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과 쉼이 깃든
햇살이 토도독토도독 초록 잎사귀를 두드리는 계절. 깊은 숲을 품고, 푸른 바다에 기댄 경북 울진으로 떠난다. 경상북도 내륙의 최북단에 자리한 울진은 동해에 면하고 강원 삼척, 경북 봉화·영덕에 접해 있다. 외따로 떨어진 지역은 아니지만 교통편이 부족해 찾아가는 여정이 녹록지 않다. 누군가는 그래서 울진을 두고 벽지라 한다. 사람의 손이 덜 탄 덕분일까. 울진은 천혜의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다. 더디게 변하는 어촌 마을 역시 정답기만 하다. 울진의 허리께를 유유히 흐르는 왕피천과 ‘인증 숏’ 성지로 떠오른 성류굴도 느긋하게 둘러볼 만하다. 산과 바다가 내어준 풍성한 식재료도 울진의 매력이다. 현지인 맛집에 찾아들어 손맛과 인심을 느껴본다. 올여름은 유난히 더울 거라는데, 삶의 온도가 너무 오르기 전 울진에서 청량한 숨을 한가득 들이마신다. 글 길다래 기자 사진 임승수(사진가)
[배는 항구로 돌아온다 - 죽변항]
배가 항구에 늘어선 풍경은 싸움터에서 돌아온 전사를 연상시킨다. 먼 바다의 거친 파도와 내리쬐는 뙤약볕을 헤치고 약속대로 돌아온 배들. 깊은 바다에서 잡아 올린 풍성한 조과를 전리품처럼 내놓는다. 그러니 해가 뜨고 지는 시간에는 항구에 가야한다. 푸르른 생명이 푸드덕거리는.
울진은 대게가 유명하지만, 지금 죽변항에선 장치를 가장 흔히 볼 수 있다. 못났기로 곰치와 1~2등을 다투는 생선이다. 강원도와 이곳 울진 바다에서 주로 잡히는데, 조림 탕이나 말려서 쪄 먹는다. 항구의 아무 식당에서나 장치의 살점에 박힌 동해를 맛볼 수 있다. 죽변항 모퉁이에는 죽변해안스카이레일이 있다. 죽변항을 출발해 봉수항에서 되돌아오는 코스다. 스카이레일은 부서지는 파도 위로 천천히 미끄러진다. 돌아오는 길 중간에 하트해변 정차장에 내려 걸어올 수도 있다. 바닷물이 들고 나는 해안선이 하트처럼 생겨서 하트해변이라는 애칭이 붙었다. 이곳에서 드라마<폭풍 속으로> 세트장을 둘러보고 울창한 대나무 숲을 산책해도 좋다.
[대한민국의 숨 - 금강소나무숲길]
아마존의 열대우림이 지구의 허파라면, 울진의 금강소나무숲길은 대한민국의 숨이다. 울진군 북면에는 크고 우람한 금강송이 빼곡히 자라는 짙푸른 숲이 있다. 수령 500년이 넘는 보호수 두 그루를 비롯해 1000만 그루가 넘는 소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가만가만 숲길을 걷노라면 서늘한 공기와 향긋한 피톤치드가 머리를 맑게 해준다. 몸통의 붉은빛이 기품 있는 울진 금강송은 곧고 치밀하게 자라 예부터 궁궐을 짓거나 임금의 관을 짜는 등 귀한 나무로 대접받았다. 군락지 역시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숲으로 관리되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숲이 파괴되었고, 이후 산림청의 조림사업을 통해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금강소나무숲길에는 다섯 개의 탐방 코스가 있는데, 홈페이지(uljintrail.or.kr)에서 사전 예약을 통해서만 탐방할 수 있다. 온 가족이 부담 없이 숲을 돌아보는 가족탐방길(5.3 킬로미터)과 옛날 보부상들이 오가던 보부상길(13.5킬로미터)이 가장 인기 코스다.
[낭만 젊음 사랑의 - 왕피천과 성류굴]
왕피천은 경북 영양군 금장산 서쪽 계곡에서 발원해 울진군 금강송면 왕?리를 지나는 67.75 킬로미터의 계곡이다. 물길이 지나는 굽이마다 숲과 기암괴석이 그림 같아 트레킹을 떠나도 좋다. 숲을 달려온 물길은 근남면에 이르러 속도를 늦추며 천천한 몸짓으로 동해로 흘러든다. 근남면에는 이 특별한 만남을 감상할 수 있는 왕피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산책로와 왕피천케이블카 아쿠아리움 등이 마련돼 있다. 왕피천케이블카에 올라 발아래에 펼쳐지는 왕피천 물결을 바라본다. 수만 개의 보석을 뿌려놓은 듯 눈부시게 빛난다. 케이블카 유리창에 쓰인 낭만 젊음 사랑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어온다. 케이블카슴 관동팔경 중 하나인 망양정 언덕을 왕복한다. 왕피천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2억 5천만 년 전 형성된 특별한 지형이 있다. 지하의 금강산 이라 불리는 석회암동굴, 성류굴이다.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석회암이 녹으며 생겨난 기기묘묘한 형상은 놀라움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성류굴 입구 조형물에서 인증 숏 을 촬영하는 게 유행이라니, 찰칵 한 장 남겨볼 일이다.
[이현세벽화거리의 안창회 씨]
이현세벽화거리는 한 사람 손으로 완성됐다. 광고 회사를 운영하던 안창회 씨(66)가 이현세와의 인연으로 벽화거리 조성사업의 그림 작업을 맡았다. 2017년부터 혼자 벽화를 그렸어요. 처음에 다른 작가와 함께 작업했는데, 이현세의 작품을 그대로 그리는 건 혼자 하는 편이 낫더라고요.
그가 완성한 벽화거리는 1킬로미터에 이른다. 지금도 매년 벽화를 정비하고 신규 작품을 추진 중이다. 만화만 봐도 재미있지만 안씨가 공들인 디테일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롭다. 그림과 배경이 찰떡처럼 어우러지며 만화 속에 들어온 듯 입체감을 선사한다.
"벽화 그림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면 좋겠어요. 다양한 행사와 축제도 열고, 나중에는 젊은 작가들을 지원해서 마을이 살아날 수 있게 하고 싶어요."
안씨는 이곳 벽화 작업을 계기로 울진의 매력에 빠져 아예 이사를 왔다. 운이 좋으면 벽화거리의 공방에서 안씨를 만날 수 있다.
[추억 속으로 한 걸음 - 이현세벽화거리와 바지게시장]
어떤 걸음은 앞이 아니라 뒤로 걷는다. 매화면에 있는 이현세벽화거리를 거닐며 시간을 거슬러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이현세벽화거리는 벽화 마니아들이 통영의 동피랑, 부산의 감천마을과 함께 국내 3대 벽화로 꼽을 정도로 수준이 높다. 식당 학교 다방 등 정겨운 시골 마을 벽을 따라 <공포의 외인구단> 등 만화가 이현세의 작품이 그려져 있다. 이현세의 부친 고향이 울진이어서 인연이 되었다. <공포의 외인구단>을 찬찬히 읽어보는 벽화 책뿐만 아니라 매직 광장, 만화 도서관, 공방 등 구석구석 볼거리가 가득하다. 벽화거리를 둘러보고 배가 출출해지면 멀지 않은 곳의 전통 오일장을 둘러보자. 2, 7일에 장이 서는 바지게시장이다. 국민 주전부리 어묵·떡볶이뿐 아니라 2대를 이어 영업하고 있는 새마을레스토랑의 메밀묵국수도 별미다. 어머니의 손맛을 이어받은 주인장이 직접 묵을 쑨다. 바닷가 마을의 오일장답게 바지게시장은 특히 어물전이 풍성하다. 말린 물가자미와 장치, 우람한 문어 등 눈이 휘둥그레지는 먹거리가 한가득이다.
[바다를 사무실로 - 해양레포츠센터]
짧은 울진 여행이 아쉽다면, 울진에 머물면서 일과 휴식을 겸할 수 있는 해양레포츠센터를 눈여겨보자. 2013년 개관한 해양레포츠센터는 수심 5m의 대규모 풀과 카페·숙박·식당·애견카라반 등의 편의시설을 갖춘 복합해양문화공간이다. 한국프리다이빙협회가 위탁 운영하면서 더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관광객을 만나고 있다. 올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워케이션 활성화 공모사업 대상으로 선?되면서 시설과 프로그램을 정비해 워케이션 성지로도 거듭날 전망이다. 워케이션은 일(work)과 휴가(vacation)의 합성어이다. 최재호 센터장(43)은 프리다이빙 스쿠버다이빙 등을 체험하고, 이곳 숙소에 머물면서 다이빙 자격증까지 취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지역 사회와 연계한 해녀·해남 프로그램도 계획 중이다. 그 밖에도 바다와 문화·예술을 접목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라고 전했다. 다이빙의 매력으로 신비로운 바닷속을 누비며 다양한 감정과 철학을 마주할 수 있다 고 전하는 최 센터장. 올여름 울진에 오래 머물 이유가 생겼다.
문의 054-783-6161
[보랏빛 라벤더 천국 - 바람길꽃마을]
봄날의 꽃 잔치가 그립다면, 여름 꽃바다에 빠져보자. 매화면 산 중턱에 마을기업 바람길꽃마을이 있다. 노광욱(57) 이윤정(47) 씨 부부가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2021년부터 마을 휴경지에 라벤더밭을 조성했다. 전체 5000평(1만 6529 제곱미터) 면적에 5만 여 주의 라벤더와 천일홍을 일부 심었다. 휴경지를 이용했기 때문에 라벤더밭은 1~6호까지 드문드문 자리한다. 길을 따라 가볍게 산책하며 라벤더의 빛깔과 향기를 감상하고 인증 숏을 남기면 좋다. 라벤더꽃은 6월 가장 아름답게 만개할 예정이다. 카페와 체험장도 6월에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 카페에서는 라벤더차와 에이드 등의 라벤더 음료를 맛볼 수 있다. 체험장에서는 라벤더 비누와 입욕제 등을 만드는 원데이 클래스를 진행한다. 품질이 우수한 라벤더를 넣은 바람길꽃마을 자체 제품도 구입할 수 있다.
이 대표는 '라벤더는 치유의 대명사이다. 이곳에서 라벤더를 마음껏 보고 경험했으면 좋겠다'고 전한다. 문의 010-9657-6786
[몽글몽글 감수성 샘솟는 - 오브덕]
여행지에서 작은 책방에 들러 기억에 남을 만한 책이나 굿즈를 구입하는 게 최근 여행의 트렌드다. 울진에서는 울진읍에 자리한 독립책방 오브덕을 찾아보자. 책방지기 주하율 씨(32)가 큐레이션한 책과 직접 만든 마그넷과 화분 등 여러 아기자기한 소품을 판매한다. 책은 주로 독립출판물과 시와 소설·에세이 등을 다룬다. 울진이 고향인 주씨는 서울에서 공부하고 일하다가 6년 전 울진으로 돌아왔다. 부모님 일을 돕다가 2021년 자신만의 취향을 담은 오브덕을 열었다. 주씨는 원래 사진 찍는 걸 좋아했는데, 울진에 와서 울진 바다와 마을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며 울진 바다 마그넷을 만들게 된 계기를 설명한다. 마을이 점점 더 재미있어지기를 기대한다는 주씨. "고향에 돌아오니 정말 좋아요. 젊은 사람들은 대단하다며 감탄하는데, 조금만 용기 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젊은 감각으로 발견한 울진을 살펴보는 것도 이곳의 재미다. 울진을 추억할 기념품 한 점 챙겨넣어보자. 문의 010-4308-8088
[울진 작가가 한자리에 - 프리다타코&커피]
죽변항 인근에 화가 프리다 칼로를 콘셉트로 한 감각적인 공간이 있다. 붉은색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프리다타코&커피다. 타코와 음료를 비롯해 울진 공예작가들의 굿즈? 전시·판매한다. 옷과 가방·소품 등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커피숍 옆 건물은 미술갤러리로 운영 중이다. 현재는 드라마 <우리들의블루스>에 출연해 관심을 모은 정은혜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굿즈도 다채롭지만 타코 요리도 기대 이상으로 수준급이라는 사실. 문의 010-9842-4602
[낭만적인 촌캉스의 정석 산포까사]
바닷가 시골 마을의 주민이 되어 하룻밤 묵어보는 경험. 매화면 산포까사는 시골집을 개조해 촌캉스의 낭만을 느낄 수 있는 독채 펜션이다. 바닷가 바로 앞에 자리하고, 마당에는 소담스러운 꽃들이 피?나 운치를 더한다. 주인장이 섬세하게 챙긴 감성적인 인테리어가 로맨틱하다. 마당에
설치된 파고라에 앉아서 솥뚜껑 삼겹살을 구워 먹으면 이게 진짜 레트로! 문의 010-3516-8028
[울진 정체성 담은 농가맛집 1호 - 진미가]
지난 4월 문을 연 따끈따끈한 신상 맛집을 소개한다. 신상이라고 해서 실력이 검증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오산. 진미가는 울진군 제1호 농가맛집이다. 농가맛집 육성 사업은 향토 음식을 발굴해 상품화하고 계승·발전하려는 사업이다. 진미가의 대표인 김성의(53) 조유진(53) 씨 부부는 울진과 경북 지역의 농수산물을 재료로 차별화된 발효 음식을 선보인다. 조씨는 치유 음식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기도 한 전통발효식품 명인이다. 그가 직접 3년간 숙성시킨 발효장을 다채로운 메뉴에 적용하고 있다.
진미가의 대표 메뉴는 까치버섯 등 다섯 종의 버섯으로 끓인 자연버섯전골이다. 표고 등은 김 대표가 직접 재배한 것이기도 하다. 그 밖에 해물장정식, 한우간장구이 등 감칠맛 나는 메뉴가 준비되어 있다. 사전 예약으로만 진행한다. 문의 054-782-8230
[3대째 이어오는 손맛 - 진해식당]
해산물 위주의 바닷가 식단이 별로인 고기파 를 위한 희소식! 죽변항에 3대째 이어오는 차돌박이 집이 있다. 시어머니가 하던 가게를 며느리가 이어받고 다시 딸이 함께 명맥을 이어간다. 한우 암소 차돌박이를 특제 양념에 버무려 연탄불에 구워 낸다. 타지 않도록 탁탁 두드리며 자주 뒤집어주는 게 핵심. 익힌 차돌박이는 깜짝 놀랄 정도로 고소하고 부드럽다. 진해식당은 관광객뿐만 아니라 지역민에게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로컬 맛집이다. 오래된 인테리어가 집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울진읍에는 딸이 운영하는 울진점도 운영 중이다. 문의 054-783-7203
[식상한 게 요리는 가라! - 왕비천이게대게]
울진은 대게가 유명하다. 울진대게는 7년 연속 대한민국 국가브랜드 대상을 받기도 했다. 대게는 찜으로 먹는 게 보통이지만 왕피천 인근에서 색다른 대게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왕비천이게대게에서는 대게짜박이와 게살(게장)돌솥비빔밥, 게살 채소비빔 만두 등 독특한 대게 메뉴를 선보인다. 대게짜박이는 대게 다리를 넣고 뭉근하게 끓인 찌개 요리다. 된장과 고추장을 모두 써서 달착지근하면서도 구수하다. 걸쭉한 느낌이라 솥밥에 비벼 먹으면 게눈 감추듯 한 그릇 뚝딱하게 된다. 시원한 동치미와 정갈한 밑반찬도 기분 좋은 요소다. 문의 054-787-8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