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손기정 체육공원 손기정 참나무
‘모든 것이 길이었고, 모든 곳을 달렸다. 오로지 달릴 뿐이었다.’는 한평생 길 위를 달렸던 불멸의 마라톤 영웅 손기정 선수의 말이다.
조선인은 일제의 노예이거나 궁핍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1912년 10월 9일이다. 평안북도 의주부 광성면 민포동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농사와 노동으로 가까스로 생계를 잇는 가난한 집안에서 아버지 손인석, 어머니 김복녀의 3남 1녀 중 막내아들인 손기정이다.
손기정의 20대조 손후는 조선 중종 승정원의 여섯 명 당상관으로 정3품 승지였다. 그런데 1519년 기묘사화에 평안도 철산군으로 유배되었고, 후손이 그곳에 정착했다. 손기정이 압록강 변 마을 의주에서 태어난 연유이다.
압록강은 백두산에서 발원 북한과 중국을 나누며 서한만으로 흘러드는 한반도에서 가장 긴 강이다. 이 압록강의 서쪽 요동은 고조선부터 고구려에 이르기까지 우리 영토였고 요하강이 중국과 국경이었으나, 지금은 이 오리 머리처럼 푸른 압록강이 한반도와 중국의 국경이다.
추위가 영하 20도로 떨어지는 한겨울의 이 압록강 변을 달리고 또 달리는 소년이 있었다. 바로 가난한 집안 형편에 스케이트화가 없어 달리기로 마음을 달래는 손기정이었다. 손기정의 집과 학교는 2km쯤이었다. 손기정은 신을 신기 바쁘게 등하굣길을 달렸고, 노는 시간에도 압록강 변을 달렸다. 달리면 하늘을 훨훨 나는 듯 즐겁고, 무엇보다 자신 있게 잘할 수 있어서 기뻤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운동보다는 공부로 성공하길 바랐다. 그래서 잘 벗겨지는 여아용 고무신을 아들에게 신겼다. 그러면 아들은 새끼줄로 고무신을 묶고 달렸다. 그 거친 새끼줄에 발목이 쓸려 피가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다.
‘오직 달리기만이 어떤 장애도 없고, 비용도 들지 않는 멋진 운동’이었던 손기정의 재능을 알아본 담임 선생 이일성이 육상선수가 될 것을 권유했다. 그렇게 손기정은 약죽보통학교 5학년 때 육상선수가 되었고 6학년 때는 신의주 대표선수로 뽑혔다. 하지만 보통학교 졸업 후 진학을 하지 못해 육상을 포기했다.
이를 안타까워하던 보통학교 담임 선생 이일성이 1932년 손기정을 일본으로 보내 학업과 일을 병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손기정은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길거리에서 옥수수나 참외 장사를 하고 가락국숫집의 배달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때 몹시 좋아하던 5전짜리 호떡을 사 먹을 수가 없었다고 훗날 손기정은 회고했다. 그렇듯 고된 노동으로도 학업을 이을 수가 없어 6개월 만에 의주로 돌아왔다.
이때 신의주의 동익상회 사장이 손기정을 점원으로 채용하여 학업과 육상을 병행할 수 있게 했다. 훗날 국어학자이자 안과의사가 된 공병우의 아버지 공정규였다. 손기정은 열심히 일하며 틈틈이 압록강 변을 달렸다. 또 같은 해인 1932년 손기정은 제2회 동아 마라톤에 출전하였으나, 지리를 잘 몰라 삼각지 로터리에서 길을 잃고 망설이다 선두를 빼앗기고 아쉽게 2위를 했다. 하지만 이 경기 뒤 양정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신기록으로 당당히 우승, 나라 잃은 이천만 조선인의 심금을 울렸다. 이때 손기정이 히틀러에게 부상으로 받은 대왕참나무가 손기정 체육공원이 된 옛 양정고 터에서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로 우뚝 서 있다. 빛나는 햇살, 싱그러운 바람결에 체육공원 운동장을 달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푸른 잎을 흔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