현대의 된소리 표기로 통합되거나 사라졌다.
-이상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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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는 있으나 글자가 없어 글로 통하기 어렵더니 우리나라 오랜 역사에 어둠을 밝히셨도다.’
세종대왕께서 1443년 우리의 문자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만드셨지람짜.
1446년에는 새 문자를 만든 목적과 원리를 밝힌 책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럴 펴내셨고라.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내 이를 딱하게 여겨,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쉽게 익혀, 사람마다, 날로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한글이 없던 시절에는 한자의 음이나 뜻을 빌려 우리말을 쓰고 읽는 차자표기(借字表記)를 사용넌데라 요 것이 ‘이두(吏讀)’ ‘구결(口訣)’ ‘향찰(鄕札)’이지라.
이두는 한자를 쓰되 어순을 우리말대로 적었고,
향찰은 어순뿐만 아니라 문법요소와 어휘까장도 우리말같일로 표현했지람짜.
구결은 한문 원문을 우리말식이로 풀어 읽기 위해가꼬 한자 곁에 기호나 글자를 써넣어서 사용한 방식이었고람짜.
1443년 세종대왕께서 맨드신 한글 ‘훈민정음’은 자음 글자 열일곱 개에다가 모음 글자 열한 개럴 합한 스물여덟 개의 글자지라.
그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뜬 다섯 개의 기본 자음 글자는 소리의 세기에 따라 획을 더함으로써 열일곱 개의 글자로 확장했고, 하늘·땅·사람의 모양을 본뜬 세 개의 기본 모음 글자는 각 글자를 서로 합성함으로써 열한 개의 글자가 탄생했지라.
이는 누구나 다 말을 소리나는 그대로 편하게 적어가꼬 왕도 노비도 모도 한글로 편지도 쓰고 서로 막힘없이 소통하기 위함임시로, 억울한 사람 누구나 한글로 상소토록 한 일이었지라.
그라제만 그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해가꼬 훈민정음 창제 직후인 1444년(세종 26)에도 세종이 아끼던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사대부가의 양반들은 이를 반기지 않았다합디다.
‘언문(諺文)’이로도 불리던 한글은 학자들 사이에서 쉽게 배운다는 뜻이로 ‘정낭글’ 또는 ‘통시글’에다 양반덜 사이에선 ‘반절(反切,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기 위한 글)에 ‘암클(여자들이 쓰는 글)’이나 ‘상놈글’ 등이로 당시 우리글을 비하하는 호칭이 많아기도 했답디다.
※언문(諺文)은 비하하는 뜻은 아니고 말씀을 적는다는 뜻에 낱말로 세종이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도록 지시한 세종실록 내용이 있다.
그라다가 1894년 고종은 그간 한문으로 작성해 왔던 법률이나 칙령을 한글(國文)로 적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필요에 따라 한문이나 국한문을 사용하도록 칙령을 발표했구만이라.
인자사 찰로 한글이 나라의 글이 된 것이지람짜.
그라고 1907년 국립연구기관인 국문연구소가 설치되었습디다.
한글은 훈민정음(訓民正音), 정음(正音), 언문(諺文), 국문(國文), 조선문(朝鮮文), 선문(鮮文)이란 여러 이름덜로 불리기도 했지람짜.
오늘날에 이름인 ‘한글’이란 이름에 유래넌 확실하지는 않제만, 당시의 잡지 등 기록이로 봐가꼬 추정덜 하기넌 한글 학자 주시경 선생이 처음 붙인 명칭이라고 보는데 ‘한’은 ‘큰, 첫째, 한(韓) 나라’ 등이로 풀이해람짜.
오눌날 디지털 문명 속에서 더욱 그 존재 가치가 빛나넌 우리글 한글덜얼 애끼고 사랑하심시로, 인자 찰로 다 사라져 갔제만 우덜 진도서 울엄매, 울아배, 울함씨, 우리 조보씨덜께서 쓰시든 그 진도 탯말(사투리)에 대한 애정과 관심도 부탁디립니다.
※거듭 말씸디리넌데 일부 옛글자가 카톡이나 카페 글에서 지원이 안댜가꼬 빈칸이로 뵈넌 점은 이해덜 하시고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진도사투리사전 저자 조병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