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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5 경북교육삼락회 문화유적답사 계획
일시 : 2017년 5월 19일(금)
장소 : 무등산 원효사. 충장사. 충효동왕버들. 충효동정려비각. 환벽당. 취가정. 담양가사문학관. 식영정
반월당(08:00 출발) - (208.7km. 2:47분) - 원효사(10:47 도착. 관람 1시간. 11:47 출발) - (3.2km. 0:11) - 충장사(11:58 도착. 관람 40분. 12:38 출발) - (4.7km. 0:12) - (점심식사 : 0**0식당. 12:50 도착. 식사 1시간. 1:50 출발) - (1.8km. 0:03) - 소쇄원(1:53 도착. 관람 50분. 2:43 출발) - (1.4km. 0:03) - 충효동 왕버들. 충효동 정려비각(2:46 도착. 관람 20분. 3:06 출발) - (629m 도보. 0:09) - 환벽당(3:15 도착. 관람 15분. 3:30 출발) - (270m 도보. 0:04) - 취가정(3:34 도착. 관람 10분. 3:44 출발) - (600m 도보. 0:10) - 담양가사문학관(3:54 도착. 관람 40분. 4:34 출발) - (300m 도보. 0:05) - 식영정(4:39 도착. 관람 30분. 5:09 출발) - (200.2km. 2:10) - 반월당(7:19 도착)
* 위 계획은 현지 사정에 따라 변동될 수도 있습니다.
원효사(元曉寺.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846)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의 지증왕이나 법흥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뒤 삼국통일을 전후한 문무왕 때 원효(元曉)가 이곳에 머물면서 암자를 개축한 뒤부터 원효사·원효당·원효암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일설에는 고려 충숙왕 당시의 이름 있는 화엄종승(華嚴宗僧)이 창건한 뒤 원효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원효암이라 했다고도 한다.
그 후의 역사는 입증할 길이 없으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섭정 때 사세(寺勢)가 다시 일어났으며, 선조 때의 승병장이었던 영규(靈圭)가 수도했던 곳이기도 하다. 정유재란 때 전소된 뒤 증심사(證心寺)를 중창했던 석경(釋經)이 직접 기와를 구워 중창하였다.
그 뒤 1636년(인조 14)에 신원(信元)이, 1685년(숙종 11)에는 신옥(信玉)과 정식(淨式)이, 1789년(정조 13)에는 회운(會雲)이, 1831년(순조 31)과 1847년(헌종 13)에는 내원(乃圓)이 각각 중수하였다.
6·25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광주광역시 당국의 무등산 개발에 힘입어 1954년부터 중창에 착수하였다. 이 때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웅전, 선원(禪院)과 요사(寮舍) 등을 중건하였다.
이 공사 때 옛 절터에서 삼국시대의 금동불상 6점을 비롯하여 백제의 토기와 와당,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상 6점, 고려시대의 철불두상(鐵佛頭像)·고려자기 및 기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만든 토기불두(土器佛頭) 140점이 출토되었다. 이들 출토 유물 중 32점은 일괄하여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절 주변에는 무명의 고려시대 묘탑을 비롯하여 조선 중기의 회운당부도(會雲堂浮屠) 등이 산재되어 있다. 부도는 높이 2m이고 4각 지대석(地臺石) 위의 4우(隅)에 신장(神將)을 세운 중대석을 놓고 그 위에 연화대로 받쳐진 탑신을 얹고 있는데, 옥개는 역시 8각으로 각 마루에는 용·거북·비둘기 등의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 절에서 무등산의 정상 쪽으로 골짜기를 넘은 곳에 의상대(義湘臺)라는 매우 수려한 바위 봉우리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의상토굴이 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효사동부도(元曉寺東浮屠.광주 유형문화재 제7호.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209-13번지)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이 부도는 원효사 대웅전에서 왼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숲속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절에 전하고 있는 몇 안되는 유물 가운데 하나이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3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基壇)을 마련한 후,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바닥돌과 기단의 일부를 제외한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은 아래받침돌 윗면에 연꽃조각을 두르고, 옆면의 네 모서리에 숫사자와 암사자를 교대로 배치하였다. 가운데받침돌은 4면에 연꽃을 새기고, 네 모서리마다 사자와 용을 각각 암수로 나누어 조각하였으며, 윗받침돌은 옆면에 연꽃을 돌려 새겼는데 너무 얕아서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탑신의 몸돌은 너비보다 높이가 길며 약한 배흘림을 하고 있다. 지나치게 큰 지붕돌은 가득 새겨진 조각들로 인해 더욱 무거워 보인다. 윗면에는 기왓골과 여덟 모서리선이 뚜렷하고, 밑면에는 2중의 서까래를 조각하여 겹처마를 표현하고 있으며, 여덟 귀퉁이에는 꽃 조각 대신 용, 다람쥐, 비둘기, 거북 등의 동물들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는데 이러한 모습은 고려 후기에 나타나는 특이한 양식이다.
통일신라의 8각양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부분 일부에서 4각을 보이고 있고, 지붕돌의 동물조각 등이 전형에서 벗어나 있어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출처:문화재청)
원효사출토유물(元曉寺出土遺物.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 광주 북구 금곡동 209-13번지)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원효가 머물었다는 광주 무등산에 있는 원효사 대웅전을 신축하던 중 발견된 유물들이다. 수 백점이 발굴되었으나 그 중 금동·청동불상 12점, 소조불상 18점, 청동거울 2점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근래에 8∼9세기의 해무리굽 청자 조각이 발견되어, 이 절의 창건연대를 높이는 단서가 되었으며, 조선시대 분청사기의 파편들이 다수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금동·청동불상들은 대부분 부식상태가 심하여, 다른 불상이 가지고 있는 몸 뒤의 광채 즉, 광배와 받침인 좌대를 잃어 버렸다. 불상들은 10㎝ 내외의 서 있는 것으로, 통일신라에서 조선시대까지 만들었다. 보살상과 동자 2점을 제외한 모든 불상이 손바닥을 앞으로 하고 왼쪽은 손가락을 위로, 오른쪽은 아래로 향하고 있다.
원효사의 발굴유물 대부분이 진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불상들로 100여점이 넘는다. 그 가운데 비교적 원래 모습에 가까운 18점을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머리모양 수법이 비슷하다. 발굴 당시의 조각들을 모아 복원한 결과 머리높이 10.5㎝, 상체 10㎝, 하체 6.5㎝로 전체 높이 27㎝ 가량의 불상들로 밝혀졌다. 이들 소조불의 발견으로 원래 원효사에 천불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거울 중 2마리 용이 새겨진 거울은 조각이 섬세하고 정교하다. 중심에는 2겹으로 된 연꽃을 새겼고, 그 밖으로 2마리의 용을, 외곽에는 구름무늬를 새겼다. 가운데 있는 2마리 용은 서로 반대 방향에서 꿈틀 거리는 모습이며, 예리한 발톱을 가지고 있고 여의주로 보이는 2개의 구슬이 돋아나게 새겼다. 또 다른 백색의 거울은 무늬가 없으며 별 특징이 없다. 이 2점의 거울은 고려시대 공예 조각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출처: 문화재청)
원효사소장만수사범종(元曉寺所藏萬壽寺梵鍾.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5호. 광주 북구 금곡동 209-13번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총 높이 86㎝, 몸체 높이 66㎝, 입 지름 63㎝인 범종이다.
종을 매다는 부분인 용뉴는 각각 여의주을 물고 있는 2마리의 용으로 장식하였는데, 용머리 위에도 불꽃에 휩싸인 1개의 여의주을 장식하였다. 용머리 장식이나 발의 조각기법은 약간 경직되어 있다. 음통을 대신하여 종의 윗부분에 2㎝ 정도의 구멍을 종의 윗부분에 뚫었다.
종 위쪽 띠에는 범자 문양 띠를 둘렀으며, 띠 아래에는 사각형의 유곽과 4구의 보살상이 동일선상에 번갈아 배치되었다. 유곽과 보살상 사이에 왕실의 안녕을 비는 글이 새겼다. 유곽 안에는 연꽃무늬의 바탕에 연봉오리 모양의 9개의 유두가 도드라지게 새겨 있다. 유곽 아래에 새긴 글로 보아 이 종이 숙종 36년(1710) 만수사에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종은 몸체 높이와 입 지름의 비율이 거의 1:1로 전형적인 조선종의 비율을 지니고 있으나, 용뉴 부위의 표현이 경직되고 음통대신 음구멍을 넣는 등 양식의 퇴화가 엿 보인다. 또 당좌 및 하대의 문양이 없어지는 등 조선후기 범종의 특징이 나타나는 점에서, 범종의 양식 변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출처:문화재청)
충장사(忠壯祠. 광주광역시북구 송강로 13 (금곡동))
충장사는 임진왜란 때의 충장공 김덕령(1568~1596년)장군의 위패(位牌)와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祠堂), 제실(齋室), 유물관, 그리고 장군 묘역으로 이루어진 사우(祠宇)이다.
김덕령 장군은 1567년 광산 김씨 가문 붕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송강 정철 등과 함께 수학하는 등 학문에 정진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덕홍과 함께 의병활동에 참가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던 명장이다.
사우배치를 보면 본당인 충장사와 내삼문, 외삼문과 동제, 서제, 은륜비각, 유물관, 관리사무소 그리고 연못을 비롯한 조경시설 등인데 모두가 전통 한국 고유의 건축양식과 정감을 살려서 장엄한 경관을 갖추었다.
유물관의 전시품 중 특히 충장공의 의복은 중용민속자료 111호로 지정될 만큼 가치의 의의가 큰 유물이다. 한땀한땀, 손으로 만들어진 이 의복들은 남자들이 전쟁 당시 입고 나갔던호신용 전포로서, 동네 부녀자들이 무운과 행운을 빌며 만들었다고 한다.(출처 : 광주광역시청)
충장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김덕령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유물전시관, 김덕령의 묘역 등이 자리하고 있다.
1971년 경향의 저명인사를 중심으로 ‘충장공김덕령장군사우복원사업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충효초등학교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처음에는 충효동 오월당(梧月堂)에 터를 잡았었는데 너무 좁다는 기술진의 자문에 의해 지금의 위치로 이동해 충장사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추진위원회는 1974년 ‘충장공김덕령장군유적보존회’로 개편하여 본격적인 착공에 들어갔고 이듬해인 1975년 2월에 완공했다.
충장사는 내삼문인 익호문, 외삼문인 충용문이 있으며, 동재와 서재, 은륜비각(恩輪碑閣), 유물전시관, 관리사무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한국 전통의 건축양식을 살려 장엄함을 유지하고자 했다. 충장사 뒤편으로는 김덕령 일가의 묘소도 자리하고 있다. 김덕령의 묘는 원래 금곡동에 있었으나 1974년 9월에 현재의 장소로 이장하였다. 한편 유물전시관에는 1791년에 정조의 명으로 편찬된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 및 김덕령의 친필 편지글, 1974년 11월 17일 김덕령의 묘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출토되었던 관곽(棺槨) 및 의복들이 보존되어 있다.
충장사 내에는 김덕령은륜비(金德齡恩綸碑)가 서 있는데, 헌종 8년(1842) 당시 광주목사였던 조철영(趙徹永)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원래 이 비는 충효동 배재마을 899번지에 있었으나 나중에 충장사로 옮겨진 것이다.(출처 :무등산웹생태박물관)
담양 소쇄원(潭陽 瀟灑園.명승 제40호. 전남 담양군 남면 소쇄원길 17(지곡리))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 중기 정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양산보(1503-1557)는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의 정원인 소쇄원을 지었다.
정원은 계곡을 중심으로 하는 사다리꼴 형태로 되어 있다. 4.060㎡의 면적에 기능과 공간의 특성에 따라 애양단구역, 오곡문구역, 제월당구역, 광풍각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정원 내에는 대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들로 된 숲이 있다. 주위에는 흙과 돌로 쌓은 자연스러운 담이 있는데 ‘애양단’, ‘오곡문’, ‘소쇄처사양공지려’의 석판과 목판글씨가 담벽에 박혀있다. 소쇄원 안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소쇄원의 모습을 목판에 새긴 그림이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정원이다. (출처:문화재청)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주거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는 하나의 후원(後園)이며,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에는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內堂)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되어 있다. 전원(前園)은 대봉대(待鳳臺)와 상하지(上下池), 물레방아 그리고 애양단(愛陽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원(溪園)은 오곡문(五曲門) 곁의 담 아래에 뚫린 유입구로부터 오곡암, 폭포 그리고 계류를 중심으로 여기에 광풍각(光風閣)을 곁들이고 있다. 광풍각의 대하(臺下)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다. 이 계류구역은 유락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내원(內園) 구역은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으로서 당(堂)과 오곡문(五曲門) 사이에는 두 계단으로 된 매대(梅臺)가 있으며 여기에는 매화, 동백, 산수유 등의 나무와 기타 꽃나무가 심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곡문(五曲門) 옆의 오암(鼇岩)은 자라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또 당 앞에는 빈 마당이 있고 광풍각 뒷편 언덕에는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도오(桃塢)가 있다.
당시에 이곳에 심어진 식물은 국내 종으로 소나무, 대나무, 버들, 단풍, 등나무, 창포, 순채 등 7종이고 중국 종으로 매화, 은행, 복숭아, 오동, 벽오동, 장미, 동백, 치자, 대나무, 사계, 국화, 파초 등 13종 그리고 일본산의 철쭉, 인도산의 연꽃 등 모두 22종에 이르고 있다.
소쇄원은 1530년(중종 25년)에 양산보가 꾸민 조선시대 대표적 정원의 하나로 제월당(霽月堂), 광풍각(光風閣), 애양단(愛陽壇), 대봉대(待鳳臺) 등 10여 개의 건물로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몇 남아 있지 않았다.
제월당(霽月堂)은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을 위한 집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광풍각(光風閣)은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의 손님을 위한 사랑방으로 1614년 중수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역시 팔작지붕 한식이다. 정원의 구조는 크게 애양단(愛陽壇)을 중심으로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광풍각(光風閣)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가적(道家的)인 색채도 풍겨나와 오암(鰲岩), 도오(桃塢), 대봉대(待鳳臺) 등 여러 명칭이 보인다. 제월당에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쓴 「소쇄원사십팔영시(瀟灑園四十八詠詩)」(1548)가 게액되어 있으며, 1755년(영조 31년)에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한다.
소쇄원은 1528년 처음 기사가 나온 것으로 보아 1530년 전후에 착공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화순으로 공부하러 갈 때 소쇄원에서 꼭 쉬었다 갔다는 기록이 있고, 1528년 『소쇄정즉사(瀟灑亭卽事)』에는 간접적인 기사가 있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소쇄원제초정(瀟灑園題草亭)』에는 자기가 태어나던 해(1536)에 소쇄원이 조영된 것이라 하였다. 1542년에는 송순이 양산보의 소쇄원을 도왔다는 기록도 있다. 소쇄원은 양산보 개인이 꾸몄다기보다는 당나라 이덕유(李德裕)가 경영하던 평천장(平泉莊)과 이를 모방한 송순, 김인후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다.
1574년 고경명(高敬命)이 쓴 『유서석록(遊瑞石錄)』에는 소쇄원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이 있어 당시 소쇄원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출처:담양군청)
광주 충효동 왕버들 군(光州 忠孝洞 왕버들 群.천연기념물 제539호.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911-0)
광주 충효동 왕버들 군은 충효마을의 상징숲이자 비보(裨補)숲으로 조성되었으며, 김덕령 나무라고도 불리우는 등 나무와 관련된 유래나 일화들이 잘 전해지고 있어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크다.
또한 수령이나 규모면에서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는 왕버들과 비교했을 때 우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수형 및 수세 또한 양호한 편으로 생물학적 가치도 크다.(출처:문화재청)
충효동정려비각(忠孝洞旌閭碑閣.광주광역시 기념물 제4호. 광주 북구 충효샘길 7(충효동))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김덕령(1567∼1596)과 그의 부인 흥양 이씨, 그의 형 김덕홍(1558∼1592), 그의 아우 김덕보(1571∼1596) 등 일가족의 충효와 절개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마을 앞에 세운 비석과 비각이다.
김덕령은 그의 형이 고경명의 지휘 아래 참전한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자 상중(喪中)인데도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기 위해 진해와 고성 등지에서 싸웠다. 그러나 이몽학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으로 혹독한 고문 끝에 20일만에 옥사하였다. 그의 부인 이씨는 정유재란 때 추월산에 피신해 있다가 일본군의 추격을 받고 순절하였다. 또한 그의 동생은 두 형을 잃고 전쟁 후에 잠시 장릉참봉이란 벼슬을 지냈을 뿐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 비는 정조 13년(1789) 세운 것으로 높이 220㎝·너비 68㎝이며, 위쪽에는 비각을 얹어 놓았다.
비각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며 삼문과 담장이 둘렀다. 특히 비석의 뒷면에는 김장군 일가의 충·열·효에 대한 칭찬의 글 뿐 아니라 ‘충효지리(忠孝之里)’라는 동네 이름까지 임금이 직접 지어 내렸다는 내용이 쓰여 있어 특이하다. (출처 : 문화재청)
광주 환벽당 일원(光州 環碧堂 一圓.명승 제107호.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387-0)
환벽당은 사촌 김윤제(沙村金允悌, 1501~1572)가 노년에 자연을 벗 삼아 후학양성을 목적으로 건립한 남도지방의 전형적인 유실형(有室形)정자로 가까이에는 무등산 원효계곡의 계류가 흐르며 계곡아래 증암천(甑巖川) 주변에는 배롱나무가 아름다운 장관을 이뤄 자미탄(紫薇灘)이라 불렀으며, 특히 이곳은 무등산을 비롯한 원효계곡의 줄기를 따라 자연 풍광이 수려한 지역으로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자주 드나드는 명승지였다.
환벽당 북쪽으로 200미터 떨어진 곳에는 사촌 김윤제가 살았던 충효마을과 증암천 너머에는 송강 정철이 살았던 지실마을이 있으며 환벽당 아래에는 송강과 사촌이 처음 만난 곳이라는 전설이 깃든 조대(釣臺)와 용소(龍沼), 쌍송(雙松)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뛰어난 곳이다.
면앙정 송순은 서하당 김성원이 식영정을 건립하고 3년이 지난 뒤 1563년 식영정의 시를 차운하며 ‘식영정과 환벽당’은 형제의 정자라고 하면서,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을 가리켜 한 동(증암천)안에 세 명승 즉, 一洞之三勝이라 말한다.
환벽당은 환벽(環璧)이란 뜻 그대로 푸르름이 고리를 두르듯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루고, 시가문학과 관련된 국문학사적인 인문학적 가치가 매우 큰 곳이며, 별서원림으로서 가치가 우수한 호남의 대표적인 누정문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환벽당이 위치한 곳은 무등산 북능의 능선으로 북봉을 거쳐 꼬막재로 이어지는 여러가지 지맥 중의 하나이며, 사촌 김윤제(1501-1572)가 태어난 충효마을 남쪽 200m지점에 있다. 또한 광주와 담양을 경계로 흐르는 증암천(별칭 : 자미탄)을 사이에 두고 남쪽 무등산에서 북쪽 성산에 이르기까지 산들이 고르게 파노라마 경관을 보여주는 선경을 이루고 있다.
환벽당 주변에는 사촌 김윤제가 살았던 충효마을과 송강 정철이 살았던 지실마을, 소쇄공 양산보가 살았던 창암촌이 있으며, 이 마을들 주변으로 식영정(息影亭)과 면앙정(俛x仰亭), 송강정(松江亭), 은거를 위한 독수정(獨守亭)과 소쇄원(瀟灑園), 환벽당(環碧堂) 등 10여개 정자가 소재해 있어 이 일대가 조선시대 원림 문화의 중심지역으로서 가치가 뛰어나다.
환벽당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인 송순, 임억령, 양산보, 김인후, 김성원, 기대승, 고경명 등이 드나들던 곳으로 수려한 자연경관을 감상하고 시문과 가사를 지으며 풍류 문화의 극치를 이룬 조선시대 사림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문화적 가치가 뛰어나다.
환벽당의 초기모습은 소세양(1486~1562)이 지은 “환벽당“시를 통해서 알 수 있으며, 삼연 김창흡(三淵金昌翕 1653~1722)의 『南遊日記』를 통해 그 당시의 원림의 식물상과 조경수종을 짐작할 수 있고, 김성원((1525~1597)의 “서하당유고“ 에 ”성산계류탁열도”등의 그림이 남아있어 인문적 가치가 있다.
환벽당 관련 시·문은 당대의 일류 문인들로서 임억령, 기대승, 송순, 김인후, 소세양, 정철, 백광훈, 고경명, 권필도, 정홍명, 목장흠, 이은상, 이하곤, 이명한, 김창흡, 조상건, 양경지, 정민하, 서봉령 등 시인묵객의 시가가 전해져 인문학적 가치가 있다. (출처 : 문화재청)
취가정(醉歌亭.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0호. 광주광역시 북구 환벽당길 42-2 (충효동))
취가정(醉歌亭)은 충효동 광주호의 곁 산중턱에 소재하고 있어 환벽당, 식영정, 소쇄원 등과 어울려 옛스런 정취를 자아낸다.
규모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고 취가정은 1950년 6.25때 불타버린 것을 김만식의 후손 김희준과 문족들이 1955년에 복건하였다.
취가정은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고 그를 기리고자 후손인 김만식과 집안사람들이 1890년에 김덕령이 태어나고 자란 이곳에 세운 것으로 정자의 이름은 권필의 꿈에 나타난 충장공의 취시가(醉時歌)에서 따온 것이다.
충장공 김덕령은 무등산 아래 석저촌(북구 충효동)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에 무등산에서 무예를 닦았다. 지금도 무등산 곳곳에는 그와 관련된 전설이 많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되어 고경명, 곽재우 등과 함께 크게 활약했는데 모함을 받고 억울하게 옥사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이 석주(石州) 권필(權韠, 1569~1612년)의 꿈속에 나타나 서로 시를 화답하면서 충장공의 원혼을 달래었다는 사연이 있다. 취가정에는 송근수(宋近洙)의 기(記), 김문옥(金文鈺)의 중건기, 김만식의 상량문 및 석주 권필과 충장공의 시가 있다.
충장공과 석주가 화답한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취했을 때 노래하니 醉時歌
이 노래를 듣는 이 없구나 此曲無人間
나는 달과 꽃 사이에 취하기를 원치 않으며 我不要醉花月
공훈을 세우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我不要樹功勳.
공훈을 세우는 것은 뜬구름과 같은 것이니 樹功勳也是浮雲
꽃과 달 속에서 취하는 것 또한 뜬구름과 같도다. 醉花月也是浮雲
취했을 때 노래하니 醉時歌
내마음 알아줄 이 없구나 此曲無人和
다만 긴 칼을 잡고 어진 임금께 보은하기를 원하노라. 我心只願長劍奉明君
- 충장공 김덕령
장군께서 옛날에 칼을 잡으시니 將軍昔日把金戈
장한 뜻 중도에 꺽인 것도 운명인걸 어찌하랴. 壯志中奈命何
지하에 계신 영령의 한없는 원한을 地下英靈無限恨
분명히 취했을 때 부른 한 곡조 노래이구나. 分明一曲醉時歌
- 석주 권필
석주(石州) 권필은 송강의 문인으로 벼슬에 뜻이 없어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낸 사람이다. 광해군때 필화 사건으로 귀양살이를 가는데 전송 나온 사람이 술을 너무 많이 권해 폭음하고 다음날 죽었다고 한다.
취가정은 큰 나무들이 서 있는 동그란 언덕에, 자미탄을 뒤로 하고 외따로 떨어져 자리잡았다. 부근의 정자들이 주로 자미탄을 내려다보는 데 비해, 널리 펼쳐진 논밭을 바라보고 있다.
이 정자는 막돌 허튼층에 기단을 둘러쌓고 자연석 덤벙주초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온돌방인 중제실(中齊室)의 기둥이 각주가 아니고 원주로 되어 다른 정자와는 다른 형태이다. (출처 : 광주광역시 북구청)
담양 식영정 일원(潭陽 息影亭 一圓.명승 제57호.전남 담양군 남면 가사문학로 859 등 (지곡리))
조선 명종 때 서하당(棲霞堂) 김성원이 그의 장인 석천(石川)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로, 이곳에서 송강(松江) 정철이 성산별곡, 식영정 20영 등 한시와 가사 및 단가 등을 남겨 송강 문학의 산실이 되었고, 우리나라 고전문학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곳으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식영정(息影亭)은 주변 무등산과 광주호 등이 있어 자연환경과 조화미가 뛰어나고 주변의 소나무 고목과 송림, 배롱나무 등이 있어 아름다운 경승지이다.(출처 : 문화재청)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특이한 것은 한쪽 귀퉁이로 방을 몰아붙이고 전면과 측면을 마루로 두고 있다.
명종 15년(1560)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 1525-1597)이 창건하여 장인(丈人)인 석천 임억령(石川 林憶齡, 1496-1568)에게 증여한 것이다. 식영정 바로 곁에 본인의 호를 서하당(棲霞堂)이란 또 다른 정자를 지었다고 하며 최근 복원하였다.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행장(行狀)을 보면「庚申公三十六歲 築棲霞堂于昌平之星山 爲終老計……」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하당과 식영정이 1560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제봉 고경명(齊峰 高敬命, 1533-1592),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등과 함께 ’식영정 사선(息影亭 四仙)’으로 부르기도 한다.
서하당 김성원은 송강의 처외재당숙으로 송강보다 11년이나 연상이었으나 송강이 성산에 와 있을 때 같이 환벽당(環壁堂)에서 공부하던 동문이었다. 송강 정철은 이곳 식영정과 환벽당, 송강정(松江亭) 등 성산 일대의 미려한 자연경관을 벗 삼으며『성산별곡』을 창작해냈던 것이다. 또한, 송강은 이곳을 무대로 하여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 하서 김인후(河西 金仁厚),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承) 등 당대의 명유들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제봉 고경명, 옥봉 백광훈(玉峰 百光勳), 귀봉 송익필(歸峰 宋翼弼) 등과 교우하면서 시문을 익혔다. 이곳은 식영정 외에도 풍광이 수려하여 유상지(遊賞地)로도 이름난 곳이 많은데 자미탄(紫薇灘), 노자암, 방초주(芳草州), 조대(釣臺), 부용당(芙蓉堂), 서석대(瑞石臺) 등이 있었으나 광주호가 생기면서 일부는 물에 잠기고 현재는 부용당만이 최근 새로 지었다.
식영정 옆에는 1973년 송강집(松江集)의 목판을 보존하기 위한 장서각(藏書閣)을 건립하였으며, 1972년에는 부속건물로 부용당, 성산별곡(星山別曲) 시비(詩碑)가 건립되어 있다.(출처 : 담양군청)
식영정(息影亭) : 식영정(息影亭) 이름은 임억령(林億齡)이 지었는데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식영정(息影亭) 이름은 장자(莊子)의 제물편에 있는 그림자의 예를 들었다고 한다.
“그림자는 욕망을 의미하며 세속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이를 떨쳐버릴 수 없다는 뜻이다.”
曰(왈)-장주가 말하기를
昔有畏影者(석유외영자)-옛날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자가 있었다.
走日下其走愈急(주일하기주유급)-그는 햇빛 아래에서 빠르게 도망을 가는데
而影終不息(이영종부식)-그림자도 끝까지 쉬지 않고 따라 왔다.
及就樹陰下(급취수음하)-그가 나무 그림자 아래에 들었더니
影忽不見(영홀부견)-그림자는 문득 보이지 않았다.
한국가사문학관(韓國歌辭文學館.전남 담양군 남면 가사문학로 877)
담양군에서는 1995년부터 가사문학관 건립을 추진하여 2000년 10월에 완공하였다.
문학관은 1만 6,556㎡의 부지에 2,022㎡ 규모의 한옥형 본관과 기획전시실(갤러리), 자미정, 세심정, 토산품전시장, 전통찻집 등의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본관은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시실, 수장고, 세미나실, 전시실, 장서실, 자료실, 문화사랑방 등이 있다.
가사문학관에는 송순의 『면앙집』과 정철의 『송강집』, 담양권 가사 18편을 비롯하여 가사 관련 도서 4,500여권과 유물 200여점, 목판 535점 등 귀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문학관 주변에는 식영정·환벽당·소쇄원·송강정·면앙정 등 호남 시단의 중요한 무대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한국 가사문학 창작의 밑바탕이 되어 면면히 그 전통을 오늘에 잇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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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 해설사님=김 교장 샘의 발언 한 마디가 생각키우는 문탐 계획지 입니다. 요사인 옛날에 가 봤던 곳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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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이 지나면 또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이 되어지고 있다는 '은중유골" 말씀. 담양의 소쇄원이 또 얼마나 변질 되었을 꼬...數 년 전 이였으므로... 좋은 정보를 공유케 해 주시는 '김 교장" 님 께 Fighting 을 올립니다. <
참가합니다.김우한